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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쉼을 주시다. (마 11:28-29)

 

현재 정치 사회적인 이슈는 일본과 한국의 대립.

그 이면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극우세력의 득세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 일본 뿐만 아니라 유럽 일대에도 일고 있는 극우운동. 영국의 유럽 연맹 탈퇴, 스페인, 오스트리아....

 

최근 유대교 출신의 기독교 개종자들에 의해서 바울이라든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조명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갈 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 때 쓰여진 "열심"이라는 단어 - 단지 사도바울 개인적인 성격이라고 해석

그런데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들에 의해서 밝혀진 열심이라는 단어는 단지 개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파의 한 그룹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종의 행동강령이었다. (툼 라이트와 같은 학자들...)

 

  • 바리새파의 두 그룹

1) 힐렐: 온건파, 공생공존, 로마 및 이방인의 치리 인정. 가말리엘, 방임주의. 기독교 운동이 하나님께로 나온 것이라면 반대하지 말고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2) 샴마이: 과격파, 열심당. 율법 자체가 이방인의 치리를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열심은 단지 기도나 경건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칼을 휘둘러서 드러내는 태도이다. 시카리(단도)- 이스캐리엇

이교도들을 단번에 패배시키거나 변절한 유대인들을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멸절시킬 혁명에 대한 열심

몸에 로마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협조하는 새리나 정치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단도를 지니고 다닌 사람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재건, 로마에서 파견된 헤롯이 차지하고 있는 성전을 탈환하는 것.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 때니이까?"

 

예수 열 두 제자들의 대다수도 이 열심당원으로 여겨짐. (열심당원 시몬, 우뢰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 형제, 예수님을 잡아가고자 했던 마고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 그리고 가룟 유다 (영문 이름 Juda Iscariot- 사카리라는 단도의 의미- 열심당원을 상징)

그들은 단지 갈릴리 출신의 촌사람 어부들이 아니라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나라를 위해 칼을 지니고 다녔던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열심있는 행동파 사람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열심당원들을, 또한 열심당원의 행동대원 격이었던 바울을 만나 그들의 열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관심은 항상 이스라엘의 재건, 성전의 탈환-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서도 그들이 꿈 꾸었던 완성된 세계)

그런데 그 중심에서 십자가에 달려 너무도 무력하게 죽어간 예수....

 

이런 입장에서 마태복음 11장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 보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 어떤 수고이고 어떤 짐인가?

나라를 위한, 교회를 위한 열심, 때론 반대파를 숙청하고 목적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제거하는...

그런데 그렇기에는 너무나도 큰 벽. 로마라는 벽, 헤롯이라는 벽,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는 ...

 

마태복음 11장 - 요한-> 예수께로 관심이 옮겨 감.

왜?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오실 그 이 - 메시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왕으로 오시는 이, 선지자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이끌 인도자. 리더.

 

그들이 힘썼던 열심, 열정 - 외부를 바꾸기 위한 열심.

나라를 바꾸고 성전의 주인을 바꾸고....

 

그들에게 하신 말씀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1. 나의 멍에를 메라

멍에는 짐을 지거나 밭을 갈기 위해 메어 놓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작동을 합니다. 주인이 뒤에서 움직여야 작동하는 것이 멍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라는 말씀은 주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매는 것은 주인과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는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님이 가시는 대로 가고, 주님이 하시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멍에를 메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 멍에나 메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

 

약한 자의 멍에를 매면 나도약한 자가 됩니다. 무지한 자의 멍에를 메면 일을 그르치게 되고, 악인과 멍에를 메면 악한 자가 됩니다. 오직 주님의 멍에를 맨 자만이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온유와 겸손

이 말씀은 두가지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주시는 멍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2-3)

 

주님을 믿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환경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함께 멍에를 메고 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멍에를 메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면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도 , 공부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도,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양들 섬기는 일도, 제자양성 하는 것도, 세계선교 하는 일들을 내가 하려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모든 것이 은혜가 되고 오히려 힘이 됩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바른 신앙생활은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것, 그것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라는 것입니다. 내게 배우라. 무엇을 배웁니까? 그 분의 온유함과 겸손함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멍에- 신앙인이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멍에- 그것이 뭐냐? 결국은 예수님의 성품, 온유와 겸손.

 

온유란 단지 착한 심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착한 심성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온유는 들판에서 내 맘껏 다니던 야생마가 주인에게 길들어지는 것이다.

