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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만난 사람 2 – 사마리아 여인

본문 : 4: 14-26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묘하게 대조되면서 또한 오랫동안 ㄱ 중요성이 가려져 왔지만 현대 성서 해석학에서 오히려 요한복음 3장보다 더 중요하다고까지 재평가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3장의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며 동시에 율법학자이자 선생이었으며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세계에 전혀 무감각함을 보여 줍니다.

 

이에반해 사마리아 여인은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무명의 여인이요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비난당하는 사마리아인이요, 그 중에서도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사막에서 가장 더운 시간에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오는 가장 척박한 땅에서도 가장 소외된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알지도 모르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유대인들은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 땅을 지나가시면서까지 그 땅으로 들어갑니다. .

 

[ 4:3-4]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성경은 “had to”동사를 쓰면서까지 반드시 그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 여인 개인의 됨됨이와는 상관없이 그 당시 여인은 사마리아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회적인 소외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북왕국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정책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지방으로 보내어 혼인정책, 혼혈정책

남왕국 유다- 다니엘과 같이 포로로 잡아 들어가 문화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정책

 

유대인의 율법에 있어서 피는 곧 생명- 피가 더러워졌다-> 저주의 상징

 

이스라엘 성전을 재 건축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온 힘을 모아 성전을 건축하였고 사마리아 인들도 이 성전 재건축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부정한 민족이라 거부하면서 할 수 없이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때가 주전 322년경이었습니다. 이 두 성전의 갈등이 그로부터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주전 129년에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라는 사람이 그리심 산에 세워진 사마리아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때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그 이후 사마리안인과 유대인들은 서로를 적대하며 원수지간처럼 지냈습니다.

 

l  유대 역사가 바벨론에서 귀환 유대백성의 힘이 아니라 이방 바사제국의 고레스왕의 명령으로 인해 -성전재건 분열되었던 이스라엘 예배가 하나로 완성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1. 사마리아인에 대한 차별  2.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백성들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사람들 사이에서의 기득권 싸움. – 귀환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은 지어도 예루살렘에서 벗어나 외곽에 거주 예루살렘 성벽이 폐허 상태로 그대로 있음 느혜미야서 -> 은혜를 받았으나 분열로 치닫는 죄악 예수께서 그 오래된 분열의 장벽을 지금 허무시는 장면

 

 

6절에 표현된 제 6는 지금의 12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막지대에서는 가장 더운 한 낮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가장 뜨거운 한 낮에 홀로 물을 길러 오는 그녀.

다섯 번 결혼 했다는 말은 어떤 학자들은 사마리아의 다섯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간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문자 그대로 다섯 명의 남편을 가진 전력이 있다고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대 문화를 살펴 보면 이 이유도 그녀의 부도덕성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이 당시 다른 남편을 가질 권리는 여인이 아닌 오직 남편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다섯 남편을 가졌었다는 전력은 요즘 시각으로 다섯 남편을 갈아치운 부정한 여인이라기 보다는 다섯 번이나 남자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처량하고 가혹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 줍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는 유대인에게도 동족인 사마리아 인에게도 손가락질 받는 어찌 보면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민족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전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섯 남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녀 자신의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다섯 명의 남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은 그녀를 이해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 12시 뙤약볕에, 살기 위해 물을 길어야만 하는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여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 여인을 예수님이 우물가에 앉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언제나 길러 오는 우물가에 먼저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계획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지요. 그리고 다가오는 여인을 향해 먼저 예수님께서 말을 거십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 예수님의 첫 마디  

 

당시 유대남성이 공공 장소에서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도 아닌 오랜 민족의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딱딱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물을 달라 하신 것이지요. 여인이 놀라 예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당신은 우리와 상종치 않지 않습니까? 당시의 사회 관습과 종교적 전통을 모두 깨뜨리시면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 내용은 다름아닌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왜 예수께서 여인을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의 육신적 목마름을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니요, 그 반대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그녀에게 주시기 위해서 여인을 만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는 처음부터 여인에게 내가 물을 주겠다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시면서 여인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까?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조차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여인을 위해 예수님은

먼저 무너져 내려있는 그녀의 자존감을 붙들어 주며 세심한 배려 속에서 그녀에게 다가가십니다.

