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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안의 무덤 (요한복음 19장 38-42)

 

종려주일- 예수의 왕의 입성

이스라엘 전체가 떠들썩 할 정도로 온 무리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왜 주님을 따랐습니까?

자기 유익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한 자리 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얻을 것 같기에 주님을 따랐습니다.

 

복음서는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렇게 이기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의 십자가 현장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주를 떠나고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던 무리들이 자기들의 뜻에 어긋나니까 십자가에 못박으로서 외치는 군중으로 돌변

 

그런데 이 때에 주님과 함께 했던 자가 있었다.

 

아리마대 요셉 -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던 자 - 요한복음 3장에 밤 중에 예수를 찾았던 자 - 니고데모처럼....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시체를 요구하는 자 -

 

누가복음 23장 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마가복음 15장 43절)

 

마가복음의 기사 - 당돌했다. -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 - 에스더서에 보면 왕비라 할 지라도 왕에게 요구하는 것 - 목숨을 건 행동

 

그리고 행한 것 -자신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냄

마태복음 27장 -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

 

당시의 무덤 - 개인의 묘라기 보다는 가문, 가족의 묘

예수 - 공식적으로는 사형수

 

  • 요셉의 행동- 목숨을 담보로 한 당돌한 행동

- 가문의 명예를 실추 할 수 있는...

- 존경받는 사회적 지위를 다 앓을 수 있는 행동

그런데 예수가 살아 있을 당시 - 유대인이 두려워 제자였음을 숨겼던 그가 죽은 시체가 된 예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의 시체를 장사 지냄. 자신의 무덤을 내어 줌.

 

  • 외경 - 빌라도 행전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후에 예수의 시체를 빼 돌린 범인으로 지목되어 감옥에서 40년형을 선고

감옥 속에서 예수가 나타나 예수의 피가 담긴 성배를 주고 가서 그 성배의 힘으로 감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언급

초대교회 유명한 교부였던 터툴리안은 감옥에서 풀려난 아리마대 요셉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고 전하고 있고 영국은 실재로 아리마데 요셉을 영국 기독교의 창시자로 정하고 있다.

그가 지니고 있던 성배를 찾아 기사들이 모험하는 내용이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인 그 유명한 아서왕 이야기.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에나 존스도 그 성배를 찾아 떠나는 여행 - 그 영화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요한복음 19장 41절)

At the place where Jesus was crucified, there was a garden, in the garden a new tomb, in which no one had ever been laid.

 

눈에 띄는 대목 - 동산이 있고 그 동산에는 무덤이 있는데 사람이 놓여 있지 않은 무덤이다.

 

  • 성경에는 동산이리는 말이 여러번 나오는데 그 동산은 히브리어로 "칸"이라고 부르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칸이라는 말을 낙원 (paradise)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 고대 교부 가운데 시릴(Cyril)이라는 사람은 에덴 동산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기도 한다. 철학자 파스칼도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고 하였다.

 

에덴동산은 그 뜻이 "즐거움, 기쁨"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벽한 작품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복이다.

그런데 인간의 죄는 그 동산을 파괴하였다. 아무도 거할 수 없는 동산이 되어 버리게 했다. 최상의 장소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회악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멸망의 동산이 되었고. 추방의 동산이 되어 버렸고 죄의 발원지가 되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동산을 회복하신다.

요한복음 18:1에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고 한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히신 곳이다. 요한복음 19:41에는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말한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바로 예수가 십자가를 지신 겟세마네 동신에 있었다.

 

겟세마네라는 의미는 "기름을 짜다"라는 의미이다.

감람 열매의 기름을 짠 곳이므로 이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몸의 진액을 짜면서 기도하셨다.

구원은 기름을 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다.

