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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 교회 /마가복음 강해 '에 해당되는 글 34건

  1. 2014.12.01 마가복음 4:35-41절 (폭풍우) (1)
  2. 2014.12.01 마가복음 4:26-34절 (씨앗)
  3. 2014.11.28 마가복음 4:21-25 (등불)
  4. 2014.11.28 마가복음 4장 1-20 (씨뿌리는 비유)
 

마가복음 4:35-41절 (폭풍우)


  • 그 날 저물 때에...(35절)

그날은 어떤 날인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 자라나는 씨, 겨자씨 등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여러 씨앗의 비밀을 통해 말씀하시던 그 날입니다. 

다른 어떤 날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소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날입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또한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느라 수고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혼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로, 믿음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저물어 밤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밤이 왔고 조금있으면 풍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루 종일 수고한 결과가 혼란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이 왔는데도 쉬질 않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하고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배에 태운 채로 건너편을 향하여 건너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무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배를 타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무리로 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자기도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올라 예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지금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말씀을 나누었던 선지생도의 아내의 이야기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열심내던 남편이 갑자기 빚만 남기며 죽게 되는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노상 우상숭배하며 살아가던 아브라함이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신앙의 길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기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통해서 움직입니다. 자연의 법칙은 간단히 말하면 인과응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반드시 인과응보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당하는 욥을 보고 세친구들은 네가 무언가 잘못했으니 그렇다 하며 자연의 법칙을 가지고 그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욥의 고난은 인과응보의 섭리를 벗어나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이 틀린 것이지요. 지혜자라 하는 솔로몬도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의 일을 보며 능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전 8:14)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 8:17)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신앙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 당신이 잘못 믿어서 그래...라고 하면서 마치 욥의 친구들 처럼 사람들의 모든 일 하나하나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어도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원인을 알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신앙의 밤이 왔을 때에, 풍랑이 왔을 때에, "왜? 하나님이 왜? 내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 계속해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인생의, 밤은, 풍랑은 찾아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 풍랑을 맞고 어떻게 풍랑을 이기는가입니다.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차게 되었더라 (37절) 

큰 광풍(Furious squall) - 어디에서인가 모르는 고난, 폭풍...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다스릴 수 없는 것, 우리의 통치 밖의 일이다. 

문제는 큰 광풍 자체에 있지 않다. 

광풍이 만들어 내는 파도가 우리에게 부딪히면, 곧 그 파도가 우리를 때리고, 평안을 잃게 하고,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파도가 배에 부딪치며 배를 물로 가득 채운다. 

마음을 채우고 심령을 채워서 우리 안의 모든 생각이 그것으로 가득차게 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을 낙망케 하고,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하는 것이다. 

광풍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파도가 내 마음을 때릴 때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그리하면...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b) 

염려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근심걱정 없는 사람 누군가? 

그런데 그것을 풀 수 있는 자는 누군가? 오직 예수이다. 

풀수 없는 자에게 가서 아무리 넉두리 하고 푸념하고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그런데 근심 걱정 있을 때에 대부분은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는 자에게 가서 푸념을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물 가운데로 가득차게 된다. 


제자들은 어부였다. 그것도 갈릴리 출신 어부였다. 

바다와 배에 관한 일이라면 전문가들이었다. 

광풍이 불자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그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파도가 일어 배에 부딪칠 때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익숙하고도 전문적인 일들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예수님을 찾았는가? 

배에 물이 가득차서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서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깨울 때까지 침묵하셨다. 제자들이 볼 때에 잠자고 계셨다. 


  •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38절) 

자기가 할 수 없을 때에야 비로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운다. 

그런데 제자들의 깨우는 말이 재미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왜 알아서 미리 미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대로 이것저것 다 하고 있는데 왜 거들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이 아닐까? 

두려운 일이 생길 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빌립보서기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먈한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하며, 근심하며,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아니면 힘에 부치는 그런 일들도 우리가 할 수 없어서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도 하나님께 아뢰거나 기도하지 않고 나중에 와서 하나님이 왜 이 지경까지 우리를 내버려 주시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것은 원망의 소리다. 

우리가 주를 배에 싣고 이렇게 잘 모시고 다니는 데 왜 우리가 죽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우리도 주님을 그저 잘 모시고 다니면서 우리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가? 내가 가고 싶은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주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주님은 잠자코 계세요. 내가  다 알어서 할께요하지는 않는가? 


