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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혼인잔치 (요한복음 2:1-11절)

 

  • 요한복음 :1장 - 서론, 2-12장 - 7개의 표적, 13-20: 영광의 책 - 십자가와 부활 21장 - 에필로그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
  • 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중 첫번째 표적 -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
  • 표적은 기적과 다르다. 표적 - 기적(Miracle)이 아니라 이정표 (sign)

표적이라고 구분된 사건은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는 사건 -> 요나의 표적...요한복음의 일곱 표적

그리고 그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뒷 부분

  • 그렇기 때문에 이 가나 혼인 잔치가 왜 그리스도의 표적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살펴야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단순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이라면 기적은 되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 :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1. 사흘째 되던 날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날 -> 십자가의 완성
  • 1장의 연속선상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창세기 1장의 창조 모델을 가지고 시작된 본문
    • 첫째날 - 빛으로 오신 예수님 (어둠과 빛)
    • 둘째날 (29절)- 세례를 받으심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물-> 세례
    • 셋째날 (35절, 또 이튿날) - 세례요한의 제자 ->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바다와 육지) 경계
    • 넷째날 (43절 이튿날) - 나다나엘. 참 이스라엘 삼으시는 주
    • 그리고 사흘 후 - 제 7일 날 - 안식일 -> 창조의 완성 -> 혼인 잔치를 통하여

 

2. 갈릴리 가나

[요 21: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1장의 마지말 사건 - 나다나엘을 부르신 예수님 -> 네가 더 큰 일을 보리라

그 더 큰 일을 보여주는 사건 - 가나 혼인잔치 -> 나다나엘의 고향

 

  • 성경의 처음과 끝

첫 창조 : 아담과 하와를 하나로 맺게 하심 - 죄가 들어옴으로 그 혼인관계가 깨어짐

죄가 들어오니 사람과의 관계 (탓),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다 깨어짐

아가서 - 신랑되신 예수와 신부된 교회와의 관계

호세아-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계시록 - 천국 혼인잔치로 끝이 남

 

  • 혼인잔치 (주님이 오신 목적)

그 분은 잔치하러 오셨다. 기쁨을 주려 오셨다.

신앙생활은 이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지이다.

십자가, 고난, 광야, 성화는 모두 이 잔치를 위한 배경이다. 잔치가 목적지이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문제해결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일한 대로 보상 받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분과 연애하는 것이요, 신랑되신 그 분을 누리는 것이다. 순교도 왜 하는가? 더 큰 기쁨을 위해서다.

우리로 하여금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다.

 

[요 2: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 포도주: 잔치의 핵심. 신랑은 없어도 포도주는 있어야 잔치가 계속된다.
  •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 삶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집에서 있어서는 이제 잔치 끝났다는 말과 같다. 곧 사람들은 실망하여 떠날 것이고, 잔치는 끝날 것이다.

 

포도주가 이제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 삶의 즐거움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잔치 음식의 핵심은 포도주였다. 포도주가 없으면 잔치는 끝난다.

다른 음식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이다. 우리를 모든 죄에서 사하실 그리스도의 피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 죄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우리 모든 삶의 기쁨의 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교회는 다른 것으로 이 기쁨을 대신 할 수 없다.

콘서트를 열고 카페를 만들고, 체육관을 지어도,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교양강좌를 열어도 그것이 세상의 기쁨을 이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기쁨의 근원은 누가 뭐라해도 그리스도의 보혈이다.

교회는, 신앙은, 믿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마른다. 즐거움이 사라진다. 다른 모든 것은 부속물일 뿐이다.

다른 것으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들이 즐거움을 잃어버리니까 자꾸 세상을 따라가려 하다가 복음을 잃어버린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이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다.

 

  • [요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여자여: 하대가 아니라 존칭으로 부른 것이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뜻밖이다. 왜 문제를 가지고 나온 마리아에게 예수의 반응이 이토록 차가운 것일까?

 

상식에서 벗어난 반응이 나올 때는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시고 자비로운 분이신데, 그 집에 난감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고 예수님은 능히 물로 포도주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면서 왜 처음에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하신 것일까?

이 말씀은 ‘그 집 일이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금 잔치집에 계셨어도,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함께 계서도 기쁨이 충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 읽고 기도해도 기쁨이 회복되지 않을 때가 있다. 왜 그런가?

