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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사무엘상하'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7.07.03 왕의 후회 (사무엘상 15:9-23절)
  2. 2017.06.15 어긋나는 승리
  3. 2017.06.10 조금함과 믿음 (삼상 13:5-14절)
  4. 2017.06.02 사무엘상 12:6-25 여호와 앞에서 담론하자 

왕의 후회 (사무엘상 15:9-23절)


  • 본문은 사무엘이 사울로 하여금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멜렉은 블레셋보다 더 오래된 이스라엘의 적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난 후에 시작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자 마자 사탄의 시험을 받듯이 하늘의 양식인 만나, 즉 말씀과 반석의 물, 은혜를 맛본 이스라엘 민족들이 비로서 만나게 되는 대적이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 에서의 후손입니다. 즉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늘의 축복을 팔아넘긴 육적인 욕망 덩어리를 대표하는 것이 아말렉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제자였지만 돈 궤를 맡다가 도리어 돈에 눈이 어두어 은 삼십냥에 예수를 팔아 넘기는 돈의 노예가 됩니다. 신앙인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언제나 돈의 영향력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돈으로 인해서 신앙을 타협하고 포기하고 외면하면 결국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모세는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손을 들고 기도함으로 물리쳤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했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기도해서 돈이 나오냐 기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들 중에서도 평상시에는 기도하다가 정작 문제가 닥치면 기도하지 못하고 해결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 지혜를 주십니다. 기도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은 기도하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문제에 압도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 사람의 육적 욕망을 의미하는 세력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 하나님은 실수하고 범죄한 사울에게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줍니다.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음에도 제사하며 승리를 구했던 사울에게 불완전하지만 요나단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주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음식을 먹지 말것을 명령하여 그것을 어긴 요나단을 죽이야만 했던 사울의 거짓 서원에도 죄를 묻지 않습니다. 

1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또다시 사무엘을 보내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제라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돌아옴의 표시로서 아말엑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안의 육적인 욕망을 제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육체를 사랑하고 물질을 사랑하는 욕망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자기 안의 모든 육신적 욕망,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탐욕과 정욕을 못박으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아말렉과 승리하게 하신 후에 아말렉은 천하에 기억도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승리이시다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 바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육신과 싸워 이기는 자입니다.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는 예수의 승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쳐서 무찔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리라. (9절) 


아각은 아말렉의 왕의 칭호입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 로마의 왕을 가이샤라고 말하듯 아말렉의 왕을 아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말렉을 치면서 왕을 멸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의 모든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고 자신이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서를 통하여 기드온의 실패를 나누었습니다. 

300명으로 13만 5천의 미디안 군사를 물리쳤던 기드온의 실패는 미디안의 남긴 보물들을 자신이 소유하고자 했던 탐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탐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보물로 에봇을 만들어 물질을 섬겼습니다. 물질을 섬기니까 그 물질의 자녀 아비멜렉으로 말이암아 집안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용사를 실패하게 하는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여기에서 지면 어떤 은혜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육신과의 전쟁에서 실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자 11절에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가 나를 따르지 않고 내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자기 소욕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찾아온 사무엘에게 사울의 첫 마디가 무었입니까? 

"13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사무엘이 그가 남긴 양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의 죄를 지적하자 사울이 뭐라 말합니까?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자기의 책임을 누구에게 넘깁니까? 백성에게 넘깁니다. 무리가 가져왔다고 합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나님을 가리켜 뭐라 말합니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 " 

21절에도 똑같이 백성이 그랬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그랬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끝까지 사울을 돌이키려 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17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십니까?" (19절) 


사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는 실로 (진짜, 정말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텅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20-21절)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고 남에게 전가하고 결국 하나님께 탓을 돌립니다. 

이젠 내가 이거 해서 너의 하나님께 제사할 꺼라고.....


ex) 땅 잘팔리게, 도박하여, 복권에 당첨되어 헌금내야지..... 그런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무엘은 그  유명한 구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이를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음이라."(22-23절) 

뭡니까? 

 점치고 우상에게 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래 입니다. 내가 이것 해 줄테니 결국 나 잘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맺어진 관계인데 사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를 원하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만 갖다 놓으면 전쟁에 이길 것으로 생각하듯 사울에게 하나님은 제사만 잘드리면 복 주시는 분, 헌금만 많이 내면 복주시는 분....그것은 결국 점치는 우상숭배, 샤머니즘 신앙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언제 후회합니까? 

