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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국정 지지도 ( 4:1-11)

 

정치 뉴스나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매주 실시 되는 여론 조사 중에서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 가까운 나라들의 국정 지지도를 여론 조사에서 매주 실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대부분 대통령 당선이 되면 70-80퍼센트의 국정지지도를 받게 되면서 지지했던 사람이던지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초기의 국정 운영에 기대 반 희망 반을 섞어 지지를 보내게 된다.

 

미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나라 대통령의 임기중의 국정 지지도의 특징은 2년차가 되면서부터 급격히 줄어들다가 3년치가 되면 대부분 절반에도 못미치고 최악의 경우 20-30%를 유지하는 경우가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대통령 임기 5년 중에 집권 3년차에 50퍼센트를 넘긴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추락하는 지지도의 이유는 대부분 부정부패와 관련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인 이유, , 자기 들의 삶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정부패야 합당한 이유라 할지라도 경제적인 무능에 대해서 한 정치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해서 호황이라거나 먹고 살만하다는 기사는 본적이 없다.

때로 미국이나 일본의 경제지를 보면 통계적인 수치를 예로 들어 경제가 나아졌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기사를 쓰기도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 신문은 수치가 좋아져도 서민들의 체감 온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실물 경제는 나아지지 않았다고 객관적인 지표마져도 부정하며 박한 평가를 준다.

미국에서도 레이건이나 오바마 같은 대통령들은 임기가 마칠 때까지 지지도가 낮아지지 않았고, 지금 우리나라에게 그렇게 비합리적인 경제보복을 행하는 아베수상 마져도 일본인들은 절반 넘는 지지를 보내는데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역대 어느 누구도 집권 3년차 이후로 50퍼센트 이상의 지지도를 유지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지도자의 평가에 대해서 우리는 박하다. 만족하지 못한다.

 

성경에 보니 성경의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도 물이 없거나, 고기가 먹고 싶다거나, 매일 매일의 삶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백성들로부터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을 들어야 했다.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평가되는 다윗 역시 자기 아들로부터도 배신당하고, 가장 친한 친구요 전략가였던 아헤도벨로부터도 배신당하고 시므온과 같은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아 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 참 어려운 일이다.

 

난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국정 지지도"라고 잡았다.

정치 기사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할까 하는 궁금함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지지를 보내는가?

지지하는가? 아니면 못마땅한가? 하나님의 치리 방법에 대해 불평한 적은 없는가?

 

오늘 나눈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께 불만이 가득했다고 해서 가인이나 가룟유다같은 악인을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요나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리던 여로보암 2세 때 나라를 대표하는 선지자였고 (왕하 14:25), 그 이름의 뜻이 "비둘기, 평화"를 뜻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선지자였다.

 

이스라엘의 번영과 회복을 위해 전심전력하는 요나에게 어느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 명하신다. 니느웨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앗수르의 수도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유하게 된다.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이켜 다시 니느웨로 가서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이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 전하게 된다.

 

그런데 요나의 이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전체가 회개한다. 왕부터 모든 백성, 심지어 가축 때까지 회개를 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며 다시금 분개하는 것이 요나서 4장의 내용이다.

 

1. 요나의 기도

[4:2-3]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2장에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을 회개했던 요나는 다시 회개의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자기가 했던 행동이 옳았었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한계는 무엇인가? 회개하여 다시 내가 살만하게 되자 가 살아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한 때는 주님을 찾으면서 주를 찬양했지만 한순간 주인이 하나님에게서 나로 바뀌어버렸다.

 

2장의 기도의 내용을 봅시다. 22절부터 9절까지는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3)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7)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주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9)

 

2장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요 회복의 기도였다. 주가 행하신 것과 자기를 건지심에 대한 찬양이 나온다.

그런데 4장의 기도는 회개했던 내용까지 돌이킨다.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으며…”

다시스는 어떤 도시인가? 니느웨 못지 않은 죄악과 쾌락의 도시, 환락의 도시이다.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니까 한순간 세상의 죄악의 길로 빠져 버리게 된다.

 

2절이 기도에서는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과 그로 말미암아 경험케 되는 추락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고하며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회개한다. 그런데 다시 요나의 마음 속에 라는 자아가 등장하고 죄악의 생각이 지배하게 되자 자신이 다시스로 간 행동을, 이미 회개한 자신의 행동을 다시금 합리화하고 토를 달고 변명하기 시작한다.

 

·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B)

-> 이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이 아니다. 좀 비꼬는 뉘앙스이다. 진심의 고백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지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사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

 

왜 비꼬느냐? 하나님이 심판 한다고 했는데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셨다. 자기는 심판을 선포했는데 니느웨는 심판당하지 않고 회복했다. 하나님, 당신은 자신의 말을 어겼고, 당신 떄문에 자신의 예언까지 틀렸다는 것이다.