기쁨이 없어서 예수께 나갔는데 왜 주님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하면서 매정하게 대하는가?

 

바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은 청함받은 자로, 손님으로 이 집에 계시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지 않아서, 예수님이 우리 집에 계시지 않아서 내 삶과 우리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내 심령에 계셔도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같은 역사가 우리 집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 집에 계시면서도 이런 기가 막한 처지가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쁨을 얻지 못하고 평안을 느끼지 못하고 염려와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 영접까지 했는데 예수님께서 알아서 도와주시고 내 인생 가운데서 역사해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모신 사람도 열심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손님이 와도 우리는 정성껏 접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손님으로 여겨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금하고 예배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은 자기가 합니다. 주님이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주를 섬겼고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위해서 봉사를 하고 헌금을 했는데.” 바로 큰 아들의 신앙이다. 아버지의 집에 있지만 아버지가 주인 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산다.

예수님은 손님 대접받으셨지, 주인 대접받으시지 않았어요.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이라 여긴다면 물건 하나 살 때도, 한 시간 여유 시간을 쓸 때마다 주님께 허락을 구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는다면,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돈을 쓰거나 시간을 쓸 때 주님의 지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내가 이렇게 하고. 주님의 허락이 왔으니 내가 하고,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하고 싶어도 하지 않고. 그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나의 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이니까 내가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주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요 2: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 그 돌항아리에는 지금 물이 있는가? 없다. 돌 항아리에 담아진 물 - 구약의 정결예식 -> 그 정결예식으로는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다. (요 3장) 큰 항아리지만 그 항아리의 물을 다 써버렸다. 그런데도 잔치집의 즐거움이 지금 다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막 7:1-7]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2:7-1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1. 예수 - 세례받고 제자들을 삼은 다음에 첫 번재 공생애 행적을 제자들과 함께 이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

그냥 잔치에 청함받은 것이 아니다. 공식적인 공생애 활동으로 참석한 것이다.

내 때 - 요한복음에 7번 등장 - 7번이 끝나면 십자가 사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 그 때를 향한 첫 시작을 하신 것이다.

 

2. 마리아 - 포도주가 떨어졌다.

[요 2: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가 예수를 아들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 대한다.

종들에게 이제 이 집의 주인이 예수가 되게끔 명령한다. 그녀 역시 손님으로 왔지만 이제 주님이 주인되신 삶이 되도록 이 집을 바꾸는 일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 자신의 신앙고백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누가복음 1장 (주의 천사가 그녀에게 왔을 때에 그녀가 고백한 말)

그리고 그 고백이 그 집의 종들의 고백이 되게 한다.

 

3. 하인들 -

[요 2: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 하인들의 말이 없다. (침묵) - 여리고성
  • 아귀까지 채운다. - 온전한 순종
  • 어디에서, 누가 이 기적을 이끌었는지를 안다.
  • 오직 순종하고 따르는 자들만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주님의 역사를 깨닫는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똑같이 기적을 누리고 표적을 보아도 우연히, 어떻게 하다가....자신의 생각 안에서 생각하다가 결국 믿음에까지 이르지 못한다.

 

4. 연회장 - 연회를 주관하고 있는 그 집의 주인

[요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 어디서 났는지를 모른다.
  •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것이 기적인지, 누가 했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지 못한다.
  • 그 집의 주인이라고 하지만 주인으로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고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른다.
  • 주님을 모르는 인생이 그렇다. 자기가 옳은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살지만 결국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5. 이 장면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인물

제자들 - 그저 보고 그 결과 믿었다.

[요 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40-42]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 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만난 제자들을 혼인잔치로 데리고 오셨다.

그리고 2절과 11절 -> 제자들

그 공생애의 첫번째 표적은 누가 대상인가? 제자들에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보게 하신 것 .

그의 영광 -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오직 그의 십자가, 보혈

 

예수님이 이 곳에 온 목적은 제자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제자들은 하인들처럼 아무 소리 없이 주님이 행하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물이 무엇인지, 그 포도주가 무엇인지.... 그리고 후에 그 피를 기념하면서 성찬식을 베풀면서 비로서 간사한 죄인을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삶에 오셔서 그 분의 보혈로서 우리 삶에 기쁨을 회복하시고 잔치를 여시는 분임을 보게 하신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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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과 지지난 시간 2주에 걸쳐서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의 비유"를 가지고 첫 주에는 이른바 탕자라고 불리우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었고, 지난 시간에는 아들이 집을 나갈 때에 나가도록 두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왜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결국 허랑방탕하여 탕자가 될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시는가하는 문제를 열왕기상 3장의 "솔로몬의 재판"에 나와 있는 사건을 살펴보면서,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거짓 어미를 대신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산 자의 어머니,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아들의 비유의 마지막 시간으로 첫째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이 비유는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원독자)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가, 아니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향한 말씀인가?

