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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빌립보서'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3.07.10 빌립보서 2:5-11절 빌립보서 강해
  2. 2013.07.10 빌립보서 2:1-4 빌립보서 강해
  3. 2013.07.10 빌립보서 1:27-30 금요예배 빌립보서 강해
  4. 2013.06.14 빌립보서 1:19-26
 

빌 2:5-11]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 바울의 기독론

                       -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 기독교: 예수가 누구인가?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 

요한의 기독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베드로의 기독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주님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눈을 형형 색색이어서 파란 마음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파랗게 보이고 빨간 마음을 가진 사람 눈에는 빨갛게 보여서 주님의 존재와 주님을 아는 인식에 큰 차이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병든 사람은 의사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은 정치적 메시아로, 억눌린 사람들은 혁명가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의 사람으로 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피부 색깔도 자기들의 피부 색깔과 같이 봅니다. 예수님은 원래 피부가 우리와 같은 황색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백인으로, 흑인들은 예수님을 아에 흑인으로, 우리 나라 김기욱 화백은 예수님을 큰 갓을 쓴 양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정확히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편견, 사람들의 편견, 신학자들의 편견으로 예수님의 원래 모습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삶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6절) 

->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가? NO)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과 같이 되지 않고자 하는 마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아담의 범죄함으로 온 인류에 죄와 사망이 들어옴. -> 아담의 범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나님의 말을 불순종.,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사람같이 되심. 


그리스도의 삶, 인격-> 자기를 죽여 인류를 살리는 삶. 영성

-> 그 방법은 겸손과 섬김과 희생 

  • 탄생, 생애, 죽음: 하늘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 나심. 의지할 처소 없이 제자들과 가난한 자, 병든자, 귀신 들린 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다니시면 사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 
  • 이 삶에 일관성있게 흐르는 삶의 태도: 자기 부인-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는 것. 자기를 아무 것도 아니라 만드는 것.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자기를 비울 수 있을까? 자기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 있을까? 

     불교: 무아, 자기 비움, 해탈....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사람이라는 단어: 동양에서는 "사이" -> 관계성을 중시 

     라틴어(유럽) :Humus, 흙, 먼지-> 덧없음. 허무 

     히브리어 : ish- 불덩이, 욕망-> 인간은 곧 욕망적인 존재이다. 

     

     무엇을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바라보고 사는 존재이다. 

     나를 비우라는 것,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비우고, 욕망을 비우고...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지 못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으로, 수동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를 바라보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 영어로 보면 너희의 삶의 태도가 예수의 삶의 태도와 같게 하라는 것이다. 

     그가 자기를 비워 겸손하게, 섬기며, 희생하였듯이 너희도 적극적으로 그의 삶을 닮을 소망을 품고 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남과 싸워 이기려고 한다. 왕, 장군, 정치가, 권력자들은 끊임없이 남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항상 패배자가 있고, 갈등이 있고 전쟁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와 싸우는 자다. 이 싸움은 남을 이기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그러한 자가 있는 곳은 평화롭고, 유익하며, 만족이 있고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도 로마 군사들과도 싸우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 그들과 싸우지 않았다. 단지 예수의 싸움은 십자가 상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삶이셨다.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8절) 

    - 무엇에 복종하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 복종의 정확한 목적이 있었다. 히브리적 사람의 정의가 욕망하는 것- 다른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라면 다른 말로 이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복종한다는 것. 

       - 무엇에 복종하는가가 사람의 삶을 좌우 : 뱀이 유혹하여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바라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인다. -> 모든 종류의 욕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 

        -> 그런데 그 욕망의 타겟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떼어 놓는 것.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금지 시키는 것. 

        ->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면 자유하게 될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떼어놓음이 모든 인류의 죄와 사망을 가져오는 것. 

   - 예수 그리스도: 오직 복종의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 그 안에 참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탄은 이것이 어떻게 말이 되냐며 끊임없이 우리를 혼란 시킨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억압이고 부자유고 그리스도인은 억압과 부자유 속에서 산다고 유혹한다. 

