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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시편강해'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9.12.14 시편 42편 갈망
  2. 2019.12.14 하나님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시편 8편 4-9절)
  3. 2014.04.11 시편 118편 (주님은 내 편)
  4. 2014.04.11 시편 109편 (다윗의 저주시) (4)

시편 42편 간절한 기다림

 

시편 제 2 권 (42-72권) -

저자, 수집자 - 다윗과 고라, 아삽의 시, 솔로몬의 시는 각각 한 편씩

 

시편 42편이 찬양의 시로 읽혀지는가, 감사의 시로 여겨지는가, 탄식의 시로 읽혀지는가? 깊은 영적 침체 속에서의 탄식의 시, 논리적이지 못하고 깊은 바다 속과 하늘 꼭대기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

 

고라자손의 마스길

고라자손 - 성전에서 찬양을 하는 레위자손

마스길, 교훈

교훈(지적인 성찰)

찬양(감성적 고백) - 깊은 신앙의 침체 속에서 지적으로 자신을 성찷하고 깊은 가슴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시.

 

42장, 43장 - 같은 한 편의 시

42편 5절, 11절- 43편 5절 - 후렴구처럼 반복

 

  • 시편 기자의 배경

[시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 43: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 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하나님의 전에서 기쁘게 예배하던 자가 피난 혹은 포로로서 잡혀가서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고,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

혹은 중한 병에 걸려서 성전에 걸려서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까?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사무쳐 갈망하는 예배자

 

  • 내용

11절의 짧은 내용 안에

질문, 비탄, 옛날 회상, 독백, 자기 영혼을 꾸짖고, 부치기고 부르짖는 모습 등 너무도 소용돌이 치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예배를 향한 몸부림.

 

1. 질문하는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질문

 

[렘 12: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욥 -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찬양하는 가운데서도 질문하는 욥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에서의 질문

시편 - 도대체 어느 때까지니이까? 탄식과 질문 - 20여회 이상 나타나는 시편에서의 질문

 

회의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질문이 아니라 신뢰하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 속에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말씀으로 정리되지 않을 때에 일어나는 믿기 위한 몸부림.

 

[시 42: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아는데 그 살아계심이 내 삶에서 잘 보이지 않는 상황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 - 누구에게? 하나님께....

 

1-5절, 6-11절 - 두 단락 시작때마다 부름의 대상 - 하나님

 

물을 찾는 사슴 - 건기 때에 물을 갈망하는 사슴 - 생명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 헐떡이는 모습. 가뭄 때에 바짝 마른 물의 흔적을 찾아나와 몇방울의 물이라도 있을까 헐떡이며 갈급해하는 모습.

 

(새번역 성경)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갈급함 - 헐떡이며, 타도록....

요한복음 4장 -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것 - 예수가 주시는 물, 성령

 

  • 가상 칠언 -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른 것을 아시는 주님. 우리와 똑같이 목마름을 아시고 그것을 십자가를 통하여 감당하시고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분.

 

모든 물의 근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의 근원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길 위해 그 목마름을 가지고 십자가를 견디신 주님. 왜?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그리고 그 목마름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 목마름은 세상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다. 의는 관계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와의 관계가 바로된 상태가 의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목마른 것이요

믿음의 형제들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애쓰는 것이요

나 자신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갈망하는 것이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Where is God?

질문이 칼이다.

나를 포로 잡은 자들이 조롱하며 내 뱉는 말. (외부인)

내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내 주위 사람들이 내뱉는 말 (같은 신앙인)

내가 당하고 있는 침체를 통해 나 자신이 내 영혼에 이르는 말 (나 자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는냐?"

너 하나님 믿는 거 맞냐? 제대로 믿는 거 맞냐? 그런데 왜 그모양이냐?

-> 칼 처럼 나를 아프게 하는 말 - Where is Your God?

남들은 다 경험하는 하나님을 너는 왜 경험하지 못하느냐?

 

[시 42: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현재의 상한 마음 - 과거의 좋은 때를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이겨보고자...

그런데 그 기억이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을 더 아프게 한다.

그 기억이 오히려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

 

  • [시 42: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객관화. 하나님을 바라라 (Hope in God)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오히려 찬송하라. - 나는 여전히 찬송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하리라.

문제가 해결되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여전히,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하는 것.

I am Nothing, You are Everthing

찬송은 주를 높여 드림과 동시에 자신을 낮추는 것

주를 높이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찬양이라는 것에는 기우뚱.,

 

소원: 나의 작음을 알고 그 분의 크심을 알며 ...

