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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43-52 우리 모두가 

 

1. 첫 번째 배반자 - 가룟 유다 

-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 : 여전히 예수에게는 특별히 사랑받은 제자 

- 검과 뭉치: 힘, 권력, 무력...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왔을까? 예수의 왕궁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아가페로 그 모든 힘들을 무력화시키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무력 앞에 사랑은 너무나 하찮고 보잘 것 없다. 그러나 결국은 사랑이 이긴다. 사랑이 칼을 이긴다. 

- 입을 맞추니: 예수를 팔기위해 입을 맞추는 인간, 어쩌면 예수를 파는 장면에 있어서 가장 사악한 인간의 모습, 겉으로는 모든 교양과 친절과 존경을 가지고 예수를 대하지만 그 입술엔 독이 있다. 독이 묻은 입술이 결국 예수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다. 

 

2. 두 번째 배반자 

50절)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특별히 베드로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누구할 것 없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 예수를 버린 제자들. 더 이상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을 찾아올 때까지 모든 사람들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된다. 

세상은 예수를 버리면 자유할 것이라 우리를 유혹한다. 

그런데 예수를 버리면 우리는 영원히 세상의 도망자가 된다. 

예) 군대에서의 술 경험 - 일반대생이었지만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개척하고 나서 얼마되지 않아...

회식만 되면 술한잔 해라. 왜이리 꽉막혔냐? 군대는 명령이다. 상급자 뿐만 아니라 장교들까지....

몇번을 사양한 끝에 한 번 잔을 받아 마셨다. 

그런데 그렇게 술을 먹이려 나를 여러 말로 설득하던 그들의 입에서 "역시 너도 별것 없구나. 내 그럴줄 알았다."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 

 

3. 세 번째 배반자.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헤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베 홑이불 - 세마포 : 부자들만이 사용하는 이불, 혹은 겉옷 

오직 마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 

두 제자에 의해 준비된 다락방의 주인집 아들- 어머니는 구브로에서 온 마리아 

마가는 바로 구브로 출신의 바라바의 생질. 

 

아마도 마지막 만찬을 곁에서 보다가 예수의 일행과 함께 길을 나서다가 봉변을 당하고 겉에 걸친 홑이불을 던져 두고 벗은 몸으로 도망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막상 본인은 가장 참담하고 수치스러운 광경 

 

왜 구태여 이 장면을 넣었을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린 것으로 마치면 우리는 표적은 제자가 된다. 제자들은 정죄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2차 세계 대전 떄에 독일군들이 유대인들 60여만명을 학살하고 로마 카톨릭이 이를 묵인 한 배경에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정죄가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누구도 정죄할 수 없게 한다. 

마가는 모든 제자들의 배반 뒤에 바로 자신이 더 우스꽝스럽고, 추악하게, 초라하게, 가장 수치스럽게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음을 밝힌다. 

 

성경의 모든 정죄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가리킨다. 

성경의 말씀이 타인을 향할 때 그 말씀은 정죄가 되고, 차별이 되고, 폭력이 된다. 

그런데 그 안의 모든 말씀이 나를 향할 때, 예수의 십자가는 누군가를 향한 정죄가 아니라 비로소 은혜가 되고 구원이 된다. 

 

성경에 씌여있는 모든 죄가 바로 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면 우리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오직 그분을 버리고 도망한 나를 향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묵상질문) 

1. 성경을 묵상하다가 남을 정죄한 적이 있습니까? 그 모든 말씀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늘 기억합니까? 

 

찬양) 우리의 어두운 눈이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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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29-38절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의 기도 

 

베드로하면 떠오르는 단어 - 열심. 가장 열심인 제자 

예수님의 사역 현장에 언제나 있던 자타공인 수제자. 

 

가룟유다의 배반을 예언하는 장소에서 다른 모든 제자들이 "나는 아니지요?"라고 걱정하며 물어볼 때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내가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장담했던 예수님이 수제자. 

 

물론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장담은 금물이다. 누구도 하루 앞의 인생을 내다볼 수 있다. 오늘 참인 것이 내일 거짓이 되어 버리는 인생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거듭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언" 맹세하지 말라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상황이 변해서가 아니라, 베드로가 장담할 때에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장담을 무력하게 만드신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왜 예수님은 베드로의 면전에다가 이런 말씀을 남기셨을까? 

베드로의 장담을 무력화시키셨을까? 

후에라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장담이 얼마나 허망하고 신뢰받지 못할 것임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철저히 주님에게서 나온다. 나는 연약하고, 실패할지라도, 그 실패를 덮고서 부활의 능력으로 나를 일으키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른다. 

 

그런데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확신과 자기 신념, 자신의 성품과 인격에 근거한 확신과 신념은 베드로처럼 무너지기 십상이고, 때론 참 믿음의 반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념과 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실패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간다. 