첫째는 니느웨가 용서받은 것에 대한 분개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스스로 어겼고, 당신 때문에 내 말도 거짓이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 선악과

-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 사탄 : 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아담과 하와 안죽네요? 먹어도 안죽네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하나님이 하신 반응 :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심.

하나님의 마음: 너 나에게서 멀어져가면 고통이 온다. 고난 당한다.

인간의 마음 : 그래도 안죽어요. 혼자 살래요.

탕자: 내 분깃을 주세요. (폐륜) -> 아들을 보내놓고 기다리시는 아버지.

다 써버리고 나서야 돌아오는 아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 돌이켜라. 회개해라.

요나의 반응: 왜 심판 안하세요? 왜 용서하세요?

 

·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자신의 한계의 극치이다. 내 뜻을 죽어도 굴복하지 못하겠다. 죽어도 저 사람이 복받는거 못보겠다. 죽어도 하나님의 일에 동의할 수 없다.

얼마나 자아로 꽉 차있는 사람인가?

신앙 안에서 나를 죽여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표현이다. 차라리 이런 저런 꼴 안보고 죽겠다는 표현이다. 감정이 한 번 이렇게 폭발하면 이성적인 모든 사고도 중지된다. 이것은 다분히 한국적인 표현이다.

죽겠네..차라리 죽여라...죽어도 안해..” 자신의 고집의 극한 표현이다.

 

· (4: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는 성내시지만 하나님은 얘기하기 원하신다.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너는 구별된 선지자로서 내 대변자인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대변인은 글을 써준대로 읽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마음을 잘 알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잘 납득시킬 수 있는 자가 대변인이다. 한마디로 마음이 통하는 자가 대변자이다.

선지자 - “나비” - 대변자

 

이러한 질문에 요나는 대답이 없다.

6. (4:5)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침묵하고 응답하지 않는다. 죄를 짓자 아담처럼 숨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죄를 지면 더 이상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한다. 한계가 꺾여지지 않으면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 5절 앞에 그러나만 붙이면 13절의 말씀과 똑같은 의미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응답 하면서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성에서 나가서 초막을 짓는다. 초막은 또다른 다시스의 공간이다.

 

초막은 무엇인가?

이것은 철저히 자기만을 위한 공간이다. 선지자가 일어나 외치지 않으니까 이제 내 안일과 평안과 안위를 위해서 일하게 된다.

3절에서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불손하지만 담대하게 대항했던 요나는 하나님께서 행동을 돌아보도록 질문하시자 침묵하고 죽지도 않고 이젠 자신을 위해서만 산다.

 

· (4:6)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대한 요나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물론 더운데 박넝쿨이 생겼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는 한마디도 감사하지 않고 그저 그 박넝쿨로 인해서만 기뻐합니다. 박넝쿨을 주신 하나님때문이 아니라 오직 박넝쿨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1장에도 4장에도 차라리 내가 죽겠습니다. 했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갇히니까 회개하고 차라리 죽고 말지 했던 요나가 박넝쿨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 또 그 박넝쿨을 거두어가시니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

 

7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벌레는 미천하고 작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고 찬양하며 우리를 낮출 때에는 벌레만도 못한 나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대고 있던 복인 박넝쿨을 그런 미천한 벌레가 취해갑니다. 그럼 요나가 기대고 있는 복인 박넝쿨은 무엇입니까? 미천한 벌레가 취해 갈 수 있는 벌레보다 못한 허무한 것입니다. 있다가도 하루아침에 없어질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기대하고 의지하고 있는 복의 실체입니다. 하나님 외에 우리가 의지하고 붙잡는 모든 것이 마치 이 박넝쿨 과 같다. 하루 아침에 없어질 허무한 것이 세상의 복이다.

박넝쿨이 사라지자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는데 뜨거운 동풍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벌하시기 위해 준비했다기 보다는 중동지역에서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현상이다. 그늘이 없으면 당연히 생기는 중동의 뜨거운 바람이다.

 

박넝쿨이 있을 때에는 햇볕도 가리고 뜨거운 바람도 가리지만 은혜를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는 자연상태는 무엇인가? 사탄이 지배하는 자연상태가 바로 지옥 아닌가? 1장과 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대로 내어버려두사 라고 말씀하신다. 그대로 내어버려 두시는 결과는 괴로움이고 눈물이고 죽음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면 우리가 심판 당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 그대로가 우리에게는 고통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한 시도 살 수 없다.

은혜 밖의 세계는 벌레가 있는 세계이고 동풍이 불어오는 세계이다.