 

길들어진 야생마가 바로 온유함의 뜻이다. 무엇에 길들여져야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다.

 

성경에서 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한 자라로 칭함을 받은 자가 누구인가?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

 

왜 그가 가장 온유한 자인가? 바로 말씀으로 훈련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자기를 꺾고 말씀을 따르는 자요, 말씀 앞에 자신을 굴복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의 반대를 성경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 또한 자기 의로 충만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한다.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누가 온유한 자인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귀를 기울이는 자, 바로 겸손한 자이다. 길들어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는

결코 길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겸손과 온유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삶으로 이 온유함과 겸손을 보여 주셨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겸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온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온유와 겸손의 정점이 바로 십자가이다.

 

[왕상 19:9-10]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어느 때인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 선지자 앗세라 선지자를 죽이고 무언가 상황이, 나라가, 이스라엘이 변할 줄로 기대했다가 환경은 하나도 바뀌지 않고 오히려 이세벨이 위협하며 달려들자 굴 속에 들어가 있는 엘리야

 

열심이 유별하오니- 마치 제자들처럼, 바울처럼....

- 다른 사람의 존재는 보이지 않고 오직 굴 속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모습만....

 

그 때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

로뎀나무 가에서 그를 쉬게 한 후에

호렙산으로 인도해서 그곳에서 그와 교제하시는 장면.

 

즉 말씀과 쉼이 있는 삶.

 

창조) 혼돈과 공허-> 그곳에 말씀이 임하여 빛이 있으라 하면서 창조의 사역.

창조의 사역은 곧 말씀의 사역-> 그 열매로, 결과로 얻어지는 것-> 쉼과 안식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여전히 끝없는 수고에도 불구하고 짐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무거워지고 있는 삶을 살진 않는가?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있는가? 주님이 당신을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내가 원하는 데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이 목자 되신 삶은 쉼이 있는 삶이다. 열매가 있는 삶이다. 그 열매는 외부환경과 상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이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어떤 땅인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이다. 주님이 약속하시고 통치하시는 땅이다.

그 땅에 사는 사람은 복되다. 주님이 경영하시는 땅이 바로 천국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더 확실한 예언 (벧후 1:12-21)

 

외적 고난 이후 찾아온 내적 혼란의 교회의 시대 - 베드로 사도가 내놓은 믿는 이의 힘쓸 일은 크고 보배로운 예수의 약속을 믿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도록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 위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힘쓰며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맺는 것.

 

예수를 아는 것-> 예수를 경험하는 것->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하는 것 ->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

-> 예수님이 통치한다는 것을 무엇을 통해 예수 닮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성품이 예수를 닮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외적 환경이 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은가!

 

베드로의 고백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12) -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왜?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3절)

외적 핍박의 시대에 그 핍박을 벗어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예수한테 자신을 구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영화 쿼바디스

로마에 거하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베드로가 핍박을 피해 로마를 벗어나려고 할 때 예수의 환상을 보고

주여 어디로 가시오리까? (쿼바디스 도미네)

나는 네가 버린 내 양들을 위해 로마로 간다

-> 이 말을 듣고 통곡하며 다시 로마로 들어가 결국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데 난 예수와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 말하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게 되는 장면.

 

베드로가 죽기까지 힘썼던 사명

- 12: 너희가 이것을 알고 (예수의 성품에 들어감을 통해 그의 통치- 그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이미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무엇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열매맺는다.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곧 실족하는 것이요 게으른 것이다.

 

  • 1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Witness- 증인)라

 

교묘하게 만든 이야기: 왜 이 말을 썼을까?

 

(사도행전 1장 6-12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12절-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관심 - 이스라엘의 회복

그들의 관심 - 주님 부활 하셨는데 내 형편은 왜 똑같아요? 우리 생활은 언제 나아져요?

그거 알바 아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 - 성령받고 증인되라

1. 복음의 전도자가 되라

2. 성령받고 예수를 나타내는 자가 되라. 예수의 성품을 통해 예수가 너희를 통해 살아있음을 증거해라.

 

그리고 승천

이 때 흰 옷 입은 두 천사의 말 -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마 24: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 이 말을 토대로 예수의 강림을 기다렸다.

무슨 기대를 하고? 예수가 오시면 예루살렘이 회복될꺼야.

