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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1-8절, 회개의 세례

 

  • First reader, 마가의 "첫번째 대상"은 누구였는가? 와 "회개의 세례"의 의미 

가장 먼저된 복음서 

초기 교회의 핍박이 극심할 때에. AD 65-70년 사이

로마에 의한 극심한 핍박.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키기 위해 로마와 대적하는 일에 참여하라는 이중 압박. 

 

  • 로마의 핍박 
  • 유대인들의 핍박과 회유
  •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 인들의 긴장

 

당시 무역과 교육의 통로였던 로마와 헬라 제국의 통로를 따라 복음이 이방에 까지 퍼지자 원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긴장이 생기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 - 베드로와 야고보 (순교) 

이방땅의 바울과 디모데 - 순교 

-> 순교가 곧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 

순교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또 반대로 변절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증명한다. 

수많은 배교자들 중에는 때로는 박해의 때를 지나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친일파를 대하는 것과 같이 회개한 배교자들을 어떻게 치리하는가가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세례시 행한 맹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배반한 자들을 수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당하며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들과 똑같이 이유막론하고 받아들일것인가? 어떤 절차에 의해 받아들여야 하는가? 

베드로 -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왜? 예수를 배반했던 자가 어찌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가? 하며 자원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예수를 배반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초대 교회 리더가 되고 순교자가 됨.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마가 - 베드로의 아들처럼 여기던 수제자. 베드로와 바울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한 자. 

         베드로 -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세번이나 배만하고 모욕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자 

         바울 - 예수 믿는 무리들을 핍박하던 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초대교회의 유대인들의, 이방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무엇으로 인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의 가르침: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라. 

  초대교회: 누구는 순교하며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지키는데 누구는 배교하고 피하다가 세상 좋아지니까 다시 돌아오고...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갈등의 고조- 

  베드로도, 바울도, 우리가 모델로 삼는 신앙의 선배들도 다 배교했던, 핍박했던 자들이다. ...

  감정의 한계를 넘어선 용서- 무엇을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의 회개. 그것이 바로 회개의 세례이다. 

  

  왜 예비하는 자, 세례 요한이 필요한가? 

  

  (출 23:20-21)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사 40: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말 3: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사자: Messenger- prepare the way for us. 

  예수를 만나기 전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을 씻겨져야 하고 공식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얻게 된다. 

  

  예수 믿음을 통해서 그냥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보기위해서, 믿기 위해서, 만나기 위해서 먼저 회개해야 한다. 

  복음은 개인에게, 공동체에게, 전 민족과 나라에게 "이제 예수가 올 것이니 회개하자. 천국,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하는 것이다. 

  

  요단강에서의 세례 - 유다 지역 ->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는 요단강의 의미를 안다. 회개하여 성화의 강을 건너는 것, 비로서 온전한 열매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의 길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 전 반드시 거치는 곳, 바로 요단강이다. 

    

  누가 회개해야 하는가? 

  배교자만 하는가? 

   NO, 우리는 다같이 회개해햐 할 사람들이다. 

  

  슬픈 광경(1:1-8)

 

  세상에는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슬픈 광경이 너무 많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회개하고 세례받는 광경은 매우 아름답지만 슬프기도 한 광경이다. 

 

1. 광야의 요한

  본문은 세례 요한의 활동 무대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였다고 소개한다. 누가는 아예 요한이 어려서부터 빈 들(눅1:80)에서 자랐다고 한다. 이것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 문화에 대한 거부이지만, 세상의 입장에서는 거룩한 선지자에 대한 용납 거부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영접받지 못하셨다고 했다(요1:11). 고향에서 조차 배척받으셨다(막6:3). 사단은 항상 거룩한 자, 하나님의 종을 배척하도록 이 세대에 요구한다.

 

2. 광야의 사람들

  세례 요한이 출현하자 사람들은 광야로 나온다. 예루살렘에서도 나오고 유대 지역에서도 나온다. 왜 나오는가? 현종교(유대교)에 식상하고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에게 염증이 나서 나오는 것이다. 사단이 지배하는 문화, 악령이 들끊는 종교, 거기엔 생명이 없다. 사람을 식상하게 할 뿐이다.

