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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여호수아서 강해'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6.08.20 여호수아 4장 - 두 개의 기념비
  2. 2016.08.13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3. 2016.08.06 여리고 정탐 (여호수아 2장)
  4. 2016.07.31 백성을 향한 세가지 명령 (여호수아 1장 10-18절)

여호수아 4장 - 두개의 기념비

1. 홍해와 요단강 


출애굽 여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큰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하나는 출애굽 할 때에 건넜던 홍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본 요단강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으로 볼 때에 홍해를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얻는 중생이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화의 문을 건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해석도 홍해와 요단강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구원을 출애굽으로 보느냐, 가나안입성으로 보느냐도 많은 논쟁이 되는 부분입니다. 

출애굽으로만 본다면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면서도 동시에 고된 광야생활 가운데 불평하고, 원망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모습을 보면서 구원의 모습에 대해 회의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한정시켜서 본다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자들은 구원에서 벗어난 자들인가? 하는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아론도 결국 구원에 실패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역사였습니다. 

홀해를 건넌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 한 것이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삶, 중생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의 목적지는 가나안입니다. 바로 성도의 성화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성화되지 못하면 불평하다 끝납니다

정말 신앙생활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한채 광야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신앙의 참 맛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냥 들여보내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열가지 재앙으로, 홍해도 건너게 하셨는데 

광야 훈련소에서는 비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만나와 매추라기로 계속 먹이고 보호하시지만 

그들이 순종하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곳에서 십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그곳에서 순종으로 성막을 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며 

오직 순종함으로 훈련하여 땅을, 기업을, 열매를 얻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성화된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이 은혜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성화의 중생의 강을 넘어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홍해는 일생에 한 번 건너지만 요단강은 우리가 매일 건너가야 하는 강입니다. 

성경에도 홍해에 대한 사건은 단 한번 기록되어 있지만, 요단강에 대한 사건은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이외에도 엘리야, 엘리사때 옷을 치며 건넌 사건, 나아만 장군이 문등병을 고치게 되는 사건,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는 사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 등 세례의 의미와 더불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거듭남의 완성이 홍해를 거쳐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한 전도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오클랜드에서 학생부를 담당하고 계신데 아이들이 신앙생활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야기해도 지루해 합니다. 심심할 것이라 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한다면 나중에 죽기 전에 열심히 할 것이라 말합니다. 


아이들 뿐만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나님, 천국과 같은 말을 들으면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힘이 나는 것이 아니라

또 저소리여, 아이 지루해, 천국은 심심할꺼야...이런 생각들을 가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을 보지 않아서입니다.

가나안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2. 두 곳에 세운 기념비 

요단을 건넜습니다.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앞세우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뒤를 따랐습니다. 말씀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지난 시간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요단을 건너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명령하십니다. 

"백성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여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이 선 곳에서 열 두 돌을 가져다가 오늘밤 유숙할 그곳에 두게하라."


표징이라는 것은 증거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이적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한결같이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기적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의 표징이고, 물고기가 사람 낚는 물고기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표징이듯이 돌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이라는 증거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표징입니까?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단물이 여호와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때의 요단 물은 어떤 물입니까? 생명을 삼키는 물입니다, 고난의 물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물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 고난이 어디서 끊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으로 고난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인생의 파도가 일 때마다 우리는 두려워하고 낙망하고 넘어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험하면 말씀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넘어지기 때문에 말씀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유혹이 역사합니다. 

사람을 기대다가 실망하게 되고, 돈을 의지하다가 탐욕때문에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은 형식적이고 남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처럼 되다가 급기야 믿음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가로막는 강으로부터 말씀으로 건너가게 하시고 이것을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볼 때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2절부터 이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으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표징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알고 그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사이에 서있는 그 자리에서 돌을 취하여 그들이 유숙하는 길갈이라는 땅으로 와서 거기에 돌을 세우고 기념하게 하신 것인데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명하여 또 한 무더기의 돌을 세웁니다. 


9절을 봅니다. 

(수 4:9) 여호수아가 또 요단 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돌 열둘을 세웠더니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닌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명한 돌입니다. 

이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자 요단강 중심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를 상상해 봅시다. 

