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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성탄 (요한복음 1:9-13절) 


요한복음 - 사복음서 중의 마지막 

마태, 마가, 누가- 공간복음 (예수의 생애, 같은 사건들을 바라보며 각기 다른 개인적, 공동체적 시각으로 기록된 복음서)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 하지 않는다. 

영어로는 the Fourth Gospel- 네 번쨰 복음이라는 말로 주로 불린다. 

독수리 복음 - 가장 높이 나는 새 - 예수님의 신성- 초대교회로부터 영성가들에게 가장 영적인 책으로 여겨졌던 성경 

왜?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부분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요한복음만의 사건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3장의 니고데모와의 만남 - 그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 

4장의 사마리아 여인

5장의 베데스다 연못의 사건...

마지막 -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와의 만남 

  • 예수님의 7가지 자기 계시

- 나는 생명의 떣이다 

- 나는 세상의 빛이다

- 나는 양의 문이다

- 나는 선한 목자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나는 참 포도나무다 

  • 7가지 죄, 7가지 기적...


사도요한의 성경- 

바울, 누가, 마가가 큰 축 VS 요한의 성경 


요한복음 1장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계시록 - 종말 

 -알파와 오메가 - 처음과 끝을 다룬 책 


 요한복음 (신자의 과거- 믿음) 

요한 서신 (신자의 삶 - 현재-사랑하라)

요한 계시록 (신자의 미래- 소망) 

- 그러나 요한의 글에서 일관적으로 흐르는 주제- 바로 사랑

 

  •  요한복음에 나타난 자기 표현 -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 

[요 13:21-요 13:25]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 13: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요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요 13: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 열 두명의 제자들이 식탁에 쭉 앉아 있는데 중앙에 있는 예수의 왼쪽에 앉아 있는 머리가 긴 소녀같은 모습 - 막달라 마리아다라는 음모설 - 베드로가 귓속말로 하는 장면 

1. 베드로 조차 꺼내기 힘든 말을 요한을 시켜서 묻게 하는 장면 - 베드로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그림 

2. 예수의 품- 예수님의 심장소리, 그는 주의 품에 기대어, 만민을 위하여 끓는 사랑으로 뛰노는 주의 심장 고동을 들었다. 저가 주의 마음을 알아내는,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저는 주의 심장의 고동을 친히 들어서 반포한 사람이다. 

주의 사랑을 가장 깊이 깨달은 자 


예수의 십자가 현장- 그가 심문당할 때 - 베드로는 뜰 밖 멀리 서서 어린 계징종의 질문에 두려워하며 예수를 세 번 부인했지만 요한은 뜰 안까지 들어가 심문을 지켜 보았으며 예수가 십자가를 지시고 달리는 그 현장끼자 함께 햇던 유일한 제자. 


주와 가장 가까왔고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의 무덤가에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을 종합해보면 요한의 머어니 살로메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가까운 친척관계엿거나 적어도 아주 가까운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마 20:20-마 20:23]- 청탁 

(마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마 20: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 - 창세기의 태초 - In the Beginning, 처음 시작 

요한복음의 태초- 영원- 시작을 알 수 없는 그저 존재하는, 그냥 있는...창세기 1장 보다 더 근원이 되는 영원한 시간


말씀이 있었다. - 하나님은 영이다. 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인간에게 감각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에게 감각되는 표현 방법- 말씀, 말씀으로 들려지는, 말씀으로 경험되는, 그리고 하나님의 그 뜻이 표현되는 방법. - 말씀 - 하나님의 자기 표현은 말씀, 곧 예수를 통해서다. 


  •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예수를 통해 펼쳐진다. 영이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예수를 통해 이루어가신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표현되지 않는다. 

성탄 이전에 그 예수는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그리고 성탄은 통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오셨다. 함꼐 동거햇다. 


성탄은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다. 


  •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예수가 인간에게 임한 결과가 생명과 빛으로 표현되어 진다. 


말슴이 임하기 전 세상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 무질서 

공허 - 무의미 

흑암의 깊음- 블랙홀 - 무엇이든지 그 안으로 들어가면 Kaos와 Nothing 

빛이 있으라- 무질서한 삶에 질서가 잡힌다. 무의미한 삶에 의미가 생긴다.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가지를 내듯이 열매를 낸다. 

이것이 빛과 생명으로 표현된다. 


예수와의 만남은 우리 삶에 생명과 빛을 주는 것이다. 

질서와 안식을 주고,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다. 


  •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문제는 예수가 왔는데 깨닫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다. 

성탄이 되어 예수가 오셨는데 교회 안의 제사장들이 동방박사의 전해주는 소식에도 무감각하다. 

