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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열두제자 설교 '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5.08.15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 (막 15:40)
  2. 2015.07.10 마태와 시몬 (마가복음 3장 13-18절)
  3. 2015.06.12 도마, 참 믿음을 향한 여정
  4. 2015.06.05 나다나엘 (요한복음 1:43-51)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야고보 

본문 :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막 15:40)

 

 성경에는 ‘야고보’라고 하는 이름의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셋 있다. 

  

 첫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다. 그는 요한의 형제로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3대 수제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있다. 그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 예수를 믿지 않다가 예수님 부활 후에 믿어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었고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기록하기도 했다. 

  셋째, 오늘 우리가 살펴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아홉 번째 제자입니다(마10:2-4). 야고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중 두 사람이나 되기에 이 두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각각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불렀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소개 그대로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여인들 중 하나인 마리아였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여인으로 그녀를 그리는 것을 보면 그녀는 예수의 영광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현장을 지킨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에게는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로 제자들 사이에서 불리웠다. 그가 작은 야고보로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학설들이 있지만 대개 세배대의 야고보와 비교해서 설명을 한다.  

  첫째는 그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보다 나이가 적었을 것이다. 

  둘째는 키가 작았을 것이다. 

  셋째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예수의 수제자로 첫번째 순교자가 된 것에 비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거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은 영향력이 작았을 것이다라는 이유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1. 작은 자로 불린다는 것은 알게 모르게 부정적인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 컴플렉스가 될 수 있다. 

"늘 작은 형으로 불리던 시절, 동생에게 화를 낸 기억" 

 

 왜 그가 작은 야고보로서 불리웠는지 모르지만 위키페디아 사전에서 보면 그는 작은 야고보로 불리면서 제자들 가운데서 작은자, 소외된 자, 연약한 자, 연소한 자의 대표자로서 언급이 된다. 그는 주님을 충실하게 섬기는 이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본이 되었다.   

성경은 그에 대해서 이름 밖에는 어떻한 말도, 행동도 언급을 하지 않지만 우리는 다른 성경의 정보를 통하여, 또한 역사가들의 말을 통하여 그의 삶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마10:3, 막3:18, 눅6;15, 행1:13)에서 그는 12제자 중 9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마 10:3)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막 3: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눅 6: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행 1: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또한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보면 다대오와 시몬과 함께 열성적인 열심당원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시간에 다루었지만 열심당원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항거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이다. 

로마에게 항거하며 로마에게 충성하는 자들을 암살하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는 것이 열심당원이다. 


이와 더불어 또 한가지의 당황스런 구절이 성경에 등장한다. 


(막 2:14)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는 마태의 이름이다. 그런데 레위 마태의 아버지가 누구였는가? 바로 알패오라는 것이다.  

그럼 야고보와 마태는 형제지간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디에도 야고보와 마태가 형제였다고 기록된 곳이 없다. 


어머니 마리아를 이야기 할 때에도 야고보와 또 다른 동생 요세(혹은 요셉)은 기록하지만 마태 레위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다. 왜 그랬을까? 초대 교회의 문서를 보아도 이 둘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한 문서가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태와 야고보는 그저 아버지의 이름이 같을 뿐이라고 주장도 한다. 형제라면 열 두 제자를 소개 할 때에 야고보만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마태의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에 유대 정통 가정이었던 야고보의 가정에서 마태를 인정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한다. 내논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항상 작은 야고보 앞에 마태의 이름이 불려진다고 주장한다.  


만약 마태와 야고보가 형제지간이라면 이는 마태와 시몬이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 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힌 일이다. 

한 집안에 민족의 배반자로 불리는 세리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자가 함께 있는 것이고 그 둘이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이다. 


야고보 입장에서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도 참 나서기가 힘들 상황이다. 민족을 이야기하자니 형이 걸리고 형 편을 들자니 시몬이나 유다같은 동료들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조용하게, 침묵을 즐기며 예수님을 따랐다고 주장되어 진다.  


