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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시편 109편 26-31절) 

 

지난 주 설교 - 큰 집에는 금그릇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쓰시는가? 금그릇, 은그릇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 

그리고 자신의 죄를 깨달은 우리는 모두 나무그릇, 질그릇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를 깨끗이 하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을 더럽히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다 깨끗한 그릇 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깨끗하다 할 자가 없다. 그것은 은혜로 주어지는 열매이지 우리에게 숙제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때에 우리는 율법주의가 아닌 은헤 아래서 올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은 시편 109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편 109편은 나 자신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받은 설교중 하나이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지은 시이다. 시편 연구가들에게는 흔히 저주시라고 분류된다. 

다윗하면 아마도 성경의 인물 중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물일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메시아상 - 다윗과 같은 왕, 다윗의 시대 

그는 인간관계에서도 가장 훌륭한 인품을 보여준다. 

그는 그를 죽이고자 달려드는 사울왕을 죽일 기회에서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어찌 자신이 죽일 수 있겠는가하며 하나님의 손에 그를 의탁하고 두 번씩이나 그를 풀어주었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애도하고 슬퍼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당해 왕궁에서 쫓겨나 죽을 위험에 처해서도 그는 아들을 미워하지 않았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너무 슬퍼해서 신하들이 만류할 정도였다. 

그가 왕궁에서 피신하여 도피할 때에 일반 백성이었던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 신하들이 그를 죽이고자 했을 때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 아니할 지라도 혹시 그의 저주 때문에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주실까하여 작은 백성의 소리까지도 업신여기지 않았고, 왕이었지만 자기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키려 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고 씻지 못할 과오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장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그 잘못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도 뚜렷이 표현할 만큼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주홍글씨같은 오명을 주었다. 

 

그런데 잘못을 지적한 이후의 그의 행동을 사울왕이 사무엘에게 잘못을 지적당하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그의 중심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빼앗은 것을 모두 진멸하라. - 마치 가나안의 왕을 진멸하라 하신 것처럼 죄악의 뿌리를 뽑아버리라. 

할 때에 불순종하고 좋은 것들을 감추었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꾸짖고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하나님도 당신을 버릴 것이라 선포한다. 그 때 사울의 반응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 범죄하였는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다. 

-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의 하나님이라 표현한다. 사무엘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 그런데 다윗이 나단에게서 죄를 지적받고 쓴 시- 시편 51편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소서.  

 

처음 부터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식한다.   

법궤가 성전으로 왔을 때에도 그는 백성이고 신하고 아내마저도 의식하지 않고 왕의 체면을 내려놓고 옷이 벗겨지도록 춤을 춘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삶을 살았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한다. 

예수님 이외에 성경 어떤 인물도 이와같은 인정을 받은 사람이 없다. 

 

그는 원래 그런 성품으로 태어난 자인가? 어떻게 그는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질 수 있었을까? 우리도 다윗과 같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기준으로 시편 109편을 보면 좀 충격을 받는다. 

시편 109편은 다윗의 시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시이다. 

 

우리가 아는 다른 시편의 내용이나 표현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다윗이 이것을 지었을리가 없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글이 왜 시편에, 성경에 올라와 있는지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의 복음과는 확연히 다른 반 복음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도시였을 뿐만 아니라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즉 성가대와 함께 했던 회중노래로서 지어진 시라고 적혀있다. 다윗 개인의 시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예배 시간에 함께 불러왔던 노래라는 것이다. 실재로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맛디아를 새 사도도 세울 때에 이 본문을 인용한다.  

 

(행 1: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이 사실로 보면 유대인들과 기독교 공동체 대부분이 이미 이 시편의 내용을 익숙하게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용을 좀 들어가보자. 

 

기도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1절) – 내 하나님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2-3절) 

  • 여기까지는 다윗이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했나 보다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는데 그 누군가가 지금 까닭없이 나를 공격한다는 소리이다. 그가 사울인지, 누구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다윗은 지금 굉장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그 이후의 기도는 이제 차마 함께 읽기 거북할 정도로 저질적인 저주로 가득차 있다.  

 

[시 109:6-8]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그도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직분있는 사람이었다. 

9절부터는 더 심해진다.  

9-15절 (봉독) 

자, 4절에서 다윗은 분명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다윗이 그를, 혹은 그들을 사랑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에 나온 다윗의 대적자가, 핍박자가 다윗에게 어떤 말로 핍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이어 나온 다윗의 말도 그에게 질성 싶지 않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정말로 초등학생이 싸우면서 자기 부모에게 고자질하는 듯한 유치한 모습마저 보인다. 자기는 무조건 잘했고 상대방은 무조건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7절에  “그의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 

8절 “ 그 년수를 단축시키시고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고..