열처녀 처럼 신랑이 오신다는 소리, 메시야가 오신다는 소리를 들으면 뛰어 나가 맞이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삶이 달라질까, 자기 위치가 변할까 두려워하며 그를 죽이는데 앞장을 선다.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는데 에수의 제자들은 방문을 걸어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살고 있다. 

예수는 부활해서 하늘엔 난리가 나고 오히려 로마의 정부와 속물이 된 제사장들은 난리가 소동이 났는데 제자들은 하루 하루의 삶을 위해 물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다시 물고기 낚는 어부가 되고자 한다. 

하늘엔 난리가 나고 잔치가 이루어 지는데 세상에 빠져 있는 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났는지 무감각하다. 


이러한 안타까움이 9-11절까지 계속 나열된다. 

[요 1:9-요 1:11]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의 말씀, 예수의 생명, 예수의 빛으로 지음받고 그로 말미암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다시금 혼돈과 공허 속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질서와 안식을, 열매와 생명을 주려는 예수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접지 아니한다. 

영접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다른 말로 하면 거절했다는 것이다. 걷어 찼다는 것이다. 

필요없다고 내팽겨쳤다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오늘의 삶,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자기만 있어씨 때문에

생명이 뭔지도 빛이 뭔지도, 열매가 뭔지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는 자, 예수를 받아들이는 자, 이것이 당연한데도 당연치 못한 시대에 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오직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는 독생자 예수다. 예수처럼 되게 하셨다. 

예수와 같은 권세를 주셨다. 권리를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셨다. 


  •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란 무엇일까?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녀로서 누리고 싶은 권세는 무엇인가? 

세상의 어떤 권세보다 높은 권세. 권위..

다시 마태복음 20장 -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구하고자 한 하나는 주의 우편에,하나는 좌편에 앉게하고 싶은 그 권세의 자리. 

(마 20:22)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 권세의 자리가 무엇인지, 그 잔이 무엇인지 주님이 보여주신 그 권세, 그 잔의 정체


[요 13:13-요 13:15]

(요 13: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34-요 13:35]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권세, 정체- 사랑하는 것, 섬기는 것, 발을 씼겨 주는 것 


요 21:15-23절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치라. 

- 목자로서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 사람낚는 어부의 완성.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인상적인 장면 

[요 21:18-요 21:19]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네가 하고 싶은 데로, 네 열심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삶으로 가라. 

(요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는데 정작 따르려 하는 자는 요한 - 라이벌 의식 

서로를 의식하고 서로 먼저되고 서로 좋은 자리... 


그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 네가 무슨상관이냐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베드로를 꾸짖는 장면 - 이 것을 누구에게 보게 하시는가, 누구를 통해 증거하게 하시는가? 요한의 눈을 통해, 요한의 입을 통해...

정작 혼나는 것은 요한 


요한에게 맡기신 것 -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가톨릭에서는 이 마리아를 예수의 육신적 어머미 마라아라 해석하며 마라아를 신성시하지만 

영성가들은 좀 더 확대하여 이 어머니를 성부 성자와 더불어 성령으로 존재하는 공동체 교회로서 넓게 해석 


베드로가,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바울이 마음껏 세계를 누리면서 교회를 세우며 순교할 때에 오직 요한은 세상으로부터 이단으로 부터 교회를 수호하며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자.로서

사명을 다하고 죽는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렸던 열혈남 요한은 사랑의 사도, 섬김의 사도가 되어 가장 인격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가장 예수를 깊아 경험한 영성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의 심장을 파고 들어가 그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여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는 그 제자, 그리고 다름아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난 예수를 정말 사랑합니다. 고백하며 베드로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끝까지 섬겼던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요한이 경험한 예수, 요한이 경험한 성탄은 바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몸을 네어주신 예수의 사랑, 죄인인 우리 앞에 앉아 우리 발을 씼겨주며 내가 주와 선생되어 너희의 발을 씼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씼겨주라 하신 그 권세, 그 하나님의 아들들만이 할 수 있는 그 사랑이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가의 성탄 (막 16:19-20)


마가복음 - 복음서 중에서 가장 연구가 덜 된 복음서. 주석이나 설교문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두드러지게 적다. 

              - 가장 짧고, 사건도 간략하며, 마가복음이 내용은 거의 대부분이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자세히 기록되어서 마태복음의 축약본으로 여겨지던 복음서. 

    

    성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이루어지면서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는 것이 학계에서 인정되면서 각광받기 시작, 마가복음 이전에는 예수의 생애를 전테적으로 모아서 기독된 문서가 없었다. - 예수 연구의 가장 고전. 

    

설교의 제목 - 마가의 성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가에는 성탄이 없다.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마가복음의 시작은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시작하면서 바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며 세례를 베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예수의 삶에서 세례는 바로 공생애,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적인 삶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마가복음은 예수를 끊임없이 일하시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밤 늦게 까지 일하시고 새벽이면 또 기도하시고 그리고 나서 또 하루의 사역을 시작한다. 