  예수께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마11:7-9)고 하셨다.

  우리가 목사에게, 교회에게 기대하는 것, 각자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위로를 원하고, 어떤 이는 돌봄을 원하고, 어떤 이는 친구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 삶을 떠나 광야에 와서 갈망하는 것은 그들을 구원할 선지자를 원하는 것. 예수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어떤 이는 돌아가고, 어떤 이는 거부하고, 어떤 이는 실망한다. 왜? 바라는 바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 구원이다. 하나님 나라다. 

 

  • 초라한 시작: 

우리가 주목할 만한 가치 있는 시작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시작이요,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구원을 주는 복음의 시작이다. 그 초라하기조차 한 시작은 어떠했는가?

 

1. 광야에서 회개를 통해 

  복음, 더 정확히 말해 오늘날 온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기독교와 교회의 시작이 거칠고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하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들이 광야에서 온전한 한 백성으로 자리잡았음을 고백하며 광야를 즐겨 회상한다(느9:19;시78:19). 그렇다. 광야는 거룩한 백성에게 위대한 시작의 장소요, 체험의 장소이다.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만나시고(왕상19:4) 호소를 들으시며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묵상 질문) 

1. 우리는 지금 성전예배를 준비하고 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바로 우리의 심령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의 정복을 완수한 말씀을 잠깐 잊고 요단으로 다시 가서 머물자. 주 앞에 회개의 제목들을 내어놓고 회개의 세례를 받자. 주의 길을 예비하자.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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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8 (첫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리라 

 

마가복음 -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덜 중요시되었던 말씀. 가장 짧은 본문. 16장 

고대로부터 주석이 가장 없는 복음서- 마태복음의 요약본이다. 

 

현대비평시대가 열리면서 마가복음을 복음서를 이해하는 키로서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함.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마가복음 이전에는 예수의 생애와 복음을 전체적으로 기록한 양식이 없었다고 본다.

 

마가- 베드로의 제자, 통역. 요한 마가라고도 함. (사도행전 12:12절)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 ,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옥에 갇힘. 천사가 베드로를 일깨워서 마가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인도. 

골 4:10절에 보면 - 바나바의 사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된 사건. - 바로 마가로 인해서...(전도여행의 도망자) 

(막 14:50-51)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려오라 하면서 "그가 내게 유익하다"(딤후 4:11)고 하였다. 

베드로전서를 기록하면서 베드로는 마가를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까지 하였다. 

 

초대교회-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에게서부터 바울에게로 넘겨져가는 상황. 유대인에게서부터 이방인에게로. 

그 가운데서 연결고리가 되는 인물이 바나바. - 바나바의 생질로서 마가는 베드로에게는 아들로까지 여겨지며 (마치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었던 것처럼) 처음에는 바울에게서 미움도 받았지만 결국 바울에게도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서의 저자가 될 정도로 초대교회에서 그 정통성과 신앙을 인정받은 자. 

 

저작 목적- 마가가 복음서를 저술한 때

유대와 로마의 핍박으로 순교하거나 배교하거나....나중에 돌아온 배교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슈 

그 때에 도망자 마가는 복음서를 저술하면서 도망자였던 자신이 누구보다 예수의 증인이 되어 초대교회의 이슈로부터 교회를 연합하게 하였다. 

 

*마가가 경험한 복음, 예수그리스도. 

마가의 기록 목적을 담은 핵심 구절은 10:45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거룩한 신성으로 인해 존귀히 대접받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거룩한 신성과 권능으로 인해 밤에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한다(1:32-34). 이것은 낮에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도 집에 돌아와 쉬기는커녕 주인의 상을 차려 주는 등 가사까지 해야했던 유대 당시의 종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바없다. 그의 신성이 드러난 것은 철저히 일함으로써 이다. 병든 자를 고쳐 주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그의 신적인 권세와 능력은 유감없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아들됨이 입증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를 단계별로 분류하여 일하시는 종, 고난받는 종, 승리의 종으로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면서 그분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마가복음은 그 기술에서 그리스도의 출생 근원이나 이런 성장 시절의 언급없이 바로 성년 시절의 세례와 사역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분의 사역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마가복음 전체 분량의 40%가 시간적으로는 3년의 지상 생애중 단 1주일밖에안 되는 예수의 수난 주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내 시각, 관점에 경험되는 복음 

  • 마태 (레위인이면서 동시에 새리)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 사자복음  

예수의 족보- 소외된 자, 외면받던 자. 억눌린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족보. 

