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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메시야는 고유명사입니까? 보통명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즉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같은, 삼손같은, 기드온 같은 장수요, 홍해를 가르고 바로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자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솔로몬 같은 지혜자였지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고난 당하여 죽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가 무릎 꿇듯 헤롯이 무릎 꿇을 것이요, 홍해를 가르듯 이적이 나타나서 로마 군사들이 다 멸절 될 것이요, 다윗왕국의 태평성대같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전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는 이전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요, 인도자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능력자요 치료자로 오셨지만 그의 사명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메시야는 잠시 잠깐 승리를 주고 평안을 주고 복을 주었다면 예수는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잠시 잠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놓았던 사탄의 일을 멸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 죄로 인해 막혀 있었던 그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막, 제사, 제물

우리는 성막, 성전, 제사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가대가 늘 찬양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처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막, 성전, 제사의 모습을 재현하면 그 모든 환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임재하셨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죄 때문입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하던 그 평안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함 가운데 절대로 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날마다 번제가, 속죄제가, 화목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그 피를 담아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번씩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동물들을 잡는 비명 소리가 늘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그을렸습니다.

그 모습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수라장이요, 도살장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장소, 그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33-38)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말 메시야라는 말의 헬라어입니다.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자에게 붙여진 직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히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즉, 유대인들의 용어로 메시야임을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고유명사입니다. 즉, 예수에게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메시야가 될 수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메시야는 고유명사입니까? 보통명사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즉 예수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 즉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 사무엘 같은 선지자, 아론같은 제사장같은 사람은 떠오르지만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의 신앙과 배격되는 일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라고까지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을 토대로 야훼라는 말을 부르는 것조차 삼가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할 때에도 야훼를 쓸 때는 모음을 쓰지 않고 자음만을 이어서 썼습니다. 죄인인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예수란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사역이요, 그 이후에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바로 십자가의 일을 갈 것을 말씀하시고 또 걸어가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은 일반적인 유대인이 생각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고백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비로서 자기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베드로마저 이 말씀을 듣고는 펄쩍 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믿는 다른 모든 제자들마저도 십자가의 사건이 이루어질 때까지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 그들에게 메시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다윗같은, 삼손같은, 기드온 같은 장수요, 홍해를 가르고 바로를 항복하게 하는 능력자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솔로몬 같은 지혜자였지 십자가를 지는 메시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께서 스스로 나는 십자가를 질 것이다. 나는 고난 당하여 죽을 것이라고 거듭 말씀을 하셔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바로가 무릎 꿇듯 헤롯이 무릎 꿇을 것이요, 홍해를 가르듯 이적이 나타나서 로마 군사들이 다 멸절 될 것이요, 다윗왕국의 태평성대같은 해방의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전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는 이전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요, 인도자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능력자요 치료자로 오셨지만 그의 사명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요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메시야는 잠시 잠깐 승리를 주고 평안을 주고 복을 주었다면 예수는 영원한 승리, 영원한 생명, 영원한 복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잠시 잠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를 멸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훼방놓았던 사탄의 일을 멸하시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두시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려, 죄로 인해 막혀 있었던 그 모든 장벽을 제거하시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1. 성막, 제사, 제물

우리는 성막, 성전, 제사 하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상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가대가 늘 찬양하고, 향기로운 향이 가득한 아름다운 처소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막, 성전, 제사의 모습을 재현하면 그 모든 환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통해서 임재하셨고 그곳에서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죄 때문입니다.

그곳을 벗어나서 하나님을 대면하면 기름부음을 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하던 그 평안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함 가운데 절대로 서지 못하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고, 기쁨에 넘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날마다 번제가, 속죄제가, 화목제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동물의 피가 진동했습니다.

제사장들이 하는 일은 백성들이 가져온 동물들을 죽여 각을 뜨고 내장을 씻고, 그 피를 담아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한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어쩔 땐 하루에도 몇번씩 그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성막은 동물들을 잡는 비명 소리가 늘 가득했고, 피비린내가 진동했으며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그을렸습니다.

그 모습은 천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아수라장이요, 도살장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같은 장소, 그와 같은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 했습니다. 왜?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바로 조금전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 마옵소서: 십자가의 길로 가지 마세요. 왜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려 합니까? 구약시대 하나님처럼 대적들을 무찌르고, 기적으로 놀라게 하고, 꼼짝못하도록 항복하게 하세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님 십자가 못지게 막을 것입니다.

붙들고 항변했다. 주님을 꽊 움켜 쥐고 항변했다.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자신이 메시야라고 불렀던 예수를 움켜 쥐고, 꾸짖기까지 하는 이 마음.

십자가와 부활을 가로막는 이 마음.

