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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6:6-10]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되 다 통곡하며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이사야 13-23장 열방에 대한 심판 

이전 14장 바벨론에 대한 심판 - 유다 백성의 성전을 불태우고 그들의 힘과 화려함과 발달된 문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린 사탄의 세력, 

 

16장 모압에 대한 심판 

바벨론에 비해 비교할 수 없는 작은 나라 but 농작물이 풍족한 나라 - 포도나무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들에게 심판을 경고한다. 왜 유다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이러한 심판을 명하실까? 

이사야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에서도, 다른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압 - 아브라함의 사촌 룻이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 한 후 그 딸들에게서 난 민족 - 모압과 암몬 

이스라엘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을 유혹하고 죄에 빠뜨리게 한 민족 - 발람과 발락 ->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여인들과 혼인케 하여 큰 죄악을 짓게 한 민족 

한편 모압 여인 룻을 통해 다윗이 태어나기도 하는 이중적 의미 

 

그들이 가진 위험성이 무엇인가? - 그들을 닮지 마라. 

그들에게도 남겨진 자가 있다. - 롯 처럼, 룻 처럼. 

 

그들의 심판받은 이유 

 

[사 16:6]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왜 작은 나라 모압의 교만함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는가? 

 

[사 16:8-9] 이는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나무가 말랐음이라 전에는 그 가지가 야셀에 미쳐 광야에 이르고 그 싹이 자라서 바다를 건넜더니 이제 열국의 주권자들이 그 좋은 가지를 꺾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 농작물의 풍족함, 그 중 특히 포도농사의 발달과 풍년으로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함이 극치에 달함. 

 

그들 민족의 특징 - 아브라함의 사촌이지만 함께 할 수 없는 민족 

무엇을 찾아 길을 가는가? 보기에 좋은 것,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모압과 암몬의 시작 - 그곳을 탈출하게 하셨으나 곧 무슨 걱정 - 먹고 살 걱정, 자손 걱정 -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후 딸들이 동침하여 이룬 민족 - - 발락과 발람의 실패했으나 결국 모압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하게 만듦. 

역사적 반복 

 

물질적 욕망, 육체적 욕망이 특징인 민족 

 

[사 15:1]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룻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룻밤에 모압 기르가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 그들이 가진 부와 향락 - 하룻밤에 황폐해질 것 -> 그의 자랑이 헛되다. 

9-10절) 너의 여름 실과, 네 농작물의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즐거운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렘 48:26] 모압으로 취하게 할지어다 이는 그가 여호와에 대하여 교만함이라 그가 그 토한 것에서 뒹굴므로 조롱 거리가 되리로다

 

하룻밤에 망하였으나 그 슬픔은 깊고 오래간다.

  • 하룻밤에 망한 모압의 사람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 탄식의 예배를 드린다. 우상 앞에서 탄식하고 애통하며 심히 울지만 더욱 헛되고 헛될 뿐이다. 고난을 만나 힘든 시기를 보낸다면 헛된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 교만으로 인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다.

 

[사 15:5]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피난민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까지 이르고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울부짖으니

  • 선지자 이사야는 모압을 보고 아파함으로 하나님의 아픔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악인, 교만한 자가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며 마음 아파하신다.

 

[사 15:7]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하룻밤에 멸망한 모압, 이런 상황 속에서도 모압 사람들은 “얻은 재물과 쌓아 두었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며 피난한다. 다른 피난처로 도망하는 것, 쌓은 재물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것은 또 다른 재앙을 만날 뿐이다. 하나님이 아닌 모든 도움, 모든 피난처는 잠시 쉴수는 있지만 피난처가 아니다. 모든 심판받는 자들이 가야할 곳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다. 나의 교만과 악함을 깨닫고 말씀앞에 나아가 심판을 받아들이고 경배하는 것이다.

