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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막 15:21)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이니라 (막 8:34)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 이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길을 따를 것을 말씀하시는 장면.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 주님을 닮고,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구원받은 믿음 -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 

 

요즈음 신앙생활들을 이야기 하면서 요새는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고 영광 만을 받으려 한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십자가는 참 신앙인들이라면 마땅히 지어야 하고 동참해야 할 것이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데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려, 적어도 기도한다. 실재로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들보다 고난에 대처하고, 고난을 받아들이는 자세라든지, 마음가짐이 다르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마땅한 것으로 여기며, 고난을 통해 유익을 얻는다. 그 중심에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지신 십자가, 그리고 그 주님을 통해 우리 또한 십자가를 지는 삶을 당연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십자가 지는 삶"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당황할 때가 있다. 추상적으로 막연히, 고난과 어려움을 견디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보면 대부분 십자가는 자기의 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부산물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십자가상의 강도 -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누가복음 23장 41절)

-> 주님 지신 십자가: 자기 죄에 대한 보응으로 받는 것이 아닌 철저히 우리를 위한, 타인을 위해 지는 십자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선택한 삶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어려움을 십자가라고 부를 때가 많다. 

예) 결혼이나 육아로 인해 겪는 가정적인 어려움, 사업이나 학업에 있어서의 실패, 건강관리를 잘못하여 얻은 질병, 인간관계의 실패에서 얻어지는 고통.... 

 

물론 예수 믿으면서 당하게 되는 많은 손해들, 혹은 시선들, 때로는 핍박들. 십자가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진 십자가는 무엇이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 십자가에 대해 추상적으로, 아무 것에나 이름 붙이는 잘못된 십자가일 수도 있다. 

 

주님 지신 십자가 - 죄없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져야했던 하나님의 계시. 

                          - 메시야로서 그들을 구원할 상상치 못할 선택. 

                          

그렇다면 주님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가 져야 주님을 따르기 위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우리를 위해 지신 주님의 십자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지는 십자가를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진 인물 - 구레네 시몬 "짧지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구절이다. 성경상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과연 성도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닮고자 하는 자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가에 대한 적어도 강력한 힌트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마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눅 2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 구레네: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나라에 지금도 있는 아프리카의 도시이다. -> 그러니까 그는 피부가 검은 아프리카사람이었을 것이다. 

 

(행 11:19-20)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증거한 사람 -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 이들로 인해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가 예루살렘에서부터 파송되게 된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 이 떄 안디옥교회의 선생 -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 니게르는 흑인이라는 뜻 -> 바로 구레네 시몬이 아닐까? 성서학자들이 조심스럽게 주장을 한다. 그를 통해 같은 동네 사람 루기오도,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 당시의 분봉왕 헤롯 (세례요한을 죽였던)의 젖동생까지,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와서....

(막 15:20)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빌라도의 법정 - 십자가가 달리게 되는 골고다 언덕까지의 고난의 길 - 비아돌로로사, 고통의 길, 고난의 길, 1 Km 채 안되는 길이지만 꾸불꾸불하고 언덕을 오르는 길. 빌라도의 법정에서 채찍으로 심히 맞으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신 길이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 지난 주 대속죄제일날의 희생양처럼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과 매를 맞으시면서 걸어가야 하는 길. 

지금 그 길에는 빌라도의 재판을 받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서 십자가를 지다가 세 번을 넘어지시고, 모친인 마리아를 만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곳을 기념하며 14개의 지점이 표시되어 어느곳에서는 교회가 세워져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기념비가 세겨져 있어 십자가의 그 고난의 길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그 14개의 지점 중 5번째가 바로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우게 된 지점이다. 

 

왜 이 십자가는 구레네 시몬에게로 왔는가? 

 

십자가 처형을 위해서는 반드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모진 고문과 고통으로 자꾸만 넘어져서 갈 수 없게 되자 로마 군사들에 의해서 "억지로"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지워진 것이다. 

 

십자가 - 입에 담기도 어려운 치욕, 아무도, 누구도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않는다. 대신 지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치욕이 될 수 있기에....흑인이자 이방인이었던 시몬에게 억지로 지워진 것이다. 

