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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사무엘상하'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7.08.05 사울과 요나단 (삼상 18장 1-5절)
  2. 2017.07.22 두 현실의 충돌 (삼상 17:33-40)
  3. 2017.07.15 사무엘상 16장 14-23절 왕의 일 (2)
  4. 2017.07.08 한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13절)

 

사울과 요나단 (삼상 18장 1-5절) 


공원이나 사람들 많은 장소를 가다보면 집에나 교회에서는 엄마 품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고 낯을 참 많이 가리던 한나가 막 내려 달라고 보채면서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서 "어무니"하면서 두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아이가 다가와 손을 흔들면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를 반겨주고 귀여워해줍니다. 

그래서 한나가 밖에 나가면 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애교를 떨곤 하는데 한번은 덩치가 좀 큰 흑인 한 명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한나가 그 옆에 가서 손을 흔들고 막 애교를 떠는데 애써 쳐다보지도 않다가 자꾸 자기 앞에서 자꾸 왔다갔다 하면서 자기에게 접근하니까 언짢은 표정을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획 하니 나가 버립니다. 

저도 갑작스런 일에 놀라서 아이를 쳐다보니까 한나 얼굴이 그야말로 멍한 표정입니다. 자기를 귀여워 해줄 줄 알았는데 휙 나가 버리니까 놀란건지 실망한건지 말을 못해서 표현은 못하는데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짓습니다. 

아마도 자기가 귀여운 짓을 해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고통을 안겨 줍니다. 거기다가 내가 정말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공격을 당할 때에 그러한 경험은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혼내기만 할 때, 선생님이 학생을 알아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책망할 때, 직장 상사가 부하직원을 무시하고 전혀 인정하지 않을 때...우리 인생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외면의 경험, 무시의 경험,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적으로 몰려 공격을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경험은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속성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도 이 사랑에 기초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또 회복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은 이 사랑과 멀어진 것들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욕을 먹기도 하고, 때론  조롱과 비웃음과 중상모략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삶에서 이러한 적대감을 맛보는 경험은 그의 영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입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공격을 받고, 때로 무시를 당했으며, 아들로부터도, 친구로부터도,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그러한 사람들로 부터 받은 상처와 곤경의 상황을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강력하게 다윗을 미워했던 인물은 바로 사울입니다. 


목동이던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여 악신이 들리자 사울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노래를 불러주는 자로 사울의 곁에서 사랑을 받습니다. 

골리앗이라는 큰 장벽이 나타나 사울과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처하자 다윗은 믿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무찔러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줍니다. 

다윗은 사울을 위해서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1. 사울 

사무엘상 16장 21절에 보면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드는 자로 삼고.."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영적으로 힘들 때에 찬양을 통해 위로해주고 치유케 해준 다윗을 좋아했습니다.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자 사울은 그를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아닌 아얘 궁전에서 자기 옆에서 머무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18장 6절부터 블레셋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대를 맞이하며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9절)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목하였다는 표현은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질투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표현입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유혹한 후에 선악과를 바라보는 시선이 욕망과 죄악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다윗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 달라진 것입니다. 


사무엘상 18장부터 20장까지의 사건을 쭉 추적해보면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무려 6번씩이나 행하고 있습니다. 

찻번째는 다윗이 사울을 위해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창을 다윗을 향해 던졌습니다. 다윗이 처음 사울의 곁에 올수 있었던 것은, 사울이 다윗을 사랑했던 이유는 바로 이 악기 연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질투심이 오니까 이제 그 악기연주가 사랑의 이유가 아니라 살인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지는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전쟁에서 수훈을 세우고 오면 자신의 딸 메랍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그를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삼상 18:17b) ......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그런데 그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자 서둘러 딸 매랍을 므흘랏 사람 아드라엘에게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 다음 자신의 딸 미가가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이용하여 다시 한 번 다윗을 죽일 음모를 꾸밉니다. 

블레셋 사람 표피 100개를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다윗이 승리하여 블레셋 사람 표피 200개를 가져오자 이번에는 할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합니다. 

또 한 번은 암살단을 보내어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안 되니까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서 다윗을 추적하려 죽이려 했습니다. 


