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82020  이전 다음

  •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사무엘상 10장 1-9절  새로운 왕 


지난 시간 우리는 사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들어 쓰시는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9장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지파의 가장 연약한 집안의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 그러한 자기의 정체성을 잘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자, 잃은 나귀 하나를 위해 찾아헤멜 수 있는 한 영혼에 집중할 수 있는 자, 아버지 마음, 하나님의 의도를 잘 헤아리는 자 등에 관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주 들었던 말씀이라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과정들을 보면 하나님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취업생들 하면 흔히 스펙경쟁이라고 합니다. 하나라도 남들 보다 뛰어난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격증 하나, 시험 하나라도 더 보아두려고 합니다. 자기 PR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내세울 것이 있으면 자기를 표현해야 합니다. 겸손은 사회에서 생각하는 미덕이 아닙니다. 겸손하면 손해 봅니다. 자기 주장을 잘 해야 하나라도 이득을 챙깁니다. 

작은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기회를 잘 타야 합니다. 인맥, 학맥, 혈연, 고향, 요새는 하다못해 혈액형 까지 드러내며 기회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기준을 폐하시고 하나님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할 자,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무슨 일을 하던지 하나님의 마음 가지고, 사랑가지고 일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금그릇, 은그릇을 찾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찾아 헤메십니다. 


오늘 나눌 10장의 말씀은 그렇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1) 기름 부으심 

첫째로 택한 자 사울에게 행하신 것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

기름부음은 곧 특별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첫째되는 역할은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확인인데, 무엇을 위해 선택했는가라는 사명이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신약으로 가면 성령의 세례와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해 세례를 받으시면서 그 분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 즉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그는 불로, 셩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로 인해 성령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곧 이 땅에서는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위임받은 이 땅의 왕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의 왕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의 책무는 하나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이요, 그 방법은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하늘나라의 백성들의 표징은 섬기는 자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신 것 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는 열광적으로 기도하고, 어떤 문제든 끄떡없고, 늘 마음이 기쁘고, 병마를 내어 쫓는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만병통치약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사명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 개인을 위해 선택의 표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선택임과 동시에 이 땅에서 섬김을 다하라고 주신 능력의 표징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2) 세가지 표징 

사무엘은 사울에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면서 귀가길에 일어날 세가지 일들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 세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라헬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 암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이요, 

둘째, 다볼 상수리나무 곁에서 세 사람으로부터 떡 두 덩이를 받게 된다는 것이고,   

셋째, 하나님의 산에서 선치자의 무리를 만나 하나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그대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 주신 세가지 표징은 무엇입니까? 

암나귀를 찾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은 사울이 해결해야할 문제의 해결을 말합니다. 그가 여기에 온 까닭은 암나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세사람으로부터 떡 두덩이를 받게 되는 것은 새로운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에게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더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구한 것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흔들고 넘치게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세번째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 하나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받을 영적인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내주하시지만 고린도전서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은 우리가 또한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외적은 능력, 은사를 주십니다.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그런데 이 세가지 표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하는 문제가 해결되고, 그 위에 넘치도록 부어주시고, 영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그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증이요, 내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보장입니다. 


[엡 1:17-19]

...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1)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2)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3)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에게 이러한 성령을 부어주심은 먼저는 1)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2) 우리게에 주신 소망, 사명이 무엇임을 알게 하시고, 3)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좀 더 보겠습니다. 

4장 17절부터 19절까지 말씀을 보면 옛사람과 새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옛사람은 성령을 받기전, 사명 받기 전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22절부터 24절까지 말씀을 보면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즉 기름부으신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새사람입니다. 썩어져가는 세상을 위해 구습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새사람을 입은 자들입니다. 


결코 그냥 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 일하는 자들에 의해 감당이 됩니다.  

성령으로 일하지 않고 사랑으로 일하지 않으면 자기 의를 나타내다가 결국 분쟁을 일으키고 분열하게 합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을 허락하신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굳은 마음을 제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7절) 무슨 말입니까? 성령으로 새 사람을 입었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 네가 맡겨진 일대로 행하라. 내게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일하라. 

로고스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올 때에 순종하여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동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3) 7일동안 기다려라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일 동안 기다리라.