 

그가 진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이 십자가는 자원하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 상황 설명:이방인이자 흑인이었던 그에게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이다. 
  • 한 사람의 자원하는 제자들이 있었더라면 이 순간에 자원해서 자신이 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한 사람도 그 십자가를 대신 질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그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요한(예수의 십자가에 있었던 제자) 은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 누구도 그 십자가의 수치를 지려고 하지 않았다. 
  • 그래서 예수와 아무런 상관없는 시몬이 십자가를 짐 

 

2. 신앙적인 동기나 무언엔가 상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힘들어도 예수님은 알아주시겠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며…위로하심이 있다. 
  • 시몬에게 보인 예수님: 죄인, 나약한 자… 초라..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는 초라한 자
  • 그 십가가를 진다고 예수께로부터도, 로마로부터도, 어떤 보상이나 칭찬을 기대할 수 없었던 십자가
  • 오히려 알려지면 가문의 수치로 남을 십자가... 
  • 그래서 억지로 들 수 밖에 없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만 싶은 십자가

 

3. 본인이 짊어져 야 할 십자가.

  •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진다고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과 매질이 그쳐지지 않는다. 예수가 당하는 고난, 희생양이 당하는 고난을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 모여있던 군중들: 제자들은 도망가있거나 숨어있고 오직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군중. 어쩌면 시몬도 예수를 욕하면서 서있다가 병사들에게 끌려왔을 지도 모른다. 
  • 십자가를 들면서 욕을 하는 입장에서 욕을 듣는 입장으로 아무런 위로나 대가 없이 당하는 그런 수치감. 모욕. 

 

억지로, 아무런 보상이나 위로 없이, 수치를 당하면서 주워진 십자가. 

이게 구레네 시몬이 지은 십자가...

 

혹시 이런 십자가 여러분들이 지시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이건 신앙생활이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치욕스런 고통들. 피할 수만 있다면 도망쳐버리고 싶은 문제들. 여전히 지니고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도 아무런 위로를 받을 수 없는 문제들. 이런 건 신앙에 걸림돌만 되고 아무런 유익이 안 될 것 같은 자신 만의 문제들. 

가만히 보면 많은 신앙인들 중에 아니 대다수 신앙인들 중에 잘 알릴 수 없는, 비밀스런 그런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도 십자가가 있지요? 

하나님도 해결해 주시지 않는 듯 한 … 

기도해도 기도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 도망쳐 버리고 싶고, 피하고 싶은, 그러나 견딜 수 밖에 없는 나만의 아킬레스 건. 

오늘 본문은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 누군가가 자원하길 바랬지만 자신들의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도 자원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넘겨져 온, 억지로 떠밀려 온 십자가

 

고난도 믿음의 분량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거나 허락되어진 것이라면 도무지 아무도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에 떠밀려서 나에게까지 온 고난. 그것이 질병이건, 가족이건, 실패건, 관계건.....신앙생활과는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러나 예수님의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 아무도 자기 편이 없고, 혼자서만 모든 짐을 지셔야 하는 그 순간에…. 이제는 너무 지쳐서 예수님 조차도 더 이상 한 걸음조차 걸음을 땔 수 없는 그 순간에… 

저기 먼 아프리카에서 온 낯선 사람 하나가, 어떤 제자도 감당하지 못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에 함께 지닌 것이다!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다가 맡은 배역 - "주님의 시선" 

감정이입을 하면서...구레네 시몬을 연기하는데 

처음에 병사들에 의해서 십자가가 지워졌을 때, 속에서부터 막 화가나서

아 재수없는 날이다. 막 욕하고 불평하다가....사람들의 저주와 비아냥을 들으며..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독백하는 내용 

그러면서 마주친 그 예수의 시선

날 바라보시면서 침묵 속에서도 비추어졌던 그 사랑, 그 뜨거움. 

골고다 언덕에서 보게된 강도의 고백 - 당신은 죄없으신 분인데....

그가 숨을 거두시면서 말씀하셨던 일곱 마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들었던 백부장의 고백 -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영문도 몰랐던 시몬이 경험한 인생 속 가장 극적인 체험의 날. 