 사무엘이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나이다. 

 이제 왕이 못될 것이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내가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범죄하였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안된다고 하니까, 이제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자기 삶이 힘들어질 것이라 하니까 잘못했다고 자기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말을 두려워하여 백성의 말을 따랐다고 말합니다. 

어디 그가 백성의 말을 두려워했습니까? 


사울이 사무엘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30절) 


아 어떻게 이렇게 까지 뻔뻔할 수 있을까?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있으니까 예배 잘 드리는 척이라도 하고 가라고 지금 바지자락을 붙잡고 비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는다는 소릴 듣기가 두려워서 자기 무기든 소년에게 죽여달라고 하는 것과 사울이 후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에게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죽는 것, 결국 자기 체면, 자기애로서 가득찬 인간의 비굴함과 연약함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처음엔 그런 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모습을 아는 겸손한 자였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효자였고, 또 성실히 일하는 자였습니다. 

왕이 될 만한 자질이 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왕이라는 자리가 사울의 모든 것을 망쳐놓았습니다. 

왕이라는 자리가 사울의 인격과 양심과 모든 신앙을 더렵혀 놓았습니다.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열심내어 신앙생활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세상에서의 기득권과 축복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해서 하나님보다 성공을 붙잡고 살다가 이제 그 자리가 위태하니까 회개하는척 하다가 신앙을 회복하려 하기 보다는 세상에서의 체면과 명예를 유지하려다가 더 큰 수치를 당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안주실까?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의 복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세상의 복, 물질의 복, 성공의 복이 오히려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망쳐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의 제목은 왕의 후회입니다. 

사울왕은 지금 육신의 정욕을 채우려다 영원한 왕의 자리를 잃어버릴 지경에 온 자신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마치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빼앗겨 버렸던 아말렉의 시조인 에서처럼 사울은 탐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아닌 또 다른 왕의 후회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후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말을 떠났고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자유는 그 분 안에 거할 때 얻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탐심 때문에 하나님안에 거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지금도 팥죽 한 그릇에 영생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말렉은 진멸시켜야 합니다. 

육신의 소욕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나의 삶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적은 없었을까? 


제가 어느 새벽예배때 받은 은혜를 적은 글을 나누고 설교를 맞칩니다. 



어느 새벽기도 시간에.....


너무 외롭고

너무 힘들고

너무 가난해서....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갈급하고

앉으면 "주여!" 한마디에 가슴이 매어지고 

한 마디 말할 수조차 없어서 한숨만으로 이루어진 기도를 드리는 


그저 날 불쌍히 여겨달라고

날 좀 구해달라고 

하는 그런 숨막히는 공간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가장 순수하며 

가장 진실하며 

가장 갈급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때라는  

감동이 

위로가 

하나님의 따스한 격려가 


오늘 

나에게 주어졌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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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난 승리 (삼상 14장 36-46절) 


지난 주 우리는 믹마스 전투에 임하는 사울의 태도를 통해 그의 조급함이 어떻게 믿음 생활에 악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명하신 하나님과 이미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위해 사울이 지켜야 했던 것은 7일이 될때까지, 즉 하나님이 약속하신 때가 되어 사무엘이 도착하여 하나님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사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모여들었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흩어지고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사울은 다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7일째가 되자 마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다가, 사무엘이 도착하여  "네가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마치 자식을 주리라는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하갈을 취하여 자신이 그 약속을 이루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급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는 데서 오는 불신앙이고 그 약속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교만함에서 나옵니다. 

반대로 신앙은, 믿음은 조여오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하나님의 약속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은 느긋함이 아니라 간절한 기다림이고 간절한  목마름입니다. 


  • 이제 14장에서는 믹마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울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믹마스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이 납니다. 때때로 우리가 실수하고 불완전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변함없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결과가 나타날 때에 안도하고 넘어가기 쉽지만 나의 불완전한 믿음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사울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 지금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믹마스라는 지역에 블레셋 군이 주둔해 있고 지금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직 베냐민 지역에서 주둔하고 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들은 병거만 삼만이고 군사는 바다의 모래와 같은데 이스라엘 군사들은 삼천명쯤 모였었다가 지금은 그나마도 도망하여 600여명만 남아있는 상황입니다. 


