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92020  이전 다음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  

마태복음 9장 9-13절 (마태에게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 

 

마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제자입니다. 

우리가 읽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제외하면 마태의 행적이 나온 것이 거의 없습니다. 

 

출생 신분으로 보면 열 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 한 사람만 다른 지방 사람이고 나머지 열 한 명이 예수님이 자랐던 갈릴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시각으로만 보면 다른 열 한 제자가 당시 열심당원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로부터 독립을 외치면서 우리나라 독립운동과도 같은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면 마태는 로마에게 충성을 다하면서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착취하며 살았던 당시 열심당원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오히려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의 정반대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였습니다. 

 

그가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공동체의 돈관리를 마태가 아닌 가룟 유다에게 맡긴 것도 의아한 일입니다. 

여하튼 열두 제자 중의 하나임에도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마태가 신약성서의 시작을 알리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고, 그가 기록한 성경이 신약성경의 첫 권이 된 것도 참 신비하고 의아한 일입니다. 

 

영향력 면에서는 베드로나 요한의 글이 더욱 권위가 있었을 것이요, 가장 먼저 쓴 글이라면 마가의 복음이 더욱 빨랐을 터이요, 가장 사실적인 기록하면 뭐니뭐니해도 의사의 눈으로 객관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알려지는 누가의 복음이 더욱 신빙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신약의 시작은 마태복음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일어난 역사일 것입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마태복음의 가장 큰 특징이자 주제어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태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왕이 아닌 하나님이 왕대신,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여기에 마태가 경험하고 마태를 통해 보이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마태복음에는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1. 먼저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로서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1장)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마 1장 1절은 언약의 족보:하나님 나라의 족보 - 아담으로부터 이어온 죄악의 계보를 떠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새 언약의 계보가 바로 마태음에서 소개되는 아브라함으로부터의 족보입니다. (사실을 기록한 누가 - 아담으로부터 시작)  
  • 그 족보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연약한 자, 부족한 자, 부정한 자가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1) 연약한 자 (아브라함, 75세의 나이, 자식도 없고 이방땅에서 우상을 만들어 살던 소망이 없는 자..) 

2) 부족한 자(원래 은혜의 흐름은 장자를 통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의 신앙../ 그러나 14명 중에서 장자는 단 5명, 나머지 9명은 아니다. ex) 이삭, 야곱, 유다, 베레스, 다윗 

오직 온전한 장자는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뿐이다. 

3) 부정한 자 

다말 - 시아버지에게 기생으로 둔갑하여 베레스를 나음

룻 - 이방여인, 거기다가 보아스의 잠자리에 스스로 들어가서 누워있음...

라합 - 직업 자체가 기생... 매춘부...

 

그러나 그러한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정한 자들을 하나님이 택하셨고, 그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해서 신앙의 피가 전해져 내려왔음을 보여줍니다.  

 

- 아담의 족보와 예수의 족보 

  • 차이점: 창세기의 족보 - ~를 낳고, ~낳다가, 몇세때 죽었더라....결국은 죽음으로 끝남.... 죽음의 족보...
  • 마태복음: 낳은다는 동사가 자그만치 40회 등장 -> 죽음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사는 자들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 - 산상수훈, 팔복  (마태복음 5-7장) 

또한 마태복음은 이 세상의 나라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복, 하나님 나라 사람들의 가치관을 이른바 산상수훈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은 구약의 사람들이 율법을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예수님의 설교요, 새 율법이요, 삶의 방향들을 보여 줍니다.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길로서 받아들여졌다면, 산상수훈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이요 (5장 17절), 그분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서 (5:13) 원수를 사랑하고 (5:43) 모래 위가 아닌 반석위에 기초한 집을 짓는 자들임을 말씀하십니다. (7:24) 

 

3.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 

마태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불화했던 세 집단이 나옵니다.