 

먼저, 예수는 여인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을 동네로 보냅니다. 상처 입은 심령을 만나주시기 위해, 그녀의 부끄러운 심령을 다치시게 하지 않기 위해, 예수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도 자리를 피하게 하고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여인이 도착하기 전 미리 그 우물가에 앉아 여인을 기다립니다.

 

아마도 예수를 발견한 여인은 또 한 번의 조롱섞인 비아냥을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여타 유대인처럼 자기를 더럽고 추하게 여기는 그런 시선을 기다렸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 기대를 깨고 생명의 영생수의 공급자이신 예수께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뜻 밖에도 나에게 물을 좀 달라.” 는 것이었습니다. 무너져 있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을 지키게 하고, 상해있던 모든 그녀의 감정을 만지시면서 항상 멸시 받고 외면 당해온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좀 도와줄래?” 하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이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을 여러분 느끼십니까? c 왜 이토록 예수님은 여인을 배려하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조롱 당하고 죄인으로 낙인 찍힌 여인을 왜 예수님은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또 하나의 배경이 되는 장소, “야곱의 우물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특별히 언급된 장소를 유심히 살피는 것은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게 해 줍니다.

 

우물-

1)   창세기 24: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늙은 종을 보내는데 우물 곁에서 물을 청해서 그 태도를 보고 리브가를 만남.   

2)   29: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도 우물

이스라엘 신앙의 조상들이 자기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 혹은 자기 배우자를 만난 곳-> 우물.

 

예수님이 아무 이름없는 초라한 여인, 유대인들로부터도 자기 민족 사마리아인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온 여인에게 다가오신 곳. -> 우물영원한 우리의 신랑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신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온 곳-> 바로 우물가.

 

이 말씀은 왜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 하필이면 가나에서의 혼인잔치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 여인을 부정하다, 더럽다 욕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을 돌아 사마리아로 오시고,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고, 그리고 가장 무더운 대낮에 그녀를 기다리시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혹이나 그 마음이 상할까봐 조심하시며 그 자존심이 다칠까봐 염려하시며 정말로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그 여인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6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8

 

, 이것이 실제 남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녀가 섬기고 있던 우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주석마다 해석이 여러가지지만 왜 어느 것이 바른 해석이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  

그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가 세상에서 취해왔던 그녀의 땅의 의지처들, 이제 쓸모없으니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보니 살만하냐?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뒤로하고 물고기 잡으로 나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물으시는 예수님.

 

다섯 명의 남편과 살아봤지만, 그것이 육적인 남편이던 영적인 우상이건, 한번도 만족함이 없이 버림을 당하고 지금 살고 있는 여섯 번째 사람도 진짜 남편이 아닌, 이제 완전한 수 7번째의 남편,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오묘하고 배려심 깊은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점점 영적인 체험 속에서 예수를 유대인(9)에서, (11, 15, 19), 주에서 선지자로 (19),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25)로서 고백하며 온전한 주님의 제자, 주님의 신부가 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을 전혀 못알아듣고 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영적인 눈이 뜨이고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29절에 예수님께서 말한 내가 그로다 하는 말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자기 선언 중 첫 번째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참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을 개의치 않고, 담대히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와서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할 때 썼던 말이죠. 복음서 최초의 여성 제자가 유대 땅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예수그리스도의 만남은 죄인인 여인을 제자로, 사도로, 그리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만들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 상처가, 초라함이, 억눌림이 없고, 오직 자유함과, 기쁨과, 담대한 증거만이 여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어떤 외적인 모습을 보고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프고 상처입고 외로워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죄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프로포즈 하십니다. 내가 너의 참 남편이다.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너에게 줄 것이다. 내가 널 살릴 것이다. 여러분 성전에서 그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주실 우리 구주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정죄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공동체어떤 죄인도 받아들이는 공동체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까 누구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돌아가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완전하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사마리안 여인의 이야기는 죄인을 구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찾지도 못했을 때에그가 내가 살고 있는 내 삶의 영역에 들어와 나를 기다리시고 만나주시고, 나름 만져주시고, 내 자존심을 세워주시고, 내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세상이 두려웠던 여인은 주님과 만난 뒤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온 동네를 다니며 주님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된다.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주님을 찾아와서 점점 더 제자가 되어 가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이 여인의 만남과 변화는 예수를 만나 변화된 가장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Posted by 소리벼리

 

예수를 만난 사람 1 - 니고데모 (요한복음 3장 15-17절)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증거하려 합니다. 여러 인물들과 만나는 장면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다시 한 번 예수님과의 인격적이고 깊은 친밀한 만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3장 16절은 성경 66권의 모든 내용 중, 그리고 인류의 역사의 모든 일등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가장 중요하다고 많은 분들이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 바리새인 관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 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하나님의 본심이 그대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 손수 지으신, 창조하신 보시기 좋았던 완전한 세상. 

