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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와서 먹으라 

본문: 요한복음 21장 2-14절

다른 복음서들이 거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끝맺음을 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21장 한 장을 할애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며칠이 지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난 것입니다. 

3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난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른 6제자들 역시 베드로를 따라 나섭니다. 왜 베드로는 물고기를 잡으러 떠나고 있습니까? 자,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낚는 어부가 되어라는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설교와 그 분의 기적을 체험하며 그 분과 하루도 빠짐없이 동행하며 수제자로서, 누구보다 열심인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죽음이었지만 예수님은 미리 주님의 죽으심을 이야기 하셨고, 그리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 그것도 수제자인 베드로는 지금 ?나는 지금 고기 잡으러 간다?하며 바다로 나서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또 다른 수제자,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바로 이전 장에서 첫번째 방문의 자리에 없었다고 다시 나타나셔서 내 옆구리과 손을 만지게 하셨던 도마까지도 베드로가 고기잡으러 간다는 소리에 말리지도 않고 말리기는커녕 따라서 고기 잡으러 나서고 있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 앞에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지금 고기를 잡으러 갑니까? 

신앙적인 상식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며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전도를 하던 예배를 하던 흥분되어 있을 시간에 그들은 하나같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터벅 터벅 고기를 잡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경험한 제자들이 지금 왜 하나 같이 힘을 잃고 고기를 잡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옆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영광의 주로 나타나셨지만 매일 같이 눈으로 보고 만지고 같이 하던 예수님이 그들의 곁에 없자 그들은 갈 바를 몰라 헤메이는 예전의 비천한 존재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믿기 힘든 기적을 경험하고 목격한 신자라 하더라도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됩니다. 길잃은 고아가 됩니다. 예수님이 곁에 없으니 그들은 우울해지고 정서가 불안해 집니다. 가만있지 못하고 불안해서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요. 

모세가 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자 그들은 안전부절 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며 죄를 범케 됩니다. 그 전에 어떤 것을 경험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내게 지금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들도 똑 같은 모습을 합니다. 우울해하고 불안해하며 그런 감정을 이기기 위해서 아무런 일을 서스럼 없이 합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다가 무언가 자기 마음대로 안되고 예수님이 곁에 없는 것 같고 자꾸 자기의 실수한 것, 잘못된 것만 생각나게 될 때, 우리의 무너지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것.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옛날의 나로 돌아가 버리는 것, 그것을 지금 예수님의 가장 가깝고도 열심이었던 제자,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와 도마와 같은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이란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이 왜 이렇게 실패의, 실의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인가요? 옛날의 나로 돌아가 전문 어부인 이들이 밤이 새도록 고기를 낚았으나 한 마리도 못 낚게 됩니다. 세상으로 돌아간 자의 삶은 너무 비참합니다. 제자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자 낙심했습니다. 빈손처럼 좌절되고 허무한 것은 없습니다.  빈손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시키고 예수님께서 옆에 계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신다는 겁니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실패해서 좌절하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뭐라고요.  ?고기를 많이 잡았냐고요. 가정은 평안하냐. 직장생활은 할만 하냐. 사업은 잘 되냐. 너, 괜찮니? 아프진 않니? 살만하니??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해서 모든 것을 보여주시고, 같이 먹고 마시며 함께 했던 제자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너무나 알아 듣지 못했고, 십자가의 고난 앞에선 하나 같이 도망쳤던 제자들, 그래도 부활하자 마자 그들에게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며 다가오신 바로 그 제자들.. 그 자리에 없다고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해서 그 앞에 직접 나타나서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던 바로 그 제자들이 지금 너무도 무력하게, 아무런 신앙의 일을 나타내지 못하고 그저 다시 예전의 일터로 돌아가 밤이 새도록 무력하게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들에게 지금 주님이 다시 다가오십니다. 다가와도 이미 신앙의 눈이 어두워져 버린 그들이기에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지요.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일해보았는데 열매가 있느냐? 기쁨이 있느냐? 만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시한 곳에 그물을 다시 던져보렴. 다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준 계명대로 순종해보렴?하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주님이시다.? 

주님이 부활하셔도 무기력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도 무기력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물고기만 잡던 제자들이 주님에 말씀에 의지해서 다시 고기를 잡게 되자, 그제서야 주님이시다. 외칩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따라 좇아오던 자들에게 자기 배를 체우기 위해 오는 자여, 썪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썪지 않는 영생을 위하여 일하라 하셨던 주님은 영적으로 철저히 무기력하게 있던 제자들에게 또다시 어부들에게 물고기를 얻게 하며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 육지에 올라서 하신 일은 더욱 제자들을, 그리고 읽는 우리들마저도 감동시킵니다. 

믿음 없는 그들을 혼내시거나, 설교를 하신다거나, 무엇을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를 가져다가 그들을 먹이십니다. 

마치 ?얼마나 힘들었냐? 배고프지? 그 동안 고생했어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멸하신 하나님이 원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이 죄를 짓고 바위 뒤에 숨어 있을 때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니? 왜 그렇게 힘들게 사니? 얼마나 고생하니? 그러면서 우리의 피곤한 육신과 영혼을 먹이십니다. 함께 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매일의 일상으로 그들을 초대하셔서 예전과 똑같이 그들과 먹고 마시며 동행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너무 너무 포근합니다. 너무 너무 좋습니다.  저는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힘든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베풀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할 수 없지만 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제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생선과 떡을 주고, 가슴이 아픈 사람에겐 울어주어야 합니다. 