   -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았다. 오직 복종의 대상인 말씀만이 그 삶을 움직였다. 시간적으로, 질적으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다. 

 - 어느 정도까지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어도,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자기를 온전히 내어놓는 것이다. -> 그 결과가 십자가이다. 그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그냥 고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함의 결과로서 오는 것이다. 아무것이나 십자가가 아니다. 

   - 사울왕의 불순종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그러나 사울왕은 아말렉을 물리친 다음에 볼품없는 것은 다 진멸했지만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어린양과 기름진 것은 남겨놓고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변명이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요,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단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은 육신의 정욕의 사람이요, 그 후손이 아말렉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려고 하는 야곱의 후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싸움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과 육적인 사람들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아말렉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은 눈으로 보이는 아말렉의 적도 있지만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인간의 정욕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거기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버림을 당합니다. 


  •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무엇이 높아지는 것인가? 

고지론과 미답지론에 대한 한국교회 신학적인 갈등

* 고지대론: 효과적인 복음전파와 크리스찬의 영향력을 위해서 높은 자리를 점령하라. 세상에서 성공하여 복음을 위해 사용하라. 요셉, 다니엘, 다윗, 솔로몬... 느혜미아, 에스더... 

* 미답지론: 크리스찬은 남이 하지 않는 것,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바울, 예수, 열두제자.... 아브라함. 

-> 성경은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어쩌면 신학적인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 정답은 자기가 그 길을 정하지 말고 말씀을 좇으라!

 요셉도 다윗도 다니엘도 느혜미아도 세상적인 영향력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보니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것이다. 

 바울도, 열 두 제자들도, 아브라함도 일부로 힘들 길, 어려운 길만 골라서 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미련한 짓이다. 오직 말씀을 따라 가다 보니까 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행복이 목표냐? 살다보면 오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 목표인가? 날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면 어느 순간엔가 그런 사람,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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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4]

(빌 2: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빌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분열된 빌립보 교회 

빌립보서 전체의 주제- 기쁨, 혹은 기쁨이 충만한 삶

*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 (2절) 

부족하고 분열된 무리들- 그러나 감사할 수 있는 이유(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1. 너희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5절) 

2.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6절)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7절)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어떤 이들은...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7절) 

->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 믿음의 진보와 기쁨의 삶 (신앙 안에서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삶) -> 믿음 안에서 기쁨과 진보가 있는 삶. 


*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에 어울리는 삶, 합당한 삶 (27절) 

-> 한 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교리는 다르고, 교단은 달라도, 서로의 가치관은 달라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있는 삶,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 

* 이러한 주제들이 초대교회 교회의 중요한 주제. 

지금 교회의 중요 주제는 무엇인가? 

부흥, 건물, 프로그램, 주일학교.....


이런 것들이 성경 상에서 한 번이라도 나오는가? 부흥은 우리의 공동체가 성령 안에 서 있고 각 구성원이 성령이 충만할 때에 당연하게 따라오는 결과.... 

초대교회는 복음을 증거했지, 그리스도가 한 것을 선포했지 전도하지 않았다. 교회 좀 나와달라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복음을 위해 한 것은 교회 나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단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하며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찾아 그들을 만나고 고치고 힘을 주었다. 


Fan이냐 제자냐? 

그리스도의 팬은 많다. 너무도 그분을 좋아한다. 따라다닌다. 또 자랑도 한다. 

그런데 하나도 닮지 않는다. 그냥 팬으로서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대로고 내가 필요할 때만 좋을 때만 그냥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팬으로서 따르는 자들을 무리라 부르셨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지만 그들에게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주님이 세우고자 한 자는 제자다. 

공생애를 위하여 세례 받으시고 가장 먼저 제자를 세우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권세를 주셨다. 성령을 부어 주셨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들이 병을 고쳐주고 너희들이 귀신을 쫓아주고, 너희들이 작은 예수로 살아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라. 

그들을 빛과 소금이라 부르셨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왔다. 그리고 오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 복음을 전했다. 