평화와 풍요와 사랑과 열매가 풍성했던 세상

그런데 지금은 어떤 세상? 

죄로 부패하고, 서로 죽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 서로 서로가, 인간과 자연이, 인간과 만물이 서로 원수된 세상.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패하고 어둔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유일무이한 자신을 내어 주신 것, 그 분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 함께 거한 것. 

드른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저를 믿는 자마다"는 제한과 무한이 함께 있는 구절-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가... 이방인이나 유대인 구별없이, 어느 누구나... 

   그러나 동시에 오직 그를 믿을 때에만... 그를 영접할 때에만... 그를 통해서 구원하시겠다는 유일한 조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꼐로 올라갈 자가 없다" 


3장 1절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대인의 지도자라.”

즉, 다시말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유대인의 관원이었다는 말은 공의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산헤드린회원이 되려면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도덕적 결점이 없어야 하고 또한 재력가이어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조건을 통해 니고데모는 학자였으며, 귀족이었으며 권세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인 동시에 부자였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을,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밤 늦은 시간에 찾아 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해 은밀히 주님께 왔다는 것입니다. . 


왜 니고데모는 밤 늦게 은밀히 예수를 찾아왔던 것일까요? 왜 그 많은 명성과 존경과 권위와 부를 획득한 니고데모는 만약 찾아온 것이 밝혀진다면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을까요.. 밤에 그를 잠 못 들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키는 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고 가르치는 자라 하더라도 그가 도달할 수 없고 그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가진 학식으로도, 돈으로도, 명예로도 할 수 없는 한계에 빠져있는 단지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였어도 채울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그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리고 그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몸부림쳤던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 술을 먹고, 오락을 하고, 춤을 추고 바람을 피고, 도박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어서 혹시 이 분이라면 자신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자신의 신분을 무릅쓰고 예수님께로 찾아온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나아만- 사마리아 여인...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믿음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무릅쓰고 하나님께로서 나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적인 자기 위치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눈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미루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우상 때문에, 너무 부자여서, 혹은 너무 가난해서, 질병 때문에, 인생의 실패 때문에, 어떤 이는 믿는 사람들의 추태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지만 실로 자신의 심령의 가난한 자들은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평안이 없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천국을 주십니다. 니고데모는 하늘나라를 소망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선지자나 예언자나 혹은 메시야가 아닐까, 자기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탈출 시켜 줄 분이 아닐까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다가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가 알지도 못해고 구하지도 못했던 천국을, 영생을, 생명을 주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건, 여러분의 마음이 가난해서, 주님이 필요해서 여러 위험을 무릎쓰고 이 자리에서 주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아뢴다면 주님께서는 다름아닌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2)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입니까?” 하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거듭나야 간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동문서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가 기대하는 것 - 이스라엘의 회복, 자신이 처한 곤경, 압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나라 - 하나님 나라, 영생, 어떤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 언제나 생명이 공급되는 나라. 


그러나 육신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듭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거듭나는 것은 바람과 같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단지 “어떻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니고데모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그만한 지위에 있고, 남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위치에 있고 성경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한 말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안타까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책망까지 하십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왜 그가 기대하는 나라는 그가 속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회복되고, 그 나라의 백성이 회복되고, 자신의 신분도 완전히 회복되는 육적인 믿음, 땅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적으로 그는 아직도 목마르고, 배고픈 심령이 가난한 자이지만 왜 자신이 가난한지, 왜 자신이 갈급한지 그 근본 원인조차 알지를 못합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깨달음을 원했고, 또한 육적인 구원을, 평안을 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유대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쫓아 다녔습니다. 그분이라면 내 병든 몸을 치유하시겠지, 내 허전한 마음의 위로가 되시겠지, 내 가난을 몰아내어 주시겠지. 우리 민족을 구출해 주시겠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까지 이러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을 가까이서 따랐던 열 두 제자들 역시 그러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그리스도인 역시 그러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예수님께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모습으로라도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줄 알려 주십니다. . 