이 광경을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단강을 절대로 우리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장벽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큰 벽, 죄의 벽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그 한가운데에 있으니 물이 갈라지고 벽이 사라졌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사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다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의 한 가운데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하고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요단강 한 가운데 서 있는 언약궤는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 죽음에서 날 구원했음을, 그로 말미암아 내가 마른 땅을 건넜음을 기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9절에 보면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더라 증거하고 있는데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이 차면 그 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그 장소, 언약궤가 서 있던 장소에 돌을 두어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왜 여호수아는 요단 물밑에 보이지도 않는 돌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까? 

강물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옛생활은 장사지내고 마음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세기라. 

그렇지만 물이 마르면, 은혜가 마르면 다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돌..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은 우리의 죄입니다. 


  •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가나안, 홍해, 요단강, 법궤, 성막, 계명, 기념비와 같은 수 많은 신앙의 상징물들이 등장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러한 신앙의 상징물들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더불어 바라보았습니다. 


물은 고난임과 동시에 세례이고 은혜입니다. 

물은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서 갈급하게 합니다. 

물에 빠지면 허우적 거리고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물을 건너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물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곧 은혜로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은 세례입니다. 

세상의 방법을 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 애굽의 나, 광야의 나는 죽고 이제 이젠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말씀처럼 거듭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에서 두 번의 강을 건넙니다.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첫 번째 세례, 바로 중생의 강입니다. 


두 번째는 광야를 통해 예전의 나를 죽이고 비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성화의 강, 우리 성결교회에서 말하는 두 번째 세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순종이 함께 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호수아는 두개의 기념비를 세웁니다. 

하나는 요단강 가운데 묻어두었던 숨겨진 기념비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내 옛 죄와 옛 자아를 죽이고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게 합니다. 

이돌은 은혜가 덮이면 항상 가리우지만 은혜가 마르면 다시금 튀어나와 우리를 자꾸만 옛자아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길갈에 세운 돌은 구원의 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날 살리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건너게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날 여기로 인도하셨다는 찬양의 돌, 확신의 돌, 영광의 돌입니다. 

영광스러운 돌입니다. 산돌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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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단강을 건넘 (여호수아 3장) 


여호수아 전체의 내용 - 가나안땅 정복. 가나안의 의미가 무엇인가? 

 

가나안 : 어떤 이는 행복, 어떤 이는 축복, 어떤 이는 물질적인 축복만을...어떤 이는 유혹...간단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땅. 

             지금의 이스라엘 전체의 땅. 그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 - 하나님의 임재, 통치.

             그러나 그 땅 자체가 복이 아니다. 그 땅은 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 

             물리적인 예루살렘 땅은 물론 선택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 땅은 불모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선민, 집착, 신앙이 강헀다. 

              북왕국이 망했을 때에도 예루살렘이 있는 남왕국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던 성전도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그 땅 자체가 아니다.  -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모든 하늘과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 

             가나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누구의 입술을 통해 하는가? 바로 라합이다. 

             (수 2장 11절)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문제는 가나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가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곧 가나안이다. 내가 어떤 가나안을 생각하는가가 내 신앙의 특징을 보여 준다. 

             가나안이 단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엄밀히 말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된다. 복의 근원이 된다. 

             그런데 그 복은 곧 깨어졌던 하나님 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고, 자녀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부재가 어떤 고통을 가져다 주는 줄을 삶을 통해 제험하고 그 은혜를 체험한다. 

             그런데 큰 아들은 한시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큰 아들에게 가나안은 빨리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왕이 될 때 까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신앙의 여정에 가나안은 유혹이고 타락을 가져다 준다.            가나안을 얻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건 축복이 아니다. 실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왕이 되어 살다가 고통을 당하게 된다.  기독교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유럽, 미국, 한국 교회 모두가 가나안 이후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한다. 

             

 2. 하나님의 계획, 준비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철저하다. 

 첫째, 사람을 세운다. 모세를 잃고 무너져 있던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운다. 

           1장에서 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는 철저히 모세와의 관계 안에서 훈련된 자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 할 때에 삶의 전쟁터에서 최선을 다했고 모세와 함께 시내산에 머물었고 모세를 떠나 가나안 땅을 정탐했다. 그리고 모세가 죽자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한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말하게 한다.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 사람과 동역한다.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이다. 