유세비우스, 혹은 요세푸스라고 불리는 유명한 초대교회의 역사가는 야고보에 대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다.” 

제자들이 서로 떠들고 나서고 할 때에도 야고보는 구석에서 항상 기도해서 그의 무릎이 굽어졌기 때문에 그는 낙타 무릎이라고 불려졌다." 


큰 야고보가 요한과 함께 예수의 옆을 지키면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청원할 때 작은 야고보는 슬며시 그 자리를 나와 무릎을 꿇고 겸손히 기도했다. 


요세푸스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더욱 야고보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예수를 닮은 제자가 바로 작은 야고보였다."

야고보는 설치기 보다는 조용했고 말하기 보다는 기도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열심히 주를 따르는 제자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는 작은 것을 택했으며 스스로 작아지는 자였고 작은 야고보로서 세상의 작고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의 대표자가 되었다. 기독교 제일의 역사가는 그 야고보가 예수님을 가장 닮은 제자라고 칭송했다. 


역사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수의 승천 후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하여 시리아 교회를 세우게 된다.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다.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한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lstle)라고 바꾸었다. 


야고보는 "지극히 작은 자"의 표상이다.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작은 자가 되기에 힘쓴다면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극히 작은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무릎이 닳도록 기도했다. 

기도는 우리의 의지를 드러내는 간구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꺾는 연단이다. 주를 드러내기 위해 나를 죽여나가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그는 작고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제자였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제자였으며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은 제자, 잊혀지지 않는 제자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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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와 시몬 (마가복음 3장 13-18절) 


시몬

1. 예수님의 형제 시몬 

(마 13: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2. 시몬 베드로

3. 열심당원 시몬 

(마 10:4)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막 3:18)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눅 6:15)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행 1: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가나나인 시몬이라고 하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셀롯인 시몬이라고 기록 


가나나인이라는 것은 가나안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에서 나온 정치적인 명칭이다. 셀롯이라는 말도 개역성경 각주를 보면 "열심당원"이라는 주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나인이라는 말도, 셀롯이라는 말도 결국 시몬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열심당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열심당의 역사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위 신. 구약 중간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주전 167년에 시리아의 잔혹한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성전에 난입하여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 피를 뿌렸고, 안식일과 할례를 폐했습니다. 민중들을 대상으로 온갖 학살을 자행했고 폭정을 했습니다. 보다못한 제사장 맛다디아가 다섯 아들들과 함께 봉기를 했습니다. 맛다디아가 죽자 아들 유다 마카비가 그 뒤를 이어 투쟁을 했고 마침내 혁명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약 80년간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그 후 로마가 유다를 정복함으로 마카비왕조 시대가 깨어지고 다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버리는데, 이 때 마카비 이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저항 단체를 결성하게 됩니다. 그들이 ‘셀롯’(열심당, Zealot)입니다. 셀롯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와 혁명주의와 저항주의의 성격을 가진 과격한 비밀 무장단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좋은 면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극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로마에 대해서 친근한 경향을 보이는 유대인들이 눈에 띠면 자기 민족임에도 과감하게 죽여 버리는 잔인성도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극렬 민족주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들은 시카라고 불리던 단도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고도 이야기하며 반대로 이 때문에 로마정부는 이들을 위험인물로 간주하여 로마 시대에 적어도 2천여명의 열심당원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시몬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왜 주님을 따랐는가하는 것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행 1: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학자들은 사도행전 1장 6절의 질문이 아마도 시몬이 했을 질문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리고 시몬 뿐만 아니라 겟셈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체포하려는 마고의 귀를 칼로 자른 베드로, 그리고 가룟인 유다 (이스케리옷)이란 말이 단칼인 시카에서 왔기 때문에 이 열심당원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말을 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독립, 그리고 다윗 왕때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올라 주님의 왼쪽 오른쪽 자리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들 제자들은 예수 믿으면 자기 나라가, 자기 민족이 세계를 이끄는 큰 왕국이 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열심당원들이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하였던 것과는 달리 필레스틴 지방에는 또 다른 분파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대항하기 보다는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며 많은 돈을 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세리 였지요. 세리는 로마를 위해 고용된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의 통치하에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열심당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처럼 로마를 향한 생각이나 태도가 정반대로 달랐습니다.