니고데모는 신실하고 겸손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듭나지 못한 신자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도 땅의 믿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세상의 복과 연결 시켜서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구약 시대 때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였습니다. 인간이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복이 임하고 지키지 못하면 저주가 임하는 것이 구약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부자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래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두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욥도 당대의 부자였고 다윗도 솔로몬도 부자였습니다. 말씀을 잘 지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의 복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900살 이상 산 사람들도 많이 나오고 일찍 죽는 사람 신앙 좋은 사람에게는 잘 안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부자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부자되었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더니 오래 살았더라라는 내용도 없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잘 지켜서 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령받고 성령이 임하더니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더라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비로서 흡족한 열매들을 맺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장 큰 축복은 십자가 지는 삶으로, 순교로서 임합니다. 땅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 자신의 욕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혹은 신자들을 죽이기까지 했던 사람들, 못배우고, 가난하고, 처량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고 성령받아서 자신의 인생을 불살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위대한 역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복은 성령의 복은 땅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주제로 삼습니다. 구약의 복은 이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이땅에서 복받는 것이었다면 신약의 복은 이 땅에서 충성하고 고난받아 영원한 하늘나라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약의 복과 구약의 복이 확 떨어져서 나누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팔복에서 보듯이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 야생말이 길들여지는 것, 순종하는 삶. 

말씀에 순종하면 구약시대때와 똑같이 땅의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의 결과로, 궁극적인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라고 팔복을 끝맺고 있습니다. 복의 복, 복의 결과는 이땅에서 복음 때문에 핍박받더라도 하늘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도 땅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목사들도 땅의 복을 얘기해야만 신자들이 오기 때문에 땅의 복을 말하는 목자들로 넘쳐납니다. 아니 그들 자신이 땅의 복을 사모하면서 교회를 통해서도 큰 성전, 화려한 성전으로서 자신의 업적을 이루려 합니다. 니고데모도 땅의 복을 사모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더니 그는 하늘의 복을 사모하는 신자로서 바뀌어 갑니다. 바람이 불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듯이 그의 인생도 예측하지 못하고 제한 없는 성령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인생을 땅의 한계, 육의 한계를 벗어난 인생을 삽니다. 바람과 같이 자유하고 시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는 남의 눈을 피해서 올 정도로 연약했던 믿음이 자라서 후에는 예수님을 잡아 가두려고 하던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며 “어떻게 그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그의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판단할 수 있는가 라고 예수님을 변호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요 7 : 50)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33kg 정도 가지고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바르고 모시천으로 시체를 바르고 무덤에 모시는 장면이 (요 19 : 39)에 나옵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이해했던 하나님

법을 잘 지켜서 순종해야만 조금 다가갈 수 있는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읽고 잘 지켜도 좀처럼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었던 하나님...

그런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자격을 얻으려 하지 말고 그 분이 날 사랑해서 날 구원하셨다는 것을 그냥 믿어라.... 

그러면 내가 그 분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 분이 날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마음 속에 가득차면, 그 분의 마음이 내 마음에 느껴지기만 하면.... 난 저절로 그 분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 

내 인생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날 이끌어 오셨고 또한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 분의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 


여러분! 마음이 가난할 때가 있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하고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 때 다른 곳에 가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던가 예배당 의자에 앉아서... 

주님, 날 사랑하세요? 내가 마음이 아파요. 내가 마음이 가난해요. 허전하고 외롭고 무너져요. 

내 생명이 잃어져버린 것만 같아요.

그러면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여러분에게도 꼭 다가가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자마다 아파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풍성한 삶, 사랑을 맛볼 수 있도록 내가 영생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절망과 허전함으로부터 일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주심으로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 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플 때에도 허전할 때에도 니고데모 처럼 그 분께 나아가 하늘나라의 맛을 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제목: 와서 먹으라 

본문: 요한복음 21장 2-14절

다른 복음서들이 거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끝맺음을 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21장 한 장을 할애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며칠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난 것입니다. 