             맡긴 자에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이다. (고전 4:2) 

 둘째, 여호수아를 통해 백성들에게 명령하신다.   

             백성에게 하신 말씀은 사흘 양식(사흘- 십자가의 시간, 죽음의 시간; 양식- 고난을 이기는 힘은 믿음, 믿음은 오직 말씀으로부터...그렇게 때문에 사흘 양식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말씀으로 준비하라는 것이다.) 을 준비하고 르우벤, 갓, 므낫세 지파를 통해 자기 목적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것이 땅과 안식이다. 

             땅이 주어졌어도 안식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는 평안하다. 안식이 주어진다. 

             

 셋째, 2장에서는 그 땅을 정탐케 한다. 12명 대신 하나님께 집중된 2명의 사람을 보낸다. 

             그리고 라합을 만나게 한다. 정탐꾼이 가서 한 일은 라합을 만나서 함께 머물고 라합을 말대로 사흘을 산에서 피신했다가 약속을 받고 돌아온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2명의 정탐꾼은 라합을 통해서 여리고성의 상태를 보았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았다. 

             처음 12명을 보냈을 때를 기억하라. 

             그들은 좋은 땅을 보았고 열매를 보았다. 그 다음 본 것이 그 나라 사람의 장대함과 자기 자신을 보았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함께 보았지만 다수는 부정적인 것 때문에 좋은 것을 포기한다. 사람의 생각은 항상 부정이 긍정을 이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부정적인 상황,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메시지, 약속, 보장을 발견한다.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산에 밝은 사람은 오히려 신앙에 실패하는 자들이 많다. 

             믿음은 여러 사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는 것이다. 

             말씀은 늘 해석이 동행한다. 

             누구에게나 말씀이 주어져 있지만 그 말씀을 붙잡는 자만이 레마를 경험한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3장에서 드디어 요단강을 건넌다. 

             

  • 1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광야의 역사는 새벽의 역사다. 새벽에 홍해가 갈라지고 새벽에 만나가 내리며 새벽에 요단을 건넌다. 새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성실한 믿음 가운데서 역사된다. 게으른 자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자는 곧 부지런한 자이다. 움직이는 자이다. "깨어 일어나"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이다.  아침형 인간....한 때 유행했던 베스트셀러. 거기에서 말하는 것-> 인간의 싸이클이 자연의 싸이클에 맞추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자는 것이 자연의 싸이클이고 곧 인간의 싸이클이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이 싸이클을 깨어버린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시작해서 육체적으로도 건강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 2절: 사흘 후에- 계속적으로 사흘이라는 숫자가 등장한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나를 죽이는 것이다. 사도바울 처럼 날마다 죽지 아니하면 또 넘어지고, 불평하고, 절망한다. 


  • 3~5절: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나아가라 하신 분께서 갑자기 멈추라 할 수 있다. 갑자기 이제 떠나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이 변화 무쌍한 세상에 변함없는 말씀이 변화한 것처럼 감각되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6절: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행하게 하실 수 있도록 

->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임재, 그가 앞서가게 하라. 자신이 먼저가지 말라. 말씀을 따라 가라. 기다리고 인내하라.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라. 

                 백성들에게: 성결하라.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진군하라. 

                 

  •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땅에 가기 위에서는 나의 장막을 떠나야 한다. 내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의지하고 있는 내 안의 안식처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말씀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 -> 여호수아 -> 제사장 -> 백성

은 신앙생활의 지휘체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개신교인들마저 제사장을 목사로서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하라고 교육을 시키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개신교의 교리는 만인 제사장이다. 

카톨릭이 구약을 모델을 따라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제사장으로 이어지는 체계를 중시한다면 개신교는 

벧전 2:9절의 말씀을 따라 우리 성도 모두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이다. 

목사의 사명은 제사장이 되어 아둔한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각자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도록 돕는 자, 함께 하는 자, 때로는 가르치는 자, 연결하는 자이다. 

