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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형편에든지  (빌립보서 4장 11-13절)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020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교회와 성도

  • 한 해 동안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적으로 본다면 무엇보다 코로나로 인해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을 당한 분이 없음에 먼저 감사하게 됩니다. 특히 이귀자 권사님 가정, 이옥희 집사님 등 연로하신 분들도 이 시기를 잘 버티고 마음은 좀 불편할지라도 코로나로부터 지켜 주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특별히 직장생활 하면서 코로나에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일하시는 집사님들, 코로나로 부터 지켜주심에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년의 대부분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며, 어느새 학교 안간다는 즐거움보다는 답답함과 지루함과 많아진 숙제량으로 인해 힘듦에도 잘 견뎌주고 있는 학생부 아이들을 보면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 그러나 그 마음 한 편에는 정말 감사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이라기 보다는 코로나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 어떤 성도는 코로나로 인해 사업의 큰 위기를 맞이하고 어떤 분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거나, 일이 많이 줄은 분들도 있습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서 다시금 코로나 확진이 많아지면서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교회나 성도들도 어두운 그늘을 많이 보게 됩니다. 
  • 특히 장사하시는 분들은 추수감사 때부터 연말까지 선물과 쇼핑으로 인해 한 해의 큰 수익을 내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는 말을 듣게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 때에 맞이하는 추수감사절, 아니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을 때에 감사를 말하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가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없는 예배, 마음에 없는 감사를 받으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몇 주 전부터 저는 감사를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전하면서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향의 땅을 떠나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막연한 땅을 찾아 떠났던 사람들이 긴 항해를 통해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을 잃고 낯선 땅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사람들이 추위로, 부적응으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칠면조를 잡아 이웃을 초청하여 드렸던 예배가 추수감사절의 시작이었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마음 먹으면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걸 정도의 큰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감사는 또한 밭에 감추인 보배를 찾듯이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라고도 나누었고 하박국을 통해서는 한 밤중에 드리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외적인 고난과 아무 것도 없는 내적 공허의 상태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의 비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기도를 통해 오천명이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큰 숙제 앞에서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것은 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마리라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식사기도 하면서 의탁하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기는 예수의 기도를 나누어보았습니다. 

 

함께 나누었던 설교를 종합해보면 우리에게 남는 한가지 질문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와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왜요? 감사는 자신의 상황을 자족할 수 있는 데서 나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이 자족이라는 말, 많이 나누었지만 외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복, 곧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고 있는가? 아니, 지금 행복한가?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나? 

 

Well-being이라는 말이 삶의 질을 나타내는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지만 상대적으로 정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주위에서 참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코로나로 고생하고 있는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니, 바울의 예를 들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기를 설교하는 것이 성도에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어서도 참 적당하고 적절한가? 진실히 이 말씀을 잘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감사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경험했던 일은 제 마음을 더 힘들게 했습니다. 

시에서 교회 건물에 대한 경고장을 받은 후에 우리는 이제 교회를 옮겨야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주소록에 올라 있는 모든 교회에 이메일을 보내 클로스로드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교회 가까이,  좋은 교회에 옮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었지만 직접 만났을 때에는 여러가지 환경으로 불가능하게 됨을 알고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주 줌 미팅을 통해서 Harbor Light 교회의 목사님을 만나고 50명 정도 들어가는 채플 장소와 사무실 자리까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제 회의를 통해서 확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수요일날 문자를 통해 Alameda County에서 모든 대면 예배에 대한 전면 금지명령이 떨어졌다고 통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따라서 교회 렌트에 관한 상황도 지금은 추진하기가 힘들다는 답변이 왔습니다. 

 

건물 계약기간은 다가오고, 시청으로부터는 독촉이 날라오고, 이사할 장소는 보이질 않고...정말 하박국이 맞고 있는 상황처럼 답답하고 어두운 밤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 같았습니다. 감사절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누었던 설교말씀이 정작 나 자신에게조차 잘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침묵상을 녹화하고 예배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좀 막막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기도하려는데 기도가 잘 집중이 되지 않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에 제가 주로 하는 것은 다윗의 시편을 읽는 것입니다. 한편 한편 눈으로 넘겨가며 지금의 나의 심정을 대변할 수있는 구절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몇장을 쭉 넘기다가 시편 57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 57: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소리가 다윗의 절규처럼 들려왔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고 싶은 마음, 재앙이라는 말도 눈에 꽂혔습니다. 

