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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17:17-24절 이제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때의 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는 명목상의 하나님 신앙도 다 사라지고 바알과 앗세라, 돈과 쾌락만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던 자였고, 이런 시대는 하나님이 결코 가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를 가지고 혈혈단신으로 아합왕앞에 섭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왕상 17:1)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이 뛰어나고 의기에 찬 엘리야였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시대에 의로운 청년 엘리야를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아합왕에게서 떠나서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지난 주 우리가 나눈 첫 번째 훈련은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었습니다. 

그릿시냇가는 "고립, 분리"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 곳에서 엘리야는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심을 경험하며 자신의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훈련을 합니다. 

그릿 시냇가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의 사르밧 땅으로 보내십니다. 

이 곳은 어디냐? 바로 그 악한 이세벨의 고향이요, 이세벨의 아비였던 엣바알이 통치하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엘리야를 이세벨의 본 고장 사르밧으로 보내어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와 함께 우선순위의 훈련을 합니다. 사르밧은 "용광로, 제련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릿 시냇가가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훈련이었다면 사르밧에서는 그 말씀을 가지고 적용하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를 훈련시키십니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를 통해 떡을 만들어 자녀와 함께 죽고자 헀습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이것이 지난 금요일날 나눈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르밧에서의 훈련 두번째 시간으로 엘리야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사건을 다룹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있어서 과부, 고아, 나그네는 가장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자, 믿음의 사람들이 돌봐야 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로 표현됩니다. 이건 좀 특별하고 영적인 표현 입니다. 


고아는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고, 과부는 남편을 잃은 사람이고, 나그네는 집,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들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돌보라는 율법은 단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선교적인 명령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돌보아 그들이 잃어버린 남편, 아버지, 본향을 회복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만 해석하면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방 땅에 그것도 애 딸린 과부의 집에 유한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그것도 3년간이나 유합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뿐만 아니라 그 지방의 시선으로도 이것은 부정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한 그녀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그 집안의 가장이 되시고, 주인된 하나님의 집으로서 그 사르밧 과부를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사르밧과 엘리야의 만남은 하나님을 믿지만 불완전하던 그들의 신앙이 어떻게 훈련받아 성숙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열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훈련 되지 아니한 엘리야가 비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고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했지만 능력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던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하는 학교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함으로서 우리 또한 엘리야가 받았던 교육, 사르밧 과부가 체험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17절은 "이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우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을 위하여, 그 다음 너를 위하여 하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약속을 성취한 후입니다. 한 줌의 가루, 기름 조금이던 그녀가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먼저 심었더니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체험한 후입니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 중에 일어날 적에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확실한 믿음이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참으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늘 내 것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것을 나중에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백만 있고 체험이 없습니다. 생각만 있고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순종에서 나오고 순종을 통해서 훈련 받으면 우리 삶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제는 과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편이 되시고 그 집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다음의 구절이 흥미롭습니다. 

"이 집의 주인 되는 여인"이라 이 과부를 표현합니다. 기름 조금, 가루 한 웅큼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가난한 여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마땅히 그 집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할 공간에 여전히 주인은 그 여인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 삼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자기가 주인된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릅니다. 죽음을 앞둔 여인처럼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와서 부르짖습니다. 도와 달라고 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이루어지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감사헌금 한 번 드리면 그만입니다. 그 다음 삶은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문을 열라 하시는데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다락방 구석에 몰아 놓고 자기가 또 주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언제까지?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기까지 자기가 주인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고가 나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 증세가 점점 위중하다가 결국 숨이 끊어졌다고 표현합니다. 병이 들어도 엘리야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증세가 악화 되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 영이 죽고, 병들어도 깨닫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자기 집에 머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를 찾지도 않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진 뒤에야 비로서 엘리야에게 나옵니다. 나와서 하는 말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7절) 


1. 바알과 앗세라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었던 여인이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왜 나를 귀찮게 하느냐? 나를 왜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느냐? 왜 자꾸 간섭하느냐? 

