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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감사절  (살전 2:13절)

 

(살전 2: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서, 스위스에선 칼빈에 의해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라는 신앙의 순수성을 위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에, 영국에서는 신앙의 순수회복을 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불편한 형태의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1534년 영국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자신의 시녀인 엔 볼렌과 결혼하기 위하여 여왕인 캐더린과의 이혼을 승인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구하였으나 교황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를 열어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하여 형식은 그대로 가톨릭을 따르나 가톨릭으로 부터 분리되어 이른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기나 형식이 신앙의 회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터나 칼빈과 같은 순수한 신앙운동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청교도운동이라 부르는 신앙의 회복 운동을 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왕조에 따라 가톨릭이냐, 성공회를 교체하던 영국에 있어서 청교도는 가톨릭 왕조로부터도, 국교회 왕조로부터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에 오직 신앙생활의 자유를 위해 승무원 6명과 남자 72명, 여자 29명, 100여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1620년 메이플라오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지의 땅 미국땅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배를 타고 이런 긴 항해를 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오직 신앙의 자유를 위해 100여명의 사람들이 긴 뱃여행을 시작해서 65일만에 11월 9일 미국의 동부 메사추세츠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뱃속에서도 뱃멀미니 건강악화로 시달리다가 꿈에 그리던 땅에 도착했더니 그곳 사정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곧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식량난과 굶주림으로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첫해 겨울을 지나는데 죽은 숫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또한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어찌 눈물바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  땅을 경작하여 옥수수와 감자를 심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가을 그들은 풍성한 수학을 거두며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50-60여명 남은 청교도들은 한해를 돌아보며 먼저 죽어간 이들을 기리고, 또한 그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던 인디언들을 초대했습니다. 90여명의 많은 인디언들이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초대는 했는데 자기들보다 많은 90여명이 초대되어 오자 당황이 되었지요.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서 급하게 들새라도 잡으러 나갔는데 다행히 들판에 있는 많은 칠면조를 잡아 그들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청교도인들은 인디안들과 아울러 모여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1621년 11월 마지막 목요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첫번째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인생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걸어 나아가는 행로에서 자그마한 구렁텅이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또 한 부류의 사람은 자기의 걸어가는 행로가 비록 캄캄하고 답답하다 하더라도 작은 빛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감사의 태도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인류의 역사도 바뀝니다. 100명이 탈출하여 50여명만이 살아남은 극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들 청교도의 신앙은 지금의 미국의 개척정신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미국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고향을 떠나고 생명을 걸고 어떠한 희생도 무릎쓰고 얻고자 한 것일까요? 다 잘살기 위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면 그들의 도전과 시도는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인류역사에서 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던 수많은 희생들, 그리고 이 신앙을 전하고 증거하기 위해서바쳐야 했던 수많은 생명들은 거꾸로 믿음이 생명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라는 구절이 있고 이 구절로 된 찬양도 있습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되었는데, 교회사를 보면 정말 믿음을 위해 생명을 버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신앙의 지형도에서 보면 한국은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된 나라들 중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신앙은 바울의 시대에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확대됩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청교도들의 이주로 이제 아메리카 대륙이 신앙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 그 중에서도 그들과 인접하지 않은 동북, 동남아는 오히려 지구를 돌아 가장 늦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 가려 선교사들의 눈에도 가리워진 나라였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을 전도하려고 지나가다가는 곳이 한국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된 19세기 말에 우리나라는 고종황제가 이른바 쇄국정책을 통해 서구 문물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의 입국 자체가  차단되었고 몰래 들어와서 선교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멀리 영국에서, 미국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던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긴 뱃여행으로 땅에 내리지도 못하고 죽은 경우도 허다했으며 땅에 내려서도 낯선 환경과 문화로 미국땅에서 첫해 절반가까이 죽었던 것처럼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차라리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 온 첫 세데 선교사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 나라에 와서 어린 자녀가, 아내가, 그리고 선교사 본인이 수없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러한 희생과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된지 100여년 만에 우리나라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 미국을 낳았고 영국을 바꾸었듯이, 뚫릴 것 같지 않던 한국의 신앙의 문이 열리자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서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갇혀 있는 감옥의 옥문이 열려 빠져나와 도망치듯 도달한 곳이 데살로니가 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해서 적지 않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곧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떼를 지어 그들을 위협하고 또 쫓아냅니다. 

