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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장 18-21절 (금수저 흙수저) 


오늘 본문은 원래 2장 12절로 끝절 31절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지만 본문이 너무 길므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무엘에 관한 구절을 택하여 전합니다. 12절로 끝절까지는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한나의 아들 사무엘의 이야기를 대조하면서 제사장의 아들로서 성전의 제사장 직을 수행하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또한 그들의 부친이었던 엘리 제사장 마저도 저주를 받게 되는지, 반대로 왜 사무엘을 통하여 새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1장부터 2장 전반부를 이끌어 오던 한나의 이야기가 사라지고 이제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루어 지고 그 중간에 짤막하게 사무엘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 말기에 언약궤가 있었던 실로의 성전(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에서 40년 동안이나 제사장 직분을 감당했던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가문은 제사장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아론의 아들 이다말의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조상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축복이 27-28절에 거쳐서 나옵니다. 

삼상 2:27-28)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는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이 택하신 아론의 후예들이었습니다. 

아론에게는 하나님께 예배 할 때 홀로 제단에 올라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분향할 수 있는 막중한 의무가 주어졌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바치는 화제를 예배 후에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예배 하는 막중한 의무에 따른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12절부터 17절에 따른 말씀을 읽어보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사장 직을 감당하지만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화제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전에 자기가 먼저 취하곤 했던 것입니다. 

화제로 드리는 제물은 먼저 불로 구워 그 연기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남은 것을 제사장이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환을 시켜 갈고리를 가지고 불에 굽고 있는 고기들을 마구 휘집어 걸려 나오는 것을 취하여 가곤 했던 것이지요. 그것도 이러한 짓을 "그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행하였더라"는 말로 상습적으로 행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기름에 태우기도 전에 사환이 와서 제사장이 날것을 원하니까 불에 태우기도 전에 억지로라도 그것을 취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어떻게 제사장인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12절에 보니까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록되 있지만 영문으로 보면 "그들이 행실이 나쁜 이유는 매사에 여호와를 간주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여기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결과가 17절이지요.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이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요즘말로 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함이었더라." 


제사장으로 특권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백성들의 예배를 돕거나 대신 드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존경과 물질적 예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를 그들이 멸시하였다 이말은 예배를 우습게 여겼다. 혹은 더 나아가 예배를 몹시 싫어했다. 경멸했다 라는 말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그들의 마음은 그 예배에 대해서 지겹다. 짜증난다. 하나님이 어디있냐는 식으로 예배 자체를 능멸하므로 그들의 관심은 오직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예물에만, 음식에만 관심이 가 있는 것이지요. 


그들의 죄악은 22절에서 이어집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이것은 육신적으로 늙은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노쇄하였다는 것입니다. 영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영권이 잃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범죄가 어디까지 갑니까?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수종드는 자들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위한 예배를 위해 헌신된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는 자들을 겁탈한 것입니다. 

엘리가 이것을 듣습니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이 말이 굉장히 웃긴 것은 "그리하지 말라." 이것은 이미 했어도 앞으로는 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 당시는 율법시대요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이 성결하지 못하거나 간음하면 그것은 죽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하여 엘리는 그 죄값을 묻지 않고 앞으로는 잘해라 이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문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요. 그들이 행한 일을 밝히려고 하지 않고 소문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로 밝혀지면 율법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죠.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향한 책임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 자녀들이 짓고 있는 범죄에 관하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엄중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데 세월 좋게 괜찮아 앞으로 잘해라....이렇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어떻게 책망하십니까?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려 하느냐?" (29절) 

 

내 제물과 예물을 밝았다는 것은 못쓰게 만들었다. 훼손했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그 결과 무엇이라 말합니까?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35절)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결국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를 위해 하나님은 그 집을 세우고 함께 하신다.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나의 기름 부은 자 - 가장 가깝게는 사울이고(첫째 왕), 그리고 또한 다윗이며 (합한 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여 그 안에서 행하게 된다. 


그것을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자? 바로 사무엘입니다. 


18절)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세마포 에봇- 세마포는 옷감이고 에봇은 그 위에 두는 조끼같은 것입니다. 

주로 대 제사장이 입었지만 다윗왕이 법궤가 성전으로 올 때에 입은 옷이기도 합니다. 