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사람의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샤머니즘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샤머니즘은 뭡니까? 

문제가 일어나면 찾아갑니다. 빌고 굿하고 부적 부치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끝나면 돈주고 그만 딱입니다. 더 이상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맘대로 살다가 또 문제 터지면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함께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동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이 내 남편이요, 내 아버지요, 내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에야 안전하고 완전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머니즘에 젖어 있는 우리 신앙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엘리야를 다락방에 가두어 두고 대화 하지 않듯이 주를 영접하고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 죽을 때까지, 문제가 터질 때까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앞에 비로서 자기의 죄를 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죄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깨닫는 것이 회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리고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나가 심문 당하는 것을 보니 자기의 잘못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뉘우쳤다" "후회했다"고 표현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달았으면 주님 앞에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돌이켜야 하는데 사람이 미련한 게 잘못을 알았어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개합니다. 탓을 하고 변명을 하고 오히려 성을 냅니다. 

인정해야 할 때에 숨기고 회개해야 할 때에 성냅니다. 

그런데 일찍 회개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3.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엘리야가 오기 전에 그 여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2절)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면 벌써 죽었을 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너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굽에 종살이가 힘들어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출애굽기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출애굽 시켜서 광야로 보냈는데 당장 물이 없다고 백성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우리를 나오게 했습니까? 거기서는 우리가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부족함이 없이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이 오고 위기가 오면 우리는 하나님 탓을 합니다. "잘되면 내 덕, 안되면 하나님 탓."

성경에 어디 예수 믿으면 고난이 없을 것이다. 위기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죽을 지경이 되도록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이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가 되는 것은 엘리야의 반응입니다. 

여인의 항변에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게 왜 하나님 잘못이냐? 네가 잘못하지 않았느냐? 왜 이제 왔느냐?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 했느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텐데 그냥 여인의 분노를, 하소연을, 원망을, 묵묵히 듣고 참습니다. 

여인과 똑같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 지킨 것이고 아들은 다른 문제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하며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인들이 십자가로 몰려 들어 침을 뱉고, 욕을 하며, 빈정대고, 소리칩니다. 

옷을 찢고,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하늘 가는 마지막 길에 주님이 하신 기도는 "주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데반도 그렇고 바울도 그렇고 모세도 그랬습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랬습니다. 

저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들이 몰라서 그렇다고 변호합니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요? 하나님 잘못한 것 알지만 저들의 편에서 생각해 주세요. 


은혜 주신 하나님께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죄하고 싶고, 꾸짖고 싶고,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보면 어처구니가 없고, 애굽이 훨씬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 보면 그럼 애굽으로 가서 실컷 먹고 살아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가 나서 저 사람 어떻게 저래요? 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광야 생활하면서 피곤한 그들의 모습, 만나를 먹으며 지겨워 하는 모습, 광야 가운데서 불기둥 구름기둥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고 그 연약함을 위해 울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고통을 알았습니다. 그녀에게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를 잃은 아픔이 얼마나 컸을지, 묵묵히 그녀의 아픔을 자기 품에 앉고 자기의 기도처소로 옮니다. 

여인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품에 가득 안고 자기 침소에 가지고 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여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인의 편에서 하나님께 변호합니다. 

이것이 근데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죄인을 구하는데, 죄인의 편에서 죄인을 이해하며 그들의 아픔을 안타까지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고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습니다 .

"주께서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주님, 이 집의 주인은 당신이십니다. 나를 이곳에 보내심은 하나님께서 이곳의 주인이 되심이 아니십니까? 

주인 잃은 여인의 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여인이 마음으로 "왜 재앙을 내리셨습니까?" 

여인의 언어로서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시체는 부정한 것입니다. 시체에는 근처에도 가면 안됩니다. 

일단 죽은 시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시체를 자기 품에 안았습니다. 그 시체를 자기 침상에 누이고 자기가 그 위에 엎드립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이전에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를 행한 적이 없습니다.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자 앞에 두고 기도할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살리시려면 진작 했겠지 여기까지 오게 하셨을까? 