그 며칠 사이의 소란 중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데살로니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3주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2-3개월 가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곧 바울과 실라는 또 쫓기어 떠나고 교회만 덩그러니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냥 도망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 감사하냐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감사합니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하라, 찬양해라. 감사해라 

 

우리의 삶- 

그 사람이 좋아지면, 내 감정이 동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좋은 일이 생겨야 찬양하는 것이지. 

감사할 일이 생겨야 감사한 것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사랑해라. 하나님의 말씀이니가 감정이 동하지 않아도 사랑해라. 

어려운 중에도 찬양해라. 

고난 중에도 감사해라. 절망 중에도 감사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 

그런데 감정이 앞서는 우리의 사랑, 우리의 찬양, 우리의 감사는 어떠한가? 정말 진실하고 정직한 감정일까? 

 

누군가는 아무리 사랑을 줘도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 힘들고 누군가는 나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이른바 나쁜 남자인데도 오히려 좋아하고 쩔쩔 매지 않은가? 

부모가 아이들에게 베푸는 정성과 사랑은 얼마나 훨씬 강해졌는가? 그래도 우리의 부모세대보다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누리는 것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런데 얼마나 감사하나?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하는가? 좋은 것 사주었을 때에 하는 찬양은 얼마나 입에 발린 소리들이 많은가? 진실한 감사와 진실한 찬양을 찾기 힘든 세상 아닌가? 

 

감정은 우유부단한 것이다. 진실하지 못하다. 현실을 왜곡하고 과대포장하거나 반대로 축소시킨다. 말 한마디 상처로 인해 사람 전체가 꼴보기 싫기도 하고 다신 안본다 하면서 반대로 맔한마디 때문에 풀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 감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정에 놀아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가? 그분이 날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진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날 사랑한다는 이 고백은 "내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변해도 세상이 변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변해도 한 번 새겨져 있는 그 말씀은 변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그 고백. 외침..." 

 

왜 우리 감정이, 환경이 사랑하도록, 찬양하도록, 감사하도록 허락지 않는데 말씀으로 감사하라고 하시는가? 

변치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견고히 서라는 것이다. 내 지금 감정이나 환경은 어렵고 막혀 있어도 반드시 그 분이 날 인도하시고 감싸 안으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 위에 서라는 것이다. 

 

감사는 내가 받은 은혜를 되찾게 한다. 오늘 특송 - 은혜: 당연한 줄 알았던 모든 것이 알고보니 은혜다. 

감사는 지금의 어둠을 이기는 소망이 된다.  

그래서 감사는 천국 백성의 표요

감사는 신앙의 선포요

감사는 행복의 열쇠요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혜요

감사는 죄의 독을 없애는 해독제요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그릇인 것이다. 

 

목사로서 저는 한없이 부족합니다. '

주일 예배 전에 제 설교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읽어보면서 어떻게 이 설교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견고히 할 수 있을까?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내 기도로도,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말씀으로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무력해지고 움추려 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부족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마음을 알고자 마음을 여는 성도님들이 계시고 그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는 것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결국 저는 통로요 제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지고 하나님의 말씀만 역사되어지면 설교자는 행복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 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를 이루어가는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이 제 모든 삶의 열매이고 면류관이고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은 축제의 잔치이기도 했지만 그 축제 안에는 고향을 떠난 설움이, 긴 항해를 통한 고통이, 긴 겨울 죽어간 수많은 가족들의 죽음과 슬픔이 깊게 묻어있는 잔치였습니다. 