고물은 배 후미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마치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것처럼 예수님도 배의 선장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게를 베고 주무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스스로 배를 움직이며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물이 배에 가득차서 죽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서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주님을 깨우자, 비로서 주님이 깨십니다. 

다 늦은 것 같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늦은 것이 없지요.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십니다. 

광풍의 근원, 파도의 근원, 우리의 모든 염려의 근원에 대해 바로 진단하시면서 명령하시면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바람에게, 바다에게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의 전문가, 배의 전문가였던 제자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그들의 고통을 단지 말씀으로 잠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비록 바람과 바다를 향했지만 제자들의 심령 속에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내가 옆에 있는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냐? "

너는 가만히 서서 내가 너에게 행하는 것들을 바라보라. 


  •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는가?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절) 

제자들이 지금 무서워하는 것은 파도였다. 폭풍이었다.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시험이었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갑자기 닥치는 파탄, 실직, 이혼, 암, 병.....

이런 것들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인생의 광풍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광풍이 파도를 만들어 우리의 심령을 치고, 깨고 부스면 우리는 그런 것에 압도되어 믿음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을 잃어버린다.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광풍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믿음이 있다는 것은 광풍에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광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십자가의 화형을 앞에 두고도, 사자들이 자기들을 삼켜버리려고 기다리고 있는 순교의 현장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것은 그들이 곧 자신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41절)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이 이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광풍을 무서워하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감히 "지금 뭐하고 있느냐?"고 불평하며 원망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을 두려워한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사는 사람은 결코 오만하지 않다. 교만하여 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는 결국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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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6.12.08 01:06

    은혜로운 주석 감사드려요.!!^^

 

마가복음 4:26-34절


지난 주에 우리는 등불의 의미를 살폈습니다. 

등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후 성막에서, 또한 성전에서 절대로 꺼지지 말도록 당부하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고 곧 이스라엘이 운명이었습니다. 

그 등불은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을 이끌었던 다윗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등불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은 후에 등불이 꺼짐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두움 가운데 살아야 했지요. 

그런 절망 가운데 다시 빛으로 오신 참 등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자는 받을 것이요, 받아들이지 않고 판단하는 자는 그 판단으로 자신들이 심판 받을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밭, 즉 말씀을 받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씨앗, 즉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지만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로 인해 몇 십배의 열매를 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등불은 씨 뿌리는 자의 정체, 즉 그가 곧 예수 자신이요,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등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리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즉 빛을 받아들이는 자들 역시 빛의 자녀, 곧 빛이 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는 다시 두가지 씨의 비유로 옮겨집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은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앞에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뿌리는 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고 사람들은 주로 밭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사람, 혹은 이전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림과 같으니 하고 그 사람, 인자, 예수 그리스도로 표현하지 않고, 불특정한 사람인 a man, 즉 어떤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뿌려진 씨앗은 어떻게 됩니까?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오직 옥토밭에서만 온전히 열매를 맺는데 이 구절에서 뿌려진 씨는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라는 말은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고....


우리에게 뿌려진 말씀이 한결 같이 같은 속도로 꾸준히 자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신앙은 기복이 있다. 좀처럼 자라는 것이 보이질 않는다. 

설 것 같으면 넘어지고, 위태할 것 같은데 하면 오히려 요동치 않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다고 해서 씨앗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지켜보고 있을 때에는 꿈쩍 않다가 자고 깨고 일어나 보니 싹이 나고 자라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의 발전, 성숙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성령은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 열매맺게 하는 것을 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역사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유롭다. 

우리가 알지 못하게 말씀의 역사는 사람을 자라게 하지만 또한 신앙의 역사에는 지름길이 없다. 싹을 내는 신앙, 이삭을 내는 신앙, 그리고 충실한 곡식을 내는 신앙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어린아이의 믿음, 청년의 믿음, 아비의 믿음의 여정 안에서 자란다. 이 여정을 건너띌 수 없다. 

