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0  이전 다음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사무엘상 6장 1-9절 우연히 당한 것인 줄 (그릇된 회개)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전리품으로 가져온 언약궤로 말미암아 임한 재앙으로 말미암아 결국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한 블레셋의 상황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이제 오늘은 그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되돌려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 열가지 재앙 중에서도 끊질기게 약속을 어기고 조금만 숨쉴 여유만 되어도 또다시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바로의 모습과 함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불신하는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통하여 이 말씀을 알게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우상숭배나 미신은 나무나 돌 같은 것을 섬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름아닌 이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믿고 자기 식대로 열심을 내는 신앙생활이 다름 아닌 이런 미신적인, 우상숭배와 같은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잘못된 회개의 모습을 살펴보며 우리 신앙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절)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달이라.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바로 다음 날 다곤 신전에서 다곤 신상이 무너지고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세군데의 지방을 옮겨다녔지만 옮겨다닐 때마다 똑같은 재앙이 임했습니다. 

5장 마지막 절에는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5장에서 6장 사이는 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재앙이 임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은 우연의 일치다 하면서 하나님의 법궤 이스라엘로 보내지 않고 쥐고 있는 사람들의 고집이 있습니다. 

아무리 눈 앞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음을 깨닫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그것을 깨닫는데 자꾸만 머리를 굴리며 이럴수도 있지 그게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 재앙을 몸으로 맞이합니다.  

바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이방 사람들 뿐만 아닙니다. 

엘리도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끊임없이 경고하시지만, 될대로 되라지, 설마 하면서 사망의 길로 가지 않습니까? 


성령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데 죄는 우리를 꼼짝 못하게 만듭니다. 

머리로는 큰일 났다 생각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을 주어 환날 날에 더욱 깊숙한 늪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불순종한 요나가 선장과 선원들은 태풍으로 난리가 났는데 혼자 골방에서 잠에 빠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아둔하면 이런 상태에 빠집니다. 


(2절)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7개월간을 끌고 끌다가 견디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드디어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내려면 누구와 상의를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궤를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을 불러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블레셋의 제사장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그 대책을 논합니다. 

여러분, 신앙의 문제는 누구와 상의 해야 합니까? 신앙의 문제는 기도하면서 성령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에 자신이 없다면 교회 안에서 교역자들이나 재직들과 상의해야 합니다. 

학교 문제는 학교 선생이랑 상의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옳은 것이요, 집 사려면 복덕방 가서 상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자기들이랑 비슷한 사람들이랑 하든가, 아니면 아얘 안다니는 사람이랑 이야기하면서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교회에서 지키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하는 것을 지지해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답을 구하려면 해답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가야지 자기 답이 맞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봐야 언제나 똑같은 실패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사장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은 있는지 블레셋 제사장들이 하는 말이 "그냥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병도 낫고 그 이유도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속건제는 레위기 5장에 잘 설명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성물이나 다른 사람의 기물에 해를 입혔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렇니까 법궤에 해를 입혔다고 여겨 지금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속건제에 드릴 예물은 율법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속건제의 희생제물은 원칙적으로 흠없는 수양을 드려야 했습니다 (레5:6, 16, 18). 

그러나 범과자의 형편에 따라 어린 양 대신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의 새끼 둘을 제물로 드리기도 했고 또 비둘기조차 드릴 형편이 안 될 경우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속건제에 대한 하나님의 율례였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제사장들이 속건제물로 드리도록 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4절에 보니까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드려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금으로 만들어 드리게 합니다. 

그러니 이 제사의 모양이 얼마나 우스워 집니까? 

자기들이 당한 재앙의 모양인 독종과 그 독종을 가져다 주는 쥐를 금으로 만들어 재물로 바치니 이 제사는 그야말로 썩은 예물이 될 것입니다. 


그들만 그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역시 그런 말도 안되는 예물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없는 양, 비둘기, 혹은 고운 가루...

이것은 순결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서에 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사에 대해 분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말 1:7) 너희가 더루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이유도 무엇입니까?

(삼상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법궤를 더럽혔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 제물을 가지고 금 쥐, 금 독종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니 이 얼마나 황당한 제사입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을 보십시오. 