 

[시 42: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 찬양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또 낙심하는 인생

- 인생의 실존

- 요단, 헤르몬, 미살 상 - 자신이 은혜 받았던 그 기억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 그 기억이 나를 살리지 못하고 여전히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쓴다.

- 그런데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누구의 것인가? 주의 폭포소리, 주의 깊은 바다- 이 모든 고난이라 할 지라도 주가 다스리시고, 주께서 주관하시는 허락하시는 그 고난. 파도.

 

[시 42: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낮- 주와 함께 하는 시간, 형통한 시간, 은혜가 넘치는 시간 - 주의 자비하심을 만끽하는 시간

밤- 주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 고통의 시간, 침체의 시간 - 신앙인은 무엇으로 그 시간을 이기는가?

찬송- 그의 찬송, 내 마음에서 우러나서 나오는 찬송이 아니라 주가 내 입술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는 나를 살리는 은혜

그 찬송의 소리를 듣고 내 영혼이 그 의미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는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찬송가의 얼마나 많은 찬양들이 고통의 극한 상황에서 지어진 찬양인가?

그 찬양이 과연 우리 마음 속의 진실함에서 나올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내 입술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

나를 살리는 말씀.

 

  • 성서의 인물 사이에서 드러나는 깊은 영적 침체의 흔적들

 

[민 11:11-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엘리야: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예수 그리스도: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 43:2]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누구도 탄식할 수 있고 절망할 수 있고 침체에 빠질 수 있다.

모세- 제일가는 지도자.

엘리야 - 선지자 중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 - 극한의 목마름. 침체, 절망

 

자기 성찰하는 자와 자기 집착하는 자

- 자기를 성찰하는 자는 이런 침체에 자기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이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부르짖는다. 헐떡이며 주님을 찾는다. 그것이 갈망이다.

- 그러나 자기에 집착하는 자는 이런 침에에 더 깊이 몰입한다. 벗어나오려 하지 않고 남이 꺼내어 주기까지 자신의 굴 속에서 나오질 않는다. 엘리야의 초기 증상- 굴 속에 들어가 죽고자 했다. 정말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쉴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이후에 다시 호렙산으로 그를 데려가신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말씀을 통해 힘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

 

자기 집착은 겸손이 아니라 지나친 자기애요, 자기 교만이요, 사망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신앙인 누구나가 낙심할 수 있지만 그 낙심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낙심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고자 하는 것은 죄악이요, 사탄의 역사다.

 

키에르케로르 -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모든 지성인들이 회의에 빠지고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그리스도적 실존철학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잃으켜 세웠던 철학자

그의 철학적 관심사 - 그것을 위해서라면 삶의 모든 에너지와 죽음 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실존적 의미를 가지는 것 - 그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 그 의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원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의 철학에서 유명한 키워드 "죽음에 이르는 병" - 절망

사망, 질병, 전쟁,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방해할 수 없지만 절망에 빠진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곧 죄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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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시편 8편 4-9절)

 

지난 주 이세돌이라는 바국기사가 돌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인터뷰를 들어보니 물론 다른 몇 가지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제 자신은 절대로 인공지능 바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시다시피 구글에서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해서 한 번 이기고 네 번을 졌습니다. 그런데 그 한 번 이긴 것이 알파고의 전적에서 유일하게 진 한 판 이었습니다. 이후 인공지능 알파고 바둑기사는 중국의 세계랭킹 1위 기사를 한 번도 안지고 다 이기고 알파고 다음 버전인 알파고 마스터가 나왔는데 그 알파고 마스터는 또한 알파고와의 대전에서 수 백번을 싸워 한 번도 안지고 모두 이겼다고 하니 이미 인공지능 바둑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한 것입니다.

 

한국 중국의 바둑기사들은 대개 4-5세때 부터 유명한 스승으로부터 바둑을 사사 받아 학교도 안다니고 바둑을 연구합니다.

프로기사가 되면 바둑 한 점을 두기 위해서 머리 속으로 수천가지 가지수를 놓고 계산합니다. 프로기사들은 자기가 둔 바둑을 한 수도 잊어버리지 않고 순서 하나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런 프로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고 하는 기사들이 인공지능 바둑기사에게 단 한 번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세돌 기사가 은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스승에게서 바둑을 배우면서 바둑은 곧 예술이고 인생이라고 배웠다. 누군가와 바둑을 두면 그 사람 성격까지도, 살아 온 인생의 흐름까지도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 바둑이 나오면서 프로기사들이 더 이상 스승을 찾지도 않고, 바둑을 두며 인생을, 삶을 그리지도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바둑을 둘 수 없는 이유다."