[눅 15:1-3]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 장면에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3. 그리고 예수와 함께 있는 제자들

-> 3절에서 말씀의 대상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 누가복음의 말씀과 평행하는 두 아들의 비유 사건 (내용상의 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유일한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너희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마 21:23) 백성의 장로- 존경을 받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들은 바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혹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 그동안 이 비유는 탕자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탕자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지만 이 말씀을 하는 대상은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당시의 일등 신앙인이라고 불리던 자들.
  •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는 탕자의 비유가 아닌 두 아들의 비유로 불리워야 할 것이요, 이 메시지는 두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요, 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핵심을 담고 있는 비유이다.

 

2. 예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첫째 아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1) 그는 성실한 자이다.

맏아들은 벝애 았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25절)

아버지는 부자였다. 품꾼도 많고 먹을 걱정도 없다. 그리고 놀기 좋아하는 동생은 유산을 챙겨 아버지의 돈을 챙겨 나갔다.

형에게도 유혹이 없었을까? 나도 좀 놀면서 하자. 이제 나 밖에 없으니 눈치 볼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5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돌아 올 때에도 밭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야 어떻든, 종들이야 어떻든 언제나 자기 일에 충실한 성실한 자이다.

 

2) 아버지를 섬긴 사람이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29절)

동생은 아버지가 싫다고 집을 나갔지만 형은 그 말씀을 어김없이 순종하는 자녀였다. 그는 순종하는 자녀였고 또한 아버지를 섬기는 자였다.

 

3) 검소한 사람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큰 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친구들과 파티를 한 적이 없다. 동생은 허랑 방탕하는데 형은 아마도 뭐 하나 즐긴 것 없이 검소하고 금욕적으로 산 것 같다.

 

4) 늘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31절)

아버지의 입으로 큰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함께 있던 자라고 인정을 받는다.

 

신앙생활 하면서 저도 그렇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소망하는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함께 거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하고, 자기 자신의 삶에도 최선을 다하는 자(성실하고 검소한 자)

어쩌면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신앙의 모든 모습을 가지고 있는 자.

 

3.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목사 중의 하나인 팀 켈러 목사님은 이 비유에서 나오는 두 아들은 모두 하나님과 멀어지는 두 길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둘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로, 이는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 밖에서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부류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 믿고 "자아 성취"를 위하여 과감히 전통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심하게 말하면 "제멋대로" 길을 가는 자들이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대변하는 길은, 교회의 전통에 철저히 순응하고, 그 안에서 크고 자라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는 우월의식과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 그리고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동생을 맞이하자 분노하여 그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종교적인, 형식적인 신앙의 길을 가는 자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동생의 길은 "못되" 보이고 첫째의 길은 "착한 길" 같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멀어져 있기는 동생이나 형이나 매한가지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오히려 비유의 결론은 충격적이다. 못된 인생을 살았던 둘째는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고 형은 아버지가 계속적으로 설득하지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로 끝이 난다.

그가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눅 15:28-29]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그가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의로운 전력, 자기의 선한 행동 때문이다.

둘째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아버지 품을 떠난 죄인이요, 첫째 아들은 순종하지만 아버지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자 똑같이 아버지의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다. 요나의 불순종처럼,...

 

영화 <아마데우스>

젊은 살리에르라는 촉망받는 음악가의 기도

"주여, 저를 위대한 음악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음악으로 주를 찬송하며 또한 저도 칭송받게 하소서. 제가 온 세상에 유명해져서 저와 제 작품이 사랑을 받는다면 저는 주님 앞에 저의 순결함과 근면함과 겸손함과 제 삶 전부를 드리겠나이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여자를 건들지도 않고, 무료로 젊은 음악가들을 가르치며, 가난한 자들을 열심히 구제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등장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뜻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여자들과 맨날 희희락락하면서 풍문이 끊이질 않고, 술취한 모습으로 연주하기 일쑤다.