(삼상 6: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말 1:8-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그러면서 자기들 스스로 바로와 비교하면서 바로처럼 완악하게 행동하지 말고 후하게 드리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7절부터 보면 더 가관이 아닙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삼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삼상 6:9)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멍에를 메어보지도 아니한 소, 그리고 송아지들을 젖먹이던 소 둘을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릴 제물을 담아 끌게 하고 사람은 지켜 보다가 벧세메스까지 똑바로 가면 이 재앙은 과연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요 집으로 돌아오거나 다른 데로 가면 이 모든 재앙은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흠없는 소도 아니고 젖먹이던 암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송아지는 집으로 가게끔 떼어 놓고, 또 멍에도 한 번도 메어 보지 않은 소를 사람이 이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길을 가게 하도록 하는 것. 


이들이 정말 믿음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다곤 신은 그렇게 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 850명과 영적인 전쟁을 치룰 적에 그 바알과 앗세라는 아무리 소리질르고 애써 보았자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는 거짓 신임이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들은 재앙이 무서워 하나님의 궤를 돌려 보낸다고 하지만 속셈은 무엇입니까? 

아니야...그럴리가 없어... 하나님이 있긴 어디있냐? 그렇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서 속건제는 왜 보내고 바로와 비교는 왜 합니까? 

이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바로 보다 훨씬 낫다고 여기는 것 아닙니까? 


결과가 어떻게 납니까? 

(삼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 가니라


곁에서 몰래 따라가면서 그 소들이 좌우로 치우지지 않고 새끼들을 찾지도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요? 

벧세메스는 아모리인의 성지였지만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하였을 때에 단 지파에게 주어졌지만(여호수아 19장)  단 지파가 블레셋 사람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피했을 때에 유다지파가 이 땅을 점령하여 결국 레위 사람의 영지가 됩니다. (여호수아 21장) 

결국 레위인들이 이것을 보며 기뻐하며 소가 끌고온 수레를 장작으로 삼아 소를 번제물로 불태워 드립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제물들을 받자 블레셋 사람들은 손씻고 자기 지방으로 돌아갑니다. 


자, 이것은 정말 놀라운 광경 아닙니까? 

멍에를 한 번도 메지 않던 암소 두마리가 그것도 자기 새끼도 놓아두고 무거운 법궤와 제물을 들고 흐트러짐 없이 벧세마스로 온 것을 보면 정말 하나님의 능력에 찬양을 드리고 경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던 다곤 신상은 그 앞에서 무너지고, 법궤로 말미암아 큰 재앙이 일어나고, 이제 자기들의 속건제를, 잘못된 제물이지만 이 곳까지 완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 

그들이 정말 신을 섬기는 사람들 이라면 참 신, 참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경배를 올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16절에 보면 그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다시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그들은 또 넘어진 다곤을 일으켜 세워서 그것을 섬기는 삶을 살 것입니다. 


늘 하던 대로 똑같이 그렇게 살다 죽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전 처럼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그저 어쩌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일로 여기면서 잊어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보고, 큰 이적을 보아도 죄인은 안믿을려고 작정한 사람 같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표적 표적 달려들면서 보여달라고 하지만 표적을 바라면서 예수를 따른 사람들은 표적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사라졌습니다. 



교회 지하 노래방 화재 사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VS

라합, 마리아 


아직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안믿을려고 작정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면 정말 잘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19-21절 

벧세메스 사람들의 죽음 

왜 죽었는가? 하나님의 궤를 들여다 보다가... 

하나님의 궤를 만지거나 들여다 보는 것은 금지.... (민 4:5-6)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


왜 들여다 보았는가? 

금지된 영역에 대한 호기심. 경외감을 잃어버리는 것. 

(삼상 6:20)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스스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시는 이 - 침묵하던 하나님이 블레셋에게 먼저, 그리고 이제 레위인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하셨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무엘상 5장 (빛의 사람들, 어둠의 사람들...) 


삼상 5:1-12


지난 시간에 우리는 블레셋에게 대패하여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빼앗기며 죽임을 당하였고 전쟁터에 두 아들이 죽고 법궤는 빼았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마저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게되는 불의한 제사장 가문의 최후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법궤마저도 빼앗아 왔습니다. 

