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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막 16:1-14)

 

부활, 새로운 해의 소망 (2018년 새해에 지은 시) 

 

단지 똑같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 새해라 부른다. 

새해가 밝았으니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새해엔 소원 성취하라고

새해엔 건강하고 다 잘 될 것이라 다들 덕담이다. 

왜 어젠 그런 소리 못하고 오늘엔 이렇게들 소란들인가!

그래 새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해가, 새로운 시간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게다. 

 

그 때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음에도 

하늘엔 잔치가 열렸다. 

사탄이 패배하고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그 날, 

제자들은 숨기에 바쁘고 

거짓 종교인들과 로마의 관리들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안도했던 날, 

하늘엔 새해가 시작되었다. 

 

부활의 날,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날, 

십자가를 저주에서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킨 날, 

그 날 후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이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해가 돋았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래, 우리의 새해는 바로 부활이다! 

 

1.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12장 - 은사장, 13장 - 사랑장, 15장 -부활장) 

(고전 15: 12,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기독교 -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수많은 위인들과 성인들 -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긴 하지만 부활을 기념하는 종교 - 기독교가 유일하다.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 -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첫 번째인가? 

No!

구약에서 엘리야 시대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 

예수님 때의 회당장 야이로의 딸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로 - 죽어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죽은 냄새가 나는 자가 살아남) 

 

그런데 왜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나? 

주를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영생의 첫 모델이기 떄문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에서 선언하신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2. 부활을 믿느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예수 믿는 우리도 주의 재림의 날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어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전 이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뿔뿡히 흩어졌을 지라도 그들이 제자들로서 주님 말씀을 기억했더라면 그래도 열 두 명 중 몇명이라도 부활을 기다리고 믿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열 두 제자 중 어느 제자도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적으로는 사탄의 세력이 힘을 잃고 하늘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낸 그리스도를 위한 잔치가 열렸는지 모르지만 부활의 바로 그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는 자 누구도 예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3. 부활의 증인 

 

1)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부활을 가장 기다리며 걱정했던 것은 뜻밖에도 종교 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마 27:62-64)...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속이던 자가 말한 것을 두려워하여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사흘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자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속이는 자이고 누가 진실한 자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그리고 나서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주일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들이 와서 빈무덤을 보고 놀라는데 여인들과 함께 무덤이 열리는 것을 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입니다. 

(마 28:4)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들은 지금 로마의 군사들이지요. 그러니 이 부활사건, 자기들이 지키던 시체가 없어졌으면 누구에게 보고를 해야 하면 로마로부터 파송받은 총독 빌라도에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보초를 잘 못선 벌로 사형을 받을까봐 두려워서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마 28:12-15)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했다는 것은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공식적인 회의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하나님을 정말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었다면 병사들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가 정말 부활 했다면 그를 찾아나서서 회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가 메시야인가 확인해 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소식은 회개나 신앙을 그들에게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는데 그 결과 또한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회의를 열어 내린 결과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첫째,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어 (뇌물을 준 것이지요) 

둘째, 그들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하라. (거짓말을 시킵니다) 

셋째,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사형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해 주겠다...) 

 

-> 그들은 메시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지위, 체면, 사회적인 안전만을 위해서 예수를 죽였고, 부활하신 예수마저도 사람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2. 여인들과 막달라 마리아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돌이 막혀 있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도 무작정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 - 빈 무덤을 본다. 

그리고 무덤에 흰 옷 입은 청년 - 천사

6-7절)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9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3. 제자들의 반응 

11절)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절)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에 자세히 소개) 

->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더라 

 

또 요한복음을 보면 20장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나타나 다른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보왔다고 하는데도 난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14절)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음이 없는 것 -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 주님의 말도, 믿음의 형제들의 말도 믿지 못하는 것 

그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누군가의 증언도 아닌 자기가 믿고 싶은 것, 자기가 되고 싶은 것만을 믿은 것-> 마음이 완악하다. 

 

  • 어떨 때 보면 정말 신앙생활을 믿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닐 안믿을랴구 안믿을랴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기도 밤낮 해도 결국은 자기 감정대로,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순종없이... 신뢰함없이. 믿음없이... 

 

4. 막달라 마리아 

이에 비해 예수님의 부활의 장면에서 유독 눈에 띠는 한 사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막 16장 1절에서도 여러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맨 처음으로 언급하고, 9절에도 그녀의 이름을 따로 언급하며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에게 보이심. 