  • 그런데 이 상황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처신이 극한 대조를 일으킵니다. 

먼저 사울은 사무엘을 대신하여 아히야를 자기 옆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삼상 14:3) 

그런데 이 아히야는 어떤 자입니까?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적에 패하자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다가 이기려고 하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이사봇, 그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가봇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꾸중을 들은 사울이 찾아 제사장으로 세운 자가 바로 이 가문에 속한 이가봇의 형제의 아들, 비느하스의 손자, 엘리의 증손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기 보다는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제사장을 세운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블레셋 군사 진영이 혼란스럽게 되자 18절에 보면 아히야에게 시켜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명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짓을 똑같이 저지르게 되지요. 

이것은 무슨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참 제사장이라면 이 법궤 앞에 서는 것 조차 두렵고 떨릴 일이요, 그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은 지기의 필요에 따라 법궤를 이리 가지고 왔다 저리 가져갔다 합니다. 자기가 필요할 때면 법궤를 가져다가 하나님보고 도와달라 하고 필요없으면 눈앞에서 치워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누가 누구를 부리는 것입니까? 철저히 자기가 주인되어 하나님을 부리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주인된 신앙입니다. 


  • 이 때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든 자, 즉, 보디가드, 호위무사를 앞세워서 단독으로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나타나는 행위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1절) 이요, 자기의 군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고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면서 블레셋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합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진격하여 내려오면 올라가지 말고 도망할 것이요, 만약 블레셋 군사들이 요다단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표징으로 알고 올라가자 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행위는 미디안 군사들을 향해 승리했던 큰 용사 기드온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은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대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요, 그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표징을 구했던 기드온의 모습과도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단 가운데 역사하시어 블레셋 군사들을 일대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런데 14절, 15절 보십시오.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자절 갈이 땅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명 가량이라.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여러분 지금 블레셋 군사가 몇명입니까? 셀 수 없이 많은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죽인 자는 고작 20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여금 블레셋 모든 진영과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땅이 진동하였다고 말합니다. 큰 떨림이 일어났다고 증거합니다. 믿음의 행위는 이런 영향력입니다. 언제 이런 큰 떨림이 일어납니까? "주의 말씀 선포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하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에 이런 큰 떨림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이지만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드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그 지역의 모든 자들을 먹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 행위 자체는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큰 떨림이 있고 땅과 하늘이 움직이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 다시 사울로 돌아옵니다. 파숫꾼이 보니 블레셋 진영의 무리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합니다. 점호를 해 보니 요나단과 무기든 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게 합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홉니와 비느하스가 행한 것처럼 법궤를 가져와서 전쟁을 치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 세워서 전쟁을 승리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니까 블레셋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어도 그들 스스로 죽이고 흩어지고 하니까 사울이 뭐라 하냐면 아히야에게 "네 손을 거두라" 무슨 의미냐면 이젠 법궤도 필요없다. 이젠 우리가 이겼다...철저히 자기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법궤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승리로 말미암아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1절) 세상으로 타협하며 나갔더 자들이 다시 신앙 안으로 돌아옵니다. 23절에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벧아웬은 벧엘의 다른 이름으로 벧엘이 하나님의 집을 의미한다면 벧아웬은 우상의 집, 속이는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벧엘은 야곱이 자기를 구원하여 땅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집"이란 벧엘로 이름붙입니다. 그런데 이 벧엘이 나중에 북왕국이 갈라져 나오면서 북왕국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벧엘에 황금송아지를 세워좋고 거기서 예배드림으로 "벧엘"이란 명칭 대신에 "벧아웬"이라 이름 붙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황금 송아지로 바꾸어 철저히 세상적인, 자기 성공적인 신화를 꿈꾸는 장소로서의 기복신앙, 우상숭배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말이 벧아웬이 된 것입니다. 자기 상황에 따라 블레셋에 붙었다 하나님께 붙었다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단상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사울의 신앙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면서 사울은 한가지 명령을 더 하는데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리"고 합니다. 이전에 이런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말렉과 전쟁하거나 할 때에 태양을 멈추게 하고 그들을 진멸하기까지 끝까지 싸우게 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의 큰 오점을 무엇입니까?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사울은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전쟁으로 보고 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원수를 갚는 자기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 명령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전쟁을 치루면서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점점 더 피곤하여지고 지쳐갔습니다. (26절) 


그런데 이 명령을 누가 어깁니까? 바로 요나단입니다. 

