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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바꾸시는 은혜 (창세기 32장 22-32절) 


서양과 동양, 그리고 듀대인들마다 각각 인간의 정의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각 문명의 가치관과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인간을 사람 인(人) 자와 사이 간 (間) 자를 써서 관계를 중시합니다. 사람 인자 하나를 보아도 두 존재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상을 본따 만든 상형 문자이며 여기에다가 사이 간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사람들 사이라는 사회성,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유학와서 명어로 쓰거나 말하면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 - 우리집, 우리 엄마, 우리 교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라는 말 속에 나를 숨겨서 표현하는) 누가 그랬데....

 

라틴어, 영어권에서 인간 -human- humus - 흙, 먼지.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성경에서 근거한 어원이지만 결국 서양 철학에서는 인간을 덧없음, 먼지, 허무주의, 니힐리즘... 

히브리인- 인간- Ish (욕망, 불덩이) - 인간은 곧 육망하는 존재. 


이 욕망이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이다. 욕망은 죄의 근원이기도 하고 동시에 신앙의 근원이기도 하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다"는 선악과의 해석을 요한일서에서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잘못된 욕망은 곧 남의 것을 탐하는 탐심이고 하나님의 것을 탐하는 교만이고 곧 죄의 근원이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정의 할 때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하면서 바라는 말씀에 근거한 선한 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욕망을 Lust, greed등을 표현하면 죄와 연관되지만 desire, hope등으로 표현하면 선한 갈망이 된다. 

그리고 그 선한 갈망 중에서 기독교인이 가장 큰 갈망은 곧 passion이다. Passion은 그 의미가 아주 강한 열정, 열망을 가리키는데 욕망 중에서 가장 강렬한 욕망이다. 삶을 전부 불태울 수 있는 욕망이다. 그런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passion의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뜻한다.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 제목이 그 의미를 보여준다. 


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욕망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욕망, 열망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뜨거운 열망이다. 

그리고 그 뜨거운 주님의 사랑을 볻받으며 따르는 삶 역시 passion 이다, 거룩한 열망을 가지는 삶이다. 


이 욕망에서 시작된 또 다른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스리엘 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ISh (인간, 욕망) + Rah (보다) + El (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우리말 성경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그래서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나 야곱처럼 하나님한테 기도해서 이겨야지"하는 마음으로 마치 하나님을 이기려는 자세로 기도하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못된 이해에서 근거한 잘못된 표현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니님을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의 이스라엘의 의미는 (하나님을 본 인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왜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로 표현했을까? 

당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는것이다.  


그 내용이 바로 32장 30절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얼굴을 대면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이 되었다. 


Ish를 사람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란 의미이지만 어원 그대로 욕망,갈망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훨씬 더 영성적이다. 하나님을 보기를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닮기를 갈망하는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닌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다.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도 야곱을 신앙의 모델로 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위대한 왕 다윗, 모세와 엘리야 같은 지도자는 존경해도 자기 롤모델이 야곱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야곱을 선택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이스라엘 나라의 시조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는 장면이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기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하다가 만들어 진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우리와 씨름하신다. 이 씨름은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가다듬이 가시는 씨름이 시간이고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는 우리의 옛 성품이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한 씨름이다. 힘겨운 씨름이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지만 오직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씨름하시고 우리는 안변할려고 불순종하려고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하나님과 대면케 하기 위해서 씨름하신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바로 그의 죄된 본성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의 뜻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기꾼, 약탈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에게 이기기 위해 발뒤꿈치를 부여잡고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한 마디로 야심을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그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욕망에 이끌린 자. -

그는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자기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이지만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가족끼리의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야심을 이루는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도 속이고 축복을 받고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것은 온전한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도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진실이 밝혀져서 창피한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모사를 행하는 것은 악인이 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조상 야곱의 삶이 이러했음을 말하며 때로는 그리스도인도 복을 얻기 위해 남도 속이고 때로 속인 것이 밝혀져서 도망하는 그러한 삶을 그럴수도 있다하며 합리화하지만 이것은 마귀적인 발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빛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밝혀져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을 갔는데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는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했는데 라반의 속임수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면서 산 사람은 결국은 그 값을 이 땅에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끝을 보면 드러납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라반과 속고 속이는 반복적인 삶의 전쟁을 치룹니다. 가축을 편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자 급기야 라반은 야곱을 외면하게 되고 결국 야곱은 다시 라반의 집을 떠나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형 에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꾀를 부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가는 곳마다 적이 있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적을 염려해야 합니다. 시편의 서론 격인 1편에 악인을 무엇이라 합니까? 바로 꾀부리는 자를 악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꾀부리는 자의 대표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악인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그 사기꾼 같은 삶 때문에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내가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그대로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더럽고 추하게 느껴 질 때가 있다면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홀로 남았기 때문에 씨름했습니다. 홀로 남겨지는 것은 삶의 극단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상황, 위기의 때입니다. 왜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까? 머리를 굴렸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굴려서 재산도 모으고 가정도 이루었지만 정작 살만해지니까 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살자니 라반이 두렵고 집에 가자니 에서가 두렵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제 3의 거처를 삼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악인일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어찌 이방인과 같이 살자고 떠날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재산을 5등분해가지고 한 차례식 한 차례식 형 에서에게 보냅니다. 왜 나누어 보냅니까? 여차 하면 도망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선물도 한 꺼번에 받는 것보다 여러 차례 나누어 받으면 똑같이 받아도 기쁨은 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도 위하고 형 에서도 생각해서 그는 머리 굴림의 극치로 이렇게 형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종들에게 이렇게 아룁니다. 

