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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절 (두 가지 시선)

 

제 구시 - 오후 세시: 일상을 멈추고 기도하는 시간

11시 예배 - 아침과 점심의 중간 - 가장 중요한 시간.

 

성전에 올라갈 새 - 일상을 멈추고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는 것

예수가 성전 척결을 하면서 하신 말씀 - 이 곳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다른 목적으로 성전에 온 사람. -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 날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 지금 나이 40살

지금도 당시도 사회의 가장 주축, 중심의 시간

그런데 나면서부터 육체의 병으로 인해 그런 중심을 잃어버리고 그저 구걸하기 위해서 성전에 오는 사람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만 있는 자.

-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자. 성전 안의 예배를 경험해보지 못한 자.

마가 다락방 안의 사람들과 다락방 밖의 사람들.

 

은혜의 안에 있는 사람 - 오직 주만, 오직 성령만

은혜의 밖에 있는 사람 - 당황하고, 놀라고, 조롱하고---오직 사람만 보이는 사람.

 

은혜의 소리는 듣고, 그 사람들은 보지만 정작 그 은혜는 누려보지 못한 자.

 

교회 문 앞을 기웃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안, 신앙 안,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성전과 세상의 경계선 상에서 서있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비슷한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성전 깊이 들어와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본다. - 그리고 구걸한다.

4절 -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 두 시선이 마주치는 사건

그는 받기를 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받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돈이다.

주기를 원하는 자의 대상은 그리스도다. 은혜다.

 

받기를 원하는 자와 주기를 원하는 자가 만나면 곧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받는 대상이 다르고 주는 대상이 다르면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받아야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받고자 하는 것이 다를 때 거기엔 진정한 만남이 있을 수 없다.

 

베드로가 그 불일치를 깨뜨리는 선언을 한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네가 얻고자 하는 것 내게는 없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내게 무엇을 찾는가?

우리는 무엇을 주고자 하는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은과 금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 그러나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가장 귀한 것. 누구에게? 그 은혜를 아는 자에게....

 

이것이 합쳐질 때에 성령이 임한다. 아무리 받고 싶은 사람과 주고 싶은 사람이 만나도 그 대상이 바르지 못하면 항상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상이 그리스도로 합쳐질 때에 은혜가 임한다. 역사가 임한다.

그 예수는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가장 근원적인 것- 멈추어진 인생이 일어나 걸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주었던 것 - 은과 금

물론 고맙고 선하고 감사한 것이지만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시간이 지나면 계속 사라지는 것. 가져도 가져도 만족이 없는 것.

따뜻한 마음도 중요하지만 예수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딱 거기까지다.

 

돈도 주고 예수도 주면 안되는가? 아니다. 돈을 주면 예수를 찾지 않는다. 예수를 바라지 않고 돈을 찾는다.

 

선교학 강의 - 한국 선교에 대한 세계의 비판 -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돈을 전한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붙인 교회만을 짓는다. 그들은 십자가의 선교가 아니라 십자군의 선교만을 할 뿐이다.

 

내게 있는 것 - 여러분에게 예수가 있는가?

여러분 안에 예수가 있는가?

그것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예수 대신에 돈을 남겨주고자 하지 않는가?

교회가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집 대신에, 카페, 체육과, 콘서트홀.... 이런 것들에 신경쓰지 않는가?

 

내 부모.... 나에게 남겨주실 동산, 부동산은 하나 없지만 내게 주신 가장 귀한 것. - 예수

형제가 모두 예수를 물려 받았다.

얼마나 감사한가....

 

기적 - 뛰어 서서 걸으며....

그것 보다 더 큰 기적 - 성전으로 들어갔다. 한번도 들어간 적 없는 성전 안의 세계, 은혜 안의 세계, 깊은 물의 세계, 지성소의 세계를 경험했다. 이것을 경험 한 적 없는 자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경험한 자, 그리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지 않은가? 뛰어 서서 걷는 것 보다 가장 큰 기적

-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인생의 무게가 떠나갔다. 노래 할 수 없는 자가 노래한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한다.

 

노래는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나를 향해서 부르는 것

찬양은 그가 좋아서, 그를 위해서, 그를 향해서 부르는 것.