  •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무기력하게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고기를 구워 먹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로뎀 나무 아래에서 남심해 잇는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통해 음식을 나르며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합니다. 

왕상 19:2)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와의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가장 믿음의 절정에서 엘리야는 이세벨 여왕의 ??내일 이 맘때까지 내가 너룰 죽이겠다!?는 한 마디 말에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850명의 이방 선지자들때문에 엘리야가 넘어졌다면 그렇구나 그럴텐데 너무도 당당하게 그들과 대결했던 엘리야가 이세벨 여왕의 한마디에 죽고 싶은 절망에까지 빠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대단한것에 낙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 돋친 한 마디 말, 아니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대가들까지도 넘어뜨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침체에 빠진 엘리야에게 나타난 현상

  •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1. 형편을 보고 (모세, 엘리야, 예수)?

믿음 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엘리야에게 갑자기 자기 형편, 자기 꼬락서니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언제 그의 형편이 좋았을 때가 있었던가? 아합왕을 처음 만나던 시절부터 그는 그릿 시냇가로, 시돈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애 딸린 과부와 함께...그리고 지금도...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금 그는 형편에 갇히게 되었는가??


2.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합왕에게 맞섰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를 모조리 죽였던 엘리야가 이세벨이 두려워 도망한다. 피하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주저 앉고 싶다. 이것은 이세벨이 강해서가 아니다. 엘리야가 약해진 것이다. 갑자기 자기 연민에 빠졌다. 이젠 나를 위해 좀 살고 싶다. 나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하고 싶다.?


3.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혼자 있고 싶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기도를 위해 골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도 접촉하기 싫어서 방에 갇히는 것이다. 자기를 돕는 사환마저도 귀찮고 싫다. 자기의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4. 죽기를 원하여 

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역설적 소망, 

죽고 싶다. 사는 것이 낙이 없다. 허락만 된다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다. 모든 의욕이 살아졌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까지 사라져버렸다.?


5.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에 빠진다. 남은 행복해 보이고 난 불행해 보인다.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이끌어온다. 모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 드러나 있는 영적 교만감 - 내가 열심이 특심하여....?


엘리야의 침체의 현상 뒤에 숨겨진 원인

1. 응답, 열매, 승리 뒤의 공허감.?

연극이 끝나고 빈 좌석을 보면서 맛보는 허전함. 주일 예배 뒤의 월요일 공포증.?


2. 잘못된 기대

이것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갈멜산에서만 승리하면 아합왕이 무릎꿇고 이세벨은 떠나가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엘리야의 기대이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다.?


3. 육체적 탈진

갈멜산의 예배와 기도

850명을 직접 죽임.?

또 비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

그리고 아합왕을 향해 달려감.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그리고 그 때 공격받았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를 들었다.?

그 때의 비난과 공격 한 마디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영적 산후 우울증이다.?

애를 낳기 위해 정성을 쏟고, 자기 몸을 조심하고, 죄악을 삼간다.?

모든 관심을 애를 향해 맞춘다. 그런데 정작 애가 나오면 자기 인생이 불쌍해 진다.?

막상 애를 낳으면 감당해야 할 짐이 너무도 많다.?

밤에 잠도 못자고 애를 떠날 수가 없고 애를 위해 자기를 보살펴주던 식구들은 자기보다는 애만 바라본다. 자존감이 상한다.?

이런 피곤함이 평생 갈 것만 같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우울증은 영적인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 하나님의 다루심?

1. 책망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그냥 받아주신다. 공감해 주신다.?

응답받은 사람이 시험에 들면 먼저 나오는 것이 판단이고 비판이다. 좋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염치도 없다.?


2. 어루만지심. 쉬어라. 천사를 보내어 돌보심.?

기다릴 뿐만 아니라 돌봐 주신다. 필요를 채워주신다. 쉬도록 시간을 주고, 외롭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어 만지시고, 배고프지 않도록 먹이신다.?

예수님, 배반해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와서 밥먹자! (요 21:12)?

무조건 적인 사랑이다.?


3. 로뎀에서 호렙산으로 인도...?

그의 보살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다.?

침체가 오면 먼저 일어나는 현상.?

기도 할 수 없고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다.?(형식은 남아 있지만 내용을 잃어버린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고 말씀 읽는 사람은 곧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우울증이 오면 말씀과 기도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호렙산.?

모세를 부르신 산, 성령을 받은 곳, 말씀과 기도로 충만할 수 있는 곳.?

피하기 위해 떠났던 로뎀나무가 이젠 호렙산 꼭대기가 된다.

 

로뎀나무에서 잠자게 하시고 어루만지시고 음식을 먹이신 이유는 결국 호렙산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다. 말씀이 영혼에 들려지기만 하면 산다. 그런데 그 영혼ㅁ까지 도달하기가 힘들다. 주님은 지쳐있는 우리를 육신적으로 먹이시고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 분의 살과 피로, 십자가와 부활로 먹이신다.

 

 

Posted by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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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기대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9.03.10 23:40

    샬롬^^
    이번한주도 은혜로운 말씀 받고 힘차게 나아갑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