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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와 한나 (사무엘상 1장 9-18절) 

 

사무엘상이 시작되는 배경은 사사시대 입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이라는 축복된 땅에 들어갔지만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엘가나라는 레위인의 한 가정을 통해서 당시의 영적 사회상을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는 레위인이었지만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서 예배를 집례하지 못하고 저 먼 에브라임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꼬박 꼬박 실로에 와서 영적인 회복을 얻고자 했지만 당시의 제사장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악하고 패역한 제사장들이었기 때문에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하는 레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지만 두 아내의 갈등은 그 가정의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한쪽의 편을 들어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그가 한 쪽 편을 들어줄 때마다 문제는 점점 더 커지기만 합니다. 

 

브닌나는 엘가나의 둘째 처였고 그녀에게는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첫째 부인에게만 가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가진 것으로 인해 만족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언제나 불만이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위해 그녀가 취한 것은 상대방을 격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녀의 처신은 가족 모두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한나는 은총이라는 이름을 지닌 여인이었지만 자녀가 없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되었음을 말합니다. 자신의 문제는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브닌나와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신을 격노하게 해도 한나는 브닌나와 상대하지 않습니다 .엘가나에게 브닌나의 행적을 이르지도 않습니다. 문제의 근본과 그 문제의 해결자인 하나님께 아룁니다. 

한나의 상처의 깊이 - 격분, 격노하였다. 1장에만 6, 7, 16절 세번이나 걸쳐서 그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사람이 감정이 격분하면 아무리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도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가 힘듭니다. 기도가 나오질 않고 성질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나는 몹시 격분한 바로 그 순간에 브닌나를 상대하거나 엘가나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 기도가 새 역사를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각자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여인을 통해서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녀를 통해 사사시대의 막을 내리고 왕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통해서 시대를 여십니다. 

 

  • 오늘 읽은 본문은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엘리 제사장과 한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실로의 성전의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성전 안이 아니라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입구의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제사장이 성전 입구에 앉아 무엇을 합니까? 예배자가 아니라 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온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언약궤가 있는 실로와 와서 제사를 드리니까 누가 오는지 어떤 예물을 가지고 오는지, 아얘 성전 입구에 자기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낙이요 임무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 안에서 어떤 죄악을 저지르건,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건 말건, 엘리의 관심은 성전을 들락달락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목회자가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하고 예배의 관리자나 교회의 관리자로 전락하게 되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부를 찬양을 검색하다가 요즘 가장 뜨거운 찬양 사역을 하고 있는 마커스찬양집회 예배를 인도하는 김남국 목사님이 언젠가 찬양집회를 잠정적으로 중단한다는 동영상이 올라와 있기에 보니 

"마커스 팀이 유명해지다 보니까 어느덧 예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배 인도자"의 모습만 남았다고 하면서 찬양팀이 예배자의 모습을 회복할 때까지 찬양사역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공감을 했습니다. 

 

성전 문설주에 자기 의자를 두고 교회의 관리자로 살아가는 엘리의 최후는 사무엘상 4장 18절에 나옵니다. 

(삼상 4: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 그에 반해 한나는 오직 하나님의 앞에서 기도합니다. 

"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 (12절) 

그가 성전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한참을 있으니까 엘리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진작 갔을 터인데 도대체 나가질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멀찍이서 바라보다가 한참을 지나고 나가지 않고 앉아 있으니까 가까이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무슨 기도를 하나 궁금했는지 엘리가 그녀의 입을 주목했다고 말합니다.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 Hannah was praying in her heart" ) 

소리가 크다고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기도했고, 마음으로 기도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리고 오래 기도했습니다. 

 

물론 기도는 일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몸에 배여 있어야 합니다. 

기도안하는 사람이 급한 일 당한다고 갑자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날마다 숨쉬듯 일상적으로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땐 우리가 우리를 온전히 내려놓고 목숨을 내어 놓듯이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기도하듯, 여호수아가 장로들이 다 돌아간 뒤에서 성막을 뜨지 않고 기도하듯, 엘리야가 하늘을 쳐다보며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듯 우리의 전부를 바쳐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한나는 그냥 기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하였다"(15절)고 말합니다. 영어로 보니까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될때까지 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교회는 건강합니다. 

