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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글락의 다윗 (삼상 27-30장) 


다윗은 성경에서 구약에 소개된 인물 가운데 가장 자세하고 길게 소개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여정을 살펴보면 기나 긴 여정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뚜렷한 기적의 흔적도 없이 평생을 살아갑니다. 

그는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산 인물이요, 또 우리와 똑같은 실수와 잘못도 반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 가운데 27장부터 시작되는 시글락에서의 삶은 어쩌면 그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시기요, 신앙의 눈으로 보나, 도덕적인, 인간적인 면으로 보나 정말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시기입니다. 

홍해를 건너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사흘 만에 물이 없어서 모세와 그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을 원망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끊임없이 범죄하는 장면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 인생을 살펴 보면 인생은 설명하기 힘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고 인간의 뇌를 이해하려는 과학이 발달해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세상이요, 또한 교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1장에서 사울을 피해 도망하던 다윗이 골리앗의 땅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했다가 당한 수모를 기억합니다. 

사울을 피해 아얘 이스라엘 땅을 떠났던 다윗은 자신의 민족의 원수이자 자신이 죽였던 골리앗의 땅 가드 땅으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신하들의 강한 반대의 소리를 듣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척하고 도망쳤던 사건 (삼상 21장 13절)을 기억합니다. 

그 뒤로 그는 아둘람 굴을 거쳐 십광야, 마온 광야, 엔게디 광야, 바란 광야등 여러 광야를 떠돌아 다니며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면서 한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다윗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둘람 굴 속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그의 광야 생활의 실상을 그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합니다. 

도망 중에도 다윗은 자기에게 피신해오는 400여명의 환란 당한 모든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과 함께 거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었고, 이들은 어려운 중에서도 남의 가축이나 재산에 손을 대지 않고 오히려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들 뿐만이 아닙니다. 

(삼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한 나라의 장관이었던 그가 도피하자 그의 가족들 까지도 사울의 보복이 두려워 그의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 하면 다윗가 그리 좋은 사이가 아닙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왔을 때에 아버지는 다윗을 소개하지도 않았고, 골리앗을 상대하러 전쟁터에 갔을 때에 그의 형들은 그에게 화를 내며 그를 멸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제들이 어려움을 피해 다윗에게로 몰려왔고,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당한 자들이 다 다윗에게로 몰려옵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을 가리키는 히브리(Hebrew)라는 의미가 원래 인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중동지방의 소외된 계층, 떠돌이, 추방당한 자, 환란 당한 자, 어중이 떠중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들 무리는 바로 교회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교회는 성도의 집합체이다. 그런데 그 성도들은 이른 바 사회적인 어중이 떠중이이다. 

광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는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제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막 2:15-17]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전의 모든 나무 - 조각목, 솔로몬의 시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에도 지성소의 언약궤는 반드시 조각목 - 비뚤어지고, 가시가 많은 사막의 흔한 나무...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리고 다윗의 무리도, 심지어 예수님 때도 함께 한 무리는 히브리 민족, 즉 사회적인 어중이 떠중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거룩한 무리로 여기시고 바꾸시고,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곳이 교회이고 신앙생활이다. 


그렇게 어렵지만 모여서 함께 고난을 참아가며 광야생활을 하던 다윗의 무리가 다시 도피처로 삼은 땅이 또다시 골리앗의 땅, 블레셋의 가드 땅 아기스에게로 피하는 것입니다. 

21장의 수모를 생각한다면 도저히 갈 수 없는 땅에 다윗은 무리를 이끌고 가서 다시 아기스 왕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 아기스왕에게 청하여 허락 받은 땅이 바로 사글락입니다. 

땅만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아기스를 위해 일했다. 아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블레셋의 적들을 물리치고 곧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에도 참여를 명받는다. (28장)  

일년 사 개월을 완전히 아기스의 신하가 되어 블레셋을 위해 살아간다. 

다행히 블렛셋의 신하들이 다윗을 극렬하게 반대하여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피하게 하신다. 


왜 어려움 중에서도 정말 소외된 사람들과 광야생활을 꾸려갔던 다윗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바로 현실의 어려움 때문이다. 

