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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 너머의 으혜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잘 알려진 바지만 사도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되는 어떤 질병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 가시에 대해서 설명한 사람은 초대교회의 교부중 하나였던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울의 삶을 추적하며 이 육체적 가시는 안질이나 간질, 혹은 심한 편두통과 같은 육체적 질병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서 칼은 바울 자신이 받았던 영적인 유혹이나, 의심, 가책, 갈등 같은 것이었다고 해석했고, 

마르틴 루터는 사도 바울이 받았던 핍박이나, 외적인 환난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사실이라기 보다는 칼빈이나 루터 자신의 삶을 적용한 해석일 수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이 육체적 질병이던, 내적인 유혹이나 고통이던, 혹은 외적인 핍박이나 환난이건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 까지 부르며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가를 표현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사용한 가시라는 단어는 고문하거나 찌르기 위해 사용하는 막대기나 가시 등의 뜻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하면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심히 괴롭히고 깊이 찌른 이 가시 때문에 바울은 큰 고통을 당하고 사역에 방해를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 성경에서 가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서 등장합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내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에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7-18) 

즉 죄가 있는 곳에 가시덤불과 엉컹퀴가 자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이 받은 저주이지만 우리 인간 안에 싹튼 저주이기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도 가시가 자라기 시작합니다. 

가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가시로 말미암아 잘 열매 맺지 못하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찔러대기도 합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도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

라고 말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가시로 말미암아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가 왜 생깁니까? 이 땅에서 살면서 이 땅의 것을 가지고 염려하며 재물과 향락을 바라고 취하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이 땅의 것을 생각하다가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잘못된 것, 영원하지 못한 것을 취하다가 얻게되는 못된 열매입니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성경에 보면 인간은 누구에게나 죄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문제는 용서받았는가, 용서받지 못하였는가만 있는 것이지 우리 인간 스스로만 보면 다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습니다. 가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나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동안 몸에서 떠나지 않는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난, 가정의 불화, 자녀문제 등의 많은 환경과 관계 속에서의 가시가 자기를 찌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가시가 되고, 부인이 가시가 되어서 일생을 찌르고, 어떤 부모는 자식이 평생의 가시가 되어 찌르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쯧하지 않은 자신의 성품이나 성격으로 인해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에 가시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 잘 띄고 안 띄고의 문제고 정도의 문제이지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찌르고, 상대방을 찌르고 주위를 찌르는 가시가 있습니다. 


  •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가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찔리고 찌르는 가시의 문제를 내가 해결할 수 없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그분께 나아오면 우리의 가시가 무뎌집니다. 그 분을 찌름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까 주님께 나왔는데, 계속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사라지지 않는 가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남겨둔 가시가 있다는 것이지요. 


  • 계속 간구했어도 남겨두었다는 것은 대부분
  1.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았거나 
  2.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거나
  3. 아주 가끔 이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거절하신 것입니다. 


  • 바울이 받은 응답은 
  1. "내게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입니다. 

가시는 하나님께서 바울이 교만해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처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환도뼈를 치게 함으로 그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 없으면 내가 평안해서 하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더 붙어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해결되면 또 하나님을 멀리 할 것을 압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시를 남기셔서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람은 약할 때 겸손해집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해집니다. 

"나는 감기한번 안 걸렸어" 라고 뽑내던 사람도 중병에 걸리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또 권세가 있던 사람도 그 세력이 없어지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돈 많던 사람이 사업에 실패하면 그렇게 겸손해 질 수가 없습니다.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우쭐대지 못하게 막습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2. 두번째로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에게 그 가시보다 더 큰 은혜, 더 한 사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우리가 당장 아픈 것, 당장 없는 것, 현재 내가 힘든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분이 인도하신 것, 그 분이 내게 주신 것, 그 은혜를 잊을 때가 많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광야에서...항상 불평.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그래도 늘 불평하는 이유는 지금 당장, 나에게 없는 것에만 골몰하기 때문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의 아픔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내용은 사도바울이 받은 은혜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층 천까지 올라가서 (일층 천- 우리가 보는 하늘, 이충천- 해와 달과 별이 운행되는 하늘, 우주  상층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 하늘나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가시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숨깁니다. 남이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냥 혼자 괴로워하다가 아파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가져나와 기도하는 자, 예배하는 자는 더 이상 가시를 숨기지 않습니다. 