이런 기도의 성도가 있는 목사는 행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엘리가 말합니다. 

엘리는 누구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한 제사장입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것조차 술취한 것으로 오해하는 어리석은 제사장 입니다.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성전의 관리자같은 제사장입니다. 

그 어리석은 제사장 엘리가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원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길 내가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소릴 들으면 얼마나 신뢰하고 감사하겠습니까? 

아니 너나 잘하세요.....그렇면서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랬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고 은사가 막 나타나니까 지도자들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바울도 무시하고, 아볼로는 쫓아 냅니다.

기도좀 한다고 모든 질서를 다 무너뜨립니다. 잘못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한나는 어리석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영적인 질서를 지킵니다. 

제사장의 소리를 사람의 소리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한나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신앙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신앙이 무엇이 다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다 붓듯이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적인 질서를 유지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좀 한답시고 남을 판단하고 목회자를 무시해선 교만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사로 질서를 흩뜨리지 않으십니다. 

 

(삼상 1:18)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이것이 믿음의 기도입니다. 

 

  •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이 와도 기도하지 않고 그저 낙망가운데 빠져 살다가 왜 하나님이 날 돕지 않느냐며 불평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자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일단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확신도 없고 그저 기도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한 것이고 안 들어 주시면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 뭐 이런거 까지 들어주시겠어 하며 자포자기 합니다. 그 신자의 삶엔 어떤 능력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나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단지 형식적인 신앙만 있지 그 안에 어떤 기쁨도 믿음의 확신도 없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만 하면 뭔가 희망이 생긴 것 같고 문제가 해결된 것 같고 기쁜데 다시 기도 끝나고 현실로 오면 다시 낙망하고 넘어지고 슬퍼합니다. 기도 가운데 얻은 확신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고 현실과 기도 세계가 이어지질 못합니다. 이런 신자는 교회에서는 은혜 받는 것 같은데 집에 가면 혼자 또 힘들어 하고 이분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입니다. 
  •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민감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낙담하여 넘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낙담하여 넘어진 모습을 보여주기 전에 하나님 앞에 와서 자복하고 통곡하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평강이 올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받으실 때까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이 찾아오면 그 평강을 붙잡고 현실에 응답이 임할 때 까지 넘어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묵묵히 기다립니다. 이게 믿음의 사람이고 기도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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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H0dFII98Djw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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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역사의 시작 (사무엘상 1장 1-8절) 

 

사무엘 하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인물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구원의 모델이라고 하는 출애굽 사건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광야생활을 거쳐 드디어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일단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갔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로서 타락하게 되는 과정이 사사기서이다. 사사기서의 주제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그리고 그 왕의 등장을 알리는 성경이 룻기와 사무엘서 

룻기는 이방여인이었던 모압여인 룻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 불리우는 다윗의 조상이 되는가하는 내용이고 사무엘서는 어떻게 다윗이 세워지냐를 다룬 책입니다. 

 

사무엘은 실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던 그 처소에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부르기도 하고, 모세 이후의 첫 대 선지자로서도 여겨지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을 기름부어 왕을 세운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사사에서 선지자로, 왕정국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어찌보면 온 인류의 참 왕이신 예수를 예비했던 세례요한과도 같은 역할이 바로 사무엘 입니다.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부모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 1절에 보면 사무엘의 부친인 엘가나를 소개합니다.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가 있었는데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었더라." (1절) 

이 족보가 나타내 주는 것은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레위 족속인 고핫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다음에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지만 레위 지파에게는 따로 땅을 나누어 주지 않고 6개의 도피성을 비롯한 전국에 퍼져 살게 하였습니다. 