3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난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6제자들 역시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왜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고 있습니까? 자,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낚는 어부가 되어라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설교와 그 분의 기적을 체험하며 그 분과 하루도 빠짐없이 동행하며 수제자로서, 누구보다 열심인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죽음이었지만 예수님은 미리 주님의 죽으심을 이야기 하셨고, 그리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 그것도 수제자인 베드로는 지금 ?나는 지금 고기 잡으러 간다?하며 바다로 나서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또 다른 수제자,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바로 이전 장에서 첫번째 방문의 자리에 없었다고 다시 나타나셔서 내 옆구리과 손을 만지게 하셨던 도마까지도 베드로가 고기잡으러 간다는 소리에 말리지도 않고 말리기는커녕 따라서 고기 잡으러 나서고 있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 앞에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지금 고기를 잡으러 갑니까? 

신앙적인 상식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전도를 하던 예배를 하던 흥분되어 있을 시간에 그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터벅 터벅 고기를 잡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한 제자들이 지금 왜 하나 같이 힘을 잃고 고기를 잡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옆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영광의 주로 나타나셨지만 매일 같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같이 하던 예수님이 그들의 곁에 없자 그들은 갈 바를 몰라 헤메이는 예전의 비천한 존재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믿기 힘든 기적을 경험하고 목격한 신자라 하더라도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됩니다. 길잃은 고아가 됩니다. 예수님이 곁에 없으니 그들은 우울해지고 정서가 불안해 집니다. 가만있지 못하고 불안해서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요. 

모세가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자 그들은 안전부절 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며 죄를 범케 됩니다. 그 전에 어떤 것을 경험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내게 지금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들도 똑 같은 모습을 합니다.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그런 감정을 이기기 위해서 아무런 일을 서스럼 없이 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다가 무언가 자기 마음대로 안되고 예수님이 곁에 없는 것 같고 자꾸 자기의 실수한 것, 잘못된 것만 생각나게 될 때, 우리의 무너지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것.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옛날의 나로 돌아가 버리는 것, 그것을 지금 예수님의 가장 가깝고도 열심이었던 제자,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도마와 같은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란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왜 이렇게 실패의, 실의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인가요? 옛날의 나로 돌아가 전문 어부인 이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낚았으나 한 마리도 못 낚게 됩니다. 세상으로 돌아간 자의 삶은 너무 비참합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자 낙심했습니다. 빈손처럼 좌절되고 허무한 것은 없습니다.  빈손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시키고 예수님께서 옆에 계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할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같이 먹고 마시며 함께 했던 제자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너무나 알아 듣지 못했고, 십자가의 고난 앞에선 하나 같이 도망쳤던 제자들, 그래도 부활하자 마자 그들에게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다가오신 바로 그 제자들.. 그 자리에 없다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해서 그 앞에 직접 나타나서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던 바로 그 제자들이 지금 너무도 무력하게, 아무런 신앙의 일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다시 예전의 일터로 돌아가 밤이 새도록 무력하게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들에게 지금 주님이 다시 다가오십니다. 다가와도 이미 신앙의 눈이 어두워져 버린 그들이기에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지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주님이 부활하셔도 무기력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도 무기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물고기만 잡던 제자들이 주님에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고기를 잡게 되자, 그제서야 주님이시다. 외칩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따라 좇아오던 자들에게 자기 배를 체우기 위해 오는 자여, 썪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썪지 않는 영생을 위하여 일하라 하셨던 주님은 영적으로 철저히 무기력하게 있던 제자들에게 또다시 어부들에게 물고기를 얻게 하며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멸하신 하나님이 원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이 죄를 짓고 바위 뒤에 숨어 있을 때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니?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얼마나 고생하니? 그러면서 우리의 피곤한 육신과 영혼을 먹이십니다. 함께 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매일의 일상으로 그들을 초대하셔서 예전과 똑같이 그들과 먹고 마시며 동행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힘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할 수 없지만 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제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생선과 떡을 주고, 가슴이 아픈 사람에겐 울어주어야 합니다. 