왜 사울은 이토록 집요하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사울은 다윗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이 된 이후 사울에게 하나님은 단지 자신을 위해 필요한 도구였지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대했고 필요없을 때는 자신의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다윗을 사랑한 이유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하기 때문이었지 다윗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하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면 집요하게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 외의 모든 것은 자신에게 필요하냐 안하냐가 기준이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하자 요나단 마저도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사울과 같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우리를 흩어보면서 어떤 이용가치가 있을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지, 우리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숫자로서, 물질로서, 물건으로서 판단하는 사람들 앞에 우리는 늘 조롱당하고, 외면당하고, 상처를 입습니다. 


시편 7편은 이러한 사울의 부당한 핍박 앞에서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하는 시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1절)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기도하고 하나님이 재판하시고 판결하시기를 거듭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10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1절) 

하면서 억울하고 위급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랍니다. 


2. 요나단 

만약 이러한 환경 속에서 요나단이 없었다면 다윗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사울에 대한 원망과 원한, 복수의 감정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 

다윗은 사울의 광기어린 살의 가운데서, 바로 그 중심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가장 깊은 사랑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영적인 우정은 기도나 말씀등의 경건생활과 다름없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예배와 경건을 돕기 위한 처소도 되지만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목적은 바로 영적인 우정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사울이 철저히 자기의 필요에 따라 다윗을 옆에 두었을 때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18장 1절)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Jonathan became one in spirit with David!" 다윗과 영이 하나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서만 주신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영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이 같은 것보다 더 큰 소통의 코드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영이 다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 믿고 예배드리는 데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를 위하고 물질을 원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 보고 자신에게 좀 맞추어 달라고 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사울왕도 요나단도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신앙은 지금 다윗과 요나단과는 다릅니다. 다른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한 영이고 자기 자리 만을 위하고 자기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는 시기하고 어떻게든 죽이려고 하는 자입니다.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상 18:4)


이것은 단순히 선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자로서의 겉옷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었던 품위와 권위의 옷을 다윗에게 벗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군복인 갑옷도 주었습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칼과 활, 그리고 가슴에 매는 띠까지 다윗에게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윗 네가 나의 모든 책임과 권리를 행사하라는 왕의 자리를 양도하는 것입니다. 이 후부터 요나단은 철저히 다윗을 지키고 보호하고 또한 사랑합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다윗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마다 요나단이 그 앞에서 막았습니다. 너는 어찌해서 내 편이 아니고 다윗 편이냐고 아버지가 통탄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되게 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을보았기 때문입니다. 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 이스라엘을 이끌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왕의 권력까지도 다윗에게 양보했던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요나단의 모습 속에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친구 된 모습을 예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친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당시 요나단과 다윗이 친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나단은 왕자, 다윗은 무명의 목동 ->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 교만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우정의 시작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교만과 존경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에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항상 나를 가장 높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를 사귈 수 없다. 객관적인 나의 기준보다 휠씬 높은 사람을 상대 할 때만 그를 존경하며 친해지고 싶은데 그 때는 난 이미 그 사람의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과 내가 친구가 되긴 더 힘들다. 요나단은 다윗과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 자신의 왕자 된 신분을 낮추었고 동시에 다윗을 왕이 될 사람이라고 높였다. 


(요 15: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겸손 - 죄인인 우리를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우리를 당신에게까지 높여서 친구가 되게 하심... 우정의 마음..


이것이 바로 친구가 되는 마음이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할 때에 우리는 결코 진실한 친구,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우리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일 때에 우리에게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성경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또한 성경 안에서 영혼의 귀함을 깨달은 자,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지 않고 자신의 인기에 흔들렸다면.

갈렙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바나바가 바울의 사역을 방해했더라면

요한이 베드로의 리더십에 끝까지 저항했더라면...

기독교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세례요한-> 예수님을 남기고 간 친구-> 예수 그리스도 – 우리를 친구로 남기고 간 하나님.

  • 너희가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 우리 또한 나 보다 더 큰 일을 할 친구하나 두고 싶지 않은가? 혹은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사랑해줄 친구하나 있고 싶지 않은가? 그럼 내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면 된다. 내가 나보다 더 나은, 더 큰일을 할 친구를 위해 내 생명을 아끼지 않으면 그 친구, 아니면 또 다른 친구가 날 그렇게 사랑해 줄 것이다. 


