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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중심으로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므비보셋의 본명은 역대상 9장 40절에 의하면 '므룻바알'로서 그 의미는 '바알과 대적하는 용사'라는 의미입니다.

초창기의 사울과 그리고 인생 전반에 있어서 요나단이 용사였던 것처럼 므룻바알도 그런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는 다름아닌 바알, 마귀와 싸우는 영적인 용사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은 성경에서 크게 세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에 궁에 있던 그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과 자신의 아버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사울의 신하들이나 므비보셋 입장에서는 당장 닥친 큰 두려움은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이 들이닥쳐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과 또 하나의 두려움은 그동안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치던 다윗이 이 때에 들이닥쳐 자신들을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두가지 두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궁에 남아있던 모든 신하와 하인들은 그 큰 두려움 속에서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므비보셋을 돌보던 유모는 므비보셋을 업고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사무엘하 4장에 보면 양 발목이 다 부러져 피난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 로드발이라는 마을에 숨어 살아야 했다고 증거합니다 .

로드발이라는 마을의 의미는 "목장이 없는 황무지"라는 의미입니다.

 

전사였던 므룻바알의 이름이 므비보셋 - "부끄러움"이라는 바꾸어진 것도 이 때일 것입니다.

그는 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고아로, 그리고 불구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절뚝발이- 예전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족이 이스라엘을 비아냥 거리며 맹인과 절뚝발이로 표현했듯이- 는 홀로 설 수 없는 죄인의 실존적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이 후에 므비보셋의 삶이 어떠했을지 성경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그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그야말로 영적, 육적 불구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므비보셋은 태어날 때에는 왕가의 장손으로 왕의 혈통을 지니고, 바알과 맞서는 장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왕궁에서의 기억은 사라지고,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고 자기는 다리가 불구가 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누군가 너의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는 사울이 어떤 자였는지, 자기가 왕의 가문이었다는 것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불구자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 어찌보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가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오직 세상에서 불구가 되어 하루 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므비보셋과도 같은 삶이 아닐까요?
  •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은 이유도, 사울이 죽자 사울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한 것도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적대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탓할 수 밖에 없는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왕이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자기는 패족한 왕족의 자녀로 현 왕의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사울의 손자라는 것마져 숨기고 세상에 나가서 떳떳하지 못하게 숨어사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2. 두 번째 등장은 사무엘하 9장에 등장합니다.

  •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법궤를 들여와 말씀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블레셋과 모압과 암몬 등 이방민족들을 몰아내면서 국경을 정비하며 또한 군대장관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서기관, 행정관들을 세워서 행정적인 정비를 다한 후에 이제 사울의 집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힘들 때에 도와주며 네가 왕이 되면 나와 내 집을 좀 지켜다오하는 약속을 기억하고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부른 것이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입니다.

 

  • 로드발에 은둔하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에게 어느날 다윗의 신하들이 찾아와서 왕이 당신을 찾는다고 전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 숨어서, 은둔하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하면서 자포자기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 다윗의 궁으로 다윗의 신하들을 따라 나섭니다.

  • 다윗 앞에 고개를 떨고 서 있는 므비보셋의 장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형장 앞에서의 사형수 같은 한 인간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절하고 있는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은총을 베풀리라.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삼하 9:7)

 

죽을 줄 알았던 므비보셋에게 다가온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 이사야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운 상황 속에서 떨고 있을 때에, 가장 최악의 상황 앞에 놓여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려준 가장 첫 마디는 "두려워말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소망의 말 한마디는 "두려워 말라"라는 그 분의 음성입니다.

늘 최악의 상황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던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다윗의 말, "이제 마음 푹 놓게, 염려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일세."

 

우리는 벌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 받으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심지어 매일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도, 심지어 평생을 같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혹시 저 사람이 날 미워하진 않을까? 날 버리지는 않을까?

왜 세상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우울증과 불면증은 더욱 극심해지고 먹는 약의 종류는 더욱 많아져만 갑니까?

