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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장 1-10절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감람산 -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린 곳

예루살렘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감람산에서 대제사장으로서의 대 중보의 기도를 드린 장소

가룟유다의 배반과 그로인한 로마 군병들에 의해 끌려가시는 장소

 

그 곳에서 제자들을 보내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가 매여있는 것을 볼 테인데 그것을 풀고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은 따로 주인이 있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그 주인을 모르는 것으로 봐선 예수님과도 일면식이 없는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당황해서 머뭇거립니다. 아니 예수님이 도둑질을 시키나....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나귀를 끌고 오려고 하는데,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복잡한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고 또 어디서 왔고 예수님은 어떤 기적을 행했고 무엇 때문에 나귀가 필요한지...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 말만 하면 즉시 나귀를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묻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큰일났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시키신 대로 그대로 말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희한하게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그냥 그대로 허락을 합니다.

백주 대낮에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자기 나귀를 풀어 데리고 가면서 주가 쓰시겠다하라 하니까 그냥 내어 주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한 마디에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나귀를 내어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이 나귀의 주인이 누구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사실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 나귀 주인은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 없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1. 주님의 주권...

주님이 원하시는 일- 어느 때에는 설명하지 않는다.

갑자기 가라고도 하고 멈추라고도 한다. 사렙다 과부의 마지막 음식을 내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무리 힘이 있어도 이렇게 하지 못한다. 상황을 설명하고 왜 필요한지 이유를 대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일은 때로 그런 설명이 생략이 된다.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특징이다.

그 분은 그럴 만한 분이다.

 

2. 제자들의 순종

제자들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속으로는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명령하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사람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는 제자들이다.

물을 아귀까지 채워하 하는 것은 주님이시지만 그 물항아라리를 들고 손님들에게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은 종들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주인이 시킬 때...항변하지 않고 순종한다.

왜? 종이기 때문이다. 제자이기 때문이다.

종은 따질 자격이 없다.

제자들은 스승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본분이다.

때로 우리는 주님, 하면서도 종된 위치를 잃어버린다. 제자의 위치를 잃어버린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항변하고, 잡아채고, 외면하고, 무시해 버린다.

그리고 또 주님...하면서 기도한다.

 

기적은...믿음을 통해 역사된다.

믿음은 보이는 상황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역사된다.

순종은 상황과 감정을 넘어서는 주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 이루어진다.

 

3. 주인의 허락

종의 순종보다 이해하기 힘든 일은 나귀의 주인의 허락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미 주님과 약속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더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인정한다.

왜 그는 종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데 순순히, 한 마디 항변없이 아무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내어 드릴 수 있었을까?

 

"한 번도 쓰지 아니한"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는 밖에 매여 두지 않는다. 우리에 둔다.

메여 놀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주인은 한 번도 쓰지 아니한 나귀를 날마다 매여 놓았다.

왜? 선한 일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마치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처럼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좋은 것에 쓰고자 날마다 매여놓고 이 날을 기다린 것이다.

 

그는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고 가장 귀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던 주인이었다.

세상에 가장 귀한 축복이 주님께 쓰임 받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어떤 분이 휴일도 없이 죽도록 일을 해서 그래도 한 30-40억을 모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아서 나머지 인생을 좀 쓰면서 즐기면서 살자...그렇다가 암에 걸린 것입니다.

처음엔 이런 방법, 저런 방법 살 방법을 간구하다가 살 가능성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하도 억울해서 내가 번 돈 계획적으로 다 쓰고 죽자하면서 의사가 말한 시간으로 나누니까 하루에 3천 200만원 정도를 쓸 수 있겠더랍니다.

그래서 이 돈을 쓰고 죽자해서 하루에 3천 200백만원을 쓰려고 했는데....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호텔에서 자고, 최고급으로 생활해도 5백 몇십만원 정도밖에 못썼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더 써 보리라 해도 하루 아무리 최고급으로 바쁘게 다녀도 500만원 쓰는 것도 너무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며칠 하다가 체력도 안되고, 그렇다고 입맛도 없고 결국은 나머지 기간 동안 1억원도 채 못쓰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하고 왜 모으고 왜 아낍니까? 잘 쓰려고 하는 것입니다.

