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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질그릇 속에 담은 보배 (고린도후서 4장 7-11절)

by 소리벼리 2021. 10. 24.

질그릇 속에 담은 보배 (고린도후서 4장 7-11절) 

 

1. 고린도교회 

고린도 교회는 항구도시로 잘사는 도시였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샌프란시스코 같은 도시였습니다. 국제적인 운동장이 있어서 올림픽과도 같은 경기도 하고 학문도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8개월간 머물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특별히 평신도의 신앙이 잘 발달된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서 하면 성령장, 사랑장이 있듯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에서 가장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은사도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은사도 많고 수준도 높았지만 고린도전후서에 보면 현대교회의 시각으로보아도 교회의 모든 문제가 집약된 교회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1) 항구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향락문화 또한 잘 발달되었고 때문에 문란한 일들이끊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2) 서로가 자기의 수준을 고집하기에 유난히 갈등과 분열이 심히 많은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각기 분파를 만들어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나누어 싸웠습니다. 

3) 리더십에 대한 불만  

 

이제 사도바울에 대해서 그가 무슨 사도냐? 그는 왜이렇게 말주변이 없냐? 그는 왜 이렇게 못생겼냐? 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문서를 보면 고린도성도들의 비판이 어느 정도였냐면 "저렇게 생긴 사람도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며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비하를 했고, 그가 말주변이 없는 것을 가지고도 끊임없이 비판을 했습니다. 바울의 뒤를 이어 2대 목회자로 세워졌던 사람은 아볼로 였습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요 또한 말을 누구보다 잘하는 웅변가였습니다. 처음에 아볼로의 말에 열광하던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겐 바울처럼 성령의 충만함이 없고 은사도 없다 하면서 아볼로도 도망나오듯 쫓겨 나왔습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권면하면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번째 목회자로 우리가 금요일날 나누는 디모데를 다시 보내면서 그 편에 보내는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 가장 바울의 감정이 드러나서 문장도 좀 가다듬어지지 않고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화가 스며들기도, 서운함이 들어있는 편지가 고린도후서...나중에 깊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질그릇과 보배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는 무엇입니까? 

6절)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 물질적, 육적 존재가 아니신 영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인간 

그런데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 육적 존재임과 더불어 영적 존재라는 것 

영성이라는 것 - 영적인 것을 감지 할 수 있는 성질.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특성.   

 

우리가 예수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 - 바로 우리에게 주신 보배, 보물이다. 

그런데 그 보배를 어디에 담았는가? 질그릇, 

질 그릇은 무엇입니까? 바로 연약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질그릇은 진흙으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바르지 않은 그릇입니다. 즉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그 보물을 질그릇 같이 깨지기 쉽고 연약한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3. 예화 

우츠프라카치아

'우츄프라카치아'라는 이름의 식물을 들어보신 적 있읍니까 아프리카에서 서식하는 이 식물은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이 손 길이 살짝이라도 닿으면 그날로부터 시들시들 하다가 며칠 안되어 결국엔 죽고 만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식물의 별명을 "지나치게 결벽증이 심한 식물"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런데 한 식물학자가 이 식물이 신기해서 오랫동안 연구를 했는데 새롭고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츄프라카치아는 어제 건드렸던 그 생물체가 내일도 모레도 계속해서 건드려주면 죽지 않고 계속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깊은 밀림에서 공기 중에 있는 소량의 물과 햇빛으로만 사는 음지식물과의 하나인 우츄프라카치아, 지나친 결벽증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던 이 식물은 오히려 한없이 고독한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고슴도치과의 호저: 호저의 딜레마,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로워 다른 호저에게 다가가면 다른 호저의 가시털이 자꾸 자신을 찌른다. 그래서 며칠동안 혼자 지내게 되고 그러면 또 너무 외로워 다른 호저를 찾고 또 가시에 찔리고는 다시 혼자가 된다. 평생 이것을 반복하는 동물.... 

 

4. 도입 질문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  

지진? 테러? 경제공황?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러스? 

 

그런 것들도 물론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것, 우울증과 두려움과 혹은 세상으로부터 나를 닫게 만드는 것...

바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점점 그런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뢰가 안간다는 것입니다. 

혼자 성경읽고 기도하면 은혜가 넘치는데 교회가서 사람만나면 누구누구 어떻더라부터 시작해서 서로 할퀴고 싸우고 하는 일들때문에 오히려 신앙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가시에 찔리고 시들시들 해지듯 내 삶에 상처만 남고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왜 받습니까? 

천국가기 위해서 받습니까? 그럼 영혼 구원 받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을 이룬 것입니까? 

 

영혼구원은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그 분을 내 중심에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의 회개와 고백, 그리고 신앙의 결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았으면 이제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구원 받기 위해서,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구원이 교회 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서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 무엇입니까?