 

기독교 역사상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여인 

1) 예수를 부정하는 안티 기독교 입장 - 그녀의 증언을 신빙성 없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의 부활 장면을 목격한 병사들은 거짓증거를 내세우면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게 누구인가? 그 장면을 같이 본 막달라 마리아...어떻게든 로마병사와 종교지도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믿지 못할 여인으로 만들어 버려야 했습니다. 

 

카잔차스키라는 작가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책,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많은 안티 기독교인들의 호응을 얻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당시 유명한 귀족 부인이었으며 "예수의 부인"이었고 예수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곧 성배였다는 결론까지 이르릅니다. 

기독교계와 학계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반박했지만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과 호응을 일으키기에 딱 알맞은 주장이었습니다. 

 

2) 기독교 공동체 

열 두 사도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선 

그녀의 정체성을 혼란시켰다. 

  • 우리는 흔히 막달라 마리아를 간음한 현장에서 붙들려와 돌에 맞아 죽을 위협에 처했을 때, 예수님의 지혜로운 한마디로 살아난 여인으로 착각합니다(요한 8,1-11).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또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며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요 12:1-8)과 동일인으로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1절은 그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요 11장)로 혼동하기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동일인은 아닙니다. 단지 일곱 마귀에 들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한 고통스러웠던 여인일 뿐이었습니다(눅 8:2). \
  • 또 하나의 역사적인 오류가 이 여인을 그릇된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1년 누가복음 7장 36-50절에 언급되는 “죄 많은 여인”을 지칭하며, ‘죄인’을 이르는 헬라어 ‘harmartolos’를 ‘창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porin’으로 잘못 해석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1969년에야 이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은 약 1500년 동안 막달라 마리아를 회개한 창녀로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3) 막달라 마리아 

복음서에 표현되고 교회역사가들의 평가 - 초대교회의 중요한 여성리더 

 

"가장 먼저"라는 말은 특별한 표현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 후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한 사실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충격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여인은 증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의 소식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꾸며낸 일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를 첫 번째 증인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언젠가 책에서 읽고, 너무 감동이 되어 기록해 두었던 시  

 

 "마리아의 고백"

 

까닭을 묻는 이에게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답한다.

의아심으로, 의구심으로, 약간은 질투심으로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편애하시고 또한 그녀에게 나타나서 부활의 소식을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그러셨을까?"하고 묻는 이들에게 그녀는 답한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답니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조차 없이'고생하며 돌아다니실 때 나는 그곳에 함께 있었지요(눅8:3).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어요(막15:40).

요셉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고요(막15:47).

요셉이 예수님을 무덤에 안치할 때에도 나는 그곳에 있었답니다(마태 27:61외).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도 나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빈 무덤', 그곳에 가 있었지요(막16:1-2).

물론, 베드로와 요한이 황망 속에 다시 숙소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무덤 밖, 그곳에 여전히 울면서 서 있었답니다(요한20:11)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이 최초로 나타나신 그곳, 그곳에 나는 또 약속처럼 있어야 했던 것이지요(요한20:13-18)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분이 전부였기 때문이에요.

내 사랑이 향할 데도 그분이었고,

내 관심이 쏠릴 데도 그분이었고,

내 시간이 바쳐질 데도 그분이었지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그분이 체포되었던 그순간,

이어 철저한 실패자로 종을 친 그 비통의 순간,

끝내는 모든 꿈이 날아간 듯이 보였던 그 절망의 순간에도,

여전히 그분은 나의 하늘이었답니다.

 

까닭을 알고 싶으신가요?

왜냐하면 그분은 내 일생의 유일한 의미였기 때문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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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제자들은 3년동안이나 예수를 따라다녔지만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은 항상 "나"였다. 

주님이 왕이 되면 내가 받을 상급, 내가 얻게 될 지위. 

예수가 죽자 그들은 생각은 이제 예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뭘하고 살지... 성령을 받기 전 그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항상 "나"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의 관심사는 항상 "그 분" "주님"

사도바울..마리아... 살아있을 때에.. 어쩌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서럽게 억울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주님을 생각했던 자들....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주님이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항상 그 자리에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는 매 주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도 항상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새긴다.  

매일 같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여러분이 없으면 찾게 되고 앞으로도 찾을 것이다.  

무슨 일일까? 아픈가? 속상한 일이 있는가? 시험에 들진 않았을까? 