세상은 믿는 자들을 적대시한다. 어쩔 땐 교회에서조차 우리는 외면당하고 비난당하고 무시당할때가 비일비재하다. 

물론 우리는 다윗이 시편 7편에서 호소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이런 세상에 맞선다.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이시고 재판관이시다. 


물론 교회는 말씀으로 성도들을 거룩하게 이끌어주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이 성화되도록 인도하는 곳이다. 

그런데 교회는 재판정이 아니다. 세상이 아니다. 

교회는 죄인을 위해 편들어 주고 십자가를 지어주는 곳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서로 편들어 주라는 것이다. 판단하지 말고 자기 몸 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누구나 요나단 같은 친구를 가지고 싶어한다. 그런데 자기가 요나단 같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높이는 친구는 되기 어려워한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이 황금률이라 불리는 성경의 해답이다. 

좋은 친구를 가지고 싶은가? 그러면 그러한 친구가 되라. 

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해줄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된 영이 되는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보호해주고 기도해주는.....


그런 장소가 교회요, 그런 친구가 바로 크리스찬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두 현실의 충돌 (삼상 17:33-40)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 나의 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생활이 그냥 여러가지 살아가는 방법 중의 하나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통장의 돈을 의지하고, 직장을 의지하고, 혹은 자녀나 배우자를 의지하고 살아가듯, 그런 것보다 더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것, 국민 대다수가 의료보험을 들고 생활하듯 위급할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그런 삶의 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 뒤에 영생이 있다고 하니까 노후 대책을 하듯 죽음 이후의 만약에 닥칠 삶을 위해 미리 가입해 놓은 보험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도 안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냥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게임에 푹 빠진 아이들처럼 신앙생할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늘 함께 하고, 그 안에서 때로 재미도 느끼고 유익도 얻지만, 더 좋은 무언가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바꿀 수도 있고, 쉴 수도 있고,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저 익숙한 습관으로서의 삶의 양식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가장 사랑받는 다윗의 등장은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도 예수를 주로 영접함으로 성령이 내 안에 오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세례의 사건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고백의 사건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거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 어느 것이든 개인으로 볼 때는 내가 하는 의지적인 행위처럼 생각되지만 사무엘이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기름을 붓듯이,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거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건은 주가 나를 선택하신 사건, 주가 날 만난 사건으로 성경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날 선택하신 사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주를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륙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마 16:17) 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우리가 결코 알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건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적, 혹은 신학적으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건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는 사건인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특정한 일을 위해 임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서 오직 막내 아들 다윗을 뽑았듯이 내가 하나님을,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여러 사람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위해 뽑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사울의 궁정에서 첫번째 그의 일을 시작합니다. 참 왕이 되기 위한,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훈련, 연단, 연습이 그의 삶의 일을 통해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훈련장, 연습장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가정에서건, 학교에서건, 직장에서건 내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 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고,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 잘 준비되어 지도록, 혹은 그 일 자체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일이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는 큰 일 작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해 특별하게 주신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신앙적, 신학적으로 이러한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그 분의 특정한 일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 내 일에 그 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일을 위해 나에게 일이 주어졌다는 사명의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와 방식, 삶의 질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상이라는 것이 무서워서 아무리 하나님의 큰 은혜를 통해 선택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향해 가는 삶을 산다할지라로 매일 매일 겪는 일상의 어려움은 우리를 통해 일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자로, 내가 사는 매일 매일의 현실에 하나님이 금방 도와주시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불평하거나, 우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으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일상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철저히 내 일을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렇게 내 일을 위한 도구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골리앗이라는 일생 일대의 장벽을 앞에 둔 이스라엘의 모습은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두 가치관, 두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골리앗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하들은 무기력합니다. 그 자신은 아무런 용기도 없고 문제를 이길 지혜도 없습니다. 단지 문제가 일어나면 이것을 누구에게 말할까 하여 능력 있는 자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게 목사건 무당이건, 돈이건, 권력이건 대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자가 있으면 어린 아이에게라도 도움을 청합니다. 물론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교회의 목사나 교역자를 찾아가 자신의 문제를 상담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를 오직 주의 종에게만 의존하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어린아이의 믿음도 벗어나지 못한 유약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직접적인 교통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 앞에, 문제 앞에 무릎꿇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2. 사울

