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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뜯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예수님께서 갑작스레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간 것 자체가 파격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방 땅이었고,  유대인들이 여행을 삼가는 곳이었습니다. 공생애를 걸쳐서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리리 지방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와 시돈 땅, 갈릴리 보다도 더 멀고, 소외되고,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어둠의 땅,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땅, 우상이 가득한 땅, 귀신들이 역사하는 그런 땅에 지금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다음31절에 보면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인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감히 가지 않는 두로와 시돈이라는 이방 땅으로 가신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에비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들이 보기에는 아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앞에 있어도 신분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을 멸시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는 대단할 지 모르지만 이방인이 보기에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갈릴리 출신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입니다. 식민지 국가의 사람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하층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오직 딸을 낫게 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조차 그렇게 비난 받던 예수를 수로보니게의 귀 부인이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간구하는 자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신앙 생활 하면서 흔히 듣는 얘기가 무엇입니까? 

설교 듣다가 상처 받았다. 교회 갔다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았다. 

그래서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교회를 나오질 않습니다. 이유도 많고 탈도 많습니다만 대부분의 이유는 자기 자존심에 상처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지키러 교회 오는 것 아닙니다. 

자존심 세우려 예배드리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은혜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존심 세우면서 용서받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그러면서 "내가 교회까지 나와서 이런 대접 받아야 하나?"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교회니까 어떤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수모를 영생과 바꿀 수 있습니까? 

자존심은 집에서 세우고 교회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러 나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딸을 고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자세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나아가 제자들과도 다른 여인의 태도입니다. 

그녀는 귀부인인데도 불구하고 갈릴리 출신 예수님 발 아래 엎드립니다. 이성적인, 사회적인 기준을 본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은혜 주는 자가 누구인가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해도 전혀 요동치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이 본문은 여인의 믿음,  즉 여인의 겸손함과 간절함에 초첨을 맞추어 설교 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관점을 제자들에게 맞추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마치 제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것은 예수님이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마가요한이 나중에 제자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이지요. 

두로와 시돈 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목적- 이 여인의 딸을 고치러... 

그런데 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숨어 있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 

억지로 이방 땅에까진 왔지만 그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차별을 받았지만 그들 역시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것. 


거룩해지는 일에 힘쓸 때에 짓게 되는 잘못 

- 금긋기, 구별하기, 난 다르다는 정체성... 

난 너희와 다르다. 너희는 더럽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볼 때 더러운 자들이었고 제자들이 두로와 시돈 땅의 이방인을 볼 때에 더러운 자들이었다. 


일본의 차별 속에서 고난을 당해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한국 땅에 들어온 동남아나 러시아 사람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착취하는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 

이것이 정말 예수님의 말씀인가? 혹시 제자들이 품고 있던 생각은 아닌가?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 앞에 엎드린 여인을 보며 속으로 품었던 정죄의 마음, 교만한 마음, 선긋는 마음, 구별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가? 

자기 자신들도 바리새인들의 차별을 받았으면서도 똑같이 이방 여인을 멸시하는 제자들의 마음.... 

이렇게 다른사람들과 구별하며 자신을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은혜는 선긋지 않는 것이다. 품어 주는 것이다. 받아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들을 사랑하고 도와줘라. 왜냐하면 너희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죄있는 자가 돌로치라. 하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갈릴리를 넘어 사마리아, 두로와 시돈, 이방지역까지 다니시면서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믿음과 간절함을 보여 주신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가복음 7장 1-23절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1절)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유대인의 신앙의 대표자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 그들이 믿음의 근거로 삼고 있는 권위를 가지고 와서... 

