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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그 민족을 변화시켰나 (느 8:1-12)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 -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특히 복음서에 등장하는 유대인 -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형식적 종교인, 외식인, 예수님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 현실에서의 유대인 - 1700만명의 인구 

           - 전세계의 경제, 정치, 사회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민족 -> 그들하면 떠 오르는 것 - 지혜, 탈무드... 

           오히려 구약의 때, 신약의 때보다 그들의 역할과 영향력과 이름은 비교할 수 없이 달라져 있다.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인 민족이 세계를 이끄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었는가? 

그 변화의 전환점은 무엇인가? 

유대인에 대한 여러 연구가 쏟아지지만 랍비들은 한결같이 그 물음에 이렇게 답변한다. 

 

유대인의 신앙과 삶을 변화시킨 것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들의 신앙의 중심이었던 두 번의 성전파괴를 통해서이다. 

 

BC 600-580년경에 걸친 3차에 의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화재 

  • 영적 딜레마 - 어떻게 하나님의 집이 불탈 수 있을까? (신앙적 딜레마) 
  • 성전의 상실은 곧 이스라엘 종교의 상실 - 민족의 상실 - 공동체의 상실 
  • 선지자들의 활동 (바로 성전 파괴의 시대 가장 활발한 선지자의 활동이 일어난다) 
    • 성전에서 바치는 제사보다 너의 삶을 제물로 드리라. 
    •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라
    • 성전, 제의, 제사장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일상 생활에서 믿음을 지키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 회당 중심, 말씀 중심, 일상의 삶 중심으로 그들의 신앙생활이 변화-> 예식 종교에서 배움과 기도, 말씀의 종교로 탈바꿈. 
  • 제사 중심 (제사장 중심) - 자신들은 변화하지 않고 외적 환경에 의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목도-> 말씀 중심 - 자신들의 내면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목도 
  • 유다이즘 - 유대인의 정체성 - 신비하게도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이 아닌 바벨론 땅에서부터 시작- 우리의 뿌리를 지키자. (왕도 없고, 제사장도 없고, 모세와 같은 리더가 없는 시기 -> 아무에게도 기댈 곳이 없을 때에 그들이 비로서 의지하고 기댄 것 -> 말씀 (모세오경, 신명기 6장 5절 -들으라 이스라엘아)등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 - 바벨론 포로기 - 흩어진 구약의 말씀들이 수집되고 책으로 만들어지는 시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헛된 자만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실질적인 탄생을 알리는, 실질적인 유대적 정통성이 확립되는 역사의 순간이 바로 오늘 읽은 느혜미야 8장의 순간이다. 

  • 느혜미야 - 유대인 이민자 3세 출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하고자 간청하여 페르시아로부터 파견나온 총독 -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이 황폐해져 있을 때에 그 성벽을 재건하러 온 인물 
  • 총 52일 만에 성벽 중건 - 임무 완성 
  • 그런데 그 일이 끝나지 않고 보이는 성벽을 중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 성전재건 - 성벽 재건 - 말씀 선포   

 

[느 8: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누구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느 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져와서 읽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고, 백성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에 집중했다. 

 

[느 8: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 말씀을 펴니 누가 미리 얘기한 것도, 교육한 것도 아닌데 모든 백성이 책을 펼 때에 일어났다. 말씀을 펼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그 분이 임재 앞에 나아가기 위해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대한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이 말씀을 통해 내게 찾아오신다고 마음 속에 경각심을 가진 것이다. 

 

[느 8: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으로 응답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손을 들어 응답하고, 그 앞에 선 자신은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댄다. 그 분은 높이고 나는 낮아지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심정을 가지고 그렇게 말씀을 대한 것이다. 

 

[느 8: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 왜 울었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왔어야만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지켰으며 지금까지 인도해 왔는지, 자신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성도가 깨달을 때에 나오는 행동은 동일하다. 회개하는 것이다. 그 분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것이다. 

 

그 완고했던 백성들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나 그들이 울었는지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레위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울지 말라. 슬퍼하지 말라 하고 달랠 정도였다. 

 

진정한 회개가 왜 중요한가?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에 진정한 기쁨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비로서 죄의 사슬이 우리로부터 끊어지고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느 8: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 회개 뒤에 무엇이 찾아오는가? 
    • 먹고 마시며 (참된 교제) 
    • 나누어주고 (참된 돌봄과 사랑) 
    • 크게 즐거워하니 (참된 기쁨) 

☞ 그들이 그 읽어준 말을 밝히 앎이라. (안다-> understanding 이 아니라 exerience) 비로서 그 말씀을 경험한 것이다. 

 

그들이 말로만 듣던 그 말씀, 귀로만 듣던 그 말씀 - 비로서 그 말씀이 그들의 삶에 경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뒤로 여호수아 이래로 한 번도 지킨 적 없는 초막절을 1000여년만에 지키게 되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사람들과 단절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난다. 

어떻게 이러한 변화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일어나는가?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 공동체 전체에게 일어난 자발적, 능동적 부흥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고 했던 자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변한 것은 한 가지다. 

경전은 바로 그 경전 - 아하스가 무시하듯 구석장이에 내팽겨쳐 버렸던 그 경전을 다시 읽기 시작한다. 읽어달라 한다. 

사람도 같은 사람들이다. 죄의 본성을 가진....

