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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영향력 (마태복음 5:13-16) 

 

인간- 하나님의 형상 (Image of God) 으로 지음받은 자.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다. Image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상이라도 만들어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표현은 물리적인 형상이 아니라 "성품이요, 영이요,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요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미지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하는 존재요,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 나니아 연대기 "를 지은 C.S. 루이스" - 반지의 제왕을 지은 톨킨의 친구 

창조의 목적 - 삼위일체로 계신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를 확대시켜 인간을 통해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도록 하는 것 - 왜? 참 사랑은 퍼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기 때문에. 영향력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으로 창조된 사람은 영향력을 끼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면 어둠이 사라지듯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는 곳에 죄가 사라지고, 어둠이 사라지고, 기쁨이 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이미지, 즉 영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게 하는 대신에 "거짓 이미지, 보이는 형상으로 현혹"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형상으로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바울을 그들의 신으로, 하나님을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형상으로 포장해 버립니다. 

 

구약의 에스겔이나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사의 네 가지 모습 - 사자, 황소, 독수리, 인간 

하나님의 특성을 네가지 동물들에 빗대어 표현 

사복음서의 특징을 이 동물들의 특징을 통해 설명 

사자 - 왕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소 - 종 - 섬김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인간 - 지혜 -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독수리 - 가장 높이 나는 신령한 - 영이신 그리스도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하나님- 왕, 인간, 독수리-> 아니다. 오직 자기를 위해 종처럼 일하는 하나님 - 무엇으로? 황금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말은 영이요, 사랑이요, 빛이요, 생명이요, 우리를 변화시키는 영향력인데 사탄은 세상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황금으로, 황소로, 아름다운 보석이나 물질로서 바꾸어 섬기게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 십자가의 형상....

 

세상이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에게 심어놓는 것- "영향력"이 아닌 "보여지는 이미지"에 집중하게 하는 것

 

본질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쓰게 하는 것 

화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의 몸짓 하나하나- 이미지...아이돌-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업- 각광받는다. 이미지를 통해 신화를 만든다. 

 

  • 우리나라 - 양반문화, 체면문화-> 이미지를 중시하는 문화.
  •  성경에서 이미지에 가장  신경쓴 사람

- 사울 - 그의 가장 큰 관심사-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가 범죄했을 때에 먼저 생각한 것-사람들 앞에서 망신....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다윗 : 그의 가장 큰 관심사: 하나님과의 관계. 참 이미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춤을 추고, 하나님 앞에서만 진정 회개하고.... 그의 눈의 관심, 초점- 하나님과의 관계.... 참 이미지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는 자- 무리를 뚫고 나오는 자- 무리를 뚫고 옷에 손을 대고, 무리를 뚫고 뽕나무로 올라가고, 무리를 뚫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이미지를 버리는 자. 이것이 참된 이미지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 말씀하신 것

소금이 되라. - 소금의 의미가 무엇인가? 소금이 되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 아이들은 설탕을 좋아하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금 - 설탕은 성인병을 유발하지만 소금은 치료.. 인간의 몸은 물과 소금... 

 

1. 소금은 흔하다. - 낮은 자에게, 보통 사람에게 주신 말씀. 부패방지 

세상,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 

그런데 성경은 통치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으면 살아 갈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 문제투성이인 애통하는 자를 불러내어 세상의 평화를 만들고 부패를 방지하고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지쳐 밥먹을 시간 조차 없었던 제자들에게 수많은 무리를 가리키시며 "너희가 주어라 "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렇게 살면 성령께서 함께 그 일을 이루어 가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세리와 창기, 어부, 농부들과 같은 서민들, 예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세상이 부패되는 것을 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밑에서부터의 개혁, 이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를 살았던 이스라엘을 통해 로마가 복음으로 정복되었습니다.  

 

2. 맛을 내라 

너희들이 세상에 나가서 살맛 나는 맛을 내라는 것입니다. 싱거운 남편을 멋과 맛을 내는 남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내의 소금역할 입니다. 싱거운 아내를 멋과 맛을 내는 아내로 만드는 것이 신앙 있는 남편이 할 일입니다. 무엇으로 맛을 내게 합니까?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를 통해서 싱거운 세상, 더러운 세상을 비추고 맛을 내어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맛을 내지 않고 비판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결국은 자신이 죽어 세상의 맛을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입니다. 