  1. 9:1-8절: 율법학자들-그들은 중풍병자를 향해서 “안심하여라.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말입니다. 
  2. 9-13절: 바리새인들- 그들은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밥을 드시는 예수님을 보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3. 14-17절: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해야만 했는데, 예수님에게서는 그런 걸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은 셈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신학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목회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수도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듯 당시의 유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모두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형식적으로, 전통적으로 굳어져 있던 신학자들, 목회자들, 구도자들과 신앙의 모든 태도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해꾼들은 이 세상의 권력자도 아니고 정치가도 아니었고 이단이나 권세자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하시면서 세금을 낼 것과 위에 있는 권력에 순종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오히려 당시의 종교인들, 잘못된 믿음과 잘못된 방법으로, 자신들만이 잘 믿고, 자신들만이 옳다고 믿는 자들, 혹은 세상 권력과 손을 잡고 그 안에서 안주하며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들,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이 행해왔던 전통과 관습을 더 우선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보다 그들의 행위에 기초해서 인정받으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가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장 의롭다고 내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4. 하나님 나라의 방법 -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수님은 이미 전 이스라엘에 유명해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이미 한님의 아들이요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도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그들에게 내려오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로서 그를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메시야로서의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오만하고 힘쎈 로마의 권력을 몰아내고 다윗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로마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뿐만 아니라 다윗의 떄, 솔로몬의 때처럼 이웃의 열방들이 부러워하고 무서워하는 힘쎈 나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언하고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세력보다 더 큰 힘으로 꼼짝 못하게 만드는 나라. 자신들을 맨 밑에서 맨 위로 올려줄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요 18: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 나라는 칼과 힘으로 정복되는 나라도 아니요 오직 십자가의 피로, 그 은혜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힘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올라서는 권력이 아니라 낮아지며 섬기는 나라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방법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결론 

지난 한 주, 대한 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광복절 집회로 말미암은 코로나 확산 - 그 중심에 선 한 목회자, 그가 이끄는 교회와 무리. 

 

그들이 외치는 것 - 이 정권을 몰아내서 공산화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애국이다. 

 

이 땅 미국에서는 종종 받게 되는 메시지. 

서로의 당을 주장하면서 다른 당이 집권하면 망한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그들의 뜻대로 정권을 바꾸거나, 정권을 몰아내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정치권력에 의해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인가?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 -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 뿐. 

천국과 지옥도 없고 이 땅에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 

 

신천지 - 그들만의 나라. 

 

물론 기독교인은 사회의 변화에 둔감해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문제에도 눈감지 말고 시대를 분별하고, 때로는 참여하고, 동참해야 한다. 

 

나라가 힘들 때,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고, 불의에 눈감지 말고 맞서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갖되,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의 영혼에 깃드는 나라요, 그 영혼을 통해 영생하는 나라이다. 

 

  • 온갖 핍박을 인내와 믿음으로 견디고 견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들의 국교로 삼았을 때, 이젠 불행은 끝나고 새 시대가 옮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공인과 로마의 기독교의 국교화는 오히려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정부패를 통해 교회의 몰락을 초래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랑으로 얻어지는 나라요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고 부인하는 나라이다. 

 

  • 마태는 세리였다. 세리는 로마에 대항하기 보다는 그 권력에 순응하면서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 먹는 자였다. 

탈무드에 보면 어떤 짐승보다도 가장 사악한 짐승이 바로 세리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올 정도로 세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태를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레위는 제사장 지파 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의 준수자였고 수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서 볼 때 마태는 자기가 세리와 같이 죄인 중의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 자기는 사형에 처할 만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자였음을 자기가 쓴 마태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리 레위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했더니 예수님께서 은혜로 그를 택하시고 ‘나를 따르라’며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는 마태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없다면 그들은 언제든 마태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된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공산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닌 이땅에 속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난 이데올로기에 빠진 교회를 경계합니다. 

노예해방을 두고 남북전쟁을 치룰 때에 정치 문제보다 더 치열하고 극심했던 싸움은 교리전쟁이었습니다. 

노예가 성경적으로 옳으냐 그르냐...

그것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노예를 지지했던 남부측 교회들은 노예는 구약에도 신약에도 존재했던 내용이고 그 존재를 인정했기에 그들에 대한 법이 세워졌다고 말했고 북측은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싸웠습니다. 

이 때에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 치열하게 다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한 문제에 대해서 신앙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할지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알기 위한 필요한 작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에 따라서 한 편은 죽여야 하는 적이 되고 한편은 의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싸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화 된 기독교는 서로를 적으로 돌리며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복음으로 화합하는 나라,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하나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이단이 설치고, 온 세계가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 지 그른지 조차 분별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시금 복음으로, 기본으로,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다른 누가 아닌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