살리에르의 고뇌에 찬 기도가 시작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난 하나님께 재능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절제하고 노력하며 매사에 신중을 가하고 흠없이 살려고 본능마져도 누르려고 애쓰는데, 저 젊은 친구는 약혼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어찌 아무일이 안 나타납니까?"

그러면서 급기야 "이제 하나님, 당신과 나는 적입니다."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다. "모짜르트, 그 자가 나타나면서부터 하나님도, 그리고 나 자신도 싫어졌다..."하면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살게 된다.

 

둘째의 희망은 허랑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오지만 형의 정말 큰 문제점은 돌아오기가 더 힘들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방법에 분노하게 되고 둘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에 참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끝까지 자기가 하나님보다 옳다고 주장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욘 4:9b)

 

구원: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사랑으로서...

절대로 선행이나 우리의 노력이 아니다. ->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구원관이다.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생각은 구원을 얻기 위해 자기가 다가가는 것이지만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신앙생활의 기준에서 볼 때 첫째에게서 없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 없다. 그는 매말라 있었다. 즐거움이 없다. 그는 친구들과 잔치할지도 모르고, 가족의 잔치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화평(Peace)이 없다. 그는 동생과도 불화하고 급기야 아버지와도 불화한다. 자비(Mercy,Forgiveness)가 없다. 그는 동생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생을 용서한 아버지는 더더욱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금할 수가 없는 성령의 열매이다.

 

형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 그런데 교만은 그 어떤 죄보다 우선된 죄다. 왜? 교만은 하나님 위에 자신을 가져다 놓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행실에 대한 회개도 해야 되지만 잘한 일들의 동기까지, 자기 의의 뿌리까지도 회개할 수 있어야 한다.

 

4. 아버지

탕자라고 할 때 영어. Prodigal의 의미는 "무모할 정도로 다 써버리다" "남김없이 다 쓰다"의 의미다.

아까 언급한 팀켈러 목사는 이 비유에서 정말 프로디갈한 존재는 둘째 아들이 아닌 아버지이다고 말한다.

 

왜? 두 아들이 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고 각자의 방법대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만 허랑방탕하고 돌아온 둘째는 뛰어나가서 반기시며 어린 양을,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피로 먹이시고 입히시며 잔치를 여시고

그런 자신의 사랑에 분노하며 집밖으로 뛰쳐나간 큰 아들에게는 "얘, 내 아들아!" 하시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시면서 여전히 설득하시면서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그 모습이야 말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분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 주신 은혜 안에서 그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런 잔치에 초청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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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2 (열왕기상 3장 16-28)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나누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비유를 기억하면서 둘째 아들을 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아버지의 모습에 관하여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이 비유가 두 부류의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결국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우리가 살펴 볼 신학적인, 혹은 실재 신앙적인 문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요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께 "내 몫"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무엇인가를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기도- 대화

간구- 들어달라고 구하는 것

중보- 남을 위해 구하는 것

 

하다못해 예배드리러 와서 "은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잘못 된 것 아닙니다. 제 자녀가 학교에서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부모에게 요구하듯이 자녀에게는 아버지께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함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가 바로 서 있을 때 이지요.

그 분깃 만을 요구하며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려 한다면 아버지는 그것을 더 이상 들어줄 이유도,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 나 복주어서 내 맘대로 살게 해 주세요."하는 기도를 어찌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여서 들어주었더니 더 이상 하나님 필요없어서 떠나버리는 것 -

사사기서의 교훈이요, 유럽, 미국,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에까지 펼쳐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역사

 

더군다나 이 아버지는 분명 복을 주어 내보내보았자 아버지 품을 떠난 그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결국 세상에 기생하는, 짐승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내보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 품 떠나서 어디 한 번 혼 좀 놔봐라!" 하는 모습이지 사랑의 모습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가만 내 버려 두시는 하나님.