그 근본 중심은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그 궁극적 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도와줄께. 내가 책임질께.. 내 앞에서 편안해라!

내 두려운 인생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요, 진리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다윗이 어떤 은혜를 줍니까?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삼하 9:7)

 

자기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회복의 역사를 약속해 줄 뿐만 아니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나 하루 아침에 개같은 내인생에서 왕의 자녀로서의 꿈같은 은혜를 얻게 됩니다.

 

  • 이에 반해 시바는 또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는 아들이 열다섯이고 종이 스무 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재산과 땅도 굉장히 많았던 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울의 종이었지만 사울이 죽고 그 집안이 다 패족하게 되자 수완을 발휘해서 그것을 차지 한 것입니다.

자기 권리가 아닌 것인데 자기 것인양 맘껏 누리며 살았던 것이지요.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이 "자신을 개같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길 때"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는 사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

 

그런데 어느날 다윗이라는 의로운 재판관, 왕이 나타나서 자기가 무시하고 있던 패족의 자손 불구자 므비보셋을 불러 오게 합니다. 그리고 뭐라 말합니까?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말합니다.

사울이 없으니까 이제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맘껏 누리고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인생은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다 주인이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

내가 가진 것, 내 소유, 내 자녀, 나 자신의 모든 것 까지도 결국 하나님꼐서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움켜 쥐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훅 불면 날라갈 것들을 잡고 의지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이 명령하자 시바는 한 마디 변명도 못합니다.

"종에게 명령한데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항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때에 불의를 행한 자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3. 16장 1-4절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을 하여 다윗이 급하게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피난길에 오르는데 시바가 다시 등장합니다. 므비보셋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시바의 입을 통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심정이 참담하여 피곤한 피난길을 오르는데 시바가 나귀 두 마리에 떡 이백개, 건포도 백송이, 과일 백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다윗에게 바칩니다.

 

다윗은 시바의 호의를 보며 "네가 무슨 의도로 가지고 왔느냐?" 묻습니다. 므비보셋이 보이질 않고 시바가 가지고 온 것이 의아한 것입니다. 사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의도를 물은 것입니다.

의도를 물었는데 시바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피곤한 자들이 마시게 하십시오."

한 마디로 "그냥 묻지 말고 먹고 가지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재차 묻습니다. "아니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니까 시바가 "므비보셋이 다윗이 도망 가니까 이제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고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압살롬이 반역이 일어났는데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이제 다 네것이다"하며 모든 재산을 다시 시바가 갖도록 명을 내립니다.

 

3. 19장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19장에서 다시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삼하 19:24-30]

(삼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삼하 19: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삼하 19: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삼하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삼하 19: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삼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구절은 굉장히 신중하게 묵상해야 할 구절입니다.

다윗의 귀환 때에 "왜 나와 함께 가지아니하였느냐" 하는 추궁에 므비보셋은 나는 가려고 했는데 시바가 나를 속이고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가면서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앞에서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도 나를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나의 억울함을 말하리오까?합니다.

 

분명 시바와 므비보셋,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당연히 시바가 므비보셋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주인과 왕에게 범죄하고 누명을 씌운 시바를 심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하듯이 므비보셋을 복권시키는 것이 올바른 퍈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반응은 시바와 밭을 나누게 하면서 그 둘 사이를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너를 내 아들로서 대하는데 너는 왜 밤낮 네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있느냐?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 그동안 므비보셋은 다윗으로부터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받고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랑받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자랐던 므비보셋은 그러면 과거의 상처와 불안과 부끄러움에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그가 지녀왔던 다윗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피해의식은 다윗의 사랑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다윗은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것이 나에게 잘 해 주는 이유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 하는 쇼일 뿐이고 하는 등 다윗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았을까?

그는 과연 다윗에게 진정 고마워하고 다윗의 호의를 기뻐했을까?