 

  • 누가 (의사) - 의사 입장에서 바라본 복음 - 인자 복음 

(눅 1:1-2)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가장 첫 두 가지 사건 - 사가랴의 사건과 마리아의 사건. 가장 비과학적인 일들이 복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 

 

  • 요한) 영적인 체험, 가장 영성적인 글들...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은 자 - 태초에....독슈리 복음 

 

마가) 복음의 현장에 있었지만 항상 뒤에서 수종들던 자. 자신이 따르고 의지하던 자들이 하나 둘 순교해가면서도 여전히 더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 

 

  • 첫 시작 - 자신의 정체성을 담고 상황을 담는 글. 

예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에 대신 복음을 전하는 자. 그를 위해 핍박받던 자.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아는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다) 세례 요한의 설명에서부터 복음을 시작. 

 

그에게 있어서 복음의 현장은 광야이다. 광야가 곧 교회이고 복음의 터전이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던 광장이다. 마가복음의 3분의 1일이 고난에 대한 기사.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 

그래서 사복음서에서 십자가와 고난이 가장 간략하지만 강렬하게 표현된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다. 

 

나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내가 성경을 기록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중요하게 기록할 것인가? 

내 삶을 통해 보여주신 복음의 측면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측면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경험한 하나님만을 기준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닫혀 있지는 않은가? 왜 신약성경은 같은 복음의 내용을 네 권이나 걸쳐서 반복되고, 때로는 이것 때문에 오류 논쟁도 일으키고,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통합하지 않고 네 권을 제시했는가? 

예수님의 삶은 네권, 동서남북, 봄, 여름, 가을, 겨울, 다각도로 살펴서 모자람이 없도록, 치우침이 없도록, 두루 살펴보아 내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버려야 할 것들.... 

을 보라는 것이다. 

이 세 권을 하필이면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똑같은 것을 보고 기록된 복음이라는 것이다.  

아니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같은 예수의 삶이 다르게 표현되어 네 권이 필요하다고, 즉 관점이 다른 네 개가 모여 한분의 삶,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공관복음이 아니라 이관복음(관점이 다르다)라고 해야 하는데 이관복음이 아닌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왜? 경험하는 사람은 각각이고, 그들이 경험한 복음, 그들이 경험한 예수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어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각각 관점이라고 해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오직 한 분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입술을 통통해서 전해지지만 결국 한 분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시각에서 하나의 관점. 공관이라는 것이다. 다른 눈으로 보아도 보여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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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자 (눅 5:4-5) 

 

교회에 대한 비전 = 한 성도를 교회로 세우는 목회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교회된 성도 

 

교회가 무엇인가 할 때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 - 베드로 

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8절, 예수의 말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니" 

 

반석- "베드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 

그 지역에서 순교한 베드로를 수장으로 여기는 로마 교회가 "반석"을 베드로로 해석하면서 교황권에 대한 절대적 권위를 주장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세운 집 - 반석은 그리스도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이다. -> 개신교의 해석 

 

베드로의 삶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연약한 한 인간을 그리스도가 머리된 교회로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끈질김, 그리고 베드로의 영적 여정을 통해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특별히 오늘 소개하고 있는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일생을 이끌어가신다. (오직 누가복음만이 베드로와의 첫 만남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1-2절)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3절에 보면 두 척의,배 중 한 배는 바로 시몬의 배였다. 

 

1. 분명 예수가 말씀하시는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표현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부터 듣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이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2. 바닷가에 수많은 무리가 몰려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또다른 자들을 주목하고 계셨다. 

그곳엔 주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가 있음과 동시에, 그 자리에는 있지만 앉아있기는 한데 말씀과 상관없이 그물을 닦는 자들이 있다. 바로 어부들의 무리다. 

어부는 고기낚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우선순위는, 관심은 오직 고기낚는 데에 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관심이 그물에, 고기에, 먹고 사는 일에, 오늘 잡히지 않는 고기에, 내일 걱정에 꽂혀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무엇인가? 지금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있는가? 아니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있는가? 