 

내가 만족스런 신앙생활이 아닐찌라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살아가는 이유는, 내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고 붙어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은 핵심을 찌르는 마음이다.

11

너랑 상관없는 박넝쿨도 아끼거늘 니느웨 사람도 내 자녀들이란다. ”

 

사람의 좁은 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넓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들이 죄를 많이 지었어도, 날 떠나고 우상을 숭배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라도 돌아와 내 안에 거하여 복을 받는 것이다. 재산을 다 가지고 나간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은 한결같이 어서 들어와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끝난다. 아마도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순종치 않았을까?

왜 요나서는 결론 맺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만을 남기고 끝이 나는가?

그 끝멪음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 하나하나가 다 요나다. 우리는 다 요나같이 불순종하며 요나같이 성내고 요나같이 좁은 마음을 가지며 하나님과 수평을 달리는 과정을 지났거나 혹은 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 사람들이 회개한 요나가 되어서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들고 전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고 계신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해서 극단의 길을 달려갈 때가 많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물어오시길 바라신다. 해답을 구하기를 원하신다. 왜 묻지 못하고 극단의 길을 가는가?

절대로 감정적으로 이끌리지 말라. 감정은 항상 내 중심적이고 욕망에 이끌린다. 나는 잘하니까 문제를 다른데서 찾으라고 한다.

 

훈련을 통해서 문제에 감정을 싣지 않고 항상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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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8.06 01:37

    샬롬^^
    감사합니다. 장문의 은혜로운 말씀 잘 숙고하고
    갑니다.
    요나와같은 저의 마음을 항상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운날씨에 건강 잘 챙기소서.ㅎ^^

염려를 이기는 신앙 (빌립보서 4:4-7)

 

기우: 기인지우(杞人之憂)라고도 하며 쓸데없는 걱정

 

“올려다 보면 장엄하게 돌고 있는 저 하늘, 그리고 우리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이 땅도 언젠가는 무너지고 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이었습니다. 기우(杞憂)는 그리하여 <쓸데없는 근심>, <괜한 걱정>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격언 으로는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걱정까지 싸짊어지 듯하는 것을 주변에서 안쓰럽게 생각할 때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사랑해라!

기뻐해라!

  • 우리의 상식으로 사랑이라든가 기쁨이라든가는 감정의 문제이다. 감정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지성으로, 의지적으로 잘 콘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은 자꾸만 우리안에서 자연스러웁게 나오는 감정의 문제를 흘러내려가는대로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훈련하라 하신다.

왜? 모든 죄악이, 신앙의 슬럼프가, 관계의 어긋남이, 바로 감정의 조절 실패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 아담과 하와를 유혹->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먹지 말라 하더냐? 그 말을 들으며 사냐? 왜 그렇게 사냐? 비아냥거리는 소리...

죄악의 결과: 두려워하는 마음, 죄책감-> 하나님의 낯을 피함.

가인: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라" (창 4:7)

모세가 실수한 것도 백성들 앞에서 분을 낸 것.

다윗이 실수한 것도 밧세바를 보고 혹하여 사리 판단 못하고 불길같은 정욕에 휩싸인 것->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 감정이라는 것- 외부작용에 대한 반응이다. 자극하는 것이 있으면 좋건 나쁘건 반응한다. 그 때 그 때 반응한다.

안좋은 일 있다가도 웃기는 프로그램 보다가 깔깔거리며 웃는 것. 웃다가도 갑자기 우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감정은 외부 작용에 대한 온도계이다.

  •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각도에서 보면 얼마나 비상식적인가?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아니 사람이 어떻게 언제나 오래참을 수 있나?

 

이찬수 목사님) 보호하심: 온도계와 같은 신앙생활 하지 말고 온도조절계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라.

온도조절계) 바깥 온도에 따라서 실내온도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바깥 온도가 너무 뜨거우면 실내온도를 내려서 맞추고 너무 추우면 올려서 맞추고...

무슨 소리인가? 외부작용이 강하게 나를 힘들게 하면 속사람을 더욱 뜨겁게 하여 평안을 유지하고 외부작용이 너무 나를 들뜨고 교만하게 하면 속사람을 가라앉혀서 겸손을 유지하고...

 

빌립보서 4장의 가장 기초석

주 안에- 신앙안에 요동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 주 안에...

 

주 안에 있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힘쓰고 애써야 한다. 내 몸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왜?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환경에 짖눌리고, 파도에 휩쓸리고, 감정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러분이 선하고 친절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행동하십시오. 주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갑자기 이 말씀이 왜 들어와있을까?

 

힘들면 기도한다. 염려가 있으면 기도한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서면, 다시 집에오고, 다시 직장에 오면 그 은혜가 유지가 안된다. 그래서 현실과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그 갈등을 누구에게 표출하는가? 주위의 사람들에게 표출한다.

