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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빌 2:5-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열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만한 기쁨에 이르지 못한 이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열심이 있었지만 무슨 일을 할 때 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었습니다. 

자기를 남보다 높이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들의 공통점은 바로 교만함, 자기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교만함이 있으면 말씀을 알고, 열심을 내어도 참 평안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교회에, 가정에 다툼이 있고 불협화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사람이 정말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난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겸손하라고 자기를 비우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정말로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한 마음을 품는 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2절에서 말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부모에서 나온 형제라 할지라도 태어날 때 부터 성격이 다르고, 같은 가정에서 자라난 자들이라도 습관이 가지 각가 입니다. 하물며 인생의 경험이 각각 다르고, 신앙의 색깔이 각각 다른 지체들이 모인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한마음으로 뜻을 합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 때가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서양 문화에 있어서 이 자기 중심성이 가장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근대 정신의 출발이라고 하는 데카르트를 그 시작점으로 말들을 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철학적 명제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입니다. 


그는 그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거짓이나, 꿈이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모든 것을 부정하면서 정말로 진리가 무엇인가를 곰곰히 따져 묻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세상이나 사물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그는 부정하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 하다가 모든 것의 출발점을 "생각하고 있는 자기 자신'으로 결론지은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림이나 문학에서도 자기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에는 자신이 없어도 누구나에게나 보여지는 객관적인 풍경이, 사물이 중심이 된 그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이후로 개인이 보는 관점이나 시각, 그리고 그림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개인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자기 자신 "self" 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 아래에서 서구의 개인주의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보다 훨씬 더 근원적으로 이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적에 부추긴 것이 이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마음은 다름아닌 인간 개인에게 하나님에게로부터 독립된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이는 마음이었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전에 바벨탑 사건은 이러한 인간의 이기심의 종착지를 다시 한 번 보여 줍니다. 

[창 11:3-창 11: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원어의 뜻을 조금더 빌자면 우리가 스스로 벽돌을 만들어 굳세게 만들자. 흙 대신에 역청을 발라 더 강하게 하자. 그 벽돌로 성읍과 탑을 세워 하늘에까지 올려 우리의 이름을 내어 흩어지지 말자! 


좀 더 의역을 하면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성을 쌓아 하나님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살자. 흙으로 만든 인생에서 떠나 영원히 죽지 않을 문명을 세우자. 

우리의 성을 세워 하나님의 이름보다 우리 영광을 위해 살고 절대로 하나님에게 무릎꿇지 말자. 


바벨탑이 인류 문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고대 문명의 비밀을 드러내는 구절일진 몰라도 신앙 안에서 이 사건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기 영광을 위해 살려는 인간의 죄악되고 헛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인간들의 마음을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하면서 복있는 자,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과 같이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이후로, 그리고 근대 이 후 더욱 급격히 사람들은 각자의 성을 건설하며 삽니다. 자기 이름을 내며 자기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이 성은 견고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바벨탑처럼 흩어놓으면 부서질 성입니다. 


요즘 뉴스의 중심 - 홍만표 변호사 

검사장 이었던 그가 변호사가 되어서 모은 재산이 5년만에 오피스텔 130여채 100억대 빌딩. 

그가 사는 호화 아파트 - 한층 전체가 그를 위해... 또 다른 층 하나는 아내, 또 다른 층 하나는 처남 소유,..


그야말로 자신들의 왕국, 자기들의 성을 쌓아 살아가려고 했으나....그의 행적이 드러나게 하심...


자기 중심적인, 자기 성을 세우고, 그 안에서 자기를 높이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세상이 주는 마음,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가진 것 같지만 정말 가난한 것이요, 화려한 것 같지만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까? 


다같이 빌립보서 2장 5절을 읽읍시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 성 안에 갇혀 살지 못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닮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을 이길 수 있는 것,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당시 사회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무능한 자들의 마음이나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유가 없는 노예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 출세하려면 겸손하면 안됩니다. 최대한 자기를 알리고 과장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겸손은 손해볼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이 마음은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장 큰 덕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겸손하면 손해보고 비굴해진다고 얘기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정말 높은 사람은 섬기는 자다. 낮아지는 자다. 겸손한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모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인이 겸손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예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섬기는 곳입니다. 

겸손의 마음, 예수의 마음은 그저 개인의 기쁨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생명, 그리스도인의 근본에 관한 마음입니다. 교회가 왜 위기냐? 이 예수의 마음, 예수의 자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낮추고, 복종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자꾸만 높이고, 주장하고, 십자가를 외면하기 때문에 위기라는 것입니다. 


저의 마음에 몇주 동안 위기의식이 왔습니다. 아프고, 이사하고, 여행하고...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허전합니다. 

왜 부흥이 안될까? 말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늘지 않는 숫자 때문에 조급함이 밀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조급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막힌 데가 없는가? 내 영적인 관리를 잘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면서 기도하며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았습니다. 


허전해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인해 충만하자.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자. 

나 자신에게 갇히지도 말고, 남들의 말에 우왕좌왕 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말씀 가운데 맡은 바 사명에 집중하자.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 어떤 마음입니까? 

[빌 2:6-빌 2: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였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6절)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대접받지 않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칭찬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신 분들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섬겨온 것을 생각하면, 시간 드려서 몸 드려서 물질 드려서 정말 희생적으로 주님의 교회를 지켜 온 것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대접받고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대접받는 자리에 앉지 않고 오히려 대접하는 자리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대접 받고자 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러나 겸손할 때 사라지는 것 역시 다툼이나 허영입니다. 


그 다음, 바울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비어’라는 말씀이 바로 ‘자기중심성’을 뽑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자기중심성’을 뽑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는 ‘겸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아니 하나님 자신이신데, 어떻게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지낼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종의 형체를 가질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를 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세상은 수준을 이야기 합니다. 수준이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려고 합니다. 수준이 맞지 않으면 피하고 외면하고 무시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서로가 수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어느 수준이든지 어울릴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품이 바른 어른 - 어느 세대와도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대접받으려고만 하고 어린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면 그것은 수준이 높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지식한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나이가 들수록 외롭고 고독해집니다. 


교회의 수준은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와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수준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죽기까지 겸손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진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겸손하려면 결국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완전히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이고 부활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교인이 교인다워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사모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래야 합니다. 심장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대로 두고서, 거기에 성경지식이나 신앙의 형식이나 경험으로 적당히 포장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면 이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집니다. 바벨탑을 지으며 그렇게 드러내려 했던 그들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굳건한 성을 지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말씀에 굳건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방법이 아닌 정말 하나님의 방법대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 외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마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우리 로고스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osted by 소리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