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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열두제자 설교 '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5.06.05 빌립 (요한복음 1:43-44)
  2. 2015.05.19 첫번째 순교자 야고보
  3. 2015.05.08 첫번째 제자 안드레 (요 1:35-42)

 

빌립 

 요1:43-44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1. 빌립 (Philip) 

안드레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한 동네 사람. 벳세다 출신입니다. 그 외에 바돌로메라 하는 나다나엘도 한동네 사람이요, 친구입니다. 그런데 빌립이라는 이름을 통해 다른 제자들과 다른 그만의 독특한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빌립’이라는 말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에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이 빌립입니다. 헬라식 이름인 것을 보면 그의 부친은 헬라파 유대인이었거나 아니면 그 당시 외국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태인들은 절대로 이방 족속의 이름을 자기 자녀들의 이름으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이 자라난 가정적인 배경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정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띤 가정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온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인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학문적이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개화한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2. 본문을 통한 인물 연구 

  이런 헬라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빌립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계산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을 시험코자 하신 말씀입니다. 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 때 빌립은 잠시 생각하더니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했습니다(요6:5-7). 여러분은 여자와 아이까지 합쳐서 약 일만 오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먹어야 할 떡의 양과 가격을 쉽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대답은 빌립이 얼마나 분석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신중함은 인내하고 기다리고 조급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신중함은 조급하고, 우유부단하며, 계산적이고 안전함만을 추구합니다. 빌립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떡을 살 수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기질은 기적을 배척합니다. 그는 너무도 계산적이기 때문에 계산을 벗어난 것에 있어서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시험코자" -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빌립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였을까? - 바로 "네가 가진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빌립의 믿음의 근거가 상식과 계산이었음을 보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구니에 음식을 가진 아이을 데리고 옆에서 있는 안드레를 쳐다 보셨습니다. 빌립이 비젼을 갖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는 속시원하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고 여쭈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안되는 것 같지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주님께 문제를 의탁한 것입니다. 안드레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는 아이가 가진 것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빌립은 자기 믿음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나는 알아야 한다. 바람을 재우고 병을 고치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 나는 왜 「주여,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라는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왜 믿음이 없을까? 라고 빌립은 혼자 말했을 것입니다. 그 날 빌립은 자신이 얼마나 속되고 융퉁성이 없는가에 대하여 얼마쯤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작은 것을 통하여도 큰 것이 이루어짐을 경험했습니다. 교회는 주제넘고 경솔하게 예산의 집행을 좌절시키려는 기도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신중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이 강한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 근거는 자기 신념, 확신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이 명하실 때"입니다. 
계산적이며 보수적인 머리가 반드시 냉정한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기계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것이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빌립은 무리를 충분히 먹이기를 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빌립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고 애굽의 군대가 양쪽으로 포위하여 뒤쫓을 때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하셨다(출 14:8-3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처형이 이튿날 아침으로 계획되어 있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행 12:1-10).우리에게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그는 또 얼마나 신중했는지 모릅니다. 

  요12:20-23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왜 헬라 사람들이 하필이면 빌립을 찾아왔을까라는 의문이 그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 풀립니다. 제자들 중 헬라문화에 익숙하고 친숙한 빌립을 찾아온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헬라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빌립에게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뵙게 해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헬라인이면 이방인인데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또 혹시 책망 받을 일인지 도무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제자들 중 가장 연장자이자 도움이 될 성 싶은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결국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께 가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안드레는 이런 저런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빌립과 안드레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빌립의 성경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빌립은 분석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신앙(믿음)은 분석을 넘어서는 영적 개념입니다. 분석적인 사람은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빌립도 도무지 영적 감각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요14:8-9). 지적이고 분석적인 능력을 탁월하지만 항상 진리를 형이하학적으로만 분석하다 보니 영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현대의 빌립 

 빌립은 오늘날 우리 주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만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성경말씀도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야 믿겠다고 합니다. 

 정말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갖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려고 하는 품목을 기록한 종이를 들고 짐차를 밀면서 선반에서 물건을 내릴 때마다 물건값을 적어 놓으며 카운터에 가서 자기의 계산과 맞추어 본 다음에 지불할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항상 신속하게 일한다. 논리가 정연하고 계산에 밝으며, 거의 기계적인 만큼 정확한 이 사람은 항상 전통을 존중하며,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수치를 맞추어 본다. 이러한 사람이 기대는 것은 상식적인 믿음과 과학적인 믿음이다.   

