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0  이전 다음

  •  
  •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  

창세기 37:23-24절 상실 너머에 있는 형통의 세계

 

요셉 - 라헬로부터 난 아들, 사랑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 성경은 특별히 사람하는 자로부터 난 아들에 대한 기사들이 많다.

솔로몬 - 밧세바, 잘못된 관계였지만, 다른 처들 - 거의 정략결혼, 그러나 밧세바는 자기 눈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 다른 아들들보다 솔로몬을 가장 사랑했다.

사무엘 -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난 아들...

 

우리 성도의 위치

[시 2:7-8]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누구로부터 나은 자식인가?

[행 13:32-33]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우리는 예수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자 독생자 예수를 통하여 그 분의 자녀가 된 자들. 사랑받는 자.

 

요셉 -

  • [창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자. 홀로 집에 남아 아버지와 함께 유하고, 남자이면서도 혼자 채색옷을 입고....형들은 일하러 가고. 편애 중의 편애..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형들에 대한 배려도, 형제우애도 잃어버리고(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자신이 사랑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인격적으로 볼 때 미성숙한 자. 형제들 사이에서 밉상.

cf) 사도 요한 -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 그런데 그는 성령 받은 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베드로를 받들고, 마리아를 받들고, 자신의 범위를 넘지 않고 섬기는 자, 사랑의 사도

여기에 비해 요셉은 사랑받는 것을 통해 남들의 미움을 받는다.

 

자기의 꿈을 가감없이 형제들에게, 두 번씩이나 고함으로 그렇잖아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 형제들로부터 질투를 받았을 터인데 꿈이야기를 통하여 이젠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까지도 형들 위에 군림하려는 요셉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을 수 벗다.

  • [창 37:8]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 그의 꿈보다 더 미운 것, 그의 말...진실한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배려가 없는 진실은 오히려 남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말을 통해 배려할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형들이 악해서라기 보다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보여준다.

 

어느날 야곱이 세겜 땅에서 양치고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낸다. 밥을 갖다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창 37: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평소 때와 같이 감시자로 보낸다. 고자질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데 오히려 더 고하게 한다. 이미 다른 아들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금이 간 형들은 아버지에게 이른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머물면서 양들을 친다.

아버지는 편애하고 형들은 불순종하여 아뢰지 않은 다른 곳에 진치고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가오는 요셉을 보고 유명한 말을 한다.

 

  • [창 37:19-20]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구절을 잘 기억해 두자.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이다.

 

  • [창 37:23-2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채색옷 - 요셉이 사랑받음을 벗기는 것, 그가 가진 모든 사랑을 벗기고 빼앗아 버림.

그리고 구덩이에 던진다. 구덩이는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이다. 누가 꺼내주기 까지는 나올 수 없다.

깊은 낙망, 깊은 우울증. 깊은 슾픔, 깊은 절망 -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설명을 붙인다. 그 구덩이는 빈 것이고 그 속에 물이 없다.

왜 이 구절을 붙였을까? 무언가 의미를 주고자 함이다. 빈 것이고 물이 없다는 것은 사랑을 잃은 자의 마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물이 없음은 이제 받아왔던 모든 은혜가 사라진 상태다.

이후로부터 요셉의 삶은 낭떠러지를 떨어지는 것 마냥 추락에 추락을 거듭한다.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옷이 벗겨진 채로 노예 상인에게 팔려가는 인생이 된다.

꿈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사는 이유도, 희망도 사라진다. 꿈이나 비전같은 말은 요셉의 삶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사치가 되었다.

 

적이 아닌, 악인들이 아닌 형들에게 배반당한 요셉 -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다 사라져 버림.,

아버지의 사랑이 속수무책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원인을 찾아보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도록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야곱이다.

 

상실 - 자발적인 포기는 상실이 아니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갖고 있는 것, 겅제로 빼앗기고 사라져 버릴 때 - 우리는 그것을 상실이라 한다.

요셉은 지금 전형적인 상실의 삶을 살아간다 - 그가 어떠한 고통을 겪었을 지는 상실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다.

부정, 저항, 포기, 낙심, 우울, 생의 의욕이 완전히 꺾여짐.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상실을 극복할 수 있는 것 - 잃어버린 것을 그 것보다 더 한 것으로 채우는 것 (욥- 나중 받는 것으로 이전 잃어버린 것들을 극복한다)

가치 없는 것으로 그 상실을 극복하고자 할 때, 그 때 많은 사람들은 중독과 일탈과 타락의 삶으로 더 깊숙히 추락한다. 그 길은 사망의 길이다.

 

  • 보디발의 집에서 적응한다. 그럭저럭 삶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도록 노예의 삶에 잘 적응한다. 눈에 띠는 노예가 된다.