골리앗이 비록 큰 용사이긴 했지만 그 능력으로 볼 때 사울 역시 골리앗 못지않은 훌륭한 용사였습니다. 블레셋, 아말렉, 모든 대적들과 맞써 싸웠고, 또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승리가운데 그가 키운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힘이었습니다. 자기의 군사를 더욱 모았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라는 자기 보다 힘쎈 장수가 나타나자 꼼짝을 못합니다. 힘을 의지하는 자는 더 큰 힘에 굴복합니다. 권력을 의지하는 자는 더 큰 권력앞에 비굴해집니다. 자기의 옷과 무기를 어린 다윗에게 주는 사울의 모습은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미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죄책감 가운데 언제나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며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왕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골리앗이라는 산은 하나님이 자신의 죄과를 갚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많은 복을 얻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언제나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문제가 나타나면 곧 자신에 대한 징벌인지 알고 그 문제에 걸려 꼼짝달짝을 못합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열심히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주받은 사람처럼 문제 가운데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문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죄에 대해서 돌이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지 결코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심판은 아닙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존재는 오직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골리앗을 무찌르고 오는 다윗을 향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저가 누구냐?"하고 묻는 장면은 바로 전장에서 영적으로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찬양을 통해 치유했던 다윗을 크게 사랑했다고 하는 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는 철저하게 신앙과 현실이 구별된 자였습니다. 교회의 삶과 세상의 삶이 완전히 분리된 자였습니다. 


3. 다윗 

오직 다윗 만이 골리앗의 크기와 힘에 압도되지 않고 골리앗을 그저 할례받지 않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짐승으로 바라봅니다. 다윗에게 골리앗의 키가 힘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결과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크건 작건 문제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부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산이, 혹은 내가 대면하고 있는 이 적이, 이 고난이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느냐,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맞는 위험에는 위험 이면에 영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37절에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고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거대한 조직체이자 악한 영의 힘으로 움직이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객기’가 아닌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용기는 세상을 바르게 보는 안목에서 생겨납니다. 사탄의 속성은 양을 움켜가는 짐승들과 유사합니다. 사탄은 연약한 성도들을 유혹하여 두려워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도망하게 하고 나약하게 합니다. 세상을 너무 과소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과대 평가하여 숨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문제로 다윗의 눈으로 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녀에 대한 문제이든 직장에 대한 문제든, 신앙에 관한 문제든 상관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나 사이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큰 문제가 크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작은 사소한 문제도 하나님 앞에서 크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의 상식으로는 마땅한 방법입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한 고로~~ ”라고 나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은 익숙치 못한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줄을 찾고 백을 찾고, 도와줄 모든 것을 찾습니다. 

자, 지금 사울이나 모든 이스라엘 군사들이 세상의 모든 방법을 가지고서 골리앗을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보다 훨씬 어리고 전쟁의 경험이 없는 다윗에게 무기를 가져다 주고, 세상적인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도와주려는 그들의 모습은 선의라고 해도 어리석은 것 아닙니까? 그들의 방법이 안되서 지금 다윗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다윗에게 와서 그들이 했던 방법대로 골리앗과 맞서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익숙한 방법입니다. 바쁜 일 있어도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고 비록 쓸데가 많아도 십일조 위주로 감사하면서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 몸에 익어 있는 믿음의 행위들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하나의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배짱 믿음이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믿음만 가지고 골리앗을 이긴 것은 아닙니다. 그는 평상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인 양들을 지키는 데에 성실하고 전문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골리앗을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성실성과 이에 더하는 전문성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작은 일에 있어서라도 다윗은 자기 분야에 전문가였습니다.

  

가장 압권인 장면

40절)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골리앗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군복과 칼을 벗어던지고 냇가에서 조약돌을 고르고 있는 다윗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가 늘 하던대로 쉴만한 물가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습... 가장 다윗다운, 믿음의 눈과 방법으로 세상과 맞서기 위한 방법...