어떤 환경에서도 변치않는 그를 위한 노래... 찬양.

 

남에게 돈을 구걸하던 그, 관심과 도움만을 구하던 그가 비로소 진정으로 예배하며 찬양했다.

 

앉은뱅이 - 홀로 설 수 없는 자. 홀로 걸을 수 없는 자.

그가 예수를 통해 걷고 뛰고, 그리고 찬양한다. 성전 안에 들어가 예배한다.

 

떄로 우리는 영적 앉은뱅이가 된다.

주님은 여전히 오늘의 구원을 주시고자 하는데 우리는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우리가 처한 환경을 통해, 우리가 짊어진 감정과 관계와 짐과 고난과 광야를 통해

그가 주시고자 하는 것, 그가 주시는 평안, 그가 주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 안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도 앉은 자리에서 뛰어, 서서, 걷는 역사, 성전 안의 깊은 곳을 체험하는 은혜, 노래가 아닌 진정한 찬양이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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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을 위해 (누가복음 24장 36-49절)

 

부활을 믿지 않고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평강 - 샬롬, 에리레네

평안과 편안: 편안함은 평안함의 모조품이다.

 

평안함은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편안함은 환경을 통해 누리는 육신의 즐거움이고 평안함은 마음을 통해 주어지는 영혼의 즐거움이다.

 

요즘 처럼 육신적 편안함 가운데서 영적 평안함을 간구한 적이 있을까?

몸은 편한데 마음은 절대적으로 불안한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주님은 그러한 우리에게 편안함이 아닌 평안함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왜 제자들을 방문했을까? 어떤 상황에서 그들을 방문하신 것일까?

 

[눅 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그런데 그 소리를 믿지 않았다.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그리고 그 이전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눅 24: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허탄하다: 영어 번역- (Non-sense) 감각할 수 없는 것. 넌센스- 비이성적이라는 말의 기원- 자기 몸으로 감각할 수 없는 것.

그런데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 그게 더 Non-sense 아닌가?

 

왜 믿지 않았을까?

믿었더라면 그들이 있어야 할 곳 - 갈릴리.

[막 14:28]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신앙생활, 끊임없이 내 감각, 내 상식, 내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그분을 믿고 바라는 것- 그런데 그 분을 믿지 못하는 일들이 불신지들이 아닌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말씀을 읽고, 왜 기도하는가?

과거의 믿음이 날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령한 은혜를 체험해도 말씀 가운데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또 내 감각 속에 갇혀서 산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가 된다.

 

그들이 믿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숨어 있으니 주님이 갈릴리로 가시지 않고 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발걸음을 돌이키신다. 우리를 찾아다닌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왜 나타났는가? 그들이 안믿으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어떻게 믿게 하시는가?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몸- 마리아도, 제자들도 못알아본다. 왜?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 모든 상처와 죄와 연약함이 사라진 몸.

 

십자가상의 주님의 몸 - 상처투성이의 몸- 채찍질, 가시면류관....

온 몸의 모든 상처, 찢긴 것들이 다 회복된 몸일진대....단지 이것은 회복하지 않고 그대로 오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못박힌 손, 못박힌 발.

왜 그 상처를 부활하신 주님이 남기셨을까? 오직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늘보좌에 좌정하셨던 그 예수가 왜 이 죄많은 땅에 내려오셨는가?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예수껜 어떤 의미일까?

여행하는 기분으로 오셨을까?

애인만나는 기분으로 즐겁게 오셨을까?

물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셨지만, 하늘 보좌를 버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그 의미는

재벌가 자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서 자기 상속과 지위를 다 버리고 오는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이 더 큰 불편함과, 고통과, 아픔을 각오하고 오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예수가 자기의 사명을 다 끝내고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 겪으시고, 감당하시고

이제 하나님 나라, 그 보좌를 향해 가는 일만 남았는데, 어서 빨리 가고 싶은 그 나라를 바로 올라가시지 않고

40일간을, 마치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에 40일간 금식하셨던 그 마음으로, 그 고통을 다시 감당하며

이 땅에 남으셨다. 왜? 오직 제자들을 위해서...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게 하시려고....한 영혼이라도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그리고 그냥 남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쳐다보기도 싫은 그 고통의 흔적, 그 조롱과 비아냥과, 그 모욕의 흔적인 손과 발의 못자국을 그대로 남기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신다. 무슨 훈장처럼 달고 오셨을까?