어차피 우리는 영생을 얻었으니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지 그런거 기도해서 "하나님도 부담, 나도 부담, 괜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식이 죽어도 그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살려달라고 간절히 시체를 앞에 두고서라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기도 하는 사람,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포기도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에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분명하기에 자기 뜻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아직 포기하라는 응답이 없으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전례가 없는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그의 기도가 오히려 수넴여인이 아들을 살리는 엘리사의 기도,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앞서는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영혼이 돌아올 때까지 세번씩이나 그 몸에 엎드려서 자기의 목숨을 건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냥 정도껏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자는 문제있는 자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는 것입니다. 짊어지고 주님앞에 나와서 그 짐을 옮겨드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자기가 그 문제을 안고서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만 대언하면 됩니다. 남의 문제를 내가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 담대하게 선포하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많은 영적인 리더들이, 설교자만 되려고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자된 삶, 참된 목자는 형제 자매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내 양을 치라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설교자는 신학교 나오면 될 수 있지만 목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자가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목사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목자는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저 또한 목사라는 이름보다 목자라는 이름이 훨씬 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서로의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영적인 목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문제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앞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기도를 시키시기 전, 한 여인의 문제를 위해 목숨을 건 기도를 시키셨습니다. 

이 기도의 훈련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갈멜산에서의 영적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이를 안고 내려오는 엘리야와 아이를 건네 준 사르밧 과부가 마주칩니다.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그 이전에는 안믿었을까요? 

아니요 그 이전에도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믿음이 단지 지식적인 믿음이었다면 이젠 온 몸으로 체험된 믿음이고 삶으로 고백된 믿음입니다. 

이제 여인은 온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

엘리야는 이제 사르밧 신학교를 마칩니다. 디셉 사람 이름없는 무명의 사람에서 이젠 하나님의 선지자로 공인됩니다. 자기 스스로 인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동역자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심젇을 가진 자, 죄짐 맡은 자,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이 아닌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서로의 짐을 짊어질 수 있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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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1.20 13:06

    목사님... 바쁘신가보네요 ㅜㅜ

왕상 17장 8-16절   악의 가장 중심에서 



아합과 이세벨 여왕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부흥과 함께 영적인 타락이 오게 됩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축출되고 그 자리에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이 음란한 제사를 드리면 예루살렘 성전을 변질시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홀연히 일어난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가문도 지파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한 집안 사람 무명의 선지자가 엘리야 입니다. 

그 이전이 모세나 다윗의 집과는 근본 태생이 다른 선지자입니다. 

그가 감히 아합왕 앞에 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는 열정으로 가득한 선지자였습니다. 자기말대로 그는 열심이 특심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열심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열정은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훈련되지 아니한 이 엘리야를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훈련시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17장의 첫 절은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 절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그릿 시냇가와 오늘 나눌 사르밧 신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18장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950명과 1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적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은 철저히 엘리야를 주위로부터 고립시키며 홀로 되는 훈련을 시킵니다. 열정이 가득한 자에게 홀로되는 훈련은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릿 시냇가가 마를 때까지 엘리야에게 홀로되는 훈련, 매일 같이 까마귀로부터 공급받는 만나의 훈련기도의 훈련을 시키십니다. 

열정에 훈련이 더해질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아무리 헌신된 열정이 있어도 훈련받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그릿시냇가가 말랐다"

사르밧의 훈련은 이제 홀로 하나님과 고립과 기근을 통해 대면하던 그릿 시냇가의 시기가 끝났을 때에 시작됩니다. 

그릿 시냇가의 훈련이 끝이 납니다. 신학교 1학년이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제 훈련이 끝났을까? 아니 이제 정말 제대로 된 2학년 생활을 시작합니다. 사르밧의 의미는 "용광로, 제련"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욥 23: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에서 말한 대로 정금이 되기 위해 용광로로 들여보내십니다. 


9절에 등장하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 어디인가? 