"27절) 요나단은 그의 아버지가 백성에게 맹세하여 명령할 때에 듣지 못하였으므로...

그런데 그가 꿀을 먹을 때에 함께 했던 백성 중 한 사람이 왕의 명령을 이야기하니까 뭐라 말합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을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결국 피곤한 군사들이 참지 못하고 탈취한 물건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채 먹게 됩니다. 피에는 생명이 있고 이 피로 말미암아 제사하지 때문에 이스라엘 율법은 동물들을 피 채로 먹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잘못된 명령으로 말미암아 급기야 백성들이 탈취한 동물들을 잡아 피채로 먹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울이 백성들의 행위를 보고 나서야 "그들이 믿음없이 행하였도라." 원문을 보면 "그들이 신의를 깨뜨렸다. 율법을 어겼다"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돌을 가져다가 거기서 잡아 먹게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35절) 

 

 요나단의 용기로 말미암은 승리- 사울이 흥분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제 동틀 때까지 쫓아 남기지 말고 전멸하자! (36절)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할 때에 제사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그래도 제사장이라고 하나님께 묻자고 제안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심(37절) 

 왜? 아니 다 정해좋고 마음대로 행하면서 왜 묻기는 해?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 거면서...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지 않은가? 

 이 물음은 자기 결정에 확답을 원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므로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지를 가린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누가 뽑힙니까? 요나단이 뽑힙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45절을 통해서 반대하니까 또 죽이지 않음.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끝맺지 못한 전투) 

 

 무언가 신앙의 행위를 하기는 합니다.  

 제사장을 뽑고 법궤를 가져오게 하고, 명령을 하고, 묻기도 하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가 먹으니까 이젠 다 먹게 하고, 법궤를 가져오게 했다가 블레셋 군이 스스로 흩어지니까 멈추라고도 하고 요나단을 정녕 죽으리라 했다가 백성이 만류하니까 또 그만두게도 하고... 

 

 그의 삶엔 일관성도 없고, 원칙도 없습니다.  

 블레셋의 전투도 "내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고  요나단을 죽이려는 의도도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릴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한 신앙은 철저히 자기를 위한, 자기를 향한 신앙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삼상 14:47-48]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나아간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기었고 용맹 있게 아말렉 사람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위해 왕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통해서도 승리를 주십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케 하십니다. 전쟁을 이김으로 사울이 행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삼상 14:52)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전쟁이 나면 날 수록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의지하고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앞장섭니다.  

요나단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는 것을 참지 못해 단신으로 들어가 그들을 대적했는데, 사울의 관심은 늘 자기 자신일 따름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고 인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 완전할 수 없어서 물론 선한 의도를 가지고도 실수하고 또 넘어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승리하는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선한 의도에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과 의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정말 다른 것입니다. 

사울은 신앙의 행위는 이렇게 저렇게 행하였지만 그의 의도는 항상 하나님을 향하기 보다 자신을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염려하고, 자기의 원수 갚는데 앞장 서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이런 때 주워지는 승리는 축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두려운 승리입니다. 이런 승리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사울의 악한 의도는 점점 더 극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때에 차라리 그의 생이 끝났으면 사울은 그래도 업적이 많은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악한 의도는 다음 장에 가서 마침내 폭발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여전히 부끄러운 것이 많지만 일단 어려운 삶의 문제가 해결되면 안도하지 않으십니까?

내 신앙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나보다 하고 나태해지지 않습니까?

정작 자신의 본모습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승리하면, 결과가 좋으면 다 괜찮은 듯 넘어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기적인 신앙,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는 길로 갑니다. 언젠가는 가라섭니다.