자식에게 화풀이 하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기도할 때, 예배 드릴 때 참고 있었던 화풀이를 한다. 그 순간 은혜가 달아나고 다시 염려에 사로 잡히게 된다.

 

  • 기뻐하라 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일단 기도했으면, 평강이 왔으면 그대로 믿고 응답받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선하게, 친절하게, 회복된 모습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그게 참 믿음이라는 것이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의 염려는 영어로는 "anxiety"로 번역했습니다. "anxiety"의 뜻 중에는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을 염려하는 것', '미래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빌립보 교인들의 상황은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회 외부적으로는 이제 로마로부터의 핍박이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복음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의 영적인 리더인 바울도 지금 감옥 속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교회가 분열되어 어지럽게 만듭니다.

도대체 편할 날이 없는 때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로 부터 편지가 날라왔는데 그 편지 속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낙천적이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인가? 상황을 무시하라는 것인가? 어떻게 염려하지 말고 살라는 것일까요?

어떻게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까?

 

1.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 주 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6a)

염려를 중단하라는 명령입니다. ‘염려하며 사는 것이 싫으냐?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거나 초조해합니다. 조그마한 문제도 자꾸 묵상하고 생각하고 확대해석하면 어느새 문제가 눈덩이같이 커져서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니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염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하십시오. 그것이 염려를 기쁨으로 만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2. 염려대신 기도하라.

…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b)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문제와 염려의 자료를 기도제목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그대로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말 ‘문제화’시키지 말고, 오히려 ‘기도 제목화’시켜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고하라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놓고도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하거나’, 아니면 ‘기도하거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 대신 염려합니다. 문제를 염려로 바꿉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 대신 기도합니다. 염려를 기도 제목으로 바꿉니다. 내가 염려하는지, 아니면 기도하는지를 보면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우리의 인생길에 염려해야 할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염려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 때에 기도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기도를 하더라도 ‘모든 일에’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즉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기도제목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큰 문제만 가지고 나오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일들도 주님께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다만’이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다만’은 ‘오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염려를 기쁨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입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염려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3.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보십시오. 바울은 기도하고 나면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병이 고쳐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그제야 행복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행복과 기쁨을 보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문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강을 먼저 맛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정한 섭리에 따라서 언젠가 틀림없이 해결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허락해 주실 겁니다. 그때가 언제가 되든지,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평강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더 이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염려하는데 시간 쓰지 말고 그 시간에 기도하라.

 

삼상 1:12-18절 함께 읽기

[삼상 1:17-18]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염려를 이기는 신앙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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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29 22:33

    샬롬^^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중심으로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므비보셋의 본명은 역대상 9장 40절에 의하면 '므룻바알'로서 그 의미는 '바알과 대적하는 용사'라는 의미입니다.

초창기의 사울과 그리고 인생 전반에 있어서 요나단이 용사였던 것처럼 므룻바알도 그런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는 다름아닌 바알, 마귀와 싸우는 영적인 용사로서의 소망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므비보셋의 인생은 성경에서 크게 세 부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므비보셋이 다섯 살 때에 궁에 있던 그에게 끔찍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과 자신의 아버지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 군대에게 크게 패하여 전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사울의 신하들이나 므비보셋 입장에서는 당장 닥친 큰 두려움은 전쟁에서 승리한 블레셋 군이 들이닥쳐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과 또 하나의 두려움은 그동안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치던 다윗이 이 때에 들이닥쳐 자신들을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두가지 두려움이 함께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궁에 남아있던 모든 신하와 하인들은 그 큰 두려움 속에서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므비보셋을 돌보던 유모는 므비보셋을 업고 급히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아이의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사무엘하 4장에 보면 양 발목이 다 부러져 피난터에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평생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어 로드발이라는 마을에 숨어 살아야 했다고 증거합니다 .

로드발이라는 마을의 의미는 "목장이 없는 황무지"라는 의미입니다.

 

전사였던 므룻바알의 이름이 므비보셋 - "부끄러움"이라는 바꾸어진 것도 이 때일 것입니다.