제목을 보니 사울을 피해 엔게디 굴에 숨어있을 때 지은 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한 때 나단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목동에서 왕궁으로 하루 아침에 거쳐를 옮긴 다윗. 

골리앗을 무찔러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을 때의 그 기쁨과 환호도 잠시 지금 그는 사울을 피해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루 앞 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 57: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그의 영혼이 지금 사자들 가운데 누웠다고 말합니다. 사자라고 표현된 그 대적은 다름아닌 사람들입니다. 말로 찌르고, 무기로 공격하는 대적들입니다. 그의 영혼이 불사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7절부터 다윗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시 57:7-9]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확정되었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도 밝히지 않습니다. 
  • 아마도 그는 기억했을 것입니다. 양들을 칠 때에 사자로부터, 곰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키셨던 하나님. 그리고 골리앗 앞에서 자신을 높여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다시금 붙들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그는 그의 마음을 확정합니까?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무엇한다는 것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는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 기도: 내 마음의 소원을 올려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는 내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주님 앞에 내 삶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불안과 절망에 둘러쌓여있는 자신을 하나님 보좌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 찬양: 그리고 그는 찬양했습니다. 만민 중에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했습니다. 뭇 나라라는 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여러 환경들 가운데서, 폭풍우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사건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사건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에게 어둠이 임하고 불안과 불만과 부정적인 모든 것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은 생각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출애굽을 시키시고 광야 가운에서도 그들을 먹이셨던 하나님이 가나안 앞에서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로잡혀 들어가려 하지 않자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 14: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삶을 맡긴다라는 뜻 - 가장 심각한 상황까지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 오면 그냥 하나님 뜻이라면 죽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나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때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지 못하면 난 부정적이고 불안하고 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없어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 -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 그 분의 손길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상황이 없어지지 않아도 더 이상 그 상황 때문에 넘어지지 않는다. 

견딜 수 있고, 맞설 수 있고, 이길 수 있다. 

 

그날 이후로 기도 시간 마다 핸드폰에 있는 노트를 열어놓고 하나 하나 체크를 해갑니다. 

- 난 지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 진짜로 그 분이 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가? 그 마음이 아니면 다시 내 인생을 인도하신 그 분을 기억하며 믿음을 구합니다. 

- 난 그 분께 내 삶을 맡기고 있는가? 도와달라고는 하면서 여전히 짐을 지고 가진 않는가? 여전히 내가 짐을 지고 있으면 다시 그 분께 구체적으로 나의 짐을 아뢰고 의탁합니다. 

- 난 지금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 

- 난 지금 행복한가? 내 인생은 지금 행복한가? 

 

상황은 변한 것 없는데 내 인생이 여기서 멈춘다 하더라도 후회하거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버티고, 누리고,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하나님께서 이후로도 영원토록 지키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배워 나가길 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우리는 모든 형편에 자족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를 보내면서 모두가 언제 옛날처럼 돌아갈까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Edward John Stetzer라는 목사님이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난 교회가 언제 예전처럼 돌아갈까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나를 지내면서 또 예전처럼 돌아갈 까봐 그것이 걱정이다." 

 

코로나가 하나님의 심판이냐, 인간의 잘못의 결과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세상은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코로나를 통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참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홀로 있어도 참 신자가 될 수 있을까? 난 내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고 굳세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언제 지나가지만을 생각한다면 예전의 삶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간을 통해 예전의 나를, 예전의 내 신앙을, 예전의 교회를 바꾸지 않고는 앞으로의 시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교회건물을 넘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새로운 어떤 것을 향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고 예비하심이 있습니다. 