 <예수님의 부르심>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빌립을 제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어떻게 제자로 삼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각 제자마다 부르시는 방법이 달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안드레가 예수님을 좇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시면서,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안드레가 진리를 찾는 사람인 줄 꿰뚫어 보신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충만한 답을 줄 수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보자마자 이름부터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새 이름을 주겠다. 앞으로 네 이름을 게바, 혹은 베드로라 하리라.” 이 이름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베드로처럼 잘 변하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입니다. 베드로처럼 감정에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시몬 자신도 이처럼 쉽게 변하는 자신의 성격에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책망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고민을 꿰뚫어 보시고 그런 사람도 변화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여 그를 따랐습니다. 자신의 고민을 한마디로 지적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빌립을 부르실 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실 때 처음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요1: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나를 좇으라”는 단 한마디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느낌을 줍니까? 단도직입적인 상당히 강경한 어조의 말투입니다. 이것은 다정한 대화를 하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을 전도할 때에는 잘 준비된 설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때로는 강제성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중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앞뒤 잴 시간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한번에 확 끌어당겨야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단순함에 빌립은 의외로 쉽게 끌려왔습니다. 

 신중한 사람의 단점-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결정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곁에 단호히 결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쉽게 따릅니다. 그래서 대통령 될 사람과 참모될 사람이 처음부터 나뉜다는 것입니다. 참모들은 이런 저런 일들을 연구하고 정리해서 보고를 합니다. 이 정책을 했을 경우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이고, 그런데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일 수록 장단점을 잘 알기에 오히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단호히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전도하려고 하면 너무 앞뒤를 계산하고 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논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시간 낭비입니다. 논쟁으로는 결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변론을 통해 선교하고자 했던 아덴에서 그는 철저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그 이후  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된 지역입니다. 

  논쟁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단호하고 강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고 마고 몰아치듯 하는 것이 오히려 통할 때가 있습니다. 

 <확신하면 행동하는 삶> 

  이런 사람은 한번 확신(결심)하기가 어렵지 한번 확신(결심)하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한번 깨달아 옳다고 확신하면 금방 행동으로 옮기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고는 친구 나다나엘(바돌로매)에게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했습니다. 

  이 말의 표현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예수님을 따를 때 무턱대고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근거로 철저한 분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얻은 것입니다. 확신을 얻은 다음에서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나다나엘도 빌립과 같은 류입니다. 빌립은 확신에 차서 달리 설명하지 않고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빌립은 자기가 전도 받은 그대로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1:43-46). 

  분석적인 사람이 한번 확신을 얻게 되면 “와 보라”고 한마디로 말하지만, 그 말 안에 진실의 힘이 실립니다

  <빌립의 장점> 

  분석적이고 계산적인 성향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점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장점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단점으로 나타나면 비 신앙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점으로 활용하면 확신한 바를 더욱 효과있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분석적인데다가 잘 활용할 때는 전도에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예> 사도 바울도 굉장히 지적이며 논리적인 사람 - 그러나 하나님에게 붙잡히자 누구보다도 더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했습니다. 

  <빌립의 순교> 

  사도 빌립은 성령을 체험한 이후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전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등지에서 사역을 했으며, 갈라디아 지방까지 올라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여러 문헌에 보면 사도 빌립은 ‘히에라폴리스’라는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반대 세력에게 붙잡혀 몰매를 맞고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중하고 계산적인 빌립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는 복음을 전하면 반대하는 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죽을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자신의 최후를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전의 계산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목숨을 건 헌신자요 복음 증거자였습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복해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쓰시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성품(성격)이 있든지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만나면 단점은 최소화 되고 장점은 극대화 됩니다. 우유부단한 사람도 열정이 있어집니다. 계산적인 사람이 헌신의 사람으로 바뀝니다. 오직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가 변화시켜 가치있게 사용할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첫번째 순교자 야고보 (마태복음 20:20-28) 


  오늘은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는 두 명의 야고보가 있는데 오늘 나눌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 야고보가 있고 또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과 초대 교회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야고보서의 저자이자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가 있습니다. 