그는 왕자에서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고아로, 그리고 불구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은둔하여 살아가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절뚝발이- 예전에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여부스족이 이스라엘을 비아냥 거리며 맹인과 절뚝발이로 표현했듯이- 는 홀로 설 수 없는 죄인의 실존적 상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이 후에 므비보셋의 삶이 어떠했을지 성경은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통해 그가 정상적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그야말로 영적, 육적 불구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므비보셋은 태어날 때에는 왕가의 장손으로 왕의 혈통을 지니고, 바알과 맞서는 장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왕궁에서의 기억은 사라지고,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죽고 자기는 다리가 불구가 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누군가 너의 할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었다 해도 그는 사울이 어떤 자였는지, 자기가 왕의 가문이었다는 것을 누리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오히려 불구자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 어찌보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가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고 오직 세상에서 불구가 되어 하루 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므비보셋과도 같은 삶이 아닐까요?
  •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결국 사울이 죽고 요나단이 죽은 이유도, 사울이 죽자 사울의 자리를 대신하여 차지한 것도 다윗이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적대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탓할 수 밖에 없는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울왕이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다윗이 왕이 되었으니 자기는 패족한 왕족의 자녀로 현 왕의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사울의 손자라는 것마져 숨기고 세상에 나가서 떳떳하지 못하게 숨어사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2. 두 번째 등장은 사무엘하 9장에 등장합니다.

  •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고 하나님의 법궤를 들여와 말씀 중심으로 나라를 통치하고 블레셋과 모압과 암몬 등 이방민족들을 몰아내면서 국경을 정비하며 또한 군대장관 뿐만 아니라 제사장과 서기관, 행정관들을 세워서 행정적인 정비를 다한 후에 이제 사울의 집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힘들 때에 도와주며 네가 왕이 되면 나와 내 집을 좀 지켜다오하는 약속을 기억하고 사울의 집에 남은 자를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부른 것이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입니다.

 

  • 로드발에 은둔하여 살고 있는 므비보셋에게 어느날 다윗의 신하들이 찾아와서 왕이 당신을 찾는다고 전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며 절망했을 것입니다. 이 때까지 숨어서, 은둔하면서 살았는데 드디어 나를 찾아냈구나 하면서 자포자기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 다윗의 궁으로 다윗의 신하들을 따라 나섭니다.

  • 다윗 앞에 고개를 떨고 서 있는 므비보셋의 장면에서 우리는 어쩌면 사형장 앞에서의 사형수 같은 한 인간의 초라함과 연약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절하고 있는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첫 마디는 누구도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은총을 베풀리라.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삼하 9:7)

 

죽을 줄 알았던 므비보셋에게 다가온 첫 마디는 "두려워 말라"였습니다.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기드온에게, 이사야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두려운 상황 속에서 떨고 있을 때에, 가장 최악의 상황 앞에 놓여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들려준 가장 첫 마디는 "두려워말라.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우리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소망의 말 한마디는 "두려워 말라"라는 그 분의 음성입니다.

늘 최악의 상황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던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다윗의 말, "이제 마음 푹 놓게, 염려하지 말게. 내가 자네에게 모든 것을 줄 것일세."

 

우리는 벌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랑 받으러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항상 두려움 가운데 삽니다. 심지어 매일 같이 일하는 직장에서도, 심지어 평생을 같이 함께 살고 있는 가정에서도

혹시 저 사람이 날 미워하진 않을까? 날 버리지는 않을까?

왜 세상은 좋아진다고 하는데

우울증과 불면증은 더욱 극심해지고 먹는 약의 종류는 더욱 많아져만 갑니까?

그 근본 중심은 두려움입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 그 궁극적 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도와줄께. 내가 책임질께.. 내 앞에서 편안해라!

내 두려운 인생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성육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요, 진리요,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므비보셋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다윗이 어떤 은혜를 줍니까?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지니라..." (삼하 9:7)

 

자기가 기억도 나지 않고, 기억 속에서는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회복의 역사를 약속해 줄 뿐만 아니라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을 만나 하루 아침에 개같은 내인생에서 왕의 자녀로서의 꿈같은 은혜를 얻게 됩니다.

 

  • 이에 반해 시바는 또 전혀 다른 인생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그는 아들이 열다섯이고 종이 스무 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재산과 땅도 굉장히 많았던 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울의 종이었지만 사울이 죽고 그 집안이 다 패족하게 되자 수완을 발휘해서 그것을 차지 한 것입니다.

자기 권리가 아닌 것인데 자기 것인양 맘껏 누리며 살았던 것이지요. 사울의 손자였던 므비보셋이 "자신을 개같은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길 때" 사울의 신하였던 시바는 사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

 

그런데 어느날 다윗이라는 의로운 재판관, 왕이 나타나서 자기가 무시하고 있던 패족의 자손 불구자 므비보셋을 불러 오게 합니다. 그리고 뭐라 말합니까?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말합니다.

사울이 없으니까 이제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맘껏 누리고 살았는데 하루 아침에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인생은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다 주인이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

내가 가진 것, 내 소유, 내 자녀, 나 자신의 모든 것 까지도 결국 하나님꼐서 맡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죽어서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움켜 쥐기에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훅 불면 날라갈 것들을 잡고 의지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윗이 명령하자 시바는 한 마디 변명도 못합니다.