한 해 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힘들게 신앙생활 하던 코로나 가운데서 참된 교회, 참된 예배를 향해 몸부림치던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아픈 기억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닌 상처도 있었고, 사랆들의 수근거림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견디고 함께 했던 이유는 참 예배에 대한 갈망,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몇 명이 모이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자 우리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함께 예배드리고, 소수이기에 가능한, 비록 마스크를 끼고 드리는 예배였지만 대면예배를 한 주도 빠짐없이 드렸고, 두 번의 야외예배, 여름 수련회, 그리고 선물로 주어진 밭모임등을 통해 정상적인 모임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다 완벽한 것은 없어서 때론 함께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이 이사로, 질병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일도 있었고, 의견의 불일치로 작은 갈등을 빗기도 했지만 그러한 일들은 더 기도하고, 하나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자 우리에게 주신 연약함의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장미꽃도 감사하고, 장미의 가시에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절은 그래서 더 은혜인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신앙의 역사를 계속해 나가도록 우리 첫 추수감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더 온전한 예배, 더 좋은 교회가 되도록 더 힘 힘쓰고 전진하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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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민수기 14장 7-9절) 

1. 서론  

 

흔히들 "너 비전이 뭐니?" "이 사람은 비전이 있다." 더 나아가 "이 교회는 비전이 있다."라고 할 때 비전이 의미하는 것? 

꿈, 전망, 가능성 등으로 두루 사용하는 단어

 

성경에는 비전이라는 말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전을 의미하는 몇가지 구절들이 있다. 

 

행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 - 비전의 의미로 쓰인 단어다. 마지막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시는 것이다. 

비전은 말 그대로 "보는 것"과 관련이 깊은 단어다.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 선지자를 지칭하는 또 다른 호칭은 "선견자"였다. "미리 보는 자"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때 바라보자의 헬라어는 "아포라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한 곳에 고정되어 뚜렷하게 보는 것. 하나의 곳에 집중하여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에, 제자들이 폭풍우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때에 이 "아포라오"라는 단어가 씌인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비전은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된 시선으로 그 분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비전은 하나님이 보는 시각으로 나를 보고, 타인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얻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아무리 애써 보아야 하나님의 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에바다"하듯이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경험케 하신다. 그래서 비전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아는 마음이 곧 소명이다. 

소명은 Calling, 곧 하나님이 나를 특별한 목적을 향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셨음을 깨닫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르신 자에게 주신 것이 사명, 곧 부르심에 대한 특별한 임무, 소명에 대한 책임감이다.  

소명은 나를 부르신 자를 아는 것이고 사명은 내가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지, 나의 임무를 아는 것이다. 

 

 

2. 도입 - 비전,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보는 것.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 

오늘은 그 중에서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나. 사명을 이루어야 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눈을 갖게 하시길 원하시는가? 민수기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알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택하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비로소 나를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비전을 가진 다는 것은 단지 꿈을 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나를 본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볼 적에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죄와 벌>을 쓴 도스도에프스키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대로 본다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른채 살아간다. 

 

  • 하나님의 안목과 자신의 안목 

1.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출애굽의 사명을 주어 부르셨을 때에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출 4:10, 13) 라고 말했다. 

2.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라"라고 부르셨을 때에 예레미야는 "나는 어린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꾸했다. 

[렘 1:5-6]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3. 동시대를 살았던 이사야를 선지자로 불렀을 때, 이사야는 더 나아가 "화도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다" (사 6:5)라고 말했다. 

4.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의 수제자로 부르셨을 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라고 말했다. 

5. 기드온을 큰 용사로 불렀을 때, 기드온은 미디안이 무서워 두려워 떨던 겁쟁이였다. 

 

  •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 - 열등감과 교만함, 자기비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끔찍이 위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지 못한다. 

대부분 참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하나님 주신 나의 고유함을 바라보는 대신에 남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려는 것이다. 끊임없이 비교함을 통해 나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등감과 교만함은 결국 하나이다. 

우리 안에 나를 판단하는 기준 -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남과 비교해서 우쭐한 것이 교만이고 남과 비교해서 움츠려 드는 마음이 열등감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교만함을 통해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경쟁하고, 판단하고, 높이 올라가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끝이 없고, 쉼이 없고, 결국 남을 무너뜨리려하다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 

열등감과 교만함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의미로 우리의 비전을 가로 막는 것은 '자기 비하', 혹은 '자기 학대'이다. 