성경에서 7은 완전한 수. 7일을 기다리라는 것은 온전히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미 기름을 부었고, 성령을 받았어도 내 마음대로 나가서 일하다가 실수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선지자, 믿음의 선배와 주의 종의 말씀으로 항상 훈련하고 배워서 무엇이 주의 뜻인지 분별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은 제비뽑기를 통해 사울이 모든 백성들에게 왕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로 다윗도 먼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사무엘로 하여금 기름붓게 하지만 그것으로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훈련의 기간, 분별의 기간, 순종의 기간을 거쳐 백성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왕으로 임명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도 항상 순리대로 진행되어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 교회에서 일을 할 때 은혜란 미명으로 마음대로 무질서하게 한다면 결코 덕이 되지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충만했지만 질서가 없었기 때문에 문란해지고, 분열되고, 어지럽혀졌습니다. 성령은 자유롭지만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자,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을 똑같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성령으로 기름부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간구할 수 있고, 은혜얻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것 뿐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것에도 넘치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은 우리에게 문제해결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은혜 충만 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 구원 받은 자가 바로 천국 가지 않고 이 땅에 살아갈 시간을 주신 것은 사명을 이루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서 우리가 새사람 되게 하셨습니다. 썩어져 가는 옛 구습을 따라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새사람을 입은 우리가 똑같이 옛사람처럼 살아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사명을 위해서 신령한 은혜와 성령을 부어 주셨는데 그 성령 가지고 맨날 자기의 육신과 몸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아니 그러한 은혜 조차도 바라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정말 무력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주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를 뽑습니다.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오묘한지 누가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이스라엘의 새 왕을 뽑는 장면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삼상 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누가 되던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나라의 법과, 국민의 선택을 존중하고 국론을 모으고 힘을 합쳐야 합니다. 

새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 사람은 틀렸다 안됐다 하면서 분열하면 정말 우리나라는 소망을 잃어갈 것입니다. 

잘못하는 것은 엄히 꾸짖되 일 할 때에는 믿어주고 지지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왕이 아닙니다. 

우리는 민주국가 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왕된 나라입니다. 대통령은 심부름꾼 입니다. 

일을 시키고, 감시하고, 봉급을 주는 모든 것이 국민이 주인 되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다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각가자 다 왕이 되어서 살아가고자 했던 시대가 사사기 시대입니다. 각자가 다 왕이 되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무질서해지고, 타락하고, 범죄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자는 하나님이 왕된 나라를 세워가는 사람들 입니다. 대통령이 국민의 심부름꾼인 것처럼, 왕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 가는 거룩한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사람을 입을 때에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삶 가운데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안에 다시금 새로운 기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새사람을 입도록 기도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무엘상 9장 1-10절  (하나님께 구한 자) 


  • 지난 시간 우리는 사무엘의 실패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다스렸던 사무엘이 이제 백성들로부터 왕을 세워달라는 요청에 시달립니다. 

사무엘의 신앙으로 보면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할과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말을 다 듣도록 명하셨습니다. 

다 들으라는 것은 선입견을 버리고 끝까지, 충분히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Zero Base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말을 불신하고 듣지 않을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듣는 데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들어보면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보다 자기의 간구만 외치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음을 봅니다. 


기도는 말하는 것을 넘어 듣는 것입니다. 자기의 간구를 넘어 자신의 영을 두드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기도에 충실한 사람은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 되는 것이요, 듣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분별하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내가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 믿음을 넘어섭니다. 내 뜻, 내 확신 보다 넘어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앞에 더욱 겸손해졌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주장하던 자에서 이제는 듣는 자가 됩니다. 그 과정 중에서 변치 않는 것은 그의 기도의 태도입니다. 

그는 상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했으며, 백성들의 거센 요구에 다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불완전한 그를 온전케 만들었습니다. 


