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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 1-7(직분에 관하여 1)


미쁘다 이 말이여! 

감탄사,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가치있는 생각인가! 


무엇이? 직분을 사모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해석한 단어. 

Overseer: 위에서 보는 자 

잘못된 생각: 통치자, 명령자....No!

-> 두루 살펴보는 자. 남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자. 돌보는 자 (목자를 가리킬 때 사용...) 

높은 곳에서 보는 자-> 남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높은 곳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직분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관점이라는 것. 

인간은 언제나 내 중심적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고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많이 배우건 못배우건, 잘났으나 못났으나 나 중심적이기 때문에 항상 판단하고 비판한다. 

남을 평가하고, 대통령도 평가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도 평가한다. 


내 입맛에 안맞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자기한테 안맞으면 NO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직분을 사모한다는 것은 이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저질이 아닌 고상한 삶에 대한 소망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외모, 지금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본다. 씨앗을 본다. 떡잎을 본다. 

롯과 아브라함....


그래서 남이 못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보고 그래서 그 일의 농부가 되고 추수꾼이 된다. 


 왜 이런 삶에 대한 소망이 중요한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 복의 근원, 영향력,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나 하나를 구원코자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열방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롯은 어떤가? 남은 상관이 없다.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 내 복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끝은 무엇인가? 자기의 유익을 쫓아가다가 결국 소돔과 고모라같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초월하도록, 넘어서도록 인도하시는데 사람의 본성은 계속 그 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허무는 것이 직분이다. 

 이 직분은 사모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나같은 사람도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까?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가 될 수 있을까? 

 

 직분 안받고 자기가 스스로 하면 되지 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직분 받으면 얽매이게 되고, 억지로 하게 되고,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공부는 좋은데 학교가기는 싫다는 것과 똑같다. 

 자기 생각에는 쓸데 없는 것도 배워야 하고, 싫은 선생님도, 친구들도 상대해야 하고, 체육도, 음악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차라리 자기가 필요한 공부하면 더 많이, 더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지 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학교 포기하고 검정고시 보는 학생의 성공 비율이 학교에서 쓸데없는 것 배워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학가고 사회생활 적응하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들여, 돈 들여 학교가는 것이다. 

 왜?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스스로 할 것 같지만 강요되지 않고, 규칙이 없고, 자기에만 맡겨 놓으면 결국 얼마 못가 시들해지거나 포기 하기 때문이다. 

 

 직분자의 검증 

  •  책망할 것이 없으며,,,: 그런데 책망받지 못할 자가 있을까? 

       모세도, 아담도,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끊임없이 백성들이나 양들의 배척과 공격을 당했다. 

  •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꼭 결혼한 사람만이 직분자가 되는가? 

      현대 시대처럼 결혼하기를 꺼리는, 그리고 사유가 어디에 있건 이혼이나 재혼이 너무나 흔해져 버린 시대에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가? 

      또 하나는 이 글을 쓰는 당사자 바울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아내가 없는 독신이 아닌가? 그럼 그는 교회의 감독이 될 수 없는 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거쳤거나 심지어 직접 세우지 아니한 교회에게조차도 오지랍 넓게 감독의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고 신중하며 단정하다는 표현은 결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아내"에 충실한 가장. 즉 첩을 두거나 애인을 두거나 바람을 피거나 하는 등의 문란한 삶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들. 

      심지어 얼마전 소림사에서 터진 일들. 

      겉으로는 독신 성직자인양 하지만 첩이나 아내를 두고 있는 그런 사회....

      

이 모든 일의 통로- 술문제. 탐욕 문제, 돈문제...


그러니까 "책망할 것이 없거나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로 시작되는 2절은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말라.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지 말라. 

남에게 공격당할 그런 비행을 저지르지 말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 (4절) 로 이어진다. 

이 말의 반대는 무엇인가? 

공손의 반대는 불손이다. 복종의 반대는 반항이다. 

왜 자녀들이 집에서 불손하고 반항하는가? 

사춘기라 그런 것이 아니라 딴 집 살림하면서 술 먹고 집에 와서는 아내를 구타하며 자녀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니 불손하고 반항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도 그랬을까? 사람 사는 곳이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똑같은 가정 불화들이 초대교회에서도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바리새인 중심, 제사장 중심 등 이른바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대교와는 달리 초대교회는 어땠겠는가? 

열두명의 제자, 어부 출신, 시골 출신들이 주축이 되고 각 교회마다 또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많았다. 