그러면 성도 각가 우리 안에 말씀의 사람이 되어 백성의 상태에서, 말씀 안에 거하는 제사장의 상태로, 내 가족과 내 이웃을 인도하는 여호수아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공동체의 지휘 혹은 계급 체계가 아닌 개인 안에서의 영적 상태, 요한이 말한 아버지의 믿음, 청년의 믿음, 어린아이의 믿음의 상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1) 구원받을 때를 기억해 보자. - 내안의 죄들과 정죄받을 것 같은 마음때문에 두려웠다. 쫒기는 듯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다. 너의 능력과 업적, 행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나만 바라보라". 바울은 이것을 "누구든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였을 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으로 갈라진 홍해를 건너기만 하면된다. 그리고 미리암 모세처럼 그 기쁨에 겨워, 내 뒤에 쫒아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악한 것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송하면 된다.


(2) 구원 받은 후 삶은- 제사장의 법궤에 따라 이스라엘이 움직인것 처럼 구원 후 나의 삶은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구원의 역사현장에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 행하시지만, 구원 후에는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 기적을, 하나님의 일을 하시길 원하신다. 거기에는 용기도 필요하다. 휘몰아치는 강에 발을 담궈야 하는 제사장들의 용기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으며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 도전해야 하는 용기말이다. 그리고 그 후 할례받은 백성처럼 하나님의 태초의 계획 "나로 성결케 되길 원하신" 그 거룩의 목적을 쫒아 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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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장 - 여리고 정탐 


가나안 땅 정복 - 

- 사람을 세우고 약속과 사명을 주심 (이제 일어나 요단을 건너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 백성에게 명하게 하심 - 지도자와 백성이 하나님이 일에 합심하게 됨 (양식을 준비하라,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도우라, 순종하라) 

- 강하고 담대하라 


3일간의 기다림의 기간 동안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한 일. - 양식 준비(말씀으로 무장), 정탐 (믿음의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는 것)

                                                                                     믿음은 오직 말씀을 통하여 역사한다. 말씀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다.  


2장 - 그 땅으로 보냄

  • 정탐꾼을 보냄 

2명의 정탐꾼 -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1절) 

정탐꾼 하면 생각 나는 것 - 가데스 바데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것 - 12명의 정탐꾼, 

- 그런데 여리고를 앞두고는 두명만을 보낸다. 영문성경을 보면 "secretly" 은밀히 보냈다고 기록한다. 왜 두명만을 그것도 은밀히 보내는가? 나누어지지 말고 하나된 보고를 하라. 

눈이 많을 수록 다양한 관점, 다양한 의견. 그러나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관성. 목표 지향성. 

믿음의 눈을 가진 서로 연합된 두 명을 보낸다. 

- 가데스바데아에서 열 두 명은 40일동안 철저히 그 땅을 정탐한다. 그러나 2명이 가 있는 기간은 고작 3일간이고 한 일이라고는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숨어있다 산에 올라가 3일동안 숨어 있다 도망친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와서 믿음의 보고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고자 하신 것은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 신앙생활은 많은 경험과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경험한 자도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고 만다면, 본질을 보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두 명의 정탐꾼은 짧은 시간동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확히 깨닫고 보고한다. 

   

  • 기생 라합 

신분적으로, 그녀는 여자요, 여자 중에서도 기생이었다.  

왜 하나님이 그녀를 만나게 하셨는가? 

 라합을 택하신 하나님 - 여리고의 가장 연약한 여인을 택하사 이스라엘 백섣을 돕게 하심 

                                 

->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 그녀는 신뢰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는 여인이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 그녀는 하나님의 메신저였고, 피난처였다. 또한 그녀를 통해 정탐꾼들은 여리고의 민심과 그들의 목숨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라합은 그들을 통해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 가정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영혼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마리아 땅에 거하는 한 여인을 구원코자 하시는 예수님의 행적처럼...

 사렙다 과부를 택하사 엘리야를 돕게 하시는 하나님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알리신 주님. 

 

라합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 왜? 그녀는 믿음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첫째, 누가 진짜 왕인가에 대한 물음에 믿음으로 화답했다.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발각되었다. 왕이 직접 사신을 보내어 지시한다. 그 명령을 어기는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을 건 모험이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위해 믿음을 버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 히브리 산파가 바로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다. 다니엘이 느부가넷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대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택했다. 누가 나의 왕인가? 누구의 말을 따를 것인가? 


9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 시혼과 옥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린다. 사용하지 못한다. 

체험이 있어도 믿음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특별한 체험이 없어도 순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수많은 말씀을 듣고, 보았어도 정작 문제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가? 