  • 사무엘상 10장은 이 사무엘이 백성들이 구하고 하나님이 뜻하신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는 분명 불신앙적인 모습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구함에 최선의 사람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울의 이름의 의미는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울을 악한 왕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는 것은 백성이 악한 의도로 하나님께 왕을 구했기 때문에 사무엘이 백성에게 경고한 대로 악한 왕을 주어 그들에게 불신앙의 대가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의 시작부터 불신의 모습으로 그를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데 사무엘이 외모로 골랐다가 낭패본 사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말씀을 살펴보면 사울은 변질된 자이지 시작부터 그릇된 왕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으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어디서부터 넘어졌는지 알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 잘 하다가 넘어진 사람,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가 지금은 변질된 종이라 하더라도 그 인생을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하였나를 살펴보면 인간이 보편적으로 넘어지기 쉬운 실패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실패를 위해 준비된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잘 이끌어 줄 사람으로 선택된 자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선택을 통해, 그리고 금요예배시간에 사사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는 자들의 특성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쓰시는가 하나님의 선택기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베냐민 지파

베냐민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막내아들이었습니다. 막내 지파입니다. 다윗도 막내아들이었지요. 

이 베냐민 지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분배 받습니다. 


(수 18:11) 베냐민 자손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제비 뽑은 땅의 경계는 유다 자손과 요셉 자손의 중간이라


지금으로 말하면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는 힘없는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거기다가 사사기서 18장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 윤간하여 죽게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지파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600명의 장정들밖에는 살아남지 못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원래 세력도 약한 데 거기다가 또 징계로서 떼죽음을 당했으니 가장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였습니다.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이 고백은 단지 의례껏 하는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진정으로 말하는 자기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한 사람이 또 한명 있습니다. 

(고전 15:9-10)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바로 또 한명 등장하는 사울, 사도 바울입니다. 12사도 밖에서 세워진 가장 마지막 세워진 사도, 어쩌면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할 때에 사울의 고백을 기억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수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었을까? 

사사시대는 각 지파 중심으로 사사가 등장해 그 지파를 구원의 길로 인도했지만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왕은 12지파를 통솔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각 지파 간의 결속과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머지 각 지파간의 불필요한 상호 견제, 시기, 경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들이 말하고 있는 것도 무엇입니까? 이제는 예전처럼 과반수 정당이 없으니까 협치해야 한다. 연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베냐민 지파는 당시 12지파 중에 주도적이었던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 사이에서 갈등과 주도권 싸움을 방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2)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아 헤메이는 자 

사울의 소개를 하면서 함께 등장하는 것이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아 방방곡곡 헤메이는 충실한 아들의 모습입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잃은 나귀를 찾으라는 명령에 산지와 땅을 두루 찾아 다닙니다. 하는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실히 수행합니다. 4절 한 절에만 "두루 찾아 다녔다"는 말이 세번이나 반복됩니다. 두루는 처음부터 줄곧 쭉, 샅샅히...그의 성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자와 곰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돌팔매질을 연습하여 그들을 상대했고 잃은 양을 찾아 헤메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한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헤메는 목동의 심정, 주인의 심정을 말씀하십니다. 


독일의 총리후보자들이 TV토론에 나와서 발표를 하는데 진행자가 한 유력한 후보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조국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총리 후보자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사랑합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답변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난 내 가족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국가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개념입니다. 가정이 모이고 민족이 모여 이룬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이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국가의 리더자들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을 강요해왔습니다. 실체가 아닌 개념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총리는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곧 가장 작은 공동체 가정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한개인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나라사랑이 시작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것은 가정이라는 개념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녀, 아내, 남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은 교회라는 건물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속한 한 사람, 한 영혼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리더자는 결국 한 영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잃은 한 마리의 나귀, 한 마리의 잃은 양, 연약한 한 지체를 보살피는 마음이 목자의 마음이요, 리더자의 마음입니다. 


  • 5절의 말씀은 그가 나귀를 찾다가 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돌아가고자 하는 사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작은 목적 때문에 큰 목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작은 근심은 잃은 나귀였지만 그렇다가 자신이 길을 잃으면 더 큰 걱정이 될 것입니다. 그는 맹목적인 성실함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자였습니다. 


3) (삼상 9:6)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 사환의 이 말은 사무엘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의하여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분명혀 보여 줍니다. 이것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3:20) 라는 말씀이 실제적인 사실이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 이것은 참 선지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객관적 증거였다(신 13:1-3; 18:21, 22). 