9절 “그 자녀는 고아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는 유리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아예 신앙인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은 온데 간데없다. 4절에서 말한 "나는 사랑하나" 라는 말을 믿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히려 다윗을 핍박한 자보다 더 나쁜 저주자가 다윗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어찌보면 욕설과 저주가 가득한 장면을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름아닌 다윗의 시에서 보게된다.  

그냥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며 계속 읽기가 거북해지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대부분 성도의 기억 속에 잘 남아 있지 않다.  

 

어떻게 다윗은 이와 같은 시를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글로 기록하게 되었고, 후에 성가대와 함께 온 회중이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하였을까? 아니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시를 성경에 기록되도록 허용하였을까? 

여러분 중에 누군가 이토록 처절한 저주의 기도를 드려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어떤 목사가 강대상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아마 신문에 대문짝처럼 실리지는 않을까? 

이 기도가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1.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언어로 말하는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옷을 지어 자신을 가리고 바위 뒤에 숨는 것. 

죄인은 가린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민낯을 가린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 무의식의 세계 

인간의 행동 너머에 있는 무의식적 표현 - 이드라고 하는 본능,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똑같이 식욕, 성욕, 탐욕이 인간 본성이다. 

 

사울처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의식한다. 벌거벗겨지는 것을 못견뎌 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가릴 것이 없다. 

진실하다는 것이 꼭 좋은 마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 속마음. 때로는 깊은 미움, 깊은 절망, 깊은 저주, 원망...

 

하나님 앞에 거북한 기도가 있을까? 

물론 다윗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셨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하나님 앞에 고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한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실꺼야. 

죽도록 미운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그 사람이 비록 이러이러 하지만 난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질때가 있다. 

 

2.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의탁하는 기도

다윗은 자신이 복수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충분히 힘이 있어도 원수 갚은 것, 억울한 일을 푸는 것, 하나님의 판단을 받고자 했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되도록 했다. 왜? 나도 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아 솔로몬의 판결 같은 훌륭한 재판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자신의 죄악도 다스리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이 재판관되지 않았다. 판결의 권한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렇기에 그는 그 만큼 실수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결은 정확했다.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압살롬은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만약 다윗이 그 일을 행했다면 잠시 통쾌할 진 모르지만 그의 손에는 피의 흔적이, 죄의식의 흔적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심판을 당했지만 다윗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한 이유이다. 

 

3. 자신의 언어 속에서 똑같은 죄를 보았다. 

우리가 시편 109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다윗도 상대방 만큼이나 저주의 입술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나 피해자가 다 죄악 가운데 있다. 

부부관계에서도, 친구 사이에도, 어떤 관계에서도 갈등의 현장에서 이야기를 듣다보면 난 잘못이 하나도 없고 상대방만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을 필터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다보면 상대방의 잘못이나 내 잘못이나 매한가지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나님의 판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진실이 내어놓다보면 그 안에서 나의 죄악과 연약함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미움에 앞에 나를 좀 불쌍히 여겨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차츰 언어가 바뀌게 된다. 진정한 내 모습을 대면하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변화의 시작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상대방으로부터 받아왔던 상처의 치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미움이 이해로 바뀌고, 그의 언어가 나의 언어로 바뀌면서 용납하게 된다. 비로서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는 것이다. 

 

4.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같은 완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기도라도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있다.

 

다윗의 시편을 읽다보면 유치하고 과장되게 느낄 때가 정말 많다. 왕인데도 늘 자신은 불쌍하고, 가난하게 표현한다. 대장부의 모습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기도는 유치했지만 그의 삶은 고상하고, 그의 인간관계는 온전했다는 것이다. 

 

고상하고 거룩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고상하게 기도하고 유치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유치하게 기도할 지라도 하나님 앞에 자신의 본 모습을 내어놓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정적으로, 언어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착해야 한다. 깨끗하야 한다는 강박에 쌓여 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단지 솔직하게 내 마음을 열고 주님 앞에 내어 놓는 것 뿐이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참으면 - 몸에 병이 온다. 

남에게 말해서 풀거나, 다른 행동으로 풀면 부작용이 온다. 말이 꼬리를 물며 왜곡되고 내 앞에서는 나를 이해 해 주는 듯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또 다른 비수로 나를 찌른다.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하거나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일에 전념하면 대다수 중독이나 일탈하게 된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아픈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푸는 것이다. 필터링 없이 내 모든 언어를 들으 실 수 있는 분 앞에 내 모든 감정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난 모든 감정에 솔직한 인간이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리고 비로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다. 