11절 -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온전한 신앙고백 안에서 구원을 구함.

지금 누가 누구를 구해주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정탐꾼의 목숨을 구해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입장에서도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과 집을 구해달라고 간구한다. 

믿음은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아는 것이다.  



언약 

사흘 동안 숨었다가 너희의 길을 가라 (16절) -> 남아있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식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간

정탐꾼에게는 산에 올라가 라합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묵상하는 시간. 

라합에게는 붉은 줄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시간. 


계속되어서 반복되는 사흘이라는 시간, 고통의 시간, 죽음의 시간, 그러나 부활의 시간. 

내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뜻이 사는 시간 

산으로 가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골방으로 가서, 은밀한 중에...)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야 할 곳. 하나님과의 대면, 기도의 처소. 삼일간의 양식을 준비하라


  • 창문에 달린 붉은 줄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와 같은 주의 보혈 

네 집 문을 나가면~ 너와 함께 있는 자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의 길은 나와 내 집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그 안에 거하는 것. 내 방법이 아니라 예비된 방법, 지정된 방법, 계시된 방법만이 구원의 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보고 (22-24절) 

정탐꾼이 본 것, 경험한 것 - 라합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자. 

여리고 땅에서 그들의 편은 오직 라합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오직 라합 뿐, 

그 나머지는 자기들을 위협하고 죽이고자 했던 군사들. 그 군사를 피해 3일 동안 산에 올라가 피해있음. 

그런데 그들이 붙잡은 것은 라합의 고백 


무엇을 붙잡고 살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은 항상 여러가지다. 

믿음의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이는가하면 세상의 사정이 보이고 환경이 앞설 때가 있다. 

약속을 붙잡을 것인가? 환경에 의지할 것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다! 


  • 하나님이 오묘한 섭리 

-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참 믿음의 증표를 

- 라합에게는 그녀로 말미암은 한 가정의 구원을...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라합은 다윗왕의 조상이 되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인으로서, 기생으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 하나님이 계획은 맞불린다. 섭리는 깊고 오묘하다. 


묵상) 누구를 왕으로 삼을 것인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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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향한 세가지 명령 (여호수아 1장 10-18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세가 죽고 영적, 육적 혼란기를 맞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먼저 여호수아를 부르신 하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70여명의 가족으로 시작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의 400여년간의 시간동안 그 숫자가 민족을 이룰 정도로 급증했고 출애굽할 때 따라나온 허다한 잡족까지 합하면 200만명의 숫자입니다. 

그들이 집도 없고, 땅도 없이 광야에서 40여년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만 모면 모세라는 뛰어난 영적인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40일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얼마나 큰 방황과 죄악을 저질렀는가를 살펴보면 그의 리더십의 영향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바로 앞둔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모세가 있어도 감히 갈 수 없었던 땅을 지금 모세 없이, 건너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먼저 여호수아를 일으켜 그에게 영적인 부흥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 처럼 우연한 일이 아니라 모세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마치 다윗을 왕으로 훈련시킨 것처럼 차곡차곡 훈련 시킨 결과였습니다. 


여호수아를 불러 그에게 "일어나" "건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수 1:2)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실 때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이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주저않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셨습니다. 

모세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바로 여호수아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제 그를 통해 너의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약속하십니다. 네 신을 벗으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신 모세의 경우처럼 이제 내가 너를 인도하는 대로 여호수아의 믿음과 경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토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 번이나 걸쳐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과 감정에 요동하지 말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야로 떠나지 않도록 하라 하십니다. 

우리 마음 속에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물질이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함을 체험할 적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평강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한영혼을 일으키사 그 영혼을 통해 공동체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작은 불꽃 하나에서부터 불길이 번지게 하십니다. 

한 영혼을 통해 가정을 일으키시고, 한 영혼을 통해 교회를 일으키시고, 한 영혼을 통해 민족을 일으키십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신 세가지 말씀은 무엇입니까? 