또한 이것은 3 : 8에서 본서 저자가 "여호와께서...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말한 바가 실제로 백성들에게 사실로서 인정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사환의 말은 그가 사무엘의 선지자됨을 온전히 믿었음을 보여주면서 신앙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문제들 까지도 선지자들에게 물어보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 뒤의 구절들을 통해서 사울은 선지자에게 드릴 예물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잘 훈련된 신앙인임을 보여줍니다. 준비된 예물은 돈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예가 몸에 마음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울은 사환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듣고 따릅니다. 사환의 말을 듣고 인생을 바꾼 위인이 누구입니까? 나아만 장군이 있지요. 예수님도 작은 어린아이를 말씀하시면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마 18장 

천국에서 큰자 : 천국에서 누가 크나이까? (1절) 

3절: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잃은 양 비유... (12-14절) 


(삼상 9:2)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


그러면 이 말씀이 해석이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중 가장 큰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외형이 큰 것이 아니라 작은 영혼에 집중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비의 잃은 나귀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사환의 말에 귀 기울여 그의 말을 따릅니다. 

작은 자를 귀히 여기는 마음, 바로 다윗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마음입니다.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좀 꺼내보려고 합니다. 

제가 목회자가 될 때에, 그리고 목회를 시작할 때에 어머니께서 가장 강조하시던 말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처믐 담임으로서 인사할 때 사명의 말로서 기억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그 한영혼에 대한 감격이 사라질 때가 있었습니다. 왜 열심히 하는데 사람이 안올까? 

내가 무엇이 부족하지? 


그런데 어느날 새벽예배를 드리는 데 그 한 영혼에 대한 감격이 폭포수같이 밀려 왔습니다. 

집사님 한 분 모시고 예배를 드릴 때가 많은데 그 영혼이 날 살리고 그 영혼을 위해 내 영혼이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며 나누고....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그 영혼이 정말 내가 말한 대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내가 경험하게 하시는구나...


대통령 선가가 한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정말 좋은 대통령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잘 치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대통령이란 누구일까? 

가정을 잘 다스리고 (디모데후서 감독과 집사의 조건) 

한 개인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

한 개인의 생명을 위해 국가가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대통령을 꿈꾸어 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무엘상 8장 1-9절   사무엘의 실패 


다시 사무엘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무엘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막상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각자가 왕이 되고 우상을 섬겼던 사시시대를 마치고 왕정의 시대가 열리는 배경을 나눈 성경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의 상징인 다윗의 시대가 열렸는지를 알리는 성경입니다. 


사순절 본문 이전에 우리는 사무엘상의 7장까지를 나누었고 오늘은 8장을 나눕니다. 

사무엘상 8장은 사무엘의 전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전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의 실패를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의 교훈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7장의 끝은 사무엘의 치리로 인한 태평성대의 소식을 전합니다.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보호) 

(삼상 7:14)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회복과 평화) 

15-17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는 말의 반복 


그러니까 7장에 사무엘의 시대가 열렸는데 8장의 시작은 사무엘이 늙었더라로 시작됩니다. 보호하심과 회복, 평화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 삼상 8:1) 사무엘이 늙으매...

8장의 시작을 통해서 몇가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평화의 시대를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보낸,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평화의 세월은 단 2장으로 압축합니다. 평화의 때는 하나님이 잘 보여지지 않습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곧 문제의 역사입니다.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만약 드라마를 하는데 문제도 없고 갈등도 없으면 그것은 드라마일 수가 없습니다. 


둘째, 사무엘이 늙을 때부터 오히려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됩니다. 

8장에 사무엘이 늙었다고 나오지만 이 때부터 사무엘의 사역이 주춤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때부터 하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됩니다. 사울을 세우고 다윗을 세우고 그들의 흥망성쇄를 사무엘이 함께 합니다. 

아브라함의 사역이 75세때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작되고, 모세의 사역은 80세때 시작됩니다.

세상은 점점 '빨리', '일찍'을 외치면서 늙으면 빨리 은퇴하라고 말하는데 성경처럼 노인들을 잘 대접하는 세계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사무엘도 사실 늙고 나서 비로서 성경의 한 역사를 장식합니다.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에게는 요엘과 아비야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사무엘을 따라 의를 행하지 않고 뇌물을 받고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 악한 제사장들이 됩니다. 