  

  먼저 그의 삶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형제 요한과 같이 어부였습니다. 또한 눅5:10에 보면, 이 사람은 베드로의 동업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름심을 받는 장면을 기록한 성경을 보면 그의 집안이 부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1:19-20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배와 삯꾼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의 집은 배를 가지고 있었고 삯꾼(일군)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촌에서 배를 가지고 있고 삯꾼을 둘 정도이면 상당한 부자입니다. 한 일설에 의하면 세배대의 일꾼, 즉 삯꾼 중의 하나가 베드로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그의 집안은 부유함에 걸맞게 사회적 지위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뜰에 심문받으러 끌려갔을 때 베드로는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 서 있었고 요한은 함께 들어갔는데 그것은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요18:15-16).

(요 18: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요 18: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요한이 대제사장과 아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대제사장과 아는 사이라면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는 가정입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야고보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유력한 집안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집안은 종교적으로도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살로메’라는 여인입니다(마27:55-56, 막15:40, 16:1, 요19:25). 

 예수의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을 각 복음서가 증거할 적에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또 한 여인이 있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그 여인을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예수의 이모, 혹은 살로메라고 그리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로 보아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이거나 적어도 친척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맞다면 야고보에게 예수님 어머니는 이모가 되고 예수님은 이종사촌간이 됩니다. 곧 야고보는 다윗의 가계(家系)에 속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종합해 볼 때 야고보와 요한은 외적으로 상당히 안정되고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 

성격적인 면에 있어서 야고보는 요한과 더불어 불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였습니다. 

초대교회를 기록한 한 문서에 의하면 "그는 분개가 치밀어 오르면, 두드러지게 과격하였다. 그는 성질이 한번 잘못 건드려지면, 불같은 성미를 나타냈으며, 폭풍이 일단 지나가고 나면, 그는 그것이 전적으로 정의로움의 분개였다고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분노를 언제나 정당화시키고 변명하는 습관이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간 때가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로서 불을 명하여 그들을 살라 버리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과 야고보를 우뢰의 아들들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예> 물론 과거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기도 했습니다. 아하시아왕의 오십부장이 엘리야를 체포하려 하자 그가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하니(왕하1:10), 곧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모두 불살랐다.

라는 구절에서 불을 명한 이 말씀은 단지 화가 나서 한 말이 아니라 구약의 성경을 근거로 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그들의 행동은 예수님께 책망받았습니다(눅 9:52-55). 

 

또한 말씀과 성령 안에서 변화되기 전의 야고보는 매우 이기적이며 독선적이고 때로는 극단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야심이 가득찬 사람> 

  또한 그는 야심이 가득찬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정치적인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마20:20-28). 참으로 가관입니다. 자기는 예수님 이모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이종사촌간일 뿐아니라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녔으니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면 높은 지위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는 예수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아들들의 출세를 위해 청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말을 듣고 가만히 있습니다. 모전자전(母傳子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고 다른 10 제자들이 모두 분해 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분낸 것을 보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10:35이하에 보면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술되고 있습니다. 청탁을 한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고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께 청탁한 것은 그의 아들들의 요청을 받아 행했던지 여하튼 그들의 부모와 그들의 뜻이 같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방해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청탁에 대하여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마20:26-2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이유도 하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대접받으려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초대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 초대교회 - 요삼 9절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서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현대교회에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 교회에 있으면 불행해 집니다.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려 합니다. 

  야심있는 목회자가 교회를 무력화 시킵니다. 교회나 성도를 자신의 야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생각하는 어릭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야심있는 교인들이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섬길줄 모르고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데서 온갖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비교> 야심과 비전을 구분해야 - 야심은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비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사랑의 사람 - 최초의 순교자> 

  처음 그들의 열심은 오직 그들의 야심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나중에 보상받으려는 남들보다 높아지려는 야심이었습니다. 그들의 본심이 탈로 난후에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이들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이들의 야심은 점차 비전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성령충만함을 받고 난 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자존심은 예수님의 말씀에 완전히 녹아졌습니다. 그의 분노도 성숙한 인격 속에 녹아졌습니다. 그의 야망은 거룩한 비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희생과 봉사와 사랑의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그의 순교 기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12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당했습니다. 