이 옷은 격식이 몹시 까다로워 입는 것 자체에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에봇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들이 붙어 있어서 어린 아이가 입기에는 몹시 무겁고 불편한 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우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는 것은 무겁고 불편해도 순종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 8절에 보면 이 세마포는 또한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증거합니다. 


한나는 매년 제사를 위해 실로에 올 때 마다 사무엘에게 작은 겉옷을 지어다 주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옷은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만든 옷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수치를 느껴 만든 옷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불완전한 옷을 벗기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짐승을 죽여 그 가죽으로 덮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 제도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 제도를 통해 우리는 죄가 가리워 지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가죽옷은 피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사람은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출애굽 할 때에 문섧주에 바른 피- 피로 그 가정이 구원 

대제사장의 대 속죄일 - 한 제사로 한 민족의 죄를 속죄 

예수 그리스도 -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마태복음 22장 -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 , 길거리에서 아무나 - 그런데 예복을 준비했는지를 통해...

예복은 무엇인가? 선한 행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곧 택함받음의 전제- 예복은 곧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삶이다. 

한나를 통해 매년 입게 되는 옷은 하나님 앞에 아이가 지은 죄를 회개케하는 어머니의 기도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향한 예배였습니다. 

한나는 사무엘과 함께 있을 수 없었지만 언제나 그 아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매년 겉옷을 그에게 둘러주며 하나님 앞에 그가 부끄럼 없이설 수 있도록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과 옳은 행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관계를 통해 자라난 사무엘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을 때에 

26절)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장은 전체적으로 왜 하나님께서 엘리의 가정을 버리고 사무엘을 택하게 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량적으로 사무엘은 간단히, 홉니와 비느하스의 이야기는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어찌보면 이 패턴이 사무엘서 전체에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엘리 대신에 사무엘을 택하여야 했는지, 왜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에 다윗을 택하여야 했는지.. 그 자초지정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사랑을 받았지만 사랑에서 멀어지고 결국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비웃었던 홉니와 비느하스, 왕으로 세운 하나님의 은혜를 다윗에 대한 시기심으로, 자기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불순종의 길을 걸었던 사울...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대신에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마음을 왜곡시킨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외침은 정작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멀어져 있는, 스스로 높아지려 하고, 정작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고 마는 그런 택함에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안타까움 입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대 제사장이 집례하러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에 방울을 들고 들어가서 방울이 울리면 산 것이요, 울리지 않으면 정결하지 못함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그런 제사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를 보면서도 바로 그들을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면서까지 엘리에게 경고하시겠습니까? 

왜 나중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에게 내가 너를 버렸도다 하시겠습니까? 

그 때에라도 회개하라는 것이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경고가 무서우면 무서울 수록 하나님의 마음은 재앙이 아니라 화평을 위해 돌아오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미 늙어 있는 엘리는 그런 하나님의 경고에도 그저 만사 태평입니다. 자신의 후손들이 이젠 대대로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데도 그의 태도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늙고 비대해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경고를 해도 그저 알았다고 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온 마음을 다해 택한 자가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교만하여지고 타락하는 모습을 보며 엘리에게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 마치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배드리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찬양하면서도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만 관심이 가 있고, 

기도를 하면서도 전혀 믿음없이 드리는 기도, 

회개 없이 늘 십자가를 통해 자기 유익에만 밝은 그런 모습.... 하나님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닌가요? 


작년 한 해 동안 유행된 말들 중에 금수저 흙수저가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현실에 고통스러워 하면서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현실을 비관해서 자살도 하고 낙심도 하고.... 사회는 금수저를 당할 수 없다...


유대인들이게 하나님의 축복은 장자를 통해, 오직 순혈 유대인들을 통해....

그래서 야곱과 에서가 장자권을 가지고 그렇게 다툼을 하고, 이방인들을 개 취급 하며 멸시하며 왜? 하나님의 축복이 장자를 통해, 유대인, 그것도 레위인이나 아론의 후례를 통해...

그런데 마태복음 1장 1절을 통해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14대에 걸쳐서 장자는 단 5명....

그리고 거기 등장하는 네 여인 다말, 룻, 라합, 밧세바

이방여인이거나 부정한 여인.... 그들을 통해 예수님이 나십니다. 


신앙엔 금수저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금수저요, 세마포 에봇을 입은 것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른 행실을 하는 자가 금수저 입니다. 