남과 비교하며 교만하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기 안에 갇혀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이 잘못된 자기 사랑의 표시라면 자기 비하는 전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표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전을 포기한 인생이다. 

하나님을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달리어 죽어야만 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모든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없게, 가치없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이나 교만함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도 끊임없이 나 자신과 비교한다. 

그 사람이 나보다 잘 난 것이 있으면 내가 겸손해져서 다가가고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면 교만하여져서 함부로 대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보다 잘 나 보이면 나 자신의 교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고 

나보다 못나 보이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가가는 사람도 있다. 

 

자기를 비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역시 관심을 두지 않거나 혐오한다.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자식을 대할 때도 자신과 자녀의 인격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자기 비하의 전형 적인 예 

"이런 못된 놈의 자식" "00놈의 자식" 

자기의 자녀에게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결국 자기가 못된 부모, 00이라는 존재라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본다 - 관 -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자기가 보는 눈은 생리학적으로 객관적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살아왔던 세상, 자기가 경험했던 인생을 통해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고, 자신과 남을 바라본다. 

 

  • 자기 안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 - 언어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가 비전의 사람인지,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사람인 지 알 수 있다. 

 

아침묵상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우리 육신에 있어서 혀, 말의 역할 - 배의 키, 말의 재갈-> 결국 인생의 목적, 방향이 말에 달려 있다는 것. 

 

[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나님이 행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그 방향으로, 목적대로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하시면서 행하신 것 - 

-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킨 것

- 홍해를 갈라 백성을 건너가게 하시고 애굽 병사들을 물리치신 것 

-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신 것 

- 만나를 내리신 것 

-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것

- 공중의 매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신 것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실 수 있는 갖가지 기적의 선물 세트를 다 보여 주신 것. 가장 가까이서, 가장 강력하고 다양한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가기까지 광야를 살았던 출애굽 1세대 히브리인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의 12지파 대표 각 1명씩을 뽑아 정탐하러 보낸다. 

정탐한다는 것은 보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라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의 안목이 드러난다. 누가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보는지, 누가 열등감과 자기비하로 자신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보는지....

 

- 먼저 12명의 정탐꾼들이 동일하게 본 것 

[민 13:27-28]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이 사실을 가지고 열 명의 정탐꾼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부정적 언어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 (비교에 의한 열등감

악평하여 이르되 (잘못된 판단- 선입견이 가득찬 말

거주민을 삼키는 땅 (거주민이 누군가? 가나안 민족, 아낙 자손- 그들이 땅에 삼켜졌는가?) - 사실 왜곡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 자기 비하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 - 막연한 추측에 의한 잘못된 판단

-> 라합을 비롯한 가나안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을 때에 두려워 떨었더라. 가나안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떨고 있었는데 그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고 그들도 그렇게 볼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을 통해 보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본 것은 라합과 가나안 사람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들만을 보았다. 

 

비전은 무엇?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는 것. 

 

그들은 왜 자신들을 그렇게 보았는가? 

하나님 이전에 애굽에 있을 때의 자신들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노예생활 하던 자신들의 세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우리가 애굽에 있었을 때에는..'

"우리가 애굽에 있었더라면..." 

 

그들의 내면에 있는 세계는 애굽의 세상. 노예로서 항상 부러워하고 눌려하던 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 비전이 없는 삶-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 

불신앙은 불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민 14:7-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심히 아름다운 땅 Vs 거주민을 삼키는 땅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면 (경멸하지 않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 (무시하지 않고) 인도하고, 들이시고, 주신다. 

Guide, Get a ticket in the Entrance, and give them to the land. 

거역하지 말라. - 인정하라. 받아들이라. 맞이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 왜 여호와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와 갈렙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지 않고 귀족이었나? 모세처럼 왕족이었나? 

아니다. 똑같이 노예였다. 

더군다나 갈렙의 족보를 살펴보면 

[민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그나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로서 에돔족속의 조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에서 벗어났던 에서의 후예였던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사람이 된다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된다. 

