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19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  
  •  

더 깊은 묵상을 위하여

1. 꿈의 해석

창세기에는 세 번에 걸쳐 꿈을 다루는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첫 번째는 요셉을 형들에게 팔리기 전에 집에서 자기의 꿈을 형제들과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어리석으리만치 요셉은 형들이 그 꿈을 듣고 화를 낼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자기의 꿈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꿈의 해석이 없다. 단지 자기가 본 꿈을 그대로 이야기 한다.

 

두 번째는 40장의 술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이다. 이 때에 비로서 요셉은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렇지만 이 때의 꿈의 해석은 한 명은 죽고 다른 한 명은 살리라는 객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왜 안좋은 꿈을 보여 주실까? 그것은 안 좋은 일에 미리 대비케 하심이 아닌가? 그렇지만 요셉은 죽음을 앞 둔 떡굽는 자에게 아무런 대응책이나 피할 길을 가리켜주지 않는다.

 

세 번째는 바로의 꿈을 해석할 때이다. 앞 선 두 번의 장면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이 바로 꿈의 내용을 해석한 후에 구체적인 대비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비책 없는 이 꿈은 흉몽이다. 흉년이 풍년을 삼키고 싸그리 황폐화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요셉은 꿈을 통해 바로에게 이것을 극복할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바로 본인에 의해 실행해 나간다.

이것은 요셉이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단지 꿈이라는 대상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성숙이다.

 

2. 애굽의 총리가 되다.

이제 흐틀어진 요셉의 인생의 퍼즐이 올바르게 꾀어 맞추어졌다.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감옥의 총무로 노예로서 행했던 모든 고난은 애굽을 통치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었고 연습이었다. 고난을 통해 요셉을 애굽의 모든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고 가정을, 기관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습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 어떤 한 부분도 의미없이 주지 않으신다. 모든 고난에는 그 분의 뜻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묵상을 위하여)

1. "형통"의 의미

지금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옵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집에 가정 총무로 일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주인에게 인정받아 그 가정이 복을 받게 되지만, 그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대가로 이제는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갖히게 됩니다.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만사 형통"이라는 말을 씁니다. 모든 일이 뻥하고 뚫려 있듯이 평탄대로를 달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요셉의 삶의 여정을 보면 만사가 형통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지금 보디발의 집에 매여 있는 종이고 더욱이 후반에 감옥에 갇힌 죄수입니다. 사방이 막혀있는 형국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39장에서 두 번이나 걸쳐서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부릅니다. 그럼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형통의 의미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형통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 다른 개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우리 또한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은 사방이 막혀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있고, 환경이 아무리 나빠져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흔들리지 않을 때에 형통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무슨 고난에서도 하나님과의 통로가 열려있는 것. 그것이 형통입니다.

 

2. 죄를 이긴 요셉.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는 요셉의 모습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아담의 모습과 대조되어 죄를 극복하는 성도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9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네임이라. -> 동산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10절)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닣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한지라. -> 사탄의 유혹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지요. 반복적, 지속적으로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공략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마치 열번 찍어 안넘어가는 나무 없더라는 속담처럼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죄를 피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상대하지 않고 함께 있지 아니한 것이지요. 죄의 유혹이 있는 공간 자체를 피하는 것입니다.

17절)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 마치 아담이 하와에게 죄를 전가하고 하와가 뱀에게 전가하는 것처럼 죄의 특성은 변명하고 전가하는 것입니다. 의인의 방법은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지요. 죄의 결과 이젠 요셉이 아닌 보디발의 아내가 죄를 전가하고 변명하는 죄인의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창세기 37장

7장의 묵상의 주제는 편애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의 두 정식 아내 외에도 빌하와 실바라는 첩까지 모두 네명에게서 난 11명 (나중에 베냐민 이후로 12명)의 자녀들이 때로는 자기의 친모가 아닌 다른 어머니들과 혼음을 하기도 하는 장면(서로 희롱하였다는 말, 더불어 함께 있었다는 말은 성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이 나오기도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눈에 띄게 편애하여 오히려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했고, 요셉은 자중하지 못하고 야곱에게 형제들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곤 합니다.

가정의 갈등이 고조에 이르러 터진 사건이 형제들이 요셉을 파는 사건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지만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은 항상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이 본문에서 모든 갈등의 권인을 제공하는 말은 3절의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라는 구절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얍복강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로 바뀌었지만 성경은 여전히 야곱의 이름을 더 선호합니다. 이스라엘로 표현된 구절은 몇 구절 되지 않지요. 37절의 다른 부분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야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하필 요셉을 더 사랑하였다는 말에서는"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분명 그러한 편애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쉽게 우리는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결론을 내리지만 하나님의 편애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하나님도 편애하시나요?