고대의 문헌들을 보면 당시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단순히 군사들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 전쟁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전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긴 나라는 그 나라의 신이 패배한 나라의 신을 이긴 것이라 여기고 상대국의 신상을 부스거나 빼앗으므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블레셋도 그러한 전례대로 이스라엘을 꺽고 그들이 의지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법궤를 빼앗아 탈취함으로써 그들이 신이 이스라엘의 신을 꺾었음을 나타내려 하는 것입니다.  패배한 나라의 신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이긴 나라의 신을 섬기게 하여 영적으로 사람들의 신앙을 장악하고 신들의 힘을 흡수하여 더 강한 나라가 되고자 하고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신은 다곤이라 불렸는데 그 신은 바알의 아버지라 불렸고, 그 모양은 얼굴은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몸은 사람의 몸의 형태를 한 신상이라고 합니다. 

사사기 16장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은 후에 다곤 신에게 큰 제사를 드리며 즐거워 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중에 전사한 사울왕의 머리를 다곤의 묘에 매달았다는 기록이 역대상 10장에 나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블레셋은 법궤를 다곤의 곁에 두어 다곤의 승리를 드러내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승리했다고 믿은 다곤의 신상이 하나님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다시 세워 놓았는데 다음날 얼굴이 엎드러져 땅에 닿았을 뿐만 아니라 머리와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 신상은 몸뚱이만 남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곤 신상이 있던 아스돗에는 큰 독종이 임해 사람들이 법궤를 그 지역에 두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옮긴 가드에도 똑같이 독종이 일어나 고통을 당하게 되자 이번에는 에그론으로 옮기는데 그 소문을 들은 에그론 사람들이 하나로 모여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 하면서 데모를 하니까 블레셋이 모든 방백을 모아 회의를 열어 다시 이스라엘로 돌려 보내기로 하는 장면이 바로 5장의 내용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은 이겼지만 하나님의 궤는 감당하지 못하는 블레셋의 모습.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권능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탄에게 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우상에게 그분의 영광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죄악의 포로가 되는 것은 순종치 않는 무력한 그리스도인이지 하나님이 무력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때에 사탄에게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이나 이스라엘 사람들- 전쟁에 이기려면 신들을 내편으로 만들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패하자 법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내 편으로 삼으려 한 것이고 블레셋은 법궤를 빼앗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마져도 그들이 소유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참신앙은 신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법궤에 써 있는 말씀에는 전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있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할 때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는 신앙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정작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은 내가 범죄하고, 불순종해도 하나님이 날 도우시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은 되돌아보지는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질 수 있지하면서 의아해 했습니다.  


법궤를 빼앗아 온 블레셋은 기고만장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지금 하나님을 포로로 잡아온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신, 다곤이 모든 신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망은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무기력하게 죽임을 당했을 때에 사탄은 기뻐하고 어둠의 세력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십자가 상에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 분의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을 본 마귀는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권세를 비웃듯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힘입니다.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사망을 그들의 본거지에서 깨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3절)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이것이 우상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인간이 세우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가 잘렸다는 것은 스스로 사고 할 수 없다는 것이고 손목이 잘렸다는 것은 능력을 잃어버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곤은  신이 아닙니다. 신으로서의 위상을 다 상실했습니다. 


6절)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그러나 법궤는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떠난 법궤는 법궤 혼자서 다곤을 무너뜨리고 가는 곳마다 블레셋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너희는 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세 번이나 걸쳐서 법궤를 옮깁니다.  

그리고 급기야 그것을 이스라엘에 돌려주려 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럼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엘리와 두 자녀 홉니와 비느하스와 함께 머물렀을 때에 법궤는 긴 시간 침묵했습니다. 

원래 지성소 안에서 부정하게 제사를 드리면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온갖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데도 법궤는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궤가 블레셋에 옮겨가자 법궤는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양 다곤을 무너뜨리고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로서 이스라엘 군대가 할 수 없었던 항복을 받아냅니다. 


왜 법궤는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에서 침묵했을까? 

그들의 죄가 성소 안에서도 범해지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직접 홉니와 비느하스를 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자 홉니와 비느하스는 더욱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없는 듯이 죄를 더하고 엘리는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에도 돌이키질 못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침묵하시고 오히려 블레셋에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셨을까?

좀 다른 말씀으로 이 질문에 답을 해 볼까 합니다. 


지난 주간에 한 목사님이 제가 강의하는 학교에서 설교하시면서 나눈 말씀을 좀 소개할까 합니다.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4-15절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동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셨습니다.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장차 빛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지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이미,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둔다는 것은 그릇 밑에 두어서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둔 다는 것입니다. 