 

갈렙의 족보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대상 2:18-20]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그 아내 아수바와 여리옷에게서 아들을 낳았으니 그 낳은 아들은 예셀과 소밥과 아르돈이며 아수바가 죽은 후에 갈렙이 또 에브랏에게 장가 들었더니 에브랏이 그로 말미암아 훌을 낳았고 훌은 우리를 낳았고 우리는 브살렐을 낳았더라  

 

그는 아수바와 여리옷, 그리고 마지막에 에브랏이라는 아내를 맞게 되는데 성서학자에 의하면 아수바와 여리옷은 애굽에 있을 때에 얻은 처요, 에브랏은 출애굽 당시의 아내 

그에게서 나은 아들이 훌, 그 훌의 손자가 브살렐 

훌은 누구인가? 아말렉 족속과 전쟁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준 사람 

초대교회 역사가 요세푸스는 훌을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소개. 

 

그리고 그의 손자 브살렐 - 오홀리압과 더불어 광야에서 성막을 짓는데 총 책임자. 

 

[출 31:2-5]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에돔의 후예였던 갈렙의 자손이 어떤 지파에 속하게 되는가? 유다지파....

다윗과 예수님의 지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열악한 배경과 환경에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했다. 그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나중에 가장 고령이면서도 기개있게 아무도 가지 않은 땅, 헤브론 땅을 취하면서, 비전의 사람이 된다. 

 

여러분 안에 어떤 세상이 있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치유받은 세상, 하나님이 충만한 세상을 지니고 그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가? 

아니면 신앙 생활 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세상, 부모와 타인으로부터 욕먹던 나, 멸시받던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젠 그 세상을 떠나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에게 거저주신 그 땅 안의 사람, 천국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비전은 결국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회복된 나로 세상을 바라볼 때, 꿈이 열리고, 열매가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린다.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있다. 한 해 동안 여러분 얼마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는가? 

아니면 올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세계에 갇혀서 비교하고, 비하하고, 하나님을 멸시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교회,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눈으로 나 자신과 다른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디모데전서 3장에서 감독 - superviser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자"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를 위한 권력자가 되면 교회는 망한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교회와 성도를 볼 때 우리는 소망있는 비전의 사람, 비전의 교회가 된다. 

그 눈은 내 안에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분이 일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의 눈으로 2021년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2022년을 비전의 해로 만드시는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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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화법 (요한복음 4장 19-26절)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 - 요한복음 3장 16-17절 -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 예수님과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와의 대화 

오늘 나눌 말씀 - 4장의 사마리아 여인, 현대 성서학자, 특히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보다 훨씬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며 많은 논문이 발표되고 있는 본문. 그 안에 들어가있는 주제들- 이스라엘의 역사, 구원의 역사, 제자도, 예배, 신앙고백, 전도 등등 그 본문이 담고 있는 주제도 다양하고 깊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다룬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다룰 때마다 또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본문이입니다.  

 

3장 니고데모의 장면과 대조하면서 보면 그 의미가 더욱 새롭습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이에 반해 4장에 등장하는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밤에" 남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아왔으나, 여인에게는 유대인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사마리아 땅에, 그것도 6절에 보니 제 육시, 우리시간으로 정오- 낮에 그것도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찾아 가십니다. 

 

1. [요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 사건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그렇습니다.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다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 지역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라섰을 때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는데, 앗수르는 역사상 가장 무자비한 침략제국으로서 강제로 혼인정책을 써서 앗수르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더럽혔다는 것은 생명이 더럽혀진 인간이라 여겨. 이후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우상숭배하고 이방인들과 혼인을 한, 날 때부터 부정한 여인"이라고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였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거꾸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이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다가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성전이 두 개가 세워지게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우리나라의 남과 북의 갈등보다 훨씬 더한 갈등 

우리는 북한의 체제는 인정하지 않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감정은 없고 그들을 한 민족으로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 자체를 결명하고 상종하지 않습니다. 

"박사과정 공부를 할 때에 종합시험을 보는데 한 교수가 정통 유대인, 제가 요한복음 4장, 바로 이 본문을 가지고 소논문을 쓰고 시험을 보는데, 이것 저것 질문하고 저보구는 잠시 나가있으라 하면서 교수 3명이서 합격여부를 판단. 