전도하라고, 교회를 세우라고? 물론 제자들은 전도를 위하여 순교의 삶을 살았고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이 주신 새계명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주신 새 계명은 서로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화목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그 전의 삶에서 분리가 되고 성결해 지면서 함께 사귀던 사람들이 떨어집니다. 

구약의 거룩의 의미는 그래서 구별입니다. 분리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국교화되자 교회는 부흥했지만 금방 타락하여 순수한 신앙을 위해 사람들이 집을 떠나고, 도시를 떠나 사막에 나가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지금 주보에 실고 있는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이 바로 그런 배경에서 나온 사막으로 나간 사람들의 깨달음의 이야기입니다. 

때로 수도원에 들어가 순수한 신앙을 유지코자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로서 저는 때로 그런 구별됨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분리되어 순수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는 거룩한 대로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거룩해 진 사람은 다시 밖을 향해야 합니다. 

형제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직분? 참 사랑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신 직분. 

교회의 사명 - 서로 사랑, 세상을 밝히는 것. 

 

한없이 상처를 주고 받는 성도들에게,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 어떤 직분, 사랑하는 직분, 사랑하게 하는 직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왜 낙심하지 않느냐? 우리도 예수의 속을 썩이고 외면했지만 결국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기에. 내가 먼저 주의 긍휼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왜 가시가 돋아나는가? 

왜 쓴뿌리가 찌르는가? 

(고후 4:2)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 숨은 부끄러움의 일- 죄가 해결되지 않고 여전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
  •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결국 하나님을 속이고 
  • 그러면서 삶의 열매가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게 하는 것.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자, 결국 자기 중심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복음이 가리워 지는 세계. 그리고 그 영향력 안에 살아가는 나. 

 

깨지기 쉽고, 깨질수밖에 없고, 그리고 여기 저기 이미 깨져 버린 그리스도인의 삶. 호저처럼, 우츠크라파치아 처럼.... 사랑으로 다가갔지만 사랑으로 배반당해 더이상 다가가기 힘들어져버린 신앙인들의 모습.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점점 더 움츠려들고 낙심되고, 포기하고 싶고, 우울해질 때에..

(고후 4:5)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상처받는 나- 상처주는 나를 생각하면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 

내가 전하는 상처입은 내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 

그 분이 내 주인이고 그 분 때문에 나도 "너희의 종"이 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 

 

나 자신을 바라 볼때마다 넘어지지만 그 분을 바라보면 다시금 일어서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 예수그리스도의 능력,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말한 질그릇은 첫째는 자기 자신 입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바울이라도 고린도교인들로부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말들을 계속들으면 자존감이 무너집니다. 화가 나고 역정이 납니다. 자기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는 자도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핍박했던 예수 앞에 오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를 어떻게 처음 만났습니까? 

바울을 만난 예수의 첫번째 말은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예수를 핍박한 자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위해 살아가다가 자기가 조금 아프다고 역정이 납니다. 포기하고 싶고 사랑하기 싫다고 합니다. 

예수는 날 위해 죽었는데 난 조금 아픈 것 같고 무너지기가 일수 입니다. 

예수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예수의 십자가 안에 자기를 묻습니다. 

그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고후 4: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왜 그렇습니까? 예수 앞에 나오면 그 앞에 어떤 어려움도 핑계 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모든 핑계가 날 위해 지신 십자가 앞에서는 변명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질그릇은 또한 자기가 사랑해야 할 모든 형제들입니다. 

그들 또한 나 때문에 상처 입습니다. 

그들이 찌르는 이유는 누군가로부터 상처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버리고 할퀴고 아픔을 주었기 때문에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 처지를 알면 불쌍해 집니다. 

긍휼함이 생깁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치료해 줘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11절)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주님 앞에서 또다시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 이기심을 죽이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수의 생명으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생명으로,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생명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요, 교회의 목적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쓸모없고, 깨지고 깨지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만 우리 안에는 보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릇은 그릇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집니다. 

보배 때문에 우리는 존귀해 진 것입니다. 이 보배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쓸모없어 집니다. 

보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전할 수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질그릇처럼 광채도 없고, 쉽게 깨지기 쉬운 연약한 질그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런 질그릇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우리 질그릇에게 보석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외모를 따집니다. 

(고후 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그런데 그런 외적인 기준은 아무리 맞추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를 때도, 다윗을 부를 때도 그들이 준비가 되어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기에 연약한 자를 통해 실패없이 사용하십니다. 복음을 자격있는 자에게 맡겼다면 누가 그 복음을 맡을 수가 있겠습니까? 

복음이 복음인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질그릇같은 우리에게 임할 때에,  질그릇도 쓰임받는, 하늘의 빛으로 빛나는 귀한 그릇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1. 나는 질그릇 입니다. (그래서 우린 연약합니다) 

2. 당신도 질그릇입니다. (그래서 때로 깨지기도 하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보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빛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3. 그래서 난 보석을 담은, 보석같은 질그릇 입니다. 

 

찬양간증) 날 세우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