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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 3장 1-12절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 


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의 현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라는 말은 마지막 때에 이런 것들로 끔직한 시기가 올 것이다는 것입니다. 


2절은 여러가지 일들이 열거되어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두가지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구절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결과 스스로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거룩하지 아니하다. 


영어로 보면 그 의미가 더 명확해 집니다. 

"People will be a lovers of themselves, lovers of money" 

자기의 연인이 되고 돈의 연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연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을 정말 사랑해서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결국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따라가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태초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결국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연인을 주어 서로 사랑하도록, 타인을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게 함으로 자연 만물을 사랑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나를 넘어 사랑하도록 창조된 것이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유혹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만물을 다스렸던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지고, 서로를 탓하는 자가 되었으며 만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섬기는 자로 변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자신만을 향하게 되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닫힌 자신은 교만하고, 아담과 하와가 그러하듯 서로를 탓하며 비방하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듯, 부모를 거역하고, 무엇을 주어도 감사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거룩하지 못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사랑이 흘러 그 사랑이 나를 적시고 내 주위를 적시는데 반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로 자신을 사랑하다 보니까 비뚤어진 나, 왜곡된 나를 사랑함으로인해 온갖 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


돈도 마찬가지 입니다. 돈을 누구를 위해 만든 것입니까? 물물 교환을 통해 생활 하던 원시 사회에서 규모가 넓어지고, 품목이 다양해지면서 가치를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화폐, 돈입니다. 인간을 위한 편의도구인 것이죠. 그런데 이젠 돈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사랑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돈을 사랑하니 돈의 특성을 닮게 됩니다. 


돈은 스스로를 자랑합니다. 자랑은 곧 교만입니다. 돈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무정하고, 복수하기를 좋아하고, 돈이 많으면 절제하지 못하게 하고, 돈은 수없이 배신하고, 조급하며 자만하고 쾌락을 추구합니다. 다 돈의 특성입니다. 


돈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의지하고 스스로 세우려고 합니다. 인류의 바벨탑이 다름아닌 물질문명으로 대변되는 돈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 (딤전 6:10)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마 6:24) 

- 씨뿌리는 자의 비유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 13:22) 

- 클레멘트: 탐욕이 심해지면 하늘 나라에 관한 생각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재물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요, 난 다만 청지기이다"는 의식을 가지라. 


사도바울 : 

[빌 4:11-빌 4: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것이 믿는 자의 표상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아무리 경건한 모양을 갖추었다 하여도 그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단언합니다. 

왜내하면 경건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기도하고, 수없이 예배해도, 늘 채우지 못해 목말라 하고 하나님을 자신이 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에는 에브라임의 미가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 우상의 산당을 만들어 놓고 레위 사람 제사장을 고용해 놓고 

(삿 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께 복받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들은 배워도 배워도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배움은 수단이 아니라 사랑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주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얀네와 앰브레는 모세가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모세가 이적을 행하면 그 이적을 따라했던 애굽의 마술사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를 흉내낼 순 있지만 그 기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탄의 자녀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진리의 대적자입니다. 

마지막 때에 표적을 보며 우왕좌왕 하는 자들은 결국 이들의 꾀임에 빠질 것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결국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심판입니다. 


10절부터는 이러한 세상에 대한 바울의 고백이요, 유언이며 당부입니다. 

무엇입니까?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글을 남기면서 마지막 세대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가 살아온 삶을 증거합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나의 교훈과....

넌 나의 가르침을 알고 있느냐? 기억하느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녀들과 믿음의 후배들에게 남길 수 있는 최고의 것...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영성을 공부하면서...가장 아쉬었던 것. 

초대교회 때부터 영성의 인물들을 공부하면 누구하면 가난의 영성, 누구 하면 순교의 영성, 누구 하면 섬김의 영성이 떠오르는데 한국의 목사님들을 보면 누구 하면 어떤 교회 목사....교회가 떠오르지 그 가르침에 관해서는 그 목사님이 다 그 목사님 같다. 그나마 떠오르는 분이 제자사역에 헌신 하신 옥한음 목사님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를 기억할 때에 가장 먼저 나의 가르침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가장 남기고 싶은 정승구 목사의 가르침 - 비록 사도 요한의 말씀을 따른 것이지만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곧 주님의 유언이요, 

예수 닮는 삶. 그 안에 십자가와 섬김의 삶이 모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안에 저의 신학과 영성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외적인 가르침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침의 완성은 그 행함입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가르침은 잔소리이고 헛된 교훈입니다. 