  행12:1-2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하나님의 교회와 말씀은 날로 흥왕해 갔습니다. 이 때 위기 의식을 느낀 이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헤롯 아그립바왕이었습니다 (요21:2, 행1:12-13, 12:2). 

  헤롯은 날로 높아가는 교회의 명성에 질투심(위기)을 느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관심과 인기를 회복하고자 교회를 핍박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핵심멤버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가장 영향력있는 몇 사람 중에 바로 야고보가 공격 목표였습니다. 그만큼 야고보의 영향력이 컸음을 증명합니다. 

"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는 주의 대답에 "할 수 있나이다"했던 그들의 대답처럼 주님은 야고보를 초대교회를 지키기 위한 가장 첫번째 순교자로, 또한 요한을 가장 끝까지 남아 초대 교회를 지킨 교회의 수호자로 그들을 세우셨습니다. 


모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요셉: 형들과 부모가 내 앞에서 절을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소원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주께서 소원을 주시면 그 방법과 실천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향으로 거룩한 소원을 이루십니다.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던 날, 그의 기품과 풍모가 얼마나 당당하고 또한 아름다왔는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의 순교를 통해 그 자리에 있다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넘쳐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우편에, 좌편에 앉는다는 것이 야고보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야고보는 죽음의 순간에 주님의 옆자리는 바로 순교의 자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죽는 순간에까지 복음의 증거가 되어 주님의 우편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첫번째 제자 - 안드레 (요한 복음 1장 35-42)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 3년동안 하신 공생애 사역의 가장 중요한 중점은 제자 삼는 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이 이루신 일, 곧 십자가를 통해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고 부활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고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알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갈 중대한 역할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약이 인물들이 우리에게 신앙의 귀한 모델을 보여주며 그들의 성품과, 능력과, 믿음의 뛰어남을 보여주는데 반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훌륭한 가문도, 뛰어난 능력도, 착한 성품도 잘 드러나지 않는 그런 평범하고 연약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평범하다 못해 많은 결함을 안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나이나 출신지나 직업도 그렇지만 성격 면에서 결함이 많은 사람들이고 영적으로는 더욱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인물들처럼 신약의 제자들을 눈여겨보며 그들의 삶을 잘 살펴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연구해도 제자들의 모습을 깊이 보지 않습니다. 

그나마 베드로나 요한 같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잠깐씩 눈을 돌릴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족하고 연약한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위대하신 일을 이루셨다고 해서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계획도 없이 제자들을 뽑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열 두 제자들의 면모를 살펴보아 그들의 어떤 성품과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보신 모습일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면 연약한 우리 삶 에서도 하나님이 보시는 귀한 모습,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인 안드레를 나누어 보도록 합니다. 


1. 요한의 제자

(요 1:35-37)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에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그는 어부였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전 이미 요한을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예수를 좇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쫓을 때 세례 요한은 그야말로 사역의 전성기로 모든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까지도 그 앞에서 세례를 받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안드레는 그야말로 무명이며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예수를 쫓은 것입니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안드레는 진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무식한 어부에 불과했으나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 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부는 새벽부터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진리를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시간을 쪼개어 요한을 따르고 또 예수를 따랐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안드레와 시몬을 보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셨더니 그들은 즉시 예수를 따랐습니다. 

고기 잡는 일이 우선되었다면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진리를 향한 갈망이 더 컸기에 안드레는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그야말로 진리를 위해 모험을 걸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제자가 됨  

(요 1:38-39)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씀을 듣고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갑자기 낯선 이가 주님을 따르니까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 "What do you want?" -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하는 말은 우리말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질문에 안드레는 "랍비"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Where are you staying?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선생은 무엇입니까? 바로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Come, and you will see." 

와 보라는 것은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알고자 하느냐? 그러면 오라. 그러면 내가 머무는 곳을 볼 것이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안드레에게 주님은 와서 나와 함께 머물자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 8:31-32)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주님은 믿는 유대인들에게 함께 거하자고 하십니다. 함께 거해야 제자자 되고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질 못했습니다. 왜? 거하기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다 머리로만 믿으려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기도하고, 머리로 사랑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함께 거하자고 하십니다.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거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사고 방식에서 아는 것은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경험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거해야만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시쯤 되었더라." 