(왕상 16:3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시돈은 이스라엘에 죄악을 가져다 준 이세벨의 고향이고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이 통치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세벨을 정복하기 전에 엘리야를 이세벨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해서 그 땅을, 그 땅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의 왕궁에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애굽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군대장관의 가정 총리로, 감옥의 총무로 훈련시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의 시대를 정복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악의 중심지에서 엘리야를 강하게 훈련시키십니다.  


그 가기 싫은 땅,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지는 그 땅에서 하나님은 한 과부를 만나게 하십니다. 왜 하필이면 그토록 가난한 과부일까?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사르밧 과부의 헌신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읽고 들었습니다. 

없는 중에 하나님께 헌신한 과부의 헌금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곳에 보내셨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눅 4:24)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예수님께서 고향 땅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 당하자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예를 드신 것이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사르밧땅 과부를 택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 땅 문등병자가 아니라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치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믿음을 찾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사르밧 과부에게서, 나아만에게서 참 믿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세벨의 고향, 바알의 땅에서 살고 있는 이름 없는 가난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었던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왕상 17:11)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왕상 17:12)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물질을 섬기고 성공을 섬기고 권력을 쫓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선 엘리야의 출사표는 무엇입니까? 

17장 1절을 다시 읽어볼까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2절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대에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심을 믿는 두 명의 믿음의 사람을 만나 동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단지 선지자 엘리야가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으려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나에게 그 음식을 줘라' 하는 것을 들으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렇게 무정하신 하나님이냐? 

아무리 복을 주셔도 그렇지 죽으려는 사람 앞에서 그 음식을 가지고 시험하는 하나님이라면 누가 이 시험을 통과하겠는가? 하면서 많은 신앙인들에게 부담감과 절망감,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야로 하여금 사르밧 과부를 만나게 하시고,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를 만나게 하시는가? 

각자의 처소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상황에 얽메이지 않고 믿음 만을 바라면서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 고난의 때를 이기고 훈련 받아 이스라엘과 시돈 땅 사르밧에서 바알과 앗세라를 무너뜨리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이를 해산하지 못하거나 남편이 없는 여인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할 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과부가 되어 자식과 같이 죽으려 하는가? 

이세벨의 신, 바알을 의지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하나님을 바라면서 자원하는 고통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라합처럼 자기 민족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자기 동족의 반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에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이 사르밧에서 바알을 믿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 중심에서 하나님의 만나와 같은 매일 매일 기적과 같은 연명함이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은혜마저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공급함을 받고, 사르밧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던, 영적 죽음의 시대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좁은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이 이제 이세벨의 고향 사르밧에서 기가 막히게 대면한 것입니다. 


(왕상 17: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냥 무작정 헌신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믿음 안에서 보장을 주십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순종 할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약속은 씨앗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듣다가, 기도를 듣다가 약속을 받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것을 성취하고 열매맺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말씀의 씨앗은 믿음의 순종으로 추수하는 것입니다. 


  • 믿음의 순종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먼저하고 무엇을 우선할까?하는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왕상 17:13)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나를 위하여 그 후에 너를 위하여


(마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 하나님께서 언제 믿음을 보십니까? 

정말 급하고 어려운 그런 상황에, 무엇을 먼저 할래? 네것을 먼저하느냐, 하나님의 것을 먼저 하느냐? 


여러분,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훈련을 이기면 정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금같은 믿음이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믿음이 됩니다. 

열성만으로, 열심 만으로 끝나는 믿음이 아니라 열매맺는,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됩니다. 

말만 번드르하고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말과 삶이 함께 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이 능력이 되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다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지요?"

이렇게 말하면서 슬쩍 넘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은 자기 일 우선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사정을 모르셔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시니까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르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2절에 사르밧 과부의 고백은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나는 떡이 없고 다만 기름통에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아주 처절한 고백입니다. 