은혜는 받았는데 그들의 과거의 삶은 어땠는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이젠 교회 와서 은혜 받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살다가 고상한 열망을 가지고 직분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직분을 사모하는 것도 귀하지만 이 직분에 걸맞게 그들의 삶을 정리 시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삼은 것이 그들의 가정에서의 모습, 사회에서의 평판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어떤가? 

교회 안에서만 괜찮으면 사회가 뭐라하던 집안에서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외부에서의 평판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교회 안에서만 괜찮으면 다 눈감아 준다. 잘못된 것이다. 


난해한 구절 6절 

(딤전 3:6)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우리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무엇인가? 

루시퍼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루시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그런데 그 찬양을 하다가 스스로 높아지기 시작.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기 시작- 교만함이 사탄의 정체. 


새로 입교한 자를 중직에 세울 때. 

왜 세울까? 

1) 열심이 뛰어남으로...

2) 사회적인 능력이 뛰어남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상황에서 감독자를 세우면 내 열심에 대한 보상. 결국 자기 행위에 대해 의롭게 생각하고 점점 더 행위 중심으로 간다. 남에게 인정받고 자랑하기 위한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적 능력으로 직분을 받으면 결국 교회는 사회 집단이 되어 버린다. 직분의 기준이 신앙적인 모범이 아니라 누가 힘있고 돈많고 권력이 있는지 흘러가게 되면 교회는 결국 그 근본이 깨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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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 8-15절  (교회 안의 여성)


이 구절은 바울의 글들 중에서 가장 극심하게 논란이 되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드러나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나라 유교식에서 많이 드러나있는 남존여비 사상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1절부터 보면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그리고 그 근거로 "아담이 지음을 받고 여자가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곳에서 뿐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더한 구절도 나옵니다. 


(고전 14: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 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엡 5: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엡 5: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교회가 남성의 우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혹은 교회적인, 혹은 가정적인 차별을 실재적으로 용인하거나 부추겨 왔고, 교회에 있어서의 여성의 리더십을 철저히 배제 시켜 왔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반대편에 있는 측에서는 이것은 예수의 생각, 즉 하나님의 생각과는 틀린 '바울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라고 폄하하거나, 바울 자체가 여성에 대한 깊은 혐오적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면 신약 성경의 13권이나 되는 바울의 서신들에 대한 신뢰성에 상처를 입힘으로 성경에 대한 권위, 즉 어떤 성경은 예수가 쓴 것이니 믿고 어떤 것은 바울이 쓴 것이니 참고만 하고...등등 성경 전체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해악을 끼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바울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을 비교하면서 둘 사이를 갈등의 관계로 바라보는 여러 신학적 시도들이나 서적들이 적지 않게 지금까지 출판되거나 주장되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예수님의 말씀과 상반된다라는 식의 주장은 위험한 발상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시대와 대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디;ㅁ

왜냐하면 성경의 말씀은 시대와 대상을 떠나서 영원한 불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도 있지만 구약의 많은 율법의 말씀, 특별히 먹는 것에 있어서나 부정한 것을 구별하는 이른바 거룩을 위한 구별법, 성전 건축법등이나 제사장의 의복 등을 규정한 법 등은 그 시대, 특별한 계층에만 적용될 수 있는 제한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시대의 유대교 사회는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로서 여자는 남자에게 절대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인구조사에 있어서도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모든 종교적인 교육에 있어서도 여성은 배제되 있었고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일부 다처제가 용인되던 시기였습니다.  

1세기의 어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자로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신약 시대는 구약 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여자들에 대하여 구약성경 시대보다 더 저등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뚜렸했습니다. 여자들은 게으르고 어리석으며 허영심이 강하고 이단과 우상숭배에 쉽게 빠지는 불성실하고 가르치기 힘든 존재로 묘사되는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유대교는 결혼을 매우 중요시했으면서도 일부다처제와 이혼을 제도적으로는 쉽게 허용하였는데 그러한 제도의 허용만으로도 여성들의 지위는 현격히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영역은 전적으로 집안 일에 국한되었습니다. 


여자들에게는 공식적인 교육의 기회가 부여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 학교는 소년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부유한 가정에서나 여자아이들에게 읽는 법과 쓰는 법 정도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가사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상식적인 미덕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안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 같은 경우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제자로서의 리더십을 인정받았고, 고린도교회나 빌립보 교회, 에베소 교회등 거의 모든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급속도로 증가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초대교회가 성령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학문위주, 교육 위주, 훈련 위주로 이어져 오던 신앙의 흐름이 이젠 성령에 의한 기도 위주, 은사 위주, 섬김과 봉사 위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6장에 나온 칭찬받는 사람,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게 6명씩...여성이 더 중심. 