그래서 17, 18세기의 하나님에 대한 상

창조하시고 심판 때까지 내버려 두시고 간섭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말라기 선지자 이후 - 400여년간 어떤 말씀도 들려지지 않는 이야기.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지을 때 간섭하지 않으시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손 대실 수 없는가? 손대시지 않으시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솔로몬의 판결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서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마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열왕기상 3장에 나온 솔로몬의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를 유명하게 한 일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촛점이 솔로몬의 판결에 맞추어져 있지요. 그리고 성경은 이 판결의 일화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는 구약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제 구약의 말씀을 필요없고 예수님의 말씀, 사도들의 말씀만을 들을 것인가하고 고민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리더들은 그리스도를 해석의 틀로 삼고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영성가들과 심지어 후대의 종교개혁자들까지도 무엇이라고까지 주장하였냐면 "성경의 모든 사건과 설교들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고 까지 했으며, 성경의 각각의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이 사건 역시, 성경이 자세히 다루고 있는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를 향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의 재판을 다시 들여다 봅시다. 또한 솔로몬의 지혜가 세상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그의 지혜가 결국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 솔로몬의 재판 (왕상 3:16-28)
  1. 이 재판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왕, 산 자의 어머니, 죽은 자의 어머니, 그리고 살아있는 한 아이.
  2. 간략한 내용: 한 집에 두 창기가 함께 살고 있고 사흘 차이로 아이를 낳는다. 그 중 한 아이가 죽자 죽은 아이의 엄마가 죽은 아이를 산 아이와 바꿔치기해서 지금 서로 자기가 산 자의 어머니라고 재판을 걸어온 것.
  3. 왕: 왕되신 하나님 산 자의 어머니: 예수 그리스도 죽은 자의 어머니 : 사탄 산 자: 모든 인간, 혹은 그리스도인.

 

    • 왜 두 창기라고 표현했을까?

창기: 몸을 판 자, 자기 위치를 잃어버린 자,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한 자

사탄: 천사에서 타락하여 땅으로 떨어진 자.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자

 

    • 아이의 부모가 바뀌다.

원래 우리 인간은 그 소속이 사탄이 아닌 그리스도께 속해 있었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우리의 소속이 산 자에서 죽은 자가 된 것이다.

 

    • 칼을 가져오라: 하나님의 공의, 심판

아이를 둘로 쪼개라는 엄위한 명령 앞에 산 자의 어머니는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죽은 자의 어머니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사탄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가 원하는 것은 분열과 파괴와 함께 공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권리, 아니 그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포기한다.

당시의 재판 - 칼을 가져오라는 왕의 심판 (최후의 판결)- 타협의 여지가 없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거짓이 탄로나는 자가 죽든, 그 둘이 아니면 아이가 죽어야 했다.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그저 아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한 것이다.

 

그 때 그 어미의 심정을 설명하는 말이 무엇인가?

 

26절: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왜 자기 목숨을 포기하는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예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포기하셨다.

자기의 옳음도, 하늘보좌도, 사람들의 기대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우리를 살리셨다.

 

  •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 하나님의 공의

모든 것을 지켜본 왕이 아이를 살리려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어미의 모습을 보며 공의로운 판결을 한다. 왜? 참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기 때문이다. 참 신과 거짓 신이 어디서 나뉘는가?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어디서 분별되는가?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가? 아니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만 결국 자신의 잇속만을 채릴 것인가?

 

십자가를 통한 사랑의 확인을 통해 사탄의 거짓이 판명되었다. 이제 누가 죽게 되었는가? 사탄의 정체가 탄로나고 그는 심판받아 죽게 된 것이다.

 

28절: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솔로몬의 지혜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머문 것이다.

 

이 본문을 설명한 한 주석에서 이 때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한 산 자의 어머니의 모습과 분깃을 얻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결국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연결시킨다.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아들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자기 권위의 치명적인 손상이요, 자기 재산의 손해요, 무엇보다도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아들이 죽게 되는 것 보다 자기가 손해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빼앗기는 것을 감수하는 어머니의 불붙는 마음과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허랑방탕한 것을 알면서도 보낼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바알과 앗세라로,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결코 어디 한 번 나를 떠나면 어떻게 되나"하면서 우리의 실패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집 나간 자식을 잊어버리고 다시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무감각한 아버지도 아니다.