  • 그런데 그들이 올 때 마다 제자들을 편치 못하다. 갈등이 발생한다. 끊임없이 지적하고 잔소리 하고 꾸중한다. 
  • 아무리 실력있고 권위있고,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도 곁에 올때 마다 이렇게 지적하고 꾸짖으면 편하지 못하디. 늘 긴장한다. 평안이 없고...
  • 왜 그들은 그렇게 지적하고 꾸짖을까? 사랑일까? 사랑해서일까?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서일꺼다.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은 거다. 자기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는데 갈릴리에서 온 것들이 어디서....하면서 비교하며 만족하는 것이다. 
  • 신약성경에 이들이 등장하면 곧 갈등이 시작된다. 지적하고 음모를 꾸미고 모의하고 꾸짖고 죽인다. 
  •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은 평안을 앗아간다. 


모래시계 찍으면서 국민배우가 된 여배우가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얼마나 까탈스럽게 했겠습니까? 자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일부러 불어를 써가면서 대화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교양인양 으시댄 것이지요.  교양있다고 하지만 중학생들이 소위 왕따 시키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가족애니 사랑이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여배우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안에 시집을 갔지만 뛰쳐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을 봅시다. 

그들이 지적한 것은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가리켜 자기들의 전통을 어겼다고 말합니다.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몸을 씻건 마음을 씻건 씻음으로 우리는 깨끗해 집니다. 

더군다나 당시 팔레스틴 지방은 사막지방입니다. 모래와 먼지가 많아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손이나 발까지도 씻어야 하는 것이 문화였습니다. 이것은 위생과 관련된 삶의 문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생적인 문화가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규례가 되었다는 것은 곧 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규례가 되니까 단지 씻지 않은 손이 "부정한 손"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와 함께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병자들을 치유하고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쉬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런 그들을 보면서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권면하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습관도 남에게는 불편하고 맞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했다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루종일 얼마나 힘들었나요? 그래도 손씼지 않고 그리 급하게 먹으면 채할 수도 있고 건강에도 않좋으니 손씻고 천천히 드시지요." 하면 그야말로 분위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뭐라 말합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모여들었다가....(1절) - 그들이 모여들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부터 트집잡고 정죄하기 위해 예수께로 모여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처음엔 그들도 예수가 누군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인지 혹 하는 심정에서 예수께로 온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지라. (2절) -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과 다름을... 그들의 기대와 다름을 본 것이다. 

묻되, 어찌하여...(5절) 지금 그들은 선지자, 혹은 메시야 되신 예수를 보러 왔다. 그런데 그들이 대하는 예수는 장로보다 못한 예수이다. 전통안에 갇혀진 예수이다. 자기의 기대와 다르니까 왔어도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그릇된 점만 바라보다가 책망받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제자가 되지 못하고 무리가 되어 떠돌다가 예수를 떠난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누구를 경배하는가? 예수인가, 장로인가? 

전통을 지키려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도다. 


그 예로 든 것이 고르반 

고르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 헌신) 

일단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의 것을 고르반이라고 해 놓고 부모를 모시지도 않고 옛날 고려장 하듯 부양의 의미조차 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하나님께도 온전히 바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전통은 굳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것은 까딱하면 죽은 습관이 되기 쉽다. 

몸에는 너무 편해졌지만 더 이상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러운 것인지를 모르는 자들. 

더러운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가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14절, 17절) 

다시 불러 이르시되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회개하라. 들어라.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왜 그들을 떠났을까? 더 이상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 예수를 떠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똑같이 모르는 자들이지만 모르는 것이 있어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묻는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5절처럼) 겸손히 예수님의 지혜를 묻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산 믿음을 참된 행함이 있다. 

그러나 행함이 있다고 해서 다 산 믿음 또한 아니다. 행함이 있어도 죽은 믿음, 거짓 믿음이 있다. 그것이 곧 외식이다. 

속은 더러운데 안더러운 척 하는 것...그것이 곧 바리새인, 서기관, 무리들의 신앙이었다. 

예수님을 보러 왔지만 결국 자기 기준, 자기 시각에 안 맞으니까 정죄하고, 욕하고 떠나는 것이다. 