 

3. 살리는 자가 되라 (공동체) 

소금은 우리의 인체에서도 음식물에서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지만 소금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이 중요하다 해도 소금만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금의 진정한 맛은 자신의 짠 성질로 인해 다른 것을 살릴 때에 그것이 비로소 소금의 진정한 맛입니다. 즉 소금은 다른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이란 살리는 것입니다. 소금이 과자에 들어가면 과자의 맛을 살리고,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을 살리고, 여러 가지 음식에 들어가면 그 음식을 살립니다. 모든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서 그 음식의 본래의 맛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는 것이 소금의 역할이고, 그것이 소금의 맛입니다.

만약 음식에 들어간 소금이 다른 양념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짠 맛만 나면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소금이 김치에 들어가면 김치의 맛이 나야지 소금의 짠 맛만을 내면 이미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소금 그 자체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소금은 아무 매력도 없는 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맛은 짠 맛이 아니라 살리는 맛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품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의 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 성품이 녹아져서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금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내가 녹지 않고, 소금 그대로의 맛을 내려고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입니다. 자기만을 나타내는 인생, 자신만을 드러내고 인기를 누리는 인생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영성의 완성은 홀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것이다. 성도는 별거 없다. 공동체를 잘 이루면 그 성도 영성이 참 좋다 생각하면 100% 맞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사는 지역에 마을 공동체, 일터 공동체, 가정 공동체를 잘 이루는 사람이 진짜다." 

한국교회 영성에 큰 영향력을 준 동교동 교회 음동성 목사의 말 

 

반대로 맛을 잃어 어디에도 쓸모없는 소금이란 바로 자기 자존심에 갇힌 사람입니다. 자존심만을 꼭 쥐고 있어서 자신이 항상 잘하고 자기 말이 항상 맞는 틀림 없는 말이며, 자신만이 항상 깨끗함을 나타내는 사람은 맛을 낼 수 없는 소금과 같이 후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여 쓸모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 자기 맛을 끝까지 고집하다가 결국은 음식과 함께 버려지고 맙니다. 나도 죽고 공동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존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우리들의 좋은 것을 끌어낼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사람 그 자체가 악이므로 나를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 하시고 지혜와 힘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끌어내고 그를 높여 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힘은 자존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남편은 아내를,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데에는 자존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누구에게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귀한 여인이 되도록 받들게 됩니다. 또한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어떻게 하면 남편이 고귀한 사람으로서 어디에 가든지 존경 받는 사람이 되게 할까를 염려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 마찬가지로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이 영광 받으실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빛이 될까를 위해 자기를 녹입니다. 
  •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행복하고 고귀하게 자라게 합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남을 자라게 하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통해서 자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나에게 사랑이 없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생명이므로 반드시 자라게 합니다.

자존심은 생명을 막습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막습니다. 남을 막다가 나도 죽고 남도 죽고 공동체도 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을 갖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은 나 혼자 서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정의 자체가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사람 인자는 누군가 있을 때에 내가 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세워 줄 때에 나도 서고 그도 섭니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자라지 못합니다. 자존심 가진 사람이 당할 것은 곧 죽음입니다. 남을 자라지 못하게 하므로 나도 자라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든 것입니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빛이 되라 하십니다. 

  •  빛은 비추기 위해 있습니다. 남을 비추기 위해 있는 것이지 자기 자랑을 위해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비추는 것은 태양입니다. 그런데 태양을 직접 보면 눈이 멉니다. 태양의 빛은 비추어 주는 사물을 통해 태양을 아는 것입니다. 내 빛이 아무리 빛나도 비취는 대상이 없다면 내 빛은 남의 눈을 멀게 하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은 자신을 비추고 빛을 자랑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등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어디입니까? 교회이고 성도의 삶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제 역할을 하는지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국가로부터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곳은 사찰입니다. 문화제를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로 갖가지 명목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찰이 부패했다고 조사하며 신문에 내고 방송에 내는 곳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여기 저기서 감시합니다. 억울한 게 아니라 우리가 바로 산 위의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 위에 두어서 세상을 비취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입니다. 

 

https://youtu.be/idN2LL1YvCM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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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자녀다! (누가복음 19장 1-10절)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확장과 분열을 계속해 오면서 지금은 여러 교파로 나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만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 성공회, 루터교 등의 주요 교단을 중심으로 세부적으로 나뉘면 훨씬 더 많은 수의 교단 들이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은 침례교가 중심을 잡고 있고 한국에서는 장로교가 가장 많은 교회와 교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장로교 하나만 예를 들어 그 차이를 보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 (온누리교회,명성교회), 총신대 중심의 예장 합동 (사랑의교회, 충현교회) 가 1, 2위를 다투고 총신대가 좀더 보수주의 노선을 지향한다면, 장신대 중심의 예장 통합은 상대적으로 온건, 중도 노선 지향 

 

그런데 그 이전에 고려신학교 중심의 이른바 고신파는 총신대의 보수주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 신학을 내세워 안식일날 예배와 가정 이외에 다른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고 교회 내에서 드럼이나 악기 사용도 금할 경우도 많고....