그가 고난 받을 때 유일하게 그의 십자가를 함께 했던 그 영광! 

 

(마가복음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이 책을 기록한 마가의 공동체에는 이름만 이야기 하면 다 알 인물 - 알렉산더와 루포 

 

(로마서 16장 13절) - 로마서 마지막 장의 문안 인사 중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루포와 그의 어머니-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내 - 사도 바울이 자기 어머니라고 이야기했던...

이 땐 이미 "구레네 시몬이 순교한 이후의 때"라는 결론

 

그 십자가로 인해 구레네 시몬은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이, 그가 남긴 아내가 초대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어떤 십자가? 

영문도 모르게 억지로 지워졌던, 아무도 지지 않아 나에게 떠밀려온 그 십자가. 

앞으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가 가르쳐야 할 십자가 

 

자기에게 임한 모든 고통, 고난, 신앙적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떠밀려온 고난, 수치, 모욕....

모든 것을 품고 감사하자. 무한 긍정. 그 속에서 주님의 시선을 볼 수만 있다면....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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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3.28 21:05

    오랜만에 들어와봤더니 교회를 옮기셨군요.
    사역의 참 모범을 보는거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트레이시 제일교회를 기대하며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성령충만하세요.
    응원하겠습니다 목사님.

  2.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21.03.30 06:09

    넵 목사님 ^O^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1. 두로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1절) 

두로 지방을 간 것 만도 이방인의 땅, 더럽혀진 땅을 간 것으로 유대인들의 선긋기, 자기 기준, 자기 방어의 장벽을 무너뜨린 사건인데 예수님은 두로 지방 뿐만 아니라 시돈,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였다고 전한다.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지도 않고 그 땅을 밟고 지나왔다는 것이다. 소개는 되어 있지 않지만 시돈에서도 데가볼리 지방에서도 예수님은 택하신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죄악가운데서, 질병 가운데서 구원해내셨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도, 그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다. 고향 땅, 그들이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고향에 왔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는 귀를 먹고 그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닫혀져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를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마치 자폐아처럼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서 세계와, 외부와 , 그리고 하나님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거하지만 자기 만의 신학, 자기 만의 신앙, 자기 만의 세계에 빠져 철저히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자기 의에 갇혀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의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앗수르에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에 나라를 빼앗기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이젠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계속되는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나? 

오직 유대인만 구원하신다. 

할례 받은 자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하신다...

 

자기는 지금 1000년 가까이 이방인들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마음 속으로는 난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이고 너희들은 심판받을 백성이다. 이 믿음이 놀랍도록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갈릴리 지방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그 지역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소문이 그치질 않고 더욱 퍼져 나가자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와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만,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 거룩한 자들만 상대할 줄 알았던 그가 죄인들과 어울리고, 장로들의 전통도 지키지 않고, 급기야 세리와 창기들,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과도 어울리며 그들을 고쳐 주니까 많은 사람들은 떠나가거나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이 닫혀진 이유는 그들이 붙들고자 하는 말씀만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땅, 또한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천하의 구원자임을 이미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잘못된 신념으로 말씀을 들을 귀를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닐면서 비로서 조금씩 눈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구나, 할례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나라 밖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오히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유대인들보다 예수를 더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구나...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안목이 바뀝니다. 

 

그 사람들이 여전히 닫혀 있는, 귀가 닫혀서 입마져 닫아 버린 유대인을 데리고 옵니다. 

왜 그가 귀가 닫히고 입이 닫혔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우리 마음이 열리기 원하시는데 사탄은 우리를 닫아 놓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합니다. 

집착하게 하고  전염되게 하고, 중독되게 하여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듣지 못하게 합니다. 

악한 마귀들은 사람들을 묶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을 묶고, 마음을 묶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좌절로 사람과의 관계를 닫아 버리고 다른 무엇엔가 집착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유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의 삶을 하나님에게로, 이웃에게, 그리고 무한한 미래의 세계로 열게 만듭니다. 여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항상 열려져 있습니다.