 

뒤 이어 이어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베드로의 실패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신다. 

 

엄밀히 따지자면 하나님과 근본 동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가 필요없으신 분이다. 그 분의 존재 자체가 말씀이고, 그 분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분은 거의 모든 순간, 자신의 사역을 앞두고 기도하셨다. 

무엇을 보이고자 한 것일까? 주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모든 일을 행하기에 앞 서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보이셨던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두 가지의 갈등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기도다. 

나의 원과 아버지의 원 

나의 원은 이 잔을 옮겨달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은 물론 고난의 잔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그 고난의 잔이 의미 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시는 육신적 고난인지, 십자가를 지심으로 발생하는 제자들과 자신을 기대했던 모든 자들이 겪을 정신적 방황함과 신앙적 아노미에 대한 고통인지 묵상할 때마다 그 잔의 의미는 날마다 더해진다. 

 

결국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위해 내 신념을 굽히는 것이다. 내 장담함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도록 내 존재를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을 향하는 삶은 기도 없이는, 절대로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영적인 길이다. 

 

우리는 "믿습니다"를 외치며 나의 뜻을 강요하는 그런 기도에 더 익숙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럴지라도 그 분 보다 더 큰 소리로 "내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한 번만 들어주시면 ~~게 하겠습니다." 하면서 하지 말라 하는 서원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그 곳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원하는 기도였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그토록 피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 앞에, 그리고 그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간곡하 부탁에도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는다. 육신적, 영적 피곤함으로 인해 한 시도 기도할 수가 없다. 이 때 베드로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호칭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단 한 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 이름을 베드로로 불러주셨던 예수님께서, 자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너 다시 시몬이 되었느냐? 예전으로 돌아갔느냐? 물고기나 낚으며 죽을 것이냐?" 하고 그의 예전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이다. 

 

정말 겸손히 나를 내려놓고 말씀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로 가는 나의 삶,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을 보게 된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바로 그 주님의 모습을 향하게 된다. 

 

내 뜻을 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내 자존심을 내세우는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토록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처절히 하셨다면 우리는 날마다 죽는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믿음은 그 피의 기도의 결과로서 내 삶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묵상) 

1. 자신의 뜻을 꺾기 위해 기도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찬양 ) 믿음이 없이는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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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10-24절 자신의 살과 피로 여는 잔치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 - 영어로 (Judas Iscariot)

1. Iscariot- Ish (사람)  + Karioth (남부 유다지역의 케리오트) - 캐리오트 사람 유다, 가룟인 유다 

2. SIcarios - 단검을 품은 사람 (로마의 통치에 격렬히 반대하는 열심당워) - 암살단원 

 

마가복음 14장에 유다가 등장할 때마다 (14장 10, 20, 43)  수식하는 단어 - 열 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

->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늘 함께 했던 제자 

 

로마의 권력에 가장 반대했던 자가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 내어주는 장면- 가장 충격적인 장면

- 그것이 그의 출신이 상징하는 정치적인 것이든, 제자의 그룹에서 그가 맡은 직분이 상징하듯 탐욕에 근거한 것이든, 극단적인 성향의 사람은 언제나 반대 급부의 극단적 무리와 함께 하는 것 - 우리의 역사도 증거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도,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의 배반자를 가룟 유다에게만 한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니지요?" 라고 물으며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대답했던 모든 제자, 급기야 나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던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 열 두 제자 모두가 예수의 배반자요, 죽음의 책임자라는 것을 복음서는 말한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장면은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과 묘하게 중첩이 된다. 

1. 제자 둘을 보내어 은밀히 준비를 시키는 장면 (그 두 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2. 이 두 사람이 신비로운 만남을 통해 어린 나귀 새끼와 다락방을 제공받게 되는 것. 이 만남과 결과과 예수의 예언대로 성취된다는 것.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고 결국 성전에 대한 파멸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을 통해 예수는 자기의 몸을 내어주는 예식을 치르고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끝낸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가장 근원적인 목적 - 잘못된 성전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성전, 교회된 성도를 세우는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과 마지막 만찬 모두가 잔치와 같은 환호성과 기쁨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흥겨운 잔치의 분위기 속에서 철저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의 유월절 식사가 죽음을 면하기 위한 식사였다면 마지막 만찬에서의 유월절 식탁은 모든 사람의 죽음을 면하기 위한 한 분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어 놓는 것으로 진행된다. 

 

영문도 모르게 예수의 살과 피를 마셨던 제자들. 

예수의 죽음 앞에서 모두들 배신자요, 외면자요, 비겁자였던 제자들. 

그러나 그들이 마신 살과 피 때문이었을까? 