내가 이 자리를 지켜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난 여러분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고 항상 바란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파격적인 임무를 주신 이유;

오직 그녀 만이 언제나 주님 곁에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먼저 그녀에게 보이셨다.  

 

여러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예수의 부활을 깨닫고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봐 로마 총독이 아닌 제사장들을 찾아간다.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의 부활을 알고도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오히려 병사를 매수하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거짓증언하게 만든다. 그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도, 부활한 예수 앞에서도 그들이 기다린다고 하는 메시야를 언제나 거부했다. 

예수의 제자들 - 마리아에 의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통해서도,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증언해도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는데도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세상으로 향한다. 

모두의 관심이 예수가 아닌 "나 자신"에게 가 있었기에 그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지 못한다. 

예수를 따라다닌 자들도 예수를 통해 자기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증인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예수가 살았을 때도, 십자가를 질 때도, 죽었을 때도, 돌문이 막혀있는 무덤가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자리를 지킨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부인하는 공동체나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마저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예수 부황의 첫 증인이 된다. 

 

예수를 통해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님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가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폭풍우가 몰아쳐도, 때론 침묵하고, 내 인생이 힘든 상황이라도 그 분 안에 있는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드린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는 우리가 되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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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 시간에 (마 26:17-35) 

 

1. 종려주일 :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마지막 고난의 일주일 - 가장 드라마틱한 일주일 

왕의 입성- 논쟁- 침묵 - 만찬- 체포- 고난- 죽음 - 부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실패와 승리가 너무나 극적으로 반전에 반전을 이루는 시간...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 묵상집을 통해 예수님의 종려주일 후 마지막 일주일의 여정을 살펴 볼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금요일은 성금요일로 십자가상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며 함께 예배드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주일날 - 우리는 3개월여간의 우리 케이티 집사님 댁에서의 개척예배와 개척하는 데에 있어서의 모든 준비과정을 걸쳐 본예배당으로 입성하게 되고, 4월 마지막 주에 창립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을 알리는 종려주일은 비록 빌린 예배당이지만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가 공식적인 예배당에 입성을 앞둔 우리에게도 너무나도 뜻깊은 주일인 것 같습니다. 

 

2. 목요일 -  최후의 만찬 

내일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히 살펴보며 함께 묵상할 터이지만 오늘 본문은 그 일주일 중에서 목요일날 이루어지는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루 전  수요일 - 침묵의 날 (그 분주한 여정 속에서 수요일날에는 아무런 행적을 남기시지 않는다. - 침묵의 날) 

하루 후 금요일 - 십자가의 고난, 죽음 

 

내일 있을 일을 미리 아시는 주님 - 마지막 시간을 누구와 보낼까? 가장 의미있는, 가장 사랑하는...제자들과 목요일 마지막 밤을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육신적 가족보다 제자들이 그분의 형제였던 것이고, 그들에게 최후까지도 남겨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3. 만찬을 맞이하는 제자들과 예수님 

  • 제자들 - 한 껏 들떠 있었습니다. 종려주일날 받았던 백성들의 환호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리고 맞이할 유월절.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들뜸은 곧 평화와 안식이 아니라 주님이 왕이 되면 그 다음 자리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는 경쟁과 시기와 갈등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맞이하는 만찬은 서로 주님께 인정받으려는 그런 자리인줄도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 -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식사자리가 평안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고난보다 더 답답한 것은 자신이 앞으로 될 일을 제자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 생각에 꽉 막혀 예수의 하는 일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갈 것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과는 달리 한껏 들떠있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만찬 자리에서 행하신 세 가지 것 

(1)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21절) 

한껏 들떠 있는 제자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 만찬 시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너희 중에 하나는 가룟유다를 지칭할 것입니다.

왜 그가 예수님을 팝니까? 앞에 15-16절을 보면 단지 은 삼십냥을 위해 예수를 팝니다. 은삼삽은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 

스승인 예수, 아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값에 팔아 넘기는 것입니다. 

 

언제나 마찬 가지 입니다.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 앞에 닥친 잠깐의 만족을 위해 신앙을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앞에 놓인 잠깐의 쾌락을 위해, 혹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과의 신뢰를 깨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면서 구원코자 하는데 우리는 당장의 작은 어떤 것을 위해 예수님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왜 이 자리에서 하셨을까? 가룟유다가 배반할 것을 미리 예언하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를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유다를 회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모든 제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보다는 따로 불러서 "네 마음에 죄악을 다스려라"하는 방법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만 한 말씀이 아닙니다. 뒷부분에도 나왔지만 가룟유다만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지요. 

