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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 1장 3-8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가장 늦게 씌여진 서신문입니다. 

바울이 순교하기 바로 직전에 쓴 것으로 바울 역시 자기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디모데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유언처럼 남긴 서신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주일날 나누고 있는 빌립보서도 똑같이 감옥에서 쓴 서신문이지만 빌립보서에는 아직도 기쁨이, 소망이 충만하지만 디모데후서는 좀 더 무겁고 진중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디모데후서는 그 어떤 서신문보다 비장하고 간절합니다. 

자기의 임박한 죽음을 느끼고 있는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가장 보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절에 보니까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고 절망스럽더라도 디모데만 보면 힘이 나고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디모데만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의 믿음의 내역까지도 칭찬을 합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그의 증조모부터 그의 어머니를 통해 이어져 온 믿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동안 바울의 든든한 신앙의 선배이자 후원자였던 바나바와 다투고 2차 여행을 준비하면서 시작됩니다. 

왜 바울이 바나바와 다투게 됩니까? 


마가는 이미 1차 전도여행에서 힘이 들다고 중간에서 떠난 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데려가 보아야 힘든 전도의 여정길에서 도움이 되기 보다는 짐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의 생질인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를 데려다가 일꾼을 만들려고 합니다. 


  •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면 이 일로 인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을 두고 누가 잘못한 것이냐? 하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바나바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리 바나바가 잘못을 했어도 어떻게 바울이 그럴 수 있냐합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도 여전히 아무도 그의 회심을 믿어주지 않았을 때에 그를 믿어 열두제자들에게 소개 시켜준 자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은인 중의 은인 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바나바에게 버럭 대들면서 다툰다는 것 자체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을 드는 사람은 바나바가 공적인 일을 앞에 두고 자기의 조카를 챙기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마가가 그의 조카가 아니었더라도 바울과 다투면서까지 그를 데리고 갔겠냐는 것입니다. 

이후에 바나바가 사도행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도 성경이 바울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보면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은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하면서 결국 마가의 믿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 마가는 누구였습니까? 비록 잡혀가는 예수님을 홋이불을 버려두고 도망했던,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했던 1차 전도여행에서 힘든 여건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던 자였지만 결국 그의 집에서 성령의 사건이 임했으며, 그에 의해서 첫번째 복음서 마가복음이 씌여 졌으며, 그는 나중에 베드로사도의 아끼는 제자가 되어 베드로를 대신하여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를 믿어주었던 바나바와 떨어진다는 것이 바울에게도 얼마나 큰 부담이고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그 때 실라와 더불어 새로운 동역자로 만난 것이 바로 디모데입니다. 


[행 16:1-행 16:2]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절에 보면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나는 밤이고 낮이고 너를 내 기도 중에서 생각하면서 내 진심을 다해 내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냥 너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청결한 양심으로 내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하나님께 너를 두고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합니다. 왜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할까?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의 조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데 바울은 자기의 조상적부터 섬겨온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디모데의 신앙의 내력을 말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 거짓이 없는 믿음이 네게도 있음을 확신한다. 


아니 믿음의 자식이라고 하면서 디모데의 믿음만 칭찬하면 됐지 구태여 그의 외할머니부터 어머니를 언급하면서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을 칭찬합니다. 


자칫 이런 말을 잘못 오해하면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그의 가족이 예수를 잘 믿지 못하면 거짓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왜 바울이 그토록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의 기도를 이야기 할 때도, 디모데의 믿음을 칭찬 할 때에도 그런 신앙의 내력을 이야기 하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그만큼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입니다.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이 구절 뿐만 아니라 디모데후서는 믿었으나 세상으로 나간 자, 자신을 배반하고 모욕을 준 자들에 대한 강한 회한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생명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비방과 배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모데에게는 

나도 너도 우리는 신앙의 내력이 있는, 변치 않는, 절대로 배반하지 않는... 마지막 때까지 믿을 수 있는 동역자임을 아프게, 통렬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울이 힘들고 아프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할까,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4절) 네 눈물을 생각하여


[딤후 1:6 - 8]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죽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은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는 것이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 신앙인이 갖게 되는 소망? 착각? 


믿는 자로서 잘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나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 주고 싶다. 