성도의 자세는 고난을 통해 배워나가고,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새벽예배 때 나눈 말씀처럼 

  • 모든 고난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떠한 고난보다 크다. 고난이 내가 너에게 만들려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내가 고난을 통해 주려는 것은 네게 받는 고난을 해결하는 것보다 크다. 네가 고난을 극복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 고난은 부활로 오기 위한 죽음의 길이지만, 그 고난에 압도되지 말고 고난을 통해 너에게 찾아오는 부활을 바라보라. 그 부활의 집을 세우라!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통해 부활의 소망의 집을 세워 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그래서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행복의 키를 발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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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자들아! (사 55장 1-9) 

 

[사 55:1-7]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막의 햇빛이 뜨겁게 내려쬐는 오후, 너무 더워서 아무도 밖에 나와 있지 않은 거리에서 홀로 물을 깃기 위해서 머리에 항아리를 메고 우물가를 찾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쩔어서 유대인들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고 동족인 마을 사람들로부터도 부정한 여인이라 찍혀서 사람 만나는 것조차 꺼리던 여인. 그러면서도 오늘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간에 오늘도 어김없이 홀로 우물가에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 

아무런 희망없이 그저 사람들 이목을 피해 하루 하루 갈증만을 면하고자 살아가는 여인에게 오늘은 특별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녀의 고통, 외로움, 비참함을 어떻게 아시고 예수님은 가던 길을 돌아 유대인으로서는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사마리아 땅을, 그것도 쨍쨍 내려찌는 오후의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하나님의 품을 떠난 자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은혜의 길을 떠난 자들의 가장 큰 특성은 목마름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이 목마름을 해결해 나가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이 목마름을 극복하고자 하는 방법들이 다 제각각입니다. 

세상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은 돈입니다. 돈을 벌어야 음식을 사고 돈을 있어야 하고 싶은 것도 하고 돈이 있어야 남들과도 어울릴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돈의 힘을 긍정합니다. 드러내놓고 돈이 힘이다. 돈이 있어야 사람구실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돈 많은 나라, 돈 많은 사람일수록 자살률이 높고, 우울증등 정신건강이 더 위험하고, 부모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 다툼이 일어나는 일이 많은 것을 주위에서 수없이 보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래도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고 살아갑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있어야 행복할까요? 얼마만큼의 돈이 있으면 족하다고 만족을 할까요?  

 

난 안 그럴 것 같지요? 

난 그정도로 욕심 부리지 않고 단지 지금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만족할 거 같지요? 

조금더 가질 수록 조금 더 라는 마음이 더 강해질 겁니다. 

왜냐하면 오직 이땅의 만물 중에 우리 사람만이 영혼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이 영이라는 것은 유한한 것으로는 절대로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영원이라는 공간을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쫓고, 쾌락을 쫓고, 권력을 쫓습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길을 향해 달려갑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잡아볼려고 그길을 가는 사람들... 무지개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기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사 55: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세상의 영원하지 못한 어떤 것도 내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고 나를 배부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듣고 들을 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 그런데 사람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배고파질, 또 목마를 것을 위해서는 아끼지 않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투자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는, 내 영혼을 채우고, 내 영원을 책임질 말씀을 위해서는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알고 고백합니다. 

 

[빌 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 예수 안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인생 안에서 비로소 자족함이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몸은 여전히 아플지라도 은혜 아래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갑니다. 

 

(사 55:3-4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다." 

다윗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어린 목동일 때부터 그의 직업은 양을 치는 것이었지만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목동에서, 궁중의 노래하는 자로, 군대의 장군으로, 때로는 도망자로, 그리고 왕으로 인생의 여정을 따라서 자주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는 그의 유일할 삶의 직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복은 바로 이 다윗에게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가 되셨으며 그로 하여금 어느 상황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그를 푸른 초장에서 쉬도록 평안을 허락하셨고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하나님의 보장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나라까지도 정복하고 그를 찾아와서 도움을 받아가도록 그의 인생을 축복했습니다. 

그의 왕권을 영원토록 보장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영원한 왕국이 보장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자의 삶을 하나님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생을 보장하십니다. 그를 만민의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바로 솔로몬부터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일천번제를 드리면서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곧 1천여개의 산당을 세워 성전을 지은 헌신을 다 까먹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하고 성전 안에서 음란한 예식을 치룹니다. 

그로부터 북왕국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 약 500여년동안을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다윗과 같이 말씀을 사랑하기를,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기다리실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보내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고자 했지만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하루하루의 도움만을 바라면서 여전히 우상숭배로, 산당으로, 말씀 없이, 사랑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은 바벨론 포로기때 쓰여진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모습은 황폐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가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탔으며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기구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5백년을 기다렸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하나님을 떠났고, 조롱했고,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외면했고 죽였습니다. 