그는 대의고, 명분이고 따질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당장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에게 의지하는 무리들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앞 뒤 살펴볼 겨를 없이 눈에 보이는 가장 안전한 곳, 사울이 두려워하고 쫓아오지 못할 지역, 블레셋 골리앗의 땅, 사글락으로 피한 것이다. 


때때로 목회를 하면서, 혹은 목회하기 전에 어머니가 목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들이 때로 술집을 열기도 하고, 장사하면서 주일을 어기기도 하고, 세금을 떼어 먹기도 하고, 좋은 조건의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안믿는 집안 인줄 뻔히 알면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자녀를 결혼시키는 일들... 

바로 그들의 삶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정죄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다윗도 그랬다. 

다윗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나니까 당연스레 애굽으로 피했고, 야곱은 아얘 그리고 이주했다. 룻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땅에 거주한다. 요셉과 마리아도 헤롯의 폭정을 피해 애굽으로 가서 예수님을 키웠다. 그것이 삶의 realty다. 

현실에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그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다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떤가를 살펴야 된다. 그래서 그런 현실의 어려움들이 닥쳤을 때에 또 다시 애굽으로 피할 것인가? 블레셋의 뒤로 숨어야 할 것인가?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27장의 선택의 결과는 30장에서 펼쳐진다.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에 참여하라는 아기스의 명령에 다윗은 충성을 맹세하여 뒤를 따르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돌이켜서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시글락으로 돌아오자 아말렉 족속들이 그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군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조리 잡아갔다. 


시글락의 선택은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윗에게 피했던 다윗의 사람들은 기력이 다 할 때까지 울다가 그 분노를 급기야 다윗에게 향하게 된다. 


(삼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사람들이 다윗에게 달려들어 돌려치려 하자 다윗이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꾀를 쫓던 다윗이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제사장을 부르고, 하나님의 판단을 묻는 에봇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아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다윗이 이제 비로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삼상 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 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600명의 군대가 브솔시냇가까지 이른다. 이중 이백명은 더이상 육신이 탈진하여 따라오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게 된다. 

400명을 필두로 따락가긴 하는데 기력이 탈진한 이들이 아말렉을 따라잡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이 때 일어난다. 아말렉을 쫓는 중에 한 병사가 길에서 탈진해서 쓰러져 있던 애굽 소년 하나를 데리고 온다. 


지금 자기 동료 200명이 피곤하여 뒤에 남겨두고 쫓아가는 형편이요, 기력을 다해 아말렉을 쫓아야 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사흘을 굶고 쓰러져 있는 한 소년을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가던 길을 멈추고 쓰러진 소년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에게 빵과 물을 주고 남은 음식을 먹이고 그를 살린다. 

상황 때문에 블레셋으로 망명했던 다윗이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아둘람 굴속에서 400명의 사람들을 떠 안았던 그 모습 그대로 굶주려 있는 한 영혼을 살리는 데에 길을 멈추어 선 것이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 바로 그들이 쫓고 있던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다. 어떤 성경에서는 바로 아말렉 왕의 종이라고도 해석을 한다. 

결국 한 사람을 살리었더니 그 한 사람을 통해 아말렉의 본거지를 찾게 된다. 


다윗은 한 사람의 아내와 자녀도 일어버리지 않고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에게서 수많은 전리품마저도 얻게 된다. 


(삼상 30:20)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이야기의 끝은 여기가 아니다. 그 절정은 이 다음에 있다. 되돌아 오다가 아까 200명을 남기고 왔던 브솔시내에 당도한다. 탈진해서 중도 탈락했던 사람들이 다윗의 무리를 보고 놀라서 아내와 자녀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런데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기분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가족들은 돌려주되 우리가 얻은 전리품은 하나도 나눠주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악한 자와 불량자"라고 표시했다. 


왜 그럴까? 

다윗은 그들 사이의 갈등에 참여해서 솔로몬의 판결을 한다. 


[삼상 30:23-25]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다윗의 입술을 통해 울려퍼지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법이 되었다! 


초대교회의 한 큰 문제...고난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성도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마가복음:... 배반자의 복음 - 마가- 예수의 붙잡힘 앞에서 홑이불을 버려두고 도망간 자. 