내가 잘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


물론 우리는 잘 될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이 어려울 때, 힘들 때, 아플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환경과 관계 없이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요,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나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포되어질 수 있고, 영광 받으시는 분입니다. 


기독교인이 사업에 실패하면 신앙에 실패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실패하도 넘어지지 않는 것,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 그것이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십자가 이후의 부활 신앙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순교의 역사입니다. 


처음엔 아무런 열매 없이 죽어간, 정말 의미 없어 보이고, 아무런 열매 없어 보이는 그런 십자가 인생들이 모여서 

한국이, 중국이, 동남아가 하나님이 나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울은 지금 자신으로 인해 낙망할지 모르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라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다 날 떠나도 넌 순전한 믿음을 지키라고, 너만은 나의 믿음을 알아주고, 너 만은 나의 신앙을 따르라고 지금 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본문은 디모데를 바라보는 바울의 기쁨과 더불어 그가 처한 고통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15절) 아시아에 있는 보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


그 믿음 좋은 바울도 고난의 극에 달했을 때에 모두가 날 버렸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비록 바울을 조롱하고 비방하고 떠났어도 모두가 바울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베두로후서에서도 베드로는 바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고, 바울의 편지에서도 끝까지 바울을 챙겼던, 따랐던 많은 동료들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 때에 나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는 그런 바울의 솔직한 편지는 솔직하기 때문에 더욱 큰 감동을 줍니다. 


  • 바울의 삶에서 등장하는 마가와 디모데는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되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끝까지, 한결같이 바울의 곁에서 바울의 동력자로, 영적인 아들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마가는 잠시 잠깐의 고난을 피해 예수를 버리고, 바울을 버리고, 디모데를 보리고 간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 둘의 똑같이 쓰임받는 자가 됩니다. 디모데라고 더 크게 일하지 않고, 마가라고 부끄러움만 당하지 않습니다. 


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성령의 역사를 발견하게 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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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1장 1-2절


[딤후 1:1-딤후 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디모데후서 

바울의 가장 최후의 서신

네로의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을 때에, 로마에서 두 번째로 투옥되었을  때에 쓴 글. 

이 때의 역사적 정황은 바울이 두 번째로 투옥되면서 사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해 겨울을 넘기고 봄에 순교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형을 두 세달 앞 두고 쓴 글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남기는 유서와도 같은 성경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후세의 학자들도 디모데 후서를 바울이 디모데와 같은 영적 자녀들에게, 그리고 교회에 남긴 유서라고 인정을 합니다.  


1. 사도 바울 

우리는 바울을 부를 때에 흔히들 사도 바울이라고 부릅니다. 

사도라는 말은 초대 교회에서 열두 제자들에게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apospolos"라는 말로 파견된 자, 전달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자, 사신 등의 뜻이죠. 

그러다가 초대교회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뽑아 사도의 직함을 주었고 나중에 이 바울도 사도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인정받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 곡절과 반대가 있었을까?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직접 선택하여 함꼐 다녔던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의 제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생전에 만난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성에 가는 중에 예수를 만났다고 하나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해도 그것은 증인도, 증거도 없는 개인의 주장일 뿐입니다.

심지어 바울을 인도했던 권위자 바나바도, 당시 유명한 설교가였던 아볼로 같은 사람들까지도 감히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의 박해자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소개 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으로...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은..."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더군다나 그는 13번째 사도였습니다.  이것은 12라는 숫자의 의미를 알면 더욱 놀라운 주장입니다. 

예수님이 왜 12명의 제자를 뽑았을까? 많은 사람들은 12제자는 바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고 12지파를 통한 모든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12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자, 사도들은 이 12의 숫자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하면서 기도하고 제비 뽑아 맛디라를 새 사도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직분은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언하는 것이고 그 조건은 

열 두 제자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항상 함께 다니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열두 제자들과 같이 다닌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바나바와 나중에는 실라, 디모데등과 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닙니다. 


제자들로서는 바울이 아무리 사도라고 주장하고 다녀도 그것을 인정해줄만한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설교마다 글마다 자신을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럼 다른 사도들이 바울은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을까요? 


[벧후 3:15-벧후 3: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 베드로는 바울이 교회에게 쓴 편지들을 다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가리켜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지칭한다. 오히려 그의 글이 무식한 자들에게 좀 어려워서 해석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러서 이 글을 쓴다고 하면서 그의 글의 가치를 칭송한다. 뿐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그의 편지 시작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하면서 시작합니다. 