값지게 쓰려고 애써 모으고 아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인가? 어떻게 써야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것인가? 주님이 쓰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가 배운 지식, 나에게 있는 재능, 내가 벌어놓은 재물, 내가 살면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드리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주님은 남김없이 쓰십니다. 아낌없이 쓰십니다.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배운 의료 지식을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가 몸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일생을 드린 복음 전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너무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매도 많이 맞고, 풍토병에도 걸리고 위험한 일을 너무 많이 당합니다. 고문도 당합니다.

이 의사는 아얘 자기 일생을 이 복음 전도자를 따라 다니면서 그가 다치면 치료하고, 매맞으면 약 발라주고, 그와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그를 따라 지중해로, 아프리카로, 온 아시아를 따라다니면서 복음 전도여행의 생생한 증인이 됩니다. 복음 전도자는 죽었짐나 그를 따라다닌 의사는 전도자가 죽은 후에 그에 대한 기록, 그가 전한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그 자신이 복음 전도자가 되어 죽습니다.

누가 입니까?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정도면 누가가 이 세상 그 어떤 의사보다 크게 쓰임 받고 크게 축복 받은 의사 아닙니까?

 

천하장사 삼손이 가장 삼손 다울 때는, 하나님에게 그 힘을 쓰임받을 때였고, 솔로몬이 가장 솔로몬 다운 때는 그의 지혜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을 때였고, 마리아가 가장 마리아 다울 때에는 그녀의 값비싼 향유 옥합이 깨트려져 쓰임 받을 때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때로는 그 사람의 소유인 지혜나 재능을 쓰시기도 하고, 을 쓰시기도 하고, 물질을 쓰시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에게 쓰임받는 것이 가장 잘 쓰는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재능이 있어도, 학위가 있어도, 물질이 있어도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해서, 내가 아직 준비가 안돼서, 내가 게을러서, 내가 아직 드릴 마음이 없어서, 주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재물, 그 재능, 그 지식은 주님 보시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입니다.

 

그럼 어린 나귀를 보면서 주님은 어떤 자를 쓰시는가?

1) 어린 나귀 새끼-

나귀 새끼를 쓰시고자 한 예언은 스가랴서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태어 나기 500여년 전 이미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리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셨다는 의미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장면일까?

어리기 때문에 연약하고 힘도 세지 못하고 모든 면에서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쓰시는 것은 우리의 소유의 크기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눈에는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재능과 물질과 지식이라 할지라도, 주님은 쓰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 그대로 주님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저는 준비가 안됐는데요, 아직 부족한데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이런 변명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데 핑계대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2) 한 번도 타지 아니한

순결을 뜻합니다. 순결한 사람, 순결한 마음. 주님은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을 쓰십니다. 그 마음이 순전하여 거짓이 없고 정결한 영혼을 지닌 자를 즐겨 쓰십니다.

(요 19: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값나가진 않지만, 비싸지는 않지만,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꺠끗한, 순결한 자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지닌 자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3)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놓으매

우리가 아무리 순결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

여전히 흠이 있습니다. 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겉옷으로 그 위를 덮습니다.

흠을 가립니다. 우리가 의로와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들의 사랑으로 우리가 쓰임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쓰임받음의 결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9절)

쓰임받는 결과는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름없는 나귀 새끼는 그대로 이름없는 나귀의 모습으로 남습니다.

 

쓰임받는 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주님의 이름이 아닌 내 이름을 드러내는 데서 유혹이 옵니다.

나귀는 자기의 이름을 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만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쓰임받는 자의 승리입니다.

왜 많은 쓰임받는 자들이 넘어집니까? 결국 자기 이름을 지키려다가 주님의 이름에 해를 입힙니다.

