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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빌립보서'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3.09.03 빌립보서 3:12-14절
  2. 2013.09.03 빌립보서 3:5-12절
  3. 2013.09.03 빌립보서 3장 1-4절 (1)
  4. 2013.07.20 빌립보서 2:19-30

 

성경본문: 빌립보서 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 서론 


우리의 삶은 항상 무엇인가를 붙잡고 삽니다.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인기와 명예를 붙잡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과 재물을 붙잡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취미와 습관에 붙잡혀 삽니다. 어떤 사람은 술과 담배와 같은 것에 붙잡혀 삽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잡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강아지 목에 줄을 매는 이유는 내 맘대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줄도 무언가에 매여 있으면 누군가에 의해서, 아니면 세상의 어떤 힘에 의해서 끌려가게 됩니다. 

 

김홍신 씨가 쓴 <인생사용 설명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시장>이라는 밀리언셀러 작가이며, 8년 연속 의정활동 1위 평가를 받은 국회의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37년 6개월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폐암의 위험이 있거나 간접적인 살인행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끊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원고를 쓸 때는 하루에 보통 서너 갑의 담배를 피웠습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던지 ‘죽는 날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죽겠다’는 수필까지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좋아하던 담배를 끊었습니다. 스승께서 던지신 한 마디 말씀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쥐는 쥐약인 줄 알면 먹지 않는데, 사람은 쥐약인 줄 알면서도 먹는다.” “아주 뜨거운 물 잔은 얼른 내려놓으면 되는데, 붙잡고 어쩔줄 모르니 델 수밖에 없다.” 

 

그는 마음에 결단을 합니다. “세상을 끌고 가도 시원찮은데, 담배한테 끌려 다니다니” 그는 37년 6개월간 쥐고 있던 뜨거운 물 잔을 내려놓았습니다.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에게 끌려 다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금단현상으로 어려웠지만 의미 있고, 보람된 일, 사랑하는 일에는 끌려 다닐 수 있지만 백해무익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담배에는 절대로 끌려 다니지 말자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피우던 담뱃갑과 일회용 라이터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몇 년 동안 놓아두었습니다. 담배가 눈에 보여도 피우지 않아야 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가 담배를 끊었다는 말을 듣고 지인들이 ‘참 독한 사람’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홍신 씨는 말합니다. “독극물을 삼키는 사람이 독한 사람이지 어찌 버린 사람이 독한가?” 

 

대학때, 술 못먹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위해 개발한 술- 레몬 소리, 채리소주,,,-> 달콤한 맛에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마시게 됨. -> 죄의 모습이 이렇게 다가온다. 


우리가 잘못된 것에 붙잡히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나쁜 습관이나 버릇에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을 좀먹고, 내 신앙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면 속히 그 뜨거운 물 잔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물인 쥐도 독약인 줄 알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계속 독약을 품에 안고 끌려 다닌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모든 나쁜 습관과 버릇으로부터 자유해 지시기를 축복합니다.