 

왜 에덴 동산에 무덤이 있었는가? 사람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정녕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무덤에 사람을 죽게 하지 않고 잠시 동안 떠나있게 한 후에 그 무덤의 주인으로 예수를 눕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금 에덴을, 기쁨을, 구원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죄악은 하나님 주신 최상의 것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파괴의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십자가는 그 무덤을 다시금 빈 무덤 되게 하신다. 광야를 에덴 되게 하신다. 죄악으로 무너진 모든 것을 다시 에덴으로, 축복으로, 구원으로 만들어 가신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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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30 01:08

    감사합니다 목사님^^♡
    미국 날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일교차가 많이 나네요.ㅎ
    감기조심하세요.ㅎ

왕의 눈물 (눅 19:37-44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시고 비밀에 붙이셨던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예수께서 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로 들어올 적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종려나무 - 히브리어로 (Tamar) - 다말

창 38장 - 야곱의 삼남이었던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고 살았는데 첫 째 아들의 아내, 유다의 맏며느리가 바로 다말. 그런데 첫째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여 죽고, 둘째가 당시의 법으로 형수를 취하여 자녀를 낳아야 했지만 대를 잇는 일에 불성실하여 역시 죽고 셋째에게 다시 보내졌으나 그 때 유다의 가나안 여인 아내마저 죽자자 집안의 우환의 원인이라 하여 다말마저 친정으로 보내짐,.

그런데 열매없고 불행의 상징이었던 그 다말이 유다에 의해서 다시금 자식을 낳아 유다지파, 다윗의 조상,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대를 잇게 됨.

 

마라의 쓴 물과 엘림사건 - ( 출 15장)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쓴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되고 안식과 평안이 임한 상징 - 12, 70- 교회를 통해 펼쳐지는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시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구약의 후기와 예수님 당시에 이 호산나 라는 말은 메시야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과 결부되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로서 여겨졌습니다.

 

  1.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2.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 열매없는 다말이 자녀를 낳아 다윗의 조상이 되듯, 마라처럼 쓴 물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듯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을 영접하는 그들은 다름아닌 다말과 마라의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의 부르짖음이었다.

 

37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했는가? 버젓이 헤롯왕이 다스리고 있는데 백성들이 왕의 오신것 처럼 떠들썩 하니 걱정스러웠던 게다. 헤롯에 기대어 사는 자들은 불편했던 게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외침이 정당하다고 한다. 그들이 외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 한다. 그 분은 단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이다.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절)

그런데 그렇게 왕으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께서 그 성을 보고 우신다. 여기서 우신다는 말은 단지 슬퍼했다가 아니라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격할 정도로 슬퍼했다는 것이다.

 

왕은 왜 눈물을 흘리셨는가?

 

자신이 다스릴 나라가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하실 교회가 썪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할 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입니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 안에서도 참평화를 알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성전에 종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왜 그들을 위해 웁니까?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참 평화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통해서 장사하고, 예배를 통해서 세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신앙엔 참평화가 없습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 성전 안에 갇혀 있는, 그런 신앙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을 향해 우시면서 그들이 기대하는 그런 신앙은 돌하나도 남김이 없이 사라지리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왕이 아니라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떄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여리고로 들어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전 마지막 사역, 삭개오만나는 사건으로 시작 .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장소는 나무 위 입니다.

나무 위를 죄인이 달려야 할 십자가 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는 십자가 위에서야 비로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마땅히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내려오게 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에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하십니다.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내려 온 나무 위, 그 외롭고 험한 십자가에 예수가 올라가시면서 그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그가 감당해야 할 수치와 고통 대신 죄없으신 그가 멸시와 고난 당하시면서 삭개오를, 예루살렘 사람들을, 그리고 우리 들을 위해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가끔 내 기도가 잘못 될 때마다

내 마음이 소망이 참된 왕이신 주님이 아닌 헛된 세상의 왕을 기대할 때마다

이 울음이 들리는 듯합니다.

제자들은 참 왕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선 자기들의 헛된 욕망으로 인해 주님을 외면했고 떠났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이룩하신 그 나라

서로 발을 닦아 주고 용서해주고 평화를 주는 그 나라를 주님과 함꼐 세워 가게 하십니다.