쓰임받고 버려지는 자들은 불행한 자들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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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교회와 성도 (아모스 5장 3-5절)

 

 

섭리 -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연도 아니고, 숙명론, 운명론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이 주도하시는가, 허용하시는가?

 

하나님의 주도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하나님이 허락 - 욥의 고난, 나면서부터 병자된 자.

 

왜 허용하셨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이암아 오랜 기간 동안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못하는 일

예배 드리는 것이 온세계의 관심이 되고 비판이 되고 있는 시기

 

당분간 자기 백성을 흩어 놓으신 것

성도 입장에 보면, 목사 입장에 보면 당분간 자기 백성을 흩어 놓으신 것

 

바벨탑-

북왕국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의 멸망으로

신약 -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흩어진 교회

 

흩어질 때의 공통적 특징

모여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 보이지 않으시고

모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났을 때

 

모이는 것 자체가 뜻이 아니다.

모여서 어떤 삶을 사는가? 모여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마음이 되는가?

자기 만을 위하는가?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가?

믿음이 자라는가? 성숙하는가?

 

[암 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벧엘, 길갈, 브엘세바 -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소가 있던 곳

그런데 그곳으로 가지 마!

그 곳이 비참하게 될 것이고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그 사이에 성전으로 오지 마

왜 성전에 오는가? 하나님 찾으러, 만나러 오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그리로 가지 말고 나를 찾으라!

 

예배당 왔으니 하나님 만난다고 단순히 생각하지 마라.

그저 내게 보이러 와서 마당만 밟고 가는 것이다.

 

성전에 오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착각하고 스스로 만족하게 하고 내 앞에서 할 일 다했다고 하는구나.....

그런 그들을 흩으셔서 골방에서, 산에서,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고자 할 때....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실 때 - 자기들 까리 좋아 떡을 떼고 교제하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나아가지 않는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이게 하시는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세상을 구원하고자...

 

바벨탑- 모여서 자기들 이름만을 내게 할 때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 예배당 중심의 신앙생활 - 한국교회의 성장 배경 - 좋은 역사

그런데 그렇게 모여서 사회의 빛이 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성도들끼리만 좋고 그 안에서만 이동하고...

 

좋은 전통이지만 그 안에서 만족하고 있으면 안된다.

예배당 안에 있으니까 괜찮다고, 할 일 다했다고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하는데....몸은 예배당에 나왔는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지 않는다.

 

거짓 부요함.

[요 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

보고 있지 못하면서 본다고 만나지 못하면서 만난다고 하는 믿음,

맹인이 되엇더라면...바디메오처럼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며 부르짖을 텐데....

안주하고 만족하고,

 

심령이 가난한가? 은혜에 주리고 목마른가?

 

영적으로 죽은 자의 징후 - 교만, 판단, 정죄....

영적으로 산 자의 모습- 십자가 은혜, 더 갈급하고, 더 겸손하고, 더, 더, 주님을 알고자....

 

나를 만나지는 않고, 만나려고 하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그저 온 것으로 만족하구나...

흩으신다. 홀로있게 한다. 묻어가지 못하게 한다.

남들을 보면서 스스로 취하고, 판단하고 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보게 하시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 - 하나님 추구하는 것

그분을 찾고 만나고 사귀는 것.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는 것 - 기노스코 (헬), 야다 (히) - 인격과 인격이, 살과 살을 맞대듯이, 아무도 간섭할 수 없이 그렇게 친밀히 서로를 알아가는 것.

그렇게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예수를 알기 위해, 그 분을 경험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를 알고 그 분 안에서 나를, 나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

 

주님의 관심이 교회 부흥일까? 성전 짓는 것일까?

내 안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내가 교회가 되는 것.

