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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3-10절:  참된 경건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을 떠나 다른 교훈이 나뉘게 될까? 


새벽예배 시간에 마가복음 10장을 나가는데 제자들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 말씀에 대한 힌트를 살펴 볼 수 있다. 


마가복음 8장엔 그 유명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고백 사건이 나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은 로마의 황제의 이름을 딴 황제의 신전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도시이다. 그 곳 한 복판에 선 예수와 및 제자들의 행색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남루한 그런 촌사람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예수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신다. 


신앙 고백은 우리가 행복할 때, 우리가 성공했을 때에, 우리가 은혜 받을 때에 물으시는 물음이 아니다. 

내 인생에 의문이 다가올 때에, 내 신앙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 내 신앙과 삶의 현장이 너무 극명하게 갈등하고 혼란 할 적에 주님의 그 한 복판에서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 


우리가 암송하는 사도신경은 오랜 기간 이단과의 깊은 갈등과 핍박 속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나온 고통 속에서의 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 후에 주님은 비로서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길은 이제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핍박하며,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신다.  

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영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얘기를 할 때마다 제자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  

처음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항변했다. 

항변했다는 것은 꾸짖었다는 것이다. 

십자가 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두 번째 말씀을 하실 때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흘려 넘긴다. 

그러면서 바로 길거리에서 "누가 더 크냐?"하면서 제자들끼리 다투기 시작한다. 


세 번째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주님은 더 분명히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예 반응하지 않는다. 무시하고 침묵한다. 

그러면서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께 슬그머니 와서 "주의 영광이 임할 때에 하나는 왼편에, 하나는 오른편에 있게 해달라고" 청탁한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그리고 그것을 계속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거기가면 영광스런 자리가 기다리고 있고,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자기들은 모두 공신이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같은 길을 가면서 정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저희들이 쓴 "백투더 클래식" 첫 글에 보면 이종태 목사님이 쓴 '큐리오시티'란 글이 나온다. 

거기엔 말씀을 대하는 두가지 태도를 '면학심'(studiositas)과 호기심(curiositas)는 말로 구분해서 말한다. 

호기심과 면학심은 둘 다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호기심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자기 만족과 교만함을 위한 갈망"이고 

면학심은 자기가 아는 것을 더 깊이 알고 싶어하는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호기심이 자기를 향한 사랑에 근거한 마음이라면 면학심은 지식에 대한, 말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다. 

어거스틴 이후로 중세 때까지 사람들은 면학심은 중요한 덕으로 칭송한 반면 이 호기심은 탐심이라 하면서 죄로 여겼다. 


3절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은 무엇인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는 것, 내 삶에 소화시키게 하는 것, 이것이 경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주님의 생각을 끼워맞춘다. 

예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누가 더 커요? 나좀 주님 옆자리 앉게 해 주세요 하던 제자들처럼 자기 목적으로 인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갇혀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는 주님의 말씀 보다 자기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이므로 교만한 것이요, 교만한 자는 결국 주님의 어떤 말씀도 받아 들이지 못함으로 역설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이다. 

무식한 자가 용감하다고 교만하고 무지한 자의 옆은 항상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 투성이다. 

이런 자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 같으나 경건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고, 교만해지고 인정받으려 하고, 성공하려 하는 것이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경건은 자족하는 것이다. 

자족은 내게 알려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경외, 두려워 하며 그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이 경건이다. 

경건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발생하는 내 희생, 내 연약함, 내 무기력함, 내 낮아짐을 족한 줄로 여기는 것이다. 


꼭 믿음 생활 잘해서 축복받는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죽도록 헌신했지만 가나안 땅을 앞에 바라두고 여호수아에게 자리를 물려 주어야 했고, 바울은 죽도록 헌신했지만 감옥 안에서 외롭게 죽어야 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들의 핀 국화처럼, 하늘의 새들처럼 살 수 있다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솔로몬의 궁전에서 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목적이지 천국이면 되는 것이지, 꼭 일등석 타고 천국갈 필요가 없다. 

목적지가 천국이면 족한 것이다. 