도저히 평소의 제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 마음.

 

십자가를 피하고 고난을 피하고 좁은 문을 피하고 넓은 길, 편한 길, 높임 받는 길, 칭찬받고 대우 받기만을 바라는 마음.

결국 가이사랴 빌립보, 또 다른 왕국, 제국, 세상의 왕과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마음.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그런 마음.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어디에서 돌이키신 것인가? 베드로와 마주보고 있다가, 지금 갑자기 뒤를 돌아 다른 제자들을 보시고 그리고 제자들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베드로를 꾸짖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듣기를 원하시는 대상은 제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33b)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일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지고 부활하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길입니다. 남들 다 가는 넓은 길로 가고 싶은 마음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뽐내고 자랑하고 높아지고 대우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34절 이제는 그 분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예수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그 길로 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외없이, 나를 따르는 자 모두...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자기 이익, 자기 이기심, 자기 욕망)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 짐, 부담, 모욕, 수치)

나를 따르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다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6절)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 안지고 칭찬과 명예와 성공과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가져도 정작 구원이 없으면 무엇이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예수가 지신, 그리고 우리에게 맡기워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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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일 마가복음 8장27-30절 당신에게 예수란?

 

마가복음 - 전체 16장, 그리고 그 중심- 가장 가운데 위치한 것이 8장 - 베드로의 신앙고백

그 이전엔 예수의 사역 -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

그 이후의 예수의 사역 - 십자가와 부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 빌립보 가이사랴 지역을 지나가신다.

이는 로마 황제인 카이샤르에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그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명명한 도시이다. -> 세상의 왕을 상징하는 도시

아무도시나 왕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왕의 이름이 붙여진 도시가 되려면 왕을 위한 신전,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는 화려함.

하필이면 그 곳에서 갈릴리 촌구석의 제자들에게 그들과 행색이 다를바 없는 예수가 묻는다.

 

대답하는 뉘앙스가 어떨까? 자부심, 흥분, 자신감? No, 아닌 밤 중에... 초라함, 당황스러움, 무슨 소릴 듣고 싶으셔서...

 

  •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반응-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 그들의 공통점-> 예수를 뛰어난 사람으로는 보았지만 그 분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한 일인가? 그들이 믿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바로 그런 종류의 인물들이다.

메시야 - 기름부음을 받은 자 -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왕, 선지자, 제사장

그런데 로마로부터 파송된 왕이지만 왕은 이미 있고, 헤롯 성전의 대 제사장도 백성들의 존경은 받지 못했지만 존재했다.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야,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끊겼던 하나님 보내신 선지자.

이스라엘을 부흥케 할 선지자. 자신을 배불릴 선지자. 먹고 살 걱정 없게 만들,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해줄 메사야

이 고백은 예수를 평가 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당신을 메시야로 이미 보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믿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다.

왜? 사람은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누구인가? 무리가 아닌, 제자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친히 가서 증거하게 하시고, 병을 고치게 하시고, 그리고 귀신을 쫓게 하신다.

풍랑을 멎게 하고 파도를 잔잔케 하면서 자연 만물을 다스리고 모든 병든 자를 치유하고 5천명을, 4천명을 친히 먹이시는 하나님임을 보게 하신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를 알까?

기적을 보고, 그 분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 분의 행함을 직접 보면 당연히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까?

No!

왜? 그들의 사고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이,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과 같이 어울리고, 먹고 마시며, 동거동락 한다는 것이 지식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입에서 사람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니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정확하게 이 구절 다음에 하나의 선언을 첨가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먼 훗날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남긴 이유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가, 룻날의 요한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역시 수제자라 열심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대답을 가지고 계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8)

 

그리고 이 고백을 하는 자, 아니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세상이 이길 수 없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복있다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천국의 열쇠, 하늘의 권세를 주셨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육신의 힘이, 육신의 지식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자. 그 은혜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주신 능력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랑하는 성도들, 당신에게 예수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지금 나의 안에 거한다는 것, 그 분이 날 택해서 교회로 삼으시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다는 것.

육적인 유대인들조차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

 

그 예수가 날 사랑하시고, 그 예수가 날 위해 죽으시고, 그 예수가 나와 함께 거하시고, 그 예수가 날 떠나지 않으시고, 그 예수가 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하신다.

예수로 사는 사람은, 하늘의 주권자를 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이 세상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꿈쩍하지 않는다.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로 삼는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을 이기고 영생을 산다.

 

부활절까지 전할 수 있는 새벽 말씀 - 8번

 

다시 한 번 예수를 알고 그 예수로 충만하고 예수로 십자가를 넘어 부활신앙에 이르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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