 

이와는 달리 한신대 중심의 기장측은 가장 진보적이라서 교회 내 경건생활을 넘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독려하고 정치에도 적극적... 

 

이런 큰 네 가지 노선을 중심으로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장로교만 100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뉜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에 의해 전해진 장로교가 지금은 백개 이상의 신앙노선으로 갈리워져 있다. 

 

더 웃긴 것은 종교개혁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는가? 루터로부터 

그런데 한국 개신교에서 루터교는 가장 소수파 중 하나... 

그리고 예배 형태라든지 예식은 가장 예전적이고 가톨릭과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루터교 예배를 드리면 루터교를 이단이라고 생각하거나 가톨릭의 아류 정도로 생각.... 아마도 개신교 교파 중에서 성공회 만큼이나 루터교도 어색하게 생각한다. 

 

  • 물론 하나님의 모습이 너무 큰 분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의 말씀에도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4-7)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성령이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교회 안에서 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양성 보다는 획일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커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터 우리는 하나의 옷 (교복)을 입히고,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치루고, 같은 지역 위주, 같은 출신 위주로 뭉치게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한때 정치적으로 주장되던 역사 교과서 

국가에서 주관해서 하나의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 자체가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서 끊임없이 해석하고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기술이 달라지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로 만들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선택하고 해석한 선택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왜 똑같은 사건에 대한 사극이 또 다른 드라마가 되어서 나옵니까? 

광해나 사도세자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만 해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되고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재미가 달라지기 때문 아닙니까? 

 

성경에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복음서가 왜 4개입니까? 

똑같은 사건이지만 관점에 따라, 누가 쓰고 누가 읽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예수의 생애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따로 기록했고 또 그것 하나 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다 들어온 것입니다. 

똑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이지만 열왕기와 역대서를 통해 거의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역사를 하나로 합치지 않고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은 하나이지만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가지 각각 입니다. 

개인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다릅니다. 

한 말씀을 읽어도 은혜받고 감동받고 결단하는 부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살아서 다양하게 역사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령 안에서 화합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도의 모습은 또 얼마나 획일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회 안의 다양한 은사를 인정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냥 불신자, 새신자, 신자로 구분해서 예배 참여하는 횟수, 기도의 양, 성경 읽는 양으로 성도들을 바라봅니다. 

신자 안에도 모습이 다 각각일텐데 내 기준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신자들끼리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합니다. 

 

  • 오늘 본문 -삭개오 

그는 철저히 주류로부터 소외된 인물. 

예수님의 그의 집으로 가시니 

[눅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거기 있는 대다수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한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 형처럼 대다수의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장면을 보고 수군거린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더 하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유대인들은 구원의 기준을 아브라함 (믿음)의 자손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졌다. 

이 말은 지금식대로 말하면 이 사람도 "예수님의 자녀다" 하는 소리다. 그리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그리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듣도록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말씀하신다. 

 

  • 예수님의 사역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자들을 함께 하게 하는 사역- 화목케 하는 사역 

- 열심당원 시몬 및 대다수 제자와 세리 마태, 삭개오. 

- 열 두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무리 

- 좀 더 나아가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이, 더 나아가 이방인이 함께 하도록... 

 

  • 고린도후서 

바울을 비난하고 갈갈히 분열되고 갈등하는 교회 

-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끝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형제임을 신뢰했다. 

 

[엡 2:14-2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하나님 -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서로 돕는 베필이 되게....- 부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그런데 그 속에 죄가 들어가니....이 여자 때문에, 이 남자 때문에....탓, 변명. 

 

그 갈라진 관계를 다시금 돕는 관계로 만들어 놓는 것 - 교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 삭개오 - 주변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고 외면당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었던 것 

           - 주님을 만나기 위한 열심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4절) 

그의 간절함과 열심이 드러나는 구절. 그는 자신의 장애에 주저앉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앞에서고 앞에서도 안되니까 올라갔다. 올라감이 없으면 그 은혜가 무언지 깨닫지 못한다. 

주님은 자기를 보러 모인 무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신다. 

그 곳에서 천국의 복음을 말씀하시고 무리를 제자로 삼으신다. 