                  바울과의 선교여행에서 중도에 도망간 자..... 

                  베드로의 수제자로서 베드로 전후서를 남긴 자. -----우리 모두가 예수의 배반자였다.

                  

자기들이 누구인가? 내세울 만한 것이 전혀 없던 어중이 떠중이... 

아무 공로 없이 비참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의 삶으로 인도된 사람들....바로 사글락 사람들.. 

그들에게 암한 구원- 값없이 얻은 승리. 

이것이 은혜이고 은혜는 또한 값없이 나누어야 하는 것임을 보여 준 것이다. 


[시 133:1-3]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대상 12:1)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가장 어렵고 실패했을 때에 함꼐 했던 시글락의 사람들이 나중 또한 다윗 왕국의 중심축...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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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인 아비가일 (삼상 25장) 


견고한 댐이 무너지는 것은 강한 파도가 아니라 작은 구멍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엄청난 고난이나 핍박이 아니라 삶의 작은 구멍, 유혹이나 분노의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아둘람 굴과 엔게디 광야의 굴속에서의 다윗을 나누면서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깊은 믿음과 거룩을 향해 나아가는 다윗을 나누었습니다. 굴이라는 것은 내면의 은밀한 공간과도 같은 것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고, 홀로 숨을 수 있는 공간이 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 굴이 자신의 가장 숨겨진 치부를 드러내는 장소가 될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이 굴이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향한 비밀이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굴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숨길 수 없는 공간이요, 다윗에게 굴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훈련소가 되었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오늘 25장에서는 분노의 칼을 움켜쥐고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달려가는 장면을 묵도하게 됩니다. 사울에게서조차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던 다윗이 지금은 분에 못이겨 400명의 동지를 이끌고 복수의 길을 갑니다. 이 때의 다윗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자신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유다지방의 마온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이 3000마리, 염소가 1000마리나 가지고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피하던 중에서도 다윗과 그 무리들은 결코 악을 행하지도 않고 오히려 강도들이나 광야의 동물로부터 그 지역에서 목축을 하던 목동들과 그 동물들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도망자라는 신분은 궁핍합니다. 기회가 되고 먹을 것이 있으면 먹어야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그 도망 중에서도 다윗은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선한 일을 베풀면서 광야에서 목축을 하던 목동들이나 동물들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 다윗의 증언: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헤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7절)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1절) 
  • 목동들의 증언: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15-16절)


그런데 양털을 깎는 시기가 왔습니다.  목축업을 하는 이들에게 양털을 깎는 시기는 일종의 추수감사절과도 같은 수확의 시기입니다. 한 해 동안 공들인 양모를 거둬들여 수확하는 시기이므로 이 때는 술과 음식이 가득한 음식상이 차려 집니다. 그들의 목축에 크게 도움을 주었던 다윗은 열명의 동지들을 나발에게 보내어 술과 음식을 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격식을 갖추어 공손하게 음식을 구하였습니다. 


[삼상 25:6-7]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절)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자기와 자기와 함께 있는 자들을 한껏 낮추어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들을 대접하는 것을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지키는 민족입니다. 창세기에도 금요일날 나누는 사사기에도 자기 집에 도움을 청하는 낯선자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녀를 희생하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접대하는 것을 율법의 중한 계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지금은 잔칫날입니다. 잔칫날에는 지나가는 자는 모두 들려서 음식을 나눕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다윗도 우리가 좋은 날 왔으니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축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다윗을 청하여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 상황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나발이 뭐라 하냐면 

10절부터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들이 많도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어디 종살이 하다가 도망나온 자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11절)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다윗을 알지 못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울에게 도망나온 다윗을 엎신여기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러니까 다윗이 열이 받은 것입니다. 자기는 대접받아 마땅한데도 예를 갖추고 대했거늘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모욕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기와 함께 한 동료들 400명을 이끌고 지금 나발을 혼내주러 가는 것입니다. 