바울은 가르친 대로 살고자 했습니다. 

십자가를 외치며 십자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 숨겨져 있는 숨의 의향, 그의 동기, 목적까지도 네가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 속에서 이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기 위해 그가 핍박받으며 오래 참고 끝까지 주님의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그 것을 통해 이 세대와 다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 말씀은 사도바울의 삶의 결론이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삶의 결과였고, 그 분의 제자들의 삶의 결과 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땅에서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핍박받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보다 주님을,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사랑함으로 거룩하고 고통 중에서도 감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디모데후서 2장 14-26절 (금그릇이냐, 깨끗한 그릇이냐?)


14절 -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업속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그들이 누구인가? 앞의 10절에 나오는 "그들"과 같다. 내가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그 그들은 누구인가? 바울의 삶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 그가 사도로 임명되어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받았다는 사실, 바울이 쓴 여러 글들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강조하는...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군사로 부름받은 자들이고 복음을 위해 고난도 달게 받을 것을 외치는 바울의 신앙, 결국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바울을 비난하며 그의 신앙과 삶을 송두리째 비난하는 그들....


달리 말하면 그들은 누구인가? 십자가와 부활 대신에 영광과 축복의 신앙으로만 받아들이려는 자들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졌으니 이제 우리는 고난 없는 영광만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종이나 군사가 아닌 자녀의 자격만을 외치는 자들이다.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 반대편에서 여전히 영광의 신앙, 성공의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신앙이 잘못인가?


아니다. 분명 신앙 안에는 축복이 있고 풍요로움이 있고, 영, 혼, 육의 온전한 구원이 있다. 

모든 신자가 한 가지 목적과 한 가지 모양의 신앙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어떤 자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지만 평생 고난의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도 있다. 어떤 자들은 정말 별 고생 않고 축복을 맘껏 누리다가 사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에도 마찬가지다. 야곱과 다윗처럼 인간사 모든 고생을 다 해본 자들이 있는가하면 솔로몬처럼 타고난 축복을 누리고 간 사람들도 있다. 좌우로 나뉘듯이 축복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은 신앙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축복의 신앙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많다. 

자칫 성공과 축복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유혹에 빠진다. 

고통 중에 죄악을 짓는 자들은 거의 없다. 죄는 늘 성공과 축복 속에서 유혹된다. 

가나안이 그랬고 다윗도, 솔로몬도 편안할 때에 범죄했다. 

예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부를 쫓는 사람은 부를 위해 하나님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신앙인들도 구원의 기회가 있기에 다투지 말라고 한다. 성공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이 서로 다투는 것은 결국 주위에서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그대신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으라'고 당부한다. 

영문을 의역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인정함을 받은 자로서 최선을 다해 너 자신을 보이라. 나타내라, 드리라.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 일꾼으로서 진리의 말씀을 적절하고 바르게 다루는 자가 되라." 

진리의 말씀을 바르고 적절하게 다루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 편의대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살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 법-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하면 법의 태두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못된 짓을 할 수 있다. 말씀도 자기 이익을 위해 변명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자기 이익을 위해 다루다가 아얘 이단으로 빠진 경우를 후메내오와 빌레도를 예를 들어 말한다. 이단은 시작은 같은데 끝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얘 처음부터 다르면 그것은 사이비이거나 다른 종교인데 처음 시작은 같은데 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시작되었는데 어느덧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교회를 트집잡는 일만 저지른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오히려 삽시간에 온 교회에 퍼진다. 바른 것은 잘 퍼지지 않는데 바르지 못한 교훈은 잘도 퍼져 나간다.  

처음에 경건하지 아니한 말로서 사람들을 현혹하다가 결국은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한 길로 나아간다.  

바울은 그들의 활동을 "악성종양"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미 진리에서 떠났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고 선포한다.   

그들은 진리의 선에서 이미 떠난 것이다.  


그런데 19절에서 이단에 대한 위협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무엇이라 증거하나?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19절) 

무슨 말입니까? 이단들의 유혹과 흔듦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기초는 견고히 서있다. 인침으로 봉인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미 누가 그의 백성인지를 아신다 

또 무엇이라 말하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는 사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 유명한 깨끗한 그릇에 관한 이야기이다.  