56절에 보니까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왜 그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합니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그토록 말씀하셨던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왜 유다에게만 나를 팔려는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말아라. 너 그렇다가 큰일 난다.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설사 누가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도 그렇하지 못하도록 서로 권면하고 잘못을 막아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뭡니까?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왜 그들이 몹시 근심하였을까? 자기들 안에서 언제든 주님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가 아니라면 떠날 마음을 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 안 품었다면 근심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근심하여 열 두명이 각각 "나는 아니지요?"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곧 교회 생활 입니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공동체 중 하나에 구멍이 뚫리면 결국 모두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이 위험하고 시험에 들었을 때에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곧 교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 앞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날 팔리라 하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이 자리에서 왜 예수님은 그토록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까? 

신앙은 서로에게 관심 갖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섬기고 보호하는 것이 구원받는 사람의 모습이고 양의 모습인 것입니다. 

 

(2) 내 살과 피를 먹으라 - 성찬과 세족식 

서로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이제 은 삼십냥을 가지고 자기에게 입을 맞추며 로마 병정들에게 넘겨줄 유다

죽어도 배반하지 않는다고 했음에도 자기 살겠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베드로. 

로마 병정들의 위협 앞에서 다 뿔뿔히 도망칠 나머지 제자들....

한시간도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해하며 졸기만 하는 그런 제자들. 

 

제가 만일 예수라면 한 한시간동안은 혼을 내며 잔소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을 해서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잊어버리지 말고,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일을 가르쳐주고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아얘 포기하고 홀로 시간을 보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편이 훨씬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 바라 볼 수록 앞으로 그들이 행할 일들이 더욱 괴씸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아리랑: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 

 

그런데 예수님 

(요한복음 13장 1절) 유월절 전날,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떄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내 살과 피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내 살과 피로 너희를 구원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씼겼습니다. 

 

우리는 세족식을 경험했거나 들어봐서 알지만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긴 다는 것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다는 것. 

이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일입니다. 전대미문이 사건입니다. 

그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서도 스승이 제자를,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의 발을 씻긴 예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행하셨을까? 

어떻게 그 만찬, 최후의 만찬 시간에 그들의 발을 씻길 마음을 가지셨을까? 

 

첫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격려, 수고했다.

미우나 고우나 3년간을 함께 했던 제자들을 손수 씻겨 주신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하는 것. 

공생애의 일과를 함꼐 했던 제자들의 수고와 피곤함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발을 씻기시는 예수의 마음은 용서였을 것입니다. 

나같으면 쳐다보고만 있어도 화가 났을 그 순간에 주님은 용서함으로 그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과거의 모든 어리석음 뿐만 아니라 이제 다가올, 그들 마져도 너무나도 후회할 그런 모든 배반과 저주의 일들을 예수는 미리 용서 하신 것입니다. 

 

셋째, 발을 씻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라"(요 13:14) 라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잘하고 기특한 자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떠나가고 도망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결국 끝까지 그들에게 예수의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방탕한 아들, 맨날 사고만 치는 그런 자녀를 끝까지 용서하고 믿어 줄 수 있는가? 

우리는 혼내고 잔소리하고, 꾸짖는데 익숙하지만 가장 엄한 회초리는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난 정말 실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서도 얼마나 실수투성이인줄 모릅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판 유다처럼 나도 시시 때때로 너무도 하찮은 일에 주님과의 약속을 깨고 내 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실패한 마음, 죄책감이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려고 하면 염치가 없어서 기도조차 안나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억지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하면 제가 어떤 잘못을 해도 주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니 용서라기 보다는 그냥 제 마음을 받아주시고 "승구야 난 너를 믿는다"하십니다. 

 

여러분, 난 회개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셨다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회개하는데 막 화내셨다 하는 분 있습니까? 

다 용서하셨지요? 

다 받아주셨지요? 

그리고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우리지만 끝까지 믿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더러도 이렇게 격려하고, 용서하고, 믿어주며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 심보가 참 못되서 혼을 내다 보면 잘못한 줄 알아도 인정하지 못하고 성질 부릴 때가 많습니다. 