급할 때일수록 먼저 기도하고, 일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께 아뢰고...다급할 때 당황하지 않고, 위급할 때에 서둘지 않고 자기가 늘 하던대로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모습.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술을 사용하셔서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첫째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절대적인 믿음이었지만,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자기 생활에서 경험했고 또한 평상시 연마했던 일상에서의 성실함과 전문성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상 중에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이 있습니다. 학생의 신분이면 그 신분에 맞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생활보다 우선하는 것은 교만한 행동입니다. 주부는 가정의 안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교회의 모든 일들도 마땅히 감당하는 교회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잘 돌보는 부모가 주일학교에서도 영혼을 잘 감당하는 교사가 될 것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의 직장에서 교회 운영의 노하우를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행정과 교회의 운영이 세상의 기업들보다도 더 원만하고 깨끗이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남성들의 사회생활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사무엘상 17장 50절에는 다윗의 승리에 대한 짤막한 정의가 나옵니다.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었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세상 사람들은 칼로서 승리를 거두려고 합니다. 남을 죽이고 깎아 내리고 업신여기므로 자신의 행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칼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성실함에 있습니다. 믿음과 이것을 행하는 성실한 행동이 뒷받침이 될 때에 우리의 인생의 어떤 것도 단지 신앙을 드러내게 하는 과정일 뿐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방법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방법입니까? 

만약 여러분의 익숙한 것이 믿음의 방법이라면 그 방법대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요. 결코 흉내내기 힘든 완악한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 승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감당하기 힘든 우리의 모습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사무엘상 16장 14-23절 왕의 일 


지난 시간에 우리는 16장의 앞 부분을 다루면서 다윗의 기름부음을 받는 과정을 살피며 기름부음의 의미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의 대상은 왕, 제사장, 선지자의 세부류의 사람만 기름부음을 통해서 임명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할 때에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할 일이 있다. 그것을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18-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특정한 일을 위해 세움을 받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특별한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 


사울도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삼상 10:6-7)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리고 이어서 10절에 보면 

(삼상 10:9-10)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그런데 오늘 읽은 16장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이 구절을 잘못 오해하면 하나님이 악령을 보내셔서 사울을 괴롭힌 것처럼 이해하면 하나님을 악령을 보내시는 자로 생각하게 되는데 이건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 크게 위배되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았을 때에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을 부으셨습니다. 왕이라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새마음과 새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5장 1절에 보면 사무엘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 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함께 주셨는데 이제 그 뜻대로, 하나님 주신 능력을 가지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않습니다. 

왕의 전령으로, 왕의 사자로서 파견되었는데 왕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마음대로 행합니다. 그러니까 왕을 버리시고 하나님의 영을 거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거두시니까 자연스럽게 사울이 사탄의 종노릇 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니까 사탄이 사울에게서 하나님 자리를 대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가를 기대어 사는 존재라는 의미 아닙니까? 


자, 사울의 불순종을 나타내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블레셋 과의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이 오기 전에 스스로 임의로 제사를 드리려다가 불순종한 죄요, 두 번째는 아말렉 과의 전쟁에서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가장 좋은 것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이것은 죄라고 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것은 부도덕 하거나 부정한 일을 저지를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인, 군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전쟁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행한 일이요,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아니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일은 윤리적인,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철저히 예배에 관련된 죄입니다. 종교적인 죄입니다. 

사울은 전쟁을 치루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사울의 죄를 자꾸 지적할 때마다 저 백성들때문에, 저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고 변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때부턴가 스스로의 주권을 책임지고 자기가 그 일을 감당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쟁이 어느덧 자신의 명예와 목적을 이루는 전쟁이 되어 버리고 그 전쟁을 위해 예배가 도구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일과 예배 

자, 창세기의 첫 기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일하시기 시작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마지막 날 예배하는 삶,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하신 예배 영성의 큰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동산에서 일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사도바울도 참 예배는 안식일날 하루 나와서 드리는 구별된 시간으로서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 몸, 우리 삶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파견된 거룩한 나라의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예수님도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연결된 자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우리가 드러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등한시 하기도 합니다.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하기도 했다가 하나님을 피하기도 합니다. 


일은 우리의 본질을 때로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에 우리는 흔히 "무슨 일 하세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알기를 원하는 것 중 하나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의 목적과 삶의 태도와 삶의 테두리를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일은 우리의 정체를 감추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 그 사람의 생각, 인격, 태도 등을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 잘 살피지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리기 일쑤입니다. 