 

아이는 밖에 나와 더러워 질 때 마다 엄마에게와서 더러운 몸을 보인다. 

그러면 몸을 닦아 주는 것은 부모이지 아이가 자기 몸을 닦을 수 없다. 

깨끗한 그릇은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내 보인 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래서 깨지고 상한 마음을 가진고 나오는 자의 예배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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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4장 1-56절   세 종류의 상속자

 

땅을 분배 받기 전에 먼저 땅을 요구한 두 종류의 사람들 

 

1.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배경 (민수기 32장) 

(민 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민 32:5)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원인:  그들이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으므로.

요구: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이 땅을 우리에게 주소서 

        (성화, 거룩,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저 이 땅에서 잘 살게 하소서...)

 

모세의 반응: 

6절: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7절: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8절: 저희 조상들은 가데스바데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10명의 정탐꾼이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낙심케 하여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십자가의 길을 걷고 예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자, 성화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 앞에 내어 놓는 자들이 가장 힘든 것은 세상이 아니다. 땅의 신앙으로 물든. 이 땅의 복을 위해 사는, 이 땅의 만족이 가장 우선순위인 그런 신앙인들로 인해 갈등한다. 

꼭 이렇게 까지 믿어야 하나?  대충 믿을까? 세상과 타협할까? 

 

결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1절) 

        (그들은 그들이 보기에 좋은 땅을 선택했다.) 

 12절: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반전: 그들은 편안히 살았는가? 

 대충 믿는 신앙이 편안함을 보장하는가?

 

[민 32:17-19]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얻지 못하고 자기 것으로만 만족하는....

결국 자기의 것이 훅 불어 날아간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대상 5:26)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앗수르에 의해 가장 먼저 침략당하고 사로잡히는 지파가 된다. 

 

2. 갈렙 

1) 장소: 길갈 -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전초기지, 거기에서 땅을 분배 

4장 5장: 요단강을 건널 때에 12돌을 쌓아 기념비를 세움, 

              여리고를 앞두고 할례를 행함. 

              유월절을 지킴 

              길갈의 의미: 네 수치가 굴러갔다. 넘어갔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지역

 

원래 유다지파로부터 시작하여 제비 뽑을 차례 

 

그때 갑자기 갈렙이 나와 먼저 지분을 요구       

땅을 분배하는 방법 - 지파별로 나아와 제비뽑기 - 그러나 갈렙은 제비 뽑기를 거절하고 헤브론 땅을 요구 

 

갈렙은 우선 9절에서 45년 전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산지"를 그에게 준다고 약속한 일을 이야기 합니다. 이 곳은 어느 지역보다 더 정탐꾼들의 중요한 보고 대상이 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곳에서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족속들 중 가장 힘이 세고 장대한 아낙 자손의 모습을 보고 놀랐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추측컨데 다른 정탐꾼들은 이 곳에서 아낙 자손을 보고 이 성을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결정적으로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다시 험악한 4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루로 전쟁의 위협이 없는 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갈렙은 아마도 온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14장 29절에 보면 갈렙의 나이 40세 때에 너희 중에서 20세 이상으로서 계수 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파의 사람들이 이젠 서로 편한 땅을 찾아 분깃에 따라 흩어지려고 할 때에 가장 원로인, 그리고 가장 공로가 많은 갈렙은 이스라엘 민족 어느 누구도 감히 가겠노라고 말하지 않는 그들의 두려움의 땅을 나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원로된 자로서 갈렙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록 육신은 쇠하였어도 한결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이 준다고 약속한 땅, 아무도 가지 않지만 믿음의 눈으로 본 자만이 감히 나설 수 있는 땅, 그 땅을 나에게 주소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40년 전에 나에게 약속한 그 땅을 지금 동일하게 내려 달라고 난 그 때나 지금이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오직 주님 당신만을 의지하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그 땅에는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이 있어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다.

분배- 나누라 (15장- 19장) 

19장 마지막 절 : 이에 땅을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 

(49-50)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경계를 따라서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곧 여호와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요구한 성읍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를 주매 여호수아가 그 성읍을 건설하고 거기 거주하였더라. 

 

누구로 시작해서 누구로 마치는가? 갈렙으로 시작해서 여호수아로 마침. 

이들의 믿음과 신실함으로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 일이 마쳐짐. 