 

레위인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막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국에 퍼져 있는 레위인은 퍼져 있는 장소에서 이른바 산당의 예배를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서를 보면 알다시피 이러한 산당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쉽게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기 일수 였습니다. 그나마 경건한 제사장들은 해마다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재교육도 받으면서 그들의 경건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엘가나도 그런 레위인이었습니다. 레위인 이었지만 실로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멀리 에브라임 산지에서 살며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자였습니다. 속된 말로 하면 중앙에서 떨어져 변방으로 밀려난 레위인이었습니다. 

 

엘가나는 패역한 시대에 나름 레위인으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코자 한 신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두가지 큰 문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1)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사랑하는 아내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인지 당시의 문화 때문인지 엘가나는 둘째 아내 브닌나를 두었는데 브닌나는 자녀를 생산한 여자였습니다. 문제는 이 두 여인 사이에서 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정적으로 불화가 끊이지 않는 것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2) 두 번째의 문제는 영적인 공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년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년 가는 이 행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유도 있지만 레위인으로서 영적으로 교육받고 무장받고 돌아와 자기 고장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육해야 하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지금 실로의 제사를 맞고 있는 제사장은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로 성전에서 음행을 저지르며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패역한 제사장들입니다. 

지금 훌륭한 제사장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돌아가도 한 해 동안 사람들을 인도하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자들이 가장 부패하고 패역한 제사장이라면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자들이 예배를 인도한다는 것은 엘가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불행이었습니다. 

 

  • 엘가나의 두 아내인 한나와 브닌나에게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한나는 첫째 아내였지만 자녀가 없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자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의미보다 훨씬 더 강한 의미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그녀의 영혼을 괴롭히고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나의 이름은 "은총"이라는 뜻인데 자식이 없으니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도 없는 듯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기업과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어딜 가서도 떳떳하지 못했고 남편이 사랑해도 그것이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람구실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느라 브닌나와 그 자녀의 분깃보다 갑절이나 그녀에게 더 주며 물질적으로 그녀를 위로하지만 이러한 영적인 허전함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남편이 주는 갑절의 물질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둘째 아내인 브닌나는 자녀를 가진 아내였습니다. 4절에 "그의 모든 자녀에게"라는 표현을 보자면 브닌나는 여러명의 자녀를 낳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녀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아닌 한나에게 가 있습니다. 여러명의 자녀를 낳아도 항상 한나가 더 많은 사랑과 보상을 받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 여자에게는 수치 중의 수치 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를 보고 있자면 마치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열매맺지 못하는 아내.... 두 여인 모두 행복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두 여인이 앙숙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채워지지 않는 불행한 삶을 서로 이해하고 위로하면 그나마 평안할 텐데 사랑받지 못하는 브닌나는 "한나를 격붖ㄴ하게 하여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설명합니다. 

 

레위인인데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집례하지 못하고 에브라임 산지에 머물고 있는 엘가나... 그나마 한 해의 영적인 무장을 위해 실로로 오면 홉니와 비느하스로 인해 더욱 영적인 침체를 벗어 날 수 없는 엘가나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은혜를 잃어버린 은혜라는 이름의 여인 한나

자식이 있어도 결코 행복하지 못한 여인 브닌나...

이들의 모습은 단지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 주는 모습이요, 어찌보면 우리의 삶과도 대치해 볼 수 있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 문제를 향한 세사람 

세사람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지닌 문제는 이들의 힘으로는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엘가나 - 가장 큰 문제 : 가정의 불화 

이때 엘가나가 한나에게 하는 위로를 보십시오. 

 

(삼상 1:8)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그는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한나에게만 내가 니편이니 울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이 한나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한나의 가장 큰 고통은 브닌나가 자기를 조롱하고 속을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가나는 와서 그 원인도 묻지 않고 단지 내가 널 사랑하니까 다 참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나에게도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만약 브닌나가 이 광경을 보면 더욱 브닌나의 속을 뒤짚어 놓는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입니다. 편애는 결국 갈등을 낳습니다. 이삭의 편애가 형제의 우애를 깨뜨리고 야곱의 편애가 오히려 요셉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안겨줍니다. 

 

본문에 비친 브닌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그녀는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요 탐심이 넘치는 여인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가진 것에 분노합니다. 