"종에게 명령한데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항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앞에 설 때에 불의를 행한 자들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3. 16장 1-4절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배반을 하여 다윗이 급하게 예루살렘을 빠져 나와 피난길에 오르는데 시바가 다시 등장합니다. 므비보셋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시바의 입을 통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심정이 참담하여 피곤한 피난길을 오르는데 시바가 나귀 두 마리에 떡 이백개, 건포도 백송이, 과일 백개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다윗에게 바칩니다.

 

다윗은 시바의 호의를 보며 "네가 무슨 의도로 가지고 왔느냐?" 묻습니다. 므비보셋이 보이질 않고 시바가 가지고 온 것이 의아한 것입니다. 사울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의도를 물은 것입니다.

의도를 물었는데 시바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피곤한 자들이 마시게 하십시오."

한 마디로 "그냥 묻지 말고 먹고 가지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재차 묻습니다. "아니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이 어디 있느냐고"

그러니까 시바가 "므비보셋이 다윗이 도망 가니까 이제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고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압살롬이 반역이 일어났는데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 하며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이제 다 네것이다"하며 모든 재산을 다시 시바가 갖도록 명을 내립니다.

 

3. 19장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19장에서 다시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삼하 19:24-30]

(삼하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삼하 19: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삼하 19: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삼하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삼하 19: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삼하 19: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삼하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구절은 굉장히 신중하게 묵상해야 할 구절입니다.

다윗의 귀환 때에 "왜 나와 함께 가지아니하였느냐" 하는 추궁에 므비보셋은 나는 가려고 했는데 시바가 나를 속이고 나를 내버려두고 혼자 가면서 나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앞에서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도 나를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나의 억울함을 말하리오까?합니다.

 

분명 시바와 므비보셋,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당연히 시바가 므비보셋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주인과 왕에게 범죄하고 누명을 씌운 시바를 심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하듯이 므비보셋을 복권시키는 것이 올바른 퍈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의 반응은 시바와 밭을 나누게 하면서 그 둘 사이를 판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하고 묻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너를 내 아들로서 대하는데 너는 왜 밤낮 네 과거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신세타령을 하고 있느냐?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 그동안 므비보셋은 다윗으로부터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받고 다윗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으며 사랑받는 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자랐던 므비보셋은 그러면 과거의 상처와 불안과 부끄러움에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그가 지녀왔던 다윗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는 피해의식은 다윗의 사랑으로 완전히 회복되었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다윗은 언젠가 나를 죽일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것이 나에게 잘 해 주는 이유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려 하는 쇼일 뿐이고 하는 등 다윗의 진정성을 의심하진 않았을까?

그는 과연 다윗에게 진정 고마워하고 다윗의 호의를 기뻐했을까?

 

마음이 병든 사람은 사랑을 받아도, 다윗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도, 십자가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도 쉽사리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을 주어도, 과거의 상처는 쉽게 가라앉지 않습니다.

평생을 목회를 하는 것을 곁에서 바라보고, 또 지금 제 스스로가 목회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 사랑받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중심을 오해하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를 감시하다가 잘못하면 벌 주시는 분으로, 늘 나에게 부담 주는 분으로 하나님을, 교회를, 성도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지지 않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을 씻기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제자,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면서도 예수님을 배반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도 예수님도 한없는 사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상처를 노출하는 사람들을 향한 처방은 "그저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 19장에 나와 있는 다윗의 마지막 판결은 언뜻 보아서 납득하기 힘든 판결을 내립니다. 시바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고 므비보셋의 충정이 증명이 되었으면 의로운 재판관이라면 당연히 시바를 벌하고 므비보셋을 당연히 회복 시켜 주어야 하는데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하면서 둘이 반씩 재산을 나누라고 한 것입니다.

 

시바는 벌받아 마땅한 자가 아닙니까? 두 번씩이나 주인의 재산을 자기 맘대로 처리하여 욕심을 부렸던 악한이고 기회 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므비보셋과 시바를 이젠 동등히 반반씩 은혜를 나누라고 하는 것일까?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은 자이지만 마치 시바처럼 이것을 자기가 낭비를 합니다. 낭비를 한다는 것은 주인의 것을 자기를 위하여 썼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인이 이것을 알고 이제 심판을 하겠다고 합니다. 직분을 빼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청지기가 어떻게 하냐면 자기가 맡은 것을 가지고 빚진 자들을 불러 일일이 빚을 탕감해 줍니다.