그런데 방 밖에 잠시 나가있는데 교수 3명이서 언성을 높이고 막 소리치는 장면 - 나중에 제 지도교수에게 들으니 평소에 저에게 잘해주시고 칭찬을 해 주시던 유대인 교수가 사마라아를 다루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사마리아 여인과 유대인이 이렇게 얘기를 주고 받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하면서 언쟁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어서 "아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던 사건...

 

그래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간다는 것은 상식에 벗어난 일일 뿐만 아니라 남들이 알면 굉장히 부정하고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우연히,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통과해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여인을 만난 사건 이외에 다른 일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전에 일면식도 없고 그녀가 자기를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는 여인도 아닌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2.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막의 더운 한 낮에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 하시는 모습- 스쳐지나갈 수 있는 모습.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그 여인을 만나신 목적 

10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 그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13-14절)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대한 첫 마디 

"내게 물을 좀 달라" 

 

오늘의 설교 제목- 예수님의 대화법... 

 

니고데모가 찾아와서 이루어진 대화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자신의 생각도 아닌 "우리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단도직입적이다.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의 말을 끊고 네가 아무리 선생이어도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다. 그가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하면서 면박을 주기도 하신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먼길을 가서 그녀를 찾아가서 그 첫 일성이 "내게 물 좀 달라"한다. 

니고데모에게 무언가 달라했으면 단 번에, 기분좋게 주었을 것이다. 왜 그는 주는데 익숙한자요, 베푸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남에게 받아본 일도, 나아가 주어본 일도 별로 없는 고달픈 삶을 사는 여인이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가장 더운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물을 길으러 온 그녀에게 그것도 자기 민족과는 상종도 않는 유대남자가,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그녀에게 와서 내 뱉는 첫 마다. - 물을 좀 달라. 

 

깨어진 그녀의 자존감을 채우신다. 상처입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신다. "나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존재고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상한 마음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을 배빈한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번씩 물으시며 그의 상처입은 마음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은 이름 없는 사마리아 지역의 한 여인을 찾아가 "나에게 물을 좀 달라"하신다. 

 

예수님의 그 따뜻함. 그 배려, 그 섬세함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경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이 열립니다. 성종할 수 없었던 관계가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됩니다. 오랜 역사를 걸쳐 막혔던 관계가 소통하는 관계, 대화하는 관계, 그리고 나아가 구원받는 관계가 됩니다.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여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 지를 보면 그 대화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9절)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 첫 대답 (약간의 적대감)

(15절)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 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여) 

 

16-18절)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구절은 해석의 주의가 필요한 어려운 부분. 

 - 전통적, 일반적: 남편을 다섯 둔 부정한 여인. 사마리아 지역에서도 가장 부정한 여인의 대명사 

 - 문자적으로 다섯 남편을 두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인가? 당시의 이혼- 여인에게 권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혼의 권리는 오직 남성에게...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번이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가련한, 기구한 여인...

 - 상징적, 비유적 해석 : 남편 - 사마리아 사람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들. 앗수르에 의해 강요된 우상들. 

 - 근거 - 이 대화 뒤에 이어지는 여인의 고백과 질문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을,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절)에서, 주(11, 15, 19)로, 주에서 선지자로 (19절),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 29절)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마친 후에 예배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바뀌게 됩니다. 

그녀의 갈증, 갈망, 세상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렇지만 여전히 수고하고 뙤약볕에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 다섯 남편을 통해서도 한 번도 안식이 없었던 여인에게 이제 내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리라 하니까 이제 그녀의 육신적인 의지가 다 사라지고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분을 인정하게 될 때에 비로서 영적인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영적인 의문을 달아서 질문합니다. 

(요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2절 말씀을 먼저 보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의 예배: 이방예식이 혼합된 예배, 성경은 모세의 5경만을 따르고...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고, 충성된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예배: 구약성경을 모두 받아드리며 구원에 대해서 가르침을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들은 예배의식을 모두 가추고 예배를 드렸으나 예배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요나- 말씀도 알았고, 체험도 있었고, 순종도 하였지만....그가 없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진리는 있었으나 신령이 없었고 사마리아에는 신령은 있었으나 진리가 없었다. 이는 예배의 두 극단이다. 그리심산에는 열광적인 이단이 자리하고, 예루살렘에는 황폐하고 생기없는 정통이 자리했다. 유대인들은 예배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모두 갖고 있었으나 뜨거운 마음이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뜨거운 마음은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이 모두 들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중에 하나라도 결핍하게 되면 참된 예배가 아니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정열적인 예배는 휼륭한 예배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진리에 기초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예배를 드려야한다.