주님을 따라 그 거하신 곳에 가니까 벌써 제 십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네시 입니다. 어두워질 때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집으로, 자기 처소로, 자기 안식처로 돌아오지 않고 주님과 함께 머뭅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3. 베드로를 전도함 

(요 1:40-41)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한의 제자 중 한 사람은 안드레라고 소개합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인지 소개되지 않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안드레는 남고 한 사람은 사라집니다.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난 기쁨에 제일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고 한사람은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전도한 자, 그는 바로 안드레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형제에게 전하고 전할 뿐만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예수께 옵니다. 


안드레는 행동하는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의 인도에 베드로가 두말없이 따른 것으로 보아 안드레는 형 베드로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요 12:20-22)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이방인이 예수님을 뵙고자 빌립을 찾아왔는데 빌립은 곧장 예수님께 데리고가지 않고 그들을 안드레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왜 그 많은 제자 중 안드레에게 부탁했을까요? 그가 시간이 남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마도 빌립에게 가장 편안하게 여겨지는, 늘 함께 있어도 부담이 없는 동료가 바로 안드레였을 것입니다. 항상 도움이 되는 친구가 안드레였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동료간에도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방인(헬라인)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순전한 믿음, 행동하는 믿음 

(요 6:5-9)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빌립과 안드레는 대비가 됩니다. 

빌립은 계산하는 믿음, 머리로 믿는 믿음의 소유자 입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한 줄 모르지만 그런 머리 때문에 그는 오히려 주님의 사역에 방해가 됩니다. 

신앙 안에서 지혜는 자기 머리보다 뛰어난 주님의 생각을 의지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늘 신앙 안에서 실패하는가? 

주님을 따른다 하면서 늘 자기의 이해 한도 안에서만 주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자기들 머리, 자신들의 능력, 자신들의 지혜만 의지 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눈 앞에 두고도 벌벌 떨며 근심했습니다. 

기드온이 자기 머리를 의지했다면 어찌 미디안 군사를 쳐부술 수 있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자기 힘을 의지했다면 어찌 여리고성을 무너뜨렸겠습니까? 

모두 자기들 보다 뛰어난, 모든 이들 가운데 뛰어난 하나님을 의지 했기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빌립이 200데나리온은 있어야 그들을 먹일 수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빌립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런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처음부터 아예 머리 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먹을 것을 찾으니까 먹을 것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어린 아이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가지고 온 것을 발견하고는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표적을 일으켜 그 많은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남들이 안된다고 포기할 때에 안드레는 혼자 무리들 속에 들어가서 계산하지 않고 먹을 것을 구했습니다. 


5. 자기를 드러내느냐, 타인을 드러내는냐?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수제자 자리를 놓고 으르렁거리던 사이였습니다. 거기다가 요한의 형제 야고보까지껴서 이들 셋은 항상 예수님을 뒤를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그러한 욕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가 자리에 대한 욕심, 남의 인정을 받는 것에 민감한 자였다면 얼마나 따질 것이 많았겠습니까? 

베드로를 전도한 것도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인정함을 받고 수제자가 된 것은 베드로입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주님께 가져 온 것은 안드레입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드러나게 하신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있던 어린아이입니다. 


어찌보면 안드레는 철저하게 인정받는 자리를 외면한 제자였습니다. 누구보다 행동하는 신앙, 우직한 신앙을 가졌지만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 가리워진 수제자였습니다. 아마 안드레가 베드로편에 붙어서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맞섰다면 제자들의 관계는 훨씬 더 갈등이 많고 싸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제자로서 안드레는 자기 기득권을 넘기고 묵묵히, 그리고 원만하게 제자들의 필요를 체워주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공헌을 합니다. 


6. 안드레의 순교 

안드레는 그리스, 아시아 등지에서 선교하다 70년경 그리스 파트라스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였다. 헬라인 총독은 안드레를 체포해서 그리스의 파트레에서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그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묶인 상태에서도 3일 동안 목숨을 유지하며, 십자가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수에 대해 전파하였다고 한다. 스코틀랜드는 안드레를 기념하여 그가 순교했던 십자가를 국기에 사용하고 있고, 안드레 기념일을 지킵니다. 무릴로가 그린 ‘성 안드레의 순교’라는 작품에 보면 사도 안드레는 X자 형 십자가에 달려있고 그 곁에 울고 있는 한 어린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바쳤던 소년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