나를 통해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남들을 포용할 수 있는, 그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주님을 따르는 자, 십자가를 지는 자. 부활을 경험하는 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내 목적에서 사라지고 내 신앙의 결과물에 만족하면서, 지금이 좋사오니 하면서 머물적에 하나님의 시험이 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자기 열심으로 이룬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열매, 하나님의 증거. 그 아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자녀/

 

그런데 왜 그 자녀를 바치라고 했을까? 왜 죽이라고 했을까?

 

그것이 축복이건, 성공이건, 신앙의 열매건, 그 것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급함이 사라질 때- 그것 죽이고 나와 교제하자.

 

우리가 골방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는 그 순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마지막 때에 알곡과 쭉정이가 갈린다. 참 신앙이 드러나고 거짓 신앙이 드러난다.

 

  •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나와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를 이루는 자- 더 깊은 신앙으로 그들의 신앙이 성숙되어져 갈 것이다.
  • 그런데 이런 시기를 만나서

처음에는 주일에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답답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럽고 하던 마음이 시간이 지날수록

편해지고, 느슨해지고,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도 괜찮구나. 꼭 예배당 나갈 필요 없구나...하면서 신앙이 헤이해져 가는 사람들은

예배당 신앙생활보다도 더 떠나가는 사람들은 신앙의 쭉정이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 몸으로 성전된 우리 성도는 교회가 필요없는가? 교회는 공동체이다. 모이고 부딪끼고 하면서 신앙이 자라고, 영향력을 발하고,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과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

흩으신 우리를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 들이신다.

흩으심을 경고하신 하나님은 때가 차매 흩어졌던 백성들을 불러들이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나타난 가장 큰 기적

홍해를 갈른 사건? 40년 동안 만나를 먹은 사건?

여리고성을 친 사건? 바다 위를 건넌 사건? 오천명이 배불리 먹은 사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가장 놀라운 기적

 

2천여년을 이스라엘을 떠나 있던 백성이 나라가 망한지 2500여년 만에, 이스라엘 영토에서 쫓겨난지 1800여년 만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다시 주셨을 때 1800여년을 떠나있던 민족이 그 나라로 모여 나라를 이룬 사건.

 

[렘 16:14-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AD 135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스라엘 전역 985개 성읍을 불태우고 유대인 58만명을 학살한 후 강제로 추방하고 그 지역에 팔레스타인 민족을 이주시킴으로 이스라엘 땅에 거하던 모든 유대인들이 추방

중세 때 십자군에 의해 대량 학살

1350년대 흑사병때 그 원인을 유대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어 그렇다는 이유로 유럽 일대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

크고 작은 유대인의 핍박이 계속되다가 세계 제 2차 대전 때 독일에서 600만명의 유대인 대량 학살 (전 세계 유대인의 60%가 죽고 악명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만 110만명 사망)

 

그 사건이 끝나자 마자 이스라엘 이라는 영토가 기적적으로, 전혀 기대할 수 없을 때에...이스라엘 국가가 전세계 승전국 UN에 의해서 주어진 것.

 

지금의 상황으로는 언제 다시 모일지, 한달 후가 될 지, 몇달 후가 될지 기약할 수 없는 때.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코로나 사태가 지나가면 우리는 다시 모일 것이라는 것.

다시 모일 그 때, 흩어졌던 유대인, 다 죽어가고, 멸시받고, 핍박받던 유대인들이 강력한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었듯이

흩어졌을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 분을 만나기를 애썼던 자들은

다시 모였을 때에 힘을 발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성도, 모든 교회, 아니 전세계에 무기력하고 안일함에 빠져있던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기회일 것이다.

흩어진 교회가 된 성도들이여

 

[암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임하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으리라

 

양치기 아모스선지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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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옮기운 자 (히브리서 11장 5절)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하면 떠오르는 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 . 엘리야와 에녹 단 두 사람.

 

5절에서 반복되는 구절- 옮겨졌다.

옮겨지다. (메타티데미)- 빠뀌다. 변화하다. 옮기다. (deliverance)- 구원받다.

 

그리고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받았을까?