말 아래 두면, 그릇 밑에 두면 빛이 아무리 밝아도 밖을 비출 수 없습니다. 


그 목사님의 동생이 사진학과를 나왔다고 합니다. 

졸업 작품으로 무당이 굿 하는 것을 촬영해서 제출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굿을 촬영하는 것이 영 찜찜했지만 졸업과제라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함께 유명한 무당의 굿 하는 장소를 찾아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당이 막 흔들면서 날 뛰다가 계속 사람들을 둘러보기도 하고 흔들다가 또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장이 있어? 왜 오늘 이렇게 신이 안내려?" 

여러분도 이런 얘기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이런 일을 당하니까 소름이 끼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 신실한 크리스천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굿 하는데 끼어 있으면 굿 자체가 안되는 것입니다. 

무당이 먼저 알아보는 것이지요.. 


우리는 함께 부딛쳐가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서로 서로 누구 신앙이 어땠느니 누구는 아직 멀었느니 하며 좀처럼 서로의 신앙에 만족하지 못하고 판단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오랫 동안 선교를 하신 선교사님은 여러분들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그정도의 크리스천을 만들기 위해서 난 평생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별 영향력 없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중국에서, 아프리카에서, 혹은 동남아에서 정말 예수를 모르고,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면 얼마나 귀하게 쓰이고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얻어 여기 산호세에 있는 쥬빌레 교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가대도 아니고 가스펠송을 부르는 찬양팀이 한 50명이 나와서 몸을 흔들면서 찬양을 하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찬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그 찬양이 신기하기도 하고 흥겹고 은혜롭기도 하다가 갑자기 드는 생각이 저 중에 열 명만, 아니 다섯명, 아니 단 한 명만이라도 선교지 작은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해 준다면 그 선교지에도 찬양이 풍성해질 텐데...하는 안타까움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50명이 40명 된다고 아니 20명만 되어도 그 찬양은 여전히 뜨거울 텐데 그 50명이 나누어서 각각 흩어져서 사역을 감당하면 곳곳이 밝혀질텐데 왜 이렇게 모여서 낭비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빛을 등경 아래 두어서 넓은 장소를 비출 수 없는 것 처럼 빛은 산위에, 넓은 곳에 놓아 세상을 비추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빛된 존재인줄 모르고 삽니다. 


믿는 사람들끼리 부딛끼며 서로 누가 높니 누가 잘났니 하는 제자들과 똑같이 아웅다웅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빛입니다. 단지 내가 얼마나 빛된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 그 틈에 있어서 언제나 구박받지만 크면서 보니까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고니였음을 깨닫게 되는 안데르센의 자전적 동화

(자신이 학교에서나 커서도 언제나 왕따에다가 적응 못하는 구박덩어리로 자라다가 결국 글을 쓰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나가는 이야기....)  


초대교회- 성령으로 모여 부흥되는 교회- 5만-10만명까지 추산...

그런데 모이기는 하는데 흩어지질 않는다. 그러니까 핍박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흩으셔서(디아스포라...)  결국은 세계로 비추이게 하시지 않습니까? 


얼마전 프란시스 교황의 말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위선적 신자보다 무신론자가 낫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요. 그가 꼬집은 위선적 신자...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직원들 월급 잘 주지 않는 업주. 

돈세탁 하며 부정하게 축제하는 신자...


그런 신자들은 차라리 안믿는 사람보다 못하다...

새겨들어야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토록 침묵하셨는가? 

빛이 되어야 할 자들이 어둠의 자녀인양 행세하기 때문에 침묵...

무반응....

그런데 그 무반응은 벌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이미 빛으로 부름받은 자들이기에....

지금까지 빛처럼 살아왔던, 그렇게 훈련받은 자들이기에 부름받은 대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다손 신상 앞에서 바로 바로 그 신상을 엎드리게 만들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을 내립니다. 

그들은 이미 어둠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빛이 자녀들이 빛의 역할을 계속 외면하고 어둠의 자녀들처럼 살면 그 기다림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탕자처럼 다 잃어버려도 돌아오면, 반기십니다. 맞아주십니다.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이토록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빛이라 하십니다. 이미 빛이 되었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꾸만 빛을 잃어버립니다. 

세상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말아래 감추인 빛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꾸만 외면하고 어둠처럼 살면 홉니와 비느하스 처럼 됩니다. 