 

  • 3절)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1. 시몬의 배에 올랐다. 

배에 올랐다는 것은 내 인생에 그가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내 인생에 들어오셨다. 내 인생에 개입하셨다. 언제나 주님이 먼저 오신다. 내가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찾아오신다.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신다. 

 

2.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무리와 베드로 사이에 서 계시던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육지에서 멀어지셨다. 육지에서 멀어졌다는 표현은 땅의 관심에서 베드로를 떨어뜨린 것이다. 땅에 것에 꽂혀있는 자들은, 예수님이 바로 앞에서 말씀하셔도 그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 밭이 돌짝밭이기 때문이다. 또한 땅에서 떨어진 것은 무리에서 멀어져 베드로에게 오신 것이다.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라는 한 인격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여전히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그 말씀은 여전히 무리들을 향한 말씀일 뿐이다. 

 

  •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허탕을 쳤다. 

오늘 걱정도 걱정이지만 또 내일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심신이 피곤한데도 그물을 닦았다. 

허탕치고 그물을 씻는 기분이 어떨까? 좋을리 없다. 짜증은 짜증대로 깊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해 또 그물을 씻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의 모습은 팔자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세월좋은 모습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가 내 배에 올라오신다. 

기분이 좋았을까? 아니다.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 조금 떨어지라 명령하신다. 

그물 다 씻어놀고 내일 준비 다 해놓았는데, 계획도 다 세워놓고 이젠 쉴 일만 남았는데 또 배를 움직이라 하신다. 평소 베드로 성격이라면 벌컥 화를 낼 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릴리 없다. 억지로 순종은 하지만 주님은 날 보며 말씀하시는데 아얘 귀를 닫고 외면한다. 

그래서 주님은 더욱 베드로와 가까워 졌는데 말씀은 여전히 무리를 향한 말씀으로 표현된다. 

 

  • 4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1. 더 이상 무리를 향한 말씀은 끝이 났다. 이젠 직접적으로 말씀이 베드로를 향한다. 핑계될 구석이 없다. 마치 불순종하는 요나의 귀에 대고 하나님이 소리치는 것처럼 애써 성질 참아가며 억눌르며 피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신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2. 이 말씀은 불순종할 만한 여러 이유들이 있다. 시간적으로 이제는 피곤해서 쉬어야 할 시간이었고, 작은 고기배로 가기엔 말두 안돼는 깊은 데로 가라 하시고, 그리고 그물도 다 씻어 정비해 놓았는데 다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말두 안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불순종할 이유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기적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일어났다. 

계속적으로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애써 외면하고 그물을 낚던 그가 말두 안되는, 정말 상식밖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도 불순종의 반응이 아닌 순종의 반응 

 

  • 5절) 선생님 (Master, 주여!)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한 마디로 시몬의 인생은 한낱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낚는 어부, 그것도 사람낚는 어부 중에서도 예수의 수제자, 반석이라 불리는 자가 된다. 

 

(마 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의 공통점 - 둘 다 모두에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딛친다. 

고난이 없다는 말이 없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온다. 반석같은 믿음이 있어도 고난이 오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에게도 고난은 온다. 우리의 착각 -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 왜 고난이 오나요? 

열심이 믿으면 고난 안받는다고 어디 나와 있는가? 성경은 열심히 믿는데 나요? 

 

반석 위의 사람과 모래 위의 사람 - 둘 다 듣는다. 말씀을 외면하지 않는다. 

말씀을 외면하면 아얘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다고 은혜 받았다고, 깨달았다고, 반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석은 순종할 때 주어지는 은혜다. 행동의 열매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 말씀 듣고 간증을 들으면 나도 믿음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그런데 그렇게 내 감정이 움직인다고 내 믿음이 세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을 들음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그 완성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롬 10:17)

(약 1: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 2: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의해서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나에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애쓰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에도 넘어짐이 없다.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없고 끝까지 자신에게서 모자란 것을 찾고 더욱 말씀을 붙잡는다. 세상의 여건과 환경이 나쁠 때 더 실력발휘를 하고 더 뜨거운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 깊은 데로 가라 

깊은 데로 가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얕은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는 것이다. 

