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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 따르기 - 요한복음 4장 34절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가끔씩 어떤 목사님들이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며 내뱉는 말의 실수가 세상의 표적과 관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 예를 들어 이전에 총리후보로 나섰던 한 후보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된 것은 공산화를 막기위한 하나님의 뜻이요, 일제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허송세월로 보낸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것-
  • 미국에 임했던 허리케인으로 인한 큰 비해, 대화제 -> 동성연애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동남아에 임한 큰 해일 , 심지어 배가 침몰되어 수많은 아이들이 죽게 된 것 ->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민족사 뿐만 아니라 개인사까지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말하는 것은 불분명하고 논쟁적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처럼 아무렇게나 쓰게 되는 오용

-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

- 자신의 경건을 나타내기 위한 수사적 표현

-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체념하듯 수용할 때 사용하는 체념적 표현

 

남북 전쟁 - 노예 해방을 두고 각 측의 신학 노선 : 각자가 다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

신학교 내, 교단 내의 신학적 싸움, 신구교 간의 갈등 - 하나님의 뜻을 사이에 두고 양보없는 갈등

세상 사람들은 풀 수 있는 내용을 교회 안에서, 신학교 내에서는 서로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서로 한치도 양보없이 싸우는 극심힌 갈등 -

 

하나님의 뜻은 논쟁적이고 복잡하며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오용을 막고 그 뜻을 찾아 신속하게 순종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향한 대 전제

 

1. 하나님의 뜻은 모든 창조세계에 미친다.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지으셨고 그 뜻대로 인도하시고 운행하신다.

 

2. 진정한 존재의 성공은 자아를 실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다.

평안과 안식 - 내 삶이 하나님의 뜻 안에, 그 뜻을 실현하고 있는가/그렇지 않은가?

성도의 원칙 -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르는 것

 

주의 기도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뜻대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그 뜻을 감추이지 않으신다.

그 뜻을 찾고 따르기를 원하면 찾을 수 있고, 찾게 하신다.

 

전제: 그 뜻을 찾고 따를 자세가 전제.

만약 우리가 그 뜻을 안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뜻을 따를지 안따를지 고려할 것이라면 그 뜻을 찾는 것은 하등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하나님의 뜻은 찾는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정도는 순종의 정도와 비례할 수 밖에 없다.

 

3.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것 까지 다 완전히 알려주시는 법이 없다. 대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시고 그 순종을 통하여 그 다음의 길로 인도하신다.

  • 아브라함 -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불 분명한 명령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정확한 지점 (Exact Point)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 (Right Direction)으로 인도하신다.

 

  • 사도바울 : 다메섹 도성 - 너는 시내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게 이를 자가 있으리라.

시내로 들어갔더니 아나니아를 만나 그 다음의 계시로 인도하심

 

-> 한 걸음씩만 보입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그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씩 right direction으로 가다 보면 어느 새 정확한 지점 (exact point)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J.I> Packer: 하나님께서 한 걸음씩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유는 우리와 기계적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이고 하나님과 더불어 작품을 같이 만들어 가기 위해서이며 또한 우리가 그 작품이 되어가기 위해서이다.

 

  •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한 안전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고 그 뜻을 이루어가는 인간의 모델을 제시하셨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 분은 떡 (양식)보다 뜻을 위해 사셨다.

[마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떡을 위해 살지 말고 뜻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자! 뜻을 위해 살면 떡도 주어지고 뜻도 주어진다. 그러나 떡을 위해 살면 떡도 잃고 뜻도 잃는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영원을 바라보는 자.

 

켐벨 몰간 : 나의 집- 사라진다. 나의 가족 - 그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의 뜻-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나의 무엇 무엇"은 다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 만이 진정한 내 것이 된다.

 

4. 실존적 현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해도 정말 알지 못해서 혼동 스러울 때, 뜻을 구해도 알려 주지 않을 때 - 그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 그 뜻을 구해도 여전히 아리송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그 분의 뜻

어떻게 찾고 따를 수 있을까 씨름할 수 있어야 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 분의 뜻 :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그 분의 뜻을 찾기 위한 첫 번째 기준

 

1) 성경으로 가라: 모든 시대, 모든 인간에게 주신 보편적인 뜻

분명하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 (Kown will of God) 로고스와 레마

출발은 언제나 그 분의 말씀 안에서 뜻을 찾는 것이다. 그런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분의 뜻에 친숙하게 된다.