그런데 부르심에 응답하여 빛을 비추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세상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의 패배하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설 때에 우리 또한 세상에 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3.18 06:18

    아멘 .

 

무엇이 빠졌는가? (삼상 4장 1-11절) 


사무엘상의 첫 부분은 엘리 제사장과 그 자녀에게서 사무엘에게로 하나님의 사명이 옮겨가는 과정을 생생히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는 영적으로 침체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을 40년간이나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제사장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아론의 계열 이다말의 후손으로 40년동안이나 실로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맡았던 자였습니다. 


목회자도 40년을 목회하면 원로목사로서 교회에서나 교단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해주고 영예로운 이름을 선사해 줍니다. 

하물며 사사시대 그 영적으로 어둔 시대에 이스라엘을 40년간이나 이끌었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평가해 주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의 최후는 비정하다못해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40년간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지만 가나안 입구에서 그 땅을 바라보며 죽어야 했던 모세만큼이나 엘리의 최후는 통한의 최후요,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와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먼저는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다음은 직접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그리고 엘리의 면전에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그에게 거듭 기회를 주시고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리는 자녀들의 범죄를 삼가지 않았습니다.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 자녀를 보면서도 붙잡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자녀에게 분노하신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위기의식 없이 태평했습니다.  

급기야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와 그 가족을, 그의 모든 후손까지도 벌하신다는 소리를 듣게 되지만 "그의 선하신대로 할지라" 하면서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하나요? 마치 딴 사람 이야기 하듯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긴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하리라" 하면서 결국 " 나를 위하는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 내 뜻을 행하는 자를 일으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엘리한테 적용하면 엘리는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0년을 하나님을 위한 제사장으로 살아왔는데 그가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고  충실하지도 못하다는 하나님의 지적은 가슴아픈 일이고 우리가 새겨야 할 소리입니다. 


4장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면서 법궤를 빼았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이를 낳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며 한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엘리의 가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영적 상태의 심각함을 살펴 볼 수 있고 또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삼상 4:2)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쳤더니 


블레셋은 잘 알다시피 사사시대동안 그리고 앞으로 다윗의 시대에까지 끊임없이 이스라엘를 괴롭혔던 나라입니다.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의 장수였고 지금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지역에서 끊임없이 전쟁하는 바로 그 팔레스틴이라는 이름이 블레셋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출13:17)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을 때에 블레셋은 가나안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3: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까운 블레셋 길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광야길을 통해 길고 긴 여정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블레셋길로 가는 것을 막으셨을까? 

17절 후반부는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8:15-16)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갔던 광야길의 의미는 "낮아지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얻는 땅"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광야의 길은 신약의 용어로 표현하면 십자가의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고난과 낮아짐을 통해 몸으로 걸어가는 경험의 길이요,  블레셋길은 지름길이요, 십자가 없는 편한 길이요, 머리로 이해되는  짜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탄이 시험을 통해 고난 없는 영광의 길로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런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들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느냐, 넓고 편한 실크로드를 가느냐?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길고 끊질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움    아벡은 이스라엘 침입의 교두보... 


지금 이스라엘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보며 블레셋에 맞서고 있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려고 맞서고 있습니다. 

첫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여 4천명이 전사합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3절)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게 하셨는고? 

  • 그전까지 블레셋이 쳐들어오면 두려워하며 떨었는데 지금은 왜 우리가 질 수가 있냐? 왜 하나님의 백성이 지느냐?하는 탄식, 원망
  • 평화로울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지 않다가 실패하면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
  •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당연하게 생각. 교만함이 묻어나는 표현 


그것에 대한 대책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 실패했으면 당연히 해야 할 것-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뜻을 물어야 함. 회개 할 것 있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함.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모든 방법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 그런데 하나님께 묻기 보다는 자기들의 취한 방법- 외적으로는 신앙적인 것 같다. 믿음의 표현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빠져 있다. 일대 일의 관계, 하나님과의 대화가 빠져있다. 죽은 신앙이다. 나만 열심히 하면 당연히 도와주시겠지.. 패배의 원인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신이 원인을 파악하고 자신이 처방하는 것.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잃어버린 사람들... 마치 공식처럼 십자가를 목에 걸면 복이 오겠지, 성경책 품에 넣고 다니면 성경책이 나를 지켜주겠지... 부적처럼 신앙생활을 행하는 사람들....
  • 무엇이 빠졌는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 관계가 없다. 사랑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 


이것이 엘리의 신앙, 홉니와 비느하스의 신앙. 