  •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고기를 구워 먹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로뎀 나무 아래에서 남심해 잇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나르며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왕상 19:2)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와의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가장 믿음의 절정에서 엘리야는 이세벨 여왕의 ??내일 이 맘때까지 내가 너룰 죽이겠다!?는 한 마디 말에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때문에 엘리야가 넘어졌다면 그렇구나 그럴텐데 너무도 당당하게 그들과 대결했던 엘리야가 이세벨 여왕의 한마디에 죽고 싶은 절망에까지 빠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대단한것에 낙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 돋친 한 마디 말, 아니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대가들까지도 넘어뜨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침체에 빠진 엘리야에게 나타난 현상

  •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1. 형편을 보고 (모세, 엘리야, 예수)?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기도를 위해 골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접촉하기 싫어서 방에 갇히는 것이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로뎀나무에서 잠자게 하시고 어루만지시고 음식을 먹이신 이유는 결국 호렙산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말씀이 영혼에 들려지기만 하면 산다. 그런데 그 영혼ㅁ까지 도달하기가 힘들다. 주님은 지쳐있는 우리를 육신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 분의 살과 피로, 십자가와 부활로 먹이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장 60-68절) 


 


  • 요한복음의 시작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로고스)=하나님
  • (14절):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성육신 하신 말씀, 성옥신 하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 

->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우리같은 육신이 되어 오셨듯이 육신인 우리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말씀이 되어 살아가라고... 


그런데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11절) 

그런데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12절) 

-> 구원의 메시지 


이 배경을 가지고  요한복음 6장을 보자.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온다. 어떤 분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폄하하는 분들도 있지만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예수님의 데표적 이적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갈릴리 지방의 예수가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오실 메시야로 소문이 나게 된다.  


예수의 사역은 누가복음 4장 13절에 표현된 대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건이었다. 병자들이 치유받고,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었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정점에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모여들고 더 많은 예수에 대한 소문들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현상을 보고 예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기다리며 임금 삼으려 함을 보고 (15절) 또한 예수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며 그들의 중심을 간파하시고 한탄하셨다. 


"2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을 보며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27절)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오신 참 목적, 자신의 참 역할, 자기를 통하여 무엇을 이룰까, 그야말로 참 복음, 진짜 의도를 말씀하시는 장면이 6장 후반부의 내용이다. 


이른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 나의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 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이해 못할 말씀이었지만 반대로 예수님 편에서는 비유가 아닌 가장 직설적으로, 가장 구체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의 사역과 역할을 말씀하신 사건이다.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가진 능력, 예수가 가진 힘이다. 그 역할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예수건, 로마의 황제건, 바알이건 앗세라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 땅에 오서서 그들을 구원코자 했던 예수는 그들의 실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버린 백성이요, 그들의 배는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물빠진 항아리와 같은 공허감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진다. 육은 밤과 물질로 채울 수 있다. 허기진 배는 밥으로 채우고 물질로서 안목의 정욕을 채운다. 

우리의 혼은 정서로 채운다. 보살핌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혼과 육은 오직 우리의 육신의 때에 펠요한 것이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살아있을 때에 제한된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문제는 이 땅의 제한적인 물질이나 정서로 채울 수가 없다. 영은 영원한 것으로만 채워진다. 영원한 것은 영이신 하나님이요, 그 분이 이 땅에 말씀으로 내려오신 예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에 대해 무지하다. 물질로서 영을 채우려고 한다. 아니 영에 대해서는 무지 몽매하다. 그런데 그들의 배는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다. 하나님이 옆에 앉아서 매일 같이 공급해줘도 그놈의 배는 꺼지면 또 배고프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영원에 눈을 뜨라고, 영혼에 눈을 뜨라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시라. 그런 자 만이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할 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다. (55-56절) 