기록에 보면 당시의 랍비에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동물들 중에 가장 잔인한 동물이 무엇입니까?" 

"사막의 짐승들,  곰, 사자와 더불어서 도시의 흉악한 짐승들, 그리고 바로 동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과 같은 인생들, 그 중에서도 세리들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관리나 군인들 보다 더 나쁜 민족 반역자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세금을 감해 주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추가해서 세금을 뜯어냄으로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어겠습니까? 나라를 잃고 억압받는 것도 서러운 일인데, 같은 동족인 세리가 고혈을 짜듯 많은 세금을 갈취해 가니 그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했고 법정의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세리는 기생, 이방인, 죄수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했고 늘 외면당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의 마태는 바로 이 세리였습니다. 

그의 첫 이름은 레위였는데 그리스도를 믿은 후 예수께서 마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그는 사도들 가운데서 일곱번째,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여덟번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행1:13). 

그러면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이 세리들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살인까지 저질렀던 자들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열심당원들입니다. 그들은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이 세리들을 보기만 하면 죽이기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같이 있고 싶어서 뽑으신 제자 들 중에 이 열심당원 시몬과 또한 마태를 함께 머물도록 뽑은 것입니다. 

열심당원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입니다. 민족을 위해, 동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자들이지요. 이들에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무기는 곧 힘입니다. 칼로서, 힘으로써, 무력으로서 자유를 쟁취하고자 합니다. 

이와 반대로 세리는 자기를 위해서라면 민족마저도 배반할 수 있는 자입니다. 남이 아무리 욕을 하건 말건, 침을 뱉던 말던, 자기를 위해서,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욕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서슴치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무기는 곧 돈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둘을 함께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세리의 집으로 가십니다. 세리였던 삭개오를 불러 내려오라 하시고, 그의 집에 머물겠다 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 조차 저가 어찌 세리의 집에 유하느냐하며 비아냥 거립니다. 그런데....제자들은 모두, 열심당원 시몬을 비롯하여 그러한 성향을 띤 유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모우 함께 그 세리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쓰려던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할 것이다라고 경계하십니다. 

마태는 그 이름이 레위로, 제사장 지파의 자손이었지만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돈을 위해, 자존심도, 민족도 다 팽개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짐승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고 하시며 그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레위를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마태라고 새로 지어주십니다. 


세상에서는 함께 할 수 없는 두 부류의 사람이 예수를 모시니까 함께 머뭅니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던 로마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세상, 혹은 돈이 최고인 물질지상주의 세상이 아닌 새로운 나라를 꿈꾸게 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였고 그 나라는 다름아닌 사랑으로 이룩된 나라였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나라. 쳐다보지 않던 사마리아땅을 지나가고, 죄인으로 격리되어 있던 문등병자들을 불러 치료하고, 그리고 세리와 열심당원이 함께 제자가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제자가 된 마태는 돈주머니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시몬은 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더 소중한 권세와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봅시다. 저는 한국만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심한 줄 알았는데, 미국도 공화당과 민주당이 철저히 갈려져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화파는 오바마를 사탄주의자로, 미국을 망하게 하는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민주파는 부시를 극단주의자요, 전쟁광이라며 이것이 한국 이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이념전쟁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구나...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마태와 시몬은 하나가 되어 어느 갈등도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하나되게 한 것이다. 이 화평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사랑의 어원-> 사르다. 불태우다. 

즉, 사람이라는 것은 사랑을 부태우는 존재라는 의미.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람들이 사랑으로 불태우는 나라이다. 

마태는 돈을 위해 사람이기를 포기한 세계에서 다시금 사랑의 사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됩니다. 