날마다 예배는 드리는데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면서, 돌이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그 뜻을 살피지도 않고...그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자기 유익만 남은 자들....

성전 입구에 앉아서 헌금만을 챙기는 엘리

성전 안에 들어가 사람들의 제물만 탐하는 홉니와 비느하스....

예배자의 어떤 모습도 없다. 


그들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가 아니라 단지 부적이다. 

끼고 있으면 승리를 가져다 주는 상징물에 불과하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반응을 보면 기가 막히다. 


5절)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7절)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외적인 언약궤를 바라보며 이스라엘은 흥분하고 블레셋은 낙심한다. 

외적인 신앙이 우리의 감정을 고취시키고 마귀를 두렵게 할 순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외적인 경건에 진실함이 없고, 하나님과 쌓여진 깊은 사랑의 관계가 얽혀있지 않다면 우리의 어떤 경건에도 능력이 나타날 수 없다. 

능력은 법궤 안에 스며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호흡이지 돌덩이가 능력이 아니다. 

 

 


엘리의 실패는 무엇인가? 

그는 40년간 예배를 이끌었던 자였다. 

그런데 그는 예배의 몸짓은 있었지만 정작 그 예배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누구에게 찬양하는 것인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그저 예배를 통해 얻어지는 양식을 통해 점점 살이 쪄서 몸은 비대해지고 영은 혼미해졌다. 

어떤 영적인 능력도, 권능도 남아있지 않았다. 머리깎인 삼손마냥 그는 영적인 눈을 잃어버린 패잔병이었다. 


18절)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년이었더라. 


성경에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생생하게 묘사한 장면이 또 있을까? 

가룟유다...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와 죽은 자...

왜 거룩한 성경에 이들의 죽음을 이토록 비참하게 묘사하는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이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당하는 경고...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구절. 

사람은 전성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이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가? 


블레셋은 지금도 우리를 위협한다. 

십자가의 길 갈 필요 없이 신앙의 지름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유혹한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넓은 길, 편한 길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겉만 신앙인 흉내내면서 속으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 나날들이 많을 수록 우리의 영은 비대해 지고 우리의 영은 늙어가는 것이다. 


빌 3:18-19)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제가 아내와 연애할 때에 써 주었던 편지

(부자로 살진 못해도 바른 길을 가는 친구가 되겠다...) 

제가 목사로 살아가면서 성도들에게도 그런 목사의 다짐을 해 본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보존자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3.11 14:23

    아멘입니다.
    여전히모양만그리스도인일뿐입니다
    경건의모양은있으나
    경건의능력은없음을고백합니다

  2. 묵상지기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5.31 18:53

    말씀묵상하다 잘 이해가 가지않았는데 말씀해 주셔서 좀 더 깊은 묵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6.02 17:16 신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사무엘상 3장 -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열리리라. 


이제 본격적으로 엘리에게서 사무엘에게로 하나님의 관심이 옮겨가는 전환점이 되는 장이 사무엘상 3장입니다. 그 유명한 하나님께서 엘리 대신에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본문은 끊임없이 엘리와 사무엘을 대비시켜 가면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 은밀하지 않으시고 엘리를 통해, 엘리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부르십니다. 

시작부터 본문은 아이 사무엘과 노쇄한 엘리를 대비시킵니다. 

아이라는 말 속에는 순전함과 동시에 미숙함이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세 번씩이나 알아듣지 못하고 엘리를 찾아갑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미숙함을 벗어나게 하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선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위한 다리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사무엘은 지금 한나에 의해서 엘리에게 맡기워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엘리가 사무엘의 대부인 것입니다. 사무엘은 엘리의 수중드는 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무엘이 지금 엘리를 섬기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종을 잘 섬기는 것은 중요하고 물론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전에서, 신앙 생활을 통해서 주의 종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 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는 어떤 주의 종입니까? 하나님 앞에 징계를 앞둔 종입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주의 종입니다. 

사무엘이 만약 엘리는 섬기는 것에만 그쳤다면 그는 엘리와 운명을 같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징계를 받음에도 사무엘이 하나님께 택함 받을 수 있는 것은 사무엘은 엘리에게,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봉사와 헌신이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3:1b)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무슨 소리인가? 영적인 중재가가 되어야 할 엘리가 침체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교제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엘리: 잘 보지 못하고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사무엘: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고... (누군가는 기도하고 있었다. 누구? 한나?)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에... 