 

아들이 나가자만자 한 날도 마음을 놓치 않으면서 돌아오는 아들을 기다리며, 또 기다리며 잃어버린 아들을 향한 불붙는 마음.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십자가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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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누가복음 15장 11-24절)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온전한 삶을 누린 모델을 우리는 에덴 동산에서 가장 먼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보시기 좋아하셨습니다." 보시기 좋아하셨다는 말은 언제 봐도 또 보고 싶은,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한다는 것은 서로가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일이 있어도 '서로가 보기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제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동행,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날 무슨 일이 있어도 날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나만을 보고 마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알람을 울리고, 찾아다니시는 감시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가 행동하고 결정하고 살아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낙원의 장소였지만 타락하기 이 전에도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다시 말하면 보고 싶어할 적에, 반대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 싶을 때에는 언제나 다가와 말걸고 인사하고 교제하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의 교제란 부르심이 있고 응답이 있는 교제 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부르심(콜링- 소명)" 이 있고 "응답- 순종, 헌신"이 있는 삶이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의 의미입니다.

마치 집 안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데 함께 살지만 동시에 서로의 공간이 있고 활동이 있고, 그렇지만 언제든지 보고 싶거나 할 이야기가 있으면 부르고 찾고, 응답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의 공간들을 허락하시고 때로는 그것을 통해 동산에서의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만물의 이름을 지어주며 동산의 모든 실과들을 맛보며 기쁨을 맛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쁨이고 행복이고 만족입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 분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매사가 그 분 앞에 바로되야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말씀 중의 하나라도 어기면 그 분이 나에게 실망하셔서 떠나가실 것 같은 강박관념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기준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남에게도 들이대면서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삶을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엄격한 잣대로 들이대면서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기준에 모자라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난 하나님을 믿은 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정말 마음 껏 즐기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솔직하게 하나님 나 00 하고 싶어요....00 해도 돼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하게 해 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이 결국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이고 반대로 나를 망가뜨리는 것임을 하나님께 묻기 전에 알게 하셨습니다.

신앙은 나에게 구속이 아니라 자유였고 금욕이 아니라 만족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주를 바라보며 생활 한다는 것이 나를 억압하거나 구속하고 끊임없이 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참 나이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이 신앙생활 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뱀이 인간을 유혹해서 우리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에게서 되돌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커다란 억압이고 불행인양 우리의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게 합니다.

눈을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리니까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냐면 나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내가 벗었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없다. 내가 부족하다. 내가 부끄럽다는 의식입니다.

 

  • 내가 벗었다 - 나의 열등감 Vs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있음으로 나는 그 분 안에서 충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입히고, 꾸미고, 가리고, 먹이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바벨탑을 만들고, 나 자신을 위해 여리고성을 쌓고 나 자신을 위해 성전을 쌓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 자신을 정말 위한 것인가? 결국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기준이 없고 절제가 없고 질서가 없기 때문이죠.

 

사사기-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가질 것 다 있어도 왕이 없는 삶, 기준이 없는 삶, 집안에 어른이 없고, 내 안에 주님이 없는 삶은 혼돈과 공허로 표현된 무질서의 세계입니다.

 

마치 붕어에게 먹이를 주면 붕어는 주는 대로 먹습니다. 어린아이가 붕어 밥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계속 주다 보면 붕어는 죽을 때까지 먹다 죽습니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인간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채우다 보면 시간의 차만 다를 뿐이지 계속 자기를 채우다고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고 채우다 채우다 죽는 것입니다.

 

  • 또한 죄의 결과로서 온 것은 하나님이 부를 때에 숨는 것입니다. 그가 찾아도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부르심은 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콜링은 있는데 순종이 없습니다. 이런 역사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질 않습니다. 그 분의 콜링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것, 그 분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은 "아담아 어디있는냐?"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소리 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을 알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응답이 없는 인간을 행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멈추질 않습니다.

 

[창 3:8-11]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평소 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담이 범죄함을 알고서도, 아담을 찾아 부르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합니다. 대답하지 않습니다. 몇번을 부르시니까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는 것....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지요.

이 대답을 듣고 하나님께서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묻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이 소리는 분명 꾸짖는 소리, 자기의 죄를 지적하시는 노하신 아버지의 분노로 들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험한 많은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탄식으로 풀이합니다.