신앙 안에는 모든 자에게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마음을 알고, 그 분 앞에 순종하며, 그 분께 진정으로 예배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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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장 1-11절 (절대적감사!)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 혹은 한나의 찬양은 출애굽 때의 미리암의 찬양,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와 비견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여인의 대표적인 찬양의 기도입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음으로 행복을 잃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남편의 사랑도 기쁨으로 얻지 못하였고 브닌나의 조롱은 그녀의 감정을 휘몰아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위대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는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녀가 없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없는 시대, 말씀이 없는 시대에 제사장을 감동시킬 만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도록 기도했습니다. 

한나의 불행은 한나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브닌나도 문제가 있었고 엘가나도 문제가 있었지만 문제 가운데 하나님을 붙잡은 사람은 오직 한나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문제는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헤어나올 수 없는 불편함을 주지만 신앙의 사람은 불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고난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취합니다. 

문제는 고난이 있고 문제가 있는대도 그냥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실 수도 있지만 바울도 이 응답이 있기까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가운데 갇혀 괴로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통해 한나의 소원을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한나를 통해 왕이 없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에 왕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통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타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영적으로 죽은 삶입니다. 


자, 드디어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고 사무엘이라고 짓습니다. 

아들이 없어 고통받고 조롱받았던 그녀에게 그 아들은 얼마나 귀한 아들이겠습니까? 

저희 장모님이 딸을 넷 낳고 마지막에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을 못나서 그렇게 구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사내아이가 기을 걸으면 그 아이를 한참을 바라보면서 데리고 가고 싶었다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마침내 아들을 낳았을 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것 같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도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한나에게도 그 아들 사무엘은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을까요? 

그런데 한나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만 그를 양육한 후에 그를 데리고 성전에 가서 그를 엘리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물론 한나는 자녀를 위해 기도 할 때에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다는 것은 나실인의 규례로서 삼손처럼 머리를 자르지 않고 세상사람들과 구별되이 양육한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삼손도 그의 부모를 통해 양육받았듯이 한나도 얼마든지 자신이 키우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남편 엘가나도 에브라임에 살지만 레위인으로서 그 지역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대도 불구하고 한나는 젖을 갓 땐 어린아이를 매몰차리만큼 냉정하게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어떻게 보면 모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치 차갑게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드리는 기도가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 21세기 들어 심리학이라든지 정신분석학이 발달되면서 사람의 내면에 대한 연구가 깊이 진행되면서 사람의 욕망(DESIRE),  혹은 행복감, 성취감을 연구하면서 등장하는 이론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내 안의 독립적인 공간에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어떤 것을 소망한다는 이른바 "mimetic desire" 라는 이론입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혼자 놀때는 그냥 아무 일 없다가 다른 아이가 나타나 무엇을 가지고 놀면 이전에는 거들떠도 안보는 것을 자기도 가지고 싶어하고 급기야 그것을 빼앗으려 싸운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원래 소망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남이 가진 어떤 것을 나도 가질 때에, 혹은 남이 가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내가 가졌을 때에 만족감을 느끼고 반대로 남이 가진 것을 내가 가지지 못했을 때에 불행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그 대상이 더 굳어지게 되면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냐 안가지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뉘게 된 다는 것이지요. 

ex) 나이키 운동화, North face 잠바.... 그것 자체가 행복을 주는 직접적인 대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냐 안가지냐에 따라서 사회적인 행복감을 얻게 되는 것들.... 유행...

그런데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복하고 불행하게 느끼는 거의 대부분이 그 대상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남이, 혹은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행복하고 불행하고...

아무 일 없다가도 남이 행복해하는 것을 바라보며 상대적으로 불행함을 느끼고 남이 불행한 것을 바라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아이를 안 낳은 다고 처음부터 불행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는 일부러 아이를 안낳는 가정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애 안낳는 것을 가장 저주받은 것이요, 애 낳는 것을 가장 축복받은 것으로 여기는 문화였습니다. 

처음 한나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입니다. 