내 형편이 나아질꺼야....여전히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환경만 변하기를 바라보고....

 

처음엔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가 왜 안오나? 언제 재림하시나 기다렸지만

오시지 않자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해석

->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환경)의 회복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말을 바꾸니까 교묘히 만든 말이다. 합리화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며 실망한 자들이 비난한다.

 

주 예수의 능력 - 3절의 그의 신기한 능력

그를 앎으로, 경험함으로 임하는 은혜와 평안. 우리 안에 약속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일어나는 것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스도의 강림이다. -> 주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는 것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를 친히 본 자다.

그가 세례를 받으시고 변화산상에 오르시고 - 주의 권능과 영광을 직접 경험 한 자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의 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직접 만진, 직접 경험한 제자의 말 - 그 당시 가장 큰 권위

 

그런데 베드로는 직접 예수를 경험하고 만진, 수제자의 그 경험보다 더 믿을 수 있고 확실한 예언을 소개한다.

 

19절을 다같이 읽어보자.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샛별

[민 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 그리스도가 내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할 때까지

우리의 어두운, 불확실한, 불완전한 심령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듯이 예수의 성품이 내 마음을 채울 때까지

베드로의 경험, 요한의 경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라.

 

[시 119:97-104]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각 절마다 표현된 더 확실한 예언 - 주의 말씀, 주의 계명, 주의 법, 주의 증거, 주의 규례, 주의 법도

그 말씀의 능력 - 원수보다 지혜롭고,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노인보다 뛰어나다.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 읽다보면 주께서 친히 날 가르치신다.

 

[시 119:105-107]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키는 자다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하루 아침에 될까?

아니다. 주의 하고 결단하고 굳게 정해도 쉽게 되지 않는다.

 

어릴 적 - 내가 7살 때 어머니가 예수를 영접

피부도 고치고 기도도 하고 기도원이란 기도원 따라다니기 시작

삼각산, 오산리,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귀신 쫓는 사람, 치유의 은사.... 정말 능력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언 받고, 능력자들,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그런 사람들- 신령한 세계에 눈이 떠짐

그런데 하나님같고 완전할 것 같은 그런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하는 그런 사람들도 또 넘어지고, 타락하고, 음란을 행하고....

 

기도가 다가 아니구나. 말씀이 없는 기도는 반드시 타락한다.

기도원가서 은혜 체험 받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아무리 읽으려 해도 읽어지지 않는다.

작정하고 댐벼도 창세기 출애굽기 떼고 레위기 넘어가면서 부터 무너지고...

신약은 복음서 겨우 읽고 로마서 가면서부터.....

말라기서부터 거꾸로 읽어도 에스겔까지 오면 걸려 넘어지고

요한 계시록 읽다가 포기하고

 

결국 신학교 가서야 작정하고 통독하기 시작

 

그래도 말씀이 꿀처럼 달지 않았다. 숙제였고 부담....

 

더 읽어야지, 더 기도해야지....

 

봉쇄 수도원) 28년간 수도원 생활하던 수도사 - 개신교 목사님 처럼 많이 말씀읽고 기도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늘 넘어진다. 기도가 적어서? 말씀을 않읽어서?

삶에 대한 훈련이 없기 때문....

 

전환점 - 어떻게 삶을 훈련할 수 있을까? 영성을 전공하게 된 계기

 

영성을 공부하면서 깨닫고 얻었던 가장 큰 유익

1. 성경은 공부하고 Master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과 연애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과서 - 한 번 떼면 다시 보지 않는다.

성경- 매일 읽는다. 왜? 이해하려고가 아니라 교제하기 위해서, 만나기 위해서다. 동행하기 위해서다.

 

2. 말씀과 기도는 하나다.

말씀을 읽는 것이 곧 기도요 기도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말하고 말씀을 통해서 듣는다. 때로 말씀을 통해서 내 마음과 상태를 아뢰고 기도를 통해서 듣는다.

 

어떤 낙심이 오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말씀이 날 일으켰고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 속의 폭풍우가 잠잠해졌다.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에 말씀이 들리게 하였다.

 

[벧후 1:19-21]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 귀에 걸면 귀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가 절대 아니다. - 말씀의 진리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라. 개인의 해석에 따라 그 진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되고 역사하는 진리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말씀이신 주님을 알고 경험하며 그 주님을 닮고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리도록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신다.