신앙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의 얕은 물가에서 살고 있다. 깊은 곳에는 조금도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왜? 얕은 물이 안전하니까.. 깊은 물의 파도를 두려워 하고 단지 쉽게 피할 수 있는 얕은 물 가에서 산다."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고난 없기 위해, 남들처럼 살기 위해... 

   

간증) 

고 3 때 수련회 떄, 강원도 수련회에서 그 지역 초등학생들 앞에서 물에 빠진 경험. 

수치와 두려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때까지 물을 피했다. 

프리몬트에 처음 이사해서 얻은 아파트 바로 문 밖에 공용 수영장. 작은 수영장이었는데도 물이 깊은 데는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한솔이가 초등학교 2학년, 한별이는 K. 

여름에 더우니까 거의 매일같이 수영하자고 조른다. 난 아이들을 보고...아이들이 물에서 같이 놀자고...

애들 앞에서 창피하니까 두려운 기색 않하고 들어갔다. 애들은 내 키가 넘는 깊은 데를 겁도 없이 들어간다. 

매일같이 애들을 보니 조금 오기도 나고 정말 더운 날씨에 나도 수영도 하고 싶었다. 좋은 물안경도 구입하고 얕은 물에서부터 잠수도 했다. 

조금씩 적응하며 물에 익숙해지다가 그만 발이 안 닿는 데까지 들어갔다. 허우적 거리고, 처음에는 애들 앞이라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발이 안 닿으니 점점 겁이 나고...

그 때 한솔이가 날 보다가 소리쳤다. "아빠 힘 빼, 그냥 가만히 있어. 그럼 물에 떠....손도 발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물에 누워..." 

그 소리가 내 귀에 박히듯이 들렸다. 

힘을 쓰고 용을 쓸 때는 점점 빠져 가던 내가 힘을 빼니까 물에 뜨기 시작했다. 

물에 빠졌을 때도 힘을 빼고 눈을 뜨니까 물 속의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별세상이었다. 

   

찬송가 302장 

2절)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 큰 바다 물결 보고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 번 헤아려 안보나 

3절)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 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보네 

                   

  • 믿음의 삶: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모험적인 삶, 위험한 삶.. 그래서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길 주저한다. 

-> "만일 내가 주님께 진심으로 헌신하면 그분은 나를 광신도로 만들어 버리실 거야. 그럼 내 가정도 내 삶도 엉망이 되겠지… 친구들도 다 떠날거야. 적당히 믿어야지…" -> 얕은 물 신앙. 너무도 많은 신앙의 비밀들을 놓치고 만다.

  • 하나님의 계획: 좋은 것, 완전한 것,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을 위한 것
  • 지금도 원하시는 예수님의 요청: 나를 네 배에 태우라. 네가 어디로 가든 너의 사업, 너의 가정, 너의 결혼을 비롯한 네 삶의 모든 영역에 내가 함께 하게 하라. 내가 널 온전케 하리라." 

 

  • 결말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사람낚는 어부(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음. 

자기가 최고의 노력을 해도 얻지 못하던 것을 순종하니 주님이 이루심. 

주님 따르며 세상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내가 온 힘을 쏟아도 얻을 수 없는 세상도 얻는다. 왜? 세상의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떄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이지만 그건 내 상황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전 지금 너무 힘들다.
-> 그런 힘듦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힘들기에 날 따르라는 것이다. 

힘드니까 이젠 너의지 하지 말고 나를 의지하라는 것이다. 너의 집을, 너의 배를 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안되는 길로 가면....

 

난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 성도들이 얕은 물이 아닌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개척을 위해 기도할 때 주신 비전이다. 그렇게 깊은 물의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고, 그런 목회를 하리라 기도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귀만 발전하는 교인이 아니라, 듣고 행하여 내 것이 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기를.  

고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와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자들이 되기를...

 

성경에서 물은 이중의 의미다. 

하나는 고난과 죽음이고, 동시에 그 물은 구원이고 세례다.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나누었지만 물을 건너는 사건이 성경에 여러번 등장한다. 