어린 아이의 믿음은 이제 세상에서 죽어 없어질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생명이 있음을,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소망이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청년의 믿음은 열성으로 무언가 하지만 목표한 열매가 아닌 다른 열매, 온전치 못한 순종, 온전치 못한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연약함에서 담대함으로, 부족함에서 온전함으로 걸어나아가는 단계, 

아비의 믿음은 성령의 온전한 열매, 나 자신 안에서 아홉가지 거룩한 인격과 성품의 열매,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 담대히 사역할 수 있는 성령의 외적인 열매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 4:29) 


이것이 그냥 우리가 들으면, 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들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 뒤에는 요엘이란 사람의 예언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욜 3:13)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요엘서의 주제는 '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고, 하나님은 거기서 곡식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던 사람들은 이제 그 고난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임하면." 이 가사가 요엘서에서 가져온 가사입니다. 이 '주의 날'은 예수님 당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망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을 믿어 고난을 견뎌왔던 자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추수의 날인 것입니다.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주의 날이 임했는가? 


(요 3:18-21)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 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빛을 영접치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결국 악한 자이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 

빛에 있다가 어둠에 들어서면... 갑자기 아무것도 안 보이다가 서서히 보기 시작함. 자기 자신은 안 보이고 남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충 본다. 대충 보기 때문에 감각을 의지한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한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은 감각적인 삶에 의존하는 것이다. 


어둠에 있다가 빛이 나오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나만 보인다. 그러다가 서서히 세상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말씀 안에 나오면 나를 먼저 발견하게 된다. 나를 보고 이젠 더 나아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세계는 처음엔 잘 모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심는 자도 심기운 자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심겨지면, 말씀은 자라고, 모든 쓸때 없는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까지도 그 그늘에 와서 깃들일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씨앗을 자꾸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씨앗은 땅속에 묻힙니다. 그러나 곧 땅속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땅 속에 묻히지만, 곧 땅 속에서 일어나는 일 말입니다. 부활입니다. 즉, 예수는 우리에게 말씀을 심으십니다. 말씀이 심겨진 사람은, 영원하여, 죽음조차 그 사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하기에," 말씀이 심겨진 그 사람은 영원하여, 반드시 부활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죽음을 뚫고 일어섭니다. 예수와 똑같은 사건을 겪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말씀이 아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여러분을 부활하게 합니다. 그 부활은 너무도 위대한 일이라, 생명의 풍성함 그 자체, 죽음이 설 자리가 없는 완전한 몸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의 파종으로 시작된 일이, 사람들의 부활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을 가져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성령으로는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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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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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21-25


등불이 무엇인가?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출 27:20-21)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 하나님만 바라보는 순수한 신앙 

-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순간이 아닌 온전한, 전부의 신앙. 


아론과 그의 아들들- 믿음의 제사장들의 절대적 의무 - 등불을 보살피는 것. 등불을 꺼뜨리면 죽는다. 

심지어 엘리 제사장의 때

(삼상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영적으로 눈이 어두웠던 제사장이라 하더라도 성전의 등불을 꺼뜨리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의 등장 이후 이 등불은 곧 사람이 되었다. 

(삼하 21: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 불렀고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등불이라 찬양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다윗을 등불이라 불렀다. 

(왕상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대하 21: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그 기름으로 세상을 밝히는 등불, 다윗,

그 다윗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등불이었습니다.

더불어 이 등불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사, 등불은 단 한 차례도 꺼지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운명도 그렇게 밝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죽고나서 이 등불은 곧장 위기를 맞습니다. 마치 바람 앞의 등불 마냥 말입니다.


(대하 29:7)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 29장 2절에 무엇이라 증거하냐면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신앙개혁을 하며 성전을 성결하게 하며 개혁하면서 하였던 말 "또 낭실 문을 닫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므로" 

단지 등불을 끄고 라며 했지만 이것이 나타내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그들의 충격적인 모습.


(잠 24: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렘 25:10)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그리고는 정말, 그 등불이 꺼졌습니다. 

B.C. 587년 성전은 모두 돌덩이가 되어 무너졌고, 이스라엘의 등불은 꺼졌습니다. 민족의 운명을 상징하던 등불은 이제 키고 싶어도 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람 앞의 등불이었던, 다윗의 등불은, 이제 촛대까지 뽑혀 다시는 빛을 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금 밝히시는 등불  (함께 봉독) 

(요 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막 4:21-22)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사람들이 예수의 이야기를 듣는 지금도, 성전에는 등불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가 허락해줘서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등불이었고, 그 등불이 켜있다한들, 이스라엘이 바라는 진짜 다윗의 등불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등불이 타고 있는 성전은, 에돔 사람인 헤롯, 로마의 하수인인 헤롯이 리모델링하는 성전 안의 등불이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다윗의 등불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등경 위- 촛대, stand. -> 일곱교회는 곧 예수로 말미암은 교회. 