그냥 있는 떡 주는 것도 어려운 것인데 그걸 가지고 요리까지 해서 주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애썼지만 결국 내 처지가 이렇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 음식을 먹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과 내 처지를 아실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안다. 아니까 두려워 말고 먼저 그 나라를 구해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이라." 

하나님도 그 처지를 아시니까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씨앗은 우리의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 믿음의 행위가 있는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기에 두려워말고 믿어라. 순종해라. 하는 것입니다. 


  •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은 행할 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절대로 말로 인해서 "믿습니다"한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함 없이 보여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행하라 그러면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팽팽히 맞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를 굽히고, 자기 의지를 꺽고 말씀에 순종하면 은혜를 맛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10절의 "물 조금"과 11절의 "떡 한조각"입니다. 

 대단한 것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겨자씨 만한 믿음, 그렇지만 정말 나를 죽일 수 있고 헌신 할 수 있는 땅에 떨어져 죽을 수 있는 작은 씨앗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얽매인 우리는 그것이 전부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사르밧 과부에게 말하고 있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입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사르밧 과부가 아니라 엘리야의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에게 동역자로 주어진 사람이 사르밧 과부입니다. 그는 이방여인이고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이세벨의 고향사람이고 가난하고 율법도 모르는 수준낮은 사람입니다. 길에서 보면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힘든 때에 그녀와 함께 사르밧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그 과부는 엘리야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신 사람,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붙여 주신 사람,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과 함께 동역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옆에 붙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아니 마음 들어 결혼했던 사람도 며칠 지나고 몇 년 지나면 마음에 안들지 않습니까? 

하물며 정말 모르는 사람을 교회에서, 사회에서, 심지어 가정에서 만나 함께 어우러 사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일하도록" "사로 맞추어 나가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난 이 사람 안맞아. 난 이 사람과는 도저히 못하겠어..하는 사람은 결국 난 하나님 하라는 대로는 절대로 못살아. 

난 내맘대로 살거야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내 맘에 들도록 하십니까? 

"먼저 나를 위해 그 다음 너를 위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 함께 신앙 생활 하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동역자구나 하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은 완전합니다. 선합니다. 나보다 지혜로우십니다. 내게 꼭 필요하니까 그런 사람, 그런 장소, 그런 사건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때에 믿음을 보이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결국 신앙 생활은 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아닌 행동으로,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열심만 있던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의 훈련을 통해 이제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갑니다. 

고립과 고독의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왜 고립하게 하십니까? 사람이 고립되기 전까지 하나님을 만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지만 결국 자기 의의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용광로와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연단은 우선순위의 훈련입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중 무슨 일을 할래? 

육신의 일과 영적인 일 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너 자신을 위한 일과 하나님을 위한 일중 무슨 일을 먼저 할래? 


그것을 통해 내 정욕을 끊고, 내 자아의 무거운 성을 무너뜨리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특별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그런데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훈련이 특별합니다 보통 사람 엘리야를 하나님의 특별한 훈련을 통해서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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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서 말씀으로 (왕상 17:1-6절) 


지난 금요일부터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주보의 목회컬럼에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란 제목으로 글을 실었습니다. 

내년도 표어와 주제의 말씀도 엘리야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왕이었습니다. 

북왕국에는 19명의 왕들이 집권을 하게 되는데 이 왕들은 모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왕들을 소개할 때에는 항상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라고 설명합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백성들이 유다왕국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못하도록 벧엘과 단에 따로 예배 처소를 만들어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것도 큰 죄악인데 그들은 산당에 황금송아지를 가져다 놓고 하나님이라 부르며 예배를 드렸고,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을 세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을 소개하면서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린 것이 아니라 황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전이 아닌 그들 마음대로의 장소에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정한 레위인이 아니라 그들이 세운 제사장을 통해 예배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그런 신앙인들을 가리켜 "그들의 신은 배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정작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 실재로는 그들의 배를 부르게 물질을 믿는 것이요, 우상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금송아지는 지금으로 말하면 맘몬신, 돈신, 물질신입니다. 