물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남편을 통해서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언제나 한나에게 가서 화풀이를 하고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녀의 질투는 남편의 사랑보다도 한나에게 돌아간 갑절의 물질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러한 시기와 탐심으로 한나를 대하면 대할수록 남편의 사랑은 점점 더 멀어져 갈 것이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는가?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 

어찌보면 자기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전가하는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탓이요 변명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기의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뿐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문제에 대해서 엘가나에게 탓하지도 않고 브닌나와 맞서서 싸우질 않습니다. 오직 자기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문제를 만난 세명의 인물은 이제 한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브닌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문제를 키우고야 마는 엘가나

모든 문제의 근본이 하나님 앞에 있고 그 해결 역시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고 그 앞에 엎드리는 한나...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우리는 중요한 두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룻과 한나라는 두 여인입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모압여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며 베들레헴으로 와서 결국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한나는 모든 문제 앞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대에서 자기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며 그 앞에 업드림으로 기도의 어머니, 기도의 사람의 대명사가 됩니다. 

 

어찌보면 구원의 이야기는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하지 못하는 마노아가 순종함으로 삼손을 잉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앙태하는 이야기...

 

잉태치 못한다는 것은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땀흘려도 보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런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제나 문제를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다가 더 큰 구렁이에 빠지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잉태치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선택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할 수 밖에 없고 또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문제가 닥쳤는데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엘가나와 브닌나가 되지 마시고 한나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기도의 사람이 되십시오. 

 

https://youtu.be/IisEzxxHHOg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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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장 30-32절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막 6:30-막 6:32]

(막 6: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막 6: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막 6: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 사도 - apostlle - 대사, 파견된 자, 청지기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히 고하니 - 6장 7절-13절에 이어지는 말씀 

예수 공생애의 초창기 - 그들이 많이 배워서 가르치고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파송하여 사역하게 함.

 

제자- 배우는 자, 따르는 자 Vs 사도 - 일하는 자 

 

  •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한적한 곳- 붉은 순교의 시대가 끝나고 흰색 순교의 시대. 한적한 곳을 찾아 사막으로, 또 사막으로..., 흰색 순교의 시대를 지나 녹색 순교의 시대 

 - 한적한 곳은 장소가 아니라 내 심령의 빈 공간이다. 세상 것으로 가득찬 마음이 아닌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온 우리의 영혼의 공간이다. 

한적한 곳에 나와 하는 일 - 쉬고 음식을 먹으라. 쉼(안식), 음식을 먹으라 (말씀을 들으라) 

왜? 세상에서는 오고 가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 방향을 잃은 사람들, 정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음식 먹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ex) 승구야, 말씀을 읽어라 하시는 말씀.... 

 

  •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갈새 

배- 교회를 상징한다. 노아의 방주,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주님, 내 삶에 들어오신 주님. 

한적한 곳- 주님과 만날 수 있는 곳, 로뎀을 지나 호렙산으로, 안식일은 쉼을 지나 임재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 오이코스 인텐시브 코스 - 학기마지막 수업 - 레이크타호에서 1주일간의 합숙 수업 

                                   - 대부분 직장인이거나 미국에 체류하기 위해 있는 학부모 

                                   - 1주일간을 집을 떠나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든 사람들... 

                                   

  • 한적한 곳에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시간은 곧 예배이고 그 예배는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다. 안식과 말씀으로 채워진 삶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예배를 통해 안식하고 말씀으로 채워진 자에게 주님은 영혼을 먹일 능력을 주신다.

 

야외예배의 의의 

1. 작장인 선교회 박홍일 장로 

주일, 예배당, 성직자 중심의 예배 -> 예배당을 벗어나 함께 어우러지는 교제도 역시 예배이다. 