등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타올랐습니다. 그것도, 그 등불이 일곱 촛대위에 올라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방 안을 환히 밝힙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왕의 귀환. 정확히는 다윗 왕의 귀환입니다. 아니 다윗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다윗보다 더 큰 이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등불이라 말합니다.

꺼저버린 등불 앞에서 절망했던 이들에게, 등불은 스스로 걸어왔습니다. 

  "등불이 등 받침대 위에 올라왔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영접하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리고 경고의 말씀 

(막 4:24-25)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듣는 말- 예수님의 말씀. 

지금 유대인들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았기리라." 


말씀을 가지고 듣고 열매맺는 자는 받을 것이다. 열매 맺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세상의 등불이 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고 여전히 미적미적 대면서 사는 자들은 믿는 믿음 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밭에 감추인 보석을 발견한 자 - 자기의 온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소유하는 자... 지혜로운 자. 


따라서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 그 분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라 믿는다면, 주의해서 그 분의 말을 세심하게 들여다 봐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 속에, 분명 당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해결들을, 그 분은 분명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은 당신의 문제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사람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이해하려 애쓰고, 그 분의 말씀을 세심하고 깊게 들여다 보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그저 좋은 얘기, 좋은 결론, 나에게 익숙한 얘기라 생각하지만, 

그는 말씀을 주의하여 들여다보지 않기에, 그 안에서 정작, 실제로 벌어진 역사의 반전을 만날 수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삶의 역사 속에서도 반전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찾으려는 자는 정말 찾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며, 가진 것 마저 빼앗기에 될 것입니다.예수께서는, 등불이신 그 분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바로 그 사람, 등불이신 예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추는데 전심전력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목소리는 결코 속삭임으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가슴을 고동치게하고, 하늘 높이 솟은 불길처럼 그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 그 분의 심정이 절절하게 들리게 될 것입니다.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무릎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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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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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4장 1-20 (씨뿌리는 비유) 


3장 - 하나님 나라의 선포 - 회당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집으로...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생기고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헤롯당, 그리고 친족 및 가족...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들이 갈림.... 


그리고 예수의 비유 중 가장 잘 알려진 씨뿌리는 비유.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4:13) 


1. 비유의 목적

예수님의 하신 비유의 한결같은 주제와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씨뿌리는 자'는 곧 예수님이고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고 열매의 씨앗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이고 말씀이 이루어 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임함"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늘나라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첫 째, 하나님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길 가, 돌짝 밭, 가시덤불 밭에도 예수님을 씨를 뿌리십니다. 좋은 밭에만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 이스라엘의 씨 뿌리는 방법: 우리나라-먼저 고생해서 밭을 고르게 갈았다. 잡풀을 뽑고 돌멩이를 골랐다. 그리고 밭고랑을 팠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씨앗을 심었다. 밭이랑에 손가락으로 작은 구멍을 일정한 간격으로 내고 씨앗을 정성껏 심었다. 하지만 2천 년 전 갈릴리의 농부는 허리를 숙여 씨앗을 심지 않았다. 위로 씨앗을 뿌렸다. 씨앗을 한가득 담은 가죽 부대를 어깨에 크로스로 메고, 한 주먹씩 쥐어서 위로 뿌렸다. 그러면 어떤 씨앗들은 씨앗들이 떨어지면서 땅에 콕콕 박힌다. 어떤 씨앗은 바람에 날리워 길가에도, 돌짝 밭에도, 그리고 가시밭에도 뿌려지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떠하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사람의 자질을 묻지 않고 뿌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문등병자에게도, 간음한 여인에게도, 사마리아여인과 같은 이방여인, 부정한 여인에게도, 세리같은 매국노에게도, 그리고 심지어 자신을 배반하는 유다에게까지도 예수님은 말씀을 뿌린다. 
  •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1)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물론 목회자의 견지에서 저는 성도들의 심령밭이 잘 기경되도록 훈련하고 기도하고 심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밭이 옥토밭이 되도록 제자훈련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대로 세우고, 혹시 홀로 괴로워하실까봐 심방도 합니다. 그런데 설사 그렇지 못하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설사 수준이 안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 합니다. 수준을 기다리면 평생 말씀 전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이 수준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내 마음이 완악했을 때에, 영적인 수준이 완전히 바닥이었을 때에...예수님께서 그 때 날 위해 죽으셨고 말씀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누구에게나 주신 기회이고 선물입니다. 


