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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3장 1-7(직분에 관하여 1)


미쁘다 이 말이여! 

감탄사,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가치있는 생각인가! 


무엇이? 직분을 사모하는 것이...

감독이라고 해석한 단어. 

Overseer: 위에서 보는 자 

잘못된 생각: 통치자, 명령자....No!

-> 두루 살펴보는 자. 남이 보지 않는 것을 보는 자. 돌보는 자 (목자를 가리킬 때 사용...) 

높은 곳에서 보는 자-> 남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높은 곳이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가 직분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관점이라는 것. 

인간은 언제나 내 중심적이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고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많이 배우건 못배우건, 잘났으나 못났으나 나 중심적이기 때문에 항상 판단하고 비판한다. 

남을 평가하고, 대통령도 평가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도 평가한다. 


내 입맛에 안맞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자기한테 안맞으면 NO다. 

그런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직분을 사모한다는 것은 이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저질이 아닌 고상한 삶에 대한 소망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외모, 지금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본다. 씨앗을 본다. 떡잎을 본다. 

롯과 아브라함....


그래서 남이 못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가능성을 보고 그래서 그 일의 농부가 되고 추수꾼이 된다. 


 왜 이런 삶에 대한 소망이 중요한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 복의 근원, 영향력,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나 하나를 구원코자 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열방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롯은 어떤가? 남은 상관이 없다. 

 나에게만 관심이 있다. 내 복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끝은 무엇인가? 자기의 유익을 쫓아가다가 결국 소돔과 고모라같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초월하도록, 넘어서도록 인도하시는데 사람의 본성은 계속 그 안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허무는 것이 직분이다. 

 이 직분은 사모함에서부터 시작된다. 

 나같은 사람도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까?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가 될 수 있을까? 

 

 직분 안받고 자기가 스스로 하면 되지 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직분 받으면 얽매이게 되고, 억지로 하게 되고,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공부는 좋은데 학교가기는 싫다는 것과 똑같다. 

 자기 생각에는 쓸데 없는 것도 배워야 하고, 싫은 선생님도, 친구들도 상대해야 하고, 체육도, 음악도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차라리 자기가 필요한 공부하면 더 많이, 더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지 안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학교 포기하고 검정고시 보는 학생의 성공 비율이 학교에서 쓸데없는 것 배워가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학가고 사회생활 적응하는 것보다 훨씬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들여, 돈 들여 학교가는 것이다. 

 왜?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스스로 할 것 같지만 강요되지 않고, 규칙이 없고, 자기에만 맡겨 놓으면 결국 얼마 못가 시들해지거나 포기 하기 때문이다. 

 

 직분자의 검증 

  •  책망할 것이 없으며,,,: 그런데 책망받지 못할 자가 있을까? 

       모세도, 아담도,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끊임없이 백성들이나 양들의 배척과 공격을 당했다. 

  •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꼭 결혼한 사람만이 직분자가 되는가? 

      현대 시대처럼 결혼하기를 꺼리는, 그리고 사유가 어디에 있건 이혼이나 재혼이 너무나 흔해져 버린 시대에 이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가? 

      또 하나는 이 글을 쓰는 당사자 바울은 어떠한가? 그야말로 아내가 없는 독신이 아닌가? 그럼 그는 교회의 감독이 될 수 없는 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거쳤거나 심지어 직접 세우지 아니한 교회에게조차도 오지랍 넓게 감독의 역할을 자처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절제하고 신중하며 단정하다는 표현은 결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한 아내"에 충실한 가장. 즉 첩을 두거나 애인을 두거나 바람을 피거나 하는 등의 문란한 삶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들. 

      심지어 얼마전 소림사에서 터진 일들. 

      겉으로는 독신 성직자인양 하지만 첩이나 아내를 두고 있는 그런 사회....

      

이 모든 일의 통로- 술문제. 탐욕 문제, 돈문제...


그러니까 "책망할 것이 없거나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로 시작되는 2절은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말라.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지 말라. 

남에게 공격당할 그런 비행을 저지르지 말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 (4절) 로 이어진다. 

이 말의 반대는 무엇인가? 

공손의 반대는 불손이다. 복종의 반대는 반항이다. 

왜 자녀들이 집에서 불손하고 반항하는가? 

사춘기라 그런 것이 아니라 딴 집 살림하면서 술 먹고 집에 와서는 아내를 구타하며 자녀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니 불손하고 반항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이스라엘도 그랬을까? 사람 사는 곳이라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똑같은 가정 불화들이 초대교회에서도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바리새인 중심, 제사장 중심 등 이른바 엘리트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유대교와는 달리 초대교회는 어땠겠는가? 

열두명의 제자, 어부 출신, 시골 출신들이 주축이 되고 각 교회마다 또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많았다. 

은혜는 받았는데 그들의 과거의 삶은 어땠는가?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이젠 교회 와서 은혜 받고 자기 중심적으로만 살다가 고상한 열망을 가지고 직분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직분을 사모하는 것도 귀하지만 이 직분에 걸맞게 그들의 삶을 정리 시키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삼은 것이 그들의 가정에서의 모습, 사회에서의 평판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어떤가? 

교회 안에서만 괜찮으면 사회가 뭐라하던 집안에서 어떻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외부에서의 평판을 숨기거나 가리거나 교회 안에서만 괜찮으면 다 눈감아 준다. 잘못된 것이다. 


난해한 구절 6절 

(딤전 3:6)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우리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가 무엇인가? 

루시퍼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루시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그런데 그 찬양을 하다가 스스로 높아지기 시작.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기 시작- 교만함이 사탄의 정체. 


새로 입교한 자를 중직에 세울 때. 

왜 세울까? 

1) 열심이 뛰어남으로...

2) 사회적인 능력이 뛰어남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상황에서 감독자를 세우면 내 열심에 대한 보상. 결국 자기 행위에 대해 의롭게 생각하고 점점 더 행위 중심으로 간다. 남에게 인정받고 자랑하기 위한 행위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적 능력으로 직분을 받으면 결국 교회는 사회 집단이 되어 버린다. 직분의 기준이 신앙적인 모범이 아니라 누가 힘있고 돈많고 권력이 있는지 흘러가게 되면 교회는 결국 그 근본이 깨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사용자 소리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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