전도는 우리 교회 작지만 좋아요, 괜찮아요...그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서서 빛과 소금이 되고 능력을 받아 도움이 필요로 한 자들을 도우며 

"내가 금과 은은 없어도 나에게 있는 것 예수의 이름으로 당신을 돕습니다. 당신을 낫게 합니다. 당신을 구원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기쁨이 충만한 삶의 핵심은 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지금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으로 인해 불안해 하고 있으며, 유두고와 순두게와 같은 여성들이 은사를 남발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지만 바울은 그들을 신앙 안에서 품고 내가 죽어도 그리스도가 증거되면 유익한 것이다. 

그들이 다툼으로, 순수하지 못하게 사역한다 하더라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그들을 자라게 할 것이라 믿고 그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복음을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일하는 자들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 충만한 그리스도인,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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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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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27-30]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빌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전 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이 처한 환경을 넘어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다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그것을 자기의 유익으로 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바로 앞부분에서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사정과 그리고 현재 느끼고 있는 깊은 심정에 대해 고백하고 나서 갑자기 테마를 바꾸어 빌립보교회를 향해 실제적인 권면의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빌립보교인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는데 그 말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입니다.


"오직"- "Whatever happens" - 무슨일을 당하던지, 다른 말로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에 있어서든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에 맞게 살아라. 


“생활하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장 27-30절의 말씀은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나뉘어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서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긴 문장의 핵심을 이루는 주동사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활하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명령의 말씀이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라”는 이 동사는 바울이 평소에 흔히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만 특별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무얼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던 없던 너희는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1장 5절에 보면 서두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전도도 잘하고 바울을 비롯한 전도자들을 잘 섬기는 선교도 잘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인 본론에 들어가서 첫번째 그들에게 말씀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그치지 말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잘 찾아보기 힘든 삶을 강조하는 바울의 주장이지요.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때, 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셨고 우리에게 하늘의 처소를 예비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으시면 당신도 구원받으십니다. 천국의 백성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분이 행하신 것을 믿는 믿음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에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다시 말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할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소리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앙생활하면 편하고  축복받는다고 해서 예수 믿었는데 신앙생활 할수록 힘들어 지네요. 갈수록 요구하는 것이 많네요.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전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나가서 "예수 믿으시고 구원 받으세요. 그런데 고난도 받으셔야 합니다." 하고 전도한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초신자에게는 말하지 말고 신앙 안에, 교회 안에 깊이 들어온 자들에게만 고난을 주는 것일까요? 그럼 약장수나 다를 바가 없지요. 달콤하게 꼬셔놓고 이젠 이것 저것 다 가져 간다면,,,,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위해 주신 통로는 모세에게 주신 계명, 혹은 율법, 그리고 범죄할 때마다 선지자들을 통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큰 짐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들에게 짐이었습니다. 틈만나면 우상을 숭배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면서 죄악을 범합니다. 


구약식대로 지금 전도를 한다면 

"우선 율법표를 작성하고 생활 계획표, 점검표, 체점표"등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렇게 살면 복받는다. 이렇게 살면 천국간다. 이런식으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학교에서, 학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생활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혹은 외부에서부터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추어서 살려고 바둥바둥 애를 쓰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우리를 살피시는 분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속마음도 꽤뚫어 보시고, 우리가 숨을 것도 없지요. 그런 분이 나를 항상 지켜보면서 계획표대로 잘 살고 있는지, 체점하고 계신다면 어떨까요? 

이런 삶 속에서 평안을 누리면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얼마못가서 다시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삽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그들이 의지하는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모세와 같은 리더였고, 아론 같은 제사장이었고, 엘리야 같은 선지자 였습니다. 다윗 같은 왕이 었습니다. 

