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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고난, 세례 (마태복음 14장 24-32절) 


오늘 본문 바로 전의 사건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가 이제 온 이스라엘에 소문이 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모여들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흥분하였고 들떠있었으며, 사기가 충천했다. 큰 비의 은혜를 경험한 바로 그런 때였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채시고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마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치 가만 놔두면 큰 일 난다는 듯이 들떠 있는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여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다. 

왜 그렇게 급히 재촉하셨을까? 

무언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교만과 게으름과 방심과 죄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틈을 타고 사탄이 역사하기 째문이다. 

지금 까지는 그들은 항상 예수와 함께 거닐었다. 

예수와 함꼐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었다. 그 분만 바라보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였다. 

적어도 그들에게 예수만 함꼐 있으면, 하는 믿음은 있었다. 


그런데 오병이어 기적 이후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게 하신다. 

실제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예수가 우리를 홀로 남겨 두게 하실 때가 있는가? 

물론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던 주의 임재가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막막한 때가 있다. 

다윗도 그러한 심정을 시편에서 수없이 부르짖으며 자기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외친다. 


심자가 요한과 같은 영성가들은 이러한 때, 하나님의 임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때를 "영혼의 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 많은 경우 예수가 우리를 홀로 보내는 것보다는 우리가 예수 없이 홀로 떠날 때가 부지기수다. 

오병이어와 같은 큰 이적을 경험한 후에 대개의 신앙인들이 마치 그것이 자기 능력인양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에서 스스로 이젠 됐다고 생각하는 영적 나태함이 일어날 때가 많다. 

 

 물을 건너는데 예수가 없다. 결과는 폭풍우다. 


(마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렇기 떄문에 이 구절은 이중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산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소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불러 하늘의 복음을 들려주시는 장소이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는 그 산에 계신데 제자들은 예수를 홀로 남기고 지금 바다를 건너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은혜에 도취되어 예수없이 먼길을 온 것이라고, 예수를 홀로 남겨두고, 이제 자기 스스로 해 보겠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쩄든 결과는 예수는 홀로 남고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바다를 건넌다. 


(마 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없이 너무 먼길을 나와 버렸다. 꺠어있지 않은 자는 언제든지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다. 

너무 바빠서건, 너무 아파서건, 예수 없이 너무 먼 길을 떠난 자의 결과는 고난이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와의 거리가 멀어지자 허랑방탕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은 새벽 네시쯤 되는 아주 깊은 밤 새벽이 오기 전의 시간입니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둠이 가득찬 시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어둠을 방치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난의 중심에서 그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밤새 폭풍우 속에서 제자리를 맴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신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말한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성경에서 물을 건너는 것은 곧 구원의 모델로서 그려져 왔다. 


1.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엵지 재앙을 통해 바로의 항복을 받아내고 애굽을 떠나는데 마음이 바뀐 바로가 뒤에서 쫓아오고 앞은 홍해가 가로막고 있다. 


[출 14:13-출 14:14]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두려워말고 -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두려워하지 않은 유일한 방법- 기도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 가만히 서서 - 꺠어 있으라. 조급하지 말고 서둘지 말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를 바라라 
  • [고전 10:2-3]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홍해를 건너는 사건 - 세례, 혹은 중생의 사건, 세상 (애굽)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말씀)으로 살아가는 여정으로 들어오는 삶. - 중생의 세례는 일생에 유일한 사건. 

그 방법-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는 것 -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런데 그 후에도 강을 건너는 사건은 계속된다. 


2. 여호수아 

  • [수 3:3-수 3:5]

(수 3:3)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수 3: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수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 언약궤를 따르라. 거리를 유지하라 (이천규빛: 약 1km) : 이전에 가보지 못한 너희의 행할 길을 알게 하리라. 

거리를 유지하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앞서지도 뒷서지도 말고 말씀을 앞에 두고 바라보며 나아가라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고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라. 멈추라 하면 멈추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은 항상 현재형으로 받는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는 자에게 주신 약속- 너희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과소평가 한다. 미리 하나님의 뜻을 이럴꺼야 하고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의 말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기대를 넘어선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기 때문이다. 

  • 출애굽을 죄에서 구원받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며, 요단강 도하는 삶에서 여호와의 선택받은 자로 살아가는 "성화"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자. 


3. 엘리사 

  • [왕하 2:13-4]

(왕하 2: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단 언덕에 서서

(왕하 2: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이르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그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 겉옷- 성령으로 옷 입는 것- 성령의 내주는 아홉가지 열매, 전신갑주는 성령의 외적 능력.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일생에 한 번 경험하는 중생의 세례를 말한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은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다시금 주어지는 제 2의 은총이다. 



 4. 다시 베드로로 

 지금 베드로가 직면하고 있는 폭풍우는 어떤 물인가? 

 죄인인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물이다. 사망의 물이다. 

 애굽과 광야 사이를 가로막은 물, 홍해이다. 세상과 하나님의 땅을 가로막은 물이다. 바로 세례이다. 

 광야와 약속의 땅 가나안 사이를 가로막은 물, 요단강이다. 바로 말씀의 물, 은혜의 물, 성령의 물이다. 엘리사가 가죽옷을 헤치며 걸었던 그 물, 성령의 능력이다. 

 그 물을 지금 예수를 바라보고 건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마 14: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물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다시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른다. 

(마 14: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첫번째 베드로에 배에 오르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바람을 그치게 한다. 


신앙 생활은 결국 내 배에 예수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분을 내 배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 물, 고난, 세례 

물은 성경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베드로가 만난 폭풍우, 바울이 만난 유리굴라와 같은 인생의 큰 고통이요 시험이요 고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예수로만 사는 세례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고난이 곧 세례이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의지하던 교만함에서 돌이켜서 고난 가운데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함을 깨닫게 된다. 

다시금 재가 죽고 예수만을 바라 보게 된다. 

고난을 통해 한없이 낮아지며 고난을 통해서 전적으로주님을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표현한 것처럼 고통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향해 외치는 확성기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즐거워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면서 누가 이기나 돌아오는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폭풍우를 뚫고 고난 당하는 베드로를 향해 물 위로 걸어오시듯이 고통 당하는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물을 건너는 사건은 중생에서 성화로 성화에서 성령의 충만으로, 그리고 물을 두려워 하지 않고 물 위로 묵묵히 건너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신앙의 성숙,단계를 표현한다. 

모세도 건너고, 여호수아도, 엘리사도 건너지만 예수의 제자 베드로는 실패한다. 마치 베드로가 실패한 그 자리에 우리를 초청하는 것 같다. 

주님을 볼 것인가? 주위를 볼 것인가? 


<군대에게서의 간증>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