그 고통의 흔적을? No! 오직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 제자들이 그 못자국의 깊이를 알까? 그 고통의 의미를 알까?

예수가 못박힐 때, 창에 찔릴 때, 그들은 다 어디 있었는가?

 

숨고, 도망가고, 저주하고, 부인하고.... 그 손의 못자국을 제대로 보기나 했을까?

그들이 보기 싫어 외면했던 십자가, 그들이 지기 싫어 도망쳤던 십자가, 그 십자가의 흔적을

 

살아나신 주님께서 나타났는데도 그 분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뚫어진 입이라고

"당신이 만약 예수라면 손의 못자국 보여줘 봐. 발의 못자국 보여줘 보! 창에 찔린 옆구리 보여줘 봐!"

 

그들이 그 상처를 보기라도 한듯이, 알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닫혀진 문을 뚫고, 두려워하는 그 마음을 뚫고

"어찌하며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하면서 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감각이 있어야 믿는다고 하면 너희들 가 감각을 가지고 마음껏 만져보라....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면

[눅 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 문장은 제가 아무리 해석해도 해석이 안돼.

너무 기쁜데, 믿지 못해....

눈으로는 보고, 손으로는 만지는데 그래도 믿지 못해....

그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데도 아직도,.....

 

뭘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주석들과 논문들을 찾아봐도 뚜렷이 확 마음에 닿는 것이 없는데....

 

크게 두 종류의 해석

 

  • 너무 기뻐서 실감하지 못하는 마음
  • 기쁘긴 한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 마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증언하고, 이제 급기야 자기 눈으로, 손으로 만지는 데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것. 믿지 못하게 하는 것 -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하는 common sense

영적, 육적 모든 감각보다 더 우선하는 사회적, 일반적 상식.

 

나를 주님 안으로 더 가깝게 믿게 하지 못하는 일반적 상식

 

다른 복음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을 꾸짖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면서 생선을 구워 그들 앞에서 같이 식사한다.

그들과 늘 하던대로, 가장 일상적이고도, 친근하게 지내던 함께 밥먹는 일. 영이 아닌 육적으로 살아났음을 친히 체험케 하신다.

 

우리는 식구잖아......

 

그리고 나서....그들을 믿게 하는 더 깊은 길

45절: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은 우리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말씀은 주의 못박힌 손과 발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말씀은 가장 친밀한 주의 사귐보다도 오히려 더 확실한 믿음의 통로다.

이게 믿어지고, 인정이 되고, 이게 납득이 되야 말씀 앞에 목숨을 건 자가 된다.

 

가장 좋은 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증거가 확실한?

사랑의 교제가 뜨거운?

물론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하고, 필요하지만 가장 좋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이다.

 

그래서 성도는 목사의 설교를 위해, 강단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은 무엇을 통해 확증되는가?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위로부터의 능력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을 통해 .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위로부터의 능력으로 덧입혀 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죄와 당신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심을 믿는가?

그리고 그 분이 죄와 사망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음을 믿는가?

그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

그 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그 상처를 내 보이면서까지 나를 믿음에서 떠나지 않게 함을 믿는가?

 

우리는 지금 부활의 소망과 부활의 능력이 필요하다.

 

영국 형에게서 온 메시지... (영국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번역해서 나에게 보내 준 편지)

 

인류에게 보내는 편지

 

지구가 속삭였지만 당신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소리를 내고 급기야 소리쳐 외쳤을 때 조차 귀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벌 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깨우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지구는 도와 달라 외쳐왔습니다. 대규모의 홍수로 외쳐도 당신들은 듣지 않았고, 불타는 화염으로 외쳐도, 강력한 폭풍과 돌풍에도 당신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양의 생물들이 해양 오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당신들은 여전히 지구의 외침을 듣지 않습니다.

빙하가 녹아내리는 심각한 경고에도, 혹독한 가뭄에도, 지구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있는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끊이지않고. 욕심은 멈추지 않고, 무수한 증오에도, 하루에도 수 많은 죽음이 일어나도 당신들은 그저 당신들의 삶을 이어갈 뿐이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지구가 보여주는 수많은 징후를 알아내기 보다는 최신 아이폰을 갖는 것이 더 중요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여기서 서서 세계가 돌아가는 그 궤도에서 멈추게 했습니다.