그런데 그 약속은 또한 우리의 참여, 결단, 의지, 동참이 필요하다.

그래서 베드로의 사명은 사람들이 다른 교사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흔들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와 권면을 통해 그 들 자신 안에 거하시고 활동하시는 성령님을 생각하도록, 느끼도록, 관심 가지도록, 그 안에 예수의 강림이 일어나심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나도 목사로서 여러분 안에 이미 성령님이 계심을 생각나게 하는 다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안에 예수가 있기 때문에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가 여러분 안에도 있기 때문에

서로의 삶 안에서 그 예수가 어떻게 다르게, 또한 연합하여 역사하는지를 서로를 바라보며 기뻐하기를 원한다.

 

마 24장 4절부터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때 - 산으로 올라가라, 산: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 골방

23절 - 믿지 말라, 그들이 혹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조지폭스 - 퀘이커의 창시자

영국 기독교사에서 가장 혼란스런 종교적 혼란기

스승을 찾아 헤메던 자

그러나 아무에게서도 해답이 없고 위로받지 못했는데

어느날 자기 내면에서 빛의 소리를 듣고, 우리는 그 내면의 소리를 성령이라 말하지만....

 

그 때의 교회를 뾰족탑 - 서로 높이 지으려고 교회를 통해 힘과 권력과 성공을 추구하던 교회

설교도, 찬양도, 모든 교회의 예식을 다 치우고 오직 침묵을 통해 자기 안의 성령의 소리를 듣고자 해서 생긴 교단.

퀘이커 - 그렇게 침묵 속에서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하면서 몸이 흔들리고 깨닫고 말하게 하심.

 

교회 혼란기에 극단적 해법

그런데 결론은 바깥에서 구원을 찾고자 하지 말고 샛별이 네 안에 떠오르기까지....

 

이렇게 말하면 어렵다고 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고 죽도록 때려 가며 나만 믿고 따르라고 하면 다 내어버리고 넘어가는 세상....

 

Posted by 소리벼리

우리가 힘써야 할 것 (베드로후서 1:1-11)

 

베드로전서 : 외부적 환란, 곧 오실 줄 알았던 주가 오시지 않고 외부의 핍박은 더해지고 있다.

베드로후서: 내부적 혼란, 외부적 환란이 더해지면 자연스레 내부에서도 혼란이 일어난다. 거짓교사와 이단들이 나오고 예수에 대한 온갖 설들이 난무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를 믿는 모든 교회와 헝제들에게 이 글을 남긴다. 베드로가 남긴 유일한 편지. 그는 핍박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형제들을 향해 어떤 글을 남겼을까?

 

종이며 사도

종: 노예 (Slave)

사도: 보냄을 받은 자, 파송된 자.

 

그는 늘 행동이 앞선던 자. 앞장 서서 일했지만 자기의 뜻과 예수의 뜻이 달랐을 때, 예수께 항변했던 자.

 

[벧후 1:1] 예수 그리스도의 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라 칭한다.

그는 자기 주관이 강한 자였다. 다혈질이고 행동파였고, 칼을 지니고 다니다가 예수를 잡고자 했던 병사 마고의 귀를 베기도 했던 열심당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예수의 제자에서 종이 되었다.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종이라는 단어는 금지어와 같은 단어다. 치욕적인 과거를 연상하는 단어다.

그런데 바울도 베드로도 자기를 칭할 때 스스로 예수의 종이라 칭한다.

사도는 파송받은 자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파송한 자의 명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예수의 심부름꾼으로 동일한 믿음을 지닌 형제들에게 편지한다.

 

그 형제는 누구인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이다.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넘어가보자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은혜는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이다. 성도에게 주님을 아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를 체험하는 것이다.
  • 평강은 언제 오는가? 환경이 변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파도가 치는 중에도 예수를 알면 평강이 온다. 그것이 은혜다.
  • 내 마음에 파도가 일 때,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아도 예수를 경험하면 그 때 평강이 임한다.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그의 신기한 능력은 무엇인가? 첫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만나는 자에게 평강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답답하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혼돈 속에서 그를 경험하면 질서가 임하고 안식이 임한다. 파도가 잠잠해진다. 또한 그의 신기한 능력은 무엇인가? 그를 경험하는 자에게 단지 예수를 경험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생명(살아있는 삶, 사랑하는 삶, 불타오르는 삶-살다, 사르다. 사랑하다)과 경건 (예수를 경험하고 닮아가는 것) 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
  • 예수를 경험하는 사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의 삶은 생명이 넘친다. 변한다. 움직인다. 그리고 그 경험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를 경험한 사람은 더 예수를 알고자 한다.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게 된다.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는 것- 바로 경건이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 보배롭고 큰 약속은 무엇인가? 보배롭고 큰 약속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 아주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 - 정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
  •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썪어질 것을 피하여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