(삼상 25: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사울 앞에서도 침착했던 다윗은 지금 자신을 모욕한 나발 앞에서 이성을 잃었습니다. 광야에서 배운 아름다운 거룩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윗은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또 다른 사울이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하인에게서 들은 나발의 처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마리 등등 음식을 가지 가지 싸들고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고 다윗에게로 달려옵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엎드려서 하는 말이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말의 요지는 무엇입니까? 

나발의 이름의 뜻은 "어리석은 자"인데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신경쓰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이 누군지를 알지도 못합니다. (25절) 

사람에게 직접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신 일이니 당신이 나발에게 보복하면 당신도 나발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6절) 

내가 용서를 대신 빌고 음식을 다 가져왔으니 화 풀고 드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축복하시어 당신의 집을 세우시리니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을 저지르지 마옵소서 

 

(삼상 25: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아비가일은 지금 다윗이 나발이 치는 사건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다윗의 처지 까지도 신앙안에서 바라보며 누가 당신을 쫓든지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생명싸개 속에 싸듯이 보호하실 것이며 당신의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물매로 던지듯 던지실 것입니다 하며 다윗이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크신지를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무엇입니까? 

"다윗이여, 원수 갚는 일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당신이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나발은 어리석은 자요 불량한 자인데 그 자 때문에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 되시렵니까?" 


흔히 우리의 감정이 격해질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판 사판이다. 나 못참는다." 그렇다가 일을 치루고 나서 뒷감당을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격한 감정은 우리를 파괴한다. 자녀를 혼내다가 폭력을 행사하고, 후회하고 부부싸움을 하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던져 버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받으며, 자기 밑에 사람을 훈계하다가 자기 감정에 못이겨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무너뜨려 버립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제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든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회개를 해도 그런 일들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다윗 앞에 무릎꿇은 아비가일의 말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엄한 임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들 끼리의 싸움에서 아비가일은 한낮 여자요,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은 약자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굳은 마음과 격한 감정으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빛을 회복시키고 모든 죄의 위험에서 다윗을 구해냅니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추었던 다윗의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합니다. 가장 추한 사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했던 자신을 기억나게 만들었습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세상에는 빛을 찾아 보기 힘든 정말 어리석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힘든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화나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칼을 휘두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들을 미워하다가 결국 우리 또한 똑같은 악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시편 14편은 나발과 같은 어리석은 자들을 겪으면서 지은 시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 14: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14:5)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시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14: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어리석은 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지만 그와 함께 거하면서도 나발의 어리석은 일에 관여하지 않고 선을 행했습니다. 악과 부딪치면서 살아가면서 악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을 행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아비가일은 나발로 인해 악에 빠질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해줍니다. 분노의 감정에 잡힌 다윗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합니다. 난파당할 뻔한 다윗을 폭풍에서 부터 건져 냅니다. 


굳건한 신앙을 무너뜨리는 것은 폭풍우가 아닙니다. 우리 안의 작은 감정의 소용돌이, 작은 구멍이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 주위에 난파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악한 자들을 대하다가 똑같이 악해져서 결국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빛을 잃어버립니다. 

믿음은 핑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 누구 때문에 상처입었다. 누구 때문에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는 순간, 우리가 잃어버리고 놓쳐 버린 것은 우리를 넘어뜨기게 했던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주위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아름다움이 우리를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서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두 손을 꼭 쥐고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에서, 험한 들판에 홀로 피어 있는 작은 꽃잎을 보며, 빗줄기 사이에 보이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무더운 햇살 속에서 슬며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세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아름다운 것들로 넘칩니다. 


내가 사는 세상 속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아비가일은 비단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나의 아비가일이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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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둘람 굴과 엔게디 광야 (사무엘상 24장 1-7절) 


사울 :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을 하고,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즉위

다윗 : 기름부음을 받고 잠시 사울의 곁에서 시중들고, 골리앗을 무찌름으로 군대의 장관에까지 오르지만 이후 10년 이상의 기나긴 도피 생활, 도망자 생활, 광야 생활. 


I am Something-> I am Nothing -> I am a Person of God 


지난 시간에 나누었다시피 이 광야 생활, I am Nothing의 삶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가장 고되고 힘든 연단의 시간이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에 이 시기는 내 교만이 깨어지고,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가장 유익한 시기입니다. 