"애가 없으니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행복하지 않고, 애가 없는 것 때문에 브닌나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애가 없다는 것이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특정한 그 아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아이든 자기의 뱃속에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줄 아이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자신을 떳떳하게 만들어줄 the boy가 아닌 a boy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남편에게는 떳떳한 아내가 되었고 브닌나를 납짝하게 만들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3절)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을 둔  자는 쇠약하도다" (5절) 

한나의 기쁨은 물론 브닌나의 조롱을 납짝하게 만든 통쾌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그 행복은 얼마나 지속되겠습니까? 아마 며칠 후면 도로 시들해 지고 또 다른 것을 욕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아마 그러한 욕망은 브닌나보다 더 많은 자녀를 낳은 다음에야 조금 해결될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의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라헬은 야곱의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레아는 아이에 집착합니다. 

첫째 아이 르우벤을 낳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창 29:32)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을 낳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시므온을 낳고 레위를 낳았을 때도 "내 남편이 이제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 29:34) 라고 말합니다. 아니 연합하지 않고 어찌 애를 낳습니까? 

연합했는데도 공허한 것입니다. 따스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이를 계속 낳아도 허전한 그녀의 마음은 차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넷째 유다를 낳고서 그녀의 고백이 달라집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 29:35) 하고 그녀의 출산이 멈추었다고 증거합니다. 

무슨의미입니까? 

이제 아이를 통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는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유다를 통해 다윗이 나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부를 다 누리면서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를 추구하며 인생을 탐닉합니다. 

지식, 쾌락, 문화, 재물,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을 다 취하면서 만족을 하려 하지만 그의 결론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였습니다.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네 인생의 곤고한 날이 이르기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이 중에 많은 분들이 이것만 얻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할 줄 알고 오랫동안 매달리며 기도했는데 막상 해결되고 성취되니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해진 것 같은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은 잡힐 듯이 잡혀지지 않는 무지개를 잡는 것 같은 끝없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것만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데 잡아도 잡아도 내 영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자기의 인생을 다 허비한 후에야 깨달았고, 레아는 세명의 자녀를 낳은 후에야 깨달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낳고 그에게 젖을 주며 양육하면서 참 행복의 근원이 어디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로다." 


사무엘이 한나를 즐거워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참 즐거움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나이다" 



그가 사무엘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삶의 기쁨이 사무엘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오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부하면 행복하고 가난하면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부해도 행복하지 못하고 가난해도 꼭 불행한 것 만이 아님을 인생은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 있으면 가난해도 부해도 주 안에서 언제나 기뻐합니다. 

세상의 행복은 상대적이고 잡히지 않고 순간 뿐이지만 

주 안에서 얻는 즐거움은 절대적이고 항상 있으며 영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합니다. 

[합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행복을 찾아 방황하십니까? 

이것만 있으면, 아니면 이것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여기십니까?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뱀의 유혹에 빠졌더니 부족함이 없는 중에도 선악과를 먹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저것만 먹으면 더 행복할 텐데 말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부유한 중에도 궁핍하게 합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다윗을 시기하여 저놈만 없으면 내가 행복할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왕의 권세도 잃어버리고 오직 다윗 만을 시기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남의 것을 탐하고 시기하는 자는 항상 배고픈 자가 됩니다. 왕의 보좌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이것만 가지면, 이것만 없으면 행복할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을 가지거나. 그것을 없애도 행복은 또 저만치 도망가 버립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반석으로 삼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늘나라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주의 백성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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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들으시다 (삼상 1:19-28) 


사무엘서를 들어가면서 우리는 첫 시작에 사사 시대에 각자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한 가정의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한나의 남편인 엘가나요, 엘가나의 둘째 처인 브닌나요, 그리고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나입니다.

엘가나는 레위 족속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은 곧 하나님입니다. 엘가나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소유된 레위 족속이었지만 성전에서 봉사하지 못하고 멀리 에브라임 지역에 삽니다. 매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는 신실함을 가졌지만 정작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 그 일을 극복하다가 더 큰 곤경에 빠지는 형식적인 종교인입니다. 

엘가나나 엘리 제사장 모두 이름에도, 삶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달고 삽니다. 

예배하는 데 빠지지 않고, 성품도 원만합니다. 누가 봐도 사람좋고 신앙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하지 않는 신자입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전에 모습은 드러내는데 정작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인격적인 교제에는 눈이 어둡습니다. 

공적인 기도는 잘 드리는 지 몰라도 자기 삶에 있는 문제에 대하여 개인적 기도에는 무지한 종교인입니다. 