육신의 더러움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 마음 속의 더러움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도취와 망각 (마가복음 6:45-56)


1. 즉시, 제촉하사 (45절)  

  • 두 번이나 걸쳐서 강조하면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떼어놓으신다. 
  •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들과 작별하며 돌려보내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벳새다 지역으로 가게 하신다. 
  • 언제인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 오병이어: 4복음서에 빠짐없이 기록된 사건. 예수의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기적의 사건이다. 십시일반 모아 서로 잘 먹은 사건이 아니다.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시듯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무리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시도했다.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호들갑을 떠들었다. 
  •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 예수만 있으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수만 있으면 언제나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무리들에게서 예수께서는 마치 어린아이를 나쁜 친구에게서 떼어놓으시는 것처럼 즉시, 제촉하여 그 자리를 뜨게 하신다. 

그리고 서둘러 무리들도 해산시키시고 본인도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다. 

떡을 먹고 배불러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 자리에서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위험한 것일까? 

천천히 앉아서 각자 느낀 점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순 없는 것일까? 

무엇이 그토록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급하게 제자들을 먼저 보내어 저들의 호들갑스러운 장면을 못보게 만드시고 무리들을 해산시킨 후에 또 홀로 기도하러 가셨을까? 

가서 또 무슨 기도를 드리셨을까? 


  • 뒤풀이문화- 그 사건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어한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결국 자아도취에 빠진다. 

드라마가 하나 끝나면 깊은 우울증에 빠져 드는 배우. 큰 성공한 영화를 찍고 나서 그 다음 작품에 연이어 실패하는 사람들. 

여전히 그 작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더군다나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하고자 한 것. 

예수를 왕으로 세우자! 

광야에서 사탄의 세 번째 유혹-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의 방법- 십자가를 통한 구원계획. 그 길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루는 완전한 방법. 그것을 위해 내려오신 예수님.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 없이 예수에게 왕이 되도록 유혹. 쉬운 길, 넓은 길, 십자가 없는 길로 인도하는 것. 

이런 자들과 어울리다보면 제자들의 신앙도 위험해진다. 왜 쉬운 길 놓아두고 어려운 길만 골라 가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오면 시험과 연단을 이길 도리가 없다. 


전** 목사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정말 사역 가운데 여러 가지 기적을 경험. 

그런데 결국 그런 기적 가운데 자신이 왕이 되어버린 한국교회의 큰 암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왜? 무리들과 어울려 있다가.... 


창 3장 뱀의 유혹-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 

바벨탑도 모든 죄의 근원은 자아 도취, 결국 교만함. 

자기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 


2.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젖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았지만 무리들의 호들갑 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넌다. 

저물었다는 것은 이미 하루가 지난 것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이제 어제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인생은 바다 가운데다. 다시 고난의 삶으로 돌아왔다. 

아니 바람이 거스르므로 지금 그들의 삶은 너무나 힘에 겹다. 


무리들과 반대로 지금 제자들은 오늘의 고난 때문에 어제 일어난 모든 기적을 잊어버렸다. 아니 기억할 틈이 없었다. 

도취가 어제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그 반대는 무엇인가? 망각이다. 어제의 일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마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 기억하라. 내가 행한 일과 행하는 일들을 기억하라. 


제자들은 어부- 삶의 전문가...

저녁 6시 부터 3시간씩 1경(6-9시) 2경(10-12시), 3경(1-3시), 4경 (4-6시) 

맙소사, 밤을 꼴딱 세워가며 지금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경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다. 몇시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적어도 4-5시간은 지금 바다에서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제 죽는구나. 삶의 고난 앞에서 이젠 소망없이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어제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오늘의 문제, 현실에 문제에서 절망하고 있을 때, 그들을 지나가는 예수를 본다. 

그토록 그들의 능력이 되고, 안심이 되는 예수가 지나가신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보자 제자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유령인가?" 

달리 말하면, 귀신인가? 또 다시 말하면 사탄인가? 


절망앞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그들의 말은 뜻밖에도 예수를 가리켜 사탄인가?하는 외마디였다. 