 

오늘 갈릴리 지역에서 만난 한 사람은 철저히 닫혀 있는 사람입니다. 귀가 닫혔다는 것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 소통이 막혔다는 것이고 말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 역시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두려운 것입니까? 

들어도 말못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면서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이 듣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귀가 닫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동시에 하나님과 대화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기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까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리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을 못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혹은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전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들려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철저히 닫혀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듣고 열린 사람이 되니까 시키지 않았는데 마을에 가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 귀가 열리고 입술이 열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나가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말씀을 듣는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33절) 

무리가 그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은 그를 무리에서 분리해서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무리도 중요합니다. 어떤 무리 속에 있느냐가 신앙의 좋은 시작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냐, 어떤 공동체에 있느냐가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공동체에 있어도 신앙은 결국 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무리가 날 구원해줄 수 없습니다. 내가 만나야 됩니다. 내 부모가 내 신앙에 유익을 줄 순 있어도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내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한 셜교에서 "하나님께선 아들만 있지 손자가 없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날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날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철저히 닫혀진 인생에 찾아오셔서 예수님은 그와 따로 시간을 갖습니다. 끊어졌던 교제를 회복하십니다. 

 

따로 떨어진 곳에서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4.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데시며... 

접촉하신다. 아가서 입맞춤- 하나님과의 연합. 

영이신 하나님이 육이신 인간을 만나는 것- 그것이 회심이고 중생입니다. 

그분이 날 만지십니다. 

혹자는 이것을 세례로 표현합니다. 

하늘의 물로 우리를 씻기시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5.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 

열리라. 

하늘을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탄식하시다. -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이 여기시며 

                 - 깊은 숨을 들어쉬시며, 제자들에게 깊은 숨을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35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보십시오. ‘에바다’ 라고 주님께서 명령하자 귀가 열렸습니다. 드디어 이 사람이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열려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이웃을 향해 입을 닫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의 혀가 풀려서 기도가 줄줄 나오고, 불신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도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서서 ‘에바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어져서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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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 장 24-30 수로보니게 여인 

 

지난 시간엔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께 예루살렘으로 부터 찾아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책망받는 장면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1. 예수살렘과 갈릴리, 그리고 두로와 시돈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제사장 등 당시 모든 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전도 활동의 무대를 미천하고 소외된 시골 갈릴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헐벗고, 사회에서 밀려난 자들이 이곳 갈릴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상하고 찢긴 상처를 안고서 살아가는 갈릴리 사람들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연약하고 상처입은 심령을 가진 갈릴리 사람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곳 갈릴리에서 12제자 중에 11제자를 이 곳 갈릴리 출신으로 뽑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로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살렘에서 온갖 기득권을 누리면서 지내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천하디 천한 상놈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이야기하면서 비아냥 거리고 헐뜻 습니다. 지금 그들은 적어도 예수님이 누구인가, 말씀을 듣고 은혜를 간구하며 멀리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는데, 자기들이 가진 전통과 선입견으로 인해 자기들이 온 목적도 잃어버리고 예수님을 앞에두고 헐뜯고 비난하고 그러다가 책망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인해, 내 기준과 가치관에 맞지 않는 어떤 것으로 인해 실컷 비판만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에 한이 맺혔는지, 집에서 받은 상처, 직장에서 받은 상처까지 다 풀고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은혜 받으러 왔다가 오히려 더 기분 상해져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목적을 잃어버리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은혜 받으러 왔다가 책망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2.수로보니게 여인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똑같은 장면을 다룬 마태복음에서는 뭉뚱거리면서 그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합니다.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합성어입니다. 이 지역은 이방땅으로서 바알신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으며 또한 비옥한 골짜기와 부유한 고대 문명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예전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곳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정도로 부유한 족속이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는 것은 헬라 문명의 교육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하고 지식적으로도 당시 시대를 지배하던 헬라의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경제력으로도, 지식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렇지도 저렇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예수가 그 동네에 왔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녀가 예수를 찾는 장면이 더욱 생생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그 지역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하고 소리질렀다고 기록합니다. 