마가의 기록 목적을 담은 핵심 구절은 10:45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거룩한 신성으로 인해 존귀히 대접받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낮에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고도 집에 돌아와 쉬기는커녕 주인의 상을 차려 주는 등 가사까지 해야했던 유대 당시의 종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바없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사자복음, 혹은 왕의 복음이라 부르면서 마가복음을 이와 상반되게 종의 복음, 송아지 복음이라 불린다. 인간을 위해 살아서도 늘 일하고 죽어선 재물이 되고, 또 양식이 되는 송아지에 빗댄 말이다. 


그래서 일할 수 없는 아기의 모습, 사람들르부터 경배받고, 예물을 드리며 사랑받는 예수의 모습을 마가복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유일하게 예수께서 쉬시고 그의 권능이 드러나는 구절이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이 마지막 부분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거기서도 소박하게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라고 표현하지 천사들이 영광을 돌리고 나팔이 울리는 그런 장면은 허락되지 않는다. 


  • 마가복음의 후에 나온 복음서들 모두 예수의 나심에 대한 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일하시기 전에 아기로 오신,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니 태초부터 존재하신 예수의 무한성, 거룩성, ,그리고 그 신비를 다루지만 마가복음에는 성탄이 없다. 


  • 마가에게 예수는 어떤 분이셨을까? 마가는 예수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난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또 다른 마가는 아닌지, 우리에게도 마가에게와 마찬가지로 성탄을 잃어버린채, 안식을 잃어버린채 일하는 신앙, 일하시는 주님, 또 우리에게도 신앙생활이 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지 마가에게 성탄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 마가와 같은 신앙인들에게 성탄을 살아갈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설교를 준비했다. 


  • 마가는 누구인가? 성경에 마가는 마가 요한, 또는 요한으로도 가끔씩 불린다. 

마가는 헬라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유대인들의 이름이다. 이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두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1. (행 12: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 예루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서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순교하게 되고 베드로도 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때 천사가 홀연히 일어나 그에게 묵여져 있던 쇠사슬이 풀어지고 옥문이 열려 인도하는대로 따라갔더니 바로 마가요한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던 그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마가의 집- 예전의 집에서의 응접실- 다락방- 2층 응접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2. [행 1:12-행 1:14]- 마가 다락방으로 성령 강림 사건 

(행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행 1: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3. [눅 22:12-눅 22:13]- 최후의 만찬 사건 

(눅 22:12)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눅 22:13)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초대교회의 많은 교부들의 전승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고 성경만을 기준으로 삼는 자들에게는 제가 말씀드린 방식대로 그 다락방, 초대교회의 첫 번째 교회가 바로 최후의 만찬이 일어났던, 첫번째 성령의 강림이 임했던,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회에 극심한 핍박이 일어났을 때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던 그 공간을 바로 마가 요한의 집- 마가 다락방으로, 마가는 그 현장에 서 있었던 마리아의 아들, 그 집의 주인 아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나바도 당대 유력한 부유한 자로 자기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며 복음에 전념했던 유력가, 권위자. 

마가 요한도 부유한 집 아들로 그 집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의 모임으로 내어 놓아 기도하던 집의 아들. 


누구보다 신앙적으로 좋은 환경, 예수의 증인, 초대교회의 증인, 사도들과 성도들을 가장 가까이 바라보았던 부유하고 동시에 신앙심 깊은 가정의 아들.

 

  • 마가의 실패 

1. [막 14:50-막 14:52]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막 14: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막 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어떤 복음서에도 없고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장면- 이 청년이 누구인가? 바로 마가가 자기의 모습, 아픈 경험을 그려넣은 것

가장 가까이서 예수 및 그 제자를 보아왔던 그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할 때 누구보다 처참하고 초라한 모습,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되어야만 했던.... 


2. [행 15:36-행 15:40]- 바나바와 바울이 갈라지게 된 결정적 사건 - 중간에 도망친 마가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이 두 번의 실패가 마가에게 어떤 트라우마로 다가왔을까? 

빚진 자 신앙 - 사도바울이 늘 얘기하는 내가 빚진 자로다. - 예수께, 성도들에게

고개를 들수 없는 부끄러움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다하면 마가에게는 베드로- 베드로 전후서 - 베드로가 불러주고 마가가 기록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었던 때 - 예수의 승천후 30여년이 지난 후 - 교회의 핍박이 가장 극심한 때 

당시 무역과 교육의 통로였던 로마와 헬라 제국의 통로를 따라 복음이 이방에 까지 퍼지자 원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긴장이 생기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 - 베드로와 야고보 (순교) 

이방땅의 바울과 디모데 - 순교 

-> 순교가 곧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다. 