 

모압, 그 민족의 특징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음행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본성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함으로 심판받았다. 그들의 풍성함이 오히려 그들의 심판의 도구가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만함 

  • 하나님처럼, 하나님 보다 더 위를 향하는 마음 - 이사야 14장에 표현된 바벨론이 가진 교만함 
  • 그러나 또 다른 교만함 -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에 찾지 않고 돌아오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교만함. 

염려- 하나님께 맡기는 대신 스스로 짊어지는 것-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태도를 교만이라 보았다. 

겸손은 맡기는 것이고 염려는 내가 맡는 것이다. 

 

모압은 하나님의 심판에도 돌아설 줄 모른다.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으로 고난의 강을 건너고자 하나 자기의 것으로 그 강을 건널 수는 없다. 그 강은 오직 주의 은혜로 건널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을 보며 애통해 하신다. 

이리로 오라 하신다. 

 

교회 안에 모압과 같은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가? '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정작 그들이 기대하고 기대고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쌓은 재물과 욕망과 수많은 우상들 아닌가? 

 

왜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시면서 구태여 바벨론을 언급하시고 모압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에게 경고하시고 심판하시며 애통해하시는가? 유다 안에, 교회 안에 바벨론 신앙인들, 모압 신앙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룻처럼 하나님 나라의 남은 자, 구원 받을 자가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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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4:12-2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 하리로다 열방의 모든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 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 도륙하기를 준비하여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여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것이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 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13장 23장 - 열국에 대한 심판 

11장  임마누엘의 최종 완성된 나라

내 거룩한 산 모든 산 위에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나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한 나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 -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 경험되어지는 앎. 경험된 앎. 

 

12장  - 이 약속을 받은 찬송 

[사 12:1-2]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바벨론에 대한 심판 

- 약속된 나라를 이루기 위한 단계 - 바벨론 심판 

 

[사 13:9-13] 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죄인들을 멸하는 분냄과 노함,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 내가 죄를 멸하러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 

그 징조- 하늘이 빛을 잃는다. - 자연의 재앙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 이 때의 사람, ,인생- 하나님 만드신 그 남기신 자. 생존자 - 희귀해지는 것 같다. 보이질 않는 것 같다. 

 

하늘과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 땅을 지배하던 자들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계시록을 이어서 보면 그런 일을 당하여도 오히려 하나님을 더 저주하며 믿음에서 멀어질 것이다. 

 

엘리야가 느끼는 것처럼 바벨론이 득세할 때에도, 또 하나님이 그들에게 분노하실 때에도, 참 사람, 참 인생, 하나님의 사람은 보이질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면 물이 바다 덮을 때가 온다. 

숨어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와 새 예루살렘처럼 드러나게 하실 때가 있다. 

 

그 바벨론으로 대표되는 세력의 정체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14장의 오늘 본문- 적그리스도의 정체, 사탄의 정체, 계시록에서 옛뱀, 용, 사탄, 마귀로 표현되는 자들의 정체이다. 

 

  • 아침의 아들 계명성 - 가장 밝게 빛나던 별, 하나님의 축복을 받던 자
  • 하늘에서 떨어졌다. 열국을 엎었다. 땅에 찍혔다. 하나님과 교제하던 자에서 이 땅을 뒤엎는 자가 된다. 이 땅에 찍혀 땅에 속한 자가 되었다. 하늘과는 상관없이 이 땅만을 위한 자가 되었다. 
  •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북극 집회의 산 위- 가장 높은 산,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 지리라. (그들의 삶의 목적 - 높아지는 것) 
  • 그들의 결과 -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한다. 

 

자세히 주목하여 살펴본 자의 진술 

  •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이 땅의 권력자가 되지만 
  • 그들의 영향력의 결과 - 세계를 황무하게 하는 것, 성읍을 파괴하는 것, 사람들을 사로잡아 집으로 보내지 않는 자. 
  • 그들의 결국 - 자기 무덤에서조차 쫓겨날 것이다. -> 밟힌 시체가 될 것이다. 