[왕상 16:30-31]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그런데 아합왕은 형식적으로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예배드리던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악하여 아예 바알 숭배자요, 앗세라신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던 여사제 이세벨과 결혼하여 성전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거나 몰아내고 바알제사장과 앗세라 사제들로 대치하고 아얘 국교를 바알과 앗세라로 바꾸어 버립니다. 이젠 공식적인 물질 숭배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 부르는 엘리야 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대를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심판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엘리야는 부모 이름도 소개 되어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인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길르앗의 우거하면서 디셉사람이라 소개합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도시입니다. 요단 강 동편, 가축이 많은 연고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지 않은 르우벤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머문 곳입니다. 

신앙 보다는 물질을 택한 지파의 땅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자 했던 자가 엘리야 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그가 어떤 연고로 아합왕 앞에 나갔는지 소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등장은 다른 선지자의 등장과 다른 특색이 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전하는 자에게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경우는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먼저 선포하고,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이 2절에 임합니다. 

1절에서 아합에게 선포되는 내용도 다른 선지자의 어조와는 다릅니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만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이 아니라 "내 말"입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자기의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전에도, 나라에도, 곳곳에 바알과 앗세라의 기복신앙, 쾌락 신앙, 세속 신앙이 가득하던 때

풍요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인생의 즐거움이 예배를 대신하던 때

엘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이런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이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고 분노하며 아합왕에게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제 내 말이 있으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내 말이 떨어지면 

"너희의 복이 끝날 것이다. 이제 복에 겨워 오만방자하게 예배하는 자,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하는 너희들이 복이 끊어질 것이다"고 우렁차게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믿음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기 보다는 신념입니다.  

신념은 때로 강한 용기로 나타나지만 능력이 없고 보장이 없습니다.  


그 말을 하자 여호와의 말씀이 비로서 임합니다. 타락한 세대에 분노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로서 엘리야에게 임한 것입니다.  


"숨어라. 내가 널 먹이겠다." (왕상 17:3-4절) 


무슨 말씀입니까? 이젠 내가 널 훈련시키겠다. 양육하겠다. 널 진짜 선지자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널 훈련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열성가득한 모세처럼, 호기 충만한 모세가 애굽 군사 하나를 죽이고 광야로 도망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듯이

감히 아합왕 앞에 나가 호기 어리게 선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숨기시고 그 때부터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 그릿이라는 말은 '고립시키다, 잘라내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를 철저히 아합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시키면서 장차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자로 가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릿시냇가에서 세상과 다른 우상, 잘못된 가치관과 삶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잘라내어 하나님 앞에서 홀로되는 훈련, 기다리는 훈련, 그리고 낮아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은혜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에 날라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그릿 시냇가의 물을 마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것처럼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삽니다.


그것이 얼마동안이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7절에 보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즉 그 시내가 마를 때까지 그릿 시냇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릿 시내가 마를 때까지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날라주는 것을 먹는 삶. 


어떤 목사님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뭄으로 고난 받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가뭄 중에서도 떡과 고기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날인지 모를 날들을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숨어 있는 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쉽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광야 가운데서 만나를 먹으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합왕이 나타내는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 없이 자기를 위하여 쌓아두고 모아두어 항상 풍족함을 누리는 삶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삶, 풍족하여서 걱정할 필요가 없고 언제나 든든함을 느낄 수 있는 삶을 바라고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바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앗세라를 믿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삶, 쾌락적인 삶을 따릅니다. 그리고 여리고성을 건축함으로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다시 쌓는 자들에게는 맏아들과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입니까? 그들의 풍요로움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흥한 것 같지만 그 풍요로움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냥 방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 생활이나 오늘 엘리야의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그분이 주시는 대로, 그 분이 공급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목마름이 없지만 넘치지도 않습니다. 아니 하루 하루 아침과 저녁 한 시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간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달이 나고 조급해지며,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고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댄 삶입니다. 


