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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 - 사도행전 3장 1-10절

 

1. 배걍

  • 나면서부터 못걷게 딘 사람,, 바디메오- 소경,

- 누가 더 불행한 사람인가? 도진개진이겠지만 차라리 못보면 상상이라도 하면서 자기 세계를 살 수 있지만 보면서도 따라갈 수 없는 것. 보면서도 어울릴 수 없는 것

- 4장 22절에 보니까 그는 40세쯤 된 사람.

"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인생의 성취를 누리는 때, 사회의 지도층, 능력, 권세, 힘이 중시되는 나이

-그런데 그의 현실은 앉은뱅이- 무기력과 무능력의 상징

 

  • 성전 미문 (the temple gate called Beautiful) - 8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으로 성전 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현재는 Golden Gate -항금문으로 불리며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야만이 열수 있다고 하여 굳게 닫혀져 있는 문

이 미문을 직접 눈으로 본 교회 역사가 요세푸스- 높이가 23미터로 웅장하며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된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문이었다고 소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매일 이 곳에 와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성전 문이 주는 화려함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잊어버리고 자신도 그 화려함의 일부분이라고 혼자 스스로 위로하는,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도 그들의 일부분으로의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처지는 구걸하는 자, 앉은뱅이, 날마다 집에 오면 변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이 사람은 미래의 계획도, 현재의 즐거움도, 과거에 이룩해 놓은 업적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그저 밥먹고 살기 위해 오늘도 성전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 먹을 양식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와서 앉아 있는데, 남들의 은혜 받은 이야기, 구원의 소식들도 듣고 있는데, 정작 자기랑은 상관이 없는, 집에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한 없이 초라해지고 외로워지는? 성전 문 앞의 앉은뱅이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 비전도, 꿈도, 소망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2. 성전과 이 앉은뱅이 . 마다 성전 문에는 앉아 있지만 사실 성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 성전 문에는 아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보지만 그 자신은 성전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자.
  • 무언가 도움을 바라고 성전 문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성전에 들어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지 은혜 받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찌꺼기 은혜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자
  • 날마다 성전 앞에 있지만 성전 안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저 성전에서 나오는 자들을 보며 저 곳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그들이 주는 도움만을 살아가는 사람들? 불신자도 아니고 기독자도 아니어서 세상에서도 시달리고 교회 안에서도 그 은혜를 도무지 못누리는 자?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church Goer들의 모습

 

-> 교회 문 앞을 기웃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안, 신앙 안,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성전과 세상의 경계선 상에서 서있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비슷한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성전 깊이 들어와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3. 베드로와 요한

  • 이렇게 성전 문 앞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은혜 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와 달리 성전을 향해 어김없이 올라가는 자, 성전 안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자 -베드로와 요한
  • 앞서 2장에서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파하여 3000명의 사람들이 세례 받도록 역사를 발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간다.
  •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 어느 날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다 -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 영성은 곧 규칙이다.

 

목사로서 가장 감사한 것 - 예배를 범하지 않는 것

군대에서의 훈련으로 인한 주일예배 불참 - 하나님께 간구 -> 일반대학을 다니는 사병으로 신학대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종병이 된 것

 

4.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리되 우리를 보라 하니

  •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 이전에 예수께서 그들이 고기 낚는 것을 보시고 멈추어 서서 그들을 주목하여 보고 ?나를 따르라?해서 제자가 되었던 자
  • 예수님이 그들을 주목하여 보고 제자를 삼았는데 그런 베드로와 요한이 오늘 늘 오르던 성전 문앞에서 늘 앉아서 구걸하던 자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멈추어서서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 성육신, 그 메시야가 우리를 사랑하사 멈추어 서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리신 사건 - 십자가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향해서 멈추어 서셨듯이 그 분의 은혜를 받는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분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멈추어 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분주한 마음을 뒤로하고 골방에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해 멈추어 서는 의식이 예배이고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멈출 때에 은혜가 임합니다
  • 세상에서는 어부요, 배우지 못한 그저 그랬던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셔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 처럼 그들은 성전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멈추어서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날마다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하나님께서 ?그 날? 보게 하신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은혜 안에 깊이 들어가려고 성전에 들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멈추어 ?하나님이 택한 어떤 사람?을 맡기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라 묵상하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맡기듯,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양들을 치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백성을 맡기시듯 날마다 기도에 힘쓰며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희망없이 날마다 구걸하며 살아가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시고 그에게 예수님의 손을 내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 앉은뱅이를 외면하고 지나감