 

2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그의 생각 - 창조 

그의 경영 - 완전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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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1:1-9]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임마누엘 약속의 연장선상에 있는 메시야 예언 

- 심판이 끝이 아니라 구원이 있을 것이라 

-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것 너머에 구원이 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 구원에 대한 약속은 궁극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도 유효한 현실에서의 구원과 은혜이다. 

아하스라는 악한 왕 다음에 나타난 히스기야- 아하스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왕 

히스기야의 아들이었던 므낫세와 그 아들 아몬- 유다의 가장 악한 왕 -> 

->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요시야 - 다윗 이후로 가장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치리했던 왕 

-> 하나님의 개입이 없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다. 

어디에 속한 자인가? 모래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반석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가? 

그 뿌리에서 나온 모든 가지가 당연히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곁가지, 돌연변이들이 많고 뿌리에 합당한 가지가 희귀하다. 왜? 사탄의 유혹과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 -> 그 결실, 다윗의 가지를 타고 나온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그 가지의 면면 - 한 뿌리에 속한 예수를 열매맺게 되는 한 가지, 한 족보 -> 흠이 없고, 바르고, 깨끗한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그 족보- 장자를 통해서만도 아니고, 연약한 자, 흠 많은 자, 부정한 자- 너무 평범해서 전혀 특별하지 않은 그 가지.... 그런데 그 가지를 관통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모든 죄악을 품고 있는 그의 가지. 

 

그 위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임한다. 

[사 11:2-3]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

 

지혜와 총명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지혜의 근본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저절로,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을 주어 이스라엘을 구원해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영이 강림하셔야 한다. 성령이 임해야 한다. 성령없이 내가 믿을 수 있는가? 믿는 것,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가?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우유부단하다. 오래가지 못한다. 오래 참지 못한다. 그 영이 강림하셔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이 임한 자의 삶 

 

[사 11:4-5]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삶- 공의, 정직, 성실 

성령이 임한 자의 삶 - 공의, 정직, 성실

성령이 임해서 기도만 하고 말씀만 읽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질서가 들어오고, 관계가 바로되며, 성숙된 인격과 삶이 나타난다. 성령의 충만한 자의 삶은 교회 건물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에서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변화 

 

[사 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 -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 - 자연의 자연의 평화 -> 자연과 인간의 평화 -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 

-> 샬롬 

지금의 모든 재해 - 자연의 파괴, 관계의 파괴-> 그 중심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데에서...교회의 책임이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다. 

 

교회의 신앙 교육의 목적이 이러한 샬롬의 삶, 사회를 이끄는 정직, 공의, 성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오히려 나만, 내교회만, 내 가족만....강조하는 이기적 삶

죄를 지어도 무감각한 정직하지 못한 삶

일상의 삶의 성실이 아닌 일확천금같은 현실을 내팽개친 그런 신앙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강조하며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는 무감각하지 않은가? 

 

[사 11: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내 거룩한 산 곧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삶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삶 ->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끄시는, 완성하실 왕. -> 새 하늘과 새 땅. 

 

1-39장 : 하나님의 모든 손길 - 심판을 향하여...

그러나 그 심판의 목적이 이 메시야 예언을 통해 약속되는 심판 이후의 구원의 삶, 심판의 메시지마다 그 끝은 이 임마누엘 구원의 메시지로 끝이 난다. 

 

이사야가 외치는 설교 - 너희들은 망할 것이다. 너희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맞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무엇을 말해도 그들이 너의 말을 듣거나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너의 구원이시다. 

예수가 이 땅에 빛으로 올 것이지만 사람들이 빛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죽인다. 그런데 그 죽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 

 

이사야의 두 아들 

스알야숩 - 남은 자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할살렐하스바스 - 그들이 신속히 망할 것이다. 

 

둘째 아들의 일이 먼저 일어나지만, 첫째 아들의 일은 훨씬 더 나중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런데 그 첫째,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리신다. 

