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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이유 (살전 2장 13절)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지금의 그리스지역에 있는 아테네 인근의 도시였고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빌립보 도시 다음으로 방문한 두 번째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지역에서 큰 핍박을 받으며 교회를 세운 후에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안식일날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전도를 하였는데 빌립보 지역에서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한 유대인들이 소문을 듣고 따라와 데살로니가 지역의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란을 일으키며 바울과 실라를 가리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 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일행을 쫓아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곳 데살로니가 지역에서의 활동은 10절도 되지 않게 짧은 문장으로 매듭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머문 기간을 2-3주 내외로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길어보았자 2-3개월 가량이라고 합니다. 짧은 기간동안 단기선교를 가서 아름답게 선교를 해도 열매를 얻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일행이 다녀갔던 그 기간동안 마을은 큰 소란이 일었고, 바울 일행에 대해서는 나쁜 소문이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고 교회만 남은 것입니다. 이들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바울과 실라는 어쩌면 유대인들의 말처럼 이 동네를 떠들썩하다가 떠나간 소란꾼처럼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지나간듯한 경유지였던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늘 마음에 품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바울이 서신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편지라고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하여 감사하며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지금 바울은 오랜 기간 전한 것도 아니고 빌립보에서 쫓겨나와 또 데살로니가에서도 쫓기는 가운데 복음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울의 말을 도망자가 전한 사람의 말로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었기 때문에 이 말씀이 또한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단지 말씀을 믿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들은 바울이 유대인에게서 고난을 받는 것과 같이 믿는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1장에 보면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게도냐 유럽지방에 전한 모든 성도들의 모범이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바울은 감격에 벅차하며 그들에게 말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2: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하늘나라에 가는 날 주 앞에 자랑할 면류관이 바로 너희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평생을 신앙생활 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 말씀을 읽지도, 믿지도, 기도하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데 인생의 선택의 순간이나, 여정을 보면 신앙과는 전혀 관계 없는 행동이나 선택이나 계획을 합니다.

 

어제 새벽에 나눈 유다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이렇게 한탄합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생각하며 선택하며 잔소리 듣듯 하는 사람들 -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내게서 떠났다 하시면서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리듯 그들을 깨뜨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 그런데 어떤 이는 짧은 만남, 한 번의 만남을 통해서도 누구보다 신실한 믿음과 신앙을 갖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공부, 기도훈련, 말씀의 훈련....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도구 들이 신앙의 본질을 바꾸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소 귀의 경읽기 처럼 아무리 교육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듣는 말씀을 책읽듯이, 교육받듯이,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을 것이냐,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것이냐 하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열매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고작 사람의 열매밖에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면, 그 말씀은 우리 심령을, 본질을, 모든 생각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 국가였던 영국에 종교개혁을 통해 영국 성공회가 시작되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 영국 성공회의 신앙은 형식적인 면에서 가톨릭과 전혀 구분되지 못하였고 당시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실질적 영국의 종교개혁적 운동이 청교도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들은 가톨릭으로부터도, 영국 성공회로부터도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 도무지 마음껏 찬양드리며 기도하며 말씀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열려지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100명 조금 넘는 신앙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지의 땅으로 건너온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시작입니다.

 

여러분,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전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목숨을 걸고 떠날 용기가 과연 어떤 마음일까?

한 달 넘는 항해로 말미암아, 항해 중에 이미 많은 사람이 죽고, 미국 땅에 도착해서 첫 해를 보내면서 또 많은 이들이 죽습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은 그들이 한 해를 보내고 첫 감사의 축제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입니다.

 

과연 그러한 때에 원망없이 감사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어떤 이들은 이전의 신앙생활을 기억하며 많은 답답함을 호소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맘껏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며 예배 할 수 있는 곳을 향해, 마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먼 항해를 떠나는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고들 합니다.

물론 사람들 부딛치지 않으며,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예배를 공급받으며 더 편해졌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편한 습성에 익숙해져 버리면 교회의 본질 또한 잃어버리고, 부딪치며, 깨어지며, 나 자신을 훈련하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입술로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날 곳이 없습니다.

세계의 어느 장소도 코로나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우리 신앙의 각성과 회복을 위해 어디를 향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전세계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가장 신앙이 뜨겁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갈망하는 나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사람인 줄 아십니까?

가장 뜨겁게, 순수하게 신앙생활한다고 여겨지는 나라는 한국도, 미국도 아닌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빼앗긴 나라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지금 현재에도 격리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며 지역 사회에서 축출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구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이 들어왔던 말씀을 암기하고 또 되새기며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가장 억압받는 땅에서 가장 순수한 신앙의 열정이 꽃피는 것입니다.

 

몇주전 무엇이 유대인들을 경멸의 대상, 비난의 대상에서 존경받는, 뛰어난, 지혜있는 민족으로 바꾸어 놓았나하는 말씀을 느혜미야 말씀을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무엇이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까?

바로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니 그들의 본질이 바뀝니다. 그들의 본질이 바뀌니 상황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도, 그들의 삶도 바뀝니다.

 

코로나 상황은 익숙한 상황에서 너무 쉽게, 나태하게 신앙생활 해오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우리의 믿음은 과연 환란이나 곤고에도 요동하지 않는 반속위에 기초한 믿음이었나? 아니면 모래 위해 쌓여진 모래탑은 아니었는가?

 

약 400 여년전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긴 항해를 하며 자유의 땅을 찾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신앙이라면 이제는 물질적 장소가 아닌 우리 마음의 장소를 찾아야 할 제 2 의 추수감사절을 준비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 역사상 수많은 성경을 불태우고 없애려는 노력들.

활자 인쇄술이 개발되기 전 약 1500여년 동안 성경은 오직 필사를 통해 다음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는 그들의 자세를 보면 가히 경외감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사하기 전에 목욕재개 하고 기도한 후에,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경외심에 가득한 마음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하나님을 대하듯 말씀을 옮기고, 하나님, 혹은 예수라는 단어가 나오면 필사를 멈추고 기도하고, 한 글자라도 틀리면 집중하지 못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기록하던 장을 찢고, 만약 한 권의 책을 필사하는 중에 네 번이나 다섯번, 어떤 이는 세번이상 틀린 글자가 나오면 그 모든 장을 다 찢어 처음부터 성경을 다시 썼습니다.

천년 이상을 이러한 필사가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손상됨 없이 후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필사를 하면서 우리는 화난다, 짜증난다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데 필사가들이 필사를 하면서 화를 낸 대상은 찢어야만 하는 종이가 아니라 오류를 범하는 자기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자신의 죄, 자신의 나태를 두고 회개하고 또 다시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기록된 필사 성경이 그들 교회의 영성이 되었고, 교회의 자부심이 되었다.

 

새벽말씀을 전하고, 또 그 말씀을 필사하면서 난 내가 경험하는 그런 말씀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전달되고, 또 함께 경험되어지기를 깊이 소망합니다.

떨어져 있지만 우리 성도들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이런 떨어져 있는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더욱 순수해지고 뜨거워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뵈옵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우리가 읽는, 우리가 쓰는 이 말씀은 만물을 창조한 바로 그 말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을 보는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질을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역사를 통해 상처입고 비뚤어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처럼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고난 가운데 가장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우리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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