큰 집에는 - 큰 집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주인 되신 집이다. 하늘나라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세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이다. 그릇이라고 표현된 이 단어는 articles, 즉 재료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금과 은도 가득하고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릇 중에는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말씀한다. 귀하고 천하게의 뜻은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천한 목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우리는 당연히 아, 금그릇, 은그릇은 귀하게 쓰이고 나무그릇, 질그릇은 천하게 쓰이겠구나 생각하겠지만 21절은 재료에 상관없이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되면 귀히 쓴느 그릇이 되어 거룩하며, 주인에게 유용하며 어느 좋은 목적을 위해서도 준비되어 지는 그릇이 된다고 말씀한다. 

이런 것에서라는 말은 바로 잎의 구절, 천한 용도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을 깨끗이 하면"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은 금 그릇, 은 그릇은 귀한 용도로 고상하게 쓰여지고, 나무그릇이나 질그릇은 하찮은 용도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금 그릇이나 은 그릇, 나무그릇이나 질그릇, 그 재료에 상관없이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내가 내 재료가, 내 달란트가, 내 능력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능력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를 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방점은 오히려 하나님은 질그릇과도 같은 나무그릇과도 같은 자들을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의 중심으로 믿는가? 교회에서 너무나도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만 진심으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로 사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실 때에도 독사의 자식들아 하시면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가 왜 힘든가? 


사람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까지 바라고 행해왔던 교육은 언제나 “큰 그릇이 되게 하는 교육” “금 그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기 떄문이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만큼 1등을 좋아하고 최고를 좋아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올림픽 나가서도 금메달 아니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선 친구와도 경쟁해야 하고 늘 남을 넘어서도록 교육받아 왔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남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교회에서조차 상투적인 말이지 실재 삶의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그릇 되라고 직간접적인 강요를 당해 왔다. 

몇달 전 서울대 대학생이 아무리 공부해도 금수저를 달고 태어난 자들을 이길 수 없다 며 비관하며 자살한 사건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보여 준다. 

 
그런데 성경은 금그릇이 되어도 천히 쓰임받는 자가 될 수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이 되어도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고 증거한다. 

그릇이 좋다는 것은 능력이 많다는 것이다. 스펙이 좋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재료가 좋다는 것이다. 금수저를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라 할지라도 천한 목적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디모데에게 바울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말한다. 

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하는가? 결국 정욕이, 욕심이, 탐욕이 깨끗함 보다는 높은 것, 즐거운 것, 화려한 것을 탐하기 때문이다. 

남과 이것이 옳다 하고 다루거나 논쟁하지 말고 묵묵히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것이 고상한 삶이요, 주인에게 쓰임받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온유함으로 가르쳐서 마귀에 올무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앞에 사로 잡힌 자가 되어 그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을 짓는 도구는 오직 조각목이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로 만들것으로 쪼개지기 쉽고 가시가 많은 나무이다. 

하나님은 이 조각목으로 성막을 짓게 하셨다. 


그런데 이 조각목을 가다듬어 금테를 두르고, 은을 둘러 쌓아 성전의 도구로 삼았다. 성령을 입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치시어 사용하신 것이다. 

다윗은 질그릇이었지만 하나님께 귀히 쓰임받는 그릇이 되었다. 

사울은 금그릇이었지만 결국 천하게 쓰임받는, 아니 버림받는 존재가 되었다. 


금그릇이 될 것인가? 꺠끗한 그릇이 될 것인가? 


확실히 우리의 마음을 정해야 할 것이다. 주인에게 유용히 쓰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그리스도인의 갈 길 (디모데후서 2장 1-13절) 


요즘 성도들의 한결 같은 소망은 참 교회, 참 목회자, 참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좀 들어갔을 만하면 쏟아지는 교회의 문제들, 목회자들의 문제들이 방송이나 신문 지상에 오르락 내리락 할 때 마다 신앙의 회의를 느끼며 안타까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모델로서 초대교회를 말합니다. 초대교회같은 교회를 다니고 싶어합니다. 

예수를 직접 본 사람들이 말씀을 증거하는 교회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공동체적인 성령을 체험했던 교회. 