그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요나단 처럼, 다윗 처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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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함과 믿음 (삼상 13:5-14절)


40세에 왕이 된 사울은 이듬해 즉, 즉위 2년째에 이스라엘 군사를 모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이루고자 이른바 믹마스 전투를 일으키게 됩니다. 맨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강력한 왕을 통해 블레셋과 전쟁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요나단으로 하여금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먼저 치게 한 후에 온 이스라엘에 고하여 전쟁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운 목적에 부합되는, 사울왕에게 있어서는 가장 극적인 전쟁이었습니다. 


왕이 되고 몇번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사울은 지금 사기가 충천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용기를 낼 때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큰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힘을 의지해서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에게서 완전히 구해내려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의 수배대를 친 것과 이로 인해 이젠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사울을 따랐다고 전합니다. 이젠 블레셋과 적당히 타협할 수가 없을 처지에 이르자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울을 따르게 됩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둘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결단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서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이 공격해 옴을 듣고 군사를 모았는데 그 수가 병거가 삼만(마차가) 마병이 육천명이고 군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조차 없어 해변의 모래와 같았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싸우려고 모이기는 모였는데 현실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적을 보면 싸울 용기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동하기 시작합니다. "위급함을 보고"라고 표현된 구절은 상황이 어려움을 보고 군사들이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영어성경은 번역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다고 전합니다. 어떤 군사들은 아얘 요단강을 건너 도망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직 용기를 잃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전쟁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명한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8절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다" 


이 전쟁은 미리 사무엘과 약속된 전쟁이었습니다. 

약속된 때가 되면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수아가 그랬듯, 기드온이 그랬듯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쟁을 치루고자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는데 사무엘이 오질 않습니다. 

백성은 두려워서 떨며 숨거나 도망하고, 블레셋 군사들은 곧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상황이 점점 조여오자 사울은 나름대로 결단을 내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와서 본인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하여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행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소립니다. 


11-12절은 사울의 변명입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부득이하여" 라는 말은 내가 어쩔수 없이,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소리지요. 

달리 말하면 상황이 이래서 어쩔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무엘의 답변은 차갑기 그지 없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영어의 표현을 보면 "You acted foolishly" 바보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왕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만약 그리하였더라면...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지켰더라면...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그 다음절 말씀을 보면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실 것이라." 


이 구절을 통해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명령하신 전쟁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사울이 보기에 상황이 어려워지자 미리 약속된 명령을 벗어나 스스로 번제를 드리고 전쟁에 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이 실수로 말미암아 사울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 듭니다. 사울 대신 다윗을 선택하게 되지요. 

만약 사울이 이 전쟁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했더라면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다."는 말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를 통해 예수가 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만큼 이 전쟁은 중요했고 사울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실수가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였을까? 

우리가 그의 상황이라면 과연 사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일은 점점 다급해지고 상황은 점점 어려워지는데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과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은 흩어지거나 요동치는데 나는 과연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을까? 


  • 영적 분별- 중요한 것을 선택할 때에 마음이 분주하고, 잠잠하지 못할 때,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

그때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 하나님께 집중하라....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재로 이러한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있는 것이 어쩔 땐 가장 힘들 때가 있다. 


  • 사울의 변명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11절을 다시 보자.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블레셋 사람은 막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고 

그런데 그 사이에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정한 날은 며칠인가? 7일 

7일은 온전한 것. 완전한 기다림이다. 

사울은 7일 째가 되자마자 사무엘이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7일이 되었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자 아얘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7일이 지나서 왔는가? 아니다 7일째 왔다. 

언제?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마자. 

결국 그가 정한 시한에 온 것이다.

기다림은 초조한 시간이다. 조바심이 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다르다. 본문의 사울은 분명한 약속을 손에 쥐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 자기가 기대한 순간이 지나자 그는 약속을 잃어버리고 조급함을 택한다. 


조급함을 택하니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미리 염려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들이 아무리 많고 강대하다 할지라도 결코 사울을 해할 수 없다. 그런데 조급해지니까 모든 염려가 다 금새 닥칠 사건으로 다가온다.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번제를 드렸다.

내가 달라고 해서 주고 안달라고 해서 안주면 그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은혜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다. 내 행위때문에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삯이지 선물이 아니다. 

사울의 예배는 잘못된 예배이다. 

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예배가 아니라 전쟁에 승리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예배를 드렸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마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만 가져가면 전쟁에 이기겠지 하면서 마음대로 전쟁터에 언약궤를 가져갔다가 언약궤도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것처럼 승리를 위한 형식적인 예배, 형식적인 기도를 드린 것이다. 