어느정도 지체 있는 귀부인이 자기 딸을 위해 애가 닳아 예수에게 고쳐 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자는 계속 부르짖고 있는데도 예수님은 모르쇠로 일관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나섰습니다. "예수님! 여자가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으니 대충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돌려 보내주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잠잠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무시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더욱 소리를 높여 지릅니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이렇게 끈질기게 애원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비수를 꽂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개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 이스라엘 전통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 했지요. 그래도 자기들끼리 이야기이지 사람을 대 놓고 이렇게 개라고 하는 것은 남자들끼리는 싸우자는 소리고 여인에게 했다는 것은 정말로 해서는 안되는 자존심을 건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저 자기 딸을 고치러 온 한 연약한 이방여인에게 "개"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불쾌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라게 여인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자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떻게 이순간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자기는 그런 무시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도 지금 여인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온 목적: 딸을 고치려고.. 그 딸을 고치실 수 있는 분

 

cf) 마가복음 7장 1-9절 : 예수를 보러 왔다가 비판만 하고 가는 사람들 

나아만 장군- 

(왕하 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그러니까 자기의 자존심, 지금 딸 앞에서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에게 읽혀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으시고 여자를 칭찬하시며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반응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침묵/ 혹은 외면이고 두 번째는 그녀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입니다. 

 

  1. 침묵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예수님은 평소와는 다르게 그 여인의 하소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한 번 부른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라고 했겠습니까?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답답하고 두려운 침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혹시 불공평하신 것은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은 즉각 고쳐주시고 이방인에게는 침묵하시는 게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한 불쌍한 이방 여자가 와서 요구를 했을 때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없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침묵은 이 여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우리의 일상 속에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이 여인처럼 답답하고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가? 자칫 시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침묵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습니다.

1)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향해 있는가? 정말로 나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내가 내가 침묵할 때 넌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지 않고 끝까지 내게서 구원을 얻으려 하는가? 넌 나의 때가 올 때 까지 기다릴 수 있는가?... 

2) 하나님의 때 - 요셉: 술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다음 2년간의 침묵기간. 

 

지금 마음에 안달이 나 있는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첫 번째 침묵으로 그녀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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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다가 침묵하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낙심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실 때까지 잠잠히 참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분이 먼저 우리의 상황과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분은 침묵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그 여인의 믿음을 확실히 하고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2. (막 7: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통해 무엇을 주시고자 하는가? 

이 여인의 모든 간구의 목표는 딸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는 음식을 구하고, 돈을 구하고, 치료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기도 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만을 구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구하는 것과 주님께서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이방인입니다. 이방 신을 섬기고 있고 뼈 속까지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녀의 신앙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고, 그녀의 생각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채, 오직 딸만을 위해서, 예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지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딸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이지 그 이상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 7:8)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니까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떠남. 

신앙이 없는 자에게 복이 들어가면 오히려 타락과 죽음.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는 지금 국가라는 벽, 종교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합니다. 그 믿음은 국가와 종교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사람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처럼 혈연으로, 이루어진 민족이 아닙니다. 허다한 잡족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 입니다.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신앙인들에게 준 것이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모시고, 나의 주인으로 모신 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넌 나의 자녀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계속해서 이방인으로서 살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여인이 대답합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난 개입니다. 난 이방인입니다. 내 종교와 내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딸을 고칠 수가 없고 내게 어떤 구원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당신이 내 주인입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것 바라지 않습니다. 난 이방인이고 아직 당신을 모르지만 당신을 주인으로 이제 주님만 믿으니까 나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지요. 

이제 국가와 종교를 넘어 진정한 그리스도인,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지체없이 그녀를 칭찬하시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지어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된 자들에게 무엇이든 구하는 대로 주시는 것이지요. 

 

겸손함은 어디에서부터 나옵니까? 겸손함은 곧 간절함입니다. 성품이 아니라 간절함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그 큰 벽, 그 짐을 오직 주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간절함은 침묵을 극복합니다. 인내로서 영적인 성숙을 이룹니다. 

침묵할 때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 간절히 주님께 매달립니다. 왜?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함은 자존심을 이기는 것입니다. 