(인하대 알레데이아, 군대군종, 그리고 징검다리) - 교회 밖에서의 사역) 

 

2. 계시 :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 

일반계시 (성경), 특별계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연계시 (자연을 통해 만나는 하나님) 

 

3. 안식과 예배 (마태복음 12장 1-8절) 안식일날 밀밭 사이로 지나며 이삭을 먹던 제자들) 

  • 예수님과 제자들 -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회당이 아닌 밀밭, 이삭을 잘라 먹는 일 

 

바로 이전 구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왜 밀밭 사이로 갔는가? 지치고 시장한 자들이 쉬고 먹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눈에 그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일로 보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회당이 아닌 밀밭에서 이삭을 먹는 것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하신다. 

 

주일날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 - 주님과의 소중한 약속 

그런데 반드시 거기에 얽메일 필요는 없다. 

때로 예배당 밖에서 예배를 드리고, 때로 순서가 갖추어지지 않은 그런 때라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께 예배할 수 있는 예배자임을, 어느 장소, 어느 순간에서도 주님을 향해 내 마음을 드릴 수 있는 온전한 삶의 예배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은혜 

- 예배가 멈추어지거나 식어가는 때에 개척하게 한 은혜 

-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할 그런 상황에서 한 주도 빠짐없이 이영자 권사님, 케이티 집사님 짐에 함께 모여 안전히 예배하게 하신 은혜 

- 그 중점에서 아름다운 예배처소를 얻게 된 은혜 

-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또한 야외예배까지 드리게 된 은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https://youtu.be/q_FaqwDSmRs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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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씨름인가?  (창세기 32장 22-32절) 

 

서양과 동양, 그리고 유대인들마다 각각 인간의 정의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각 문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인간을 사람 인(人) 자와 사이 간 (間) 자를 써서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 인자 하나를 보아도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따 만든 상형 문자이며 여기에다가 사이 간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사람들 사이라는 사회성,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유학와서 명어로 쓰거나 말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교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라는 말 속에 나를 숨겨서 표현하는) 누가 그랬데....

 

라틴어, 영어권에서 인간 -human- humus - 흙, 먼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성경에서 근거한 어원이지만 결국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덧없음, 먼지, 허무주의, 니힐리즘... 

히브리인- 인간- Ish (욕망, 불덩이) - 인간은 곧 육망하는 존재. 

 

이 욕망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욕망은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의 근원이기도 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선악과의 해석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잘못된 욕망은 곧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고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교만이고 곧 죄의 근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정의 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면서 바라는 말씀에 근거한 선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욕망을 Lust, greed등을 표현하면 죄와 연관되지만 desire, hope등으로 표현하면 선한 갈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한 갈망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큰 갈망은 곧 passion이다. Passion은 그 의미가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가리키는데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그 의미를 보여준다. 

 

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욕망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욕망, 열망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열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볻받으며 따르는 삶 역시 passion 이다, 거룩한 열망을 가지는 삶이다. 

 

이 욕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스리엘 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욕망) + Rah (보다) + El (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 야곱처럼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이겨야지"하는 마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이기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한 잘못된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표현했을까? 

당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32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Ish를 사람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란 의미이지만 어원 그대로 욕망,갈망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영성적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닮기를 갈망하는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도 야곱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왕 다윗, 모세와 엘리야 같은 지도자는 존경해도 자기 롤모델이 야곱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야곱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장면이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신다. 이 씨름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가다듬이 가시는 씨름이 시간이고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옛 성품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씨름이다. 힘겨운 씨름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씨름하시고 우리는 안변할려고 불순종하려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면케 하기 위해서 씨름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바로 우리 안의 죄된 본성 때문이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잘못된 욕망에 이끌린 자. -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린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이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끝을 보면 드러납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룹니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악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계속 두려움이 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 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럴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응답해주십니까? 

우선은 내가 자격없고 엉터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야곱은 이제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자격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육탄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돈도 없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최후의 보루로 결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질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길들여 진자. 말씀으로 훈련된 자.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뚝 절뚝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우리가 고치고 싶은 것 - 성형 수술 하듯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부분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이름을 바꾼다. 내 본질을 바꾸신다. 

나를 부모의 유전이나, 세상의 풍습에서 떼어 하나님의 가지에 접붙인 자가 되게 하신다. 

 

https://youtu.be/p8xqOlamQDQ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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