2. 본론 

1) 내가 붙잡힌 바 된 것은 무엇인가? 내 사명은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는 가장 의미 있는 것에 붙잡힌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붙잡을 수 있는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잡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붙잡을 수조차 없는 미련한 인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보려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하나님의 복을 붙잡으려고 했고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그들의 신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붙잡힌 바 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붙잡으려던 사도바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의 말씀 앞에 거꾸러집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빛 앞에서 육신의 눈이 멀었지만 새롭게 영적으로 눈을 뜹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은혜는 무엇이냐? 과거에 자기가 보던 세상의 눈이 멀고 새롭게 은혜의 눈이 여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이 머는 것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어리석고 무능한 것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전적으로 주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똑똑한 척 살아가던 나를 버리고 예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인생의 슬로건이 바뀌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의 힘과 권력을 붙잡은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께 붙잡힌 자들은 다 승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붙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는 우리를 가만히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붙잡힌 자 된 자들을 깨닫게 하시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면 누구나 사명자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의 손에 붙잡힌 순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사명을 깨닫습니다. 우리들이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인생이 바뀝니다. 내 삶의 가치가 바뀝니다. 내 인생의 꿈과 목표가 달라집니다. 어떤 고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주도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왜 능력없이 살아가는가? 예수께 붙잡히긴 했는데 무엇을 위해 붙잡힌 지에 대한 목표가 없습니다. 일제때, 6.25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무너진 나라를 일으키는 것, 가난한 나라에서 축복받은 나라로, 사회로, 가정으로 나아가는 것.... 그 때는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축복 이후의 교회는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의 푯대를 잃어버리니까 큰 교회 만드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된 목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것을 얻고자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도바울은 삶의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그는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의 목표는 세상의 명예나 권세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후에 그의 인생은 오직 예수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그의 삶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목표가 빗나가면 아무리 수고하고, 많은 것을 소유해도 그것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갖게 되면 자기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힘을 사용합니다. 세상을 섬기라고 주신 축복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쓰게 됩니다. 결국 자신도 무너지고,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ex) 어느 바닷가에 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간 배들이 등대의 불빛을 보고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사는 나이 드신 할머니가 와서 기름을 좀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너무 딱해서 등대를 밝힐 기름을 좀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할머니가 다시 찾아와 다급하게 기름을 좀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번에도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기름을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할머니는 기름을 요청했고, 등대지기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기름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비가 내리고, 성난 파도가 무섭게 몰려오는 밤이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등대의 불을 환하게 밝혀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름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많은 배들이 항구에 돌아오지 못하는 조난당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등대지기의 사명은 언제나 등대의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에 이끌려서 기름을 주다보니 정작 등대를 밝혀야 할 시기에 등대를 켜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목표와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사명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이미 얻었다고, 온전히 이루었다”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에 있는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6년 전쯤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바울의 나이는 60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배가 파산을 당하고, 수없이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나이가 60이 넘었고, 그동안 사역의 열매로 보면 누가 보아도 훌륭한 사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노년은 좀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사역을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말하면 ‘나는 아직 불러주신 주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달려간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달려간다’는 헬라어로 ‘dioko’인데 의미는 사냥개가 먹잇감을 보고 전심전력하여 달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인간문화재이신 박동진 옹이 있습니다. 그 분이 TV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저는 매일 아침 하루 4시간 이상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리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너무나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아니 한국의 최고 명창으로 이제는 그만해도 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고생을 하십니까?” 그 질문을 받은 박동진 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소리를 연습 한다는 것은 내가 왜 살아 있는가에 대한 본질을 알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은 자기가 살아있음을 소리를 연습하는 그 순간을 통해 느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고백을 들으면서 목사로서 참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렇게 연노하신 나이에도 자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나는 부름 받은 종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바울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부르심의 소명을 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의의 면류관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최선의 경주를 다하는 자에게 상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푯대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 자에게 승리의 월계관이 주어지듯, 우리 주님도 승리의 면류관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많은 천사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위해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3. 결론 

이제는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녹슬게 하고, 무너뜨리는 나쁜 것들은 모두 잘라내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오직 예수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인생,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나의 가치를 깨닫고 의미 있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푯대를 향해 계속 달려가서 승리의 면류관을 쓰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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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가장 고상한 삶 (빌립보서 3:5-1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행복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해야 행복해지고 무엇을 해야 즐겁고 기쁘고 만족하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얻어지는 행복의 조건들은 그 생명이 길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불만족하며 살아갑니다. 행복의 조건이 주어졌는가 하면 곧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해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행복한 삶의 내용이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복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를 알고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삶”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그동안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다 미련 없이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알게 되면 구원받고 천국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엄청난 은혜 말고도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뜻있는 삶을 살게 하는 은혜의 조건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것을 위해 전부를 버릴 수가 있는가?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알게 되는 은혜

내가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 무엇보다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종말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본을 이해하게 되고 깨닫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여러분, 사람이 자기의 근본을 알고 뿌리를 아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알아야 나의 뿌리를 알고 미래를 알고 운명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 근원,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는 앞길을 알고 산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것처럼 초보적이면서도 근본적인 물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니까 삶을 회의하고 비관하고 때로 포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참 불행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비관하다가 달리는 차에 뛰어들어 죽습니다. 그래서 기관사들이 이 사람들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달리는 전철에 뛰어들면 본의 아니게 내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모는 차에 사람이 치여 피 흘리고 죽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의 참상을 목격하는 순간 다시는 차를 몰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 아니라 “내가 운전하는 전철에 사람을 치여 죽였다“하는 마음 때문에 평생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불행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예수는 살리는 영을 가지신 분입니다. 