  • 기껏해야 하루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기껏해야 이 세상의 풍요만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자기가 추구하는 것만을 보게 된다. 아무리 진리를 얘기해도 자신의 정욕으로만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들은 생명의 떡을 말하는데도 계속해서 오병이어의 기적만을 기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당신의 피를 먹으라고 그 피를 먹어야만 너희가 죄에서부터 자유를 얻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오병이어만을 기대하며 물고기와 보리떡만을 바라보고 마는 것입니다. 
  1. 오병이어는 위대한 기적이었다. 우리의 연약한 작은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요를 체험케 하신 놀라운 기적이었다. 우리의 작은 십일조를 통하여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 그 분의 삶에 동참하는 것, 즉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 어떤 기적도 표적도 예수님의 살과 피보다 앞서나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피와 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천국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신앙이 이렇게 생명의 떡의,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신앙이 되려고 할 때 많은 수많은 무리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육신의 행복을 위하여 믿었던 신앙이 참 영원한 나라의 영생을 위한 신앙으로 바뀌어 갈 때 수많은 무리들이 흩어져 버립니다. 배부르기 위하여 예수님을 단지 부분만, 순간만 의지하려는 신앙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하고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예수와 연합하는 삶으로 가고자 할 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도망을 쳐 버립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6절)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권능과, 예수님의 이적으로 인해 다 내버리고 예수를 쫓았던 무리들, 그분과 함께 있으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발생할 것 같았고, 자신의 위치도 올라갈 것 같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릴 줄로 여겼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너의 전 영역을 나와 함께 하자하고 말씀 하실 때에는 두려워서, 무서워서, 귀찮아서, 부담이 되어서 더 이상 예수를 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참 모습은 예수님이 강할 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질 때, 아무런 역사가 없을 때에, 너무나 고통당하고, 조롱당하고, 외면당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그 때에 참 신앙의 모습은 빛을 발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룰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시고, 육은 무익하다고, 세상의 가치관을 꺾어버리시고 영생의 복음을 드러내실 때에 대다수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물어보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에서 정말로 영생의 참 신앙에 눈을 뜰 때,  더 이상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새로운 영적 가치관에 눈이 띄어질 때, 신앙생활에 고난이 따르고 십자가가 주어지고 죽음이 있어야 부활 할 수 있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 할 때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날 버리겠느냐?”


한국 기독교 안에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

긍정적인 요소- 하나님 사상. 새벽예배. 신을 섬기는 사상. 복채...

부정적인 요소- 기복신앙(미래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 현실의 복이 최우선). 남을 꺾어 나를 세우려는 사상. 복채. 기쁜 일 있을 때, 중요한 일 앞두고 복채를 더 내어놓음) 


우리나라 - 복을 간절히 사모하는 나라- 배게에도, 숟가락 젓가락에도, 대문에도, 한복에도, 덧버선에도, 고무신에도, 복복복.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 복이 정말 필요했을 때....

정말로 신앙을 통해서 복받는 소식들이 전해짐. 여기 저기서 간증들이 쏟아짐. 

우리나라 60-70년도 새마을 운동->교회 부흥의 절정기. 최고의 화두는 복. -> 성취. 


5병이어 다음에 예수와 동행, 고난에 동참. 피와 살을 나누는 삶. 

샤머니즘은 남을 죽어 내가 복 받자. 그러나 기독교 정신은 내가 죽어 남을 살리자. 

내 살을 먹어 너희가 살아라. ->신앙의 전환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 순간에 많은 신자들이 떠난다. 자기의 복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복을 찾기 위해...


*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는가? 

1)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려-> 복의 근원은 예수그리스도. 

2)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려....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먼저 먹어라. 기력을 좀 차려라. 


병든 자, 배고픈 자, 억눌린 자,  외로운 자를 치유하고, 먹이고, 해방시키고, 함께해 주시려...그러나 그 보다 가장 큰 이유는 영생을 주시려고... 복음서에 보면 구원의 의미가 각각 현세적인 구원과 내세적인 구원 모두 구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현세적인 구원은 만족이 없고 끊임없이 채워주어야 하고 그래도 만족함이 없어. 항상 부족하고 불만족하고 배고퍼한다. 오직 영생만이 이 모든 것을 채울 수가 있다. 


구약 - 말씀에 순종하면 복, 그렇지 않으면 화.. 그런데 말씀 잘 지켜서 복 주면 그게 지속이 안됨. 채워지면 교만해지고 채워지면 죄짓고, 채워지면 떠나고... 죄와 복의 순환.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죄와 순환 사슬을 끊는다. 영원한 복을 줄 것이다. 

영생만 가지면 다 해결될 수 있도록.... 그런데 영생이 무슨 의미인지를 도대체 알지 못한다. 3장 니고데모 -> 어찌 사람이 거듭날 수 있습니까?  

현세적 믿음에서 영생의 믿음으로 갈 적에 많은 신앙인들이 떨어져 나간다. 그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사오매 내가 어디로 가오리까? 하며 주를 붙잡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내 삶 가운데서 이루면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한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