* 순교자가 많았다는 사실은 또 반대로 변절자들이 많았다는 것도 증명한다. 

수많은 배교자들 중에는 때로는 박해의 때를 지나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친일파를 대하는 것과 같이 공식적인 회개한 배교자들을 어떻게 치리하는가가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세례시 행한 맹세,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을 배반한 자들을 수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당하며 신앙을 지킨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들과 똑같이 이유막론하고 받아들일것인가? 어떤 절차에 의해 받아들여야 하는가? 

베드로 -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왜? 예수를 배반했던 자가 어찌 예수와 같은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가? 하며 자원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 

예수를 배반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초대 교회 리더가 되고 순교자가 됨. 어떻게? 성령의 능력으로.... 


마가 - 베드로의 아들처럼 여기던 수제자. 베드로와 바울을 가장 가까이서 목도한 자. 

           베드로 -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세번이나 배만하고 모욕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자 

           바울 - 예수 믿는 무리들을 핍박하던 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초대교회: 누구는 순교하며 목숨을 바치며 신앙을 지키는데 누구는 배교하고 피하다가 세상 좋아지니까 다시 돌아오고...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갈등의 고조- 

  베드로도, 바울도, 우리가 모델로 삼는 신앙의 선배들도 다 배교했던, 핍박했던 자들이다. ...

  감정의 한계를 넘어선 용서- 무엇을 의지해서? 성령 안에서의 회개. 그것이 바로 회개의 세례이다. 

  

  • 이 마가의 회복과 열매 

1.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바울에게 디모데가 있다하면 마가에게는 베드로- 베드로 전후서 - 베드로가 불러주고 마가가 기록했다. 

파피아스라는 초대교회 교부는 마가복음도 사실 베드로의 증언을 마가가 기록한 것이라 여길 정도로 마가와 베드로는 친부자 이상의 관계 


2.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이 죽기 바로 전 마지막 때에 기록한 성경 

내가 메몰차게 멀리했던 마가를 불러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내 옆에 누가밖에 없다. 


바울의 마지막 죽기전 바울과 누가와 마가가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 

신약성경의 대표적 저자 세 명이 한 자리에 모여....말씀을 나누고 또 기록하고 그 광경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동스러운가! 


마가, 바울, 베드로 - 예수께 빚진 자로 살았다. 쉼없이 달렸다. 왜? 모두 예수를 뼈아프게 배반한 적이 있는 트라우마가 있던 실패자들. 


그런 삶도 물론 귀하지만 쉼이 있고 안식이 있고, 참다운 교제가 있고 즐거움이 있는 신앙


간증) 쉬는 것을 자책했던 나. - 멘토링 -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실까? 


빚진 자 신앙도 값지지만 주님은 우리를 빚잔 자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빚은 어차피 우리 힘으로 갚지 못할 빚이요 주님께서 십자가로 갚아주신 빚이다. 


신앙생활은 누림이다. 억눌림이 아니라 즐거워하는 것이다. 


저에게 마가가 이 성경을 기록할 때에 만약 함께 있었다면 마태와 누가가 했던 것처럼...난 성탄의 소식을 꼭 기록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아무런 일하지 않고 누워계신 그 아기예수를 바라보며 그 순수함과 거룩함에 취해 함께 찬양하고 그 앞에서 동방박사들과 우리의 값진 헌신을 담아 세상 그 무엇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마가와 함께, 마가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과 같이 쉼없이 달려가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잠시 머물러 성탄의 설램을 함께 하고 싶다. 

 

Posted by 소리벼리

 

마태의 성탄 (마태복음 2:1-12절) 


  •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은사님 중에 홍성철 교수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책 중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란 제목이 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를 다루면서 그 분이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1년동안 설교한 내용을 정리한 글인데 제가 놀란 것은 그분이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 그것도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다윗, 그리고 예수님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족보를 자그만치 1년 동안 설교를 해오시면서 쓴 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성경 1장을 가지고도 1년 동안 설교를 할 수 있구나... 

한 장을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며 설교하는 모습도 존경스럽지만 그것을 불평없이 1년 동안 참고 들으며 은혜를 나눈 성도님들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마태복음을 전공하신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마태복음을 통해서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시각으로 접근 할 것인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해 본 것 같습니다. 