그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중심. - 제도적으로는 남성 중심, 신앙적으로는 여성 중심. 

David Murrow, Why Men Hate Going to Church?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 자체가 남성 보다는 여성성에 적합? 

남성: 힘, 경쟁, 효율성, 성과, 기술, 목적, 성공

여성: 사랑, 교제, 관계, 도움, 섬김, 감정, 조화...


지난주 나눈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 다양함 가운데 통일. 

그런데 모든 은사의 목적은 공공의 유익, 교회의 유익, 타인을 세우는 데 목적. 


자, 여성이 해방되었다. 자기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다. 

갖가지 은사가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로 말미암아 좋은 효과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교회 안의 질서가 어지럽혀졌습니다. 

서로가 자기 은사를 내세우다가 어지럽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유두고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이 서로가 으르렁 거리며 교회를 분열시켜 놓았습니다. 


또한 은사는 받았지만 이 여성들은 유대교의 종교적, 신학적, 성경적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여인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은사를 내세워서 남성들을 가르치거나 하거나 리더하려고 할 때마다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고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던 에베소교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특별히 에베소 교회는 어떤 문제가 더 있었냐 하면 우상을 섬기는 데 있어서 다이에나 라는 여사제가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예전부터 바알과 앗세라 등 많은 우상숭배자들의 제사장을 여성이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복장은 화려했고 음란했고, 과감했습니다. 


그런데 은사를 통해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기독교 여성들이 그런 이방 사제의 복장이나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철저히 그런 우상문화와 구별시키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머리를 가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 9절처럼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치장하지 말고 내적으로 단정하고 소박하며 정결한 모습을 유지할 것을 분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신학을 한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갈 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라는 말로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적용 

- 여성은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하는가? 

그들은 지금 교육에 있어서 전혀 차별이 없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 

그 때에는 교회가 사회보다 앞서 여성을 해방시켰지만 지금은 오히려 사회가 더 여성에 대해 열려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가? 

그렇지 않다. 극심한 가부장제적인 시대에 예수가, 바울이 여성들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듯이 주 안에서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열려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여성이, 은사가 우위를 범했을 때에 일어났던 부작용을 깊이 새겨 이를 줄여나가야한다. 

질서 안에서 은사를 활용하도록. 

가장 중심은 사랑. 

남을 세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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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장 1-7절: (믿음의 선한 싸움의 무기- 기도에 관하여)


2장의 시작: 그러므로 (시작하는 접속사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가 받는 내용이 무엇인가? 

18절: 예언을 따라 (말씀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워라

그것의 수단: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워라. 

그리고 믿음과 선한 양심- 불신과 악한 마음으로 인해 파선한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예를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그것을 위한 첫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권면은 바로 기도이다. 

간구 (Request)

기도 (Prayer, hearing, two-sided dialogue) 

도고(intercession, 중보, 탄원) 

감사 (Thanks-giving) 

 

 


기도의 종류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기도의 순서이기도 하다. 

교회, 특별히 개신교- 신앙생활의 두 축 - 기도와 말씀

기독교 전통, 기도와 말씀을 구분하지 않았다. 기도와 말씀을 하나로 여겼다. 

기도는 말씀을 새기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고 말씀은 기도를 통해서 또한 하나님께 받는 것이었다. 

말씀을 읽는 것이 곧 기도였고 말씀을 암송하여 구하는 것이 곧 기도였다. 


가톨릭에서 기도는 곧 의식, 예식이 되었고, 그것에 반대하여 모든 형식화된 기도를 철폐한 개신교인들의 기도는 자칫 중언부언이 되기 쉬었다. 기도의 형식화가 무서운 것은 기도에 마음을 담지 못하는 것이고 중언부언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또한 자기 탄식,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기도를 강조는 하지만 그 안 깊숙히 스며있는 기도에 대한 불신이 있다. 

기도에 대한 연구,  특별히 한국 교회 기도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부르짖는 기도, 간구하는 기도는 자기 욕망의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간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듣는 기도, 대화하는 기도를 말하면 말장난 같고, 익숙하지 않은 기도같고, 그렇게 기도에 불확실하니 중보에는 확신이 없고, 확신 없는 기도를 하다보니 열매가 없고 그 결과 감사도 없다. 그저 내용없는, 무의식적인 감사인사 정도만 그칠 뿐이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할지, 내 기도가 합당한 기도인지, 중언부언은 아닌지, 형식적인지 아닌지, 자기 생각, 이성, 자아가 기도를 이길 때가 많다. 


말로는 기도의 중요성을 외치면서도 실재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말로는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작 기도해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 차 있을 때가 많다. 