참왕, 참 나라, 참 믿음을 소망하시는 로고스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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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22 03:37

    amen 감사합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 뱅이 - 사도행전 3장 1-10절

 

1. 배걍

  • 나면서부터 못걷게 딘 사람,, 바디메오- 소경,

- 누가 더 불행한 사람인가? 도진개진이겠지만 차라리 못보면 상상이라도 하면서 자기 세계를 살 수 있지만 보면서도 따라갈 수 없는 것. 보면서도 어울릴 수 없는 것

- 4장 22절에 보니까 그는 40세쯤 된 사람.

"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인생의 성취를 누리는 때, 사회의 지도층, 능력, 권세, 힘이 중시되는 나이

-그런데 그의 현실은 앉은뱅이- 무기력과 무능력의 상징

 

  • 성전 미문 (the temple gate called Beautiful) - 8개의 성문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으로 성전 문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현재는 Golden Gate -항금문으로 불리며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메시야만이 열수 있다고 하여 굳게 닫혀져 있는 문

이 미문을 직접 눈으로 본 교회 역사가 요세푸스- 높이가 23미터로 웅장하며 금과 은을 입힌 황동으로 된 화려하고 웅장하며 장엄한 문이었다고 소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매일 이 곳에 와서 구걸하는 앉은뱅이.

성전 문이 주는 화려함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잊어버리고 자신도 그 화려함의 일부분이라고 혼자 스스로 위로하는,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도 그들의 일부분으로의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처지는 구걸하는 자, 앉은뱅이, 날마다 집에 오면 변하지 않는 자신의 처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이 사람은 미래의 계획도, 현재의 즐거움도, 과거에 이룩해 놓은 업적도 없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그저 밥먹고 살기 위해 오늘도 성전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하루 먹을 양식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와서 앉아 있는데, 남들의 은혜 받은 이야기, 구원의 소식들도 듣고 있는데, 정작 자기랑은 상관이 없는, 집에 들어와서 혼자 앉아 있으면 한 없이 초라해지고 외로워지는? 성전 문 앞의 앉은뱅이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신앙 안에서 비전도, 꿈도, 소망도 없이 그저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2. 성전과 이 앉은뱅이 . 마다 성전 문에는 앉아 있지만 사실 성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 성전 문에는 아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보지만 그 자신은 성전 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한 자.
  • 무언가 도움을 바라고 성전 문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성전에 들어와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지 은혜 받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찌꺼기 은혜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자
  • 날마다 성전 앞에 있지만 성전 안의 세계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저 성전에서 나오는 자들을 보며 저 곳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상상하며 그들이 주는 도움만을 살아가는 사람들? 불신자도 아니고 기독자도 아니어서 세상에서도 시달리고 교회 안에서도 그 은혜를 도무지 못누리는 자?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church Goer들의 모습

 

-> 교회 문 앞을 기웃거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안, 신앙 안,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성전과 세상의 경계선 상에서 서있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신앙 비슷한 것이어서도 안됩니다. 이왕 신앙생활 한다면 성전 깊이 들어와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3. 베드로와 요한

  • 이렇게 성전 문 앞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은혜 없이, 소망없이 살아가는 자와 달리 성전을 향해 어김없이 올라가는 자, 성전 안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는 자 -베드로와 요한
  • 앞서 2장에서 성령을 받고 말씀을 전파하여 3000명의 사람들이 세례 받도록 역사를 발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올라간다.
  •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새 - 어느 날 갑자기 올라간 것이 아니다 -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 영성은 곧 규칙이다.