모세-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바라보라. (중생의 은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여호수아- 법궤를 앞에두고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제사장이 먼저 발을 담그라. 말씀 따라, 리더 따라 순종하는 믿음 

엘리야와 엘리사 - 옷을 가지고 물결을 가른다. (옷은 곧 능력)- 순종을 넘어 성령의 능력으로 고난을 이긴다. 

 

베드로 - 물결 위를 걸어간다. 파도는 여전히 친다. 그런데 그 파도 위를 주님 바라보고 걷는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피해가지 않고, 고난 위를 묵묵히 걷는다. 깊은 물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신앙이다. 

 

유일하게 물을 건너면서 실패한 예를 남긴다. 베드로가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실패한 원인을 주님을 바라보다가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성경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사건은 우리를 향한 질문이다. 

너희는 그 물을 건널 수 있느냐? 난 이미 답을 주었다. 어떤 물도 주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내 손을 잡아 주신다. 

 

나에게도 트레이시 제일교회의 사역은 내 인생의 마지막 항해이기를 꿈꾼다. 여기 계신 두 분의 장로님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도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 함께 하는 이 항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 어떤 바다를 건널까? 얕은 물 가에서 안전히, 빠지지 않을 정도로 편안한 길을 갈까? 아니 그 길이 과연 편안할까?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 배는 작지만 깊은 물을 향해 나아가 볼까? 함께 하는 항해라면, 그리고 분명 주님이 계시기에 외롭지 않고, 정말 기대가 되지 않는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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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임받는 삶 (마태복음 25장 14-30절)

 

1. 복습과 문제제기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 - 깨끗한 그릇 

어떻게 깨끗한 그릇이 되는가? 

시편 109편 - 우리의 죄악된 모습 그대로, 감추지 말고 하나님께 드러내라. 

빌립보서 4장 4-7절: 연약한 감정을 기도의 언어로 바꾸라. 

 

오늘은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는 누구나가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쓰임받는다. 

어떤 이는 선한 일을 위해, 어떤 이는 악한 일의 도구로 쓰임받는다. 

내가 어떤 일의 도구로 쓰임받는가?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 중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쓰임받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함꼐 나누어 보도록 하겠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이다.  

달란트는 화폐 단위로서의 달란트가 있고 그 외에 흔히 talent라고 말하는 재능, 능력, 혹 은사라는 의미도 있다.

달란트라고 하면 두가지, 물질과 재능 모두 포함이 된다. 

 

언뜻 이 비유를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재능이나 물질을 주셨는데, 잘 사용하여 이윤을 남긴 자는 칭찬하고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시고, 아무 것도 사용하지 않고 남겨 둔 자는 책망받는 내용으로 다가온다. 이 이해는 자칫 복음의 내용을 변질 시킬 위험이 있는데, 하나님의 칭친을 받으려면 열심히 일해 이윤을 남기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책망을 받는 행위구원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그것은 우리 개신교 신앙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 은혜를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믿음과는 상응할 수 없는 하나님 이해이다.  

 

말씀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보자. 

 

남긴 자는 주인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자"라는 칭찬을 들었고, 하나도 남기지 못한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라는 꾸중을  듣는다. 더욱 유심히 볼 것은 꾸중의 내용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한 자는 꾸중을 넘어  '무익한 종'이라는 이름으로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것은 결국 지옥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이다. . 

 

남긴 자가 칭찬을 받고 못남긴 자가 꾸중을 받은 것 정도는 충분히 이해가 갈 만히디. 그런데 남긴 자가 "성실하다, 잘했다"를 넘어  "착하다"는 칭찬을 들을 만한가? 못남긴 자가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그의 성품이 "악하다"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합당한가? 많은 이윤을 남긴 자는 선한 것이고, 남기지 못한 자는 악한 자인가? 그런 논리라면 세상에서도 장사 잘 하여 성공한 사람은 다 착한 자들이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 악한 자라는 결론을 맺게 된다.  