소수의 사람- 앉은뱅이가 원하는 것? 은과 금을 쥐어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눈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전해 줌. 나사렛 예수의 이름.

 

5. 우리를 보라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 금과 은: (오늘 만을 위해 필요한 것) VS 예수의 이름 (영원히 필요한 것, 그를 일으켜 세울고 그에게 영생을 주는 것)
  • 당신은 무엇을 위해 예수를 믿는가? 금과 은을 구걸하고 있지 않은가?

 

6.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1.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2절)
  •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사람들? 매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를 메고 성전미문까지 데리고 오는 사람들?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없으면 구원도 없었다. 그들의 헌신과 매일 매일의 수고가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만남을 가져다 주었고 성령의 역사를 이끌었다.
  1. 요한

복음서에서 수제자를 놓고 베드로와 경쟁하던 자. 그런데 앞선 2장의 설교 장면에서도 이 곳 앉은뱅이와의, 장면에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동행한다. 그가 성전에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고 그가 설교 할 때 함께 중보 고 그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그를 보좌한다.

두 사람이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일으키면 오히려 잡음이 생긴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가운데 나타난다. 누군가 일을 하면 누군가는 뒤에서 도와 줘야 한다. 누군가 앞에서 설교하면 누군가는 그 설교에 역사가 임하도록 뒤에서 기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같이 설교하면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 베드로가 일할 때 요한은 침묵가운데 그가 더 일하도록 그와 함께 하고, 함께 기도해준다. 동역자 없이 하나님의 역사 없다. 바울이 일하도록 바나바가 그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고 함께 했다. 어찌 보면 요한의 역할이 베드로의 역할 보다 더 힘이 들다. 그래서 요한은 가장 끝까지 살아남아 초대교회의 위대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고 요한 계시록과 요한서신을 남겨 가장 영적이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7.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절)

  1. 서는 종교- 십자가에서 조차 서 계신 예수님. 다른 종교의 신- 앉아서 섬김을 받는 신. 그리스도 자신도 서서 섬기고 남들도 서게 하는 예수.
  2.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 드디어 성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맛본다. 그 기쁨은 우리를 뛰게하는 기쁨이고 저절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기쁨이다.
  • 베드로와 같이 날마다 더 큰 은혜,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해서 꾸준히, 날마다 영적인 경건생활에 힘써야 한다.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결코 후퇴가 없다. 게으르지 않는다. 또한 멈추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주위를 살펴야 한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까 늘 깨어 있고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살펴야 한다.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사람들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소리 없이 메고 오는 것을 감당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요한처럼 성숙되게 대로는 잠잠히, 때로는 뒤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누군가를 통해 불타오르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베드로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를 만난 사람 3 - 나다나엘 (요 1:24-31)

 

나다나엘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이 1장과 21장에 걸쳐서 나옵니다.

 

  • 시몬 베드로디두모라 하는 도마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요21:2).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은 바돌로메와 나다나엘을 한 인물로 본다.

바돌로메는 돌로메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이다.