그런데 그들에게 달라진 것 - "말씀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이 남기신 그 말씀을 말로 대하지 않고, 글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존재로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잃어버렸던 그 말씀을 듣게 해 달라고 에스라를 청하고 

그 책을 펼 때에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맞이하고 

말씀을 읽을 때에 두 손들어 아멘 아멘 하고 자신들은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똑같은 말씀읋 읽는데 이전과 달리 그 말씀이 지금 내 앞에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

왜?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고난과 재난과 어려움 까지도 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고, 믿음을 가지라고....왜?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하시는 그 분의 말씀으로 그들이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죄의 권세에 의해 포로되었던 자들의 마음이 만져 지면서 그들 안에 새로운 기쁨이, 소망이, 믿음이 샘솟는 것이다. 

 

신명기 -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땅이 너희들을 토해내리라 - 반복되는 경고 

설마 설마 하다가 그 역사를 경험하고 나서 다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경외하는 것 

 

말씀대로 살고 싶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그 말씀대로 우리를 맞추기 보다는 그 말씀을 우리가 원하는대로 맞추고 싶어한다.  (죄의 영향력) 

그리고 변화하고 싶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다. (영적 게으름) 

 

씨뿌리는 비유 (말씀을 대하는 네 가지 태도) 

  • 길 가에 뿌려진 씨앗 -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 - 말씀을 받으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 완고한 사람- 뿌리 조차 내리지 못한다. 
  • 돌 밭에 뿌려진 씨앗 - 뿌리가 내리는 것 같지만 금방 말라 버리는 사람 - 말씀을 들을 때는 기쁨으로 받지만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금방 말씀을 잊어버리는 얄팍한 신앙 
  •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 - 가시가 그 말씀이 자라는 것을 찌르고 막는다. 세상의 염려, 유혹에 약한 사람

 

그의 영적인 상태가 지금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 성령의 역사를 가로 막는다. 

 

누가복음 5장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장면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 - 그들은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는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은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베드로의 배에 올라 이리로 오라 하신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나랑 상관없는 말씀이 내 배, 내 삶에 올라 내게 말씀 하실 때 그 분은 예수가 되고, 실재가 되고, 나와 관계하는, 내 삶에 역사하는 말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나오기를 주저한다. 그저 베드로처럼 내 할일 해 가면서 남에게 하시는 말씀 기웃 기웃 하면서 좋은 말씀 있으면 그저 기억하는 구경꾼의 모습이 되고 싶어한다. 그 말씀이 직접적으로 내게 다가오면 뒷걸음치고 외면한다. 

그런 심령에게 주님은 지금도 문을 두드리신다. 

"누구든지 내 음성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살 것"이라 말씀하신다. 

 

주님을, 그 말씀을 그저 글로, 역사로, 누군가의 말로만 여긴다면 그 말씀은 전혀 나와 상관없는 교과서일 뿐이다. 

 

  • 네 번째 밭 - 좋은 밭 - 옥토밭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들어왔던 그 말씀이 어느 날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내가 그 말씀을 그렇게 듣고 있을 때, 그 말씀이 지금 눈감고 귀닫고 현실 속에서 넘어지는 그런 내 삶의 중간에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시는 그 현존! 

그 때 우리는 옥토가 된다.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 밭이 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상태에 대한 말씀이다. 

 

내가 성경을 해석하는 자가 되지 말고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도록 마음을 열 때, 그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넘겨 드릴 때에, 난 말씀 앞에서 비로서 내 삶이 열려지는 것이다. 

 

루터 - 성경은 예수가 누워계신 구유이다. 네가 성경 어디를 읽던지 네 눈을 열면 그 곳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보자

그러면 반드시 그 분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이 날 변화시키기를, 내가 말씀의 해석자가 아니라 말씀이 내 삶을 해석하고, 날 이끌 수 있도록 나를 내어 드리자. 

말씀을 통해 들린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들린 말씀에 순종해 보자. 말씀에 민감해져 보자

 

신앙생활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부담은 되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가? 

오래토록 해 왔지만 도무지 변화하지 않는 현실, 변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에 실망감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는가? 

왜 누군가에게는 변화의 원천이요, 기쁨의 원천인 신앙이 나에겐 별 효력없는 죽은 것 같은 신앙으로 여겨지는가? 

주님이 다른가, 말씀이 다른가, 아니다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다를 뿐이다. 

 

설교와 설교자 

  • 설교와 설교자를 구분해야 한다. 설교자가 좋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옳게 들리고 설교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찾아오고, 에스라를 통해서 그 말씀을 읽게 하듯이 설교자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한다. 
  • 그는 죄인이 아니었을까? 온전한 자였을까? 아니다. 에스라도 죄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죄인인 인간의 입술을 통해 전하게 하신다. 그 입술에서 나온 말을 통해 거룩한, 흠없는 역사를 시작하신다. 하나님은 죄인된 인간을 당신의 나팔수로 사용하신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가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고 바라보고 순종하는 자는 그 죄인의 입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의 신비요, 설교의 딜레마요, 설교의 역사이다. 
  • 설교자도 자신의 입술을 통해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집중해야 하고 그의 삶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성도 역시 어떤 설교자라 할지라고 그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에 성령께서 분별의 영을 주시고 내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신다. 

 

교회를 잃어버린 성도들 - 방황하고 무너지고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가 사회로 부터 비난을 받으며, 삶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그런데 그 때 내 신앙의 근거가 드러나고 세워지게 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반석이 곧 교회가 아니다. 반석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이다. 반석은 무엇인가? 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도 그리스도가 반석이 되지 않으면 모래일 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 교회가 사라져도 우리가 반석 위에 서 있으면 그 교회는 언제든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예수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의 삶은 반석 위에 기초한 삶이 된다. 

 

당신의 교회가 무너졌는가? 좋은 기회이다. 반석을 회복하라. 말씀을 통해 무너진 교회를 세워라. 

당신의 삶의 토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라. 그 재건의 완성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대할 때, 완성된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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