아브라함의 기근-모세의 광야생활-예수님의 광야 생활 

-> 시험과 유혹의 장소 

  • 세상의 지혜(꾀)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인가? 
  • 애굽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가나안(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 결국 광야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법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아히멜렉의 성전에서 나와 다윗이 향한 곳은 가드. 마치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가듯이 다윗도 성전을 나와 가드땅으로 피합니다. 가드 땅은 자신이 물리쳤던 골리앗의 땅입니다. 

그 땅에서 다윗은 미친사람 행색을 하며 도망나와 본격적인 도피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두 장소를 지나게 되는데 하나는 아둘람 굴이요, 또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 소개된 엔게디 광야의 굴 입니다. 


굴: 사막 지대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외적인 위험으로 부터 보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아둘람 - 격리된 장소, 피난처 

이곳에서 경험된 은혜: 


1. 다윗은 아둘람에서 피상적인 하나님, 막연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마치 욥이 고난을 통해서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 아둘람은 다윗이 자원해서 들어간 동굴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어둠의 터널이었지만, 절망의 터널이었지만 그는 이 곳을 나올 때 밝은 빛을 경험하고 나옵니다. 
  •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노래 


1) 시 57편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시 57:9]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 (시편 142편) 

(시 142: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시 142: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시 142: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시 142: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 142: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시 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2. 평생의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 오늘 추방자요 도망자인 다윗의 곁에 찾아온 자들은 누구입니까?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지금 자기 혼자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아니 세상에 힘든 사람이란 힘든 사람이 다 모여서 그에게 모여듭니다. 우리는 힘이 들고 기분이 안좋으면 좀 밝은 곳, 좋은 사람을 만나서 기분전환이라고 하고 싶지요. 내 기분도 안좋은데 더 안좋은 사람 만나면 얼마나 힘듭니까? 그런데 지금 다윗이 이방땅에서 미친척 하면서 쫓겨나서 가까스로 이곳에 피신했는데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환난당한 모든 자들이 이 곳에 모여든 것입니다. 
  • 그들은 장차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 
  • 삼하 23장에는 다윗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나라의 장수들, 기둥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이 아둘람 굴 속에서부터 만나 동거동락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굴람굴에서부터 같이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다윗의 왕국의 기초가 되고 장수가 되고 기둥이 되어서 나라를 다스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자신에게 부담만을 안기어주었던 사람들이 후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다해 충성하는 그런 왕국의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번째 장소 - 엔게디 

염소새끼의 샘, 어린 염소새끼를 먹이는 물, 은혜, 피난처의 공간. 아둘람이 단순한 피난처였다면 이곳 엔게디는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는 공간, 생명을 경험하는 공간 

외적으로는 지금 사울이 3000여명의 정예 군사와 함께 다윗을 쫓고 있는 상황이지만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삼상 23: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어떤 위험이 있어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안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생명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다윗은 사울을 볼 수 있는데 사울은 다윗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목숨이지만 은혜 안에 들어오니까 어떤 위협도 침범칠 못합니다. 

오히려 어둠 속에 방황하는 그들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1)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기면서도 추한 장면. 

광해의 한 장면 - 왕이 변을 보는데 궁녀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보고있다가 변을 보면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하면서 그 변을 어의에게 가져다 주고 그것으로 왕의 건강을 체크 


그런데 지금 굴 속에서는 어떤 신하도 사울 곁에서 시중들 수 없고 그가 옷을 벗어 던지고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는지도 모르고 옷을 벗어 던지고 뒤를 보는 상황.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 - 내가 벌거벗겨지는 공간. 

광야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가장 연약한 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교육으로, 체면으로, 권력으로, 힘으로 가려왔던 자신의 은밀한 치부들이 다 공개될 수 있는 공간. 


생존을 위한 광야- 서로 잡아먹고 죽이기도 하고, 성범죄와 모든 인간의 본능이 꿈틀대는 공간. 


광야는 애굽의 궁에서 왕자로서 자랐던 모세가 일개 목동이 되어 삶의 지루함과 자기의 자존감이 완전히 상실되는 가운데 자기가 입고 기대어 왔던 모든 것이 전혀 쓸모가 없어지는 그런 공간. 