잘못한 줄 몰라서 안고치는 것이 아니라 심보가 못나서 성질내고 않고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어다." 

호되게도 아니게 하나님의 가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한낱 가인이 하나님이 따끔한 지적에 회개하지 않고 살인을 합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가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죄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두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곧 넘어질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일 잘하고 인정받는 제자들을 위해서 살과 피를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곧 넘어지고 배반하고, 떠나갈 자들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신앙인 

"내가 이런 이런 일을 해서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어..."

자기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자격 있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자격 있는 사람만 구원하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없기에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격없는 우리앞에 주님이 무릎을 꿇으시고 우리의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십니다. 

발을 씻김으로 죄인인 우리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시고,  주 앞에서 잘못한 것들을 용서하시고, 그리고 실수 투성이인 우리임에도 끝까지 믿음을 주셔서, 우리 또한 그렇게 살라고, 부족한 자들의 발을 씼겨주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수건을 두르시고 천지를 지으신 그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씼겨 주시면서 내가 너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씼겨 주어라 하십니다. 

 

지난 3개월동안 함께 했던 가정 예배 

코로나로 모일 수 없는 중에도 우리는 모였고 예배드렸고, 또 조심스러웠지만 교제했다. 

기쁨도 있었지만 사로의 부족한 모습도, 어쩌면 실망스런 모습도 보았을 수 있다. 

이제 더 큰 예배당에 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금까지 우리생각보다 항상 더 빠르게 더 많은 것들을 역사하신 하나님꼐서 어떤 일들을 예비하고 계실 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처럼 기쁨과 슬픔, 죽음과 부활, 실패와 승리가 롤러코스터처럼 왔다갔다 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모였던 이 장소, 이곳에서 누렸던 기쁨, 그리고 사랑을 잊지 말자.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고 그들에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하셨던 예수님의 새 언약처럼 처음 시작했던 우리 멤버들을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발을 씼겨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가 행복하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의 우리 교인들도 행복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서로 "나는 아니지요?"하는 마음으로 자신만을 챙긴다면 모두가 무너지는 둑이 될 것이다. 

예수의 살과 피의 능력으로 서로의 발을 씼기는 예수 공동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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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32-45절 세번의 십자가 선언과 제자들의 반응 

 

마가복음 8장 27절부터 - 베드로의 고백 (예수의 공생애와 마가복음 전체의 Turning Point)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때, 비로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보여주신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그리고 부활의 길 

 

  • 세 번에 걸친 십자가와 부활의 길 선포 

1. 첫번째 죽음과 부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2. 두번째 죽음과 부활 (막 9:31-3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무이더라.  

제자들의 반응 :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영적 반응) 

육적반응: 누가 크냐? -> 여전히 세상의 원리, 황제의 원리. 

 

3.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의 선포 (막 10:33-34)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 

 

  • 에수의 십자가 선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1. 첫 번째 (막 8:32-34)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 예수에게 대항하다. 예수를 꾸짖다.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너희도 이 길을 가야한다) 

 

2. 두 번째 제자들의 반응 (막 9: 32-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ㄹ한 것이 무엇이냐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 왜 묻지 않는가? 관심이 없기 때문에...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그 일은 내가 싫어하므로....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복음은 이미 우상숭배이다. 샤머니즘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우상숭배 -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 자기 우상이다. 

 

3. 세번째 예수님이 세 번째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는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은밀히 찾아와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른바 은밀한 청탁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반응이 없는 것

아픔이 있어도 반응하지 못하는 병, 

불에 디어도, 살이 썩어도 반응하지 않는 병- 문등병. 죄악의 병, 저주의 병 

 

말씀하시는데 반응하지 못하는 병은 죽음의 병이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다. 

주님은 점점 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죽음을 향해 가는데, 제자들은 처음엔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급기야 반응하지 않는다. 

 

  • 똑같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은 죽으러 가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고 계속해서 높아지고만 하고 그것도 점점 더 은밀해져가며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를 하려고 한다. (세상의 방법으로 높아지려 하는 것)  

 

이 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막 10:42-45)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너희를 주관하고 명령하고 통치한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잘보이려고 알짱 거리고 아부하고 또 끊임없이 청탁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저 어린아이를 섬기듯이 사람들,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 

 

내가 너희를 섬김같이 너희도 섬겨라. 

 

묵상질문) 

1. 같은 목적지를 향해 동행하지만 정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가는 예수와 제자들을 깊이 생각해보자. 내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목적과 그 방향인가? 