시몬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다가 주님을 만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주님 안에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은 마태의 잔칫집에서, 주님의 부활하신 후 굳게 문닫힌 집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으로 새삶을 살게 되는 오순절 다락방에서 함께 유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전파자로, 한 형제가 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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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참 믿음을 향한 여정


도마에 대한 기사는 주로 요한복음에 집중되어 있고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는 단지 열 두 제자로서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째로(마 10:3), 마가과 누가복음에서는 여덟번째로 (막 3:18/ 눅 6:15), 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번째로 기록되어 있다(행 1:13). 


도마의 이름의 뜻은 쌍동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쌍동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도마를 소개하면서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디두모라는 말도 쌍동이라는 의미이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와 있는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도마에 대한 사실은 여기까지이지만 요한 복음은 도마에 대해 알 수 있는 몇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 나사로를 향해 유대로 가자! (요한복음 11장) 

요한복음 10장,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 10:30) ->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사 거기서 복음을 전함. 


(요 11:6)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 8절: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이 가려고 하지 않음.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16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사건은 부활에 대한 첫 증거, 예수의 부활에 대한 예표이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며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심을 보여 주고 예수 또한 부활할 것임을 알려주는 사건. 

그런데 그 사건을 이루려면 다시 자신들을 돌로 치려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야 한다. 


부활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유대로 가기를 두려워할 때에 도마는 앞장 서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한다. 

이 때가 도마가 이름 외에 첫 등장하는 기사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예수와 함께 죽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다. 

베드로가, 요한이, 안드레가, 야고보조차조 망설일 때에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용기는 믿음에 근거한 용기가 아니었다. 맹목적인 용기였다.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나사로를 향하는데 도마는 용기있게 그 현장에 제자들 인도한다. 


나사로 사건의 결말 

(요 11: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2. 그 길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5절) 

그곳을 피해 있다가 유월절 엿세 전에 다시 나사로가 살아난 베다니를 방문 (12장 - 마리아의 향유 사건) 

13장) 최후의 만찬, 발을 씻기심 

드라마틱 하게 십자가를 향해 절정에 이르는 장면 

겉으로는 예루살렘에 화려하게 입성하여 환호성을 받지만 예수는 반대로 죽음을 준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이렇게 14장이 시작하면서 

"너희는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라며 시작 이제 몇 시간 있으면 로마 병정들에게 잡히실 그 절박하고 급박한 때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죽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죽는다고 하지 않고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4절에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니까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질문은 너무도 급박한 순간에 나누는 도마의 혼란스런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서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고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죽음도 능히 이기실 분이라는 것, 주님은 이미 죽음 마져도 극복하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 도마와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이 단지 죽음의 길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가장 근접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 도마인지 모른다. 

다른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최후의 만찬에 서로 나는 아니지요, 나는 절대로 주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할 그 때에 도마는 도대체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이 무슨 길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생갈 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문을 주님께 묻는다. "내가 모릅니다. 어떻게 압니까?"


어찌보면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은 도마에게 참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 같다. 

구도자의 길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신학은 우리의 무지에서 부터 출발해서 주님께 묻는데서부터 시작한다. 

믿음은 맹목적 수용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릴적부터 질문하는 것에 대해 열려 있지 않다. 

부모가 말하면 말대꾸 하지 말라 한다. 

그저 무조건 받아들이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라는 말이 지배한다. 

괜히 질문했다 남들보다 무식하다는 소식을 들을까봐 자신의 무지를 숨긴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은 겸손을 가장한 무지의 결과이다. 


그런 교육은 언제나 일방적이다. 스승은 단상에 올라 가 있고 학생은 밑에서 스승을 보면서 무조건 수용을 강요받는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기도를 통해서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일방적으로 주님께 간구하고 일방적으로 끝맺어 버린다. 

수업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고 기도는 일방적으로 말해버리고 끝내버린다. 참 대화와 참 교제가 없다. 


참 교육은 쌍방향 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대화를 통해, 교제를 통해, 삶을 통해 자란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그냥 자라지 않는다. 