자기가 그럴 권리가 없는데 이제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해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분명 시바가 다윗을 도운 것은 자기 것이 아닌 므비보셋의 것을 가지고 다윗을 돕습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다윗을 도운 것이지요. 그것도 선한 마음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뜻하지 않은 선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도움이 다윗이 가장 힘이 들때, 도움이 필요할 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게 됩니다.

시바는 기회주의자고, 악한 심성을 가진 자이고, 굉장히 정치적인 사기꾼이지만 다윗을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결국 주인 재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됩니다.

 

므비보셋도 은혜가 필요한 자이고 마찬가지로 시바도 은혜가 필요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설사 잘못된 동기가 있어도 내팽기치지 않습니다.

마치 거짓말장이 야곱처럼 시바는 불의했지만 다윗에게서 은혜를 구했습니다. 은혜를 위해 비록 자격이 없고 권리가 없지만 값을 치룹니다. 선을 행합니다.

 

결국 그토록 원한 자유와 재산을 얻습니다. 온전치 못한 자가 반쪽이지만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그럼 므비보셋은 절반을 잃은 것입니까?

므비보셋이 말합니다.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난 밭이 없어도, 종이 없어도 당신만 옆에 있으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잃어도 당신만 있으면 난 황송하고 감격한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 무엇이 가장 귀한 지를 깨달은 자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4. 다윗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다윗이 백성을 향하는 첫번째 원칙은 다름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삼하 8:15)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려 다윗이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할새

 

그의 정의와 공의는 사랑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는 통치하고 관리하는 왕이 아니라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죽을 때도 그는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므비보셋의 의심나는 행동에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없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말은 므비보셋을 향한 첫 마디와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어주고 힘이 되어 줄께요."

 

저는 성도들이 저와 함께 있을 때에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어딜 가든 성도들을 상대하는, 관계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런 화평케 하는 자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인관관계는 점점 매말라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이면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함들고, 얼굴을 보면서도 마음을 가립니다.

 

주님은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제발 주님의 진실한 사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 앞에 나온 므비보셋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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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26 00:48

    감사합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온전한 평안이 없는 제자신이
    므비보셋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T.T

감옥 속의 기쁨의 전도자 (빌립보서 1장 12-21절)

 

새벽예배에 말씀을 나누고 있는 빌립보서.

27권 신약성서 중에서 사도바울의 저작이라고 여겨지는 성경이 13권인데 그중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 바로 빌립보서

 

빌립보는 이스라엘이 속한 아시아와 로마로 향하는 유럽의 다리 역할을 하는 지역인데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시작지가 바로 빌립보 지역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 교회의 탄생에 대한 배경이 소개되는데 바울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복귀해서 1차 전도여행에 대한 보고를 마치고 2차 여행을 출발하고자 채비를 갖추고 있다.

1차 전도여행을 함께 했던 바나바와 결별하고 이제 실라와 디모에와 함께 떠나는데 원래 그들의 목적지는 1 전도여행에서 방문하거나 개척했던 교회들을 방문하여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1. 무엇을 위해 힘쓰는가?

 

그런데 출발하고자 할 때 성령께서 그들의 길을 되돌이켰다.

 

행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 바울과 그 일행에게 있어서 마게도냐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지역. 언어나, 거리, 거기에 대한 정보도 하나도 없었다.

성령의 두 번에 걸친 역사와 환상으로 인해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땅, 준비되지 않은 채로 미지의 땅 마게도냐, 유럽을 향하여 떠난다.

 

7절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0절-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니 곧 바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2. 감옥과 기쁨

빌립보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

그런데 이 글의 쓰는 바울의 배경을 보면 기쁨이라는 주제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의 현상황

로마 감옥에 2차 투옥

1차 때는 단지 감금으로서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지만 그 곳으로 오는 사람들을 영접하며 마음껏 대화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빌립보서를 쓸 당시의 상황은 더 악화 됨.

 

사정이 달라져서 악명높은 시위대 감옥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그는 틈틈히 복음도 전하고 만날 사람도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완전히 자유가 봉쇄당하는 본격적인 감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감옥 안의 삶 - 비인간적인 대우, 매를 맞음.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

- 그가 한 것은 주를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것. 그런데 결과는 감옥 속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의 모습.

 

무엇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는가?

1) 감옥 안에서 사도바울의 깨달음.- 내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

- 12절: 나의 당한 일- 감옥에 갇히게 된 일.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시위대 안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게 됨.

그가 시위대 안에 있음으로 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몇 명의 사람들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이사의 집 식구 중에서도 몇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 그의 기쁨의 기준 - 내 개인적인 사정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예수에게 도움이 되는가, 주의 일에 도움이 되는가?
  • 우리의 기준: 항상 '나'에게 맞추어져 있다. 내가 잘되면 좋은 것이고 내가 고통스러우면 불행한 것이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하는 생각은 내가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도 영광이요,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가?
  • 다른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지속적으로 말씀으로 양육하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시위대 감옥에 들어가면서 걱정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서 너무 낙심한 나머지 신앙을 버리는 자들은 없을까 혹은 제대로 채움을 받지 못해서 거짓 교사를 따라가는 자들은 없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그의 염려와는 정반대였습니다.