부하려 하는 자, 성공하려 하는 자, 자기 만족을 다 가지려 하는 자, 9절에 보니까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 끝은 파멸과 멸망이다. 

그리고 그 탐심의 가장 근원이 결국 돈 문제, 일만 악의 뿌리, 돈에 대한 욕심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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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1-2절 

종과 주인과의 관계


5장에서 바울은 디모데 및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의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교회에도 가정과 같이 어른을 공경함과 존경함이 밑바탕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과부와 장로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이들을 이끄는 디모데에게 무엇보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며 교회를 잘 치리할 것을 말씀 합니다. 

지금까지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이제 6장으로 넘어오면서 바울은 시선을 교회와 맞닿아 있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목회자로서 성도들의 사회에서의 삶과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또 그 안에서 교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타 다른 서신서에서도 성도들이 교회 안의 삶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대단히 민감하게,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집사나 감독의 직분을 줄 때에도 교회 안의 신앙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사회에서는, 가정에서는 어떠한가가 직분자의 더 우선시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바로 이 사회에 바탕을 둔, 사회에 터 박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피난처인 동시에 전시장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킬 의무도 있지만 교회 안의 성도들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사명도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산 꼭대기에 짓게 한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배를 볼 수 있도록 지은 것입니다. 

각 층마다 창을 둔 것도 방주 안의 사람들도, 방주 밖의 사람들도 서로 바라볼 수 있도록 지은 것입니다. 

신앙있다고 세상과 문닫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며 소통하는 것이고 세상은 세상 끝까지 교회를 바라보며 비판하고 때론 칭찬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의 말씀은 종들에 대해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또한 이스라엘 자체가 대대로 내려온 종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신분적으로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유대교도 이러한 노예 제도에 대해서 희년이나 안식년 제도를 통해서 이들을 구제해주고 해방시켜 주는 율법이 있었지만 이러한 노예제도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떻게 보면 당시의 이런 신분제도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노예보다도 가치없게 여겨지던 여인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기도 했고, 오늘 새벽에도 나누었지만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취급당했던 아이들을 가리켜 그를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신앙을 보이시면서 바리새인들과 기성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을 부끄럽게 했고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일약 사도로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높은 부와 명예를 지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은 예수의 복음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단어로 정의했고 그 사랑 안에는 남녀노소,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차등이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로마나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에서 볼 때에 이런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위험성을 지닌 위험한 집단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전 이미 가톨릭이 우리나라에서 배격당한 가장 큰 이유도 이러한 신분제도가 어지럽혀 진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어찌 주인이 종과, 양반이 상놈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제도나 시스템이 꽉 조여져 있을 때엔 엄두도 못할 생각과 행동들이 신앙 안에서 자유를 얻은 종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의 주인을 더 이상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겉으로 따르더라도 속으로는 이미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제도적으로 억지로 복종하기 시작합니다. 


1. 믿지 않는 상전을 공경하라. 

그런데 이렇게 신앙 안에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당시의 종들에게 바울은 전혀 새로운 시각의 주문을 합니다.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자기의 주인들을 범사에,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항상", 마땅히는 "당연스럽게"  "공경할 자로 알라"- 그들을 공경받아야 할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경하라는 것은 마치 어른을, 부모를 공경하듯이 공경하라는 것이지요. 

믿지 않는 주인을 부모와 집안 어른처럼 공경하라는 것은 선뜩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 같습니다. 

잘못된 제도에 순응하라는 수동적이고 비겁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어떻게 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의 불순종으로 결국 누구의 이름이 훼손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회적으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불손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듯이 예수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예수믿는 자들에게 흔히 하는 비난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들이...", "교회 다닌 다는 것들이..." 

자기들은 안믿고 마음대로 살면서 믿는 자들이 조금 실수고 그들 눈에 어긋나면 너무 쉽게 이런 비난들을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무슨 소리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으리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억울합니까? 