왜 이런 시간들이 필요합니까? 역시 인간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 광야와 같은 그릿 시내와 같은 인내의 시간, 고독의 시간,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까? 그런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대를 비판하고 교회와 성직자와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합니다. 이래서는 안됀다고 너도 나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본인들도 그러한 시대의 일부분이 되어 갑니다. 시대가 변했으니 어쩔수 없다고 타협하고 변명하고 굴복합니다. 

죄를 미워하지만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격리시켜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홀로 만드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만날 사람도 의지할 사람도 없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분을 의지하지만 늘 부족한 것 같고 모자란 것 같은 시간에 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 홀로된 시간을 통해 우리는 고독하지만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비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게 하기 전 40년 동안을 홀로 미디안 광야에 머물게 하십니다. 요셉이 애굽을 다스리기전 홀로 감옥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게 합니다. 

함께 하기 위해 홀로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이 가장 조화있게 사신 삶의 모델을 보여 줍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내가 살아왔던 잘못된 습관,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거룩함입니다. 성결입니다. 

때로 풍요로움이 우리를 게으르고 방탕하게 한다면 고독은 우리를 근면하고 성실하며 성결하게 합니다. 

그릿 시냇가의 삶은 하루 하루 사는 삶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뜨겁게 기도한 다음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만나시길 원합니다. 

날마다 만나지 않으면 또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그릿시냇가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장소입니다. 

까마귀가 날라준 음식은 진수성찬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만 이스라엘 에서도 죽은 음식만 먹은 꺼름직한 새였습니다. 그 새가 날라준 것을 날마다 먹는 다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왜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왔습니까? 

자신의 기도 때문이고 자신의 선택때문입니다. 


(약 5: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그는 하나님이 없이 풍족함을 누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 안타까이 분노하며 하나님께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 자기 자신도 물이 마르게 되는 고통을 감수했습니다. 

축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서라도 간절히 회개를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풍요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잊어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풍요로움을 포기하고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자신의 기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육신이 의지하고 있는 시내가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엘리야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라가는 시내를 보면서 자신의 객기어린 선포를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숨기시고 훈련시키시며 연단하셔서 그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 

아합왕을, 아합왕이 꿈꾸는 세상을, 아합왕을 움직여서 바알과 아세라의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세벨의 세계를 무너뜨리게 하십니다. 


때로 우리 인생의 부족함, 모자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자랄 때에 하나님이 손길을 더욱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항상 모자람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앗습니다. 그들이 굶지 않았고 신발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왜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풍성함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가? 왜 가나안 전에 광야생활을, 갈멜산 전투 이전에 그릿 시냇가에 머물게 하실까? 

그 시간과 그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왕상 17:2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이름 없던 촌 사람 디셉사람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와 다음 시간에 나눌 사렙다에서의 삶을 통해 디셉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명칭이 바뀝니다. 

단지 열정있는 호기 어린 신앙인에서 그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신앙인으로 변합니다. 


작년도 표어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말씀을 교회 표어로 삼은 교회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2017년도를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게, 저와 우리 성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정말 그릿 시냇가의 삶처럼, 때로 고독하게, 고립시키고, 외로움에 내려두고, 하늘의 도움밖에 의지할 것이 없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동안 다른 어느 때보다 말씀을 가까이 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첫 학기는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을, 이번 학기에는 모세 오경을 비롯한 구약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게 하시고, 성도들과는 매일 같이 큐티 훈련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신념의 신앙에서 말씀의 신앙으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내년의 표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그릿 시냇가의 삶을 잘 이겨오게 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식의 신앙, 자기 신념의 신앙에서 이젠 말씀 중심의 신앙, 순종의 신앙, 훈련의 신앙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남은 엘리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시면서 내년 한 해, 엘리야가 경험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소원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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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10.30 10:29

    아멘 ~~~

엘리야의 등장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왕은 누구일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합왕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말들을 합니다. 

대부분 악한 왕들이 행한 것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는 이른 바 산당 예배를 드리며 우상을 겸하여 섬겼습니다. 