그런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은 비로서 가식 없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런 야생의 장소에서 오히려 자신의 본능대로 추한 짐승처럼 변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울이 엔게디 광야에서 신하들을 떠나 홀로 뒤를 보는 장면은 왕이라는 껍데기에 가려왔던 한 인간의 가장 연약하고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2) 다윗이 당한 유혹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본문에서 다윗은 아주 특별한 유혹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 되어서 뒤를 보는 사울을 지켜보면서 다윗의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하면서 그를 죽이라고 다윗을 치근합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통쾌한 장면입니까? 

지금 당하는 고난을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에 있어서 치명적인 함정은 무엇입니까? 

"네 생각에 옳은대로"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 마음대로..." 


골리앗을 무찔렀던 다윗에게 지금 자신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며 무장해제 되어있는 사울은 그야말로 죽어마땅한 어떤 왕의 권위도, 인간으로서의 조그마한 존엄성도 찾아보기 힘든 추악한 모습 그대로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의 다윗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삼상 24: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결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어서 치리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추한 모습을 보이는 사울의 모습 속에 비교할 수 없고, 입에 담기에도 힘든 가장 거룩한 단어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추한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경외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롬 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사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사람들은 그리 존경하거나 예우를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죄인, 추한 자를 두고 그를 우러러 보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마음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 - 그리스도의 완전한 분량.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 - 우리가 영원히 살아갈 모습 

우리에게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먼지 한톨 보다도 짧은 시간의 모습. 믿는 자들은 모두 온전한 모습으로 영원을 살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그 짧은 순간의 않좋은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판단하고 미워하고 무시하고 경멸하고....


다윗은 지금 자신 앞에서 엉덩이를 까놓고 변을 보는 사울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하나님의 선택 받은 자를 보게 됩니다. 


(삼상 24:13)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은 악한 방법을 통하여 선을 이루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때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지만 악은 악인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선인에게서 악한 행동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다윗을 보면서 사울은 울며 말합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어찌보면 사울의 마지막 성령의 임재가 이 때 이루어 집니다. 

성령의 예언들이 사울의 입술을 통해서 펼쳐 집니다. 


비록 사울은 이후에도 또 다시 다윗을 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자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24장의 마지막 구절은 엔게디 광야의 굴 속에서의 두 사람의 갈림길을 보여 줍니다. 

(삼상 24: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기름부은 자였지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결국 자기만의 처소, 자기길,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윗은 기름부은 자로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며 요새로 돌아갑니다. 

요새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견고한 성입니다. 그의 신앙과 삶과 환경을 더욱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엔게디 광야로 인도한 것은 삶의 위기, 고난, 위험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굴로 피합니다. 

그리고 그 굴 속에서 다윗은 그가 그토록 갈구 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맛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일은 드뭅니다. 

보통 하나님을 향한 출발은 다윗 처럼 피부에 와 닿는 삶의 문제들을 통해서입니다. 

엉망이 되어 버린 삶, 말 안듣는 자녀, 까다로운 배우자, 해결되지 않는 여러가지 삶의 문제들...

언제나 우리는 우리 삶의 엔게디 광야에서 바둥거리면서 출발합니다. 

그렇지만 그 삶의 굴 속에서, 점점 더 자신의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어느덧 하나님의 광야에서 시험과 유혹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둘 가 광야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사울은 오로지 다윗을 잡아 죽일 생각만 하다가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는 왕이 됩니다. 왕같지 않은 왕, 가장 부끄러운 인간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곳 광야에서 하나님께 달려가서 피하고 그 굴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눈을 뜨며 그 말씀을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 찬양의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갑니다. 


광야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요, 우리의 모든 가면이 벗겨지는 곳이요, 때로는 우리의 치부가 드러나는 곳이요, 어떤 이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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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안의 두 사람 (사무엘상 21장 1-9절)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의도가 단지 우발적이 아니고 계획적, 조직적, 적극적인 것이 확인되자 다윗은 이 때부터 장차 10년 동안이나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고, 왕의 궁전과 왕의 곁에서 왕을 직접 보며 훈련을 받은 다윗의 다음의 훈련 코스는 광야와 같이 일정한 처소가 없이 정처없이 방황하며 고통을 통해 믿음을 성장시키는 이른바 고난학교, 광야 학교, 기근학교였습니다. 