간절함이 큰 자는 자존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존심을 내세웁니까? 

자존감이 낮은 사람입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문등병을 치료하라고 할 때... 요단강에 가서 목욕해랴... "날 뭘로 보고... 우리 나라에는 그만한 강이 없는가?" 

"뭘로 보긴, 문등병자로 보지...문등병 치료하러 왔지 장군 훈장 받으러 온 거 아니잖은가?" 

목적이 분명하고 간절함이 있는 사람은 헛된 데 자존심 세워 그르치지 않습니다.  

 

죽을 병에 걸려서 그 병에 대한 가장 유능한 의사의 소문을 듣고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보니 시설이 자기가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 변변치 못합니다. 

무엇보다 환자들의 모습이 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같습니다. 좀 비슷해야 기다리면서 자랑도 하고 수다도 떠는데 도무지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꾹 참고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의 말투가 거스릅니다. 나를 다른 환자들이랑 좀 다르게 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 형편없는 환자들처럼 막 대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 병원에 갔다고 욕을 하고 나오겠습니까? 

 

정말 저 의사가 자기 병을 고쳐줄 의사라고 믿으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교회 나온 목적이 사람 대접 받고 싶어서 나온 것입니까? 

좋은 시설 보고 싶어서 입니까? 

자기랑 수준맞고 관심사가 같은 사람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그 분께 예배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께서 허락한 공동체에서 자라나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생활 하면서도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을 많이 참습니까? 

돈 때문에는 그런 것 다 참아가면서 구원을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는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수준을 찾습니까? 자기 수준 찾으면서 정말 회개의 심령을 가질 수 있습니까? 

갈급하십니까? 간절함이 있습니까? 자기의 영적인 문제에 대한 심각성이 있습니까? 

그럼 다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며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보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십니까? 

그러면 혹시라도 그분이 침묵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매달려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고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내가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내 자존심이 아무리 상하고 내 인격이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그 분께서 버리라 하는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됩니다. 그래야 천국의 복을 받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시험하려고 우리에게 신앙적인 불편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참 자녀를 삼아 주시려 하기 때문에 때로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도 하십니다. 저도 주의 종으로서 언제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할 순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 자유를 주시고 참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묵상질문) 

1. 자존심으로 인해 시험에 든 경험을 이야기해보자. 

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보러 왔다가 그냥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시고자 하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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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 1-8절 (전통과 믿음)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1절)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유대인의 신앙의 대표자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 그들이 믿음의 근거로 삼고 있는 권위를 가지고 와서... 

  • 그런데 그들이 올 때 마다 제자들과 갈등이 발생한다. 끊임없이 지적하고 잔소리 하고 꾸중한다. 
  • 아무리 실력있고 권위있고,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도 곁에 올때 마다 이렇게 지적하고 꾸짖으면 편하지 못하디. 늘 긴장한다. 평안이 없고...
  • 왜 그들은 그렇게 지적하고 꾸짖을까? 사랑일까? 사랑해서일까?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서일꺼다. 본 때를 보여 주고 싶은 거다. 자기들은 예루살렘에서 왔는데 갈릴리에서 온 것들이 어디서....하면서 비교하며 만족하는 것이다. 
  • 신약성경에 이들이 등장하면 곧 갈등이 시작된다. 지적하고 음모를 꾸미고 모의하고 꾸짖고 죽인다. 
  •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은 평안을 앗아간다. 

 

모래시계 찍으면서 국민배우가 된 여배우가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얼마나 까탈스럽게 했겠습니까? 자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일부러 불어를 써가면서 대화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교양인양 으시댄 것이지요.  교양있다고 하지만 중학생들이 소위 왕따 시키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가족애니 사랑이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여배우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안에 시집을 갔지만 뛰쳐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을 봅시다. 

그들이 지적한 것은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가리켜 자기들의 전통을 어겼다고 말합니다.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몸을 씻건 마음을 씻건 씻음으로 우리는 깨끗해 집니다. 