참된 신앙 생활은 일과 예배를 하나되게 합니다. 일이 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잘 표현할 수 있게 합니다. 

엿새를 일하고 칠일째 예배하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삶과 예배, 일과 예배를 구별하지 말고 하나로 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자꾸만 엿새동안의 삶과 안식일의 삶을 구별하고자 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든지 주일날 나와 예배하면 만사가  ok인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세상에서는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건 주일 날 나와서 거룩한 말투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인것 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일반적인 대화를 할 때와 전혀 다른 말투로 기도하는 분들 있습니다. 흔히들 목사님 말투라고 기도할 때만 나타나는 말투....

하나님은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이 대화를 하기 원하시는 것이지 시낭송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하는 변명이 무엇입니까? 

이건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교회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로 얼마나 많은 비난을 면해 왔는지 모릅니다. 

투명하지 않은 재정문제, 깨끗하지 않은 인간관계, 모든 불순한 것이 교회라는 건물과 주일이라는 시간 속에 숨겨져 왔습니다. 


디모데서에서 말하는 직분자의 기준은 주일날 예배드리는 모습을 통해 직분자 뽑으라 하지 않습니다. 

그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건전한 자인가? 성실한 자인가? 인정받는 자인가? 오히려 그의 일상과 일터에서의 모습을 통해 직분자를 뽑으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영성, 일과 예배, 삶과 예배의 일치된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에서의 특별한 언어로만 이해되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의 복음은 베들레헴의 말구유, 갈릴리의 고기잡이 배, 삭개오의 집, 나사로의 무덤, 사마리아의 우물가 등 우리의 일상의 언어와 환경과 분위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 다윗의 기름부음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새로운 일터로 불려 나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첫번째 일터은 왕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울을 섬기는 데서 시작됩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후 다윗은 20여년간 왕으로서의 일을 배웁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인턴십 과정으로 나뿐 왕, 실패한 왕을 섬기게 합니다. 

왕으로서의 첫번째 코스는 왕의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기업의 총수의 아들이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밑바닥 부터 일을 가리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왕의 일과 종의 일은 전혀 다른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으로서 섬기는 일이 곧 왕으로서 통치하는 일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라"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사울을 섬기면서 왕의 직책은 곧 섬기는 직책임을 깨닫습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때만다 후보자들은 국민을 받들겠습니다. 국민을 섬기겠습니다. 말들을 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을 보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또한 다윗은 사울을 보면서 왕이 하나님의 뜻을 떠났을 때에 어떤 일이 발생되는지를 온몸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의 죄를 지적받았을 때에 그가 외친 기도는 사울처럼 "나를 왕에게게 물러나게 마옵소서"라든가 백성들에게서 내 죄를 감추소서가 아니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도,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아닌 주의 성령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참 일에는 섬김과 통치가 하나로 이어집니다. 

왕이라는 직분은 우리가 가진 역할이고 그 방법이 바로 섬김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했던 일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시달리는 영혼에게 찬양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도록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사탄의 지배를 받던 사울이 다윗의 찬양을 통해 그가 상쾌하고 (씻김) 낫고 (치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회복) 라고 증거합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임명하시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성령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가 기름부음 받은 자의 완성, 즉 그 The Messiah, the Christ가 됨으로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은 자의 대표성을 띈 것은 사도였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대사, 특정한 일을 위해 임명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고백을 다함께 선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도로 임명된 자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거룩한 직분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표현하고 드러내도록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을 통해 혼돈에서 질서를 이루며, 정결해지고, 치유되며, 회복되는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왕이라는 일을 위해 기름부음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실패한 삶이요, 사탄에게 지는 삶입니다. 

일을 위해 예배를 도구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요 타락한 예배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타락한 죄인을 섬기는 왕이 되었습니다. 무질서한 영혼에게 질서를 공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달리는 영혼을 상쾌하게 해주는 도우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 입니다.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위해 나를 세우셨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가정에서의 일이건, 회사에서, 가게에서, 자동차 안에서의 일이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그 일을 통해 예배하기 원하십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한 왕을 보았다. (사무엘상 16장 1-13절) 


작년 말에 올해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무엘상을 택하게 된 이유... 