자기들의 환경이 나빠질 수록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바알에게로 아세라에게로 더 향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의 길로, 그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찬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래도 애가 타도록 또 말씀하십니다. 미워하지 않으시고,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지기 품을 떠나 방황하는 자들에게 돌아오라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사 55:1-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오호라.... 통곡의 소리이고 애원의 소리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떠나 있으려냐? 너희가 지금 힘이 들지 않느냐? 목 마르지 않느냐?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겠느냐? 

돈 없어도 된다. 내가 주는 은혜는 값없이 사는 은혜다. 값없지만 영원한 은혜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은혜이고, 너희를 살릴 은혜이다. 

더 이상 또 배고파지고 목말라지는 헛된 것에 네 물질과 에너지를 다 쏟아붓지 말고, 내게로 와서 듣고 또 들어라. 

 

  신앙생활 하다가 우리 또한 또 목말라 질 수 있습니다. 또 배고파 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가 한 순간 우리의 관심이 현실에 부딛치고 장벽에 부딫질 때 내 영혼은 또 목마릅니다. 

그런데  내 영혼이 목마를 때마다, 내 영혼이 아플 때마다 나를 고칠 수 있는 분, 나를 만질 수 있는 분... 그 유일한 분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너무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하고는 싶은데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까? 

 

EX) 예수 기도 

초기 교회 시대때 사막으로 기도하러 나가던 사람들. 

그 수도자들에게 지혜를 구하러 쫓던 구도자들. 

어떻게 하여야 깊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여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분이 느껴질 때 까지.... 한 마디 한 마디...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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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4장 1-5절 고통의 중심에서 노래하라. 

 

[사 54:1-5]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사 54:1]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 심판에서부터의 구원, 회복- 그들을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 잉태치 못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자 - 삶의 열매가 없는 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그 열매를 잃어버린 자. 
  • 잉태치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불러 잉태하는 자가 되게 하심 - 하나님의 구속.
  • 성경은 잉태치 못하는 자가 잉태케 되는 역사의 기록 - 아브라함, 이삭, 사무엘, 삼손,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
  •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시금 잉태치 못하는 자가 됨 - 왜? 불순종, 불신앙으로 인해   

 

[사 26:16-18] 여호와여 그들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사오며 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잉태한 여인이 산기가 임박하여 산고를 겪으며 부르짖음 같이 우리가 주 앞에서 그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나이다 

  • 우리가 헛된 것을 의지하면서 살면 산고를 겪는 고통을 당할 지라도 열매맺지 못하고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왜 열매가 없나? 왜 기한 중에 열매맺지 못하는가? 죄로 인해서다. 생명을 공급받지 못해서다. 
  •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때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 

 

[사 54:2-3]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

그렇게 고난 중에도 어떤 삶의 열매에 대한 소망도, 기쁨도 잃어버린 백성에게 노래하라하신다. 그것도 큰 소리로 외쳐 노래하라 하신다. 

  • 남편을 잃어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어떤 민족보다 많은 자식을 낳을 것을 말씀하신다. 
  • 네 장막터를 넓히며 말뚝을 견고히 하고 처소의 휘장이 널리 퍼지겠다고 말하신다. 너의 집- 이스라엘을 견고히 하시겠다는 것이다. 
  • 언제? 지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집도 없고 성전도 불타있는 그 상황에서... 
  • 현재의 고통 속에서 미래를 잃어버린 민족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열방에 대한 약속을 주신다. 

 

[사 54:4]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젊었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요, 부끄러움을 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젊었을 때 - 원어를 보면 "아룸"이라는 말로 "사춘기" 때- 주석을 보면 아직 어려 민족이 되기 전의 때 - 바로 애굽의 노예 때의 수치를 가리킨다. 

과부 때 - 이스라엘이 남편을 잃어버리고 바벨론으로 팔려간 때 - 현재의 때이다. 

 

  • 지금 수치와 부끄러움 속에 몸을 떨고 있는 자들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될까? 
  • 이 약속에 신뢰가 갈까? 어떤 자에게 위로가 되고 신뢰가 될까?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는 보인다. 그 분의 말씀이 보인다. 그리고 믿음이 생긴다. 왜 그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고, 우리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십자가의 현장에서는 그 고통이 평생을 지날 것 같다. 그러나 부활이 오면 죽음은 사라진다. 그 기억은 잊어진다. 