더군다나 당시 팔레스틴 지방은 사막지방입니다. 모래와 먼지가 많아서 밖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면 손이나 발까지도 씻어야 하는 것이 문화였습니다. 이것은 위생과 관련된 삶의 문화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생적인 문화가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규례가 되었다는 것은 곧 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규례가 되니까 단지 씻지 않은 손이 "부정한 손"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와 함께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병자들을 치유하고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쉬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런 그들을 보면서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그리고 그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권면하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아무리 좋은 습관도 남에게는 불편하고 맞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만약 이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권면했다면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루종일 얼마나 힘들었나요? 그래도 손씼지 않고 그리 급하게 먹으면 채할 수도 있고 건강에도 않좋으니 손씻고 천천히 드시지요." 하면 그야말로 분위기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뭐라 말합니까?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모여들었다가....(1절) - 그들이 모여들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부터 트집잡고 정죄하기 위해 예수께로 모여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처음엔 그들도 예수가 누군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인지 혹 하는 심정에서 예수께로 온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지라. (2절) - 무엇을 보았는가? 그들과 다름을... 그들의 기대와 다름을 본 것이다. 

묻되, 어찌하여...(5절) 지금 그들은 선지자, 혹은 메시야 되신 예수를 보러 왔다. 그런데 그들이 대하는 예수는 장로보다 못한 예수이다. 전통안에 갇혀진 예수이다. 자기의 기대와 다르니까 왔어도 참된 것을 보지 못하고 그릇된 점만 바라보다가 책망받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결국 제자가 되지 못하고 무리가 되어 떠돌다가 예수를 떠난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전통을 지키려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도다. 

 

그 예로 든 것이 고르반 

고르반 (하나님께 바쳐진 선물, 헌신) 

일단 하나님께 바쳤다고 하면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런데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의 것을 고르반이라고 해 놓고 부모를 모시지도 않고 옛날 고려장 하듯 부양의 의미조차 지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하나님께도 온전히 바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전통은 굳어진 습관을 말한다. 그것은 까딱하면 죽은 습관이 되기 쉽다. 

몸에는 너무 편해졌지만 더 이상 나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더러운 것인지를 모르는 자들. 

더러운 손으로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무리가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14절, 17절) 

다시 불러 이르시되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 회개하라. 들어라.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왜 그들을 떠났을까? 더 이상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먼저 예수를 떠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온다. 

똑같이 모르는 자들이지만 모르는 것이 있어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와 함께 한다. 그리고 묻는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5절처럼) 겸손히 예수님의 지혜를 묻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산 믿음을 참된 행함이 있다. 

그러나 행함이 있다고 해서 다 산 믿음 또한 아니다. 행함이 있어도 죽은 믿음, 거짓 믿음이 있다. 그것이 곧 외식이다. 

속은 더러운데 안더러운 척 하는 것...

자기를 고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함으로 타인을 정죄하는 것. 

은혜는 철저히 나를 향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남을 향하면 아무리 좋은 말씀도 정죄가 된다. 

그것이 곧 바리새인, 서기관, 무리들의 신앙이었다. 

예수님을 보러 왔지만 결국 자기 기준, 자기 시각에 안 맞으니까 정죄하고, 욕하고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끊임없이 갈들을 빚으신 무리들은 당시의 신앙의 중심에 서 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 흔히들 장로들이라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불신자가 아니라, 이방인이 아니라, 가장 신앙있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의 모습과 맞지 않다고 예수를 보러 왔다가 비난하고 돌아간다. 예수와는 한마디 진지한 얘기조차 나누지 못한다. 

 

신앙생활 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두렵고 조심스러운 것이 내가 이 시대의 바라새인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난 지금 이 시대에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을 바라보는 자. 오늘의 은혜로 나 자신을 채우는 자. 주님은 오늘의 나를 새롭게 만드신다. 

 

 묵상 질문)

 1.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찾아 이 먼길을 온 이유는 무엇인가? 

 2. "아무리 좋은 습관도 남에게는 좋지 않은 갈등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깊이 새겨보자. 주님은 각자마다 다르게 오셔서 각자에 맞는 계명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다. 항상 나에게 주시는 말씀과 은혜로 오늘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자.

 

 찬양) 

 새롭게 하소서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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