시편과 함께 다윗의 삶과 영성을 깊이있게 살펴보고자 하는 갈망때문에. 

이제 2017년 전반기를 지나고 7월이 되어서야 사무엘상 18번째 강해로서 다윗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역사적인 사건의 배경을 살펴 본 후에 몇 가지 구절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고, 그 다음 이 사건과 구절들이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역사적 배경 

사울이 하나님을 떠나 그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회개하지 않고, 거짓으로 변명으로 자기의 잘못을 감추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마을로 보내어 이스라엘의 새 왕을 뽑게 하신다. 

사무엘이 도착하자 베들레헴은 긴장이 흐른다. 

사울을 꾸짖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 사무엘이 이름없는 마을에 온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성읍 장로들이 떨며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4절) 

하나님의 진로와 심판이 두려웠던 장로들을 안심시키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함께 제사하자. 예배하자 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모으로 특별히 이새의 아들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예배에 참여했지만 사무엘의 관심은 오직 이새의 아들들에게 가 있었다. 

엘리압에서부터 아비나답, 삼마, 그 뒤의 모든 아들들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 유명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7절) 하시면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지 않으신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초대받지 못했던 막내 다윗을 불러오게 한 후에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한다. 


2. 말씀 들여다 보기 

  • 내가 그를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니...(1절) 


사울의 실패 - 

그는 겸손한 자였다. 성실한 자였다. 그리고 충성된 자였다. 용기있는 자였다. 

한 마디로 해서 왕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자였다. 

그런데 왕이라는 타이틀이 그의 자질을 다 감추어 버렸다. 자리가 그를 망쳤다. 

왕이라는 자리로 말미암아 그는 겸손한 자대신 사무엘의 영적인 자리를 탐하는 교만한 자가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과 백성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가 되었고, 자기의 속 마음을 숨기는 거짓된 자가 되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라 불렀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는 세가지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왕, 선지자, 제사장. 

신학적인 용어로 이 세가지 부류를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왕은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백성을 인도하는 자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의 죄를 예배를 통해 사하도록 하는 중보자였다. 


결론적으로 기름부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나타내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께는 인간의 기도를 말씀드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울은 이 역할을 망각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 

하나님께 백성의 소리를 전하고 백성의 죄를 회개하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 마저도 백성에게 돌리는 자가 되었다. 그것 하나로서 그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 (1절 후반) 

누구도 다윗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조차, 그의 형제들에게 조차 다윗은 주목받지 못한 자였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메시야, 그리스도의 역할을 잘 감당할 기름부은 자로서 합당한 그의 존재를 보았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다리 역할, 메신저 역할, 통로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시편 23편 - 목동으로서 경험한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만족했고 충만했고 풍요했다) 

그가 나를 푸른 풀 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는 롯 처럼 좋은 땅,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에게 좋은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이다. 그 땅을 그는 쉼이 있는 땅, 안식의 땅으로 불렀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 평안을 준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한다. 그 인도하심으로 날마다 새로와지는 경험을 한다.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가운데 때로 자기가 부족해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뢰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때로 인생의 고난이 와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능히 이기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미 그는 기름부은 자였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나타나고 그를 통해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거하면... 산다는 것은 함께 거한다는 것.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동행하는 것) 


거룩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꾸밈이 없다는 말이다. 첨가되지 않은, 인공적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다. 

왜 그런 사람이 중요한가? 죄를 지은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포장하고 가리고 숨기고 외식하기 때문이다. 

외식하는 자들을 주님은 독사의 자식, 죄의 자식, 사탄의 자식이라 부르셨다. 

사울은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다윗은 목동일 때나 왕일 때나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였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대로였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었다. 기름부음 받기에 합당한 자였다. 


  •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12절) 

이것은 언뜻 보면  7절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외로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지목하기 전에 누구도, 사무엘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를 데리고 오자 비로서 그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다. 

감추었던 그의 존재가 빛을 발한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씨의 시처럼 하나님의 안목을 통해 그의 존재가 아름답게 드러나는 것이다. 감추었던 존재가 꽃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었던 우리 존재를 드러내 주신다. 숨겨졌던 우리 아름다움을 피어나게 하신다. 