요한의 글이 예수의 사도된 요한은..이라고 시작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마태가, 다른 제자들의 글도 자신을 소개하면서 구태여 사도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요? 그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하필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아까 베드로 후서 3장 15절 16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겠지만 그는 바울의 글쓰는 형식을 빌어 구원에 대한 사실을 보충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사도 중의 사도요, 가장 큰 사도로서 인정받는 자가 지금 사도 중에 끼기 힘든 바울을 사랑하는 는 나의 형제라고 하면서 그의 글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하면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베드로 사도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오히려 열 두 사도 누구도 사도 라는 이름 붙이기에는 좀 어설프고 낯선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꼭 꼭 이름 앞에다가 사도 바울하고 불릴 정도로 사도의 대명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바울 자신이 이 '사도'라는 이름을 너무 너무 사랑하고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라는 이름의 뜻은 그냥 심부름꾼인데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이 이름을 너무 너무 사랑했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직분, 여러분의 사명을 이렇게 사랑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는 이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글을 마지막으로 디모데에게 남기면서도 늘 그래왔듯이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사명, 자신의 사도직을 말씀함으로서 편지글을 시작합니다. 


그는 스스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그가 받은 이 사도직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 즉 그 분의 피값으로 모든 과거의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죄에서부터 자신을 용서하시고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도, 사신, 심부름꾼이 된 나 바울....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나의 정체성을 무엇입니까? 

목사로서의 삶. 

난 이 직분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 감사한가? 자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성도라는 이름. 

그 이름 Saint. 성자, 성인...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 

너무 거리가 멀어서 낯설어버린 이름은 아니십니까?  성도라는 이름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한 적 있으십니까? 남들에게 성도라는 이름을 자랑하신 적 있으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시스터 액트 2: 가수가 너무나도 되고 싶은 소녀...

어느 날, 주인공 수녀가 그 여자에게 물어요. 

넌 무엇이 되고 싶니? 가수요, 그런데 될 수가 없어요. 저희 집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머니는 내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하시거든요...


그래서 포기할꺼니? 그럼 포기해....

그런데 넌 일어나자 마자 무슨 생각을 하니? 자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니? 

노래하는 것이요...

그럼 넌 이미 가수야. 노래하는 것을 그만큼 사랑하면 어떤 것도 널 방해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듣고 그 소녀는 어떤 장벽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래하는 곳으로 향합니다.


너무나도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되고 싶었던 베드로

너무나도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되고 싶었던 요한....

왕 이전에 찬양하는 자가 되고 싶었던 다윗....

그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바라는 모습대로 되었습니다. 


당신은 예수의 어떤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되고 싶은 간절한 그런 모습이 있습니까?

당신의 유언장에 당신은 당신의 이름 앞에 어떤 글귀를 넣고 싶으십니까? 

바울은 누가 봐도 사도의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로부터 위임받은 그 사도라는 직을 그 어떤 사도들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사랑했고, 그로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대표적인 사도가 되었습니다. 12라는 제도도, 관습도 무너뜨리고 당당히 이방인을 위한 열 세번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소명과, 사명을 찾으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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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6장 17-21절 "복을 복으로 누리는 삶"


신약의 가장 중심된 구원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면 구약의 가장 중심된 구원의 사건은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의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출애굽, 즉 애굽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사건입니다. 

왜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십니까? 그들이 세상의 종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시키는 대로 일해야 했고, 일하는 것 만큼 삯을 받지 못하였고,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도 누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현실에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노예의 삶이란 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출애굽의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열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드라마틱한 기적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노예로부터만 해방 되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풍요로운 삶을 살 줄로만 알았는데 광야 생활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연단의 과정을 만난 것입니다.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의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넉넉 잡고 한달이면 갈 수 있는 짧은 여정이었지만 세상의 노예로부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너무도 길고도 지루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중생 이후의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들은 신분적으로, 법적으로는 이미 애굽의 노예, 세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났지만 그들의 기질과 습관과 생활 방식은 여전히 노예 때의 모습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은 여전히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로 함께 하셨지만 40여년의 긴 여정 가운데 날마다 똑같이 보이는 하나님의 기적은 더 이상 기적으로도 보이질 않습니다.  