물을 주고 햇볕을 주고 거름을 주고 보살펴야 한다. 이른바 관계가 맺어져야 열매가 맺는 것이다. 


도마가 난 그 길이 무엇인지 모릅니다하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요한복음 14장 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학자였다. 신학자였고 존경받는 스승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무지를 주님 앞에서 드러낸다. 

"네가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이런 것도 모르느냐?" 그의 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게 한 후에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마리아 여인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음을 드러나게 한 후에 

"너희는 여태껏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지만 이제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하며 참 예배에 대해 알려 주신다. 


내가 안다고 하는 순간 교만이 찾아오고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믿음이 아닌 맹신만이 가득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신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참 믿음을 원하신다. 


3. 보지 않고 믿는 믿는 자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장 24-29)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돌아가신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문을 닫고 모여 있었다. 누구도 주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기대하지 않은 듯하다. 주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시며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신다. 

그런데 그 현장에 도마가 없었다. 

그 시간 도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냐하면 나사로의 사건에서, 마지막 만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는 현장에서 도마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 주님의 길에 근접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도마는 누구보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고 찾아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주님이 가신 길을 자기도 찾아 헤메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만 주님을 보지 못했다. 자신에게만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셨다. 

어쩌면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에 도마는 주님은 그런 식으로 오시지 않을꺼야....

다른 제자들과 전혀 다른 생각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도마가 의심한 것은 오신 주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여태껏 주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던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 제자들에게 먼저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간다. 

교회가 타락했다고 하고 무너졌다고도 한다. 

주님은 이제 교회에 계시지 않고 교회 밖에 계신다는 말들도 한다. 

교회 밖의 다른 길을 찾아 헤메는 구도자들이 늘어만 간다. 


제자들의 무지를 의심하며 함께 있지 않았던 구도자 도마처럼 교회 밖에서 주님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무지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제자들의 무지는 주님의 계획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여시고 깨닫게 하시면 우리의 무지는 씻은 듯 해결된다. 


문제는 약속된 처소에 내가 머물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은혜가 되는 구절은 26절 

"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이번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 곳을 떠나지 않았다. 무너졌던 제자들에 대한 믿음, 그 실패했던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 예수를 기다린 것이다. 


주님은 반드시 교회를 통해 오신다! 

타락하고, 무너지고, 조롱받고, 외면당해도, 주님이 오셔서 교회를 회복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부활의 기쁨에 참여케 하신다. 

그 때에 돌아온 도마에게 주님은 이전의 제자들이 경험했던 예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는 똑같은 말씀과 도마  한 사람을 위하여 주님의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손대게 하신다. 


비로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기 전, 너희 믿음을 위하여 내가 기뻐하노라 하신 주님이 부활하신 몸을 이끌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하신다. 


몇 주일 동안 최근 미국과 한국에 계속적으로 펴져가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마져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실망하고 절망했다. 

이러한 세대에 교회를 떠나 말씀을 떠나 어떻게 접근을 하나라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도마의 신앙을 통해서 제자들을 떠나 주님의 길을 가고자 했던 구도자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통해 다시금 사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모습을 보며 소망을 보게 되었다. 주님이 오실 때에 그들도 버리지 않고 다시금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나도록 해 주시리라! 


다른 복음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신앙고백의 모델로 삼고 있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도마의 신앙 고백,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를 더욱 부곽시킨다. 

도마의 고백 후 바로 나온 구절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21)로 끝을 맺는다. 


다른 복음서가 도마를 여섯번째, 혹은 일곱번째 제자로 소개하는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요한은 도마를 베드로 다음의 두번째 제자로 등장시킨다. 


도마를 공부하기 전 도마는 그저 의심많은 제자 도마였다. 

빌립과 같은 회의론자, 염세주의자였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도마는 회의론자라기 보다는 구도자였다. 

진리를 향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였고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는 자였다. 


한 목사님이 미국에서 역사가 두번째로 오래된 교회의 담임으로 청빙받아 가게 되었다. 