죽어가던 사람도 예수를 만나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살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런 소망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복의 영이십니다. 예수를 만나면 회복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기운이 회복됩니다. 삶이 회복됩니다. 부활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것을 미련 없이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알면 먼저 나를 알고보고 발견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를 알면 인생이 따뜻함 

예수를 알게 되면 또 내 인생이 따뜻해집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고아는 배가 고파도 울지 않습니다. 울어보아야 누구하나 알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아는 좀처럼 울지 않습니다. 우는 대신 스스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언제나 삶을 걱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차갑고 우울하고 어둡고 고독하겠습니까. 

 

또 사람이 집이 있고 가족이 있다고 다 그 인생이 따뜻한 것이 아닙니다. 다 있어도 예수를 모르면 살아가다 고달프고 어렵고 힘들고 몸이 아프고 슬퍼도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기도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수를 모르고 살면 인생이 춥고 삶이 고독하고 그 인생이 외로운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산다는 것은 복입니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인도해주고 안내해주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그것이 없으니까 그 삶이 늘 불확실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삶이 막연하고 막막하고 희미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뒤에 누군가 확실한 후견인이 있고 나를 보살펴 주는 분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얼마나 자신 있는 삶을 살겠습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안정되고 자신감 있고 든든하겠습니까. 그 삶이 예수와 함께 하는 신앙인의 포근하고 따듯한 삶인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주일날 어머니 심부름 하다가 교회에 가는데 시간이 좀 늦었습니다. 그래서 뛰어갑니다. 가면서 “제발 늦지 않게 해 주세요, 빨리 뛸 수 있게 힘주세요”하고 기도하면서 뛰었습니다. 시간 안에 가까스로 교회문턱에 도착하자마자 그만 앞으로 넘어졌습니다. 그때 이 아이가 손을 툭툭 털면서 “그렇다고 떼밀 것 까지는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를 아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뛰면서도 예수님과 대화할 줄 알았습니다. 잘 뛸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를 알고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를 바로 알면 그 예수가 나의 앞길과 현재와 미래와 나의 운명까지도 모두 인도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해지고 따뜻해지고 부드러워지고 향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알되 껍데기로 알지 않고 이론으로 알지 않고 체험으로 안다면 정말 행복한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최근 읽은 신앙서적 가운데 이런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이름은 “빽이 도대체 누구야”라는 책입니다. 33세난 다니엘 명라는 분이 쓴 책입니다. 한국에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가서 처음에는 상당한 고생도 했겠지요. 그런 가운데 잘 자라서 일류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취업하려는데 미국에서 최상위 회계법인 6개 가운데 4곳에서 입사제의를 받았습니다. 이 일류법인에 입사만 하면 미래와 장래가 보장된다고 보아도 됩니다. 그 4개 법인 중에는 미국에서 모든 회계학 전공자들이 취업하고 싶어 하는 아서 아더 앤더슨이라는 회계법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4개중 취업회사를 선택하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히 모든 회계사들의 꿈인 초일류회사인 앤더슨을 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면접을 마친 후에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 회계법인들은 모두 연봉이 많은 대신 하루 평균 12시간씩 일을 해야 하고 주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주일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 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일을 지키지 못한다니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분이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연봉과 장래보장과 초일류 회계법인으로 결정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곳을 찾아야 하느냐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처지가 내 입장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아들이이라면 어떻게 조언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이 고민이 이 책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면서 영적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 싸움이 바로 이런 결단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잘 싸워야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미국에서 순위 6번째인 쿠퍼스 & 라이브랜드 회계법인 회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면접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가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면 좋겠는데 어떤 조건이면 오겠느냐.” 그때 이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인데 주일에는 출근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주관이 분명하고 뚜렷합니까. 오늘은 이런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좋아하시고요.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이 면접관이 아주 흔쾌하게 승낙을 해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분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가 그 자리에서 마음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나와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모두 너 제정신이냐, 너 정신 나간 것 아니냐 하고 말했습니다. 그도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결정이고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의 기준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이고 장래를 결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런 마음 이런 삶의 자세를 하늘에서 주님께서 아신다면 그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앞날을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길게 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결정하고 직장생활을 하는데 인간인지라 조금은 아쉽다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류회사인 아더 앤더슨 회사가 2001년에 엔론사건이라는 회사의 회계부정사건에 휘말려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결정해서 다니던 순위 6위였던 이 회사는 98년에 순위 5번째 프라이스 워터하우스라는 회사와 합병해서 지금은 첫 번째 순위에 오른 회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은 언제나 지금 현재는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보면 그것이 옳은 길이었고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이런 통쾌한 감격을 느끼게 되고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만나고 이루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꼴찌를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그 꼴찌를 일등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기적이고 하나님의 섭리이고 능력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입니까.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알고 그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려고 힘쓸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림 