하나님을 얼마나, 어떻게 기쁘시게 했기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로 옮기셨을까?

 

당시 사람들의 풍조

3장- 아담과 하와의 타락, 선악과 사건 -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된 사건

4장 - 가인과 아벨 (살인)

5장 - 족보 (아담에서 노아까지...) - 첫번째 심판

그 타락의 족보에서 노아 외에 유일하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김을 받은 자 - 에녹

 

창 6:1-3]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
    • 사람의 딸들 -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과 교제가 끊긴 사람들
    • 육신이 되었다- 나의 영이 영원히(계속적으로)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게 되었다.
    • 육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끊기고, 사랑이 끊기고, 교제가 끊긴 자들.

“육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사르’입니다. ‘바사르’는 헬라어 ‘사르크스’하고 같은 의미예요. 즉 살덩어리입니다. 부패해서 사라져버릴 살 덩어리, 자기 욕망에 살찌워진 살 덩어리, 결국 허무하게 죽게되는 살 덩어리가 육신입니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자 사람은 살덩어리에 불과한 “육신”이 되었습니다.

이와 반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하나님과 교제하던 하늘에 속한 자들이 육신이 되니 그 결과가 무엇인가?

[창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래서 행하신 것이 첫번째 심판.

그런데 그 심판의 과정에서 그 심판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자 - 에녹

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가?

그에대한 기사가 짧막하지만 창세기 5장의 족보의 내용 중에 기록되어 있다.

 

[창 5:21-창 5:24]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 5: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365세를 살았는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했했다.

그럼 65년은 마음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 그시대의 풍조를 따라.

창세기 6장에 소개된 대로 육신이 되어 살았다면 65세 이후에는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65세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1절에 보니 므두셀라를 낳았다. 에녹은 어떻게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

므두셀라의 뜻 - 창을 던지는 자, 그 부족의 수호자. 보호자 그런데 그 의미는 곧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고대 이스라엘 지방에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의미는 곧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는 의미였다는 것이 문헌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름 자체도 무트 (죽음) 살라트 (보내다)- 죽음을 보내다.

므두셀라가 187세때 라맥을 낳았고 (25절) 라맥이 182세때 노아를 낳았다. (28-29절) -> 369세

홍수가 시작될때가 노아 나이 600세때 입니다

(창7: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

 

어떻게 그 이름을 지었을까?

하나님이 계시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것을 알까?

그런데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 듣지 않고 명심하고 두려워하며 동행했다.

 

그래서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을 당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드셀라라는 이름 - 그가 죽으매 심판이 임한다.

- 인류에서 가장 오래 산 자 -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기다리심. 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하려고...

노아가 그토록 방주를 만들어 사람들을 실으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도 듣지도 않았다. 오직 노아와 그 식구들만이 그 배를 탔다.

 

그런데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흘려 듣지 않았다.

그를 키우며 바라보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였다. 경외는 두려움에서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 코로나19의 사태 - 심상치 않은 사태

이러한 때에 성도들을 안심시키거나 위로하지 못하고 심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건전치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며 지지난 주 누가복음 13장 실로암 망대 사건을 설교하며 이 세대를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새기면서 이번 사건을 하나의 사인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전염병 - 후진국에서 발생하기 나름,의학이나 위생이 불결한 환경에서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신천지라는 이단 교회를 통해.

지금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

미국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피해를 보는 지역 - 뉴욕 - 세계 자본의 중심지. 돈의 중심지

캘리포니아 보다 일주일 늦게 shut down을 시켰는데...왜? 경제가 굴러가야 되니까....

그 일주일 때문에 바이러스가 일파만파....

 

요람에서 무덤까지....사회 복지로서 낙원을 대신 했던 유럽의 여러 나라...

로마로 상징되는 이탈리아-폐허.

스페인, 영국....이젠 북유럽까지..