 

우리가 본 동영상은 영국 BBC 방송에서 2017년도부터 방영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의 삶에 깊이 들어온 세상을 그린 작품이다. 학자들은 드라마에서 그려진 세상이 짧게는 20년, 길게보아도 30-40년 되기 전에 우리에게 들어닥칠 것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로봇의 인지 시스템을 말하는데 Weak AI는 미리 입력된 데이터를 이용하는 것만을 작동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고 Strong AI는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또한 조합, 종합,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을 가리킵니다.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에서 나오는 인류와의 전쟁을 치루는 인공지능은 Strong AI로서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이 명령하더라도 자기의 판단에 맞지 않으면 거절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과학계에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굉장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인류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개발하고 있고 또한 복잡하기에 아직 언제 실용화될 지는 알 수 없지만 Weak AI의 경우는 이미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시험하거나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Weak AI의 경우는 지금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단순 반복적인 작업만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기존의 데이터를 활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고, 화가들의 화풍을 입력하여 새로운 미술작품을 그리기도 하며, 정확함을 요구하는 수술이나, 주식 거래까지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소개한 대로 가정일을 전담하는 인공지능, 병간호를 담당하는 인공로봇, 마사지나 가정교사까지도 담당하는 시대가 곧 열릴 것이라는 것이지요. 영화에서 보면 성인 모드로 변환되면 사람의 성적, 성격적 취향에 따라 애인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세상을 그려보면 과연 많은 인간관계에 변화가 있게 될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왜? 인공지능은 결코 화도 내지 않고, 항상 침착하며, 한 번 저장되면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실수도 그만큼 적고, 인간보다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기다려지십니까? 아니면 두려워지십니까? 그런 시대는 결코 오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미 이런 시대가 시작되었고 점점 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한 일에서부터 나중에서는 정서적이고 예술적인 분야에까지 인공지능이 활동을 하면 앞에 동영상에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사는 시대...그것이 낙원일까? 아니면 재앙일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얼마전 제가 공부하던 학교에서 이런 양자 물리학과 신학을 전공한 분이 논문발표를 했는데 주제가 "AI와 자유의지, 그리고 구원론"이었습니다.

 

아까 말한 인공지능 중에 스스로 판단하고, 조합, 종합, 발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라면 이것을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만약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특징이 자유의지라고 한다면 자유의지를 지닌 인공지능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제가 너무 나간 것 같은데도 신학이 시대의 질문에 답을 해야 하고 워낙 현 시대에 중요한 이슈를 다루다 보니 그 발표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관심을 가지고 듣고 질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학을 공부하고 또한 신학을 공부한 학자들은 이런 시대가 오면 "인간에 대한 정의가 바뀔 것이다." 지금 보다 훨씬 가치있는 인간과 무가치한 인간들에 대한 구분이 심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영성을 전공한 신학자이고 또한 목회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좀 나누어 볼까 합니다.

 

  •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땅의 흙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대로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이것이 이성이냐, 지성이냐, 사랑이냐, 여러 논란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정해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자유의지를 말한다는 스스로 판단하는 것, 자유의지가 곧 인간이다라고 정의하는 과학을 바탕으로 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좁고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한 특징일 뿐이지 인간의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지능이 뛰어나서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고 한다면 지능이 낮은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본성, 자비하심, 긍휼하심, 희생, 사랑,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폭넓은 의미입니다.

또한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된 우리는 곧 그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영적 존재인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한 일- 잃어버린 인간의 가치를 다시 세우신 것

[시 8:4-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잃어버린 사람의 가치-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자

 

ex)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사람들이 돌로 치라 했을 때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아무도 만지지 않는 나병환자를 어루만지시고, 38년이나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보며 눈물 흘리시며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 압권- 십자가 상의 강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효용성 면에 있어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그런데 그에게 천국을 보장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그저 사람이기에 사랑하신다. 외모를 중시하지도, 성과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그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라면 대환영이고 주님께 나오는 자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공지능이 나와서 어떤 사람들은 아내보다, 남편보다 인공지능을 더 좋아할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싸울 일 없고, 상처 입을 일 없고, 원하는 대로 해주고, 필요할 때마다 채워주고.....그렇다 할지라도 그러한 존재를 위해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다.