 

14절,“형제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분명히 그들 중에는 그의 문제로 신앙에 흔들리는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를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 더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없이 하나님을 담대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3.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들

  • 15-17절)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 로마 안에는 복음을 위하여 열심을 내는데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우리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은 그 동안 우리를 힘들게 하던 자가 제거되었다 이때야 말로 우리들의 세력을 넓힐 때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지금까지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 세력을 키우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선교를 하면서도 다른 교회가 이미 들어 간 지역은 들어가지 않도록 함으로 교회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믿는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게 해서 스스로 자립하게 했지 자기 세력을 확보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어떤 복음 전하는 자와 분명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것이 바울을 굉장히 괴롭게 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17절에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 생각하여’라고 말한 것은 실제로 그들의 활동이 바울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렸으며 그의 원칙을 깨트려서 상당히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18절,“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겉치례로 하나 참으로 하나 (whether from false motives or true)- 거짓 동기로 하든지 혹은 참된 동기로 하든지

비록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다 옳지는 않고 또 어떤 부분은 사실 욕심으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까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벗어버렸을 때 그는 감옥 안에도 하나님의 찬란한 빛이 비취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 (빌 1: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이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게 된 일이...
  •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그가 신앙 안에서 이룬 결론. 성령께서 주신 생각...
  • 너희의 간구와: 사도바울의 외로움이 들리는가?

-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가장 높은 학식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학문과 가문이 뛰어난 자가 반역자라는 이름을 무릎쓰고 유대교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를 쫓음. Why? 예수를 만났으니까... 주님의 은혜로 강권적으로...

-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의심한다. 그는 죽일 때까지 그의 사도권, 그가 참 그리스도인임을 변호하며 다녔어야 했다. 그 자신도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워했다. 안식처가 없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나 그의 불행을 기뻐한다.

-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상처받은 이야기, 배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직 가룟 유다 이외에는...왜? 그들도 떳떳치 못하니까... 그들 자신도 다 배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바울은 누구는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갔으며... 그리스도를 떠났으며..그런 구절이 많다. 서운함도 느낀다. 어디 하나 의지할 때가 없다. 결혼을 안 했으므로 가족도 없다. 그래서 서운함도 느낀다. 외롭다. 성도들의 기도는 그가 세상에서 위안을 받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과 능력이 있음을 안다.

-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믿음이 좋으니까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에 상처를 안 입었을까? 아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순간 그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자기의 것을 다 내려놓았다. 배설물로 여겼다. 자기 자신 안에 기댈 수 있는 것들을 버렸다. 그래서 그에겐 성도가, 믿음의 동료가 귀했다. 때로 의지했다. 그들의 헌금에도 의지하고 그들의 기도에 의지했다.

 

  •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내가 풀려나게 될 줄을 내가 안다.

-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풀려 났다가 다시 감금되고 지하 감옥에서 사형당함.

- 곧 풀려 나지만 또다시 감금...

- 그러나 영원한 구원에 확신을 가짐.

 

(빌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그의 인생의 기준점, 목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되려 함. 그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 이 말씀을 보는데 너무 부끄럽다. 내 소망과 기대... 말로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인데...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가 잘 되고 싶어하는 생각... 내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생각...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게 살고자 했는데...난, 나 자신을 살펴보면 너무 부끄러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아직도 내어 드리지 못한 부분이 너무 많다. 내가 서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살고자 하는 생각이 너무 많다. 나 스스로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으려 하다 보니까... 주님 앞에 설 때엔 언제나 부끄럽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라고 했습니다. NKJV에 이 말씀이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죽는 것은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od News Translation에는 “For what is life? To me, it is Christ. Death, then, will bring more (삶이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더 많은 것을 가져 올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난 내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다. 예수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들이 여전히 있다.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는 아무런 간섭받지 않고 쉬고 싶고 즐기고 싶고 때론 망가지고 싶다. 그런데 삶의 경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일부분만 헌신하고 나머지를 뜻대로 쓰다보면 결국은 그 시간이 일부분의 헌신 마저 집어 삼킨 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말씀 하신 이유는 그 분이 욕심장이라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조금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군열, 구멍에서부터 큰 댐이 무너지듯이 우리 마음은 조그마한 틈에서부터 무너진다.

사도바울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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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7.10 03:24

    부끄럽습니다.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