베드로나 야고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신앙의 영웅들이 말씀을 증거하며 가르쳤던 교회....

그런 곳에 있으면 우리의 신앙도 잘 자랄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초대교회는 신앙의 문제가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아주 작은 사건으로부터 인해 군열이 가게 됩니다.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를 돕는 문제로 인해 사도들이 골치를 썪게 됩니다. 

이래도 한 쪽에서는 말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그러한 물질 문제가 얼마나 교회를 괴롭혀 왔는가를 보여주는 예를 보여줍니다. 


결국 말씀과 성령, 표적과 이적이 많았던 초대교회도 몇몇 물질 문제를 통해서 균열이 되다가 이를 틈다 여러 이단 사상들과 내외부적 탄압으로 인해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는 어떠합니까?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 볼 2장 23절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딤후 3:2-7]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여 남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으며 거룩하지도 않으며...

무정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메마르다는 것입니다. 가시인생이라 건들면 욱 하고 일어나고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무인하니....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고.....그런 여자들은 항상 배우는 것 같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무엇입니까? 자기 욕심에 이끌려 살다가 결국 구원얻지 못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 이랬습니다. 


이 모습을 지금의 교회에 적용한다고 해도 어느 말씀 하나 속하지 않는 말씀이 있을까요?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상적인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시작 때 부터 돈문제, 이단 문제, 여자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늘 말썽이었고, 지금까지도 이것과 싸워오고 있고,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싸워 나가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낭만주의 낭만주의....다른 집을 바라보면서 참 화목하겠다. 행복하겠다...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보면 현실주의.... 

낭만주의 VS 현실주의


그러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목회자에게 이것 저것 다 경험한 목회자인 바울이 당부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현실에 무릎꿇지 말아라. 다른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든 따라가지 말아라. 네 신앙을 단단히 하라! 

그리고 잃지 말아야 하는 것"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비밀이 아니다. 복음은 넓은 곳에 선포된 공언이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여기까지가 복음의 사명입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단단히 서서 주위에 흔들리거나 휩쓸리지 않고

다른 충성된 자, 신실한 자를 찾아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세우는 데 까지 하면 통로로서의 내 사명은 완수되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로만 있어서도 안되고 가르치는 자로서만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내가 잘 배워 남을 가르쳐 또 그가 가르치는 데까지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믿음의 통로, 복음의 통로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이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오해도 받고, 배신도 당하며, 모욕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군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군사로 부름받은 자입니다. 병사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 생활이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가 좋아서 군대가는 사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저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말로는 예수를 주님이라 하면서 실재로는 나의 심부름꾼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낯추었습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흔들리고 불평이 들어올 때마다 예수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위해 사는지, 예수가 날 위해 사는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매인 것에 낙망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여도 복음은 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국에서 연거퍼 진 후에 기자 회견에서 그가 한 말, 나 이세돌이 진 것이지 절대로 인간이 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게임에서 결국 알파고를 이겼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고난받고 실패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복음의 실패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에 매인자 였지 자신에 매인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에 매여 있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이 않좋으면 남이 은혜를 받던 안받던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기뻐야지 주님도 생각하지 내가 속상하면 주님의 마음은 항상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 비록 부족하고 넘어지고, 떠나가는 사람들 투성이었지만 그들도 구원받을 자로서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힘들어도 그 힘듦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기쁘게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조금 내 기준에 모자라면 얼마나 깎아 내리기 좋아합니까? 

저 사람은 구원도 못받을 사람, 아애 사탄취급 할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를 괴롭히고,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어도 결코 그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미쁘심, 변함없으심, 완전하심에 근거한 믿음이었습니다 .

그 사람들의 현재 상황, 자신의 노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다 도망친 제자들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처럼 말입니다.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실한 사명자, 충성된 일꾼은 어느 교회든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디모데와 같은 충성된 일꾼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런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 돈, 섹스, 권력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을 닮고 따라가는 그런 성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아름다운 것을 지키는 믿음 (딤후 1장 9-18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입니다. 사형을 한 해 앞둔 시점에 쓴 글입니다. 

사형을 앞둔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디모데에게 권한 권면의 편지에서 눈에 띄는 몇가지 단어들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7절) -무엇을 사망을, 고난을...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8절)


그에게 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왜 그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빌립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 죽어도 괜찮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성도들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 자신은 산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확신마져 없습니다. 