 

올라감의 신앙이란 하늘을 향하여 갈급해하고 부르짖고, 갈망하는 신앙이요, 내 영혼의 공허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완전한 반전이 나타난다. 

  •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5절) 

올라간 삭개오에게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 하신다. 그냥 내려오라는 것이 아니라 속히 내려오라는 것이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삭개오에게 무엇이라 말했겠는가? 

나무위로 올라간 아이같은 자에게 "조심히 내려오라. 천천히 내려오라," 이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제자들을 제촉하사 속히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주님.... 

그런데 성경의 구절이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면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왜? 

그 위에 머물러 있으면 갈급함이 곧 교만함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 서 있으면 남들이 다 낮아 보이고, 주님 마져도 내려다 보기 때문이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다 밑에 있다.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뿐이다. 

신앙의 열심과 교만함은 순간이다. 

 

목사의 사역 - 함께 할 수 없는 둘을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것 

                   - 그 안의 성령을 발견하고 신뢰하여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감당하게 하는 것 

                   - 목회는 성도들이 올라갈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목회는 올라가 있는 성도를 내려오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내려와야 주님이 머물고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고 공동체가 된다. 내려오지 못하면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 

                   

  • 목회여정 중에 가장 힘든 한 해 

목회를 계속 할 수 있을까? 내가 목사직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면서 기도하고, 또 말씀에 메달리고... 내가 목사로서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가? 

 

내가 이 곳에서 받은 교육 (GTU)하는 학교 

개신교와 가톨릭 모든 교파의 학교와 학생과 교수를 만나고 보고 체험할 수 있었던 곳. 

세계에서 이렇게 체험할 수 있는 학교가 또 있을까? 

 

논문을 쓰는 중 - 한 명의 교수 (Naomi Saidman) - 유대인, 유대교 전공. - 내가 다룬 페이퍼 -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불같이 화를 냄?-> 사마리아인을 우호적으로 표현한 글을 받아들일 수 없는.... 

 

기독교 영성 -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과 사람, 역사를 배우는 것. 

 

성도들의 지평을 넓히는 것, 분별력 있게 하는 것 

넓은 그리스도의 모습, 넓은 기독교의 영성을 체험케 하는 것. 

나는 집안이 모두 성결교 가족이고 성결교 목회자이고 또한 성결교 신학과 교리가 자랑스럽지만 우리 교인이 성결교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로고스 교회 교인으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설교를 듣던 그리스도를 만나고 참된 말씀을 분별하며 스스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본받고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를 능가해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분별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원한다. 

 

내 사람, 내 교인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교회.... 

 

우연히 듣게 된 한 설교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명 설교가 찰스 스펄전과 조셉파커 목사 

두 설교가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미국에서부터 영국까지 찾아간 목사 

 피터 파커가 시무하는 City Temple교회 - 이천여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고 아름다운 예배당 

 열성적인 설교- 예배가 끝나면서 하나같이 "What a great Preacher!" 

 

찰스 스펄전 - 설교를 듣고 나오는데 교회 건물도 성도들도 다 잊게만들고 설교에 빠져듦. 

나오면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 

"What a great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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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9-29절  제자들의 고백 

 

어떤 원본에는 마가복음이 16장 8절로서 끝남 

9절부터 나머지 부분 - 추가로 들어간 부분

 

그 내용은 무엇인가? 

 

1. 여인들의 증언 

11절) 그들은 (예수의 12제자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꾸짖으시는 예수님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12제자들은 사도들로서 초대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들 

예수를 친히 만나, 함께 동거동락하며 그 분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만진 자들.. 

제자들의 권위가 강력했을 때에...

 

왜 마가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제자들의 수치스러운 실패를 궂이 기록해야만 했을까? 

 

끝에 부분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며, 늘 실수하고, 다투며, 배반하는 모습들...

오히려 이방인의 믿음이, 여인들의 믿음이 복음서에서는 크게 부각된다. 

제자들 틈에 끼지 못했던 아리마대 요셉이나 구레네 시몬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신실하게 등장한다. 

 

우리가 제자로서 복음서의 기록자라면 자신의 리더십을 위해서라도 무용담 하나쯤은 추가하여 제자들로서의 위신도 세우고 권위도 내세울 수 있었을텐데....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은, 스스로를 부끄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구약도 마찬가지고, 신약도 마찬가지고 

성령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그리고 있음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보면,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히 실패와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현장을 도망해야만 했던 처절한 죄의 고백이고 부끄러움에 대한 눈물의 참회록이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바로 실패한 그들에게 Great Commission, 바로 대 사명을 남기신다. 