에베소서 6장 5절부터 보면 

더욱 적극적으로 주인에게 순종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엡 6:5-엡 6: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주인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두려워하고 떨며라는 말은 신앙적인 용어로 바꾸면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만 하지 말고 철저히 그 마음까지 순종하라는 것이지요. 

왜요? 그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나에게 이런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순종할 때에 누가 갚으시리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받으시고 갚으실 줄을 알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2. 믿는 상전을 더 잘 섬겨라. 

2절은 무슨 말씀입니까? 믿는 상전을 둔 종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좀 전 까지 한 예배당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주 안에 우린 하나..."하며 찬양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가지고 일터로 왔는데 주인이 주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사회적인 관계로 돌아가려니 헤깔리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직장도 교회처럼 은혜롭게 일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주인 노릇하면 교회가서 저사람 일터에서는 나를 종 부리듯 한다라고 하면 그만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하고 완악해서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더 막대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기고만장하고 더 나아가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사탄처럼 위협하고 협박하면 순종하는데 그리스도처럼 자녀가 되고, 친구가 되자 하면 자녀나 친구가 아니라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믿지 않는 상전이야 싫어도 할 수 없지 참지만 믿는 상전은 오히려 종이 감시자가 되어 자기에게 함부로 하면 신앙의 위선자라고 뒤집어 씌웁니다. 

바울은 이런 죄인의 연약한 심성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믿는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라. 

왜 그렇습니까? 안믿는 상전들은 우리가 그를 잘 대해주어도 당연하게 여기며 악을 행해도 할 말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참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주인을 잘 섬기면 섬기는 대상이 , 나의 섬김을 통해 유익을 얻는 자가 바고 믿는 자요, 형제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 사회 안의 그리스도인  

물론 우린 믿는 자로서 부당한 사회적인 악에 맞서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적으로 순응을 강요해서도 안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신앙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혁명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악한 사회에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원칙으로 세상의 원칙을 극복하라고 말씀합니다 

부한 자에게 돈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합니다. 

내가 하면 주가 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4. 작은 사회인 교회 

이 말씀은 성도의 교회 밖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 안의 삶에도 적용이 됩니다. 교회 역시 여러 사람이 모인 사회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이 드신 분이, 혹은 중직자가 신앙도 깊어서 육체적 어른이 신앙적 어른이 될 적에 교회는 가장 건강하고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신앙의 나이가 육신의 나이와 상관없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말합니다. 은혜 받고 온전해지는 것은 육신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보다 믿음 없는 자가 나를 리더할 수도 있고 믿음 없는 목사가 성도들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손쉽게 나올 수 있는 실수는 무엇입니까? 

무엇을 할 때마다 신앙적으로 공격하고 맞서는 것입니다. 

"그건 신앙적으로 틀립니다. 그건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질서를 잃어버립니다. 관계가 깨어집니다. 

교회는 정답이 승리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이 승리하는 곳입니다. 은혜가 승리하는 곳입니다.


모세- 왜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따라갈까? 

그들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공동체가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은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교회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곳으로 나아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니요, 옳은 것을 가지고 싸우기 보다 기도하며 인내하면 그것이 정말 옳다면 주님께서 옳은 방향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는 자를 푸대접하고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새신자에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가까운 사람, 믿음 있는 자들도 외롭고 도움이 필요하고 격려 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의 경험을 통해서 성도님들이 

"목사님,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나 신경쓰세요.."

하는 말을 들을 때가 바로 그에게 다가가야 할 때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면 내가 믿고 신경쓰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힘든 당할 수가 있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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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17-25절 (목회자들의 대우문제)


지난 시간에 우리는 교회 안이 참 과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부터 과부는 단순한 홀몸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홀몸 이면서도 교회에서 도움을 받으면서 동시에 교회의 일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도움을 받는 대상이자 또한 성도들을 심방하거나 사역하는 적극적인 사역자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이제 세상적인 정욕을 끊고 교회에 특별히 헌신된 어찌 보면 여성 교역자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


이번 시간은 좀더 적극적인 직분자, 특별히 목회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목사와 장로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교회의 직분에서 장로들은 공식적으로 교단에서 시험을 치루고 목사가 없을 시 설교나 목회를 대신 맡을 수 있는 권한이 부여 됩니다. 