진짜 사망이 임박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믿음 안에서 그가 양육하고 가르쳐 왔던 자들은 어떻게 될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괜찮다가도 불안이 엄습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덧씌워지게 되면 

마음은 곤두박질 하게 되고 꺾이게 된다. 

한 번 마음이 꺾이게 되면 그 마음을 추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이렇게 연약하다. 


그렇지만 그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기도와 말씀 속에서 두려워 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것이 그에겐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의 체험이었다. 

마음이 요동칠 때마다

내 마음에 파도가 일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Key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것이다. 


그의 소명은 그의 열심을 따라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기 소명의 확신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여러 환경이 그를 흔들 때마다 이 소명의식은 그를 더욱 요동치 않고 무너지지 않게 하는 Basement였고 Foundation이었다. 


그는 이방인을 구원하여 그들의 땅에 교회를 세우는 것, 그것을 위해 당하는 모든 핍박과 환난을 엉원적부터 미리 정해져있었던,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주신 자신의 사명으로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그의 믿음의 기초였다. 


그는 상황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자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요동치는 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믿음은 흔들리는 상황을 흔들리지 않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부르신 소명을 확신하는 것이다. 


  •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아얘 믿음이 변해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부겔로: 그의 이름의 뜻은 망명자였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부겔로는 고난의 때에 세상으로 망명했다. 바울을 바라보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의 삶을 떠났다. 

허모게네: 그 이름의 뜻은 허메에게 난 자, 허메는 바로 헬라의 신이었습니다. 
이전에 루스드라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바나바는 스쓰로, 바울은 허메로 불리면서 제사를 드리려 했던 바로 그 신이다. 


그들은 고난을 떠나 세상으로, 세상의 신으로 망명했다. 그들과 같이 아시아에 있던 많은 신자들이 바울의 고난을 보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세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메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부터 그를 자주 찾아와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했다.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빌립보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그는 열심히 봉사했다. 


오네시보로는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가 아닙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도망나왔다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자이지만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교인으로서 끝까지 바울을 돕고 함께 했던 신실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때에 주의 긍휼을 입게 해 달라고 그들 위해 중보하며 디모데에게도 부탁하고 있다.) 


13-14절은 고난의 때를 살아가는 디모데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바울의 모든 신앙의 간절함이 담긴 유언의 말씀이다. 


[딤후 1:13-딤후 1: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의 삶을 본받는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의 말을 빌자면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가 나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게 주신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크게는 내게 주신 사명이고 작게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 속에서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cf) 로고스 VS 레마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성도님들께 흔하게 듣는 말. 

이단들도 많고, 욕먹는 교회, 욕먹는 목사들이 하도 많다 보니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참다운 믿음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바른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가장 고전적인 설명을 하자면 

진, 선, 미입니다. 

참다운 것이 곧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 곧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으로, 그리고 쉽게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거꾸로 참다운 것이 아닌 것은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불륜의 사랑을 저질르면서 사랑때문에...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진리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올바른 관계 안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방법이 옳지 못한데 결과만 좋다고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결과만 좋으면 좋다고 합니다. 

성경은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난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나 방법과 결과가, 동기와 결과가 함께 선한 것이 참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과 능력있는 사람을 나눕니다. 

착해도 능력없으면 버림받고, 좀 들 착해도 능력있으면 대접받습니다. 

나쁜 님자 신드롬이라고 거칠고, 좀 나빠도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이 매력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선한 것이 곧 능력이고,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지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도, 가정도, 교회도 진선미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한 신학교에서 대학생 신학생들 수련회 하는데 연세대 신학과 총장 출신인 한 목사님이 와서 목사가 되면 권력과 명예에 물질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설교했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항의를 받은 사실이 기독교 신문에 나왔습니다. 

 오정현이니 전병욱이니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끊임없이 거짓에 거짓을 일삼는 목사들의 교회가 오히려 크게 부흥되는 현실을 봅니다. 

 어쩔 땐 막 분노가 치밀기도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것은 성전의 크기도 성도의 수도 아닙니다. 

 정말 바른 신학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상황에, 감정에 맞춘 신앙이 아닌, 말씀에, 소명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곧 믿는 자의 능력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