내가 마침내 당신들로 듣게 만들었습니다. 당신들로 대피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생존에 대한 염려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고 계십니까?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뜨거워 몸살을 겪는 것처럼 당신들에게서 고열이 나고,

지구가 대기가 오염으로 가득 찬 것처럼 당신들에게 호흡곤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지구가 매일 약해지는 것 같이 당신들에게 연약함을 주었습니다.

세계를 멈추게 만들어 당신들로 지구와 그 아픔을 잊게 만들던 편안함과 즐거운 외출을 당신들로부터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단지 공장들이 더 이상 오염물질을 지구의 대기에 내뿜지 않게 된 것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베니스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곤돌라가 멈추는 것 만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신들은 비로소 당신들의 삶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나는 여기에 당신들을 벌 주러 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을 깨우기 위해 온 것입니다.

내가 떠나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제발 이 시간들을 기억해주세요.

지구의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더 이상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을 멈춰 주세요.

 

싸움을 멈추고, 더 이상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리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이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시작해 보세요.

지구와 그 안의 모든 생물을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혹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모습으로 오게 될 거예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마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깨우듯 이 질병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깨우고자 하는 이 글의 모습이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면서까지 우리를 믿게 하시면서

편안함이 아니라 평안함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마음갖지 않은가?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부활의 증인이 되라 하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 시작 한 뒤로 처음맞게 되는 가정 온라인 예배라는 말씀들을 하신다.

편지 글 대로 우리를 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일꺼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자기 길로만 가는 수많은 성도와 교회들에게

말씀으로 돌아오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고... 단지 예배당에서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으라고....

 

부활의 주님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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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앙의 안전거리 (눅 22:54-57)

[눅 22:54-눅 22:57]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왜 가장 앞장서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까?

가장 열심내던 제자가 이젠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되었을까?

예수의 십자가를 공언한 후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예수께 항변했다? "rebuke"라고 번역된 이 구절은 예수를 도리어 꾸짖었다. 혼내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니까 안된다고 하면서 예수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꾸몄던 계획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사탄의 계략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 마 16:23)

 

그리고 이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

정말, 예수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병사들에 의해 집히시어 심문을 받게 되자 가장 가까웠던 제자에서 이젠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된 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잡혀 갔다. 자기 눈앞에서 함께 죽고자 했던 예수가 끌려갔다. 너무도 힘이 없고, 너무도 무력하게 예수가 세상에 끌려갔다.

예수님은 자기가 말씀한 대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데 자기 생각에 갇혀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멀어져간 주님을 보며 앞장 서던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가장 앞장 서던 자가 이젠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됩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eter followed him at a safe distance

<베드로가 안정거리를 두고 예수를 따라갔더라>

앞장 서던 베드로가 적당히 신자가 됩니다. 안정장치를 두고 한 발은 예수를 따르고 다른 발은 이제 도망하여 세상으로부터도 욕먹지 않고, 고난 받지 않고, 언제나 도망갈 방도를 마련해 두고 예수를 쫓은 것입니다.

그래도 뒤돌아서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죠.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요 18:15-요 18:18]

(요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요 18: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요 18: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요 18: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요한은 뜰 안까지 가서 예수를 보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이 블러서 그를 데리고 오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예수를 바라보다가 이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불을 쬡니다.

이것은 무슨 장면입니까?

자기의 믿음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랫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지, 언제나 예수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고, 문밖에서, 바깥뜰에서, 사람들 옆에서 예수와 점점 멀어지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도 예수편이지" 하니까 부인하고 저주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씩 부인하는 것! 이것이 멀찍이 따르는 베드로의 결말입니다.

 

여러분의 안전장치는 무엇입니까?

Return Policy: 한국에서는 반품하려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절차가 복잡한데 여기와서 제일 놀라고 좋은 것이 영수증만 있으면 몇개월 지나도 반품....