1.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이자 사색의 장소였다. . 아주 극소수의 귀족들만 서재가 있었으므로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좀 더 나아가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무화과 나무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참 삶의 터전인 성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곧 당시의 참 신앙의 열매는 없고 입사귀만 무성한 예루살렘 교회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짜 나무이건, 혹은 성전에서건 나다나엘은 무엇을 하였기에 예수님께서 그를 가리켜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다고 말씀하실까?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발립과 나다나엘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간사한 것이라는 것은 계산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에 익숙했던 나다나엘은 빌립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했지만 그 방법과 동기에 있어서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다윗이 그랬듯이, 모세가 그랬듯이 철저히 고독한 공간에서 말씀과의 대면을 사모했다.

 

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나다나엘은 조용히 묵상하는 자였으나 회의론자였다.

성경을 묵상했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지역 전체는 정통 유대인들에 의해 더러움에 물들어 있었다. 그곳은 “이방의 갈릴리”(시 9:1~2)라 불렸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흑암 가운데 거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나

 

(마 2: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요 7:52)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상반되는 두 구절 - 그러나 현재 구약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말씀들...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말씀,

어쩌면 전통적이거나 관습적, 편견으로 자리잡은 것들....

그래서 이 말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이 갈릴리 지방을 조롱할 때 쓰던 관용적 표현이었다. 나다나엘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는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의 초대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한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빌립이 초애에 회의적이었던 그가 결국 빌립을 따라 예수께 나와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호기심 때문이건, 빌립에 대한 우정때문이건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께 온다.

 

차분하고 내면중심적이지만 좀 부정적인, 회의적인 자에게 주님이 부르신 방법

 

2.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1:47)

(롬 9:6)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롬 9:8)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참 이스라엘에 속한 나다나엘의 마음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위선이 없었고, 속됨이 없었다. 그는 진실히 하나님을 사모했고, 메시야를 기다렸다.

 

간사함- 헤롯왕, 예루살렘에 속한 제사장들.

동방박사로부터 메시야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이 행한 것은 메시야를 찾아 죽이고자 한 것. 왜?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그들은 겉으로는 메시야를 믿는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성공,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그것을 위해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그것도 예루살렘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왕이요, 그들 자신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다나엘는 참 하나님, 참 메시야를 갈구했다.

그를 인정하고 칭찬하시면서 그의 속을 치유하신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 어느 제자도 이토록 따뜻하게 주님이 부르신 자가 있는가?

 

그러면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너를 보았다.

 

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너를 부른 것은 빌립이 아니라 나다.

내가 너를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나다나엘은

(요 1: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어느 누구보다 먼저 주님이 하나님이 아들이심과 왕되심을 고백하게 된다.

말씀을 통해 고대하던 자가 바로 당신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50-5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의 순교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 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짔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보는 나다나엘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 2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4-26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ㄱ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l  유대 역사가 바벨론에서 귀환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는 지금의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c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29: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

 

,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에서, (11, 15, 19), 주에서 선지자로 (19),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공동체어떤 죄인도 받아들이는 공동체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까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를 만난 사람 1 -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15-17절)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려 합니다. 여러 인물들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친밀한 만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 중, 그리고 인류의 역사의 모든 일등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가장 중요하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 바리새인 관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하나님의 본심이 그대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손수 지으신, 창조하신 보시기 좋았던 완전한 세상. 

평화와 풍요와 사랑과 열매가 풍성했던 세상

그런데 지금은 어떤 세상? 

죄로 부패하고, 서로 죽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 서로 서로가,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만물이 서로 원수된 세상.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패하고 어둔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유일무이한 자신을 내어 주신 것, 그 분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 함께 거한 것. 

드른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저를 믿는 자마다"는 제한과 무한이 함께 있는 구절-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가... 이방인이나 유대인 구별없이, 어느 누구나... 

   그러나 동시에 오직 그를 믿을 때에만... 그를 영접할 때에만... 그를 통해서 구원하시겠다는 유일한 조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꼐로 올라갈 자가 없다" 


3장 1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의 지도자라.”

즉, 다시말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말은 공의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고 또한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니고데모는 학자였으며, 귀족이었으며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인 동시에 부자였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을,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찾아 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주님께 왔다는 것입니다. . 