 

15절)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눅 24:48-4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하신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사명은 바리새인처럼 내가 남들보다 훨씬 잘 믿었다고 의기양양대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가 왔음에도 자기 자리에 급급해서 오히려 메시야를 죽였던 거짓 통치자들에게 주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히 알아 주님 앞에 늘 겸손함으로, 나의 낮음과 그 분의 크심을 아는 자들, 경험한 자들, 그래서 오직 예수 앞에 서면 한없이 머리 숙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사명이다. 

그러한 자들만이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며

남을 정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워주고 보살피면서 주의 길을 가는 것이며

오직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지난 두 달 넘는 기간동안 마가복음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의 길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감추어져있던 수많은 신실한 자들의 모습들과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였던 많은 리더자들의 타락한 모습들을 보면서 지금의 교회, 그 교회에 서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느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찬양) 눈물의 참회록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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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6장 1-8절  빈 무덤 

 

안식일이 지났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일찍

해 돋을 때에 세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간다. 

세 여인이 해 돋을 때에 모여 무덤에 간다는 것은 셋이 밤을 새었을 것이다. 

단지 죽은 예수의 시체가 썩지 않도록 향품을 바르러 간 것이다. 

 

마치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어 "낭비"라고 하는 제자들의 원성을 들었던 것처럼 

남자제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사다두었다가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가를 여인 셋이 찾은 것이다. 

 

또 하나의 여인들의 무모함이 있었다. 

당시의 무덤은 땅 밑에 장사된 것이 아니라 동굴처럼 지상에 자리잡고 있었고, 그 입구에는 장정 몇명이 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큰 돌문이 가로막혀 있었다. 

여인 셋이 아무리 힘을 합쳐 보았자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큰 돌이다.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의 심정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모두가 돌아서서 초라하게 죽은 시체 앞에 여인들은 무엇을 바라고 그 새벽에 그 무덤을 찾았을까? 

무언가를 바랬던 사람들은 모두가 예수의 십자가 앞에 뿔뿔히 도망했다. 

여인들은 오히려 예수 앞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죽은 예수를, 그것도 뜬눈으로 밤을 새워, 자기 돈을로 향품을 사서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기도 하기 앞서 자기 마음에 있는 것들을 비우는 훈련을 했다. 

자기 마음이 더러우면 예수를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여"라는 한 마디를 내 뱉기 전에 마음 속에 조그마한 잡념이나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기도를 방해할까봐 자기 마음을 온전히 비운 후에야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하고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훈련하고, 그렇게 기도를 시작했다. 

 

물론 기도는 어려워서는 안된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이기에 내 마음으로 다가가면 그 분은 내 기도를 들으신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기도를 들여다보면, 끝난 뒤에 무엇을 이야기 했는지, 주님이 느껴졌는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때가 수두룩 하다. 

무언가 잔뜩 부르짖기도, 간구하기도 했는데, 결국은 내 마음의 한풀이로 자기 감정의 정화만을 남긴채 아무런 교제 없이 기도의 처소를 나올 때도 많다. 

여인들은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돌 문이 막혀 있음에도, 새벽 녁 자신들의 집을 나올 수가 있었다. 

 

예수를 보는 것 이외에 아무런 바램이 없었기에...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바램 때문에 오히려 예수의 얼굴에서 멀어져 가고 있지는 않은가? 

부르짖어도 내 뜻에 요동하지 않는 예수의 침묵에 실망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은가? 

그 바램이라는 것이 정말 주님의 존재를 대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인가? 

 

(요한복음 11장 38-39)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십자가의 사건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방해한 것은 바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다. 

 

죽은 예수의 무덤 앞에서 여인들 외에 아무도 예수의 무덤을 찾지 않은 이유도 아마도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돌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하고 이미 치워져 있었다. 예수님에게 무덤의 돌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장애는 그 돌 때문에 예수 앞에 나아가기를 포기하는 내 의식이 문제이다. 

 

우리에게도 예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돌들이 있다. 

죄책감, 두려움, 누군가에 대한 풀지 못한 감정, 무지...

그런데 예수 앞에 서는 순간 그 모든 돌들은 사라진다. 수 많은 돌들은 그저 예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내 안의 형틀인 것이다. 

 

묵상질문) 

1. 오직 예수를 보는 것 외에 다른 바램이 없었기에 예수의 부활에 동참한 여인들을 묵상해 봅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수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바램들은 무엇입니까? 

 

2. 나로 하여금 예수 앞에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문은 무엇입니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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