거기다가 그것이 돈이 되었건 재능이나 은사가 되었건 그것을 발휘하지 못한 자가 꾸중을 들을 순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지옥으로 간다면 우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구원의 복음마져도 결국 "우리가 맺은 열매대로"라는 "행위 구원"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신앙과 말씀의 메시지가 어긋날 때에 우리는 이 구절들을 넘기지 말고 세심히 살펴야 한다. 세상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 이 비유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깊히 묵상해야 한다. 이 달란트 비유는 단순히 재능이나 은사를 잘 활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라고 결론 짓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예수님의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2.  전체 장의 맥락을 보라.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을 이해하려면 그 사건 전후로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가?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정화의 맥락 안에서 그 구절들을 살피는 것- 전통적인 성경 연구 방법이다. 

마태복음 25장은 이른바 천국의 비유장이다.  

첫 부분에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 비유가 나오고 달란트 비유 다음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온다. 

결국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자로 나뉠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비유들이다. 

열처녀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천국은 일상적으로 깨어있는 자, 늘 준비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일상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살았는가?하는 삶의 기본적인 자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거하다가 결국 갈라지듯이 깨어있는 자와 깨어있지 못한 자,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가 결국 갈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와 신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리이다. 

 

성경에서 지시하는 마지막 때, 세상에 대한 심판에 앞서 교회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어 참 그리스도인과 거짓 그리스도인이 갈린다. 코로나 19- 믿음 있는 자는 더욱 깊은 믿음에 거하고 반석 위에 서지 못한 자들은 결국 흔들리며 요동하며 갈라서게 되어 있다.  

 

그러면 앞 뒤 비유와 맥을 같이해서 다시 이 본문을 가지고  달란트 비유에서 나타내고 있는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착하고 충성된 자의 삶의 자세와 악하고 게으른 자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 보아야 한다.  

 

  • 14절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새 

어떤 사람은 곧 주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가 지금 타국에 갔다고 이야기한다. 종들 입장에서는 타국이지만 주인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로 간 것이다. 바로 아버지 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의 자리로 가신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정체가 드러난다. 즉 우리는 그곳을 가보진 못했지만 그곳은 이곳과는 다른 나라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그리스도가 데려가실 영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청지기이다. 단지 정해 놓은 기간동안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이고 이 시기가 지나면 주님과 함께 그 나라로 가야 할 존재들이다

 

  • 14-15절: 자기 소유를 각자의 재능대로 맡겼다. 

우리가 기진 모든 것은 그 분 것이고 그분이 내게 맡긴 것이다. 어떤 자에겐 많이 맡긴 자도 있고 적게 맡긴 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분량대로 맡겼지만 한 달란트 받은 자라고 결코 적은 양을 맡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 달란트는 그 당시 돈으로 6000데나리온이다. 

그 당시 장정 하루의 일당이 바로 한 데나리온 이었는데 한 달란트는 6000일에 대한 품삯이니까 연수로 따지면 15년- 20년치의 수당이 바로 한 데나리온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장정만 오천명 모인 그 현장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했을 때에 빌립이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장정만 오천이면, 여자들과 아이들 포함하면 2만여명 쯤 된다고 하니까 이만 명 먹이는데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만여명을 30번 먹일 수 있는 금액이 한 달란트이다.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 모두에게 맡기신 것이 그 만큼 넉넉하게, 크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작게 맡긴 자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도 부족함이 없게끔 맡기셨다. 모두에게 크게 맡기시고, 크게 주셨다. 

그리고 크게 맡기신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

 

ex) 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 받는다. 땅을 분배 받는 것만 해도 큰 은혜이다. 자기 들이 세우지 않은 도시를 받고, 심지 않은 열매를 얻을 땅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땅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곳에 들어가서 더 큰 땅을 개척하라 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라 하신다. 분배받은 것을 기반으로 생육하고 다스리고 번성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 한 달란트 남긴 자 

그는 주인에게 받은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 재능, 은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땅에 감추어 두었다

그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살았다면 과연 그는 무엇으로 산 것일까? 

종이 주인의 것으로 살지 않으면 그는 자기 재산을 숨겨 두었거나 세상의 다른 것을 가지고 먹고 산 것이다.  

세상의 것,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요구에 맞추어서 산 것이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주인이 왔을 때에 그가 한 변명은 무엇이었나?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무슨 소리인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생각한 주인은 "자기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자 하는 굳은 사람, 나쁜 주인"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이용해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존재로서 주인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열심히 해서 주인이 이득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 반대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은 어떠했는가? 