사울은 무엇때문에 실패했는가? 

눈에 보이는 상황이 그를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지게 했다. 

엄청한 수의 블레셋군들의 모습. 

그 모습을 보면서 흩어지고 도망치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모습. 


이 모습은 기드온의 전쟁과 극한 대립을 이룬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13만여명의 군사들을 무찔렀다.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거나 세상에 무릎꿇는 모든 군사들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300명만을 남기시어 그들을 통해 승리를 이루게 하셨다. 

칼과 방패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빈항아리와 그 속의 횃불, 그리고 나팔을 통해 승리를 이루셨다. 

빈 마음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조급함의 반대는 느긋함이 아니다. 느긋함은 때로 게으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신앙안에서 조급함의 반대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시므온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듯,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듯,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기다리듯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기다리고, 그 기다림 가운데 깨어있는 것이다. 


간절한 기다림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상황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것들을 지키는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그 분이 주신 감동, 그 분이 주신 확신, 그 분이 주신 약속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이다. 


로고스 교회는 부흥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여러 성도들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제 기도 가운데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어서 내려오라는 올해의 표어를 묵상하며 여전히 내려오지 못한 우리의 교만함과 세상욕망과 조급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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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6-25 여호와 앞에서 담론하자 


사무엘상 12장은 이른바 사무엘의 고별설교라고 이름붙여 있는 장입니다. 사사나 제사장에 의해 통치되던 신정정치에서 이젠 정치적으로 왕정국가가 되면서 이제 사무엘은 백성을 앞장서서 이끌던 리더자에서 뒤에서 섬기는 중보자의 위치로 가게 됩니다. 

앞선 11장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조롱하며 압제했던 암몬 사람을 물리치고 드디어 사울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 앞에서 왕으로 추대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도 복잡합니다. 

먼저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 하고 요구하게 되고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아 헤메는 사울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로 인도합니다. 

사무엘은 먼저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사울에게도 세가지 예언을 하며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택하셨음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미스바에 온 이스라엘을 모아 각 지파에 천명씩을 뽑아 앞으로 나오게 하고 제비를 뽑아 베냐민 지파 마드리의 가문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혀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우심을 선포합니다 .

그런데도 10장 27절을 보면 어떤 불량배는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11장에 보면 사울이 그들을 조롱하는 암몬의 군사들을 완전히 무찌르자 드디어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백성들도 그를 왕으로 삼고 하나님 앞에 화목제를 드리면서 기뻐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미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는데 그것을 백성들에게 인정시키는 과정이 복잡하게 그려졌습니다. 계속해서 불신하는 것이지요. 

불량배, 불신하는 자라고 표현된 이 단어가 재미있는데 이 단어는 "벨리야알"이라는 말로 문제아, 불량배...이라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자기들이 왕을 요구해 놓고 하나님이 왕을 주시자 계속해서 의심하는 것이지요. 


이제 모든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자 이제 그들 앞에서 공적인 임무를 마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던 사무엘이 마지막으로 공적인 선포를 하는 것이 바로 12장의 내용입니다. 


  • 먼저 1절부터 5절까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백성들을 이끌면서 사심없이 청렴하게 일해 왔음을 사람들 앞에 말합니다. 

그가 만일 부정을 저질렀거나 사람들이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였거든 증언하면 갚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당신은 깨끗이 잘 자신들을 인도했다고 말을 하지요. 

그러니까 자신이 거짓없이 청렴하게 일해왔던 것을 하나님 앞에서와 새로 뽑힌 왕 앞에서 공개적으로 증언하게 합니다. "계속 증언, 증거"라는 법률적인 단어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6절부터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들, 정의로운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하고 말합니다. 

마치 재판정에서 재판을 하듯이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 하고 이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는 것입니다. 

"담론하다"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 말로는 "새파트"라는 말로 재판하다. 판결하다.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니까 "증거를 가지고 대면하다"라는 말입니다. 


  • 5절까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내밀라고 하던 사무엘이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증거"를 제출하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출애굽 시대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조목 조목 이야기 합니다. 