응답하시건 거절하시건, 치료하시건 남겨두시건 그것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자기의 가시를 놓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체험했습니다. 

내 능력의 약한 데서 더 온전하여짐을 경험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강하게 보이려고, 남에게 약점 잡히지 않으려고 바둥바둥 사는데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약해질 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세상은 자기의 강한 것을 자랑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든 가시를 감추고 괜찮은 듯 살아가지만 가장 중요한 때에 가시를 드러내며 찔러댑니다. 매정하게 찔러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시를 인정하고 가져와서 치료받던지, 아니면 가시보다 더 큰 은혜를 맛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이 성전이나 언약궤를 지을 때에 주재료로 사용했던 나무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조각목입니다. 

조각목은 싯딤나무 혹은 아카시아 나무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사막에 서 있는 싯딤나무는 그야말로 가시나무입니다. 

조각목은 서로 찔러댑니다: 조각목은 사막에서 자라기 때문에 결이 심하게 꼬여서 모질어진 악마디가 많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험난한 인생 중에 모나고 거친 성품이 많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각목은 가시가 많아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끼리 부딪히면서 서로 찔러댑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이처럼 조각목은 모나고 찔러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막 목재 부분을 모두 조각목을 사용하라고 하셨고,  특히 성전을 떠받치는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막을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짓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땅에서 받은 면류관이 어떤 면류관인줄 아십니까? 

바로 가시 면류관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씌여준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찌르시는 것을 다 담당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물론 가시가 있으면 아픕니다. 될 수 있으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가시를 빼내어야 합니다. 나자신도 남도 찌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의 재료가 조각목이든 교회는 가시 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그 찔리는 상처가 아프고 괴로와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로서 서 가는 것입니다. 

가시가 예수님의 면류관이듯이 가시가 그 분을 따르는 우리 성도들의 면류관이기도 합니다. 

가시를 통해서 더 겸손해 지시고 가시를 통해서 더 큰 은혜, 넘치는 은혜를 맛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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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23 16:59

    약함으로인해 온전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바라봅니다.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내가 너를 지명하였다. (이사야 43장 1-2절) 


[사 43:1-2]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1. 선출직과 임명직 

  • 한 나라의 관직에는 크게 선출직이 있고 임명직이 있습니다. 정치를 예로 들면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은 선출직이지요. 살다보면 대부분의 직이 선출직입니다. 회사는 시험을 통해서 신입사원을 뽑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일한 성과와 또는 계속되는 시험을 통해서 승진을 시키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공정함과 객관성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상관이 주관적으로 임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위원은 투표를 통한 선출직이지만 주로 행정이나 실무를 맡는 각 부처의 장관들은 임명제입니다. 뽑는 자의 주관이 가장 큰 기준입니다. 그래서 장관을 뽑을 때마다 잡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적당한 기준을 초월해서 임명되는 경우를 "낙하산 인사"라 합니다. 누군가 윗선에서 힘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편애가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임명직입니다. 임명직에는 거의 항상 수근거림이 뒤따름니다. 무슨 관계일까? 뒤에 무슨 빽이 있을까?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는 것은 선출직을 말하겠습니까? 임명직을 말하겠습니까? 임명직입니다. 여러 명에서 어떤 객관적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합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에게 지금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이 "지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2. 이사야서 

  • 이사야서는 제 5복음서라 불릴 정도로 구약의 성경 중에서도 복음의 내용을 가장 깊이 다룬 책입니다. 

이사야서는 전체가 66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39장 까지는 웃시야왕에서부터 히스기야 왕까지 유다 말의 이스라엘의 타락상과 더불어 유다의 심판의 메시지가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40장이 시작되면서 시대가 갑지가 바벨론 포로기로 들어서면서 이사야서의 메시지는 심판에서 구원으로, 하나님의 회복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이야기, 그 종에 의한 이스라엘의 구원이 메시지로 절정을 이룹니다.