1. 양식을 준비하라 (11절) 

2. 요단 동편에 거하게 되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에게 "가서 그들을 도우라" (14절) 

3. 순종하라, (17-18절) 


1. 양식을 준비하라 

그 동안의 양식 - 만나, 매일 같이 내리는 하늘의 양식 

                          준비할 필요도 없었고, 준비해서도 안되었습니다. 매일 그 날의 양식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매일의 경건)  

                          그런데 사흘 동안 요단을 건널 때에는 이 준비된 양식이 없으면 건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말씀- 일상을 뛰어넘는 특별한 말씀) 

                          마치 홍해를 건너기 전 무교병을 먹도록 하여 유월절을 준비시킨 것처럼 이번에도 만나를 대신하여 3일 동안 견딜 수 있는 양식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큰 일을 시작하시기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준비하라" "네 의복을 깨끗케 하라" "거룩하라"등의 특별한 말씀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3일간의 양식은 무엇일까? 나에게 준비시키는 양식은 무엇일까? 요단을 건너기 위해 준비해야할 양식은 무엇인가? 양식은 매일같이 동행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별한 일을 위해 예비하신 특별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주신 것이지만 특별히 나에게 주신 말씀이 곧 레마, 나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때에 준비된 말씀이 있습니다. 깨어있는 자,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을 수 있는 그 말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3일을 견딜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2. 가서 그들을 도우라 

르우벤, 갓 지파, 므낫세 반지파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 동편의 땅에 정착한 민족이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옵니다. 

(민 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

(민 32:5)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많은 가축 떼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똑같이 광야 생활 가운데 이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은 농경문화가 발달하여 농사 짓는 땅이요, 자기들은 가축을 가꾸어야 하기 때문에 요단 동편의 땅이 좋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대신 이곳에 남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보다 자기가 지금 가진 것, 자기 환경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어찌보면 합리적이고 그들 보기에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끌고 있는 모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각자 자기 보기에 좋은 곳에 남고자 하면 결국 남는 것은 힘없는 자, 다른 계획과 소망이 없는 자들만 남는 것입니다. 


모세가 불같이 화를 냅니다. 

(민 32: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민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모세는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그들이 합리적인 생각, 자기 중심적이 생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다 준지를 상기시킵니다. (8절~14절) 

40인의 정탐꾼을 보내었을 때에 그들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을까? 

그 근본적인 원인이 가축이 너무 많아 그 땅 자체를 원하지 않은 것을 밝혀냅니다. 그들은 가축을 키울 땅을 구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 자체를 반대한 것입니다. 


분노하는 모세에게 이들은 약속합니다. 

[민 32:16-민 32:19]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이들이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2장에 보면 이들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켜서 여호수아와 다른 족속들의 칭송을 받으며 당당하게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가나안 땅 밖에서 머물면서 그들의 왕국을 이루고자 했던 그들은 결국 그들의 분리된 예배처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다가 우상숭배를 통해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합니다. 

왜 이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인도하시는 가나안 땅에 가려고 하지 않고 요단 동편에 머무르려 합니까? 

가축이 너무 많아서입니다. 

광야의 삶 속에서 남들보다 가축이 많은 고로 가나안의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광야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땅에서의 축복을 따르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단 동편을 선택한 세 족속에게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약속한 대로 네 형제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너희들이 먼저 가서 도우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 땅의 복을 사모하는 자들과 영원한 복을 사모하는 이들이 섞여 있습니다. 

리더자는 이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땅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순종하라. (16-18절) 

무엇을 말하던지 들을 것이요, 어디를 가라 하던지 가겠나이다.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순종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그들의 말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순종에는 교만함과 어리석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17절)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의 영어 번역은 "Just as we fully obeyed Moses, so we obey you" 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기를 fully하게, 온전히, 완전히, 넘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평하고 원망했으며 모세를 죽이고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순종한 것 만큼만 당신에게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전제가 있습니다. "Only may the Lord your God be with you as he was with Moses" 

오직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들을 애굽에서 부터 인도하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할 때에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광야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순종 서약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서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하신 말씀과 이들의 입술을 통해 들리는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는 같은 말이지만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든 결국 여호수아에게 요구하는 것은 강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승리요 이스라엘의 승리요, 바로 우리의 승리인 것입니다. 



질문) 

1. 난 하나님의 말씀하신 가나안을 소망하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정, 내 가축들을 위한 땅을 더 원하지 않는가? 

2. 난 공동체를 위해 먼저 가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3. 순종했는가? 순종하는가? 순종 할 것인가? 내 순종의 정도는 어디까지일까?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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