 

목사로서 가장 감사한 것 - 예배를 범하지 않는 것

군대에서의 훈련으로 인한 주일예배 불참 - 하나님께 간구 -> 일반대학을 다니는 사병으로 신학대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종병이 된 것

 

4.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리되 우리를 보라 하니

  •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 이전에 예수께서 그들이 고기 낚는 것을 보시고 멈추어 서서 그들을 주목하여 보고 ?나를 따르라?해서 제자가 되었던 자
  • 예수님이 그들을 주목하여 보고 제자를 삼았는데 그런 베드로와 요한이 오늘 늘 오르던 성전 문앞에서 늘 앉아서 구걸하던 자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며 멈추어서서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 성육신, 그 메시야가 우리를 사랑하사 멈추어 서서 우리를 위하여 나무에 달리신 사건 - 십자가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향해서 멈추어 서셨듯이 그 분의 은혜를 받는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 분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멈추어 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 예배드리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멈추어 서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 분주한 마음을 뒤로하고 골방에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향해 멈추어 서는 의식이 예배이고 기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멈출 때에 은혜가 임합니다
  • 세상에서는 어부요, 배우지 못한 그저 그랬던 베드로에게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셔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 처럼 그들은 성전으로 향해 올라가다가 나면서 걷지 못하는 자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멈추어서 앉은뱅이를 보았습니다. 몇 십 년 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날마다 구걸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하나님께서 ?그 날? 보게 하신 것입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은혜 안에 깊이 들어가려고 성전에 들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멈추어 ?하나님이 택한 어떤 사람?을 맡기십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을 치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올라 묵상하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맡기듯,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양들을 치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백성을 맡기시듯 날마다 기도에 힘쓰며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희망없이 날마다 구걸하며 살아가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게 하시고 그에게 예수님의 손을 내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 대부분의 사람- 앉은뱅이를 외면하고 지나감

소수의 사람- 앉은뱅이가 원하는 것? 은과 금을 쥐어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눈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을 전해 줌. 나사렛 예수의 이름.

 

5. 우리를 보라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 금과 은: (오늘 만을 위해 필요한 것) VS 예수의 이름 (영원히 필요한 것, 그를 일으켜 세울고 그에게 영생을 주는 것)
  • 당신은 무엇을 위해 예수를 믿는가? 금과 은을 구걸하고 있지 않은가?

 

6.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1.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2절)
  •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사람들? 매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를 메고 성전미문까지 데리고 오는 사람들? 궁극적인 구원을 주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없으면 구원도 없었다. 그들의 헌신과 매일 매일의 수고가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만남을 가져다 주었고 성령의 역사를 이끌었다.
  1. 요한

복음서에서 수제자를 놓고 베드로와 경쟁하던 자. 그런데 앞선 2장의 설교 장면에서도 이 곳 앉은뱅이와의, 장면에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동행한다. 그가 성전에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고 그가 설교 할 때 함께 중보 고 그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그를 보좌한다.

두 사람이 같이 소리 지르고 같이 일으키면 오히려 잡음이 생긴다. 성령의 역사는 질서 가운데 나타난다. 누군가 일을 하면 누군가는 뒤에서 도와 줘야 한다. 누군가 앞에서 설교하면 누군가는 그 설교에 역사가 임하도록 뒤에서 기도해야 한다. 두 사람이 같이 설교하면 사람들이 듣지 못한다. 베드로가 일할 때 요한은 침묵가운데 그가 더 일하도록 그와 함께 하고, 함께 기도해준다. 동역자 없이 하나님의 역사 없다. 바울이 일하도록 바나바가 그를 이끌어주고 인도해주고 함께 했다. 어찌 보면 요한의 역할이 베드로의 역할 보다 더 힘이 들다. 그래서 요한은 가장 끝까지 살아남아 초대교회의 위대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고 요한 계시록과 요한서신을 남겨 가장 영적이고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7.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8절)

  1. 서는 종교- 십자가에서 조차 서 계신 예수님. 다른 종교의 신- 앉아서 섬김을 받는 신. 그리스도 자신도 서서 섬기고 남들도 서게 하는 예수.
  2. 성전에 들어가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 드디어 성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맛본다. 그 기쁨은 우리를 뛰게하는 기쁨이고 저절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기쁨이다.
  • 베드로와 같이 날마다 더 큰 은혜, 더 깊은 은혜를 사모해서 꾸준히, 날마다 영적인 경건생활에 힘써야 한다.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결코 후퇴가 없다. 게으르지 않는다. 또한 멈추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도록 주위를 살펴야 한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까 늘 깨어 있고 멈추어 서서 자신의 위치를 살펴야 한다.