주인이 맡긴 것을 가지고 장사했다. 누구의 장사인가? 주인의 이름으로 장사한 것이다. 

장사하여 이득을 남긴 자들은 주인이 없어도 늘 주인의 이름을 가지고 주인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그 주인이 준 것으로 자기도 풍성하며, 주인에게도 풍성하며, 이 장사에 관계된 모든 이들을 풍성하게 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이 준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의 삶을 영위했다. 주인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삶을 살았다. 

결국 주인의 은혜를 모두 땅에 묻은 자는 육신적으로 게을러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불신과 편견으로 고의로 불순종하여 자기 멋대로의 삶, 탕자로서의 삶, 세상 속에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달란트 비유에서 말하는 충성과 게으름이란 결국 주인을 신뢰하고 천국에 소망 둔 삶을 사는가? 주인을 불신하고 이 땅에 소망 둔 삶을 사는가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본문의 해석에 근거가 되는 내용의 비유가 누가복음 19장 11-27절에 나옵니다. 

눅 19:12-13)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

14절)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주인을 배신할 음모를 꾸입니다. 

나중에 주인이 와서 그를 심판하면서 하는 말이 

27절)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결국 그가 왜 악한 종인가?  그는 달란트를 받을 때부터 주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신자가 왜 불신자인가? 

여러분, 만물은 하나님의 손길로 가득 차 있다. . 

육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가 다 하나같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런 신비에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게으르고 심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자전, 공전, 물이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자들에게 주인이 말한 것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되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좀 전에 우리는 한 달란트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 큰 은혜이고,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인지를 나누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그 큰 것을 주님은 "적은 일"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는 한달란트 가진자가 열달란트 가진 자를 보면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 속에서 열등감과 불행함을 맛볼 것이지만 하나님 눈에는 한달란트도, 열달란트도 그저 적은 것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많이 가졌다고 교만할 이유도, 적게 가졌어도 비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 아버지는 온 세상을 창조한 만물의 주인이요, 난 그 분의 자녀이면 만사 끝이다. 

 

그런데 그 마음 중심.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분께서 주신 것을 통해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큰 것을 맡기신다 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그것이 고을을 맡기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이 땅의 의미를 벗어나는 일이다. 어린 양들을 맡겨 충성을 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맡기시는 것과 같을까?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어떤 왕이신가? 선한 왕이신가? 나를 구하시기 위하여 이 조각목각도 같은 쓸모없는 존재에게 하늘의 귀한 것을 맡기시고 살게 하신 분, 하늘 나라로 가게 하신 분.... 

 

한 달란트 받은 자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나님 주신 힘과 능력이 아닌 내 힘으로 일하는 사람 

  • 떨기 나무에서 만난 모세 - 애굽의 왕자의 신분으로 애굽 병사 한 사람 죽이고 도망하여 40년을 숨어살던 자 
  • 로뎀나무가의 엘리야- 내가 열심이 유별하여 나만 홀로 남았더니....

-> 자기 열심으로 일한 자들은 넘어지거나 교만해진다. 

  • 자기가 이룬 성과로 하나님께 창찬받으려는 자

-> 한나가 자기가 만든 요리라고 주면 한 두 번은 맛있는 척, 먹어주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러면 혼을 내 줄 수 밖에 없다. 

 

주인의 즐거움

- 장사해서 이윤 남기는 것? 

아니다. 하나님이 준 것으로 풍성하게 하고도 남아 이웃까지 풍성하게 하는 것 

오병이어의 기적 - 거기 있는 사람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주신 힘으로 일할 때, 우리 자신만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까지 축복이 흘러 넘치게 하신다. 우리가 예배 끝에 부르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 

 

간증) 

우리 아버지가 주셨어요....

 

우리 트레이시 제일교회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분의 풍성함. 

내가 한 것이 아니다. 그 분께서 하시고 우리는 누린다. 그 분을 통해 우리가 풍성하고, 우리의 풍성함이 주위를 풍성하게 한다. 쓰임받는 삶이 가진 기쁨이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코로나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들끼리 이 시간 동안 예배하게 하실까? 

누가 일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여지는 전통이 세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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