예수를 알게 되면 또 한 가지 주어지는 은혜가 내 눈이 넓게 열린다는 점입니다. 그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고 내가 할 일을 발견하게 되고 보통 때 보지 못하던 뒷면의 세계까지도 보게 되는 안목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신비한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면 무엇보다도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함께 살고 섬기며 살고 돕고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직 나만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일생을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매사 혼자서 오직 나만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굴 위해서 기부금을 내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봉사하고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데 그 삶에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예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서울 강남에 아파트 6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7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모두 집값을 올리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입니다. 이분들은 남들은 집이 있건 말건 내 집 값만 올라가는 것이 꿈이고 관심이고 목적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누고 주고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지는 행복한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집이 몇 채씩 있어도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겉에서 보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좋겠구나 하고 생각되겠지만 실상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부요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주는 기부문화가 참 미숙합니다. 그러니까 소유함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기부함으로 누리는 은혜와 기쁨과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한국에 기부문화를 일으킨 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헌금하는 생활을 통해서 이 기부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교회에 나오며 헌금하고 11조 드리고 선교헌금 드리는 이 헌금생활을 통해서 주고 나누고 드리는 이 기부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통 훈련인줄 아십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11조 드리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당연히 드리고 나누는 일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로서는 놀랄 일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발표한 각종 기부금액을 보면 기독교가 단연 으뜸입니다. 

 

2002년도에 홍수가 나서 전국을 쓸어갔을 때 각종 단체에서 수재의연금을 거두었는데 그 통계를 보면 불교는 1,300개 사찰에서 모은 것이 13억원이었습니다. 천주교는 57개 성당에서 거둔 것이 3천 5백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4,875개 교회에서 거둔 것이 53억원이었습니다. 또 대구지하철 참사 때 모금된 성금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439개 사찰에서 모은 것이 3억 9천만 원이었고 천주교는 42개 성당에서 모은 것이 2억 2천만 원이었고 기독교는 3,567개 교회에서 모은 것이 34억 5천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 돕기에 참여한 기부금 내용을 통일부가 집계한 통계를 보면 불교가 13억 3천만 원으로 3.5%였습니다. 천주교가 14억 3천만 원으로 3.8%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352억원으로 92.6%에 해당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생각이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채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알면 세상이 보입니다. 옆 사람이 보입니다. 예수를 알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동안 내가 유익하게 여겼던 것을 모두 해로 여긴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고상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그동안 내가 소중히 여겨오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께 더 잡히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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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빌 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1. 끝으로

  • 종말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 중요한 말을 쓸 때에... 


빌립보서의 두 큰 주제

"기뻐하라" 

" 주 안에서" 

-> 두 주제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동전의 앞 뒤 면이다. 

하나로 정의하면 "주안에서의 기쁨의 서신"


  • 1, 2 장에서 '주 안에서' '기쁨으로'등의 주제어구를 수시로 사용. 이제 본격적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를 함께 사용. 
  • 세상에서의 기쁨- 조건적, 일시적, 주관적인 기쁨 
  • 주 안에서의 기쁨- 상황이나 조건에 연연하지 않는 기쁨. 불멸의 기쁨, 절대적 기쁨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근심하는 기쁨 -> 주님은 부활을 이미 앎으로 고난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 후의 일을 미리 알려 줌. 주님의 부활은 언제나 현재형, 미래형.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맛보기 시작한 기쁨->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 안에서의 기쁨'
  • 바울: 감옥에서 하루하루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 그런데 말끝마다 기뻐하라. 왜? '감옥 안'이 아니라 '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현실을 굳건히 받치고 있기 때문에... 
  • 실내온도와 실외온도: 실외온도- 환경의 영향, 기후의 영향... 그러나 실내온도는 항상 같은 온도... 겨울이나 여름이나....

오히려 더운 여름은 더 시원하게, 추운 겨울에는 더 따뜻하게... 