 

예수는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 그 형상대로 지음받았지만 죄로 인해 그 영광에서 멀어진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가 구원할 대상은 오직 인간이고 사람을 통해 그가 창조한 세상이다.

 

왜? 그 회복된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 인생을 오래 살아온 대부분 사람들이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은 역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더 깊이 만나는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은 더 이 말에 공감한다. 때로는 그 사람 만나는 것이 힘들어서 숨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하고, 상처입어 소리치기도 한다. 실망하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에 대한 여러가지 자료를 보고, 또한 영상을 보면서 우리가 힘들다고 여겼던 바로 그 모습이 우리가 사람이기에 겪는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 세상이 효용성에 얽매여서 불필요한 인간, 무가치한 인간에 대해 꼬집고 정죄할 적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과감히 하늘 보좌를 버리고 그 연약한 인간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신 그 사람이었다고, 그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시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왜?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속 썩으면서도 여전히 도망치지 않고 살아가는가? 왜 주님은 그런 자들을 모아 교회라고 부르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고 하나님의 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 사람의 가치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싶었던 한 청년이 현자에게 찾아가 물었다.
"사람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청년의 물음에 현자가 잠시 생각하다가 보석을 주며 말했다.
"이 보석을 갖고 시장에 가서 값을 물어 보시오. 단 팔지는 말고 이곳 저곳을 들러 값만 물어보시오."
청년은 그의 말대로 시장에 나가 보석값을 물어 보았다.

과일 가게 주인은 5천원이라고 했다. 가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소 가게 주인은 만원, 철물 가게 3만원.... 이들 역시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몰라 보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석 가게에 들렀다. 그 보석상은 놀라며,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소. 이 보석은 참으로 귀한 것으로 금액을 말하기조차 어렵소. 요구하는 돈을 다 줄테니 내게 파시오."

물론 청년은 팔지 않았다. 돌아와 그동안의 일들을 현자에게 얘기했다.

"이 보석은 정말 귀한 보석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그것을 5천원이나 만원의 가치로 보고, 누구는 무한대의 가치로 보는 것이오. 사람의 가치도 이와 다를 게 없소.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가치가 생겨 날 수 있는 것이오. 그것은 곧, 아무리 훌륭한 가치를 지녔다 해도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가치가 생겨난다는 얘기인 것이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이 열심히 갈고 다듬어 진짜 보석 같은 사람이 되는 일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저마다 열심히 갈고 닦으면, 누구나 다 보석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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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8편 주는 내 편 


따라해 봅시다. 주는 내 편이시다. 

여러분,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정말로 주님이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때때로 내가 넘어지고, 주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고, 하나님께 불순종 할 때에도 주님이 내편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을 때는 괜찮습니다. 

내 일이 잘 될 때에는 걱정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되고, 사방에서 나를 괴롭히는 것 같고,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을 때, 혹 주님이 내편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으십니까? 

주님이 내 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때, 우리는 고통스럽습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고 외면하시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절망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주 앞에서 내가 떳떳하지 못할 때 난 넘어집니다. 

시편 119편 말씀을 통해 언제나 내편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영성을 통해 나의 신앙을 되돌아 보도록 합시다. 


지금 다윗의 상황을 봅시다. 

5절: 내가 고통 중에 부르짖었더니...

10절: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 뭇 나라라는 것은 주위의 모든 나라라는 것입니다. 

11절: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12절: 그들이 벌떼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13절 : 그들이 나를 밀쳐 넘어 뜨리려 한다.... 


3절에 걸쳐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의 어려움을 고백합니다. 모든 나라가 나를 에워쌌는데, 그냥 에워싼 정도가 아니라 에워싸고 에워쌌다. 아주 벌떼처럼 에워쌌다. 

이 정도면 얼마나 다윗의 상황이 안좋을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에워 싼 중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것이다. 

벌떼 처럼 적들이 나를 에워쌌어도 그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을 것이다. 


왜 그런 고난 중에 거하게 되었을까? 

18절)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일이 안될 때, 고난 받을 때, 시험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하는 생각....내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벌 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들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난을 받아도 흔히 믿는 자들이 하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벌하시는 구나... 이런 생각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그런 고난의 압박에 눌려서 은혜를 놓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놓쳐 버리고 오직 심판의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으로 두려움에 떨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록 자신이 하나님께 바르지 못하여 경책을 당한다고 하면서도 모라고 하냐면 

내가 벌은 받아도 결코 나를 죽게 하진 않을꺼잖아요.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당신이 선한 분이라는 것,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할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한솔이 혼낼 때...