 

(묵상질문) 제비 뽑기에 앞서 먼저 땅을 요구한 두 부류의 사람들 

요단 동편의 땅 -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그리고 갈렙과 마지막에 받은 여호수아 

 

하나님이 주신 땅, 하나님이 주신 축복, 하나님이 주신 기업 

VS 

내가 원하는 땅, 내 환경에 맡는 축복, 

나는 어떤 기업을 가졌고, 어떤 기업을 가진 자가 되고 싶은가? 

 

온전히 믿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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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3장 1-7절  - 가나안 땅의 분배 

 

  • 여호수아의 전반부 :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의 역사 -> 21장까지 그 땅을 분배하는 긴 설명 
  • 13장은 21장까지의 땅의 분배에 대한 종합적 개관 설명 -> 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도 역시 중요하다. 일반적 역사 - 전쟁하여 승리하는 것으로 12장에서 끝나지만 성경의 역사는 창조되어 주신 땅을 어떻게 하였는가에 대한 역사이다. 성도의 생애, 신앙의 여정-> 하나님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내 달란트, 내 사명 
  • 완전한, 또는 불완전한 정복 - 분배. 

1절: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그렇지만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1) 피곤한 육신을 위하여  

여호수아의 삶: 40년 광야생활, 7년의 가나안 정복의 시간, 쉴 틈 없는 고된 훈련과 전쟁의 시간 

그가 늙었다. 힘들게 살았다. 야곱이 표현한 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그러나 아직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다. 남겨진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 쉴 수 없다.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2) 완전한 땅은 지금이 아니다! 

3) 아직 해야할 것이 남아있다

-> 여호수아의 사명이 왕을 처단하는 것이라면 그 땅에 들어가 땅을 정복하는 것은 각자의 사명 

->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단 권세를 멸하셨지만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사명이다. 

우리의 사명은 왕이 없는 그 장소에 들어가, 자신에게 주어진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그 땅을 주님이 주인되게 하는 것이다. 

땅을 취하고 분배하여야 한다. 

남은 지역은 어디인가? (요단 서쪽,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전 지역의 땅) 

2-3절: 블레셋 사람의 땅의 다섯 방백 :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 이제부터 사사기 시대, 다윗왕조의 시대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가장 괴롭히던 족속. 

4절: 가나안 족속의 모든 땅. 

6절: 시돈 사람의 땅.: 이세벨, 사르밧 과부의 땅. 

: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 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하라. 

 

7절: 너는 이 땅을 아홉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기업이 되게 하라: 하나님의 땅이 되게 하라. 

 

그 이전 까지의 전쟁: 연합하여 쳐들어온 각 땅의 왕들을 쳐서 죽임, 사단 권세를 멸하심

이제 남은 전쟁: 왕이 없는 그 땅에 들어가 자기가 취해야 할 것

각자가 들어가 정복해야 할 땅. 

말씀과 순종으로 똑같이 들어가 정복해야 할 땅. 

언제 이 땅을 정복하는가? 다윗왕 때에 가서야 비로서 이 땅을 취하는 것을 완수함.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누리기 위해선 "믿음과 순종" 행동하는 신앙이 필요. 

 

(수 13:13)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까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거주하니라

(수 17:12)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사사기 1장: 여러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축출하는 것에 실패했음을 보여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후손들은 여호와를 알지도 못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 

(삿 2: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전쟁은 성공했지만 그 땅에 정착하는 것에 실패. 

원인: 불신앙, 불순종, 여기가 좋사오니, 이 정도면 만족. 

사사기: 빼앗긴 안식에 대한 주제.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이 없는 땅에 들어가서 주님이 왕되게 살아야 하는데 각자가 왕된 것처럼 살다가 왕을 잃어버렸다) 

룻기, 사무엘서-> 여호수아를 대신해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한 장

 

묵상 질문) 

1.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 사탄의 권세,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그리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나에게 주신 땅은 어디인가? 우리 트레이시제일교회에게 주신 땅은 어디인가? 그 땅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하라 하신 말씀은 어떤 것인가? 하루 하루 주신 말씀에 순종하자! 

2. 주신 사명에 순종하지 못하면 단지 열매맺지 못하고, 우리가 가질 것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대적이 되어 끝까지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의 삶의 올무가 된다. 우리 안의 있는 죄의 공간도 걸국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불순종하는 것도 결국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한다. 우리 삶에 취하지 못한 영역은 어디인가?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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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2장 1-8절 가나안 평정 2

 

1. 1-6절: 모세가 취한 땅 - 바산왕 옥과 헤스본왕 시혼 .

당시에 모세는 바산왕 옥과 헤스본왕 시혼에게 다만 길만 빌려주면 아무 피해를 주지 않고 통과하겠다고 하였다. 이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므로 전쟁을 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신뢰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러 나왔다. 모세는 이들을 공격하여 진멸시켰습니다. 이것이 라합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군사들을 들이는 원인을 제공한다. 