 

김동호 목사님 새벽 설교를 듣다 보니까- 가나 선교사에게 아직 삼십명도 채 안되는 환자가 발생했지만 그 전까지는 다 외국 나갔다 온 사람인데 마지막 확진자는 국내에서 감염된 환자

병원이나 격리시설도 턱없이 부족.

 

우리가 선교하는 카메룬 곽여경 선교사님의 선교편지에서도 아직은 소수이지만 국가 전체가 공포에 젖어 있는 상태

 

지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는 지구 재난의 시작일 뿐.

핵전쟁으로 인한 멸망

그보다 더 무서운 생화학 무기 전파.

인공지능의 폐해

온난화에 따른 이상기후로 인해...

 

대부분의 시나리오가 무엇때문? 인간을 위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거꾸로 인류 멸망의 원인.

핵이 터지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가져야 힘이 있다고 만드는 것 - 그것이 인간.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 가지고 있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갖고자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

 

N번방이라고 부르는 사건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터넷 범죄. - 그 주된 운영자. 10대, 20대- 거기에 놀아나는 30,40,50대 기성세대들...

 

그런 난리의 소문에도 여전히 심판,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기성교회에서 자취를 감춘다.

무드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 그런데 그는 인류상 가장 오래 살은 자.

왜? 심판이 지연되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마 24:7-14]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계 6:6]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

 

6장 -10장: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 끝까지 교회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에게 임할 심판

[계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그런데 더 무서운 것

[계 9:20-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코로나로 예배당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전 세계 수많은 크리스찬과 신학자, 목사. -> 교회관, 선교관, 신앙관이 코로나 전과 후로 바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코로나 19가 지나가면 또 다시 옛 생활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그 다음 바이러스 때까지, 똑같은 삶으로...

또 물질의 노예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땅의 여인들을 마음껏 아내로 삼아 살듯이 그렇게 육의 존재가 되어 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더 깊은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일을 무시하고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그런 사람에게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 삶의 마지막 날은 반드시 임한 다는 것.

 

하나님은 지금도 한 영혼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참고 계시지만 그 기다림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에녹처럼. 십자가 상의 강도처럼, 하늘을 사모하시고 그 말씀을 믿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옭김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드셀라나무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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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32-52절 (내가 네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8장 말미에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예수 그리스도 :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들이십니다.

 

가리사랴 빌립보- 세상의 최고의 권세 앞에서 선포된 예수님의 본질.

내가 가는 길은 세상이 가는 길과 다르고 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르다. 황제의 신전 앞에 서있는 예수와 및 제자들의 모습

 

-> 내가 가야 될 길은 죽음의 길이다.

1. 첫번째 죽음과 부활

인자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1절)

 

-> 예수를 붙들고 항변 (32절)

->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 두번째 죽음과 부활 (막 10:30-32)

제자들의 반응 :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영적 반응)

육적반응: 누가 크냐? -> 여전히 세상의 원리, 황제의 원리.

 

3. 세 번째 죽음과 부활의 선포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

: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33-34절)

첫번째 - 베드로의 항변

두 번째-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왜 묻지 않는가? 관심이 없기 때문에...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그 일은 내가 싫어하므로....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복음은 이미 우상숭배이다. 샤머니즘이다.

세 번째는 제자들이 아무 반응이 없다. 그냥 으례 하는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반응이 없는 것

아픔이 있어도 반응하지 못하는 병,

불에 디어도, 살이 썩어도 반응하지 않는 병- 문등병. 죄악의 병, 저주의 병

 

말씀하시는데 반응하지 못하는 병은 죽음의 병이다

처음부터 그러지 않았다.

주님은 점점 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죽음을 향해 가는데, 제자들은 처음엔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급기야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육적 반응은 어떠한가?

처음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주님을 위해 또한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 밑에서 함께 동거하며 살고자 했다.

두 번째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었다.