친절하게도 성경은 이들이 심히 놀라 마음이 둔하여져서 그 떡떼시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였다고 설명한다.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만들었는가? 바로 오늘의 문제, 현실의 문제, 고난 앞에서 믿음이 둔하여 진 것이다. 


어제의 일에 도취되는 것- 교만함과 패망함 

그러나 어제의 일을 잊고 사는 것 -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 못하고 헛소리 하는 것. 

그러면 도대체 도취되지도 말고 잊지도 말고 적당히 기억해야 하는가? 


3.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어제의 예수를 생각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만하지도 아둔해지지도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내 인생의 배에 예수가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 '

날마다 오늘의 예수를 앉고 사는 것. 

그 품 아래 거하는 것. 


그 분과 함께라면 

"아무데나, 그 분께서 들어가시는 곳... 그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성함을 얻는다." 

손을 대는 것 -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서 본 모습.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 오직 그분을 향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 분을 만지는 것- 믿음의 손을 대는 것. 

여러가지 생각중에 믿음의 생각을 붙잡는 것. 붙잡고 요동치 않는 것 

한나의 기도처럼. 


날마다, 오늘 예수의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성함을 얻는다.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와 세례요한 (마가복음 6:14-29절)

 


마가복음의 시작이 세례 요한의 회개선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시 요한에게서 예수로 넘어가는 신앙의 대 전환을 이야기한다. 


세례요한은 신약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보아야 한다. 율법의 마지막 수호자이다. 

그는 헤롯의 죄를 지적했고 백성들에겐 회개를 외쳤다. 


그에게 나오는 자는 회개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았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선 철저히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는 광야에서 석청을 먹으며 살았다. 요한복음 1:20장에 보면 그는 드러내어 말하는 자다. 

그 앞에 나가면 누구든 죄가 드러난다. 

이것이 율법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된다. 회개해야 한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살듯이 그는 근신하며 깨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다. 


예수님, 죄인을 찾아나선다. 

유대땅 소외된 자, 새리, 혈루증 앓는 여인, 죽은 야이로의 딸...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준다. 

의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묻지 않고 고치신다. 

너는 다 나았다고 선포한다. 지긋지긋한 죄까지도 사해주신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먹고 마셨다. 

금식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도 이삭을 먹었고, 사마리아 땅에 가서도 양식을 구해 먹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드러내는 것 같으나 감추었다. 

인간들의 죄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지만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부자들은, 고향 사람들은...그 분의 말씀을 애써 폄하한다. 무시한다. 

그래서 그의 말씀은 숨기운 말이 된다. 믿는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비밀이 된다. 


이처럼 다른 요한과 예수. 

그런데 놀랍게도 헤롯은 예수의 소식을 듣고 곧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외친다. 

예수가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아났듯이 예수를 통해 자기가 죽였던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이, 회개의 세례가 살아났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죽음으로 이제 그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께로 모여든다. 

그가 감옥에 갇히자 이제 예수의 시대가 열린다. 

둘인 줄 알았지만 그들의 사역은 끊기지 않고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헤롯 -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 갈릴리 지역을 다스림. 

자기 동생 빌립왕의 부인 헤로디아와 결혼


세례요한 드러내놓고 그의 죄를 지적-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옳지 않다. 


헤롯의 지식-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다. 두려워하여 보호하였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 

                    피하지 않고 잘 들었다. 크게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았다. 그저 후회했다. 

                    듣는 것으로 회개를 대신했다. 

                    빌라도) 아내의 말을 듣고 예수가 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가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눈. 

왕이지만 아내의 말, 딸의 말 때문에 죽이지 말아야 할 자를 죽였다. 

그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진리보다 사람들의 이목이고, 자기의 체면이고, 사회적인 안정감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전한 것은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리를 전한 것이었다. 

누가 더 자유한 삶인가? 


겉으로는 사람들이, 딸이 왕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왕이 그들의 이목과 체면 때문에 진리를 버리고 살인을 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죽었지만 그의 고백대로 예수로 인해 부활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