 

[롬 5:6-1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몰랐을 때에도, 죄인 되었을 때에도 그가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셨다면 , 하나님과 화목한 인생에는 도대체 어떤 구원이 나타날까? 우리의 무지 때문에 그의 죽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이루어야 했다면 우리가 화목된 자라면, 그의 살아나심으로 일하시는 구원- 동행하는 구원-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구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구원

 

그가 심판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이룬 것 같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고난, 모든 질병, 모든 연약함을 통해서도 그의 구원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가? 신뢰하는가? 

 

내게 나타나는 구원이 내가 무엇을 해서, 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바라고 신뢰하고 열심내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 더 깊은, 더 즐거운, 더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한 자원함이라는 것을 아는가?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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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편 1-5절 사랑하는 자가 받는 고통 

 

[시 22:1-5]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 

신약- 요한복음 3장 16절

구약 - 시편 23편

 

그런데 구약학자, 특별히 시편을 전공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된 시편 시편 22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의 하나(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이 읊조리신 유일한 시편구절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을 가장 잘 표현한 시편 - 시편 22편 - 메시야 시편, 십자가의 시편 -> 1절 외에도 여러구절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성취되는 고난기사의 절정이다. 

 

다윗의 부르짖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윗의 언어로, 사람의 언어로 아파하시고 부르짖고 기도하셨다. 

 

하나님도 고난당하실 때에, 천상의 고통을 천상의 언어로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언어로,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기도하셨다. 

 

  • 절에 가면 앉아 있는 부처의 상 

편견을 버리고 그 상을 바라보면 느끼는 것 

세상의 것을 다 초월한 미소와 따스함. 

그리고 가만히 앉아 한 손은 무릎에 한손은 앞을 향하여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평안함과 위엄. 

 

그래서 불교에 귀의하면 결국 세상을 떠나 그 초연함을 따라 산으로, 부처가 되어 속세를 버리고 모든 집착과 나 자신마저도 잊고 해탈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 해탈, 무아지경

 

  • 그런데 예수 

십자가 위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 고통당하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예수님 

석가모니는 세상을 초월해서 해탈을 향해서 나아갔다면 

예수는 초월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으로, 그 고통으로 내려와서 그 육신으로 인간의 고통을 당하신 분. 

그리고 그 언어로 기도하신 분. 

 

이 세상의 것을 아시고 경험하시고 그 고통을 이해하시는 분.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신다. 

 

나는 이 세상의 문제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아파하는데

믿음 좋다는 한 분이 "다 부질없는 것이야. 그런 고통은 다 소용없는 것이야..."하면 그 말이 과연 위로가 될까? 

 

그런데 우리가 너무 고통스러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예수를 통해 받는 위로는 무엇인가? 

"내가 안다. 내가 그 고통을 안다. 나도 그렇게 아팠다...." 그 말이, 그 음성이, 그 말씀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is unable to emphasize with our weaknesses, but we have one who has been tempted in every way, just as we are, yet he did not sin. 

->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없는 대제사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 당하셨던 한 분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배고품의 문제, 육신적 고통의 문제, 오해당함의 문제, 배반당하는 문제,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버림받는 문제....그리고 그 가장 높은 곳에 오늘 다윗의 부르짖음처럼 그가 가장 의뢰하고 의지하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문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고통을 당하며 그에게 가든 그는 아신다. 공감하신다. 그리고 같이 아파하신다. 

 

십자가의 구원 - 우리의 죄를 구속해주시는 것 - 추상적인 것 - 신학적인 것 

그에 앞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십자가 아래에서의 은혜 - 구체적인 것 - 영성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내가 너의 고통을 이해한다. 내가 너의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내가 너의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한다"

 

시편 22편 - 다윗의 고난, 예수의 고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 그 침묵 때문에 난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 그렇지만 난 신뢰한다. - 더 큰 은혜가 임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 

다윗이 아닌, 예수가 아닌 나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았다"하는 경험이 있나? 