네, 성경에는 하나님의 편애의 장면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아브람을 택하시며 따라나선 롯은 끝끝내 헤어지게 하시는 주님, 아벨, 야곱, 요셉, 다윗, 베드로와 요한,,,,무엇보다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

 

그러나 편애를 인정하는 신학자들이라 하더라도 대체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편애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편애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자기 마음에 꼭 드는, 그리고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들을 편애합니다. 결국은 편애도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편애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편애는 주로 약자를 향합니다. 편애가 나타나는 부분은 장자 보단 둘째, 혹은 막내, 이스라엘 사람보다는 이방인, 남자보다는 여인들에게서 하나님의 편애가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약자에 대한 편애 이면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사명을 부어 주십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여 은혜 속에서 그들을 성장시킨 뒤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통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또 다른 약자들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 현장에서 잘못된 우리의 편애가 갈등과 혼란을 유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약자들을 사랑하되 그 편애가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행동과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편애"라는 말이 특히 오늘 가슴을 찔리게 하고 아프게 하는 날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제목 : 고난 중에 예비되는 다윗의 왕국

본문 : 삼상 22 : 1 - 5

[삼상 22:1-삼상 22:5]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예전에 주일 저녁 다큐멘터리 <성공시대>를 가끔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TV에 실린 그들의 공통된 모습은 그들의 어려운 고난을 극복하고 인생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착각하기 쉬운 잘못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극히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 모두는 인생에 있어서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힘든 고난을 겪으면서 그것을 이기므로 신앙의 성공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 나누었던 다윗의 인생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골리앗을 무찌른 후 사울은 그를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으로 세웠습니다. 그때 다윗의 나이 17세 때였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이제 열려있었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이 될 때까지 가파른 상승 곡선이 이어질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않는 시험이 다윗에게 몰려옵니다. 자신 보다 백성들에게 더욱 칭송 받는 다윗을 보고 왕인 사울이 시기를 하고 핍박을 하고 급기야 죽이려고 다윗을 쫓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대 장관에서 쫓겨나서 천부장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에는 모든 자리를 버리고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본문은 첫 번째로 블레셋에 도망하여 미친척하여 가까스로 위험을 넘긴 다윗이 다시 아굴람 굴이라는 곳으로 숨는 장면입니다. 신비한 것은 자기 목숨도 부지 못하는 다윗에게 그의 가족들이며 또한 원통하고 환란당하고 빚진 자들이 다 그에게 모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쫓기는 몸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들을 감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고난에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남을 돌아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자신의 문제도 감당하지 못하고 숨으려 할 때 자신이 부담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닥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쫓기는 다윗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그에게 더욱 위험스런 일이었고 부담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모여드는 이런 일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돌려보내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책무를 다했고 그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은 10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갔고 또한 위험을 극복하고 그들의 신앙을 더욱 넓혀 갔습니다. 삼하 23장에는 아굴람굴에서부터 같이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장수가 되고 기둥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부담만을 안기어주었던 사람들이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그런 왕국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다윗이 모압 땅에 자신의 부모를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어려움 중에도 자신의 가족들을 위한 책임을 다하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다윗의 가장으로서의 행동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환란을 당하면 내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의 여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협조와 이해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환란 중에 가족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려 했고 오히려 시간을 내어 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환란 중에도 자신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자 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라는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 모를 그런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5절을 보면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하는 말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다윗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운 길로 그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긴 아굴람 굴에서 나와 사울이 있는 유다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피하지 말고 위험에 정면대결하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작 어려움이 닥치면 맞딱뜨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나약하게 숨어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할 터이니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망설이지 않고 갓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다윗은 실재의 역사적 인물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교훈으로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도 추스르기 힘든 어려운 환란 중에 다른 인생들을 돌보았고 또한 가족에게 책임을 대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성도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교회를 돕고 소외된 자를 돕고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된 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중에 순종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빚진 자, 환란당한 자, 원통한 자로 모인 400인의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훈련받고 하나님 나라의 기둥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로소스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어떤 상황에도 요동치 않고 폭풍 속에서도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가고 훈련받아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려움 중에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맡겨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우리 로고스 모든 식구들이 다윗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는 일꾼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2.12.06 10:32 신고

    로고스를 묵상하고....
    로고스를 따르고.....
    로고스로 사랑합니다....

    로고스이신 그분을 향해...
    그 분 곁으로 한 걸음 내딛습니다....
    지금 이 순간....

    로고스가 내 안에... 내가 로고스 안에 ... 머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