정욕 (evil desire) - 자기만 위하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하나님 없이 살려는....하나님과 떨어지고자 하는 그 욕망에서 기인된 세상의 부패

고유정: 자기 삶을 위해서 전남편도 살해, 아들도 살해했다고 유력히....완전히 부패된,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했던 사회자가 자기가 다룬 사건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라는 그런 사건.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릇된 세태의 결과물

  •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 - 신성한 성품,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그 분을 닮을 것이다. 누가? 주님께서

[빌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는 그 분의 성품을 닮는 것에 관심이 없고, 때론 포기하고 싶고, 난 안된다고 절망할 그 때에라도 주님은 우리를 완성시키신다. 가장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

 

[벧후 1:5-7]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

에베소서 2:8-9 -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선물로 주셨으니. 주님이 주신 것

[히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덕 - 믿음에 근거한 행동, 선한 행동, 영향력 있는 행동
  • 지식 - 그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온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나온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행동은 우리의 의를 드러내지만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오는 행동은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낸다.
  • 절제 - 지식을 절제하라는 것이 아니다. 바른 지식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말씀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죽여 그리스도의 행동이 나오도록 하라는 것이다.
  • 인내 -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할만할만하면 또 내 성격이 나오고 내 성질이 나온다. 한 번 순종은 쉽지만 계속적인 순종은 십자가에 온전히 죽은 것이다. 십자가에 온전히 죽는 것은 죽음을 인내하는 것이다. 고통을 참는 것이다.
  • 경건 - 무엇으로 인내하는가? 다시 말씀과 기도다. 경건은 무엇인가?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오도록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 삶에 그리스도가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이다.
  • 그런데 그 경건의 끝이 왜 형제우애와 사랑으로 끝나는가? 예수님의 새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경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경주하는 것이다. 믿음의 길은 내가 높아지기 위한 경주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경주이다.

 

금요일 신명기 말씀을 통해 나누었지만 광야 생활 40년동안 가장 많이 변한 것이 다름아닌 모세다. 그는 백성을 짐처럼 여기고 부담스러워했지만 결국 그들을 위해 가나안을 포기한다. 그들을 멸하시려면 자신부터 처단하라고 한다. 단지 통솔자에서 영적 부모가 된다. 진정 사랑하는 자가 된다.

 

사랑을 열매로 할 적에 그 사랑의 원천은 그리스도가 완성시키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믿음이요, 그 믿음을 이루어가는 것은 지식과 경건, 즉 말씀이고 기도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절제와 인내이다.

같은 내용을 다룬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는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로 시작해서 끝까지 견디는 것으로 마친다.

 

내적 외적으로 피곤함과 핍박에 시달리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베드로는 너희들이 예수를 알고 경험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힘쓸 것, 우리가 열매 맺어야 할 것을 분명하게 증거한다.

 

그리고 이런 것이 없는 자, 이런 열심과 이런 열매가 없는 자를 무엇이라 말하는가? 맹인이라 말한다.

예수를 보면서도 예수를 보지 못하고 예수를 경험하면서도 예수를 닮지 못하는 자 -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 맹인이라는 것이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경험하면서 이렇게 예수를 닮아가고자 하는 자는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확언한다. 왜 실족하는가? 우리의 관심이 예수를 알고 예수를 닮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부르심과 택하심

내가 주께 나온 것이 아니라 주가 날 불렀다. 주가 날 택했다. 왜?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고.... 그 안에서 온전케 하려고

 

[벧후 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그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다. 예수를 알고자, 예수를 경험하고자, 예수를 닮고자 하는 자들이 넉넉히 누리게 되는 은혜이다. 보배롭게 지극히 중요한 은혜이고 약속이다.

 

왜 기도하는가? 왜 열심내는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내 뜻, 내 소원 이루려고 열심 내는 것 아니다. 생명과 경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내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베드로의 눈물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