3. 본문의 전장인 42장 21~25절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게 하여 존귀하게 하려 하셨으나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여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락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크고 존귀하게 하려 했지만 이 민족이 도둑 맞고 탈취를 당하여 다 굴 속에 갇혔고  옥에 갇혔다. 억울한 일을 당하되 도와줄 자가 없다. 지금 큰 낭패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 백성인 이스라엘이 지금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불타고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 뒤에 구절도 맥락은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했느냐?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다. 순종하지 않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25절에 가면 하나님의 분노가 절정에 달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 뭡니까? 그렇게 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부르짖어야 하는데 도무지 다 죽어가는데도 깨닫지도 마음데 두지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4. 43장 

그래서 맥락으로 보면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더 큰 진노를 내리겠다거나 해야하는데 뜬금없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이가 지금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회개한 것도 아닌데, 돌이킨 것도 아니고 기도한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분노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야곱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너를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 내가 잘 할 때, 무언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때에 날 사랑한다하시면 납득이 간다. 
  • 그런데 내가 정말 잘 못하는데, 자꾸만 어긋나는데 그런데 내가 널 사랑한다. 너는 정말 내 아들이다고 할 때에는 그 말이 잘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잘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 분이 날 지명해서 임명했다는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에... 기드온을 부르실 때에,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하나님이 지명하여 부르시는 그 현장에서 하나같이 난 아닙니다. 난 죄인입니다. 날 어서 떠나세요...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 또한 함께 예수 믿는 자들 중에는 정말로 믿음이 연약하고 인간적으로도 볼품없고, 별 애정이 안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는 짓마다 밉상이고, 도대체 그 말과 행동과 생각이 하나도 맘에 안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를 지명해서 부르면서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해서 불렀다. 넌 내 자녀다"하면서 귀한 직분을 주신다면 화가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도 정의롭지 못하고 편애가 가득하고 옳지 못하다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지명해서 불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불합리하고 편견이 가득하고 공정치 못할 정도로 하나님 맘대로인 것...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편애다. 어떻게 그렇게 그런 자들, 그런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가? 


1) 내가 너를 구속했다. - 내가 너의 죄값을 치뤘다. 내가 용서했다. 내가 널 샀다. 입양했다. (1절) 

-> 내 부족함을 그가 구속하셨기 때문에 날 임명할 정당성이 생긴다. 


2) 내가 그를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다. (7절) - 내 것이므로 내가 책임진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이가 (Create)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Form) -> Refoem, Transform...(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 약속) 

-> 그가 야곱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셨다. 변화시켜 주셨다. 회복시켜 주셨다.  

이스라엘에게만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했다고 하지 않고 아직 야곱인 자에게도,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때라도....


3)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이다. (7절) - 그들을 통해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일 것이다. 그들을 통해 또 다른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죄악이 많을 지라도 반드시 그들을 나의 자녀의 합당한 자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들로 만들 것이다. 


 5. 지명  2 

  • 지명은 그가 나에게 이런 자리, 임무를 주었다. 
  • 세상-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기가 주인되어, 자기 주관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
  • 세상은 힘들면 피한다. 맘에 안들면 바꾼다. 길을 가면서 힘들면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고민하며 염려한다. 
  • 어떤 사람은 직장을 바꾼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도 바꾼다. tv 채널 바꾸듯이 자꾸 인생의 노선을 변경하며 바꾸려고 시도한다. 
  • 그런데 지명해서 불렀다는 말은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이 친히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 가정에 살도록,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도록, 그 자리에 똑 맞는 사람이 나라서 그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한사람 나 만이 그 자리, 그 위치,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목사로서, 어떤 사람은 장로로서, 권사로서, 안수집사로서, 집사로서.... 하나님이 그 자리는 반드시 너가 해야 된다면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 나 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나를 창조하신 이유가 바로 이 것 때문이라고.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남편, 다른 사람이 보살 힐 수 없는 자녀, 다른 사람이 쉽게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과 바로 내가 그 곳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 할 수 있도록 임명되었다고. 하나님께서 꼮 찝어서 나를 임명하셨다고.... 
  • 물론 하나님께서는 돌맹이 하나를 통해서도 원하시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그런데 왜 그토록 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자란 나 같은 것과 동역하기를 원하시는가? 
  •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4절)
  • 도대체 그 분이 왜 날 그렇게 사랑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턱이 없다. 나같은 것을 어떻게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았는지 알 턱이 없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하나님 눈에 콩깍지가 낀 것이다.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6. 야곱의 두려움 

  • 내가 맡은 바 직분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에 밀려드는 죄책감은 곧 두려움으로 온다
  • 일이 잘 안되고 어려울 때 우리는 내가 잘 못해서 그런 일이 닥쳤다. 하나님이 날 벌하신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물론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환경은 그 말이 맞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어려움도 주시고 연단도 시키신다. 때로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책감을 주기도 한다. 
  • 그런데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평강이고, 자유이고, 기쁨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와도 그 분은 우리를 절대 죽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1) 물 가운데로 지날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요 - 홍해를 건널 때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홍해를 건너는 사건- 바울은 이것을 세례의 사건으로 풀이. 