  • 지난 시간 저는 누가복음의 마리아에 나타난 수내고지 사건을 다루면서 공관 복음이라는 것은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증언이기에 <공관복음>이라 말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태복음은 마태라는 한 사람, 혹은 그가 중심이 되었던 한 교회 공동체의 시각으로 바라본 예수를 다룬 글입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을 정경으로 만들었을 때에 성경의 배열, 순서를 정하는 데에도 치밀하고 활발한 연구와 논쟁을 걸쳐서 경정이 됩니다. 정경에 속한 것을 정하는 것도 치열한 논쟁이었지만 정경으로 뽑혀진 성경의 순서를 정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첫권,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 되고 서론이 되는 책을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매태복음이 신약성경의 첫 권으로 선택된 것은 정말 의외의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씌여진 순서를 보면 바울 서신이 먼저 씌여졌을 것이고, 복음서만 하더라도 마가복음이 씌여진 것이 마태복음보다 훨씬 전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생생히 증언함에 있어서는 차라리 사실을 중시했던 누가복음이 더 나았을 것이요

예수님과 가까운 관계를 권위로 내세웠을 것이라면 베드로의 성경이나 요한의 성경이 더 권위가 있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신학적 깊이나 성경의 전체 배열을 보더라도 성경의 끝이 요한 계시록 이니까 차라리 요한복음을 성경의 첫 권으로 놓아도 사람들이 이견을 제시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의 시작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해서 종말의 계시록으로 마친다면 문학적 구성도 훨씬 돋보였을 것입니다. 


  • 왜 마태복음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느냐? 바로 마태라는 개인적인 사람의 배경 때문입니다. 

마태의 직업이 무엇이었나요? 네 그는 세리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를 위해 고용된 세금 징수원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자기 민족도 배반하고 어떤 욕도 먹기를 작정한 돈에 환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리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탈무드에 보년 당시의 랍비에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동물들 중에 가장 잔인한 동물이 무엇입니까?" 

"사막의 짐승들,  곰, 사자와 더불어서 도시의 흉악한 짐승들, 그리고 바로 동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과 같은 인생들, 그 중에서도 세리들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그래서 새리는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관리나 군인들 보다 더 나쁜 민족 반역자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세금을 감해 주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추가해서 세금을 뜯어냄으로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했고 법정의 증인이 될 자격도 상실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세리는 기생, 이방인, 죄수들과 함께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사람이 아닌 짐승 취급을 당했고 늘 외면당했습니다. 


중요한 대목은 그들은 증인의 자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법정에서 그 어떤 것도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증언 자체가 거부되었습니다. 

그러데 가장 중요한 신약성경의 서문일 할 수 있는 그 첫 군을 새리였던 마태의 복음서로 정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은 누구였지요? 막달라 마리아... 당시 여자들 역시 법정의 증인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부활하신 첫 모습을 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그녀를 통해 부활의 소식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성한 사실을 증언하게 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태는 열두제자 들 중에서 별 두드러지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라고는 그를 부르시는 장면이 마태복음 중간에 살짝 등장하는 정도입니다. 


[마 9:9-마 9:13]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 9: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와 함께 밥먹는 것 조차도 사람들의 큰 공격의 대상이었을 정도였던 새리 마태를 예수님은 제자로 삼으시고 함께 그 집에 유하면서 밥을 잡수시고 또한 그에게 신약성경의 서언을 맡긴 것입니다. 


  • 마태의 또 다른 이름 - 레위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도 똑같이 다루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라는 이름 대신에 레위라고 명명합니다. 그러니까 시몬을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 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는 그가 지금은 로마 식민지라는 상황 안에서 레위인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고 돈에 자기의 사명과 정체성을 다 내어놓은 새리가 된 것입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의 마음 한 편에는 늘 자기 인생에 대한 죄의식과 갈등이 다른 새리들 보다도 더 심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그렇게 살아가면 마태의 직장까지 찾아가 나를 따라 오라 하시면서 마태라는 이름으로 그의 인생을 바꾸어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정말로 마태의 인생에 예수님이 산타처럼 나타나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  열두 제자들과 마태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그것도 사도라 부르는 12제자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무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또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 대부분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냐면 민족주의자, 열심당원의 정치적 색체를 띄고 있습니다. 

그 중 가나나인 시몬은 열성당원 중에서도 으뜸인 자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복음에는 가나나인 시몬이라고 하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셀롯인 시몬이라고 기록 

가나나인이라는 것은 가나안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에서 나온 정치적인 명칭입니다. 셀롯이라는 말도 개역성경 각주를 보면 "열심당원"이라는 주가 붙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나인이라는 말도, 셀롯이라는 말도 결국 시몬이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열심당이라는 그룹에 속해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극단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로마에 대해서 친근한 경향을 보이는 유대인들이 눈에 띠면 자기 민족임에도 과감하게 죽여 버리는 잔인성도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극렬 민족주의 집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카'라고 부르는 단도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이러한 로마의 앞잡이를 죽이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표적으로 가나나인 시몬 뿐만 아니라 예수니믈 잡으로 왔던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도, 그의 형제 안드레, 가룟 듀다등도 모둔 열심당원이거나 같은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까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그 공동체에 들어왔는데 그곳에 와보니 자기와 같은 새리들과 로마의 협력하는 자들을 죽일 칼들을 늘 가지고 다녔던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마태의 삶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12제자 무리 중의 가룟 유다가 홀로 유다 출신으로 지리적 이유로의 왕따였다면 어찌 보변 마태는 정치적인 이유로의 제자들 사이에서의 왕따었을 것입니다. 