참 당황스러운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다루면서 이들의 잘못된 행위 뒤에는 아버지의 영적인 둔감함과 나태함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선지자 중의 대표자라고 할 정도로 성실하고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러면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반대되는 그런 아들들이 나와야 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 몇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가정에는 소흘했다. 

어릴적 너무 일찍 성전에 맡겨져서 아버지의 상에 대한 학습이 없었다. 어릴적 부터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나랏일과 성전일은 잘 돌보았지만 가정일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무엘에 비해 두 아들이 뛰어나지 못한 것이지 요엘과 아비야가 결코 악한 사사가 아니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바로 사무엘의 둘째 아들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이라고 소개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설명들은 변명정도로 여겨지지 두 아들의 악한 행위에 대한 적당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하는 자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우리에게 피하고 싶은 구절입니다. 

또한 모세도 실수하는 장면이 나오고 다윗도 실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앞에 실수하는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인생의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답을 구하지 못할 일들이 많고, 하나님의 섭리 역시 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 분명한 것은 엘리가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생각하여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이 곧 엘리의 죽음을 이끌었지만 사무엘은 자녀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히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 5절)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않으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 원인은 사무엘은 늙어 다스릴 만한 힘이 없고 아들들은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달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백성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스스로 서지 못하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사시기서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시기 시대는 각자 개인이 왕이 되어 활동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사도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쪽 지파, 저쪽 지파 다양하게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긴 사사시대를 지나면서 그들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고, 그들을 다스릴 대언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책의 기준으로 그들이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답을 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와 같이" 믿지 않는 나라들이 그들의 판단 기준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나라 중에 뛰어나게 하시어 열방을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생각은 광야에서와 마찬가지로 항상 "나도 저들처럼..."하면서 세상이 기준이 되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 구별코자 하시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그들을 바라보며 닮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 6절)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자신이 늙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당신 이제 늙었어 하는 것은 너무 다르지요? 거기다가 자기의 자식들이 잘못했어도 그것을 직접 지적하며 바꾸어 달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사무엘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상함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사무엘은 위로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상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하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7절)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9절) 먼저 듣고 경고하고 가르쳐라.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가/아닌가입니다. 


사무엘은 백성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3가지 메시야직에 대한 예언을 통해, 제사장, 선지자와 함께 왕을 세울 것을 미리 계획하셨습니다. 

그 왕의 계보를 따라 다윗왕이 나고 그 다윗왕의 계보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왕을 백성들이 요구한다고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차근차근 왕을 세울 단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백성의 이야기를 다 들으라!(7절) 9절에도 먼저 듣고 경고하고 가르쳐라! -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무엘의 생각을 만지시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10절부터 사무엘의 행동을 보면 무엇부터 행합니까? 

먼저 왕을 세웠을 때에 나타나는 부작용부터 이야기 합니다. 경고부터 하는 것이지요. 

17절- 18절 )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왕을 세우면 이제 하나님이 너희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백성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19절) 백성이 하나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NO! 

소통의 단절이 옵니다.

21절)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22절)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 하나님은 듣고 경고하고 가르치라 하셨는데 사무엘은 가르치고 경고하고 듣는다. 순종의 순서가 바뀌었다. 

이 구절은 처음에 백성이 사무엘에게 요구하며 사무엘로 하여금 백성을 설득하는 내용을 띠지만 자세히 들여야보면 오히려 하나님이 사무엘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고 자녀양육도 마찬가지고,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목사가 성도들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성도가 목사를 가르치는 것이고,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자녀에게도 부모가 배웁니다. 


우리는 엘리와는 달리 기도의 사람이었던 사무엘이 왜 자식농사에는 실패했을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때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사람 말 듣기에 실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가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에 너무 말이 안 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어찌보면 자녀들이 이런 저런 요구를 하는데도 사무엘은 자신의 신앙 기준을 자녀들의 기준으로 삼아 엄격하게 금지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 못하는 것이 많을수록 자녀들은 불만이 쌓이고, 결핍되는 마음을 물질로서 채웠는지 모릅니다. 