기도하기 위해 앉아 있지만 혼자 간구하는 단계에서 이것이 내 뜻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갈팡질팔하다가 끝내는 경우가 많다. 기도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제가 영성을 공부하며 나 자신을 바라보며 또한 함께 공부하는 영성전공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기도에 대한 공부는 죽어라하고 하지만 정작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새벽기도나 부르짖는 기도는 마치 샤머니즘의 잔재인양 불신하며 침묵기도나 다른 초기 기독교 교회의 기도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까 자꾸 이것 저것 시도만 하다가 기도의 깊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합리화하기는 기도를 꼭 무릎꿇고 해야하나, 교회에서만 해야하나 길가다가, 편하게 어디서나 할 수 있지 않은가 말한다. 맞는 말 같지만 또한 들여다 보면 변명이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늘 기도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금식하셨다. 그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한적한 곳으로, 골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주기도문) 

그리고 귀신을 쫓다가 실패하고 창피를 당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막 9: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 "기도 외에는"의 헬라어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라는 해석이 덧붙여 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도 결국 기도하러 가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자 마자 행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기도였다. 


(행 9:11)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회심 후 그의 전 삶의 모델 같은 장면이었다. 그는 아라비아 3년, 고향 다소에서 10년, 깊은 기도생활이 있었다.

바로 전도여행다니지 않았다. 13년을 전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며 자신을 다스리고 준비했다. 


모세가 날마다 호렙산에 올라 40년동안 준비한 것, 요셉이 감옥에서 힘쓴 것.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갔음에도 일어설 수 있었던 것! 바로 기도였다. 


기도 외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에 참여할 수도 이길 수도 없다. 


부르짖는 기도가 어리석은 기도처럼 들리는가? 고상한 기도는 듣는 기도고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것은 하급 기도인가? 

기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고백이다. 

가난한 자는 구할 수 밖에 없다. 구하지 못하면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하지 않는 기도는 위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에 구한다. 

요청한다. 더 다급하게, 간절하게, 가난한 자일 수록 더 크게 기도한다. 

하나님이 못듣기 때문에 크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간절하여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서서히 나를 보게 하신다. 

너무 가난해서 문제 밖에 안보이던 내가 부르짖어 하나님을 바라보자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게 하신다. 

그래서 더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 

내가 구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되고, 그 안에서 내 죄와, 내 허영심과, 욕망과, 조급함을 보게 하신다. 

그래서 간구는 곧 기도가 된다. 

대화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나의 변명과 회개, 수정된 요청을 드리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서 시작된 기도는 곧 중보로 이어진다. 내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서 여겨지지 않으면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혹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식구들과 교인들을 위해서 나에게 임한 은혜가 그들에게도 임하기를 간구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의 기도는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짐과 같이 그들에게도 이루어지기를"의 중보와 확신의 기도가 된다. 

확신하기 때문에 모든 기도는 감사로서 끝난다. 


이런 과정 중에 사도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말한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위정자가 아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로마와 결탁한 자들이다. 매국노이거나 로마인들이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안믿을 뿐더러 교만하여서 오히려 믿는 자들을 핍박한다. 마귀의 또 다른 이름은 "공중과 권세 잡은 자"이다. 


그런데 왜 이들을 위해 중보하는가? 

1. 물론 그들에게도 구원에 이르는 길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사랑의 연습이요 실천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3-4)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구원이 임하기를 원하신다.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하신다. 포기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2. 나의, 믿는 자들의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2절 b) 

We may live peaceful and quiet lives in all godliness and holiness. 

peaceful (평안: 외적) - holiness (거룩, 단정: 내적):  

quiet (고요: 외적) - godiness (경건: 내적)  


왜 위정자들,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의 평안이 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평안은 불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파도에 휩쌀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의, 환경의, 외적인 상황 때문에 내 삶의 평안이 깨어지지 않고 그럼으로 내 삶이 단정하게 되는 것. 검소하게,  질서있게, 순전하게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킴으로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집중함으로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세상을 위해, 세상을 향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고요와 경건은 곧 하나님을 향한 삶을 나타낸 것이고 

평안과 단정은 세상 안에서의 우리의 삶, 질서있고 규모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기도이다. 

세상을 위한 중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기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질서와 하나님을 향한 삶을 갈망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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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싸움과 파선 (디모데전서 1장 18-20) 


  • 아들 디모데야 (18절) 


바울은 진심으로 디모데를 아들로서 여기고 있다. 

그에게 디모데는 자기의 후임목사요, 제자요, 또한 아들이다. 

디모데에게 바울은 자기의 스승이다. 