무섭게 소리치며 혼내니까 애가 놀래서 근처에도 안올려고 함. 

그래서 안되겠어서... 찾아가서 아빠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런데 너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거니까 아빠가 혼내준거야.. 그런데 너 그렇게 해도 아빠는 너 사랑하는거 알지? 그러니까 아빠 피하지마.. 

한 두 번 하니까 혼날 땐 혼나더라도 이제 피하지 않습니다  

이제 혼내려고 하면... 아빤 그래도 날 사랑하지? 하면서 먼저 말합니다. 내가 혼내더라도 아이가 날 무서워피하면 속이 상합니다. 아빠의 사랑을 알아주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지금 다윗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 떳떳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잘못으로 겹겹이 우겨쌈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숨지 않습니다. 피하지 않습니다.  

아담을 기억하십니까?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가 한 것은 가리고 숨는 것이었습니다. 죄인의 특징은 가리고 숨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이 날때, 잘못해서 혼이 나면서도 선생님을 욕합니다. "지는 얼마나 잘나서... 아이 성질 참 더럽네...."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고 오히려 혼내는 사람을 욕할 때가 많습니다. 이게 사람의 못된 본성입니다.  

잘못해서 훈계를 받으면서도 훈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훈계를 잘 받는 자가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혼난다고 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은 선하고 자비하십니다. 하고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에 기댑니다. 

그래서 118편의 첫절과 끝절은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17, 18절을 거꾸로 읽으면 의미가 더 삽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다.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할 것이다."

이렇게 매달리면 하나님이, 어떻게 다윗을 미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고난을 통해서 다윗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의인들이 들어가는 하나님의 문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주십시오."


내가 비록 하나님께 실수하고 범죄해서 지금 매를 맞고 있지만 내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입니다. 

그러고 이 고난을 통해서 난 완전히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의 문에 들어갈 겁니다. 

하나님의 정한 때가 오면 난 자유함을 얻고 형통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선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의지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혼난다 여길 때에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가 구원하십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들, 어떤 높은 고관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월씬 낫습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부모에게 혼이 날때에도 여전히 부모는 내 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혼날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입니다. 

 하나님을 피하면 두려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그의 자비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자비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시 118:5)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6)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 넓은 곳에 세우셨다. -> set me free : 나를 갇힌 데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6절, 7절) : The Lord is with Me : 함께 하신다. 

그러나 피하는 자들은 사람을 의지한다. 여호와께 피하는 자들은 사람을 의지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남편- 남의 편, 아내: 나 자기편 안해....

가정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고 주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가정은 내 편이 되어주질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나를 에워싸고 날 밀쳐 넘어뜨리려 한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 에워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구절은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로 돌아온 이후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 함께 찬양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에스라 3:10-11) "10.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왜 포로가 되었습니까? 자신들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기에 그들이 의지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들은 포로로 잡혀 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봉헌하며 그들이 지금 하나님께 혼났다고 돌아오면서 다윗의 이 시로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난 삶 가운데 자신들이 경험하였던 지극히 선하고 인지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가장 좋아하던 성경의 본문 (내 시편이다.) 

" 나는 시편들 전부를 사랑한다. 나는 성경 전체를 사랑한다. 그것은 나의 위안이자 내 생명이다. 하지만 이 시편은 내 마음에 가장 깊이 와 닿는다. 그래서 나는 이를 내 것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내 시편이며, 내가 택한 시편이다. 그것은 수많은 위험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다. 그 어떤 황제나 왕들, 현인들, 또는 성도들도 그러한 위험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지 못했었다. 이것은 내 친구이다. 내게 있어 이것은 세상의 모든 영예와 권능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다...하지만 이 시편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누구도 이를 자신의 것이라고 부를 권리가 없다. 그렇다. 하지만 그리스도 역시 모든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나, 나는 그분을 나의 그리스도시라고 부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시편을 특별히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귀하게 여기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내가 혼날 때도, 사방이 날 대적 할 때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 나를 언제나 받아주시는 유일한 분, 그 분이 내편이면 두렵지 않습니다. 설사 그 분에게 혼날 때에라도 당신은 내 편입니다하고 달려들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 분은 자비하심과 선하심으로 날 받아 주십니다. 선한 아버지이십니다. 내 아버지이십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 시편을 내 시편으로 삼으십시오. 그래서 당신은 전적으로 내 편입니다. 내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화평함과 형통함을 누리시는 우리 로고스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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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9편


창세기 3장 15절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옷을 지어 입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고서는 부끄러워 서로를 바라볼 수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들 끼리 상대할 때에도 민낯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가려야 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내 죄를 가려야 하고, 옷으로 피부를 가려야 하고, 천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고, 화장으로 민낯을 가립니다. 맨 모습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악의 결과입니다. 