감정이 상한 상태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한 감정의 기도도 하나님께서는 즐거이 받으시고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실패는 상한 마음으로 기도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후에도 그 상한 마음이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상한 마음 그대로 백성들을 상대하다가 오히려 백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익숙하지만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은 필요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많은 기도의 사람들도 이런 실수를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왜 실수입니까? 우리는 솔로몬에게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왕상 3:7-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 (예전 성경: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종이고 작은 아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가장 낮추고 하나님을 높임과 동시에 백성들을 주의 택하신 백성, 큰 백성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높입니다. 

이것이 참 왕의 마음임을 보여 줍니다. 


  •  "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주님은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를 간구했지만 제자들도 사람들도 듣는 데 실패합니다. 듣는 데 실패하니까 십자가를 진다는데 누가 크냐 싸우고 부활을 이야기 했는데도 모두 도망갑니다. 


참 지혜는 무엇입니까? 참 왕은 무엇입니까? 잘 다스리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잘 듣는 자입니다. 듣는 것이 지혜입니다.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언제나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잘 들어야 하지만 사람들의 말도, 자녀들의 말도, 형제들의 말도 잘 듣는 것, 깊게 듣는 것, 경청이라는 것은 예를 다하여 듣는 것입니다. 

 머물르면서 듣는 것입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실패였지만 이 실패를 통해 사무엘은 한단계 더 성숙하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에게서 듣는 자가 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에벤에셀의 회복 (사무엘상 7장 1-12절)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결국 하나님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말씀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곧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브레셋과의 전쟁에서 대패, 홉니와 비느하스의 죽음, 법궤를 빼았기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가 죽은 이야기, 그 충격으로 갑자기 애를 낳다가 죽은 엘리의 며느리, 그가 외친 말 ‘이가봇’, 말 그대로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난 상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나자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입니까? 곧 허랑방탕하고, 재산을 탕진하다가 결국 돼지 쥐엄열매를 먹고, 그 조차 먹지 못해 구걸하는 신세...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자 물고기 뱃속에 갇혀 살려달라고 외치는 상태... 




가끔씩 신앙을 불평하면서 내가 교회를 안다녔으면 그 시간에 공부해가지고, 더 좋은 학교에 가고, 헌금 낼 돈 모아서 사고 싶은 것 사고... 신앙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처소를 떠난 인생은 그야말로 이가봇의 삶을 삽니다. 제게 주신 은혜가 있다면 한번도 하나님을 떠난 삶을 상상하지 않은 것... 




금요예배 때에 말씀을 전해주신 목사님...


좋은 직장도 그만 두고 목사가 되어,  더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유학까지 왔는데... 아이의 병으로 말미암아 목회도 그만 두고, 학업도 그만 두고...  이젠 택시 운전하면서 아이의 치료를 계속해야 하는데....곁에서 바라볼 때 조차도 그 신앙이 어찌 유지 될 수 있을까? 아니 신앙은 고사하고 그 삶을 어찌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와서 전해주신 첫 마디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평화, 평화 하나님 주신 선물에 목매어 하던 그 모습... 




그 모습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도 참 고민이 많았지만...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 신앙이 부끄러워지는... 


파도 위를 걸어서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하면서 하나님께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 


"아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00명의 사람들이 있다."  


엘리야도 모르고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숨어있는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교회 찾기 힘들고, 믿을 수 있는 목사를 찾아보기 힘들 때에 그래도 하나님의 교회에는 순수한 신앙을 위해 몸부림치는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7개월 동안 떠나 있던 법궤가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스스로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찾아왔습니다. 


제사장들로 모여진 벧세메스 사람들마저 법궤를 들여다 보고 죽임을 당하자 법궤는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통해 20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산에 사는"이라는 말이 눈이 멈추어 집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랐지만 산에 올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소수였습니다. 


산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장소입니다. 자신을 비워 주님을 따라가는 장소입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구별된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할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법궤.


홉니와 비느하스-


다곤 신전- 


벧세메스- 




하나님의 이름이 능욕당하고 거절 당하고 외면당하는, 도저히 함께 거할 수 없는 그런 곳을 떠나 거처를 찾아 헤메는 법궤. 