(왕상 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 여로보암의 죄: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못하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가져다 두고 그것에게 경배하게 한 죄.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아 자기들 마음대로 예배드리게 된 죄. 거짓 예배. 


그러나 아합왕 때에는 완전히 하나님 믿는 믿음에서 떠나 바알과 앗세라를 섬기던 무당과도 같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과 하나님의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로 성전을 점령하게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과 아세라의 신전, 그들을 위한 제단. 

이세벨- 엣바알의 딸, 바알은 고상하다는 뜻 


또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여리고성을 짓지 말라고 하셨는데 아합왕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짓지 말라는 여리고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은 바벨탑과도 같은 자기 자아의 성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문을 완전히 닫고 자기로만 가득찬 성이 여리고성입니다. 아합왕은 바알선지자를 아내삼아 자기 사랑으로 가득찬 성을 짓고 자기 사랑, 우상 숭배로 무장한 이스라엘 역대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왜 바알과 아세라신을 섬겼을까? 

그것은 영적인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농사를 풍요롭게 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짓고, 이른 바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땅의 신을 섬겨야 한다는 세속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가 하나님만을 믿는 유일신 신앙을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일반적인 역사로 볼때 아합왕때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풍요를 누리고 도시의 확장과 화려한 건축물들이 세워지게 되는 풍요을 누리게 됩니다. 


솔로몬의 때, 이를 이은 여로보암의 때, 모두 이스라엘의 경제적 번영기였다는 것을 살펴보면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반드시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타락했던 때,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 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여기는 엘리야는 바로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왕때에 하나님이 세운 자입니다. 

1절에 보면 길르앗에 우거하는 디셉사람 엘리야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다른 인물들과 다른 소개입니다. 

대부분 인물들을 소개할 때에 그의 부모가 누군지, 누구의 자손인지를 통해서 그의 인물을 짐작케 합니다. 

더군다나 열왕기상하는 왕들의 족보입니다. 어느 집안 사람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부모가 누군지, 심지어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 사람인지조차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디셉이라는 지명조차 지금은 사라지고 어느 지역인지 역사적으로 고증이 되지 않은 지명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남겨준 힌트- 길르앗- 요단 동편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아니한 자- 왜? 그들의 가축이 많아서... 결국 가장 먼저 멸망당하는 자....그 땅에 우거하는 한 사람- 엘리야. 


이름 없는 집안 이름없는 태생의 한 선지자가 가장 악한 왕의 때에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선택된 것입니다. 


(왕상 17:1)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아합이 거짓 예배로 판치던 때에 참 하나님을 예배했던 자. - 엘리야 


이 때의 엘리야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하겠습니까? 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차라리 하나님 못믿어서 백성들이 힘들고 어려우면 회개를 촉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에게 너희들 지금 잘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분노하신다 하면 콧웃음을 칩니다. 

더군다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도 없고 겉보기에도 투박한 사람이 외치는 소리는 미친 사람의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 아합과 이세벨을 심판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고, 천재지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무명의 한 사람, 그것도 죄악의 땅에서 출생한 한 예배자를 택해서 그를 아합왕과 맞서게 하신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하나님은 지금도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기도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시대의 아픔을 느끼며 말씀으로 맞서고자 하는 한 사람을 택하신다. 


엘리야는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에 용기를 준 인물이다. 그는 신념도 있었고 광야를 걸었으며, 탈진도 경험하고, 때로 교만하기도, 외로운 삶을 살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평범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하나님은 그가 가장 힘들 때에 그를 책망하거나 탓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에게 찾아와 음식을 먹이신 예수님처럼 로뎀나무가운데 그를 어루만저 주셨다. 


그는 외로움을 벗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세상과 맞설수 있는 용기 있는 자였다. 그는 바알과 앗세라 950명과 맞서는 용기있는 자였는가 하면 이세벨 여왕의 한 소리에 기가 질려 도망하는 연약한 자이기도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엘리야의 삶을 통해 내년도 표어와 말씀을 받을 수 있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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