->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 안에 있는가?" "주 밖에 있는가?"하는 것. 주 안에 있는지, 세상 속에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 

->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인생의 추위가 올 수 있습니다. 견디기 힘든 더운 맛을 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재산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왕이면 좀 이런 절대적인 불멸의 기쁨을 맛보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성경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왜 우리 마음속에 이런 기쁨이 없을까요? 


Why? 인격적인, 관계적인, 상호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일방적인, 형식적인, 무감각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 ‘형식’에 익숙해 있기는 한데, 그 속에 ‘내용’, ‘본질’, ‘알맹이’가 빠져있다. 예배드리는 일에 익숙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예배가 그냥 빨리 해치우는 것이 되어 버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정말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감동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끝나고 나서 하나님과 만나고, 서로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고, 그 의사소통한 내용을 가지고 세상에 파송하기를 워하십니다. 그런데 예배는 드렸는데 무엇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가끔씩 사람들 만나서, 혹은 중보기도 하면서 요새 기도제목이 뭐세요? 하고 물으면 딱히 뭐....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기도는 하는데 무슨 기도를 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 새벽기도 시간에 기도제목을 하나하나씩 적어놓고 기도하는 훈련... 

  •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 뿐, 생명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하다 보면 여러 가지 직분을 받게 됩니다. 직분 안준다고 시험은 드는데 직분 받고서 그 역할을 안하는데에 있어서는 무감각합니다. 그 직분이 직위나 부담이 될 뿐 그 직분에 걸맞게 봉사하면서 맛보는 기쁨이 없습니다. 형식은 그럴 듯하게 갖추어져 있는데, 진짜 있어야 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주 안에서 맛보는 기쁨’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2.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아마도 이 편지 말고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다른 편지들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편지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반복해서 하는 말이 있고, 거듭해서 가르치는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자꾸 반복해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 꼭 알아 두어야 할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이야기 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대충 넘어가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꾸 반복해서 강조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매일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새로운 말씀, 새로운 성경공부, 새로운 프로그램, 새로운 형식을 원합니다. 물론 형식은 새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위대한 구원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매일 듣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닙니다. 

-> 주일날 설교-> 금요일날 설교의 내용.... 새벽예배때 설교의 내용이 반복될 때가 많다. 처음엔 그것이 부담. 아내에게도 질책-> 그런데 왜 그렇게 하실까? 중요하니까...아직도 깨닫지 못했으니까... 


  • 여러분이 매일 먹는 음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매일 밥을 먹습니다. 거기에 이런 저런 반찬을 곁들이고 찌개와 국을 곁들이고 하지만, 결국에 그것들은 밥을 잘 먹기 위한 side dish에 불과합니다. 매일같이 밥을 먹는다고 그것에 대해 지겨워하고 짜증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같은 밥을 먹어도 맛있다고 합니다. 매일 우리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맹물을 매일 마신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생명의 떡과 생명수가 되는 진리의 말씀을 반복하여 듣고 먹고 마셔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기본적인 진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여 듣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그것이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무슨 기발하고 새로운 것을 자꾸 찾는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적인 진리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해서 지겹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단 사조에 쉽게 빠지곤 합니다. 

-> 어떻게 같은 말을 듣고, 같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본질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딜레마-> 그러나 우리가 읽는 말씀을 살펴보자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도 늘 새로운 말씀... 

     주기도문, 사도신경.... 신경써서 해보면 그것을 통해서 얻는 새로운 은혜...'

     가톨릭의 기도- 정해져 있는 기도....-> 형식주의다!   개신교 - 새롭게 기도해라...-> 과연 새롭게 기도하는가? 

     -> 신앙생활 자체가 같은 것을 반복하면서도 늘 새롭게 부어지는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 

     -> 세상의 문화: 늘 새로운 것이 나오지만 금방 실증내게 되는 문화. 늘 새로워도 늘 지겨운 문화... 