매일같이 부으시는 하나님의 기적이 지루하고 지겹다가 어느날 물이 부족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짜증내고 오히려 애굽이 좋았다고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나보다 하며 불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시선이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있었을 때의 것만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부으시는 만나도, 메추라기도 은혜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현재가 고달프면 과거는 언제나 행복했던 것 같고 현재는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들의 고향은 여전히 애굽이요, 세상이요, 물질에 있습니다. 


가나안 이후의 삶은 더욱 가관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경작하지도 아니한 땅을 얻게 되었고, 그들이 심지도 아니한 과실과 열매를 가졌습니다. 

날마다 감사하며, 예배해도 부족한 이 큰 변화에 그들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께 예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치 않아진 것입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으로부터 구해줄 구원자가 필요했고

광야에서는 지긋지긋한 연단의 때를 벗어날 길을 안내해줄 인도자가 필요했지만 

그들의 삶이 풍족해지자 더 이상 구원자도, 인도자도 필요없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스스로 왕된 삶,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 됩니다. 

복을 얻을 자격이 없는 자가 누릴 때의 결과를 사사기서를 비롯하여 이 후의 솔로몬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목적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 하여 애굽의 백성, 바로와 같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신약의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는 섬기러, 죽으러 왔는데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끊임없이 높아지려 합니다. 

바리새인들을 꺾고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왕노릇 하는 것을 꿈꿉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령이 임합니다. 

신약 시대의 가나안 시대가 임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임하고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이 떠나가고 병자가 치유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소망이 생기고 외식에 쪄들어 있던 외식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화된 자들 역시 또 다른 세상을 꿈꿉니다. 

이전의 권세자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이 된 나라를 꿈꿉니다. 

결국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우상 숭배를 통해 노예 상태가 되어 버리듯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자들 역시 세상을 꿈꾸다가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주신 바울의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은혜를 체험한, 그리고 신앙 안에서 세상의 복을 되찾은 그런 신앙인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이라는 것은 믿고 부자된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믿고 부자되어서 축복을 누리는 대신에 믿고 부자 되어 오히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이젠 필요없다 하고 다시금 돈을 의지하고 결국 세상의 노예가 되는 자들을 위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 마음을 높이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거만하지 말라. 목에 힘주지 말라. 높은 사람 행세치 말라. 
  •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은 불확실한 것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는 사람을 오히려 불확실한 것을 붙드는 자 취급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물질을 오히려 불확실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휙 불면 날아갈 것으로 묘사합니다. 

  •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풍족히 주시는...

우리에게 정말 즐거움을 주는 것을 아낌없이 부어주시는 분. 반대로 우리에게 정말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주시지 않을 수도 있는 분. 참 즐거움이 무엇인가? 

  •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 

-> 이것이 이 땅에서 복 주시는 이유. 

그런데 과연 이땅의 복을 추구하는 자들이 이렇게 사는가?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가? 너그러운가? 


-> 이렇게 사는 것이 다가올 시대를 위한 견고한 기초로서 우리 자신들에게 참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참 생명의 삶을 소유하는 것이다. 


롯데 신격호, 신동주, 신동빈... 

신동빈이 실세. 

신동주가 자기가 후계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를 재판에....


90넘은 아버지를 법정에 데리고 나와서 한 자녀는 아버지가 나에게 주었다. 

한 자녀는 아버지는 정상이 아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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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장 11-16절: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할 싸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늘 새벽예배 때 나눈 말씀이 마가복음 13장의 말씀인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2절 말씀) 