열심당원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입니다. 민족을 위해, 동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자들이지요. 이들에게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무기는 곧 힘입니다. 칼로서, 힘으로써, 무력으로서 자유를 쟁취하고자 합니다. 

이와 반대로 세리는 자기를 위해서라면 민족마저도 배반할 수 있는 자입니다. 남이 아무리 욕을 하건 말건, 침을 뱉던 말던, 자기를 위해서, 자기 가족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욕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서슴치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무기는 곧 돈입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둘을 함께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세리의 집으로 가십니다. 세리였던 삭개오를 불러 내려오라 하시고, 그의 집에 머물겠다 하십니다. 종교지도자들 조차 저가 어찌 세리의 집에 유하느냐하며 비아냥 거립니다. 그런데....제자들은 모두, 열심당원 시몬을 비롯하여 그러한 성향을 띤 유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모우 함께 그 세리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을 쓰려던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할 것이다라고 경계하십니다.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 NO!,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한다. 

흔히들 하면 마태복음을 마태가 레위인임을 중시하여 유다인의 복음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족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 1:1-마 1:6]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유대인들은 왕의 족보를 이런 식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족보에 흠이 있어도 흠될 것은 가리고 성스럽고 거룩하게 포장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의 면면이 생생하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며느리- 근친상간 

살몬은 라합에게서: 이방여인 (여리고성) 

보아스는 룻에게서 : 모압여인 (모압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그냥 밧세바라고 하면 되는데 밧세바라는 이름 대신에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 - 다윗의 죄 

-> 죄인, 여인, 연약한 자...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창세기의 족보와 비교해서 또 두드러진 특징은 구약의 족보는 누가 누구를 낳고 몇세에 죽었더라로 표현되지만 마태복음의 족보는 낳았다는 표현만 있지 죽었다는 표현이 없다. 왜?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산 자들이기 때문에... 


  • 마태의 성탄 

마태가 경험한 예수의 나심..마태에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 

하나님 나라와 비교되는 나라-> 헤롯의 나라 

헤롯은 한 명이 아니라 예수의 탄생 때부터, 예수의 죽음때까지 3-4대까지 이어지는 한 가문의 왕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은 그 헤롯 왕조의 시조인 헤롯 1세로 그는 에서의 후예인 에돔 족속이면서 유다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로마의 치하에서라도 유다 족속이 아닌 에돔 족속이 왕이 된 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자기의 왕권을 강화하고 유댜인들을 회유하기 위해서 했던 두가지 정책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 - 스룹바벨 성전 - 바벨론 포로 귀환자들이 세웠던 성전- 학개서 2장에도 나오지만 이 성전에 대한 열등감 - 솔로롬 성전보다 못하다. 초라하다. 

헤롯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재건하며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고 동시에 종교 제사장과 서기관들,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 정통 유다 계열의 후손- 다윗의 후손에 대한 경계 - 유아학살로 이어집니다. 

왜>? 자기 출신의 대한 열등의식이 결국 유아 살해라는 잔학한 일로 이어지지요. 


  • 그는 이런 정치적 극한 혼란기에 유다인 아닌 동방박사들에 의해 증거되고 경배되고 찬양되는 예수님의 탄생을 증거합니다. 이스라엘도 아닌, 로마도 아닌 애굽도 아닌, 하나님 나라의 탄생을 알립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칼, 세상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돈, 자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명도 잃어버리고 돈 앞에 자존심도, 정체성도 팔아 넘겼던 새리머져 맞아 주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처럼 오는 나라. 

마태복음 5장에 가서 산상 수훈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지켜야 할 새로운 계명들을 알려 주시고 결국 원수도 사랑하며 새리와 열심당원이 하나로 살아 갈 수 있는

모든 갈등과 분열이 예수의 사랑 앞에 녹아지는...

나는 섬기러 왔다.하면 우리의 발을 씻기면서 내가 하늘과 권세를 네게 주었으니 가서 이 나라를 선포하라. 

화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광야에서 울려퍼지는 그 나라

그것이 마태가 보았던 성탄이고 예수님의 성육신이고 우리가 가야할, 우리가 증거해야할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몇 주 전 느혜미야 말씀을 증거하며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하며 범했던 두 가지 실패 

- 사마리아인들은 피가 더러운 민족이므로 성전에 끼이지 못하게 하자. 