자신들은 늘 실패해도 이들 만큼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자처럼 섬겼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평범한 인간과는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들 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에 늘 정통해야 했고, 잘 지켜야했고, 그리고 이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했다. 회개하자 하면 그 땐 다같이 회개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무서우신 하나님보다 이들 선지자나 제사장을 훨씬 의지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철저히 자기들과는 다른 신령한 자들이었니다. 이들은 옷도 자기 들과는 다르게 입었고 먹는것, 자는 것, 생활하는 것이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의례 그들은 자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대접하고 봉양했지요. 왜냐하면 그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막아주고 축복을 빌어주는 일종의 "생명보험"같은 존재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누구도 이들과 함께 살거나, 닮거나, 이들의 사역을 나누거나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자신들과는 분리된 다른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자신들은 여전히 죄를 지어도 이들 선지자나 제사장 만큼은 죄를 짓지 말아야 했고, 왜냐하면 이들이 죄를 지으면 정말로 하나님의 분노로부터 피하고 중보할 존재가 없어지니까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에게는 구약 시대에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지켜주던 제사장, 선지자, 왕이라는 삼중직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먹고 마시며 다니셨습니다.

 구약의 병자들과 죄인들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을 찾아와서 예물을 드리거나 제사를 드려 (아니면 나아만 장군처럼 시키는 일을 해야)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다니시거나 자기를 찾아오는 자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아무런 요구 없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본인이 직접 빛으로 오셨지만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하십니다. 

 배가 고파 굶주린 자들을 보며 제자가 묻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고 하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 시며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을 보이신 다음에 너희들이 나가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쳐주고 천국의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자기의 재산을 다 가지고 지키기 위해서 모세를 따르고 선지자를 따랐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결국은 나를 닮아라. 나처럼 살아라. 너희들이 예수로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처럼 살기 위해 보내 주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예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곧 성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서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더 얻어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 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에 널리 퍼진 복음은 그야말로 귀가 번쩍 띠게 해주는 기가막히게 좋은 소식뿐이어서 예수 믿는 것이 성공의 보증 수표를 받는 것처럼, 혹은 건강에 이상이 없음이라고 확인시켜주는 건강진단서를 받아쥐는 것처럼 형통의 신학과 건강과 치유의 신학이 교회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여전히 물질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교회 생활에서도 재물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현실은 그 뒤에 이와 같이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형통하게 된다는 신학과 기복주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는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들은 변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자들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능력없는 자들로만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자신이 바로 서서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고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 만나서 기도받고, 안수받고, 축도 받아 축복을 보장받는 그런 무리들, 언제나 주위에 휩쓸리고, 다른 사람들이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자 하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대로 따라가는 믿음없는 신앙인이 되고 있지 않나 반성해 봅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30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고난이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는 바울의 이야기가 진리라면, 반대로 고난이 없는 신앙생활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는 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고난이 없는 안위한 신앙생활도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

제가 오늘 본문의 바울의 의미를 잘 못 해석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고난이 따라옵니다.

너무 고난이 없고 평탄하기만 한 삶은 오히려 내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 않는 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합니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상속자에게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이 따른다면 고난도 당연히 받을 수 있다.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난이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증거이다. 고난을 통과하는 자만이 떳떳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반드시 물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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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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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9-30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게 된 일이...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가 신앙 안에서 이룬 결론. 성령께서 주신 생각... 
  • 너희의 간구와: 사도바울의 외로움이 들리는가? 

     -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가장 높은 학식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학문과 가문이 뛰어난 자가 반역자라는 이름을 무릎쓰고 유대교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를 쫓음. Why? 예수를 만났으니까... 주님의 은혜로 강권적으로... 

     -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의심한다. 그는 죽일 때까지 그의 사도권, 그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변호하며 다녔어야 했다. 그 자신도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 안식처가 없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의 불행을 기뻐한다. 

     -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상처받은 이야기, 배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직 가룟 유다 이외에는...왜? 그들도 떳떳치 못하니까... 그들 자신도 다 배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바울은 누구는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으며... 그리스도를 떠났으며..그런 구절이 많다. 서운함도 느낀다. 어디 하나 의지할 때가 없다. 결혼을 안 했으므로 가족도 없다. 그래서 서운함도 느낀다. 외롭다. 성도들의 기도는 그가 세상에서 위안을 받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안다. 