초대교회에는 목사와 장로에 대한 구분이 전혀 없었지만 크게 다스리는 장로와 교육하는 장로들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

이들 가운데서 특별히 구제의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서 집사들이 세워지게 되구요. 


처음 이들 목회자들을 위해 당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을 존경할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잘 다스리는 자- 영문 표현을 좀더 번역하면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잘 지도하는 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하라. 


목회자를 존경하라! 

뭐 당연한 것 같지만 그리 당연하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현대 교회에서 정말 목회자를 존경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들을 도둑놈이나 위선자 취급합니다. 

문제는 교회의 성도들도 목회자를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지요. 

난 목회자를 존경하는가? 

현대 교회야 그렇다쳐도 초대 교회에는 당연히 목회자들이 존경받았겠지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그 뒷 구절들을 살피면 그들이 실제로 교회 안에서 많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멀리 살펴볼 것도 없이 사도 바울이 예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린도 전후서나 여러 서신들을 보면 바울은 여러차례 성도들의 무시와 비난을 변호하거나 성토합니다. 

잘 알다시피 바울은 가장 좋은 종교적 가문에서 태어나서, 가장 좋은 학파에게서 신학을 전수 받고, 또한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였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바울은 원래 사도가 아니다. 

말을 너무 못한다. 

결혼을 못하니 불구자다. 

대머리다. 

못생겼다. 

뭐, 유대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서 끊임없이 거의 능멸에 가까운 모욕을 당합니다. 


그의 후임으로 들어온 아볼로는 유명한 학자요 웅변가였습니다. 

외모도 바울에 비하면 너무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거의 도망하다시피 교회를 빠져나와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럼 유대교도 그랬을까요? 

아니요. 바리새인들은 일반 대중으로 부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속으로야 어떻게 여길지 모르지만 성전의 제사의 집례자들로서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와 명예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에서 장로들은 존경받지 못했는가? 

  • 첫째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찾을 수 있지요. 유대교는 예식 중심입니다. 형식과 절차가 중요합니다. 

      레위인, 제사장들의 특수한 임무는 곧 그들에게 종교적 권위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을 통해야 나아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초대교회는 성령 공동체였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 사도였습니다. 성전 안에서 굳게 유지되던 계급과도 같은 문화들이 사라졌습니다. 

      형식보다는 은사가, 지식보다는 체험이 강조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영적 민감성이 있는 여성들이 교회의 중심으로 등장합니다. 

      성령의 은사 받은 자들이 인정받기 시작하고 형식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점점 위축되고 나아가서 외면당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있어서는 특별한 교회였지만 질서나 형식에 있어서는 무질서와 혼돈이었습니다. 

      비단 고린도교회의 문제 뿐만 아니라 대부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치리하는 리더의 중요성, 교육하는 리더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은사만 있다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인간의 순종, 혹은 결단, 혹은 동역함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있어도 영적 분별함이 있어야 하고, 우선순위에 맞추어 일을 진행하는  리더십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사람이 항상 뜨거울 수는 없습니다. 항상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변화산을 경험하면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올라감과 내려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지탱하고 깊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 18-19절은 목회자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를 보여 줍니다. 

       18절의 말씀은 좀 어리둥절 하지요?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앞의 구절은 신명기 25장 4절의 말씀이고 뒷 구절은 누가복음 10장 7절의 말씀입니다. 

       (신 25:4)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눅 10:7)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은 소가 일을 하면서 곡식을 먹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히브리 인들의 타작하는 방법은 타작마당에 곡식단을 펴 놓고 그 위를 소가 지나가게 하거나 소가 끄는 타작 기구가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때 주인은 일하는 소가 곡식을 마음대로 먹게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결국 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0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 씩 짝지워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이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그 집에 유하며 말씀을 전하다가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면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셨습니다. 