2)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광야 생활의 마지막 가나안을 입성하기 전 건넌 강- 요단강. 

    (수 3: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 이제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나갈 때에 어떤 어려움도 이기게 하신다. 

3)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다니엘과 세 친구) 

(단 3: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 불같은 시험 많아도 겁내지 아니할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결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지명하여 소명받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분은 야곱된 우리를 이스라엘로 바꾸어 줄 것입니다. 무기치하고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자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용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곁에는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보지 말고 환경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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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6 02:18

    샬롬^^
    목사님 오늘도 은혜많이 받고 갑니다.
    감사드려요.♡

 

은혜는 모든 것을 바꿉니다.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설교자로서 제일 힘을 주는 말 - 성도들에게 은혜 받았다. 

또한 설교자로서 가장 무기력하게 만드는 말 -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은혜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성경은 은혜로운 환경 가운데 살아가지만 전혀 은혜롭지 못한 사람들을 소개한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되 내 것이 다 네것이니..."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 아버지와 함께 거하고 떠난 적도 없고,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았는데.... 그에게 은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은혜의 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 38년된 병자.... 왜 매일같이 은혜의 집에 모였는데 그들에게 은혜의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까?


이와는 달리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버을은 다시 한 번 복음을 전하면서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현제의 모습.... 

과연 예수 믿은 후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많이 받았는가? 

다메섹 도성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바울의 모습 


(빌립보서 3장 5-6절)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는 고린도교회를 세운 개척자였지만 지금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분열되어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고 있다. 그의 사도권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가 말이 어늘한 것을 비아냥 거리고, 더 나아가 그가 생긴 것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는다. 


예수를 알기 전 자기 잘 난 맛에 살던 바울은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빌립보서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눈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리고 지금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말하며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것을 아는 것이다. 은혜를 그리스도릉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자기가 받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았고 또 받고 있는 그 은혜의 내용을 15장 1절부터 설명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서 선 것이라"  (1절) 


은혜는 곧 복된 소식, 복음이다. 우리가 이미 받았고 또 지금도 그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반대로 헛되이 믿는다면 - 구원에서 멀어진다. 구원과는 성관이 없다. 이 구원은 장차 올 구원이기도 하지만 오늘 내게 임한 현제의 구원이기도 하다. 


-> 은혜는 내게 전해진 그 복음의 말을 굳게 지키고 참되게 믿는 것이다. 


그 복음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3~4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8절)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 사도될 자격도 없고, 예수의 생전에 예수를 따르지도 믿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예수를 핍박하던 나같은 자에게까지 나타나신 주... 


너무나도 평범하게 들어왔던 그 복음의 내용이 내 삶의 중심에 박히도록 들어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정말로 만삭되어 난 자 같은 나, 아무런 믿음의 자격도 조건도 없는 내가 예수 안에서 천국의 시민권을 받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유대인들이 들으면 신성모독이라 여기고 깜짝 놀랄 그런 친밀한 관계...) 


  •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예수가 달린 십자가, 그냥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잘 안 다가온다. 그 십자가는 누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가? 내가 달려 있어야 할 십자가. 


- 군대에서의 경험, 군대에서 사고가 나서 영창은 아니고 군기교육, 총과 모든 개인용품을 넣은 군장을 매고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연병장을 돌고 자녁 먹은 다음 저녁 7시부터 시작해서 하루 A4로 10장씩 번성문을 써야 잘 수 있었는데 ...도저히 쓸 것이 없어서 첫날은 새벽 2시가 되어서 잠자리....

그 다음날 또 아침에 일어나서 연병장을 도는데 벌써부터 반성문 걱정.. 

그 날도 새벽 2시 

그런데 그렇게 반성문을 쓰다보니까 내가 어릴적 부터 저질러왔던 모든 행동들에서부터, 마음 속에 품었던 생각들, 행동으로 저질르진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풀어왔던 수 많은 폭력과 살인과 음행과.... 