  • 이것은 신앙생활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새로운 반찬이 있으면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밥이라는 주식입니다.
  • 진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이 도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내용을 담는 형식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릇이 없이 물을 담을 수 없듯이, 형식이 없이는 어떤 내용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취급된다면, 그것은 주객이 바뀐 꼴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형식에 빠져듭니다. 형식에 목숨 겁니다. 형식에 담겨있는 진리와 정신과 내용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형식 자체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이 빠져있던 형식주의라는 함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빌 3: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  ‘삼가라’는 말은 경계하고 조심하고 피하라는 뜻이지요. 그 세 가지는 ‘개들’과 ‘행악하는 자들’, 또한 ‘몸을 상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빠져있던 형식주의입니다

1. 개들

  •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개’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최하의 짐승을 가리킬 때 ‘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이 바로 ‘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개들’을 조심하라는 겁니다. 아무나 보고 짖고, 아무것이나 먹어대고, 서로 물고 싸우고 으르렁거리는 개들처럼,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이방인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짖어대고 그런다는 것이지요. 
  • 여러분,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상대방에 대해서는 너그럽습니다. 그런데 형식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자신은 항상 옳고 다른 사람은 항상 그르다고 비판합니다. 그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볼 때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실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느라고 바빠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손가락질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애절하신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할례를 받았으니 특별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뻐기는 것이지요. 


2. 몸을 상해하는 일

  • 이전의 개역성경- 몸을 상해하는 일-손할례당
  •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할례’를 자신들이 선민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
  • 손- '잘라내다' 손할례당-  할례의 의미에 이미 잘라냄이 포함. 
  •  굳이 이 말을 덧붙여서 사용하는 것은, 육체에 겉모습에 상처를 내고 잘라내는 그런 할례에 목매달고 사는 유대인들의 형식주의를 비꼬아서 하는 일종의 말장난
  • 바울은 할례를 형식주의적인 신앙을 대표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 1차 전도여행을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이방인의 할례문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 문제 하나로 회의를 열어 베드로, 야고보등의 정리로 이방인에게는 할례를 안해도 됨을 공표. 
  • 할례가 처음 소개된 것은 창 17장 -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그에게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명령. 

    75세 때 부르심을 받아 이삭을 약속받았지만 24년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열매- 99세 때- 이젠 인간적인, 육신적인 기대가 다 사라졌을 때에다시 그에게 나타나서 이삭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명함. 

    믿지 못할 상황이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포함해서 온 식구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꼭 일 년 후에 아브람은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낳은 지 팔 일만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기적같이 이루어진 일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들을 볼 때마다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과의 계약 백성이라는 표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감격과 믿음은 사라지고, 그저 표피만 잘라내는 형식주의로 남게 된 것입니다. 할례라는 형식은 행하는데, 그 속에 담겨있어야 할 기쁨과 감격과 믿음의 고백은 사라진 것입니다. 나중에는 할례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그 이외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육체에 상처를 내어 붙인 표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미 곳곳에서 이러한 형식주의를 경고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렘6:10)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단순한 육체의 할례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무수히 지적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형식주의에 목매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제 고집대로 목을 뻣뻣이 곧게 세우면서 살면서도, 단지 육체에 할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무슨 특별한 자격이 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한 것도 바로 이것을 지적한 때문이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행7:51)

형식주의자들은 형식에 목숨 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용보다 형식이 언제나 더 중요합니다. 형식을 바꾸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누가 건들기만 하면 손톱을 세우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할례주의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 결국 ‘개들’이나 ‘행악자들’이나 ‘할례주의자들’은 형식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도 이런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함정은 유대인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겉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 안에 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지 않으면 기쁨 또한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형식주의’에 목매다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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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9-30

[빌 2:19-빌 2:30]

(빌 2: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빌 2: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빌 2: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 2: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빌 2: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빌 2: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빌 2: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빌 2: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빌 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3명의 일꾼, 동역자 


1. 바울  (아버지의 마음) 

  • 바울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입니다. 고통스럽고 불편한 감옥 생활이지만 자신보다 오직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있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자신보다 교회와 성도를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식사와 마실 물과 옷가지를 챙겨주는 도우미였습니다. 이들이 없으면 바울의 감옥 생활은 참으로 힘들고 불편하고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릎 쓰고 헌신적으로 도와줌으로 좀더 수월한 감옥 생활이 되었을 것입니다. 
  • 그런데 바울은 자기 자신보다 빌립보 교회가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지만 빌립보로 가서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사랑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다 알아주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천거하면서, 나의 사정을 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사랑하고 일군되는 그런 사람이 좋은 일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좋은 일군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사정 알기를 원했고 그래야 자기가 위안을 받을 것 같습니다.
  • 교회의 좋은 일군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사정 알기를 원했고 그래야 자기가 위안을 받을 것 같습니다. 
  • 사도바울의 마음: 너희의 사정을 알고 싶다. 그런데 그 사정을 내 마음과 같이 가리켜 줄 자가 없다. 왜?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데 디모데는 연단을 받아서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께 하듯이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안다. 내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영이 통한다.