둘 째, 씨뿌리는 자가 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의 첫 번째 목적은 여기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떠하냐......가 초점이 아닙니다. 

천국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천국에 동참하려 하지 않았다....가 초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널리 가르친 이스라엘 동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 그 마을이, 그 나라가 흥왕하고 복음으로 넘쳤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진실로!!! 이 비유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의 씨가 뿌려졌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뿌려졌으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의 씨가 뿌려졌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 복음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천국복음은 배척되었고, 뿌려진 씨들은 모두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허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밭에 뿌려진 씨의 진실입니다.
  • 이것이 진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널리 전해지지만 환영받지 못합니다. 씨가 뿌려졌으므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로는 뿌려진 씨는 대부분이 허비됩니다.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이 우세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하지 못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복음이 뿌려졌을 때의 반응입니다. 4분의 3이나 되는 대부분의 씨가 허비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 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씨뿌리는 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세번째 비밀은 무엇입니까? 

이 비유의 핵심이 본문의 뒤쪽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대다수의 복음이 허비되었으나, 결실한 좋은 밭이 남아 있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8절 말씀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아멘! 

대다수의 씨는 허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4분의 1의 씨는 남아 있습니다. 이 씨들은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결실을 하였습니다. 

결실한 밭의 내용물들을 보십시오. 

처음에 뿌린 씨는 4분의 1만 좋은 땅에 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원래 뿌린 씨만큼만 결실하려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4배가 자라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배척받은 복음의 씨가 비록 4분의 1밖에 결실하지 않았지만, 이것이 4배 더 자랐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몇 배의 결실을 이루었다고 말씀합니까? 백배의 결실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천국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천국 복음이 배척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슬프고 힘든 일입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열매가 없으면 힘듭니다. 절망합니다. 씨앗은 계속 뿌리는 데 열매가 없으면 도망가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말씀을 전해도 깨닫지 못하고, 변하지 않고, 여전히 넘어지고 절망하고 감정대로 행하고, 입술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끊이질 않으면 내가 그동안 왜 기도했지,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안들어주시지 별 생각이 다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오히려 믿는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아끼는 제자들은 깨닫지를 모르고 맨날 엉뚱한 소리만 해댑니다. 따르던 군중들은 한 순간에 돌아서 돌로 치라고 소리칩니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완전히 패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패배처럼 보이는 사실 뒤에, 너무나 놀라운 결과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패배한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것 처럼 보이고, 죽어버리고 없어져 버린 것 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은!!!

“비록 적은 수의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뿐이지만,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폭발적으로 자라난다!” 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비록 적은 사람에게 환대를 받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비록 천국복음은 배척받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없어지지도 쇠하여지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박해받는 것을 통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독교가 배척당하자 복음은 죽어버렸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버리지 않고 결실했습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에게서지만, 그 환영받은 복음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자란 것입니다.

 

수 만명이 살아가던 소돔과 고모라 땅에 하나님은 의인 열명만 있으면 이 도시를 구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히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소돔과 고모라 땅에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불에 탔습니다. 

난 우리교회 성도들이 전적으로 다 구원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통치하시는 삶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매일같이 그러한 그림을 그리면서 기도합니다. 

지난 주 금요일날 오집사님 내외, 이옥희 집사님 다 같이 나와서 금요예배 드리는 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리던 모습이 나타난 것 입니다. 