역사가 오랜 교회답게 교인 수에 비해서 대다수가 장로님 권사님이셨다. 

평균 신앙 연력이 30년은 기본이고 50년이상 신앙생활 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해도 부담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무엇을 말해도 다 아는 듯한 표정이 목사님을 자신감 없게 만들었다. 말끝마다 여러분도 다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이 한마디 말할 때마다 후렴구처럼 반복되었다. 


한 번 그 교회 수석 장로님과 개인적으로 식사할 시간이 되어서 솔직하게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했다. 

그런데 그 장로님 말씀이 

"목사님, 저두 제가 많이 아는 것 같았습니다. 들을 땐 왠만하면 다 아는 것처럼 느꼈으니까요. 그런데 한 번 말씀을 읽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게 다름 아닌 나구나. 내가 모르면서 모른다는 것 조차 모르고 살았구나.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이건 정말 입니다. 저희는 목사님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모릅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도 설교의 부담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있게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고 성도들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소망하게 되었다고 저에게 직접 간증해 주셨다. 


참 진리를 향한 구도자가 되자. 모르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진리를 구하자! 

그러면 정말 참 믿음 안에 거하는 은혜를 맛보게 하실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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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나엘 (바돌로메) 요 1:43-51


 

나다나엘이 주님의 열두 제자인가? 왜냐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인물이 나오지 않고 오직 요한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 누가, 마가과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요21: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한다.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은 바돌로메와 나다나엘을 한 인물로 본다. 

바돌로메는 돌로메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이다.

1.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 아주 극소수의 귀족들만 서재가 있었으므로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발립과 나다나엘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빌립이 그리스 학문을 배경으로 탐구하고 훈련 받은 사람이라면 나다나엘은 이스라엘인답게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였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간사한 것이라는 것은 계산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에 익숙했던 나다나엘은 빌립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했지만 그 방법과 동기에 있어서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다윗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철저히 고독한 공간에서 말씀과의 대면을 사모했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다.


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다나엘은 조용히 묵상하는 자였으나 회의론자였다. 

성경을 묵상했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 전체는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더러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곳은 “이방의 갈릴리”(시 9:1~2)라 불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흑암 가운데 거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나 

(마 2: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요 7: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상반되는 두 구절 - 그러나 현재 구약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말씀들...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말씀, 

어쩌면 전통적이거나 관습적, 편견으로 자리잡은 것들.... 

그래서 이 말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적 표현이었다. 나다나엘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 전통과 편견들 중에서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소망을 품을 것인가? 포기하고 절망할 것인가?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다. 


3.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1:47) 

(롬 9: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롬 9: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참 이스라엘에 속한 나다나엘의 마음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위선이 없었고, 속됨이 없었다. 그는 진실히 하나님을 사모했고, 메시야를 기다렸다. 


간사함- 헤롯왕, 예루살렘에 속한 제사장들.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행한 것은 메시야를 찾아 죽이고자 한 것. 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메시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성공,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그것을 위해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것도 예루살렘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요, 그들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참 하나님, 참 메시야를 갈구했다. 


차분하고 내면중심적이지만 좀 부정적인, 회의적인 자에게 주님이 부르신 방법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속을 치유하신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 어느제자도 이토록 따뜻하게 주님이 부르신 자가 있는가? 


그러면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보았다. 

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를 부른 것은 빌립이 아니라 나다. 

내가 너를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나다나엘은 

(요 1: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어느 누구보다 먼저 주님이 하나님이 아들이심과 왕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통해 고대하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에 만족하시지 않았습니다. 

 50-5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의 순교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짔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1.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이다. 자기의 약점을 끝 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개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자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열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자. 그때 부터 교정은 시작된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준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온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는가? 보통 ‘네 이미 잘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이다. 
(예)사랑을 고백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불평을 하면 더욱 한심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고백이라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시인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나다나엘은 고백의 중요성과 영감있는 아름다운 고백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진실하고 조용히 주님을 따라가며 생애를 주님 위해 바친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수 있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꼐신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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