       유대교의 같은 경우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에 대한 대우는 율법으로 정해 놓아 각 지파의 십일조를 모아 그들이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같은 경우는 그런 제도적인 모습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지요. 그래서 장로들의 처우를 이야기하면 성도들이 반대하거나 구설수에 오른 일이 당시에도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은혜 받고 신앙생활 하는데 너희들은 왜 돈받고 하느냐?하는 것이지요. 

       

       사도바울은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에서 또 한 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 9장 4절-14절) 

      (고전 9:9-10)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지금뿐만 이나라 초대교회때도 목회자의 사례비 문제로 인해서 목회자들이 존경받지 못하였다는 것이 웃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삯은 무엇입니까? 배부르고 부자되는 삯이 아니라 복음에 전념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삯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욕심이 들어가고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취하려는 자들로 인해서 여러 구설수에 오르는 것입니다. 

       (가톨릭 Vs 기독교) 

       

  • 목회자들의 치리 문제

       조심하라 - 두 세사람의 증인이 없으면 고발을 받지 말라.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유대인의 재판에 대한 전제였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 그를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인적인 앙심을 가지고 참소하는 자들로 인해서 교회에, 목회에 지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꾸짖어서 모든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 그들의 막중한 책임에 대한 경각심을 주어라!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 가장 큰 문제. 유아세례주듯 목사안수 주어서는 안된다. 

       

       불공평하게 하지 말라. 경솔히 하지 말라. (서두르지 말라) 다른 사람의 죄와 공유하지 말라. 정결하게 하라. 

       

  • 목회자의 건강문제  

 디모데- 이방인 아버지, 그러나 할례 받고 나실인 처럼 거룩한 삶 - 왜? 복음 증거를 위하여....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포도주는 즐기기 위해서도 마셨지만 위생과 건강을 위해서도 마셨습니다. 

 당시 물이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만 먹고서는 위장병이나 이질 같은 병에 걸리기 쉬었기 때문에 포도주는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테니스 치는 목사님 

목회자가 건강관리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음없다는 소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운동 안하다가 병걸리면 정말 믿음없다는 소리 듣는다.! 

       

사람들의 이목에 너무 신경쓰지 말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알곡과 쭉정이, 선인과 악인을 드러나게 하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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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5장 3-16절 (참 과부를 존대하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이른바 초대교회가 세워지면서 과부는 초대 교회 안에서 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아세아로, 유럽으로 확장되면서 교회는 단순히 신앙 공동체를 넘어서 제도적으로 체계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리스도 정신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세계 곳곳의 선교 역사를 보아도 복음이 뿌려지는 곳마다 단순히 신앙적인 부흥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악을 몰아내고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봉양하는 사회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른바 이기적인 정욕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사랑운동, 희생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 44-45절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워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물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떠나니 자기들보다 더 연약한 자들이 보이고 서로 살려는 운동, 함께 살려는 운동, 이른바 긍휼의 문화가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 긍휼의 초대교회의 문화에 있어서 가장 섬김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이른바 과부들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구약의 율법에서도 구제에 있어서 가장 강조된 부류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즉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아는 그들에게 직접 지원해 줄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혹은 기관이, 양부모가 양육을 해 주어야지 어린 아이들에게 직접 구호를 해 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허다한 잡족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였고, 그들에게 땅과 나라를 주셔서 그들이 강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오히려 나그네, 이방인은 그들을 압제하는 로마인들이거나 그들과 낫거나 혹은 같은 처지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아, 나그네, 과부 들 중에서 구제의 대상이 당연 과부에게 몰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초대 교회에는 폭동으로 인해 사형을 당하거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교당하는 자들이 많은 때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도 여자들이 남자들 보다 오래 살던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마다 과부들이 넘쳐났고, 또한 그들이 구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 과부는 단순히 도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과부가 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결혼을 하기 보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생을 교회에 헌신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가부장제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리더십이나 역할이 훨씬 자유롭게 부과되었던 교회에서는 남편을 둔 아내보다 과부들에게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맡겨졌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전도사와 같은 기도하고 심방하는 일들이 과부들에게 맡겨지면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 과부들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혹은 사회적인 배려와 관심의 중심이었던 동시에 교회 사역에 있어서는 활발한 리더들이요, 후원자들이요, 봉사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부들에 대한 환대와 리더십이 굳어 지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과부들이 몰려 들어 더이상 교회가 과부들을 감당하는데에 무리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은 심해져서 큰 교회가 작은 여러교회로 전파되기 시작되면서 그만큼 재정도 약화되었는데 과부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진 것입니다. 