-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힘없고 무력한 사람이므로 상종하지 말자 하면서 성전은 건축했어도 여전히 그 도시와 성벽은 폐허로 남겨두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으로 성전을 재건하는가? 오직 고레스를 통해 주신 것으로, 은혜로, 값없이,. 

그런데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앞세워 사마리아를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 밖에 살면서... 갈등과 분열을 일삼는 그들에게 

마태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예수의 새 복음 "서로 사랑하라. 이것을 통하여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일라리:는 요한의 메시지와 더불어 교회의 참된 모습,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주의 사랑 앞에 하나로 품어지는 성탄의 평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

 

말씀, 꿈, 그리고 성탄 (누가복음 1장 26-38절) 


결혼을 앞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결혼할 남자와 약혼을 한 상태입니다. 

집안끼리 약혼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신랑의 얼굴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날마다 그 사람을 상상하며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 조금은 설래기도 하면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몇개월만 기다리면 신랑이 혼수 예물을 들고 신부의 집으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엔 며칠동안 잔치가 열리면서 이 두사람의 결혼을 온 마을이 축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제가 끝나면 여인은 신랑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큰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이 여인을 방문하여 청천병럭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청천벽력이라는 것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린다는 뜻입니다. 푸르를 것 같은 여인의 삶에 일대 혼란이 찾아옵니다. 


혼인을 앞둔 여인에게 "네가 아이를 밸 것이라"(31절) 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이 여인에게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28절) 하고 말합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라니요? 그것도 신랑의 아이도 아닌 한번도 들은 적도 없는 성령으로 아이를 벤다니요...

유대인의 법으로 결혼하지 아니한 여인이 아이를 갖게 되면 곧 처형입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돌을 던져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정혼한 상태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마리아 뿐만 아니라 신랑될 사람의 인생도 큰 일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 벼락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28절) 라고 말합니다. 

도저히 은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평안하라구요? 

여러분 같은면 이런 상황에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놀람을 보고 천사가 거듭 이야기 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그러면서 그녀에게서 날 자가 누군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큰 자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며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자" (32절)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녀를 통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예수님의 나심을 알려준다 해서 "수태고지"라고 불리는 사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약 이러한 삶의 선택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마리아라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이미 예정되어 있는 요셉과의 단란한 가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천사의 초대에 모세처럼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택할 만한 자를 택하소서..."하시겠습니까? 마리아와 같이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하시겠습니까? 


  • 마태복음에는 이러한 예수의 나심을 부친인 요셉에게 말하고 있고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Canon, 모든 것의 척도, 기준. 그런 성경이 예수의 일생을 네개의 복음서에 각각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을 바라보고 쓴 글 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것, 같은 사건을 바라보아도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은 신약성경 저자 중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의사이자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가 쓴 글입니다. 

누가는 의사이기 때문에 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가 관심있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의 내용이지요. 

누가복음 1장 1절은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시작합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더 자세히 묘사하고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려


그러면서 세례요한의 탄생과 예수의 탄생, 사가랴의 반응과 마리아의 반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요 하나님 앞에 의인이며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없이 행하던 자라고 묘사합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친히 잉태를 말하는데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하면서 

천사의 말에 자기의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부정합니다. 어쩌면 마지막 율법의 선지자로서 나타나는 세례요한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는 율법적으로 제사장이요 그 모든 규례와 계명을 흠없이 지킨 자였지만 정작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형식은 온전한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꿈을 꾼다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신앙생활은 죽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내가 스스로 꾸는 꿈이 아닙니다. 

 내가 꾸는 꿈이 Dream이라면 신앙 안에서의 꿈은 Vision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꿈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꿈입니다.  

 기도할 때, 말씀읽을 때, 전심으로 찬양할 때, 성령을 통해 보여주는 꿈입니다. 

 약속된 꿈이고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말처럼 평안하게 오지 않습니다

 내가 누려왔고 살아왔던 익숙한 길, 나의 느낌에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버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인도함과 보호하심이 내가 나를 의지하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주가 사는 길입니다. 

내가 보기에 죽을 것 같은 길인데 주 안에서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날 때 나이가 75세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을 꿈꿀 수 없는 그런 나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그분이 지시한 땅으로 떠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 나올 때의 나이는 80입니다. 200만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그것도 뒤에는 애굽 군사들이 쫓아오는데 그 길을 떠납니다. 애굽의 궁궐은 아니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아이낳고 결혼하고 단란하게 살고 있는 안식처를 버리고 위험천만한 길로 떠납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복의 일등공신입니다. 가나안 가장 좋은 땅을 달라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는 땅, 또다시 전쟁을 해야지 취할 수 있는 땅, 그 땅을 내게 달라고 합니다. 

 

 내힘으로 할 수 없는 길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는 길입니다. 