            똑같이 누워있지만 어디에 누워있느냐? 엘리는 제사장이지만 자기 집에 누웠다. 침체되고 징계를 앞두고 있지만 마치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마냥... 집에 그저 누워있는 것이다. 

            이에 사무엘은 똑같이 침체의 시대를 살지만 여호와의 전을 떠나지 않는다. 자더라고 그 속에서 잔다. 시대가 악해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주의 종이 타락해도, 다른 사람들 다 신앙을 떠나도 그 곳을 떠나지 않는다. 

            

            - 많은 성도들이 자기 신앙의 정체를 목사에게 의탁한다. 좋은 목사를 만나면 성장하고 나쁜 목사를 만나면 침체된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다. 좋은 목자를 만나고 좋은 목사를 만나는 것, 중요하고 축복이다. 내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선생이 누구고, 친구가 누구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무엘은 최악의 조건에서 자랐다. 

            그는 그를 돌봐줄 부모의 손도 떠났다. 그가 지켜보는 제사장의 모델은 홉니와 비느하스. 시대의 악한 제사장이다. 그리고 그를 책임진 엘리는 늙고 영적으로 어두운 종이다. 부모는 잘못된 선생에게 사무엘을 맡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엘리의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 법궤를 지키면서 살았다. 하나님의 종들은 타락했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말씀은 언제나 사무엘을 지켜주었다. 

            물론 목사로서 나는 나의 삶이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길 소망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주의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혹이라도 나의 삶이 여러분의 맘에 차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맛보기를,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를 더욱 소망한다. 나를 통해서, 나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보여준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러나 나의 삶이 여러분들의 성에 안차더라도 상관없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내 책임을 다 한 것이다. 

                        

  •         부르셨더니-누웠더라.(5절)  

              부르셨더니 누웠더라. (6절) 

              부르셨더니 다시 누웠더라 (9절) 

            

 세번씩 불러 일으키시는 주님. (베드로에게 세번 네가 날 사랑하느냐?" 

 제자들을 세번씩 찾아가셔서 부활이 증인되게 하시는 주님. 

 부르면 다시 눕고 부르면 다시 눕고 하지만 여전히 택한 자를 불러 일으키시는 주님 

            

 왜 일으키느냐?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는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를 찾으려고... 

            

 엘리와 한나의 신앙의 여정을 통해서 엘리이 사명이 사무엘에게로 옮겨가는 과정. 엘리의 입술을 통해서.... 

 여호와여 말씀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엘리를 깨우는 외침이기도 하다. 

 "내가 너 대신에 그를 부른다." 

 "내가 너를 불러야 하는데 네가 듣지 않으니까 그를 부른다." 

 

 이것은 엘리 입장에서 보면 땅을 쳐야할 일이요, 각성해야할 일이요, 회개해야할 일이었다. 

 세번의 부름을 통해 엘리는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런 일이 있다면 엘리 역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사울왕이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해서 사울의 왕권을 빼앗게 하지 않으신다. 

            사울의 궁으로 들어가 왕으로서의 행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오랜 기간을 통해서 보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엘리- 여호와께서 선하신 대로 행할 지니라. 

            사울- 네가 왕이 될 것임을 내가 아노라. 

            

            그들 본인의 입술을 통해서 자리를 물려주게 하신다.  

            

사무엘이 말씀하옵소서 종이듣겠나이다.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사무엘에게는 직접 말씀하심.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은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곧 일하심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하나님은 말만 해 놓고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라 말하시고 일하시는 분이시다.  

일을 행하는데 그것을 보는 자라 하지 않고, 경험하는 자라 하지 않고 "그것을 듣는 자"라고 하신다.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귀로 듣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는 것, 경험하는 것이 즉 하나님을 듣는 것이다. 

"내 말을 믿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하거든 나의 행한 일을 보라."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듭하시는 말씀) 


그냥 듣는 다고도 하지 않고 그 일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진동하리라. 땅이 진동하고 마음이 진동하리라. 

엘리는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는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심판하신 다는 것을 귀로는 알고 머리로는 알았어도, 그것을 경험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경험할 것으로 알았다면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 

"그가 아는 죄악" (13절)  - 하나님 당신이 아시는 죄악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아는 죄악,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 죄악. 외면하는 죄악. 자식을 사랑해서? 안들으니까? 설마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변명치 못하리라. 