브닌나는 세상적으로 다 가진 듯 하지만 정작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공허감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그런 공허감을 푸는 데 자기 보다 못가진 자를 괴롭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이 넘치지만 어떤 것을 가져도 그 마음은 채우질 못합니다. 그녀 안에는 평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하는 사람들 역시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사 시대의 일반백성의 모습이 이러했습니다. 

다 가진 것 같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늘 불안함과 전쟁과 갈등 뿐입니다. 


그런 시대를 사는 한나 역시 여러 문제를 안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자녀가 없고 브닌나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아랫사람에게 멸시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그녀는 세 번씩이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격분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동요는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스스로 억누르면 몸에 질병이 생깁니다. 남편이나 브닌나를 통해 풀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큰 분쟁이 일어납니다. 

모든 마음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시작점은 바로 기도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내 영의 문제를 고칠 수 있습니다. 


첫 설교의 중심은 기도의 시작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문제가 닥쳐 왔을 때에 그 해결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기도하면 새역사가 시작됩니다. 내 문제 뿐만 아니라 문제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사무엘이 태어나고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국이 건설됩니다. 기도는 내 문제의 해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엘리 제사장과 한나를 비교하면서 참된 예배자, 참된 기도자의 자세를 나누었습니다. 

엘리는 제사장 이었지만 그의 의자는 성전 안이 아닌 성전 입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에 있었습니다.

그는 의자에 턱 하고 앉아 예배를 구경하고 사람들을 관리하는 구경꾼이요, 관리자요, 관망자였습니다. 

결국 그는 그 의자에서 최후를 마감합니다. 


한나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그녀는 자기 마음이 요동할 때에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그녀는 오래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심정이 하나님께 통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참된 예배자는 형식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기도 한 것 자체 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를 통해 자기 마음을 하나님과 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통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흩뜨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영적으로 무지한 엘리 제사장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한 번 응답 받은 것에 대해 그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그것 때문에 마음을 다치지 않습니다. 

내게 자녀를 주시겠다 약속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으면 지금 자녀가 없어도 그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해 놓고 또 근심합니까? 

응답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응답받았어도 근심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르리니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기도는 떨어집니다. 

지난 주 설교의 주제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기도의 완성, 응답받은 후의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19절)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는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한나와 엘가나는 다시 여호와께 경배하였다는 것은 예배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급할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기도는 제목이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부흥회와 같은 집회가 있으면 열심히 참여하다 집회가 끝나면 오히려 기도가 식습니다. 

며칠 열심히 했으니 이젠 쉬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평소 기도 안하는 사람이 급할 때에도 기도하지 못하듯이 기도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문제가 없을 때에도 꾸준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쌓는다는 표현을 하듯이 기도는 평소에 훈련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19절 b) 

여기서 생각하셨다는 것은 지난 금요일 전도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강조한대로 "자카르" - 자세히 살피고 기억하여 권고해 주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생생히 기억하시고 그 기도에 행동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기도듣기를 즐거워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지 우리가 하는 기도는 다 욕심에 따라서 잘못구하니까 난 하나님보고 다 잘 알아서 좋은 것대로 역사해달라고 기도할 뿐이야" 하고 말합니다. 

고상하고 겸손한 것 같지만 기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면 인간을 창조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의지가 하나님의 생각과 연합되어 함께 일하시길 원하십니다. 

기도는 육을 입고 사는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 맺고 연합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약속된 통로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들을 주십니다. 

사무엘의 뜻은 "여호와 즉, 나의 하나님께 구하였다" 는 의미입니다 .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 

여러분 이 감격이 있으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


신앙생활 몇십년이 되었어도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가지고 고민하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 들으라고 하는지 사람들 앞에 하는건지 불분명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 맺는 영적인 교제입니다. 


전능하신 분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여러분 이것이 체험되고 느껴지만 소름이 돋고 감격스런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 분이 들으셨다!"는 감격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내 자녀도 내 말을 안듣고 내 가족도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데, 전능하신 만유의 주인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를 들으신단 말입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일입니다.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신 아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한나의 관심은 사무엘에 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꼐서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기도 해 놓고 정작 그 응답이 임했을 때에 너무 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기도의 결과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저 일이 이루어진 여러 요인들 중의 하나로 기도를 생각합니다. 