8절에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하면 아브라함이지만 실질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제도적인, 국가 정체성의 조상은 야곱이지요. 


그 때에 너희들이 부르짖었을 때에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응답하셨다. 그런데 너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너희가 부르짖어서 응답했는데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 후에 하솔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삶들과 모압왕의 손에 넘어가서 백성들이 또 회개하고 부르짖게 되지요. (10절) 그래서 한 번만 더 구해주면 이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11절에 여룹바알, 우리가 금요일날 나누는 기드온이지요. 베단은 삼손의 별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블레셋과 싸운 자 이지요. 또 입다와 사무엘을 통해 블레셋과 암몬을 치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그들을 침입하는 왕들을 보면서 왕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삼상 12:12) 너희가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노라. 


그러니까 왕들이 쳐들어 오면 백성들이 부르짖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람들 보내어 구원해 주시는데 이것이 반복이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 왕을 우리도 가지면 우리가 침입당하지 않고 우리도 남들을 침입하면서 살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왕을 구한 백성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아무리 선한 것을 역사하셔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악한 왕들이 자신들을 계속 공격하자 오히려 그 악한 왕이 우리에게라도 있었으면 하고 보이는 악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EX) 어떤 청년이 어린 나이에 자기는 결혼도 하지 않고 주의 길을 가리라고 마음 먹고 살아갑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혼기가 오니까 자꾸 주위에서 결혼하라고 말들을 하기도 하고 젊고 건강해서 그런지 자꾸만 음란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께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청년의 정욕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할 때마다 은혜를 주시기도 했는데 자꾸만 정욕의 생각이 떠나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차라리 결혼을 하고 또 주의 일을 하자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처음에는 또 주의 일에 열심을 내서 살아가려 하는데 이제 아이들도 키우고 가정도 이끌어 가려고 하니까 자꾸만 경제적인 것이 걸림이 됩니다. 

"그래서 또 끊임없이 내가 물질에 얽매이지 않게 해 주시고, 물질에 자유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기도 할 때마다 어려운 형편에도 살 길을 주시고 또 살 믿음도 주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경제적인 문제가 닥쳐오니까 "차라리 돈을 벌고 그 돈을 가지고 주의 일에 쓰자"해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장을 얻었습니다 .


여행, 취미.....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잔뜩 하다가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 왕을 구하는 백성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고 사무엘은 너희들이 왕을 뽑아도 결국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왕도 너희도 다 하나님께서 멸망할 것을 이야기 합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다 해 주어도 너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량배이다. trouble maker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엇입니까? 

21절)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요 

너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오직 그를 경외하고 마음을 다하고 진실하게 그를 섬기라 하고 말씀합니다. 


불량배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불순종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이고, 사무엘은 자신을 버리고 새왕을 달라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공기, 바람, 빛,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지 못할 것이 많은데도 자기가 붙잡지 못하면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기가 구한 왕을 믿으려 하지도 않고, 자기가 구한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떨 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완악하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 (히브 11) 이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감각이지요. 만져지는 것을 만지고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것이요,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인 할례를 왜 신체의 은밀한 부분에 했을까? 

지난 갈라디아서 수업에서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습니다.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도 하나님과 함께 하라. 

타락하지 말고 성결한 삶을 살라...


그런데 할례를 신체의 가장 은밀한 부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곳에 한 것은 결국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고 보여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증거는 나만 아는 것입니다. 내가 잊고 숨기면 하나님 앞에 부정직하고 불경건한 자가 되는 것이요 내가 인정하고 드러내면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그 은밀한 육체의 할례 마져도 마음에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증거는 우리 마음판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각자마다 보여 주신 증거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과 여호와를 구별하여 썼습니다. 

하나님은 보통명사로 객관적인 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내가 경험한 하나님, 내가 만나고 교제한 하나님이  여호와 입니다. 

로고스는 객관적인 성경의 말씀이라면 나에게 주신 말씀, 내가 경험한 말씀은 레마, 즉 내게 주신 계명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여호와 이십니까? 레마의 말씀을 경험하십니까? 

그 증거는 밖에 있지 않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미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담론하자. 

증거를 가지고 나아가자.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제자요 증인들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그 이름을 선정해서 너무 안타깝지만 믿음의 삶은 바로 여호와의 증인으로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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