                           

저주를 자청해도 금하지 아니하였다. 


우리는 저주를 자청하는 말과 행동을 한 적이 없었는가? 하나님을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는가? 

내 일에 급해서, 내 사정 때문에, 나 중심적으로, 바빠서, 게을러서, 마음이 심란해서, 그럴 마음이 아니라서.... 


사무엘에게 엘리는 어떤 존재였을까? 

7절에서 보았다시피 사무엘은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경험하지 못했다. 

단지 오직 엘리를 통해서 엘리에게 순종하며 성전일을 맡아 했을 뿐이다. 


그런데 첫번째 하나님의 경험이 그렇게 순종하고 따르던 엘리에 대한 심판의 말씀

얼마나 마음이 두렵고 떨렸을까? 


자, 지금 사무엘이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엘리에게 전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이 밝자 엘리가 불러 사무엘에게 묻습니다. 


"지난 밤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냐?" 

이것을 솔직히 말하기가 쉬웠을까요? 

대충 얼버무리는 것이 편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말은 해도 "하나님이 제사장님께 조심하래요. 홉니와 비느하스 때문에 아마 마음이 상하신 것 같아요..." 

최대한 엘리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자의 모습이지요. 


어쨌거나 솔직히 말하라는 엘리의 요청에 사무엘은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왜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첫 번째 만남을 이처럼 어렵고 두렵게 시작하셨을까요? 

선지자라는 것은 사람 눈치 안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첫 번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엘리가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며 훈계 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사무엘이 스승인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쉬웠을까요? 

엘리가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해야하는 것은 쉬울 뿐만 아니라 부모로서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자녀가 범죄하고, 혹은 성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누군가 자기 밑의 제사장이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면 당연히 훈계하고 벌을 주고 회개를 시켰어야죠. 

그런데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엘리는 그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중히 여겨서 그랬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좋은게 좋다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 마음 상한다고 잘못가는 길을 방치해선 안됩니다. 더군다나 공동체에 해악이 가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는 자를 자기 개인적인 감정이나 관계를 상치 아니하려는 목적으로 묵인한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사람에게 좋게하랴. 하나님을 좋게하랴. 내가 사람의 기쁨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라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쩌면 성도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모로서, 제일 힘든 것이 또한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했던 사무엘에게 나타났던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더니 그의 말에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을 가감없이 전하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과 열매가 일치됩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온 이스라엘이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십자가에 달리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말씀 

첫번째 (8장) - 베드로의 신앙고백 다음에 바로 -> 베드로의 항변 - 사탄아 물러가라 

두 번째- (9장) - 누가 크냐 쟁론

세번째 (10장) - 하나는 우편에ㅡ, 하나는 좌편에 


예수님은 죽으러 간다 하시는데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안 일어날꺼라고...날 좀 높여달라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왜?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 말을 믿는 자, 경험할 것이라 믿는자는 반드시 볼 것이다. 

그러한 자를 통해 일하실 것이다. 


But! 엘리의 반응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라."

놓치기 쉬운 애매한 답변 

아니 하나님은 지금 엘리의 집을 멸한다고 하시는데...

선하신 대로...(그의 눈에 보기에 옳은 대로...) 

결국 그가 아무리 말을 했어도 선하지 않은 일은 안하실 것이야....


뱀이 하와를 유혹 할 때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

안 죽을껄!...

선악의 개념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서 자기가 판단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


세 번 씩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또한 세번씩이나 엘리에게 경고하시고, 돌아오라 하신 분... 

그런대도 돌아오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도대체 그 담대함과 무식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눈이 점점 어두어서 잘 보지 못하니..." 


야곱, 모세, 여호수아...나이가 들어도 절대 영력이 시들지 않았다. 깨어 있었다. 

그런데 엘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죽었다. 결국 그는 버림 받고 사무엘의 시대가 열린다. 


사무엘이 자라매...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느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방법. - 여호와의 말씀으로...

그런데 그 말씀이 안들려 오고, 안믿어지고, 경험되지 않는다면...나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늙은 것이다. 눈이 어두운 것이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말씀으로 나타내시고 엘리에게 경고하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말씀으로 경고하신다. 듣는 자는 두 귀가 울리것이고 열매를 볼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03.09 05:20

    탁월한 해석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