기도 한 것은 그저 내 소원을 아뢴 것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그 기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이 "내가 이러이러하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해 주셨어...'라고 너무 확실하게 말하면 속으로 "아니 지가 뭔데 하나님께서 자기 말대로 응답했데..."하는 사람들이 있지요....이런 사람들도 역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때로 일하시지 절대 우리 기도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셔..."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하는 것이지 내 뜻을 이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야...." 기도 응답에 대해 나름 신학적으로, 논리있게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다 이뤄주시지 않을 때도 있지요. 

그런데 기도 하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그 뜻을 위해 기도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그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 할지라도 그 강청하는 것을 통하여 들어주시니 낙심하지 말고 간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건, 우리의 환경을 바꾸시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21-23절 

매년제, 서원제

기도의 응답을 받자마자 드린 예배 - 서원의 예배

매년 올라가는 매년제 외에 이제 자기의 서원한 것을 기억하고 서원제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서원에 대한 말씀들...

(신 23:21)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전 5:4-5]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왜 이렇게 서원에 대한 말이 많을까요? 

여러 말씀을 요약하면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요구하신다. 

전도서에서나 산상수훈에서는 아얘 서원 자체를 하지 말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급한 사정이 있을 때의 사람의 마음과 그 사정이 넘어갔을 때의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뻔뻔합니까? 하물며 강청했던 자녀가 응답한 이후에 발뻄하면서 기도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이 얼마나 큰 죄입니까? 


[민 30:6-8]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부부의 경우 아내가 서원을 하였을 경우 남편이 허락지 않으면 이 서원은 무효이다. 그러나 남편이 동의하면 이 서원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서원에 대한 규례를 남편의 동의를 얻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말을 들은 엘가나가 " 당신 뜻대로 하시오." 하면서 그 서원을 인정해 주었고 "여호와께서 그이 말씀대로 이루시기리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은 우리는 이 서원을 지키려고 힘을 쓸 것이지만 이것을 지키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하면서 한나가 했던 서원이 주 안에서 반드시 지켜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서원을 지키는 것을 잊은 것도 아니고 부담 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젖을 떼자 마자 아이 뿐만 아니라 수소와 밀가루와 포도주 한 부대 등 여러 가지 귀한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사무엘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사람 한나의 기도의 완성입니다. 


급할 때는 여기 저기 기도부탁하고 저에게 전화하기도 하고....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면 싹 외면하는 신자들...

나에게 고맙다고 안해도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루신 것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가나안 같은 천국같은 장소도 지옥같은 불행한 처소가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리 큰 문제가 해결되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수단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내가 소통하고 그 분이 일하시게 하는 통로입니다 .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응답되어진 일들에 대해서 예배함으로 우리는 깨어서 감사하고 또한 더 깊고 친밀한 관계로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 1:26-28]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엘리를 찾아가서 한나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기의 이름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고향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 늘 기도하는 여자, 항상 기도하는 여인....

자신을 이렇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내가 기도하였더니 그가 내 기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앞에 드리되 그의 평생, 그의 전부를 당신께 드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쓰는 제사장이나 남편은 그저 형식적인 종교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을 때에 한나는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어둔 세상에 빛을 비추듯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장 귀한 자녀를 그 분께 드립니다. 왜? 그 분안에서 가장 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믿을 수 있는 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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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와 한나 (사무엘상 1장 9-18절) 


사무엘상이 시작되는 배경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이라는 축복된 땅에 들어갔지만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엘가나라는 레위인의 한 가정을 통해서 당시의 영적 사회상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인이었지만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서 예배를 집례하지 못하고 저 먼 에브라임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꼬박 꼬박 실로에 와서 영적인 회복을 얻고자 했지만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악하고 패역한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에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하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지만 두 아내의 갈등은 그 가정의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한쪽의 편을 들어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가 한 쪽 편을 들어줄 때마다 문제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브닌나는 엘가나의 둘째 처였고 그녀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첫째 부인에게만 가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가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언제나 불만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녀가 취한 것은 상대방을 격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처신은 가족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나는 은총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되었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브닌나와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신을 격노하게 해도 한나는 브닌나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엘가나에게 브닌나의 행적을 이르지도 않습니다. 문제의 근본과 그 문제의 해결자인 하나님께 아룁니다. 