결혼도, 삶도....결혼 안하고 동거하는 문화... 왜? 피할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변질되고 교회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도 사람들의 여론을 들으면서 안전장치를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믿긴 믿되 적당히 믿자. 거리를 두자. 안전장치를 두자.....그렇게 점점 베드로처럼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십니다.

 

은혜는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이미 예수께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눅 22:31-눅 22:32]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세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현장에서도 도망쳤던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번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안의 상처와 부끄러움을 치유하시고 다시금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양들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수십번 수천번 주님을 배반하고 여전히 안전장치를 하면서 주님을 멀리하는데 주님은 그런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런 나에게 네가 날 사랑하냐 하시면서 식었던 사랑을 일깨워 주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면서 주님의 친구로,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시는 로고스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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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4장 12-27절 (자기 몸으로 차린 만찬)

 

고난주간 목요일엔 최후의 만찬이 있는 날, 이 날 다락방에서 세족식, 성찬식, 유언설교를 행하시고 겟세마네로 가신다.

그 날의 시작을 알리는 마가복음 14장 12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 14: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우리가 추수감사절 하면 칠면조를 떠올리듯 유대인들은 유월절날 함께 먹을 어린양을 떠올린다. 유월절은 잘 알다시피 출애굽할 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는 집은 재앙이 넘어갔다해서 Pass Over, 재앙아 넘어간 날로 지낸 유대인 최고의 명절이다.

 

그 시작을 알리는 무교절의 첫 날, 성경의 기자는 특별히 이 날을 이름 붙이기를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담아 이름을 붙였다. 예수는 그 날의 이름처럼 그 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 의해 붙잡힌다.

 

그러니 제자들의 말은 더욱 더 어처구니없이 가슴 아픈 말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말인 즉, 어디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당신을 희생제물로 준비할까요?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결과로 다가오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 헌신한다 할 것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할 것이고, 그 열심대로 언제나처럼 누가 더 많이 하고,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영광의 자리를 앉을까를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주님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무리에게 넘기는 그 자리에 함께 했다.

 

최후의 만찬 현장에서 주님은 만찬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꺼내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18절)

 

"만약 너희들 모두가 오늘 날 팔리라" 하셨더라면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분명 그들 모두는 그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장면에 동참하는데 주님의 어법은 그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그들의 잘못을 가리는 것인지,

단지 "너희 중 한 사람,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안도했던 것 같다. 기분은 썩 안좋지만 적어도 그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닐꺼라 말한다.ㅣ

 

[막 14: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성경은 친절하게도 열 두명의 제자가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하며 불안 가운데서도 안도하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의 모습은 늘 이렇다.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이 세대를 향해 꾸짖고, 홍수를 예언하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교회의 심판을 이야기해도....근심 중에서도 "난 아니야, 난 다행히 그 저주의 명단에서 빠져있어."

스스로 안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 하나도 예외없이 주님을 버릴 것을....

[막 14:2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런데 바로 그 때 주님이 차리고자 했던 진정한 만찬이 시작된다.

제자들이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 분께서 첫번째 유월절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 밤 그를 버리고 뿔뿔히 흩어질 죄인들을 위해

그의 피로, 그의 몸으로 친히 그들의 양식이 되신다.

 

유월절 양잡는 날, 진짜 유월절의 만찬은 모두가 돌아가면 "난 아니지요"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숨기고자 할 때, 그 숨긴 죄는 곧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들을 위해 주님께서 그의 피로 그들을 닦으시고, 그의 살로 그들을 먹이신다.

요한복음의 본문을 추가하면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그들의 죄를, 그들의 허물을 주님의 손으로 닦아 주신다.

 

오늘도 우리는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나름 사순절을 의미있게 보내고자 말씀을 펴고, 기도를 하고, 유튜브를 찾아보며 나름대로의 수고를 하며 "난 아니지요?"하며 주님의 인정을 받으려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을, 죄를 숨기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우리의 그 완악함을 주님께서는 그저 닦아주시며 그 분의 피를, 그분의 살을 우리를 향하여 먹이신다.

 

구원은 내가 그분의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분이 차린 만찬을, 그분이 손수 차린 구원을, 그 피를, 살을 먹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어떤 의도, 어떤 자랑도 있을 수 없고, 오직 그분이 담당하신 그 사랑을 우리는 받아먹을 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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