  •  아브라함: 창세기 12장의 부르심 - 선택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 그 땅은 곧 가나안, 팔레스타인 지방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당한 일 - 기근

 

 예수님도 마찬가지 -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 가장 먼저 행하신 일은 세례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세례 받으신 예수님께서 그 다음 당하신 것 -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과 시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 - 세례 

 세례 받은 백성의 그 다음 코스 - 광야 

 

기근, 고난, 광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경험한 것 - 애굽으로 피신 - 사라를 아내가 아닌 누이라고 거짓을 말함 - 거짓을 행한 바로가 위험에 처하여 사라를 돌려주게 되는 사건 


예수님께서 광야를 이기신 말씀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 - 만나와 성막, 율법 - 말씀으로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 


[시 1:1-2]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있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할 것 - 꾀를 쫓지 말고, 죄인의 길에 서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 

복있는 사람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삶. 말씀과 함께 동행하는 삶

요한복음 1장 -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결국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고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 


왜 열심히 믿는데 기근이 올까?

왜 점점 더 어려워질까? 

왜 일이 잘 안풀릴까? 

-> 왜? 세상의 가치관. 힘, 꾀, 교만, 탐심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버리고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는 훈련 


우리는 삶의 기근이 오면 본능적으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별 수단을 다 강구하게 된다. 꾀를 쓰고 빽을 쓰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쓴다. 

아브라함은 기근이 오자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고,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도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향한다. 

성도들도 삶 속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익숙한 세상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하게 된다. 심지어 점을 보고 부적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본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가 정말 여호와를 의지하는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지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런데 그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말씀이 없는 믿음은 헛된 신념이요, 우상숭배이다. 


  • 다윗은 이제 군대 장관에서 도망자가 되었다. 

사울 개인이 아니라 사울이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해서 다윗을 쫓는다. 

왕궁에 있었을 때는 사울이 내 본심을 알아준다면, 내가 딴 맘 갖지 않고 충성을 다한다면 회복되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이젠 오직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삶 밖엔 없다. 

그런데 기특하게도 다윗은 어디로 피하는가? 놉 땅의 아히멜렉 - 제사장들이 무리로 거주하는 놉 땅으로 피한다. 


그런데 아히멜렉이 자신을 반기는 것이 아니라 "떨며 그를 영접하였다"고 말한다. 

왜 제사장은 떨었을까? 사울과의 일을 알지 못하는 아히멜렉에게 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 성전을 찾은 것은 죄를 지었거나, 정결하지 못한 일을 저질러서 정결의식을 필요로 하거나 문등병에 걸리거나 하는 안좋은 일 때문이다. 

성전으로 피하고자 했던 다윗이 아히멜렉이 왜 홀로 여길 왔느냐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거짓을 말한다. 

다윗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자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자였지만 어려움이 닥치자 "세상의 꾀"에 의지한다. 


자신은 사울의 비밀 업무를 수행하러 왔다고 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동행자에게 떡을 좀 달라고 청한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제사장만이 성소에서 먹어야 할 거룩한 떡, 진설병을 주어 먹게 한다. 

다윗은 거짓으로 떡을 구한 것이고 이에 엘리 제사장의 후손이었던 아헤멜렉도 성전의 율례를 어기고 진설병을 제사장이 아닌 다윗과 다윗의 소년들에게 주어 먹게 한 것이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일 때에도 사울의 검이나 세상의 칼에 의지하지 않고 승리했던 다윗이 스스로 위기에 몰리자 그것도 성전에서 제사장에게 무기를 구하게 된다. 

성전에는 골리앗의 칼만이 오직 믿음의 전리품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가 무기를 구하여 받은 것이 바로 골리앗이 쓰던 칼이 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다윗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굶주린 배를 채우고, 골리앗의 칼을 얻더 도피한 곳이 어디인지 아는가? 바로 가드왕 아기스에게 이다. 가드는 바로 골리앗의 출생지이다.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 바로에 의지하듯이 다윗도 성전을 떠나 적진의 중심, 가드 땅으로 갔다고 신하들의 말을 듣고 미친척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수염에 침을 흘리며 도망하게 된다. 