 

그러니까 21절에 

(요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내 말을 믿으라...-> 잘못된 표현 -> Believe me. 내 말을 믿으라...가 아니라 나를 믿으라. 

그러면서 사마리아의 예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예배도 아니고 너희 아버지께 예배 드려라. (예배는 '어떻게'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의 문제이다. )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인이 주님을 유대인에서 주님, 주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녀의 믿음이 자라듯 그녀 역시 예수님을 고백하며, 이름없고 소외된 여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신앙인으로, 그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로, 제자로 그녀의 신분 역시 달라집니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 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를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며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연결하는 다리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그녀의 고백을 변화시키지만 그 고백의 변화는 그녀의 신분 또한 변화시킵니다. 

 

신앙생활도, 기도도,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결국은 예수님과 대화함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가 삶이 자라고, 우리의 신분이 자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 대화함으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여러분의 고백도, 여러분의 영적인 신분도 날마다 자라며 변화하는 주님의 제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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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5-16절) 

 

전세계 성도들이 성경 66권 안의 모든 구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꼽으라면 1, 2 위를 다투는 구절 - 시편 23편과 더불어 요한복음 3장 16절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의 신앙고백을 다루고 있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편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과 구원의 핵심을 표현하고 있는 성구가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 

이 구절이 나타내게 된 배경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그가 누구이기에 그에게 기독교 역사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말씀을 주신 것일까? 

 

본문 3장 1절에서는 니고데모가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바리세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리고 여러분 성경책에 지도자라는 말 뒤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분들은 그 번호를 따라서 설명을 읽어보면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더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로마의 승인하에 이스라엘 국가 전체에서 종교적 일뿐 아니라 정치적 결정까지도 함께 결정했던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다. 

초기 문헌을 보면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나오는데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1)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2)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며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며 

3) 또한 경제력을 갖춘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절)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부러울 것 없는 권력과 재력과 남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학자들은 "밤에" 라는 시간에 관심을 가집니다. 

지금처럼 전기나 불빛을 내기가 어려웠던 때에, 밤은 곧 사람들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이요, 더군다나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손님을 초대하는 일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예수님을, 그것도 밤에 찾아왔을까요? 

밤에 찾아왔던 것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와서 주님을 가리켜 선생이라 부릅니다. 

 

1장 38절부터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자신을 따라오는 둬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묻지요. 

"무엇을 구하느냐?"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며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친절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유력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님이지요?" 라고 묻습니다.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이 알려지면 그가 누려왔던 선생의 자리, 사람들의 존경스런 눈빛이 사라질까 두려워 남들이 보지 않는 밤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기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고민하고, 밤잠을 설쳤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예수님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리 남들의 칭송을 받고, 그 자신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였더라 할지라도 그가 풀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갈급함, 영적인 갈증, 갈망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자신이 가진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남들을 가르치고 존경을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절) 

세상 사람들은 가난한 것을 두려워하고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더군다나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인생을 잘못살았다는 말로 여긴다. 그래서 그 가난함을 숨긴다. 부자인채 한다. 난 부족함이 없다 한다. 

그런데 성경은 가난한 자를 복되다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 말한다. 자신의 가난함을 숨기지 말라 한다. 

마음의 가난함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다. 아니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자신이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을 가장하고 꾸미는 자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주님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님을 도와줄 지언정 주님으로부터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의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남들의 눈을 피해 왔지만 은밀히라도 주님께 찾아온 니고데모를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하나님께로 온 선생님이지요?" 묻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겉으로 보면 선문답같은 대화이다. 

선생님 맞지요? 하고 묻는데 거듭나야지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신다. 