 

2)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을 경험하라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성령께서 하시는 말 :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가르치시는 영

 

정말 그 분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한 자의 조언을 구하라. (목회자나 목자나...)

그러나 그 조언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것을 가지고 골방으로 가서 더 깊이 물으라.

그 분의 뜻이 분명할 때까지 기도하고 확신하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는 신중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신속하라.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분의 뜻을 구하는 데는 신속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너무 신중하다. 뒤바뀌었다.

 

사람

-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

- 자기 뜻에 따라 사는 사람

-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어떻게 하나님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가? 우리가 그 뜻을 묻고 따를 적에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다.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다.

 

행하기 위해 그 뜻을 찾고자 하는 자는 시도에서 끝나지 않고 승리하게 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하나님의 뜻을 찾고 따르는 데 인생을 드려라.

그 뜻을 찾는 데에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 뜻을 주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 말라.

그 뜻을 찾기 위해 도움을 구하되 최종적인 분별은 성령님께 의지하라.

그 뜻을 찾는데 신중하되 뜻이 확실하면 즉시 순종하라.

 

하나님의 뜻 따르기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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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 그리스도인의 행복 (벧전 4:7-11)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유일하게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쓰여진 시기는 학자들마다 여러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는 AD 63년의 로마 대 화제 이후에 네로황제에 의해 그 화제의 원인으로 기독교인들이 지목되면서 시작된 대핍박과 환란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는 것입니다.

 

이 때는 이미 기독교 공동체가 이방의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지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때문에 극심한 핍박을 견뎌야 했던 시기입니다. 대화제의 범인으로 기독교인이 지목되었듯이 사회에 안좋은 일이 생기면 "교회 다니는 사람 때문"이야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지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고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기독교인의 자세, 혹은 신앙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믿음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벧전 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우리는 무언가 고난을 받으면 죄의 댓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초대교인들 -> 우리는 피뿌림을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다. 고난을 갑옷으로 삼아라. 고난 받는 자는 죄에서부터 멀어진 자다. 보통의 상식과 반대되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 정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

무언가 성공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정욕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잘 안 와닿을 수 있지만 우리가 승승장구 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지만 얼마다 마음이 들뜨고 경건치 못한 것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의미를 추구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찾게 되고,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자,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환란의 날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는 것. 필요한 것일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이런 환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그런 위급한 때에 정신 차리고 기도하는 것. 성도가 가진 힘이자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그 뒤의 구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이런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과는 맞지 않는 뜻밖의 권면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 Above all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니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사랑하라 말씀합니다. 그것도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하라고까지 강조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고(9절)

서로 봉사하라(10절)고까지 합니다.

 

이렇게 힘든 때에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봉사하면서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라"가 아니라 "하는 것 같이 하라"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정말 힘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런데도 힘들게 봉사하면서도 자기를 내세우거나 힘든 내색하지 말고 하나님이 힘주셔서 하는 것 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권면한다면 여러분, 아멘 하고 감사하면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힘든 척 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죽는 환경에서도 사랑하고 봉사하라니 우리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항상 하나님이 힘주셔서 하는 것처럼 하라니 이런 위선이 어디있습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힘든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아니 상대방이 좋으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할 것이고, 그저 그런 사람을 억지로 사랑할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런데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더니 급기야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 몸과 뜻과 힘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사랑이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사랑마져도 교회 안에서는 부담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해서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 마치 연약한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든 무엇이든 빼앗아 가서 만족하는 탐욕스러운 왕의 모습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봉사하라고 하는가?