그런 막연한 감정이 아닌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느낌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럽게 부르짖어버린 적이 있는가? 

 

그만큼 먹고살기가 편해서 그런가?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은 옛날보다 편해졌다고는 할지 모르지만 각자가 느끼는 고난의 강도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힘들어하고, 나이 좀 먹었다하면 내 인생이 다른 어떤 사람보다 고난이 많은 삶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누구도 나만큼, 이토록 고난에 대한 경험이 많을 것이라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토록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면서도 내가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그 부르짖음, 그 호소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자가 막상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그 분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서 느껴지는 적막감, 고독감, 두려움, 염려, 낙심....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정말 다윗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했던 것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기도해 보았는가? 그런 기도를 들어보았는가? 

 

그 분의 음성이 들리기 전에 나 혼자 포기하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다른 길을 찾아오진 않았는가? 침묵하시고 임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그런 침묵이 오히려 더 익숙한 것이 되어 버리진 않았는가? 

 

  • 누가 버림받았다고 이토록 아프게 부르짖을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다윗처럼, 예수처럼 이렇게 고통스럽게 기도할 수 있을까? 

 

한 연인이 있었다. 서로 사랑해서 둘이 꼭 결혼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꾸던,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인이었다. 

그런데 어떤 연고로 이 커플이 헤어지게 되었다. 

한쪽은 덤덤히 이 이별을 받아들였다. 사랑했으니 헤어질 수도 있지. 그래도 그동안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으니 헤어지는 것도 아름다운 거야. 그 사람도 축복해주고 나도 이젠 새로운 사람 만나야지. 

 

그런데 한 쪽은 헤어진 것을 통해, 내가 버림받았다는 고통으로 인해 몇날 며칠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밥을 먹지도 못한다. 삶이 다 끝장 난 것 같다. 누구도 만날 수 없고 헤어졌음에도 계속 그 사람이 내 앞에 있을거란 환상에 빠지기도 하고 도무지 헤어짐을 인정할 수 없다.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사랑한 것인가? 누가 간절히 사랑한 것인가? 누가 자신의 전부를 받쳐 사랑한 것인가? 

버림받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 사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고통이 없다. 나 자신만 중요해서 그 사람 아닌 나를 채워 줄 다른 사람만 있으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것-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니라도 자기를 만족시킬 누군가만, 어떤 것이든지 있으면 되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 것 - 그래서 우상 숭배는 곧 간음이다. 그 우상 섬김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시기하시는 것도, 나는 질투하는 여호와니라 하신 이유도

왜?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못견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예수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했는데,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왜 나를 혼자 남겨두었나요? 하면서 그토록 사랑하고 신뢰했던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다. 

 

  • 이 설교를 하게 된 배경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친구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 분이 계속 시편 강해를 하는데 이 22편을 준비하는 중에 아이들과 함께 빈 학교에 가서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 아이와 한나랑 동갑인 아들이 있다. 

 

목사님이 술래 차례가 되어서 아이들을 숨게 하고 있다가 재빨리 딸아이를 찾고 장난끼가 발동되어서 거꾸로 아들아이 몰래 딸과 같이 둘이 몰래 숨어 있었다. 

아빠가 자기를 찾을지 알고 꼭꼭 숨어있던 아들아이가 주위가 조용하자 숨은 데서 나와 두리번거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게 보고 있다가 아들이 경기가 일으킬 정도로 울자 큰일 나겠다 싶어서 아빠가 뛰어서 아들에게 가니까 아들녀석이 서럽게 울면서 "아빠가 날 찾아야지, 왜 안찾었어..."하면서 더 크게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울면서 아들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내 던졌다. 

"난 아빠 믿었는데, 난 아빠 믿었는데..."