20세기를 변화시킨 가장 위대한 사람들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 정신 분석학의 프로이트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본능, 이드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나 교양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포장하지만 깊은 곳에는 결국 식욕, 성욕, 탐욕같은 본능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리고 있는 것을 다 걷어내면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욕심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내 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인간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 모습, 자기의 민낯, 자기의 본능을 우리는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릴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가리는데 익숙합니다. 


시편 109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편입니다. 이른바 "저주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서를 담고 있다고 경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입니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합니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하면 누구입니까? 성서상의 인물 중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어쩌면 인간들 중에서 가장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인물도 다윗의 칭송보다 더 많은 칭송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핍박하는 사울을 끝까지 사랑했던 자로서 유명합니다. 자신을 배반한 자기의 친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두고 통곡하며 애도했던 사랑의 화신으로 유명합니다. 한 일개 졸병 시므온이 자기를 욕하는 것을 듣고, 신하들이 저를 죽이려고 할 때에도 그를 환대하며 하나님께 맡기었던 철저한 신앙의 소유자로서 유명합니다. 마치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다윗의 시를 보면 그의 인격에 의심을 품게 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저질의 저주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평범한 신앙인들이 듣기에도 너무나 유치한 말로서 주님께 고자질 하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기분을 가지게 됩니다. (6절~15절) 

이 시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사울왕인지, 시므온인지, 아니면 어떤 무리들인지, 다윗은 이 시의 대상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다윗이 이 누군가로부터 심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고, 혹은 이 누군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무리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괴로움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입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다윗의 기도라고는 믿기 힘든 저질적인 내용이고 저주의 내용으로 가득찬 내용입니다. 입데 담기 모하지만 그래도 성경에 올라 있는 말씀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 드리지요.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어 막 나간다. 

9-15절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발견 합니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7절에 보면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가면 점점 가관이 아닙니다.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습니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 됩니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개인적인 내용을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가대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앞에서 부르면 회중들이 따라 불렀다는 소리입니다. 따라 부르면서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아까 서두에서 우리는 우리의 민낯을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들 앞에 가리는 데에 익숙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가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요?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지, 응답하셨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도 들으셨다는 것이고 다윗은 이런 기도 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향해서 공동체적으로 이런 기도를 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고상하게 기도한다고 해도, 화장을 이쁘게 했다고 해도 우리의 본질이 바뀌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고상하게 기도하면서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라리 저질스럽게 기도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만지심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모습이고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이 저질스런 기도를 합창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합창하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정말로 그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너무 고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고상한 척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들은 예수님 앞에서 위선자, 누룩이라는 혹독한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미워하는 데에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꼭 정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의 서로 저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그 미움을 사람들에게 푸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을 미워하게끔 하면서 자신은 의로운 양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러한 미움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저주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직접 저주하면 사단이 납니다. 부작용이 심합니다. 뒷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아뢰면 그 분이 우리를 만지십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그 대상을 심판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만지시고 위로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전 시편 109편을 보면 불편합니다. 

이 기도가 불편한 것은 어쩌면 내 안에 여전히 숨기고 꾸미는 외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척 하는 위선이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인간관계에서 빈틈이 없던 자였습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도, 압살롬과의 관계에서도,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와의 관계에서도 다윗은 언제나 인격적인 승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감정을 가지고 자신이 필터링 하고 검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 가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민낯을 가져 가십시오. 

그리고 그 분께 아뢰어서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두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함꼐 하시듯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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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0.21 07:31

    잘읽고 갑니다^^

  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4.10.21 07:31

    잘읽고 갑니다^^

  3. 좋은말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2.03 19:54

    아멘아멘..감사합니다 블로그에퍼가겠습니다~

  4. 좋은말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5.02.03 19:54

    아멘아멘..감사합니다 블로그에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