 

구원하셨으니 마땅히 그 은혜를 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구하지도 않은 구원을 그것도 내가 태어나기도 까마득히 전에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서, 잘 믿어지지도 않는 십자가를 말하면서 그러니까 너희는 고난 받으면서도 아무 소리 말고 감사하고 봉사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렇게 선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영광받으시는 것이라고 하니 봉사하면 주님이 영광받으시고 봉사 안하면 하나님은 영광 받지 않으시니 하나님은 봉사에 굶주린 분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분이고 부족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주의 주재시요 수많은 천사들이 수종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봉사가 없으면 불편하고 부족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계명은, 그리고 그 중에서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봉사라는 것은, 봉사하는 삶은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가진 사랑을 함께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섬김이고 봉사입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왕으로 사시지 않으시고 종으로 사셨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것을 종들을 위한 종으로 오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서 사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잃어버린 영혼들에게도 종의 역할을 서슴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삶, 하나님이 감정,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요, 섬김이요, 봉사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사람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랑의 삶, 돌봄의 삶, 봉사의 삶을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짐이 아니라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자 사랑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면 돌보고, 섬기고, 나누어야 하는데 사랑이 정욕이 되고 탐욕이 되니까 주기보다 받기만 원하고, 결국은 돈을, 우상을, 게임을, 사람보다, 가족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는 것보다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봉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헌금을 드리고, 봉사하고, 예배하고, 섬겨야지만 만족하시고 살아가시는 무의탁 노인같은 분이 아닙니다 .

그 분은 불쌍한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사랑이 없어도, 헌신이 없어도 스스로 충만하시고 만족하시며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예배하도록, 헌신하도록, 봉사하도록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이 그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사랑을 알고 이 세상에 하나님 자녀답게, 하나님 닮은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 가장 기본적인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삶

기도의 삶이고 사랑의 삶이고, 그것은 결국 섬김, 봉사의 삶입니다.

 

  •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Each of you should use whatever gift you have received to serve others, as faithful stewards of God's grace in its various forms.

-> 여러분 각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을 남을 위하여 사용하십시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가지 형태의 은사를 통해서 남을 섬기도록 여러분을 은혜의 청지기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봉사하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께로 남을 섬기기 위해 받은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의 번역인데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지만 봉사하라고만 하면 마치 안해도 될 것을 해야하는 extra 짐으로 여겨지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아니마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것이 가정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아이들 양육하고, 학비 내고...가정 지출의 가장 큰 부분...

그런데 그것을 아깝게 생각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부모, 상식적인 부모라면 그럴 수 없다.

 

내 사랑하는 가족이고 자녀이기에 마땅히 그 일을 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위해 고생하면서 그것을 행복이라 말한다.

실재로는 그것 때문에 고생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고생을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왜?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고생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봉사는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족, 성도들을 위해 고생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성도를 사랑하며 수고 하는 것이 봉사이다.

 

 

왜? 나를 위해 살고 나 자신 만을 위해 사는 것보다 그 가족, 식구들을 위해, 사는 것이 삶의 맛을 주고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조금 확장하면 저같은 목사는 교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생하는 것이 사는 맛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희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선물을, 은사를, 달란트를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George Beverly Shea 의 간증

1909년 캐나다 에서 감리교 목사의 여덟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경제 한파로 학업을 포기한 후 보험회사에서 세일즈 맨으로 일하던 중 NBC 라디오 프로에 나가 “가라 모세”를 불러 하루 아침에 일약 스타가 되었다. 방송출연 제의가 쏟아지고 돈과 인기가 굴러 들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에게 두려움이 몰려 들었다. 갑작스레 부와 인기가 찾아오니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가 하는 두려움과 언제 떠나갈 줄 모르는 그런 박수소리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아니라 대중들을 위한 찬양에 회의가 일었다.

 

어느날 그는 자기 옷 주머니 속에 넣어둔 어머니의 손편지를 잃게 된다. 평소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싯구가 그이 마음을 때렸다.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그것과 바꿀 수 없다"...

잠시나마 엄청나게 짓눌렸던 쉬아에게 짧은 글이 믿음과 확신으로 그의 마음에 다가왔다. “그래, 예수님만이 나의 행복이야!”라고 소리쳤다.

그는 즉시 그 아름다운 가사에 곡조를 붙이기 시작했다. 바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시가 음악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쉬아는 자신이 쓴 찬송 곡조를 부르며 다짐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주님만이 행복임을 고백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바라던 삶이었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헌신이었다.

 

며칠 후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을 때 쉬아는 확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주님만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방송국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일생을 통해 쉬아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정이었다.