 

2.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아얘 반응하지 않는 제자들을 바라보자. 말씀속에서 내가 듣기를, 반응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말씀은 없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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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 27-38절 (Turnig Point) 

 

16장 마가복음의 정확한 중간지점. 

 

유대인의 지역에서 오천명을 먹이시고, 또 이방인의 땅에서 4천여명을 먹이신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신다. 

이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이다. 

 황제의 이름을 붙이려면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어야 한다. 원형경기장이 있어야 하고, 신전이 있어야 한다. 바로 크고 대리석로 치장한 화려한 신전이 있는 곳에서 주님은 초라한 옷을 입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반응-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 -> 그들의 공통점-> 예수를 뛰어난 사람으로는 보았지만 그 분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했다. 아무리 눈에 기적이 나타나고 병고침을 보아도 사람의 일로 보았다. 사람이 하는 일로 보았다. 운이 좋아서, 어쩌다가 되는 일로 보았다. -> 어쩌다가의 끝-> 이 지구, 은하계, 나아가 나 자신도 어쩌다가 우연히 생겨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완벽한 작품을 보고서도 사람의 일로 본다. 우연으로 본다. 

 

사람의 한계 안에서 메시야를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영성이라는 것 -> 물질적이고 육신에 갇힌 삶을 살면서 영이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성품. 왜?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창조했으니까...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서 영적인 것을 빼앗아가려 한다. 왜? 

영적인 능력이 없으면 그들이 우리보다 뛰어나니까... 영적인 질서 안에서 천사는 우리를 섬기는 자다.. 돕는 자다. 인간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닮아 그 분이 맡기신 생육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에게서 영성을 빼앗아가려 한다. 

예수를 인간으로서 따르게 한다. 메시야라는 고백을 할 수 없게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은 그들에게 다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친히 가서 증거하게 하시고,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그리고 귀신을 쫓게 하신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병든 자를 치유하고 5천명을, 4천명을 친히 먹이시는 하나님임을 보게 하신다. 

왜? 그들이 영적인 존재로 태어났음을... 하나님의 일을 나눌 사람들이 바로 그들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권력이 있는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가이샤라 빌립보 지역에서 

 

 로마의 상징: 힘(권력, 군사력, 경제력), 지식(대형 도서관, 서재의 크기를 자랑함) 아름다운 인간의 육체(조각상 즐비) 거대주의, 성공제일주의, 황금만능주의

  그 상징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신앙의 고백을 듣는다. 

  너에게는 내가 저 로마의 모든 것보다 훨씬 값지냐? 

  세상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 보다 나의 것이 더 좋으냐? 

  

  주는 ->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로마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과 권력과 지식이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리스도시요-> 당신만이 나의 구원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400여년동안이나 말씀이 끊겼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 다윗의 예배를 기뻐 받으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아들-> 당신이 메시야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다. 

  

이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다. 

교인은 누구인가? 교회 나오는 자들이 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는 자가 교회이고 교회의 교인이다. 

 

이 고백이 없으면 교회의 생명력은 상실된다. 예수가 정말 내 주인인가? 난 주인에게 충성스런 종인가? 

이 고백을 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하늘의 크고 놀라운 비밀들을 알려 주신다. 

 

가장 높은 자가 가야할 가장 낮은 길.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길. 

 

더 깊은 길로 인도하는 주님 앞에 항변하는 베드로 (Peter took him aside and bagan to rebuke him.)

그가 예수를 끌고 가서 그를 꾸짖었다. 화를 내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영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로 육의 일을 생각하는 구나! 

십자가 없는 영광의 길로 가라. 지름길로 가라. 신앙에는 지름길이 없다. 광야를 거치고 연단을 거쳐야만 갈 수 있다. 십자가의 길로만 가야 한다. 

죽지 않고 천하를 얻으려 하는 생각

 

썩어져 가는 씨앗이 되라! 왜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가? 왜 죽지 못하는가? 한알의 밀알이 되지 못하는가? 

 

내일 살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내일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가이사랴 빌릴보- 음란하고 죄 많은 세상이다. 자기만을 위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의 중심에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묵상 질문) 

1. 왜 하필이면 가이사랴빌립보라는 도시에서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고백을 들으셨을까? 

2. 십자가의 길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꾸짖는 베드로를 바라보라.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 않을까?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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