2. 디모데: (아버지를 잘 아는 아들의 마음) 

  • 사도행전16장 빌립보에서 사도바울을 처음 만나 예수님을 믿고 이차전도여행 때 같이 전도여행 갔다가 사도바울이 문제가 생기자, 대신 순회하며 심방하고, 삼차 전도 여행때 핍박 피해 온 사도바울을 영접해서 함께 복음전도에 동참했습니다.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딤후4:9 이하의 편지를 읽으면 그 때 사도 바울이 디모데의 도움을 얼마나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에베소에 있던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두 번씩이나 부탁을 했습니다. 자기를 돕는 동역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자기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다른 일이 있어서 다른 데로 보냈다고 했습니다. 누가만 로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에게 해를 많이 보였고 자기 말을 심히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드로아 가보의 집에 있는 겉옷 외투를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또 몇 권의 책도 두고 왔는데 그 책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춥고 외로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순교를 각오하고 있는데 순교하기 전에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보고 싶었고 마지막 부탁할 말을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알 자.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것. 

              다른 동역자: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1절) 

     디모데의 연단: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2절) 

     -> 오늘 본문에 보면 디모데는 바울과 "뜻이 통하는 동역 자"이며, "오직 주의 일을 구하는 자"였으며,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동역 자"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아주 작은 일이라 나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람의 판단을 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순종한다. -> 판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심판하실 것이다. (3-4절) 


9절부터 

  • 내가 생각하건데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꺼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 즉 축복하고 박해를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받은 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 무엇을 위해? 복음과 주의 영광, 그리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14절부터

  •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쓴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음이라. 


->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살피는 바울. 그 바울에게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복종하듯 아버지의 심정, 바울의 심정으로 진실하게 성도들의 사정을 살피는 디모데... 

 

 3. 에바브라디도 (친구의 마음)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돌보는 또 다른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였습니다.

  •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요, 나와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했습니다. 
  • 형제란 말은 기독교에서 생긴 말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형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이 같기 때문에 가문이 같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형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고 질문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아나니아는 사울을 가리켜 "형제 사울아"(행9:17)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에서 형제는 가장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기도를 함께 나누고 교제를 함께 나누고 봉사를 함께 나누고 물건을 함께 나누고 생명을 함께 나누는 사입니다. 
  •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였습니다. 교회의 대표로 뽑혀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하여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로마까지 달려왔습니다. 3천 2백리나 되는 머나먼 길을 걸어서, 낙타를 타고, 심신이 지치도록 오직 바울의 쓸 것을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는 죽을 각오로 바울을 보살폈습니다.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빌4:18).  편지와 선물을 받은 바울은 너무 기뻤습니다. 인생은 편지요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대신해서 바울의 쓸 것을 도왔습니다. 의식주의 필요한 것들을 도와드렸습니다. 마치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가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던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로마 감옥에서 사도 바울의 의식주를 도와드렸습니다. 바울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기쁨을 누렸습니다. 인생은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충실한 교회의 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는 주인 노릇 하려는 사람보다는 메센저와 심부름꾼 노릇 하려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사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의 사자였고 예수님의 심부름꾼이었는데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의 사자였고 빌립보교회의 심부르꾼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그만 병이 났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먼 여정이었기에 탈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바울이 갇혀있는 감옥 근처에 머물면서 바울에게 식사와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었는데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 그런데 에바브로디도의 관심은 자신의 지도자 바울이었습니다. 자기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가 근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기 자신 때문에 "오히려 교회를 근심하게 했다"고 마음 아파하고 심히 근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오직 목회자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사는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건진 그에게 다시 빌립보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겨우 몸을 회복하고 일어섰는데....다시 머나먼 여행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바로 믿음의 사람들의 강점은 비록 피곤하고 지쳤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예"하고 다시 힘을 내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생명 주님께 바치리"...라는 복음송을 부르면서 계속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4.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들 영접하고 (그를 맞이하라. 닮아라.)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이런 자들이 비추이게 하라)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