거기다가 새롭게 들어온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구제가 너무 히브리파, 즉 이스라엘사람들 위주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과부에 대한 구제와 그로 인한 불평 불만이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정도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일곱집사를 세워 이 일을 전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할 정도로 과부들의 문제는 초대 교회의 교회의 큰 중심문제 중의 하나였던 것이지요. 


디모데에게 전하는 목회서신에 있어서도 바울은 이 과부들에 대한 존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적으로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존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3절에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고 말합니다. 

아니 과부면 다 과부지 참 과부가 있고 거짓 과부가 있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참 과부는 "who are really in need", 즉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과부들을 인정하고 존대해 주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정말로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있다는 것이지요. 도움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과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자녀나 손녀가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또 도움을 청하는 자는 참 과부가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우리 이민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예민하고도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자녀도 재산도 도움 받지 않을 만큼 다 있는대도 미국와 와서 여러가지 혜택을 보는 사람들로 인해서 정작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저도 점점 사회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4절의 말씀의 의미는 우리에게 강한 메시지를 줍니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영어로 된 표현을 보면 "They should learn to put their religion into practice by caring for their own family and so repaying their parents and grandparents, for this is pleasing to God." 

무슨 소리입니까? 자녀는 그들의 신앙을 그들 자신의 가족을 돌보고,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에게 보답함으로써 신앙을 실천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자식으로 한 번도 부모에게 보답하는 삶을 산 적이 없고, 그저 받기만 하다 부모님 장례도 지키지 못했던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그나마 이제 돌아볼 수 있는 것은 장인으로 말미암아 우리 과부되신 장모님도, 또 친 부모님께도 이젠 효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 어르신들께도 아버님을 생각하며 돌아보도록 굳은 결의를 하는 것입니다. 


8절은 더욱 아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자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 외에 또 한 부류의 참 과부로 인정받기 힘든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 째는 나이가 육십이 덜되고...

이 말은 무엇입니까? 

육십이 덜 된 자들은 스스로 살 능력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다니며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라는 것은 가정에 충실한 자인가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낸 헌금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만한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지요. 

즉 한 남편의 아내였던 가정에 충실했던 자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성도들에게 희생하고 환란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선한 일을 행한 자. 

신앙적으로 합당한 자인가가 참 과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되지 못한 과부는 어떤 자입니까? 

과부로서 행실이 부정하고 게으른 자 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교회에서 이런 일 저런 일에 함께 하며 심방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신앙 안에서 바르지 못할 경우 집집을 돌아다니며 않좋은 소문의 진상지가 되기도 하고 

성적으로 나쁜 스캔들을 내기도 하고 부정한 일에 연루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게으르다는 것은 본인이 일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삶을 외부의 도움에 의탁하는 자라는 의미도 있지만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 즉, 영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데 게을러서 결국 세상의 것을 쫓다가 정욕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꾐에 빠지거나 교회의 유익이 되기 보다 헛된 소문을 퍼뜨리는 폐단의 근원지가 될 수 있는 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쓸데 없는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가? 

영적으로 게으른 자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해 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게으른 자는 시험에 드는 자요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 교회의 헌금

목회자와 교회 운영 외에 중점은 선교와 구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선교헌금을 내는 데도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내는 헌금이 선한 일에 쓰이는가? 

호화롭게하는 몇 몇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기 및 가족의 온 삶을 희생하며 복음을 위해 애 쓰는 대다수의 선교사들의 사역마져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 봅니다.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많은 연봉은 대다수 검소하게 사역하시는 목회자들의 삶 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듭니다.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이나 지원을 받는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나 혹은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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