(민 21:22)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에든지 포도원에든지 들어가지 아니하며 우물물도 마시지 아니하고 당신의 지경에서 다 나가기까지 왕의 큰길로만 지나가리이다 하나

(민 21:23)시혼이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그의 백성을 다 모아 이스라엘을 치러 광야로 나와서 야하스에 이르러 이스라엘을 치므로

 

그 땅은 르우벤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되는데 그냥 분배 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가장 먼저 앞서 참여한다는 조건하에 분배를 해 준다. 자기 땅을 차지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머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가장 앞서서 전쟁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 

 

2. 7-24절: 여호수아가 취한 땅

여호수아는 광야 생활 40년을 견디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7년간 자그만치 31명의 왕을 정복합니다. 

어찌보면 한 평생 쉴 새 없는 광야 생활, 가나안 땅의 정복 역사로 일생을 삽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10가지 재앙 -하나님께서 애굽이 의지하는 10가지 신을 무너뜨리는 재앙 

그리고 광야생활 40년- 만나 훈련, 십계명과 성막, 매일의 말씀과 예배를 훈련  

 가나안 정복 7년 - 여리고성과 아이성 전투를 통해 가장 어려운 성도 자기 입술을 제어하고 순종하면 취하는 것이요, 가장 쉬운 성도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실패한다는 산 체험 

 그리고 연달아 남쪽 연합군, 북쪽 연합군....광야 생활을 통해 그토록 두려워했던 가나안 민족 자그만치 31명의 왕을 진명하고 그 땅을 정복해 나간다. 

 

12장을 통해 우리는 우선 모세를 불러 인도하신 가나안 정복 역사가 여호수아를 통하여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각 시대마다 주의 종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흠많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은 축복이고 은혜이고, 감사한 일이다. 쓰임받는 것으로 교만해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나같이 죄악된 자를 쓰시는 하나님께 크게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성전 건축의 준비를 시키시고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완성시켰듯이 가나안 정복도 모세를 통하여 준비시키시고 그것을 이루는 것은 여호수아다, 

이것은 율법이 구원을 이루는 초등교사가 되고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받는 구원의 모델을 보여준다. 

이것이 세례 요한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케하고 예수를 통해 구원의 복음이 완성되는 것으로 결말맺어진다. 

베드로를 통하여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졌고 바울을 통하여 유럽의 복음 역사를 열고 열두 제자의 순교를 통하여 전세계로 복음이 뻗어 나간다. 각 시대마다의 사명이 있고,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도 준비의 단계, 전투의 단계, 열매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전쟁 중앙 (여리고와 아이성을 점령) 

여리고성과 아이성 전투-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는가? 

내 힘과 상황을 의지했는가? 

 

너머지 남부와 북부의 왕들 

그들이 먼저 동맹하여 전쟁을 걸어옴. 

주도권을 그들이 쥐고 전력도 훨씬 앞섰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전쟁에 임하라고 한다

전쟁에 임한 후에 하나님은 우박을 내리고 태양을 멈추고 그들을 전멸시키신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 완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전쟁을 완수한다. 

 

아낙자손을 두려워하여 40년간을 방황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믿음 안에서 7년간의 전쟁 동안 31명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31명의 적을 순종을 통해 믿음으로 승리한다

 

가나안땅은 아름다운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굽기3:8), 기름진 땅(예레미야2:7), 영화로운 땅(다니엘8:9), 거룩한 땅(스가랴2:12), 약속하신 땅, (히브리서11:9)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 거하는 부족들은 근친상간, 수간(짐승과 성교), 간음, 우상숭배, 그리고 각종 사슬에 매여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먼저는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그 땅을 취하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죄악을 진멸하라는 것이다. 

땅만 정복해서도 안되고 땅과 함께 반드시 그 땅의 죄악을 몰아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정복해야 할 31개의 대적들 -외적인 대적, 내적인 대적들을 위해 기도해보자.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믿음은 무엇인가? 말씀과 예배 안에 서 있는가? 나의 힘을 의지하는가? 

내 안에 두려움이나 감정적인 불안과 낙심이 있는가? 믿음 안에서 담대한가? 

구원받는 나이지만 그 안에 죄악들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가나안 정복을 써 내려가야 한다. 

이전까지의 삶이 광야였다면, 트레이시제일교회 성도들과 함께 하는 삶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 31개의 두려움과 내 안의 죄악들과 싸워 이겨나가는 사역이 되기를 꿈꾼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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