“에서는 주인이고 야곱은 종이라 하라” 결국 재산도 이루고 명성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사람앞에 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녀와 아내까지도, 가족들까지도 이용해서 다 건너 보냅니다. 

무슨 소립니까? 대개 도망가더라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데 야곱은 아내와 자녀까지 건너보내는 정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홀로만 남게 됩니다. 가진 것을 다 보내고 이제 남은 것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고도 자기 목숨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계속 두려움이 남습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꾀로 살아남으려 할 때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한낱 지푸라기같게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고 쓰다가 그래도 해결이 안되니까 이제 하나님꽈 씨름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야곱을 보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는 그가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남았을 때에 그 때에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해서 남은 것 없이 다 망했을 때에도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지 할 데 없자 자신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해주실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럴때에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와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염치없어도 다시 부르기가 창피해도 그때에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야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결코 천사를 놓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마저 떠나가면 더 이상 소망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온몸이 져러오고 아파와도, 살사 죽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금식하고 부르짖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면 내가 엉터리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서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가장 더러운 자로 나를 보고 그렇게 때문에 오직 하나님 외엔 소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고 씨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응답해주십니까? 

우선은 내가 자격없고 엉터리임을 인정할 때입니다. 야곱은 이제 가진 것도 없고 아무 자격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육탄으로 몸으로 하나님께 나옵니다. 돈도 없고 상의할 사람도 없고 하니까 최후의 보루로 결사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질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도우셨습니다

야곱은 여지껏 누구에게 진 적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이겨왔던 것이 야곱이었습니다. 그렇게 형 에서도 이겼고 아버지 야곱에게도 이겨서 축복을 받았고 라반에게도 이겨서 두 아내과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얍복강 아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해결,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첫째 이름을 바꿉니다. 사기꾼을 하나님과 싸워 이기었다라고 하는 승리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실존 자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신비의 원리가 여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항상 이기려고 살았던 야곱이 알고 보니 다 지고 있던 자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형을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형을 두려워하고 아버지의 축복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항상 그것을 빼앗길까봐 염려하는 자였고 라반을 이겼다고 했지만 도망하여 피해다니는 그야말로 패자 중의 패배자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기려면 항상 지는 것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승리자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니까 하나님께서 날 이기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응답은 돈이 더 많아 진 것도, 건강이 더해 진 것도 아니라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을 더 연약한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 길들여 진자. 말씀으로 훈련된 자. 


순간만 하나님 앞에 굴복해서 약한 것이 아니라 육신을 약하게 해서 계속적인 연약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교만하지 않고 패역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의지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기도 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대개 우리가 의지할 것이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은 환도뼈가 상해서 평상을 절뚝발이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뚝 절뚝 걸어다니면서 매일 순간마다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시금 의지했을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응답은 야곱의 삶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비로소 어두운 밤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지껏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야곱이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꾀를 의지해 살던 악인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니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결국은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본질이 바뀌고 본질이 바뀌니까 환경도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러 올 줄 알았던 형 에서가 자신을 반기러 오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야곱을 통해서 제사장 민족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 앞에 굴복했더니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며 그 가정,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지금도 날마다 하나님을 이겨가면서 하나님은 이기는데 정작 이기지만 매일 지는 것과 같은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은 자신이 엉터리라고 생각지 않는가? 사기꾼같다고 여기지 않는가? 남을 이기려고,  지는 것 같을 때는 한 없이 초라하게 느끼고 원망함을 느끼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도 홀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씨름하다가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이 아프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주보- 성형 수술 하듯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부분만.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이름을 바꾼다. 내 본질을 바꾸신다. 

나를 부모의 유전이나, 세상의 풍습에서 떼어 하나님의 가지에 접붙인 자가 되게 하산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