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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제일교회/주일예배설교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장 37-44절)

by 소리벼리 2022. 7. 24.

예루살렘 입성 (누가복음 19장 37-44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어떤 분께 종려주일이 뭐예요? 물었더니 사순절 끝나는 주일인가요? 

종려주일은 종료했다는 끝의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환호성을 쳤던 이른바 왕으로서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

공생애 기간 동안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알리시고 비밀에 붙이셨던 예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심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 종려주일을 기념하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로 들어올 적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입장하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교회 장식 - 교회 입구에도 성전에도) 

 

그런데 종려주일은 왕의 입성을 기념하는 영광과 기쁨의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어지는 슬픔의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고난주간의 시작이 바로 이 종려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예루살렘이 들썩일 정도로 환호하고 기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를 몰아내고 성전의 부패하고 썩은 종교 지도자들을 몰아내고 왕이 되실 줄로만 알았던 예수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잡혀 심문받으시며 열세에 몰리자 하루 아침에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치는 사나운 군중이 되어 버립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일주일 - 왕을 환호하는 군중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그 사이 특별한 사건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과 로마 병정에 잡히시고 심문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주간의 시작이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의미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며 정결하게 한 주간을 시작하는 기쁨과 슬픔, 축제와 동시에 근신하고 절제하여야 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날입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시 118편 25절)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호산나의 의미를 잘 표현한 구절) 

 

구약의 후기와 예수님 당시에 이 호산나 라는 말은 메시야를 갈구하는 백성들의 소망과 결부되어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를 고대하는 기도로서 여겨졌습니다. 

 

유월절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를 건너 출애굽 시킨 날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종려주일은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 참왕으로 오신 예수의 이날, 종려주일의 행적을 살펴보며 "그는 어떤 왕이셨는가? 그가 이루는 구원은 어떤 구원이었는가?" 누가복음 19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맹인과 삭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이) 

19장으로 들어가기 전 18장 끝부분에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눅 18:31-눅 18:34]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왜 깨닫지 못하였을까? 그들은 부활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입성을 마치 혁명의 기점으로 막연한 위험을 경고하는 말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다음 맹인을 만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맹인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말로 하면 종려주일날 백성들이 외친 소리와 마찬가지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며 주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여리고로 들어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전 마지막 사역,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삭개오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이스라엘에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죄인의 대명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무 위로 올라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라고 하시면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장소는 나무 위 입니다. 

나무 위를 죄인이 달려야 할 십자가 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삭개오는 마땅히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려야 할 죄인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내려오게 하시면서 그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에게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말씀하십니다. 자기 가족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맹인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삭개오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정체성,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고 이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친히 그 나무 위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2.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다. 

갈릴리 지방의 예수가 이젠 메시야의 예언을 이루시며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의 입성을 반기는 제자의 온 무리는 

 

38절)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면서 지나가시는 곳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서 지나가시게 합니다. 완전한 왕으로서 그의 입성을 환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행차가 아니라 예루살렘 온 지역이 다 알도록 하는 떠들썩한 행차였다는 것이지요. 이런 떠들썩임에 무리 중의 바리새인이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하셨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들의 찬양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분명 왕으로 입성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분의 행차가 좀 기이합니다. 

왕이면 풍채도 당당하고 큰 권세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지금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합니다. 

30이 넘은 장년이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은 왕의 입성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입성을 바라보며 환호하는 무리들의 모습도 좀 기이해보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이 예수께 나아와 무리 좀 말리라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 장면에 가면 또 한번 이해하지 못할 장면을 보게 됩니다. 

가까이 오사....이제 예루살렘 성으로 더 가까이 오시더니 갑자기 성을 바라보며 우시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왕의 귀환을 기대하며 기쁨과 흥분에 가득 차 있을 때 갑작스레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누구를 바라보면서 우는 것입니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참평화를 알지 못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고, 성전에 종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예배드리지만 그 안에서 참 평화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통해서 장사하고, 예배를 통해서 세상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위해서 우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의 꿈을 실현 시켜 줄 왕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의 한을 풀어 줄 왕, 자기 인생을 역전시켜 줄 왕,

자기가 말만 하면 다 들어줄. 자기가 필요한 전지전능한 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하고

군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롱하며 침뱉기도 하며 

제사장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저주하기도 하고 

로마 군사들이 그랬던 것 처럼 실재로 못박기도 하고

빌라도가 그랬던 것 처럼 난 상관없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신앙엔 참평화가 없습니다. 참 만족이 없습니다. 

 

주보에 실린 컬럼 (예루살렘을 향해)

사람들이 동경하는 그 곳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결국은 자신을 위해 쌓은 또 다른 바벨탑이 모습! 

난 오늘 그 곳을 향해 

화려한 미문 너머 황폐해 버린 영혼을 향해 통곡하러 간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왔던 

힘과 명예와 영예의 성!

경건 뒤에 감추어진 추악한 욕망의 덩어리! 

난 오늘 그 곳에 가서 몰염치하게 예배하는 

장사치들을 몰아내러 간다. 

 

사람들의 환호가

한 순간 저주의 외침으로 뒤바뀌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외면하며 뒤돌아 서는 곳 

나를 죽이고자 하는 사자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어 

나를 수치와 절망으로 빠뜨리는 곳. 

난 오늘 그 곳에서 

나무에 달려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고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깊은 고독 속으로

그 절망 속으로 

그 죽음 속으로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그 분의 이름을 예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간다. "

 

예수님의 울음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영생이 아닌 자기 만족

십자가가 아닌 자기 배부름

죄에서부터 구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이 올라가려 또 다른 죄를 짓는 그런 헛된 왕을 바라는 자들을 향한 통곡

그들을 향한 부르짖음

"내가 찔림은 그런 너희들의 허물 때문이고 

내가 상함은 그런 헛된 꿈을 꾸는 너희들의 죄악 때문이다"(이사야 53:5)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왕이 아니라 

빛나는 왕관 대신에 로마 군사들에 의한 가시면류관

높은 왕의 보좌 대신에 십자가에 달이셔야 했던

화려한 왕의 가운 대신에 거의 벌거 벗겨져야 했던 

왕의 장대한 행차 대신에 침뱉음과 조롱을 당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난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야 했던 그런 왕.

예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한 왕이었습니다. 

 

왜, 예수는 그런 왕이 되셔야 했습니까?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죄악떄문입니다. 이 시대의 삭개오가 달려야 할 나무에 대신 달려 구원을 완성하신 사랑의 왕이었습니다. 

 

예수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그 성전을 바라보며 통곡하신 후로 2022년이 지난 오늘의 교회 

우리는 또한 "호산나"하면서 오늘날의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더욱 더 파괴와 분열과 단절과 전쟁으로 치닫는 이 세상 

주님은 2022년의 교회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여기실까, 여전히 통곡하시면서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가시지는 않을까? 

우리는 또다시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소원만을 이루기를 원하며 그것을 채우시지 않는 주님을 향해 실망하고 원망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하며 소리치고 있지는 않을까? 

 

주님이 말씀하신 성전 안의 참 평화, 그가 십자가를 지실 정도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 평화, 참 구원, 참 복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는 진정한 종려주일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