한나이 상처의 깊이 - 격분, 격노하였다. 1장에만 6, 7, 16절 세번이나 걸쳐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분하면 아무리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가 힘듭니다. 기도가 나오질 않고 성질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나는 몹시 격분한 바로 그 순간에 브닌나를 상대하거나 엘가나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기도가 새 역사를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자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여인을 통해서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녀를 통해 사사시대의 막을 내리고 왕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통해서 시대를 여십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은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과 한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실로의 성전의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 안이 아니라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입구의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사장이 성전 입구에 앉아 무엇을 합니까? 예배자가 아니라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언약궤가 있는 실로와 와서 제사를 드리니까 누가 오는지 어떤 예물을 가지고 오는지, 아얘 성전 입구에 자기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낙이요 임무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 안에서 어떤 죄악을 저지르건,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건 말건, 엘리의 관심은 성전을 들락달락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목회자가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하고 예배의 관리자나 교회의 관리자로 전락하게 되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부를 찬양을 검색하다가 요즘 가장 뜨거운 찬양 사역을 하고 있는 마커스찬양집회 예배를 인도하는 김남국 목사님이 언젠가 찬양집회를 잠정적으로 중단한다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기에 보니 

"마커스 팀이 유명해지다 보니까 어느덧 예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배 인도자"의 모습만 남았다고 하면서 찬양팀이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할 때까지 찬양사역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공감을 했습니다. 


성전 문설주에 자기 의자를 두고 교회의 관리자로 살아가는 엘리의 최후는 사무엘상 4장 18절에 나옵니다. 

(삼상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 그에 반해 한나는 오직 하나님의 앞에서 기도합니다. 

"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 (12절) 

그가 성전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한참을 있으니까 엘리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갔을 터인데 도대체 나가질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한참을 지나고 나가지 않고 앉아 있으니까 가까이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나 궁금했는지 엘리가 그녀의 입을 주목했다고 말합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 Hannah was praying in her heart" ) 

소리가 크다고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기도했고, 마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리고 오래 기도했습니다. 


물론 기도는 일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기도안하는 사람이 급한 일 당한다고 갑자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날마다 숨쉬듯 일상적으로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땐 우리가 우리를 온전히 내려놓고 목숨을 내어 놓듯이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기도하듯, 여호수아가 장로들이 다 돌아간 뒤에서 성막을 뜨지 않고 기도하듯, 엘리야가 하늘을 쳐다보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듯 우리의 전부를 바쳐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나는 그냥 기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하였다"(15절)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니까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될때까지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목사는 행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가 말합니다. 

엘리는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한 제사장입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조차 술취한 것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제사장 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성전의 관리자같은 제사장입니다. 

그 어리석은 제사장 엘리가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길 내가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소릴 들으면 얼마나 신뢰하고 감사하겠습니까? 

아니 너나 잘하세요.....그렇면서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고 은사가 막 나타나니까 지도자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바울도 무시하고, 아볼로는 쫓아 냅니다.

기도좀 한다고 모든 질서를 다 무너뜨립니다. 잘못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한나는 어리석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질서를 지킵니다. 

제사장의 소리를 사람의 소리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한나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신앙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신앙이 무엇이 다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붓듯이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좀 한답시고 남을 판단하고 목회자를 무시해선 교만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로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십니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와도 기도하지 않고 그저 낙망가운데 빠져 살다가 왜 하나님이 날 돕지 않느냐며 불평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자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일단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확신도 없고 그저 기도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한 것이고 안 들어 주시면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뭐 이런거 까지 들어주시겠어 하며 자포자기 합니다. 그 신자의 삶엔 어떤 능력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나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형식적인 신앙만 있지 그 안에 어떤 기쁨도 믿음의 확신도 없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만 하면 뭔가 희망이 생긴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된 것 같고 기쁜데 다시 기도 끝나고 현실로 오면 다시 낙망하고 넘어지고 슬퍼합니다. 기도 가운데 얻은 확신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고 현실과 기도 세계가 이어지질 못합니다. 이런 신자는 교회에서는 은혜 받는 것 같은데 집에 가면 혼자 또 힘들어 하고 이분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입니다. 
  •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민감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낙담하여 넘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낙담하여 넘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하나님 앞에 와서 자복하고 통곡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평강이 올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받으실 때까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찾아오면 그 평강을 붙잡고 현실에 응답이 임할 때 까지 넘어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묵묵히 기다립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고 기도의 비밀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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