 

그 말을 듣고 이 본문을 묵상하니까.... 아, 이 버림받은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 믿었던 자가 외면당했을 때 당하는 고통이구나. 정말 사랑했던 자가 당하는 고통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하나님을 정말 신뢰하는 자만이 그 분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에 버림받은 것처럼 괴로워할 수 있는 것다. 그 분이 내 삶 속에서 충만했던 경험을 하는 자만이 그 분의 모습이 삶 속에서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때에 무섭고, 고통스럽고, 울 수가 있는 것이다. 늘 하나님이 안보이는 듯이, 신뢰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그 분이 침묵해도, 내버려 놓아도 어떤 걱정도, 불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단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안될 때, 내 삶에 문제가 닥쳤을 때에만 하나님 도와달라고 매달리는 것이다. 그런 성도는 시편 22편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 1절 - 나의 하나님: 걱정이 많고 두려움에 쌓여 부르짖는다. 
  • 3-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한다. 
    •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내가 그를 보지 못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 그는 나의 신앙의 선배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 나의 존재가 불확실하고 내가 환란 중에 정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그 분은 기도하는 자를 건지시는 분이기에 또 신뢰한다. 

 

이러한 고통과 신뢰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조롱거리니이다. (6절) 

->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바라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8-9절) 

-> 평소에 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의 믿음을 바라보며 참고 있다가 그가 고난당하니 그의 믿음을 가지고 조롱한다. 그렇게 믿더니 왜 하나님이 안 구해주시냐? 

예수님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봐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제 몸 하나도 구원하지 못하냐..."

이렇게 조롱당할 때에도 다윗은 또 하나님께 기도한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나를 도울 자 없나이다." 

언제? 하나님이 안느껴지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그 때에도 난 당신 밖에 없습니다. 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난 당신만 바라봅니다. 

 

  • [시 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 이런 고통이 왜? 주께서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이토록 고통스럽다는 것이지만 

 

[시 22:19]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 그래도 또 기도한다. 마치 차인 여자가 나를 찬 남자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버리고 떠난 연인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니라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간음한 백성 아니었던가?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실까? 어떻게 이토록 자신 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그의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실까? 

 

21절부터 31절까지는 왜 그런 설명없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그의 응답이 나타난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확신시켜 주신다. 

 

[시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그리고 그의 경험을 개인의 경험에 두지 않고 자기를 따라 행하는 모든 성도에게 약속으로 준다. 

[시 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내가 이렇게 찬양하게 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다. 나와 같이 주를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약속하는 것이다. 

 

지난 주간 예배 후 zoom미팅을 통해 한 집사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로 말미암아 더이상 가게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정리를 해야 하고, 이지역의 물가가 너무 비싸 이 곳을 떠나야만 한다면서 괴로워하시는 것이다.  

떠나기 싫고 옮기기 싫은데 자꾸만 떠나야만 하도록 떠밀리는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40여년간 정들었던 이 곳을 떠나기가 너무 서운하다는 것이다. 

 

그 서운함이라는 말이 일 주일 내내 가슴에 남았다. 

그 서운함은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깊이 때문에 겪는 고통일 것이다. 

오랜 동안 사랑했던 사람만이 겪는 그런 고통일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만 하는 고통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 속에서도 다윗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보자.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 분이 행하시는 것을 바라고,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그 분께서 보여주시는 그림을 그려보자.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그 분을 믿기를 포기하고,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그 분과 함께 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때로 나 자신이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여전히 그 분께 부르짖어 보자. 

왜 안보이냐고, 왜 말씀해주시지 않느냐고. 난 당신만 바라본다고. 난 당신만 믿는다고....

 

그리고 그 분이 하신 것을 증거삼아 그분이 인도하시는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리자. 찬양을 드리자. 

 

버림받음 - 사랑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이 버림받은 감정을 가장 깊이 체험하신 분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아왔다. 

그 분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지만 성육신 하신 그 예수님을 우린 또 버렸고 죽였다. 

 

 그렇기에 그 분은 버림받은 인간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깊이 헤아리신다.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외면치 아니하신다. 

 당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그 때, 바로 그 분께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번 맡기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누리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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