우리는 욥기를 통해 그가 나중에 잃어버린 자녀를 갑절로 얻었을 때의 기쁨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전의 아픔을 잊게 한다. 

 

[사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 호세아에서 남편을 떠난 것은 일방적으로 고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나 남편은 그 여인을 찾고 받아준다. 
  • 아내의 부정함에도 받아주는, 받아줄 수 밖에 없는 그 사랑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남편이기에 부정한 여인을 받아준다는 말은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의 남편은 너를 지으신 자다. 
  • 곧 내가 너를 낳았기 때문에 난 널 포기하지 않는다. 널 버리지 않는다. 너의 하나님이다 하시는 것이다. 

 

[사 54: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 하나님을 버림으로 긴 침묵의 시간이, 영혼의 어두운 밤의 때가 임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아도 침묵하시는 그 때를 하나님이 잠시 너를 버린 때로 표현한다. 
  • 그런데 이 때 쓰인 "잠시"라는 표현은 "레가"라는 말로 눈 깜빡 할 시간, 찰나의 순간을 말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잠시 동안만이라도 우리에게 침묵하시면 우리는 견딜 수가 없다. 
  • 그런데 우리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외면하면서 살다가 내가 하나님을 부를 때 응답하지 않으시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상태는 버림받음의 표현이다. 
  • 예수님은 그 버림받음의 표현을 십자가에서 감당하시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인간의 그 깊은 고통, 하나님의 찰나의 깜박이는 순간의 침묵의 고통의 깊이를 표현하신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그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아니 왜 그런 고통을 통해서만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가? 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는가? 

 

[롬 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헤어짐이 없이는 하나님의 없음의 고통을 체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버림받음은 사랑하는 자들만이 겪는 고통이다. 
  • 그리고 믿음은 인내를 통해, 우리 믿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충만에 대한, 임마누엘에 대한 갈망함을 얻는 것이다. 
  • 환란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의 그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마음 속 끝까지 갈망하고 경험하고 채워 나가는 것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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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장 1-6절 (종된 삶으로의 초대) 

 

[사 53:1-6]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종의 노래의 결정판 - 가장 잘 알려진 본문, 마치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본 것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묘사, 제 5의 복음서 
  • 그런데 그 종-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 자신의 어떤 것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종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제자들에게, 그 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남겨주신 예수의 재림때까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룰 자 - 종
  • 이 종과 상반되는 성경의 반대인물- 선악과를 먹은 아담 (하나님이 내 삶의 기준이 아니라 내가 선악의 판단자가 되어 살 것이다) - 사사기 -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을 택하기 전 - 바벨탑 사건을 통해 드러난 그들의 삶의 목적 - 우리의 노력으로 하늘 꼭대기에 닿아 우리의 이름을 내자. - 하나님과 같이 되자. 그 분보다 높아지자. 
  •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을 외면한 자의 반대편에 하나님의 종이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다. 자기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종이다. 
  • 그리고 그 종의 완전한 모델이 되어 하나님이 친히 성육신 하여 종의 완성을 보여준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1) 우리의 마음에 담겨져 있는 예수의 얼굴, 예수의 모습 - 우리의 이상형, 왜곡된 현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혹은 사진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타낼까요? 

역사를 통해서 많은 예술가들, 혹은 영화 감독들, 혹은 영화 배우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인자하고, 온유하며 사랑이 많은 그 분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그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노력을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 

 

이상하게도 성경은 예수님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키가 큰지 작은지, 미남인지 추남인지, 멋있는지, 유머가 있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절대로 예수의 생긴 건 언급을 안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어떠하셨을까? 

성경에 예수의 얼굴이,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예수의 얼굴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에게 예수의 얼굴을 함부로 상상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패션오브 크라이스트가 상영될 때에도 많은 유대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영화의 상영을 막으려 애썼다. 

고난당하는 예수, 매맞는 예수, 피투성이가 된 예수.... 이를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 여겼기 때문이지만 그 속내는 예수를 그렇게 만든 유대인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를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은  넓은 이마와 긴 머리, 그리고 수염을 가진 잘 생긴 남자의 모습으로 생각한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Celsus(2세기)는 예수를 '작고 못생겼다'고 혹평한다. 역시 2세기에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신학자인 Justin Martyr 또한 예수를 '주목할 만한 아름다움은 없는' 이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200년 정도 후 제롬과 어거스틴은 예수의 얼굴과 몸을 이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어거스틴은 예수를 '아이처럼 아름다우며 지상과 천국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자'로 말하고 있다. 