오늘 세번째 제자들은 은밀히 주를 찾아와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기를 간청한다. 마가복음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라고 나와있고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은밀히 와서 청탁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고 계속해서 높아지고만 하고 그것도 점점 더 은밀해져가며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를 하려고 한다. (세상의 방법으로 높아지려 하는 것)

 

  • 저의 영광 중에서 우편에, 좌편에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다름아닌 십자가 상의 강도이다.

하나님이 영광이 가장 드러난 순간,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이다.

그 순간 우편에, 좌편에 함께 했던 자들은 불행하게도 두 명의 사형수였다.

그들은 자기 죄를 자기가 짊어지고 죽음으로 가는 자들이었다. 그 중 한사람은 예수께 자리를 의탁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어떤 자리? 자기의 영혼의 자리를 의탁함으로...그런데 지금의 제자들은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육적인 자리만을 탐한다.

 

더 불행하게도 그토록 큰 자리를 원하던 제자들은 예수의 가장 영광의 순간, 도망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 이 청탁을 듣고 또 다른 열명의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화를 내었다.

왜 화를 내었을까?

요한과 야고보가 불의를 저절렀기 때문일까? 자기들보다 앞서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실패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부정한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자기들보다 앞서간 것이 화가 난 것이다. 그러지 못한 자기 들에게 화가 난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어머니가 있었으면..." 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며 다시 세상의 모습과 하늘나라의 모습의 차이를 설명한다.

 

(막 10: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방인의 통치자들은 너희를 주관하고 명령하고 통치한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잘보이려고 알짱 거리고 아부하고 또 끊임없이 청탁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저 어린아이를 섬기듯이 사람들, 연약한 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

 

내가 너희를 섬김같이 너희도 섬겨라.

 

46-52: 이해 못하고 자꾸 어리석은 길로 가는 제자들과 달리 그 마침은 항상 뜻밖의 이방인의 구원의 이야기라 마무리 합니다.

맹인거지 - 바디메요...그 이름은 존경받는 자

 

눈은 보이지 않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면서 예수가 곧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다.

 

큰 자 되게 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편에 좌편에 세워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메시야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해 보았던 가장 오래된 기도 중의 하나 예수 기도 (Jesus Prayer)는 이렇게 기도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

 

이렇게 소리 지르는 바디메오에게 제자들은 꾸짖고 잠잠하게 하신다.

이미 어린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을 꾸짖은 적이 있던 제자들이다.

예수님을 향해 이처럼 달려드는 자들을 왜 꾸짖을까?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 더 가까운 자리를 요구하는데 그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르짖는 소리에 예수가 멈춘다. "머물러 서서"

예수를 멈추게 하는 소리는 무엇인가? 바디메오의 부르짖는 기도였다. 더욱 소리지르는 그의 간절함이었다.

예수를 멈출 수 있는 기도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한나처럼 간절히 기도해 보았는가? 그 메어지는 가슴과 구원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 보았는가?

 

"그가 너를 부르신다"는 소리에 바디메오의 행동은 어떠한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자신을 숨기고 있던 감추고 있던 모든 겉옷을 벗어던지고, 죄악을 회개하고, 드러내고, 예수께 나아온다.

죽은 나사로를 막고 있던 돌을 굴려 옮겨 놓듯, 칭칭감긴 붕대를 풀어재끼듯, 자신을 감추어 놓았던 겉옷을 벗어내놓고 예수께 뛰어 일어난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보기를 원한 것이다.

 

진리를 알기 원한 것이다.

 

눈을 떠도 장님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들의 모습이 장님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누구보다 예수 가까이에 있으며 그가 하신 말씀을 듣지만 애써 외면하고 자신이 듣고자 하는 것만 듣고, 보고자 하는 것만 본 제자들....

 

우리도 보게 되어 예수의 길을 따라야 한다.

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른다면 오히려 무서운 이단자가 된다.

따르면서도 예수를 놓치는 자. 열심은 있는데 허탄데 그 열심을 쓰는 자.

불행한 신앙인이다.

 

참 진리를 보고 예수를 따르는 자. 그는 참 자유한 자이고 참 행복한 자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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