나를 부정하고 더럽게 생각했던 나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해 주신다. 

ex) 피부병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던 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게 하셨다.


  •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절) 

여기서 막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카탄"이라는 말은 the youngest, the least, 

가장 적은, 혹은 가장 작은, 하찮은, 중요하지 않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람들 대다수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업신여기는, 그런 존재이다. 

그의 존재가 하찮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가 하는 일이 정말 하찮은 일이라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시는 자는 이런 하찮은 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결단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 그 어린아이, 하찮은 존재가 바로 막내라고 번역된 카탄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쳐주지 않는 양을 지키는 일, 그렇지만 그 양을 지키는 자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접하고 전하게 된다. 가장 작은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충실히 행했던 그 자를 하나님은 가장 큰 일을 감당하는 왕으로 부르셨다. 

사울이 자기 스스로를 왕으로 여기고 사무엘보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우선하자 하나님은 그를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셨다. 

하늘나라의 왕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가장 작은 자이다. 


3. 적용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쓰신다. 하찮은 자를, 연약한 자를, 작고, 적은 것을 쓰신다. 

그런 자를 왕으로 부르시고 기름부은 자를 만들어 주신다. 

이것은 단지 작은 자를 크게 만들어 주신다는 성공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 앞에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야기 할 수 있수 있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큰 전문적인, 능력있는 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보여주는 하나님은 포장되고, 과장되고, 왜곡되어지는 하나님이 될 수 있고, 그들이 드리는 중보기도는 외식적인, 자기 합리화와 변명에 일관한 그릇된 중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외에는 중보자가 필요없다. 성령 외에는 참 선생이 필요없다. 

내가 목사로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도같은 목사, 목사 같은 성도는 우리가 주 안에서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라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무언가 특별한 목사를 기대하는 성도는 종교라는 물건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좋은 상품이 나오면 열광하면서 달려들지만 거기에 하자가 발견되면 반품하고, 항의하고, 언제나 손님으로서 왕노릇 하려고 하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언제나 신상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종교의 소비자일 뿐이다. 


이런 성도를 기대하는 교회와 목사는 종교라는 포장된 물건을 파는 상인일 뿐이다. 

끊임없이 소비자의 입맛대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출시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비싼 가격을 요구하면서 소비자가 가진 돈과 시간과 마음을 빼앗으려 하는 악독 기업주일 뿐이다. 


다윗은 구약에만 600번이상, 신약에서 60번이상 그 이름이 나타난다. 

영어권에서 가장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름이 다윗과 요한이다. 

흔하디 흔한 이름, 가장 하찮은 이름. 그 이름을 하나님은 왕으로 부르셨다. 


다윗은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자세히 다룬 인물이다. 

그런데 다윗의 일생을 보면 거기엔 어떠한 기적의 일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브라함처럼 100세의 나이에 아이를 갖는 이야기도, 홍해를 가르는 이야기도, 태양을 멈추는 사건도, 불이 나와 우상과 적을 뿌찌르는 일도, 하다못해 병자들을 치유하는 일도, 어떤 신비한 기록도 다윗의 삶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그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 기다림의 연속, 방황의 연속, 때로는 유혹에 넘어가고, 죄에 괴로와하면서, 자식때문에 걱정하고, 우정을 나누며, 춤추고, 울고, 슬퍼하고, 때로는 증오하면서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담은 가장 평범한 삶을 보여준다. 

그는 가장 평범한 인생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 모두가 다윗이고 다윗이 될 수 있다. 

가장 거룩한 영성은 날마다 기적을 체험하고, 신령한 것에 잠겨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장 평범하고 일상으로 가득찬 것이 가장 깊고 거룩한 영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에서 있었던 기름부음의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이새도, 아니 다윗 마저도 사무엘이 행한 것이 어떤 의미의 일인지 알지 못하고 사무엘은 그 자리를 떠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한 왕을 찾으신다. 

한영혼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기름부어 주신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세상을 보며 타이틀에, 성도수에, 성공을 표현하는 세상 앞에서 때때로 초라해지지만 다윗의 영성은 가장 작은 나를, 가장 연약한 우리 로고스 교회를 왕으로,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세워주신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