그런데 설사 내 기도가 열매맺지 못하고, 더러는 땅에 떨어지고, 소망하던 일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좋은 밭을 가진, 옥토같은 밭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기워 지기만 한다면 100배의 결실이 맺히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사람이 저였으면 좋겠고, 저희 성도들이었으면 좋겠고, 저희 로고스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은 밭 되시기를, 그 소망을 가지시기를, 믿음의 선한 욕심, 선한 소망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열매맺지 못하는 밭 

1) 길 가:

(눅 8: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 말씀을 듣는데 전혀 그 마음으로 듣지를 않습니다. 귀로는 듣는데 머리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합니다. 그 마음에 마귀가 들어가서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왜?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머리 속에 딴 생각들어오고,  피곤하고, 졸리면, '아! 마귀가 날 방해하는구나' '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구나!'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마귀가 눈에 보이면 얼마나 섬찟 하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마귀가 활동하면서 우리가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2) 바위 위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 말씀을 들을 때는 신이나고, 소망이 생기고 기쁨니다. 나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집에가면 언제 그 말씀 들었는지 다시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 집니다. 조금만 시련을 당해도 신앙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유다의 것을 택합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고 베드로의 길을 택합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 잘못인 줄도 알면서 행하는, 그러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빌라도의 길로 행합니다. 
  • 바위 위에 얇게 흙이 덮혀있는 것과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감정적 흥분과 피상적 열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감정의 상태를 넘어 말씀이 심령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예수께서는 뿌리 없는 믿음이라고 규정하는바 이들의 믿음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입니다. 믿음의 진정성 여부는 시험에 견디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검증되어집니다. 
  • 왜 시험이 오면 넘어집니까? 뿌리가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신앙의 뿌리는 일상생활의 신앙생활입니다. 주일만, 교회에서만, 성경책을 읽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도, 어디에서도 매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동행하는 것이 뿌리깊은 영성입니다. 또한 뿌리는 언제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고난이 와도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날 용서했고, 날 구원했으면 그가 부활하심으로 나도 다시 살았다는 복음의 진리에 흔들리지 않고 서는 것입니다. 
  •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은 마치 뿌리 없는 식물과 같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하며 따라서 그 과실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시험을 견디어낸 믿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약 1:12).
  • 뿌리 있는 신앙인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십자가 앞에 나와와 죄짐을 벗도 의의 길, 부활의 길로 들어갑니다. 


3) 가시 떨기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 가시떨기와 같은 상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상당한 정도의 신앙을 갖게 되지만 궁극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가치를 혼동함으로써 결국에는 실패하는 부류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가 문제가 됩니다.
  • 첫째는, 이생의 염려입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신앙이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게 됨을 말함에 있어서는 같은 뜻입니다. 이 염려는 신앙생활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영혼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화시켜 마침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죽은 영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 둘째는 재리(財利)입니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열망 때문에 진리를 따르지 못한 예는, '어리석은 부자'(12:16-21), '부자 관원'(18:18-23)과 같은 이야기에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셋째는 생의 향락입니다.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충동적인 육체의 쾌락을 위해 영혼의 존귀한 가치를 망각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습니다. 


4. 좋은 밭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1) 착하고 좋은 마음

  “착하다”라는 것은 “바르다”라는 것입니다. 바르다라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배려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만 잘되려고 하면서 믿는  것은 결국 샤머니즘적인 신앙입니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너를 죽여서 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는 죽여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 어떻게 되든지 우리 교회만 잘되면 되고, 다른 가정 어떻게 되든지 내식구만 잘되면 되고.... 착하고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은 온유하고, 긍휼이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2) 말씀을 듣고 지키어

  •  완악한 자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잘 듣습니다. 잘 들어주는 자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상담의 첫째 원리- 잘 들어주는 것. 목사의 실패- 잘 들어주지 못할 때... 가정의 평화- 잘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듣는 훈련을 잘 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훈련. 기도도 말하는 기도와 똑같이 듣는 기도... 먼저 들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 요소는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말씀 듣는 것을 지루하게 생각하고 이상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이상한 곳에서 축복을 찾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구원받은 교인이면서도 육십갑자로 육갑을 떨어서 결혼날짜와 개업날짜와 이사날짜를 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요한 시험 때는 수염을 깎으면 안 된다고 믿고 지저분한 얼굴로 나와 면접시험에서 떨어집니다. 
  • 성도는 절대로 어떤 미신에도 영향을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만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미신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운명에 좌우되지 말고 운명을 다스려야 합니다. 누가 운명을 다스립니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운명을 다스리게 됩니다. 
     

3) 인내로 결실하는 자

  • 좋은 밭에 있는 자들은 결코 기한 전에 추수하지 않습니다. 알맞게 익은 열매를 추수하는 자입니다. 
  •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성도는 좋은 마음도 가지고, 말씀도 듣고 지켜야 하지만 무엇보다 끝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 누가 교회생활을 잘합니까?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헌신하며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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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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