요한복음 1장 -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 체험하고 싶다"라는 소망. - 말씀 묵상, 말씀을 통하여...


시편 1편의 복있는 사람,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 예수 그리스도. 




이 2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사모했다"고 전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법궤가 사라지면 이스라엘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체험하고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후회에 가까운 것이고 자기 연민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사라지면 재앙이고, 곁에 두자니 불편하고 두렵고.... 

이것은 은혜가 임한 것이 아닙니다. 법궤가 돌아왔지만 그들과 함께 거할 수 없어 산 위에 올라가 가까이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슬픔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무엘이 등장하여 이른바 미스바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이때의 미스바라는 장소를 따서 많은 집회의 이름이 미스바 집회, 미스바 회개 운동 등으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미스바는 "망대" 즉 파수꾼이 망보는 곳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영적인 의미로는 깨어라, 깨어있으라는 말입니다. 


슬퍼하지만 말고, 두려워하지만 말고 하나님 앞에 깨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은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로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전햇던 세겜 언약에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 우상 섬기고 이방신 섬기고, 세상에 기대어 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삶이 지속되면 알게 모르게 하나님 아닌 가까운 것, 빠른 것, 쉬운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밖에 나가면 때가 쌓이듯 세상에 살면서 깨어있고 회개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우상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상은 끊임없이 믿는 자를 넘어뜨리고 유혹하고, 하나님이 아닌 돈을, 물질을, 권력을, 힘을, 세상을 의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물을 여호와께 붓는 것은 '자신들의 죄과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실제적 회개'를 의미합니다. 마치 물을 부어 쏟듯이 자신의 마음 전부를 다 내어놓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방법으로 금식을 했다는 것은 주의해서 살펴야 합니다. 


죄의 성격은 욕구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죄의 통로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것이 먹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가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식욕을 다스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드릴 것도 빼앗아 먹었습니다. 엘리는 너무 먹어 몸이 비대하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들은 먹은 것에 지배당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먹지 않고 욕구를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진정과 겸손으로 회개한다는 구체적인 표시로 '금식'(fast)란 방법이 채택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전심으로 회개하며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을 때에 블레셋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사단의 역사도 함께 일어납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먼저 방해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그들은 교활해서 우리가 결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 하면 일을 만들고, 몸을 치고 마음을 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깨어있는 자는 그러한 일이 나타났을 때에 사단의 정체를 발견합니다. 사단에게 무릎꿇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니까 결심해도 일생기면 포기하고 낙담하고 맨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블레셋이 쳐들어 왔다는 것을 듣고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쉬지 말고 부르짖어달라" 요구합니다. 


그들은 군사를 모으지 않았습니다. 두려웠지만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니까 기도를 통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온전한 번제"란 말에 주의하십시오. 


블레셋 사람들도 볍궤 앞에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는 드렸지만 자기 마음대로 독종과 금쥐를 만들어 예물로 드렸습니다. 


신앙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생활은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되야 하지만 형식도 있어야 하고 방법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번제입니다. 




기도하며 번제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군사 하나 모으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우레를 내려 그들을 어지럽게 하여 흩어지고 스스로 무너지게 하삽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기게 합니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장소를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의미의 에벤에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에벤에셀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삼상 4:1b)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들은 이미 에벤에셀에 진을 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블레셋과 싸우려 했습니다. 


거기서 패하자 "아니 어찌하여 우리가 패하였는가?"하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그러고 실로에 있던 법궤를 가져다가 또다시 전쟁하여 대 재앙을 맞습니다. 


그 장소도 역시 에벤에셀 입니다. 




똑같은 에벤에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4장과 7장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의는 해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패하자 우리가 왜 졌을까? 하면서 궁리하여 법궤를 가져오게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여전히 범죄하며 단지 형식만 남은 경건, 부적과도 같은 신앙생활만을 합니다. 




그런데 7장은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곁에 없을 때에 자기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법궤는 산위에 엘리아살이 지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상을 제거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회개와 기도,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이자 능력입니다. 




우리는 엇그제 헌신 예배를 통해 한끼 금식을 작정했습니다. 


굶는 것으로 작정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 삶의 우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스바의 부흥회가 우리 로고스교회에 열려야 합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