 

장면은 바뀌어, 예수님은 잡신들이 우글거리는 이방인 지역,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제자들과 함께 가시다가 문득 한 가지 질문을 불쑥 던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때 제자들의 의견은 분분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며 그냥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대답이 아닙니다. 
이때 예수님이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다른 사람은 다 착각하고 있다 해도 제자들은 과연 당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 있게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희랍 말이고 히브리말로는 메시아요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이 옳게 바라보고 바르게 고백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도 착각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관입니다. 베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메시아란 현세적으로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진 분이라 믿었으며 바로 그 힘으로 나라를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부흥시키며 또한 사회를 안정시키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보처럼 당신이 사람들에게 잡혀 버림을 받아 죽는다고 하시자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펄쩍 뛰면서 주님을 말렸습니다.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는 잘 나가다가 사탄으로 전락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바라보는 베드로의 믿음의 눈은 아주 위대했지만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영화롭고 현세적인 문제의 해결사의 메시야로만 봤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자신의 욕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큰 꾸지람을 듣습니다. 정신이 번쩍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생활은 사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신앙의 모순이며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평생 방황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는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는 이미 왔으며 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어제 본문의 끝 부분인 52:13절부터 53장까지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을 그리는데 오늘의 말씀은 마치 메시아의 모습을 십자가 아래에서 그린 것처럼 선명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제 5의 복음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 Who 

[사 53: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 왕, 권력자, 힘, 돈, 명예를 쥔 자로? 그런 자들을 통해? 
  • 하나님이 바벨탑 앞에서 아브라함을 택할 때부터, 에서가 야곱을 택할 때부터, 사울이 아닌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을 택하면서도...한결같이 하나님이 쓰시는 자, 하나님이 택하는 자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건만 너희가 믿었더냐? 너희들이 우러러 보던 그 권력자에게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났느냐? 
  • 아무 것도 아닌 존재를 통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종이, 메시야가, 하나님 당신이 온다. 

 

왜 믿지 못했는지를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연한 순- 어린 묘목같다. 어린 나무일지라도 비옥하고, 물이 풍부한 곳에 있어서 머지않아서 큰 나무로 자랄 것이 확실하게 보이면 좋을 텐데, 마른땅에 자라고 있어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되고, 게다가 뿌리가 아주 작게 나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저히 제대로 클 나무라고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될 성 싶은 나무 - 미리 판단한다. - 외모로 그를 바라본다. 

  

그래서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를 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니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방 한 칸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셨습니다. 

게다가 말씨도 표준어가 아닌 갈릴리의 투박한 사투리를 쓰셨을 것입니다. 

그 무엇으로 보아도 메시아로 인정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구절들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입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우리 모두의 죄악’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다 영원히 죽은 존재였음에도 하나님은 독생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을까? 

그 초라함이 바로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상한 얼굴로 와야만 했던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 상한 얼굴로,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실존 - 

왜 열심히 믿는데도 고난이 오나? 왜 우리에겐 엄청난 복을 허락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리스도가 그런 우리의 가장 평범하다못해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고난 받는 모습으로 오셔서,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그래야 구원이 임한다고, 우리가 가야할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 목회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드는 생각과 유혹  

- 내게 힘이 있다면, 내게 능력이 있다면, 내게 권위가 있다면, 내게 돈이 있다면...

- 성도들이 내 말을 잘 듣고, 우습게 보지 않고, 말 한 마디에도 종처럼 움직일 텐데...

- 그런데 주님이 가라하신 길- 네가 종이 되어 걸어가야 결국 구원이 임한다. 네가 멸시를 당해야 그들의 죄가 사해진다. 그래야 은혜를 안다. 그래야 나를 안다.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자들은 숱하게 많지만 그 권력으로 사람의 몸은 움직여도 영혼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구약의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로 그들에게 비추어 주었어도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가 초라하게 십자가를 지었을 때에, 그분을 따르는 그 분의 제자들은 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목숨을 아까와하지 않았다. 종의 길을 가는 것이 마땅했기 때문이다. 

 

Posted by 소리별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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