그들을 결국 예수를 따라 살다가 예수를 따라 죽었다. 

 

우리도 수없이 많은 예수의 말씀을 듣지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아니 완전히 반대의 길로 걸어갔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의 살과 피의 의식에 참여하고, 그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심겨진 이상

우리에게도 결국 예수의 온전한 열매가, 온전히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삶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묵상질문) 

1. 로마의 가장 극력한 반대자였던 유다가 예수를 로마 병정의 손에 넘겨주는 모습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삶에 그와 비슷한 일은 없는가? 

 

2. 비록 예수의 목적과는 다른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마지막 만찬에 임해서 많은 실패를 겪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의 삶이 예수를 따라 살고, 예수를 따라 죽게 되는 역사적 사실이 나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인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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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1-9절 (Passion) 

 

고난 주간 묵상집을 통해 나누었지마 1-2절의 배경이 되는 유월절 이틀 전은 목요일 최후의 만찬을 하루 앞 둔 수요일날이다. 

수요일날의 예수의 행적은 사복음서 어디에도 나타나있지 않다. 그 다음날 아침식사의 배경이 되는 베다니에서 하루를 머물며 홀로 시간을 가지셨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예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입장에서 예수는 흔히 말하는 이단의 수장으로 여길 수도 있기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려 한다는 의도의 순수성 만큼은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다면 흉계 따윈 쓰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시체가 사라지고 부활했음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빌라도를 두려워하여 대제사장을 찾아왔을 때에, 대제사장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간구한다. 그 대책은 병사에게 뇌물을 주어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해 갔다고 거짓증거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앞뒤에 행해지는 종교지도자들의 부정한 방법은 그들의 의도가 순수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증거한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부정한 방법을 통해 이루리라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결과가 과정을 합법화시키기도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과정이 결과를 증언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잘 알다시피 애굽에게 임하는 재앙을 면하기 위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이루는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때로부터 일주일동안 사람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며 이를 무교절로 지킨다. 

 

이스라엘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유월절날 무교절을 먹는 것은 축제의 모습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광경과 너무 조화가 된다. 

 

제자들이 유월절을 맞이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축제이다. 이제 며칠 뒤면 참된 이스라엘왕의 대관식을 기대하며 예수의 대관식 때에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를 시시탐탐 노리며 기대하며 한껏 눈치와 기대와 설램이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축제의 정점이 자신의 죽음으로 끝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죽음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처럼, 피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순수한 고난의 죽음이다. 예수는 목숨을 잃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제자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얻고자 예수를 잃고 반대의 길로 간다. 축제와 죽음이 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목요일날 아침에 일어나는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의 대관식을 하루 앞둔 날, 유대인들의 예식은 대제사장이나 선지자에 의해서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인정을 공표했다. 그리고 왕의 기름부음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수의 기름부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베다니 문등이 시몬의 집에서, 대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닌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예수는 이 대관식을 명하여 "장례식"이라 명한다. 

 

제자들은 이 여인의 기름부음에 노하여 예수의 머리에 부은 기름의 값을 논한다. 

메시야의 머리에 온 천하를 다 합한 기름을 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낭비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의 머리 앞에서도 한낫 값비싼 향유가 낭비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백데나리온은 엄청나게 큰 액수이다. 오병이어의 현장에서 빌립은 이 무리를 다 먹이려면 이백데나리온의 돈을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만여명 되는 사람들을 다 먹이고도 백다나리온이 남든다. 아마도 예수의 머리에 붓기 위해 이 여인은 평생에 모을 수 있는 모든 가치를 다 부었을 것이다. 

같은 날 마지막 만찬을 위해 어린 나귀를 메어놓고 주를 위해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한 이름없는 무명의 나귀 주인 역시 주를 위해 사용하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준비시켜 놓았다. 

 

예수와 더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죽음과 헌신으로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한 무리와 

자신들이 살기 위해 예수를 팔고, 불의한 방법과 부정한 생각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 앞에 동일한 예수의 반대편을 차지한다. 

 

제사는 자신을 불태우는 번제가 되어야 한다. 

욕망이 큰 자는 모든 행동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 있어서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욕망과 열정을 넘어 가장 큰 열정으로 표현된 용어가 바로 "Passion of Christ"이다. 

우리는 이 글자를 정열로 쓴 뒤에 고난이라 읽는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겪는 고난이야 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열정이다. 

묵상질문) 

1. 살기 위해 예수를 부인하고 불의한 삶을 살아가는 대관식의 구경꾼들과 자신의 전부를 드림으로 대관식의 주인공이 되는 예수 및 한 여인과 이름 없는 나귀새끼의 주인. 나는 주님의 나라에 어떠한 참여자인가? 

 

찬양) 내 영혼에 예수의 흔적있으니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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