 

마음이 병든 사람은 사랑을 받아도, 다윗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도,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도 쉽사리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을 주어도, 과거의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평생을 목회를 하는 것을 곁에서 바라보고, 또 지금 제 스스로가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 사랑받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중심을 오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를 감시하다가 잘못하면 벌 주시는 분으로, 늘 나에게 부담 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교회를,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을 씻기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한없는 사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상처를 노출하는 사람들을 향한 처방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 19장에 나와 있는 다윗의 마지막 판결은 언뜻 보아서 납득하기 힘든 판결을 내립니다. 시바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고 므비보셋의 충정이 증명이 되었으면 의로운 재판관이라면 당연히 시바를 벌하고 므비보셋을 당연히 회복 시켜 주어야 하는데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하면서 둘이 반씩 재산을 나누라고 한 것입니다.

 

시바는 벌받아 마땅한 자가 아닙니까? 두 번씩이나 주인의 재산을 자기 맘대로 처리하여 욕심을 부렸던 악한이고 기회 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므비보셋과 시바를 이젠 동등히 반반씩 은혜를 나누라고 하는 것일까?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자이지만 마치 시바처럼 이것을 자기가 낭비를 합니다. 낭비를 한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자기를 위하여 썼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인이 이것을 알고 이제 심판을 하겠다고 합니다. 직분을 빼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청지기가 어떻게 하냐면 자기가 맡은 것을 가지고 빚진 자들을 불러 일일이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기가 그럴 권리가 없는데 이제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분명 시바가 다윗을 도운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므비보셋의 것을 가지고 다윗을 돕습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다윗을 도운 것이지요. 그것도 선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뜻하지 않은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도움이 다윗이 가장 힘이 들때,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시바는 기회주의자고, 악한 심성을 가진 자이고, 굉장히 정치적인 사기꾼이지만 다윗을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 재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됩니다.

 

므비보셋도 은혜가 필요한 자이고 마찬가지로 시바도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설사 잘못된 동기가 있어도 내팽기치지 않습니다.

마치 거짓말장이 야곱처럼 시바는 불의했지만 다윗에게서 은혜를 구했습니다. 은혜를 위해 비록 자격이 없고 권리가 없지만 값을 치룹니다. 선을 행합니다.

 

결국 그토록 원한 자유와 재산을 얻습니다. 온전치 못한 자가 반쪽이지만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럼 므비보셋은 절반을 잃은 것입니까?

므비보셋이 말합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난 밭이 없어도, 종이 없어도 당신만 옆에 있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잃어도 당신만 있으면 난 황송하고 감격한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가장 귀한 지를 깨달은 자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4. 다윗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다윗이 백성을 향하는 첫번째 원칙은 다름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그의 정의와 공의는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통치하고 관리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을 때도 그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므비보셋의 의심나는 행동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없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말은 므비보셋을 향한 첫 마디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어주고 힘이 되어 줄께요."

 

저는 성도들이 저와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어딜 가든 성도들을 상대하는, 관계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화평케 하는 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관관계는 점점 매말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함들고,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을 가립니다.

 

주님은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제발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앞에 나온 므비보셋

 

Posted by 소리벼리

감옥 속의 기쁨의 전도자 (빌립보서 1장 12-21절)

 

새벽예배에 말씀을 나누고 있는 빌립보서.

27권 신약성서 중에서 사도바울의 저작이라고 여겨지는 성경이 13권인데 그중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빌립보는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와 로마로 향하는 유럽의 다리 역할을 하는 지역인데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시작지가 바로 빌립보 지역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탄생에 대한 배경이 소개되는데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복귀해서 1차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2차 여행을 출발하고자 채비를 갖추고 있다.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던 바나바와 결별하고 이제 실라와 디모에와 함께 떠나는데 원래 그들의 목적지는 1 전도여행에서 방문하거나 개척했던 교회들을 방문하여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1.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그런데 출발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그들의 길을 되돌이켰다.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바울과 그 일행에게 있어서 마게도냐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지역. 언어나, 거리, 거기에 대한 정보도 하나도 없었다.