이스라엘 역사에 예루살렘에는 세 번의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첫째가 다윗이 서원하여 솔로몬때 완성된 솔로몬 성전이고, 두 번째가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와 지었던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두 번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초라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기억하고 그리던 성전은 솔로몬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바로 헤롯성전인데 이 헤롯성전은 로마로부터 파견되었던 헤롯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도 좀 사고 로마의 강력한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기 위해서 기원전 20년부터 착공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30여년이 더 지나 완성하게 되는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도 7년여의 공사기간이 들었지만 이 헤롯 성전은 옛 성전 터전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 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부친이 짓지 못한 염원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감사로서 지어진 성전이고, 스룹 바벨 성전이 다시 포로에서 돌아와 여러 부족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지은 헌신의 열매였다면 헤롯 성전은 헤롯에 의해, 로마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지어진 성전이라는 점에서 그 동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로마의 국력을 상징하는 그 외형은 가히 어마어마 했습니다. 이 성전은 거대하고 웅장한 대리석으로 건축되었고 기둥의 높이는 약 11미터 둘레는 세 사람 정도가 팔을 벌려야 안길 만큼의 큰 것으로 로마건축양식의 위용과 아름다움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바라보며 종교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은 점점 로마의 힘과 위용에 점점 동화되기 시작했고 그들이 주는 외적, 물질적인 영화에 신앙의 순수성이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편안히 모든 권력과 편안함을 누리다가 동방박사들이 와서 메시야의 나심을 선포해도 메시야를 반기지 못하고, 헤롯과 함께 어린아이들을 죽이는 데에 방관하거나 묵인하며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오직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 신앙생활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독사의 자식들아!"하며 타락해버린 그들의 신앙을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헤롯 성전이 주후 70년경, 네로 황제 때 불타게 되는데 디모데 전후서의 내용은 성전이 불타기 5-7년 전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경고했던 헤롯 성전이 어느덧 완공되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종교지도자들은 겉은 성전이지만 속은 로마의 힘, 세상의 힘으로 가득찬 건물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고, 십자가 없는, 희생없는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헤롯 성전 앞에서도, 지금 디모데에게도 예수와 바울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미혹"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미혹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고,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며, 정욕과 이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다는 자기 교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 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랑아!" 

무슨 소리입니까? 

디모데야 너 만큼은 권력 추구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라! 세상에 종노릇 하지 말아라. 

마치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 바알에게 무릎꿇고 죽임을 당하고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하듯이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만큼은 디모데야, 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라하면서 간곡히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피하여야 할 것과 따르고 취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3-10절까지의 것들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훈에서 떠나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고, 신앙을 통해서 부해지고자 하는 생각, 탐심으로 인한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빠지게 되는 것, 돈을 사랑하는 것.... 이런 것들을 피하라는 것이지요. 

이들이 결과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부패해지고, 언쟁과 비방이 끊이지 않고, 욕심에 떨어지고, 결국 근심에 휩싸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누가 더 근심이 많을까? 

우리는 풍족하면 근심이 없을 줄 아는데 조금만 삶에 대해 살펴보면 오히려 가진 자들이 근심하며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빠집니다. 

불면증, 우울증, 신경성 장애, 스트레스 장애...다 선진국형 병이지요. 


따라야 될 것은 무엇입니까? 

의- 세 가지 관계 (하나님, 이웃, 나) 

경건 - 자족하는 마음, 자족은 주어진 것을 족한 줄로 여기는 것이다. 만족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상황을 인정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경외, 두려워 하며 그 말씀을 사랑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이 경건이다. 

경건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의 길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데에 발생하는 내 희생, 내 연약함, 내 무기력함, 내 낮아짐을 족한 줄로 여기는 것이다. 

믿음 - 이 험한 세상, 세상이 왕노릇하는 것과 같은 세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 확신하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사랑- 복음의 진수, 헉헉대며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견디는 것 

인내, 온유- 신앙은 파도 위의 평안이다.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마냥 즐겁고 평안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 영생을 가리고 세상권세로 유혹하는 사탄의 세력과 십자가를 통해 하늘나라 영생의 삶으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와의 전쟁이요, 싸움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믿는 다고 뭐가 나오냐? 믿음 생활의 결과가 고작 고거냐, 나에게 절하면 세상 영광을 주리라..하며 온갖 감언이설로 믿는 자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말씀 없이, 기도 없이는 누구라도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시기심이 들어오면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그 사람만 보이고, (사울) 

탐욕이 들어오면 온 세상을 다 가져도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선악과) 

근심이 몰려 오면 두려움에 떨며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엘리야) 


이러한 사탄의 싸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 나라를 소유한 자만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오직 영생을 소유한 자, 이 땅에 미련을 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자만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하며 폭풍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만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기약이 이르면, 때가 되면..하나님이 그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이시며, 유일하신 주관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빛에 거하시며 오직 그에게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사랑하는 로고스 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아!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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