세상의 꾀를 의지한 결과이다. 그것의 결과가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도와주었던 바로가 큰 재앙을 만나듯이 꾀를 내어 거짓으로 성전의 떡을 취했던 다윗을 도와준 결과로 아히멜렉과 놉 땅의 선지자 85명이 사울의 명령으로 떼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현대의 해석은 다윗이 성전에서 얻은 떡과 칼의 의미에 집중한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그냥 먹을 것을 구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떡 다섯개를 구한다.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대로..." (3절) 

이에 아히멜렉은 그에게 거룩한 떡을 내어준다. 


그리고 또한 성전의 제사장에게 전혀 성전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무기를 구하고 그 무기의 댓가로 자신의 믿음의 전리품인 골리앗의 칼을 얻는다. 


성경에서 떡과 칼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비유들이다. 떡 다섯개는 예수님이 행하신 오병이어를 떠올리고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설명하면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절)고 말한다. 

예수님은 안식일날 이삭을 베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예를 들어 그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히멜렉과 다윗의 행위를 변호하신다. 


(막 2: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물론 다윗이 거짓을 말한 것과 가드 땅으로 피하다가 미친척 한 것은 그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믿는 자의 꾀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를 황폐하게 한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서 얻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일으키는 떡으로, 악한 죄와 사단을 물리치는 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그런데 다윗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적, 육적 힘을 공급받고 있을 때 또 한명의 사람이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는 다윗과 아히멜렉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목격했다. 

7절에 보니까 그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라고 나온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 육신을 위해 영적인 축복을 포기한 사람의 후손들이다. 

그는 왜 성전에 머물러 있었을까? 

그도 자신의 죄를 씼던가, 예배하던가 무언가 종교적인 이유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윗도 그를 의식하지 않고 그 앞에서 숨김없이 아히멜렉과 대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도엑은 예배라던지 하나님의 말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던 자였다. 그는 예배에는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 목적은 자기 몸을 위하고 자기 목적을 위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자에게 예배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으로부터 떡과 칼로 비유되는 말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위장하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다. 


그는 성전에서 나가서 곧장 사울에게 달려나가 이 사실을 보고한다. 사울은 아히멜렉을 취조하고 신하들에게 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제사장을 죽이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사울의 신하라 할지라도 감히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은 왕보다 높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삼상 22:17-18)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왕의 호위병들마자 행치 않던 일을 얼마전 까지 함께 예배하던 자 속에 속해있던 도엑은 전혀 망설임없이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필십 오인을 죽인다. 

그에게 성전은 오직 자기 성공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시편 52편은 이러한 도엑의 행위를 하나님께 고하는 다윗의 기도이다. 

(시 52:1)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시 52: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시 52: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시 52:4)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시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시 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8)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시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성전에서는 연약한 자가 말씀으로 힘을 얻고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성전은 연약한 자들이 말씀의 떡과 칼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회복과 치유, 능력과 힘이 주어지는 곳이다. 

그런데 성전은 또한 끔찍한 일도 일어난다. 자기를 위장하여 가리고, 자기 목적을 위하여 언제든지 하나님을 이용하고 성전을 무너뜨릴 계책이 범람하는 곳이 또한 교회다. 

똑같이 예배를 드려도 누군가는 회복과 치유를 맛보고 세상을 이길 믿음을 얻는가하면 누군가는 그 안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며 더욱 악한 자가 나올 수도 있다. 


무엇이 이를 구분짓는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가? 다 뒤로 하고 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곳에 나왔는가? 

성전을 나갈 때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다윗은 떡과 칼을 취하여 세상으로 나갔다. 

비록 세상으로 피신하다가 더 큰 곤경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다윗은 점점 더 말씀을 의지하는 자가 된다. 말씀과 동행하는 자가 된다. 


[시 34:8-시 34:22] 다윗이 미친척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시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시 34: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시 34:16)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시 34:17)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시 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시 34:22)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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