     -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상처를 안 입었을까?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았다. 배설물로 여겼다. 자기 자신 안에 기댈 수 있는 것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에겐 성도가, 믿음의 동료가 귀했다. 때로 의지했다. 그들의 헌금에도 의지하고 그들의 기도에 의지했다. 

     

  •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내가 풀려나게 될 줄을 내가 안다. 

     -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풀려 났다가 다시 감금되고 지하 감옥에서 사형당함. 

     - 곧 풀려 나지만 또다시 감금... 

     - 그러나 영원한 구원에 확신을 가짐.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그의 인생의 기준점, 목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려 함.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다. 내 소망과 기대... 말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인데...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잘 되고 싶어하는 생각... 내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생각...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고자 했는데...난, 나 자신을 살펴보면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서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나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려 하다 보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엔 언제나 부끄럽다. 


  •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 이런 감정이, 열정이 한 순간이 아니다. 한 순간 이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 내 자신을 다 드린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한결 같이, 예나 지금이나, 온전히....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는 것이었다. 

  • 목적이 있는 삶: 릭 워렌 "목적이 이끄는 삶" 목적이 있는 삶의 넷가지 유익

      1) 삶의 의미를 준다.  목적이 없는 삶: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 사치와 향락 속에서 삶의 허무함을 고백

      2) 목적이 있으면 삶이 단순해 진다. :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일이 내 삶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일인가?” 하고 묻게 됩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아 보면, 우리에게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시간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우리에게는 더도 말고 덜도 말

         고 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힘과 시간만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 복잡합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일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자인 체하나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난한 체

         하여도, 부자인 사람이 있다.” 이 말씀이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이 번역한 Message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retentious, showy life is an empty life; a plain and simple life is a full life (남에게 과장되게 보이려고 하는 삶은 텅 빈 삶이고, 단순한 삶이야말로 가득 찬 삶

         이다).” (잠언 13:7) 

       3) 셋째로, 삶에 목적이 주어진 사람은 삶에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4) 삶의 목적이 주어지면 삶에 동기가 부여된다 (Knowing your purpose motivates your life)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동기가 있어야 성과가 있습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NKJV에 이 말씀이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죽는 것은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od News Translation에는 “For what is life? To me, it is Christ. Death, then, will bring more (삶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더 많은 것을 가져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난 내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다. 예수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들이 여전히 있다.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는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쉬고 싶고 즐기고 싶고 때론 망가지고 싶다. 그런데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를 뜻대로 쓰다보면 결국은 그 시간이 일부분의 헌신 마저 집어 삼킨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하신 이유는 그 분이 욕심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군열, 구멍에서부터 큰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 마음은 조그마한 틈에서부터 무너진다.


[빌 1:22-24]

(빌 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빌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 사도바울의 생사관- 진실하게 그의 삶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 천국을 본 자이기 때문. 그리스도께 받을 칭찬과 영화를 누린 자. 

  • 이 땅에서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 사망, 죽음... 천국의 소망이 없는 자. 사망을 가장 두려워한다. 맨날 죽는다 죽는다 하지만 막상 죽음이 다가오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한다. 사탄의 다른 이름 사망권세 가진 자. 
  • 그런데 바울은 이미 그 권세에서 자유롭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다린다. 
  • 그런데 참 의미를 위해서, 참 열매를 위해서 사는 것이 더 좋은 지, 죽는 것이 더 유익인지 잘 모르겠다. (22절) 
  • 자신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 ->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을까? 미련 없이 천국을 향해 갈 수 있을까? 
  • 그런데 이 땅에 남는 이유? 너희를 위하여- 너희(아직 믿음 안에 온전히 서지 못한 자. 바울 같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자) 
  • 삶의 이유: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나에게 남겨진 양 때의 유익을 위하여... 
  • 너희 유익이 무엇인가? 너희 믿음의 진보와 신앙 안에서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성도, 믿음의 동료들에게서 보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삶의 의미. 
  • 자기에게 맡겨진 성도를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자신의 삶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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