왜 니고데모는 밤 늦게 은밀히 예수를 찾아왔던 것일까요? 왜 그 많은 명성과 존경과 권위와 부를 획득한 니고데모는 만약 찾아온 것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까요.. 밤에 그를 잠 못 들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도달할 수 없고 그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진 학식으로도, 돈으로도, 명예로도 할 수 없는 한계에 빠져있는 단지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리고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나아만- 사마리아 여인...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평안이 없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하늘나라를 소망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선지자나 예언자나 혹은 메시야가 아닐까,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탈출 시켜 줄 분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알지도 못해고 구하지도 못했던 천국을, 영생을, 생명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건,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해서, 주님이 필요해서 여러 위험을 무릎쓰고 이 자리에서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아뢴다면 주님께서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2)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입니까?” 하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가 기대하는 것 - 이스라엘의 회복, 자신이 처한 곤경, 압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나라 - 하나님 나라, 영생,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 언제나 생명이 공급되는 나라. 


그러나 육신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듭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거듭나는 것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단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그만한 지위에 있고, 남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위치에 있고 성경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안타까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책망까지 하십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 그가 기대하는 나라는 그가 속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회복되고, 그 나라의 백성이 회복되고, 자신의 신분도 완전히 회복되는 육적인 믿음, 땅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적으로 그는 아직도 목마르고, 배고픈 심령이 가난한 자이지만 왜 자신이 가난한지, 왜 자신이 갈급한지 그 근본 원인조차 알지를 못합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을 원했고, 또한 육적인 구원을, 평안을 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유대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분이라면 내 병든 몸을 치유하시겠지, 내 허전한 마음의 위로가 되시겠지, 내 가난을 몰아내어 주시겠지. 우리 민족을 구출해 주시겠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 이러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을 가까이서 따랐던 열 두 제자들 역시 그러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예수님께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라도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줄 알려 주십니다. . 


니고데모는 신실하고 겸손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도 땅의 믿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세상의 복과 연결 시켜서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구약 시대 때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인간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이 임하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이 구약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래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욥도 당대의 부자였고 다윗도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말씀을 잘 지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900살 이상 산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일찍 죽는 사람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잘 안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부자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부자되었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오래 살았더라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지켜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받고 성령이 임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더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비로서 흡족한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큰 축복은 십자가 지는 삶으로, 순교로서 임합니다. 땅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자신의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혹은 신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 못배우고, 가난하고, 처량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성령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역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복은 성령의 복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주제로 삼습니다. 구약의 복은 이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이땅에서 복받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복은 이 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복과 구약의 복이 확 떨어져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팔복에서 보듯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 야생말이 길들여지는 것, 순종하는 삶. 

말씀에 순종하면 구약시대때와 똑같이 땅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결과로, 궁극적인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팔복을 끝맺고 있습니다. 복의 복, 복의 결과는 이땅에서 복음 때문에 핍박받더라도 하늘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땅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목사들도 땅의 복을 얘기해야만 신자들이 오기 때문에 땅의 복을 말하는 목자들로 넘쳐납니다. 아니 그들 자신이 땅의 복을 사모하면서 교회를 통해서도 큰 성전, 화려한 성전으로서 자신의 업적을 이루려 합니다. 니고데모도 땅의 복을 사모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더니 그는 하늘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로서 바뀌어 갑니다. 바람이 불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그의 인생도 예측하지 못하고 제한 없는 성령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을 땅의 한계, 육의 한계를 벗어난 인생을 삽니다. 바람과 같이 자유하고 시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서 올 정도로 연약했던 믿음이 자라서 후에는 예수님을 잡아 가두려고 하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며 “어떻게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의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요 7 : 50)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3kg 정도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바르고 모시천으로 시체를 바르고 무덤에 모시는 장면이 (요 19 : 39)에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