 

1절은 ‘세상의 부귀’보다 ‘예수님’을, 2절은 ‘세상의 명예’보다 ‘예수님’을 그리고 3절은 ‘세상의 행복’보다 ‘예수님’을 더욱 귀하게 여긴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찬송은 ‘세상 부귀’(1절)로 간단히 번역됐지만 영어가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세상의 금과 은, 큰 재물, 많은 집들과 땅보다 예수님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1983년 74세 된 백발의 쉬아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 후에 굵은 베이스 음성으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불렀다. 수많은 회중의 끝없는 박수에 쉬아는 다시금 고백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 갈채도 예수님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

여러분의 신앙에서 무엇을 세우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면 그 분을 따라 섬기는 삶에, 봉사의 삶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는 섬김을 받기만 원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인 이유 - 주방봉사든지 이런 저런 봉사하면서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힘들어서 봉사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있어도 탓하거나 정죄하지 않는다.

지금도 아름답지만 그러한 봉사에 자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원한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나와 우리 로고스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George Beverly Shea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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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맞으며- 연결되고 세워져가는 교회

 

[엡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한 해 동안 계속적으로 묵상하며 경험해야 할 표어이다.

따라해보자.

"연결되고 세워져가는 교회"

 

우리 교회와 성도가 신앙 안에서 가장 지향해야 할 두 축을 보여주는 구절.

 

  • 연결되고 - Unity (연합, 협력, 하나됨)

성도는 합당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합당하게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삶을 향해 "부름받은" 자들이다. 성도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발된 자가 아니라 은혜로 "선택"되어 부름받은 자다.

 

그러한 부르심이란 다름 아닌 "서로 사랑"하기 위한 공동체이다.

 

좋은 성도가 무엇인가? 당신이 부모로서 혹은 신앙의 선배로서 자녀들에게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언을 남긴다면 무엇이라 남길까?

말씀 많이 읽어라. 기도 많이 해라. 기도해야 산다. 누구처럼 십일조를 당부할 터인가?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면서 하신 마지막 당부

"서로 사랑해라."

 

좋은 성도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되지만 그것만으로 안된다.

좋은 성도는 기도도 많이 해야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좋은 성도는 전도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다 좋지만 그것이 좋은 성도의 핵심이 아니다.

제자, 즉 좋은 성도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성도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천상의 찬양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꾕가리라고 했다.

 

서로사랑하는 것을 특별히 "새 계명"이라고 하면서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들로 예수의 사람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설교를 잘해서 기도의 능력이 있어서 예수장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사랑하는 자가 예수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한일서 2장 10-11절에 보면

"빛 가운데 있다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또 어둠에 행하며 갈곳을 멀게 하니 이는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는 빛이 아니라 어둠의 자녀다. 구원받지 못한 자라는 극단적이고 무서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위한 구체적 말씀으로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엡 4:1-4]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겸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왜?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비전이 그에게 있으므로...

온유- 야생마가 길들여짐. 제멋대로 굴던 내가 말씀으로 길들여지는 것 - 온유

야생마 같이 살면 안된다. 우리는 주의 멍에를 메고 주를 주로 섬기는 주께로부터 훈련 받은 자.

오래참음 - 하나되기 위한 기본 자세

사랑으로 용납- 사랑없는 용납은 방관이요 방치.... 사랑 안에서 용납하는 것 만이 능력이 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 - 평안의 매는 줄 - 고통 중에서, 푹풍 중에도 주로 말미암아, 주로 인해 평안할 수 있는 마음. 우리가 참고 용납할 수 있는 능력- 주가 주신 평안.

 

  • 주와 함께 세워지는 교회 - Purity

신앙 생활의 목적 - 복받고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닮는 것, 주를 따르는 것, 주와 같이 사는 것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것-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 좋은 받- 기쁨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

아는 것 - 그 말씀을 경험하는 것, 적용하는 것, 내 것이 되는 것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지 못하면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온갖 교훈과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 귀가 얇아 누구의 말을 들으면 금방 혹 하고 ...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며 집이 무너지는 자 - 모래 위- 모래는 흙- 인간에 기초한 신앙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

 

결론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 개개인의 교회된 성도도 범사에 그리스도를 따라 자람으로 거룩하여 지고 -
  • 공동체된 교회 역시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각 지체의 분량에 따라 그 전체 공동체가 자라고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세워지는 것이다.