 

그토록 깨끗하고 아름답던 사람의 마음 속에 죄라는 커다란 상처가, 부패가 생겨서 더 이상 이들이 하나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이제는 끊임없이 두려워하고 숨을 수 밖에 없게되는 인간의 타락을 슬퍼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서 여겨졌던 것은 질병, 특히 문등병. 그리고 부정한 자, 창기와 신약시대의 세리와 같은... 부정한 민족, 사마리아인들과 같은...(섞인 민족)

그런 자들은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여겼기 때문에 아얘 쳐다보지도 않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로 이런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죄 지은 자를 정죄하시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창조한 그들이 그토록 어렵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통한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어떻게든 그들을 구하여 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많은 설교가들은 이 제목을 고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탕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으로까지 불리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서기관들과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작은 아들을 이들과 다른 평범한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들을 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치 아버지의 재산이 자기 것인양 자기 분깃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내 분깃 - 내 부분, 내 몫

아버지가 주신 것 - 그 "살림"을 각각 주었더니...

살림 - 헬라어 "비오스" 생명, 인생

 

창 2-3장 : 에덴동산에 거할 때에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므로 그 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왜? 피의 제사,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희생을 통해 그들을 만나시는 것.

 

이미 아버지를 떠나기로 마음 먹은 아들, 하나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린 탕자에게 아버지는 그의 생명을 주어 그를 보낸다.

 

"구약의 시각"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 죽는다. 저주 받는다.

신약의 시각 - 하나님이 벌을 주셔서 저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떠나면 저주가 임한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이 도래한다.

 

아들은 먼나라로 떠납니다.

'먼나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아버지로 부터 거리가 먼 곳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입니다. 무신론의 나라, 유물론의 나라, 우상숭배의 나라, 사탄이 지배하는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멀고 먼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그 곳에서 아들은 '허랑 방탕'한 삶을 삽니다. 허랑 방탕하다는 것은 기준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통제 할 수 없고 정욕대로, 쾌락대로 살다가 자기를 망가뜨렸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의 분깃을 달라고 해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나갔지만 성경을 아들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끝까지 아버지의 재산, 아버지의 살림이라고 표현하지요.

15:14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결국 허랑방탕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궁핍해지게 됩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홀로 살겠다고 했지만 결국은 알지도 못하는 세상 누군가에게 붙어서 사는 기생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자유한 것 같지만 결국은 세상의 종노릇 하고 붙어사는 인생이 되지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도 아닌 짐승에게 붙어사는 인간....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합니까?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인생의 밑바닥에 가서야 비로서 탕자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끝에서 비로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고 자신을 보니까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참자기를 보는 것, 자기의 상태,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점이고 바로 회개입니다. 자기의 상태를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옵니다. 21절에는 또 다시 '아버지'란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2절에도 '아버지'란 말이 나옵니다. 자기를 깨닫고 회개하니까 이제 보이는 것은 아버지 뿐입니다.

 

아버지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분깃만 보이고 세상만 보이고 나만 보았던 탕자가 자기를 보고 회개하니까 비로소 아버지의 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제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 마음이 복잡하게 이를 데 없습니다.

죄를 지은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께 면목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그 많던 재산 다 까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가니 그 앞에 설 자신이 없습니다.

회개는 했지만 아버지의 기준에 한 없이 모자라는 것 -"아직도 거리가 먼데..." 이것이 회개한 자의 위치이지요.

 

그런데 그런 거리가 먼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 염치가 없는 죄인을 아버지는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지요.

기독교는 아버지가 찾아오신 종교입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해서 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요.

거리가 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너를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창조했는데, 죄의 유혹에 넘어가 거지가 되어 나타난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요,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요, 다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오십니다.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자 달려와서 우리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고 견딜수 없는 사랑으로 더럽고 악취가 나고, 그의 온 재산과 명예를 다 잃어버리고 온 나같은 죄인을 달려와서 안고 입을 맞추시는 분. 그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을 입히고: 신분 회복- 아버지의 아들로

가락지를 끼우고 - 새 언약

신을 신기라- 참 자유

를 주시는 분.

 

너무 잘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돌렸던 시선을 그 분께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 분이 부르시면 부족하지만 "네 제가 여기있습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예배요, 기도요 신앙생활입니다.

기도 할 때 마다 제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부족한 저에 대한 부끄러움이고 회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제가 모자라다고 책망치 않으시고 대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날마다 날 일으키십니다. 그렇게 날 안아주십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부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여전히 거리가 먼 우리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분께로 시선을 향하기만 하면, 돌이키기만 하면 불쌍히 여기시고 달려오셔서 안아주십니다.

아들의 옷을 입히시고 언약의 가락지를 끼우고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십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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