요셉은 집에서 궂은 일을 해 본 일이 없다.그런데도 이방 땅, 다른 문화, 다른 언어의 사람에게 팔려가서 온갖 굳은 일을 해가며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는다.

.

사랑받는 자녀에게서 노예로서의 삶 ->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경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지만 하나의 구절을 통해 힌트를 준다. .

 

상실을 대체하는, 누군가가 그에게 있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요셉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에 등장.

사랑받는 자녀였을 때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던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등장한다. 언제? 그가 상실의 극한에 있을 때에

꿈을 잃어버렸을 때에, 형들에게 배반당했을 때에, 물이 없는 구덩이에 빠졌을 때에....

 

그런데 그 전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자신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에게 경험된 하나님이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은 비로서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만난다. 아버지에 사랑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그 분은 언제나 존재하시지만 그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내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경험할 때 그 존재는 현존, 임재, 동행이 된다.

 

포기 할 만할 때에 그의 삶에 생명력이 들어온다.

아버지의 집에서도 하지 않던 남의 집을 자신이 관리한다. 자신이 청소하고 운영한다. 모든 것을 관리한다. 놀라운 생명력이다. 포기의 순간이 오히려 그에게 생명을 주는 시간이 된다.

 

형통 - 찰라흐

외적 환경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영과 혼이 만족되면서 오는 만족과 기쁨.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형통이다.

삶에 동기가 생기고 생명력이 생긴다.

그런 형통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축원한다.

 

  • 또 한 번의 시험 - 두 번 째 상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힘.

죄를 이겼는데 그 죄값을 치룸,.

이제 그 집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살 소망을 가졌는데 그 집을 빼앗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상실이 찾아온 것이다. 어떤 상실이 더 큰 상실일까?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었다. 보디발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했다. 그래서 신나게 일하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았다. 칭찬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를 감옥에 들어가게 한다. 억울한 일을 풀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앙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다.

 

첫 번째 상실이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상실이라면 두 번째 상실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상실이다. 어떤 상실이 더 컸을까?

두번째 상실은 그간 버텨온 요셉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상실이다.

첫번째 상실이 그의 외적 환경을 빼앗는 상실이면 두 번째 상실은 그의 내면을 뒤흔드는 상실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첫 번째 상실을 신앙으로 극복하지만 두 번째 상실을 만나게 되면 무너진다. 넘어진다. 일어서질 못한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생긴다.

 

[창 39:2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떤 상실 -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찾으면서 견뎠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어졌을 때에....

그런데 그 때에도 넘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상실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상실을 통해 요셉이 얻은 승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내 기대와 내 생각 넘어에서 행동하시는 분이니까... 그 분의 행동은 내 생각 밖에서 움직인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가 겪는 가장 흔한 실수

-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꺼야... 자신이 주도하고 해답을 내리고 하나님을 이끌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안되면 넘어지고 화내고 실망한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의 자람은 내 마음대로 역사하지 않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이다. 그 때에 비로서 나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난다. 내 존재 위에 계신 하나님께 의지한다.

그 전에는 말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지만 결국 내 믿음, 내 신념을 기대사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내 힘의 원천이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더하신다. 은혜를 받게 하신다. 요셉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포기하지 않도록, 그에게 사랑을 주신다.

 

17살에 끌려와서 27살 떄 그 감옥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또 붙든다.

 

성도가 하나님께 실망할 때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하는데도 오히려 내 삶이 무너질 때

 

내가 상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상(iMAGE)일 뿐이다.

내 과거의 믿음을 넘어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부활 전의 예수님의 상에 갇혀 있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제의 믿음을 깨뜨리고 오늘의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실날처럼 보여진다.

말씀이 새롭게 보여진다. 그 분의 어떤 맒씀도 허투로 보지 않는다. 내 경험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 안에 내 영혼을 드린다.

 

감옥에서 3년만에 총리가 된다. - 오늘 새벽에 나눈 사도 바울의 아바리아에서의 3년....

 

[창 42:8-9]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 요셉이 꿈을 붙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루 하루를 살았더니 어느날 문득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결국 자신에게 주신 말씀, 자신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갔을 때에 그는 과거의 모든 꿈을 잃어버리고 말도 잃어버렸지만 우리가 그 말씀을, 꿈을, 비전을 잃어버려도 결국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내 여호와로 경험하는 삶이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지난 후에 알게 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을 때에 형들에 대한 사무친 억울함과 원망도 사라지게 된다. 상실을 넘어 형통으로, 상실을 넘어 화평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뉴욕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과 통화

예수 붙들자. 예수 바라보자. 견디고 참고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자.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