앉은뱅이를 메고 오는 사람들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소리 없이 메고 오는 것을 감당하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요한처럼 성숙되게 대로는 잠잠히, 때로는 뒤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누군가를 통해 불타오르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성전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베드로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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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16 03:49

    샬롬^^.
    겸손한 신자되기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 이은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16 22:06

    아멘 !!!

예수를 만난 사람 4. 바디메오 (막 10:46-52)

 

동방정교회에서 시작되어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기도

Jesus Prayer - 예수 기도

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떤 순례자가 성경을 읽다가 "쉬지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의 말씀을 읽고 어떻게 하면 계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을까?하면서 스승을 찾아 헤메었다.

누구를 만나도 기도에 대한 뚜렷한 답을 얻지 못하고 헤메이던 그에게 어떤 수도사에게서 길을 걸을 때나 어느 때던지 호흡과 같이 이 기도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거라.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고 길을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스도자가 말한 대로 호흡과 더불어 "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를 계속적으로 되뇌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다 말다, 아무런 느낌도 없고, 머리속으로는 이게 도대체 뭐야....

그렇지만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걸음걸이에 맞추어 호흡에 만주처 계속 "Jesus, Son of God, Have Mercy on ME" 를 되뇌이다.

그 짧은 기도의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가 머리 속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토록 멀리 있게만 느껴지던, 아니 아무리 느끼려고 해도 느껴지지 않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강하게 임하게 되고

그 분께 내 영혼을 의탁하고 은혜를 구하는 간절함이 가슴에서부터, 아니 영혼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예수 기도의 모태가 된 것이 바로 바디메오의 기도이다.

이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나다나엘 - 바돌로메 - 돌로메의 아들

바디에모 - 디메오의 아들 -, 디메오, 혼돈, 불결,

그리고 실제 그의 처지 - 거지이고 동시에 맹인..

 

그가 길 가에 앉아 있다.

길 가에 앉아 있다. 길 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마 13: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말씀이 뿌려져도 악한 생각, 악한 습관, 악한 행동이 그러한 말씀을 빼앗아 가 버리니 존경받아야 할 자가 거지가 되었고 명예로와야 할 자가 장님이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단절된 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길 가에 앉은 신앙인이 어느 날 나사렛 예수가 지나신 다는 소리를 듣는다.

같은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 18장 36절에 보니까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이 무슨 일인가 묻는데 그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하니까

소리를 질러 예수를 부르기 시작한다.

 

특별히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이 바디메오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마가복음은 전체가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간인 8장에 베드로의 고백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아니이다. 라는 고백이 나온다.

 

이 고백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로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질 것과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8장과 10장을 걸쳐서 세 번을 말씀하시는데

1. 첫번째 십자가와 부활 예고 (막 8:31-32)

  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2. 두 번째 십자가와 부활 예고 (막 9:31-32)

  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 왜 묻지 않는가? 관심이 없기 때문에...그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그 일은 내가 싫어하므로.... 애써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복음은 이미 우상숭배이다. 샤머니즘이다.

 

3. 세 번째 십자가와 부활 예고 (막 10:33-34)

-> 반응이 없음. 무시

세 번째는 제자들이 아무 반응이 없다. 그냥 으례 하는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반응이 없는 것

아픔이 있어도 반응하지 못하는 병,

불에 디어도, 살이 썩어도 반응하지 않는 병- 문등병. 죄악의 병, 저주의 병

 

주님은 점점 더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죽음을 향해 가는데, 제자들은 처음엔 항변하다가, 묻기를 두려워하다가, 급기야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육적 반응은 어떠한가?