좋은 스승이란 무엇인가? 

좋은 스승은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살았던 것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이나 서양이나 옛적부터 스승과 제자의 삶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함께 동거하며 살아가면서 지식만이 아닌 삶을 배우는 가르침을 주고 받은 것입니다. 

(고전 4: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정말 아버지의 마음으로 디모데를 대했습니다. 

요즘 스승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학생이 있을까요? 

스승은 제자를 아비의 심정으로 대하지 않고 제자는 스승을 아버지로 대하지 않습니다. 선생은 몸을 사리고 자기 이익만을 채우며 제자는 선생을 존경하기는 커녕 비웃고 비난합니다. 

여전히 학생이 부모가 학생들 앞에서 선생을 모욕주고 때리는 일이 뉴스나 소문을 통해서 흘러나옵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이젠 뜻을 알수 없는 전설같은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 선한 싸움 (18절 b) 

바울사도는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종으로써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예수의 종, 예수의 제자된 삶을 선택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진짜 스승이 있어서 가르치고 혼내고 끌고가도 힘든 것이 제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식에서 만난 예수를 위해 평생 스스로 종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로마감옥에서 죽기 전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딤후4:7) 하며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하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믿음 안에서의 자녀 디모데에게 똑같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위한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생활을 전쟁으로 표현합니다.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이라는 것은 신앙 생활을 못하게 만드는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싸움의 상대는 누구입니까? 


1)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적은 사탄입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에 굳게 서서 그를 대적하라."(벧전5:8,9a)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7)


분명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지만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생각을 통해서 불안과 의심과 않좋은 마음을 주기도 하고, 상황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몸을 건들수도 있습니다. 

(고후 11:3)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딤전4:1)

"떠난다"는 말은 "주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을 나타낼 때 사용했습니다. 이 말에는 "반란을 선동하다" "단념하다" "철회하다" "버리다"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래 가기로 했던 그 길에서 일탈하는 것을 말합니다.

(EX) 오르바 


2) 두번째 우리의 적은 세상입니다

(약 4:4)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은 우리의 적을 바꾸어 놓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싸웁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싸웁니다. 돈때문에 형제도, 부부도, 가족도 원수가 됩니다. 

(요일 2:16-17)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3)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자

딤전 1:3)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이단의 생각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믿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성령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실수할 수 있습니다. 

(EX) 전도폭발 


4) 네 번째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 입니다. 

자기 안의 탐욕, 정욕, 교만,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마음과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금욕, 금식, 경건, 훈련 


  • 믿음과 선한 양심 

이 선한 싸움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선한 싸움을 이기는 무기로서 믿음과 착한 양심을 이야기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면 기쁨과 전리품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고 담력이 자라고 또한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믿음의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첫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이미 이 전쟁에서 이겼다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요 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전체의 전쟁은 이미 승리했지만 패전하는 마귀는 끊임없이 도주하며 국지전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승전보를 숨기고 여전히 우리를 위협합니다. 
또한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이 싸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알게 하여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양심만 가지고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믿음과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악한 것으로 아는 것을 행하려 할 때 양심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경고한다. 그것이 양심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또한 양심은 쉽게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양심을 깨끗하게 되었으나 양심은 죄로 더러워지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의 양심은 화인맞아 더 이상 역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한 양심을 지닙니까? 양심은 지식과 같이 결부됩니다. 아는 만큼 내안에서 죄가 되는 것들에 대해 양심은 경고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읽으라는 것입니다. 

옳은 것과 잘못된 것들의 분별을 어디서 얻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양심은 선한 양심이 됩니다.  

만일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못하게 되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기준이 되어버린다.  


믿음과 선한 양심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하나의 공격 무기는 곧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 후메네오와 알렉산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 의해 교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딤전1:20)는 뜻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사탄에게 넘겨주다는 의미는 고린도전서 5장에 한 번 더 소개가 됩니다. 


(딤후 2:16)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딤후 2: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딤후 2:18)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궤양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질병입니다. 벌레 먹어 고통당하는 병과 같습니다. 후메내오가 교회 안에서 내 뱉었던 말들은 그런 류의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교리로 교회를 야금야금 삼키려는 더러운 질병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메내오는 빌레도와 함께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어떻습니까? 그는 본래 바울이 에베소 전도 여행을 갔을 때 도왔던 인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으로서 초창기 바울의 사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훗날에는 바울이 그를 가리켜 "사탄에게 내어준 자"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 4:14-15)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악을 행하였으니 주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너도 그를 조심하라. 그가 우리의 말을 크게 대적하였느니라.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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