 

연결된다는 것 (Unity)- 서로사랑하고 하나됨으로 서로 도움이 되어 결합되는 교회

세워진다는 것 (Purity)- 신앙의 목적이 문제 해결이나 자기 소원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고 따르는 것에 목적을 두고 나아갈 때에 교회는 스스로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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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을 보내며 - 적극적 평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19-22]

 

한 해의 표어를 받으면 한 해 동안 어떤 굴곡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감사한 일이건, 고통스런 일이건 가장 먼저 표어의 말씀을 떠 올리며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금 새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샬롬!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2019년도에 대한 표어로 받았을 때는

성도들도 좀 늘고 재정적으로도 안정이 되어서 이제 성도들 가정마다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는가 보다 하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표어의 말씀만 딱 떼어 보면 이제 고난 끝 행복 시작 하듯 예수님께서 평안을 선물로 주시는 말씀 같았지만 그 말씀이 속한 요한복음 20장 19-22절의 말씀을 보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평안과는 좀 맥락이 많이 달랐습니다.

 

즉,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평안과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안은 그 성격이나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이 바란 평안, 우리가 바라는 평안

이스라엘의 독립, 이스라엘의 회복, 문제가 해결되고, 자기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문제가 없어지고, 방해꾼들이 사라지는 걱정 근심할 것 없는 평안.

상황적 평안, 감정적 평안, 물리적 평안.

그런데 삶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평안이 과연 있는가? 잠시 잠깐 문제가 해결되고 방해꾼들이 사라지면 잠시잠깐 편안할 수 있지만 그 편안함이 얼마나 지속되는가?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나 또 다른 문제, 더 큰 문제가 다가오고.....

 

  • 주님이 가져다 주신 평안

 

    • 안식 후 첫 날...(19절)

 

첫 안식일 - 6일간의 창조 사역 이후-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 좋았더라 하시면서 창조사역의 완성으로서 맞는 첫 안식일.

 

그런데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그 안식을 나누어주셨던 완전한 안식이 죄로 인해 깨어지고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두 번째 창조사역, 말씀으로, 손으로 빚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창조하신 인간을 위해, 말씀 대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된 말씀으로, 손으로 인간을 빚으신 것 대신, 손수 그 손에 못에 박히면서 십자가로 죄를 지운, 죄값을 대신 지신, 그 새로운 창조의 사역의 결과로 얻은 두 번째 안식...

 

그런데 자기의 죄가 사해진 줄도 모르고, 여전히 이스라엘은 그대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성전의 제사장들은 여전히 믿고 의지할 수도 없고, 자기들이 기대했던 예수는 십자가의 형틀로 사라지고....

평안과는 완전히 반대된 상황에서 모든 문을 닫아 버리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제자들....이런 상황 속에서 평안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상황과는 정반대인 그런 참담한 상황.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는 어디로 오는가? 바로 평안과는 전혀 정반대인 상황의 정 가운데 중심에서....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바로 그 말씀이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혼돈과 공허의 상황에서 "빛이 있으라"

말씀 하신 바로 그 창조주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 분은 절망 끝에서 평강을 창조하시는 창조주시다!

 

그리고 상황만 변하기를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다. 못박힌 손, 창에 찔린 옆구리....

죽어야만 하는 그 예수가,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예수가

못박힌 손 그대로, 찔린 옆구리 그대로, 피와 물을 쏟은 그 옆구리 그대로

그 고통에도 죽지 않았노라고,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요, 너희의 그리스도라고....

그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러니 너희도 괜찮다고, 고통스러워도 절대 죽지 않을 것이요

물가운데를 지나도 불가운데를 지나도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요, 너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그 절대적, 적극적 평안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신다.

성령과 함께 거하는 평안. 상황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평안.

 

폭풍 가운데서도 잠잠할 수 있는 평안.

 

바로 적극적, 절대적 평안이다.

우린 여전히 그 평안과는 거리가 먼 세상에서 산다.

여전히 우리는 사람의 말 한마디, 표정 한 마디에도 평안을 잃어버린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상황을 바라보며 절망한다.

 

그런데 예수를 바라보며,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금씩 상황적 평안은 거짓 평안이요, 금방 지나가는 평안이요, 주님 주신 평안만이 요동치 않는 평안임을 소망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 숨쉴 때까지 계속적으로 소망하고, 갈망하고, 기도해야할 성도의 평안이다.

 

shalom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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