성령의 두 번에 걸친 역사와 환상으로 인해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땅, 준비되지 않은 채로 미지의 땅 마게도냐, 유럽을 향하여 떠난다.

 

7절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0절-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니 곧 바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2. 감옥과 기쁨

빌립보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

그런데 이 글의 쓰는 바울의 배경을 보면 기쁨이라는 주제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의 현상황

로마 감옥에 2차 투옥

1차 때는 단지 감금으로서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 곳으로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며 마음껏 대화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쓸 당시의 상황은 더 악화 됨.

 

사정이 달라져서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감옥 안의 삶 - 비인간적인 대우, 매를 맞음.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

- 그가 한 것은 주를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 그런데 결과는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모습.

 

무엇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는가?

1) 감옥 안에서 사도바울의 깨달음.- 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 12절: 나의 당한 일- 감옥에 갇히게 된 일.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시위대 안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됨.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 그의 기쁨의 기준 - 내 개인적인 사정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예수에게 도움이 되는가, 주의 일에 도움이 되는가?
  • 우리의 기준: 항상 '나'에게 맞추어져 있다. 내가 잘되면 좋은 것이고 내가 고통스러우면 불행한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생각은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요,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가?
  •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절,“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들

  •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선교를 하면서도 다른 교회가 이미 들어 간 지역은 들어가지 않도록 함으로 교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자립하게 했지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절,“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whether from false motives or true)- 거짓 동기로 하든지 혹은 참된 동기로 하든지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벗어버렸을 때 그는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비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게 된 일이...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가 신앙 안에서 이룬 결론. 성령께서 주신 생각...
  • 너희의 간구와: 사도바울의 외로움이 들리는가?

-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가장 높은 학식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학문과 가문이 뛰어난 자가 반역자라는 이름을 무릎쓰고 유대교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를 쫓음. Why? 예수를 만났으니까... 주님의 은혜로 강권적으로...

-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의심한다. 그는 죽일 때까지 그의 사도권, 그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변호하며 다녔어야 했다. 그 자신도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 안식처가 없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의 불행을 기뻐한다.

-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상처받은 이야기, 배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직 가룟 유다 이외에는...왜? 그들도 떳떳치 못하니까... 그들 자신도 다 배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바울은 누구는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으며... 그리스도를 떠났으며..그런 구절이 많다. 서운함도 느낀다. 어디 하나 의지할 때가 없다. 결혼을 안 했으므로 가족도 없다. 그래서 서운함도 느낀다. 외롭다. 성도들의 기도는 그가 세상에서 위안을 받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안다.

-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상처를 안 입었을까?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았다. 배설물로 여겼다. 자기 자신 안에 기댈 수 있는 것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에겐 성도가, 믿음의 동료가 귀했다. 때로 의지했다. 그들의 헌금에도 의지하고 그들의 기도에 의지했다.

 

  •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내가 풀려나게 될 줄을 내가 안다.

-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풀려 났다가 다시 감금되고 지하 감옥에서 사형당함.

- 곧 풀려 나지만 또다시 감금...

- 그러나 영원한 구원에 확신을 가짐.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그의 인생의 기준점, 목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려 함.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다. 내 소망과 기대... 말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인데...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잘 되고 싶어하는 생각... 내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생각...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고자 했는데...난, 나 자신을 살펴보면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서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나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려 하다 보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엔 언제나 부끄럽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NKJV에 이 말씀이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죽는 것은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od News Translation에는 “For what is life? To me, it is Christ. Death, then, will bring more (삶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더 많은 것을 가져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난 내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다. 예수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들이 여전히 있다.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는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쉬고 싶고 즐기고 싶고 때론 망가지고 싶다. 그런데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를 뜻대로 쓰다보면 결국은 그 시간이 일부분의 헌신 마저 집어 삼킨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하신 이유는 그 분이 욕심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군열, 구멍에서부터 큰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 마음은 조그마한 틈에서부터 무너진다.

사도바울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