그리고 겉은 바른 척 하지만 속으로 풀어왔던 그릇된 말들, 욕들.... 

2주동안 난 정말로 내가 큰 죄인이었구나. 내가 이런 벌을 받아도 쓰구나... 


- 언젠가 TV에서 정치범으로 몰려 30년 가까이 억울하게 감옥할이 하고 나온 사람들의 인터뷰

억울해서 언떻게 사셨습니까? 

처음엔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내 죄값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젠 별로 억울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 로마 시대의 사형 방법, 지금은 금지된,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참혹한 

벌거벗겨져서 숨이 멎을 때까지 고통을 받으며 또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사람들로부터, 군병들로부터 방아야 하는 조롱과 멸시... 


십자가 상의 강도 - 

(누가복음 23장 41-42)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은혜는 내가 받을 상보다 조금 더 받는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나는 죽어 마땅한 데 오히려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 은혜는 어느날 사두었던 복권이 당첨되는 정도의 행운이 아니다. 나는 산 적도 없는 천국의 시민권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어진 것이다. 
  • 기대치도 않았는데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그런 상이 아니다. 나는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오히려 삶이 되돌아 오는 것이다. 

-> 은혜는 갚을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헤아릴 수로 셀 수 없는 것이다. 은혜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 그런데 그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부활이다. 

- 고린도전서 15장은 흔히 부활장이라 일컫는다. 

고전 15장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 겉은 살았으나 죽은 자 같은 자. 영이 죽은 자, 범죄한 아담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적으로 죽은 자의 이중의 의미 

 ex) 계 3:1)…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이다. 살아있으나 정작 죽은 자 같은 자들의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은혜가 오는 순간 죽음은 사라진다. 

 가장 절망적일 때 그의 은혜가 생각난다. 

 

 (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면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은혜는 주가 베푸신 역사가 내 일상의 삶 중에서 고백되어 지는 것이다. 내 입술로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비로서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 그런데 은혜를 입지 못하는 자 
  1. 자기가 십자가에 달릴 만한 죄인임을 부정하는 자 

죄인, 새리, 창기- 자기가 죄인임을 누구보다 아는 자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 자기는 상 받을 자라고 생각하는 자. 


2. 남의 은혜를 바라보고 자신의 은혜를 비교하는 자ㅡ, 은혜의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들은 은혜를 누릴 수 없다.  

탕자의 형

포도원에서 일찍 나와서 일한 자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 


남의 은혜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부당하게 느껴진다. 왜 은혜를 수치로 환산하기 떄문이다. 

남의 은혜는 큰데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작아보인다. 그런데 은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3. 내 삶이 상황이 주님을 가릴 때에 은혜는 보이질 않는다. 

마 14: 24: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7절: 예수꼐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절: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지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나 그렇게 상황에 눌려 수렁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다윗을, 수많은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을 붙잡아 일으키신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른 뼈에 생기가 돋게 하신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다. 

은혜가 보이질 않는가? 느껴지지 않는가? 너무 바빠 은혜를 바라볼 시간이 없는가? 

너무 무기력하여, 떄로는 우울하여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가? 


가만히 십자가 위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있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내 모습을 가져다 보아라. 

어울리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을 만하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도 싸지 않은가? 

그런데 그 자리에는 내가 없고 언제나 주님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저주의 상징인 그 십자가가 이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보물이 되게 하신다. 목거리마다 귀거리마다 가장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호품이 되게 한다. 버림받은 것 같은 나의 존재를 그렇게 보석같은 존개가 되게 한다. 


당연히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내 모습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보고도 이제 일어나라 하신다. 

내가 널 위해 죽었거늘 너 지금 무엇하고 있냐 말씀하신다. 

은헤는 내 모든 우울함을 사라지게 한다. 내 억울한 모든 삶을 무용지물이 되게 한다. 

은혜는 내가 값을 매겼던 모든 부조리와 불평등과 부폐를 전혀 나와 상관이 없게 만든다. 

난 은혜받는 자다. 은혜는 나를 숨쉬게 한다. 

나의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그냥 나를 보시고 구해주기로 작정해서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내게 경험된 그 은혜가 우리 성도 여러분께도 경험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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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2.15 04:20

    주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