처음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주님을 위해 또한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을 짓고 그 밑에서 함께 동거하며 살고자 했다.

두 번째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었다.

오늘 세번째 제자들은 은밀히 주를 찾아와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주기를 간청한다. 마가복음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라고 나와있고 마태복음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은밀히 와서 청탁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는데 이들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고 계속해서 높아지고만 하고 그것도 점점 더 은밀해져가며 부정한 방법으로 거래를 하려고 한다. (세상의 방법으로 높아지려 하는 것)

 

46-52: 이해 못하고 자꾸 어리석은 길로 가는 제자들과 달리 그 마침은 항상 뜻밖의 이방인의 구원의 이야기라 마무리 합니다.

맹인거지 - 바디메요... 길 가에 떨어져 예수의 말씀과 떨어져서 결국 혼돈과 불결한 삶으로 전락하여 거지가 되고 맹인이 된 자-> 제자들의 현제의 모습이 아닌가?

 

눈은 보이지 않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면서 예수가 곧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고백을 한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다.

 

큰 자 되게 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우편에 좌편에 세워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메시야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소리 지르는 바디메오에게 제자들은 꾸짖고 잠잠하게 하신다.

이미 어린아이들이 달려드는 것을 꾸짖은 적이 있던 제자들이다.

예수님을 향해 이처럼 달려드는 자들을 왜 꾸짖을까?

자신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도 더 높은 자리, 더 가까운 자리를 요구하는데 그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르짖는 소리에 예수가 멈춘다. "머물러 서서"

예수를 멈추게 하는 소리는 무엇인가? 바디메오의 부르짖는 기도였다. 더욱 소리지르는 그의 간절함이었다.

예수를 멈출 수 있는 기도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한나처럼 간절히 기도해 보았는가? 그 메어지는 가슴과 구원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 보았는가?

 

"그가 너를 부르신다"는 소리에 바디메오의 행동은 어떠한가?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자신을 숨기고 있던 감추고 있던 모든 겉옷을 벗어던지고, 죄악을 회개하고, 드러내고, 예수께 나아온다.

죽은 나사로를 막고 있던 돌을 굴려 옮겨 놓듯, 칭칭감긴 붕대를 풀어재끼듯, 자신을 감추어 놓았던 겉옷을 벗어내놓고 예수께 뛰어 일어난다.

 

그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보기를 원한 것이다.

 

진리를 알기 원한 것이다.

 

눈을 떠도 장님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들의 모습이 장님처럼 여겨지지 않는가?

누구보다 예수 가까이에 있으며 그가 하신 말씀을 듣지만 애써 외면하고 자신이 듣고자 하는 것만 듣고, 보고자 하는 것만 본 제자들....

 

지난 시간에 나눈 나다나엘 - 네 속에 간사함이 없다. 누구를 빗대어 하는 말인가?

헤롯 성전에서 로마의 힘과 권력에 기대어 사는 종교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 안에 흡수되어 버린 바리새인들이 나다나엘과 반대편에 있던 간사한 자들의 무리라면

지금 바디메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은 바로 그 나다나엘을 비롯한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다니고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분과 동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길로 간다.

또 다른 간사한 자들의 무리가 되어 버린다. 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의 눈을 멀게 헀는가?

높아지려고 하는 탐심이 누가 높냐를 두고 그들을 싸우게 만들고

은밀한 거래를 통해 취하는 세상의 방법을 취하게 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바로수 주님의 소리를 듣고 소리지른다.

높아지게 해 달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남들이 모라하건 소리 지른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장님된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비로서 자기의 이름을 되찾는다.

그리고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죄악의 옷, 탐심의 옷, 은밀한 죄악의 옷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제자가 된다.

 

예수를 만난 바디메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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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4.13 04:54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