논리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 니고데모의 가난한 심령, 그 영적 가난함때문에 밤에 찾아온 그 연약함을 바라보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다. 

넌 심령이 가난한 자이구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키를 주시는 것이다. 

그 키는 무엇인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영적인 가난함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소리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요, 그러기에 영적인 대화를 따라가지못한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난 늙었는데 어떻게 또 태어납니까? " 그의 학식에 비추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답변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10절) 

 

니고데모 - 바리새인이요 선생이었다. 달리 말하면 율법학자요 율법의 실천자였다. 

그가 그 자신의 영적 갈급함, 마음의 가난함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대충 신앙생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런대도 만족이 없다. 평안이 없다. 계속 부족한 것 같고,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수가 없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예수님과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마가복음 10장 17절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하나님 주신 계명을 알지 아니하냐?"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절 (함께)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2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가니라 

 

이것을 가진 재물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에게 다 구제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소리인가? 이것은 일차적 해석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해 애쓴 것 - 주님의 계명을 힘써 지킨 것 

그것을 보시고 주님이 "사랑하사" - 그것을 귀히 보신 것이다. 그의 노력의 흔적들을 칭찬하신 것이다. 

그리고 너와 같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네가 살아왔던 그 신앙, 계명을 지키는 그 열심을 또 다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런데 자신이 해왔던 그 마음이 네 마음에 가득차서 네 가난함이 사라져 버렸다. 

네 열심이 네 의가 되어서 너는 네가 행한 그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취해 있구나.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것을 다시 다 비우고 나와 새 길을 가자꾸나....

 

마치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았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어려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우고 마음대로 행했다면 이젠 내 마음대로 살아보렴...: 하는 것으로 새로운 부르심으로 그를 초대하신다. 

 

우리가 행했던 아무리 선하고 좋았던 열심도 그것이 스스로 만족이 되면 그것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무슨 소리인가? 우리 스스로 하늘로 올라갈 자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계명을 지켜도 그것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 나라는 주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은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므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내려서 많은 백성들이 죽게 된다. 

회개하고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장대 높이 놋불뱀을 달아놓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살도록 하셨다. 그것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자들은 바라보지 못함으로 죽게 되었다. 

 

우리가 내는 열심. 

교회 내에선 그것 때문에 누군 열심히 믿고 누군 게으르게 믿고 그것으로 신앙의 높낮이를 판단하지만, 결국 우리가 내는 모든 열심이란 눈을 들어 장대를 바라보는 그런 노력과 의지이다. 물론 이것조차 못하는 분들이 분명있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끝까지 바라보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어떤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세상, 그 인간...그렇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 떠난...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모든 신앙의 열심은 결국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화) 오징어 게임 오일남 할아버지 - 첫번째 방송 인터뷰 - 유튜브 

 

젊었을 땐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꺾어서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산에 가서 예쁜 꽃이 있으면 바라보고 있다가 그냥 옵니다. 

그 꽃이 보고 싶으면 다시 그 산에 갑니다. 나이가 드니 그렇게 되네요. 

그냥 조용하게, 조금은 투박하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듣는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갑자기 눈물을 떠트리며 흐느낍니다. 그것을 보며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소유하는 신앙이 있고,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요. 

젊을 때는 신앙도 내것, 구원의 은혜, 방법, 공부하듯, 참고서 외우듯 그렇게 소유하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분이 아니예요. 내가 그 분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분도 날 완전히 소유하지 않으세요. 

 

그 분도 날 바라보시며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듯 조심이 다듬어 가시고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 눈에 비친 그 분이 가다듬어 가시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신앙은 때로는 잡히지 않고, 더딘것 같고, 변하지 않는 것 같고, 진보가 없는 것 같지만 내 존재의 모든 것 까지도 주님 손안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을 것 같은 그런 순간들이 지나고 보면 항상 내가 힘써 했던 것보다 훨씬 빠를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없습니다. 교만함이 없이 감사만 남습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그런데 육적인, 혹은 율법적인 마음에 젖어 있던 니고데모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그런 소리도 율법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내가 회개해야지... 

제일 답답할 때가 어떨 때인가? 본심을 몰라 줄때... 진정성을 몰라 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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