 "오직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덮힐 때에 갈 수 있는 땅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시겠습니까?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고백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난 주가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이 말이 얼마나 대단한 신앙의 고백인지...모세를 보아도, 그리고 바로 앞의 사가랴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앙 좋다던 그들도 하나님이 비전을 보여 주셨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자기 상황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부정합니다. "나는 입이 뻣뻣한 자입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나는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보고 온 열 명의 정탐꾼은 "저 땅이 좋아보이기는 하는데 저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메꾸기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예수의 부친이던 요셉에게 이루어진 수태고지의 사건을 마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축소된, 혹은 외면당한 역할, 요셉 

성경 및 초대교회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요성은 많이 강조되어 온 반면 요셉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언급되어 오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8절 – 19절) 

  • 요셉은 당시 마리아와 정혼한 상태로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결혼 문화는 한국의 전통혼례와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남녀 간의 결혼은 주로 그들의 부모나 가족을 통하여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신랑측의 가족이 증인을 데리고 신부측 가족을 방문해서 결혼식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신부측 부모님들이 허락하면 약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결혼할 당사자인 남녀는 결혼 전까지 한 번도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약혼을 한 후 결혼까지 남녀는 서로 결혼을 준비하며 상대방을 그리게 됩니다. 
  • 아마도 그 준비기간 동안에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아이라는 것을 요셉은 알고 있었겠지요. 그럴 경우 이스라엘 율법은 파혼은 물론이고 이 일을 동네방네 알려서 파혼의 책임이 있는 여인을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마땅히, 혹은 당연히 유대인 남자로서 해야 하고 또는 해 오던 일이었지요. "당연한 생각" 
  • 요셉도 아마도 그 당연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유대인 남성으로서 당연히 율법대로 그녀의 죄를 드러내고 죄를 도말하게끔 세상에 알려서 자신은 의를 지키고 마리아는 죄를 받도록 하는 생각을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를 보호하고 지켜 주고 싶다고 결심하고 행합니다. 율법을 넘어서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성경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율법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살리려고 마음 먹고 행동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부합되고 당연한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서는 생각, 사람을 살리려는 생각을 한 요셉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조차 넘어서지 못한 율법의 문턱을 넘은 것입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20절) 

  • 아마도 요셉은 며칠 밤을 세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생각이 참 많았겠지요. 유대인의 법을 따를까, 잘 모르지만, 혹은 부정하지만 저 여인이 욕먹지 않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할까? 생각이 복잡한 요셉은 아마도 그런 생각들로 지쳐서 잠시 잠이 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생각에 지쳐있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듯 하나님은 요셉을 잠들게 하십니다. 왜 잠들게 하십니까? 꿈을 꾸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1) 

  • 내가 무언가 근심이 되어 잠도 못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잠들게 하시며 천사를 통해 말씀하여 근심을 바꾸어 기쁨되게 하시는 사건. 복음은 이렇게 어둠 속에 빛으로서 우리에게 오신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 왜 복음입니까? 바로 꿈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현실 속에서 논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꿈 같은 일이 일어났기에 바로 복음입니다. 사람은 꿈을 꿉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현실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신비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영혼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꿈을 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가 영혼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영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꿈이 담겨져 있는 씨앗이요, 반드시 열매맺게 되어 있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가 만질 수 있는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증거합니다. 

그렇지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고 그 꿈의 성취를 맛보는 권세를 주셨다고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이 말씀 대신에 꿈을 넣어 한 번 말을 바꾸어 봅시다. 

하나님이 꿈을 꾸시면 곧 만물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꿈은 곧 실현이고 창조입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꿈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꿈을 인간에게도 주어서 인간이 만물에게 명하면 그것이 이름이 되고 순종했는데 죄로 말미암아 말의 권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꾸면 말씀이 되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인간은 꿈을 꾸어도 죄로 말미암아 이루어 지지 않고 말을 하여도 서로가 신뢰하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말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만물도 인간의 말을 듣지를 않지요. 

아무리 꿈을 꾸어도 실현되지 않으니까 이젠 꿈을 꾸는 것 자체를 잊어버립니다. 꿈꾸려고조차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만물을 이루는 근원이 꿈에서부터 시작되어 말씀으로 나타나고 이 말씀이 만물이 되고 육신이 되었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안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고 만물 속에서 갇혀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님의 꿈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에게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온 이 하나님의 꿈을 외면하고 삽니다. 그 꿈을 살피지 않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만물에게 종살이 하듯 삽니다. 

그런데 이 말씀, 하나님의 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비로서 그 꿈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과 똑같은 꿈을 꾸며,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는 꿈꾸는 직업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꿈꾸는 삶입니다. 

성탄은 그 꿈이 나에게 오는, 하나님의 꿈이 나에게로 내려오는 설레는 시간입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